-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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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32- 서양철학사 2nd 읽기 -20101101
1. 저자에 대하여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백작(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OM 1872년 5월 18일 ~ 1970년 2월 2일)은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이자 논리학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불려진다.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고, 강사가 되었다. 케임브리지대학 강사시절 제1차 세계 대전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6개월의 구금형에 처해졌는데 옥중에서 수학의 기호 기술에 관한 <수리철학 개론>과 <정신의 분석>을 썼다. 전쟁 뒤에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철학과 수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데 앞장섰고, 그의 스승이며 협력자였던 화이트헤드와의 공동저작인 <수학원리>를 출간 당시에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20명도 안되었다는 것에서 지적인 수준이 월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은 분리된 두 개의 주제를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절대 확실한 지식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자는 <수학원리>로 결실을 맺어 현대의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러셀의 철학
(1)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20세기 초에는 헤겔에 영향받은 이상주의에 반대했고, 30년 뒤에 이는 비엔나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형이상학 반대를 반복했다.
(2) 러셀은 근대 수리 논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콰인은 러셀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3) 러셀의 첫 수학에 관한 책은 <기하학기초론에 관한 에세이 (1897)>이다. 이 작품은 칸트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러셀은 자신의 책이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스키마를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칸트의 수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4)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은 러셀이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철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특히 이론철학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그는 무어, 비트겐슈타인 등과 더불어 케임브리지 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한 실재론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헤겔학파, A.마이농 등 당대의 철학 흐름 변화를 따라 자신의 사상을 조금씩 발전시켰으며 신실재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인식론과 존재론을 사상의 소재로 활용했으며 영국 고유의 경험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논리적 실증주의를 중시하는 철학자 및 논리학자에게 자극을 주게 된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프레게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페아노와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데데킨트와 칸토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 비롯된 기호논리학을 집대성했다. 현실 사회에 대한 진솔한 관심과 스스로가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적 기질이라고 불렀던 그의 성향은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평화주의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핵 무장 반대자로서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되었으며 1950년 노벨 문학상 수상하고 1979년 웨일즈에서 사망할 때까지 문필가, 철학자, 무정부주의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평생 철학, 수학, 과학, 역사, 교육,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에서 7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고 2천 편 이상의 글을 쓰는 집필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를 수학과 철학의 권위자로 만든 <수학원리(1910∼1913)>, <정신의 분석(1921)>,<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 <결혼과 도덕(1929)>, 현대인의 행복에 관한 스테디 셀러인<행복의 정복(1930)>, 그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도 준<서양철학사(1945)>, 철학적 자서전이라 할<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1959)>, 사망 1년 전에 출간한<러셀의 자서전(1969)>, 기독교 비평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외에도 <기하학 기초론에 관한 에세이 (1897)>,<회의주의자의 에세이>, <서양의 지혜>, <자유와 조건> <철학의 문제>, <교육론>, <권력>, <보세비즘의 이론과 실천>, <철학의 탐구> 등을 썼고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첫 번째 읽기의 발췌문 두 번째 읽기의 발췌문 50개의 인용문에 대한 생각 |
옮긴이 서문
[P. 5] 러셀에게는 어떤 철학자도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단지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할 따름이다.
(1) ➜ 우리는 비판에 얼마나 마음을 열고 있는가? 비판이나 논쟁 커멘트를 받지 않고 자라서 인지, 조금의 비평에도 쉽게 토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비평했던 사람의 의도나 취지는 생각하지 않고 사용한 단어나 표현방식에 대해 심한 경우는 비평받은 사람과 친분이 있던 사람까지 합세하여 역공하는 문화를 한국인은 가지고 있다. 그렇다. 러셀은 모든 철학자를 비평했다. 가혹하게 비평했지만 러셀을 타인에 대해 잔인했다고 하는가? 그는 비평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평을 위해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허점이 보이니까 비평한 것이고 그것이 진실에 가까우니 후세가 그의 사상 깊이에 감동하는 것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미리 보는 사람에게, 이상하다는 식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만치 우매한 자는 없으리라. 특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그리해서는 안 되고,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그런 식의 어리석음을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P. 5] 비판은 거침없고 신랄하며,
(2) ➜ 비판을 할 때 거침없이 신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러셀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난척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깊은 통찰에 의한 진리에 조금 더 근접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는 자신감이 그 비판을 거침없고 신랄하게 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철학자는 매우 다행이었을 것이고, 살아있는 비평대상자는 그에게 원한을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혹시 이미 사망한 철학자의 사상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러셀의 비평을 읽고 러셀을 미워하고 러셀을 공격했다면 그는 그만큼 밖에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똑똑한 추종자는 러셀의 비판에 마음을 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러셀에게서 오히려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만큼 진화해 나갔을 것이다. 비평에 대해 철저히 마음을 열수 있는 문화가 한국인에게는 절실하다. 그리고 비평은 신랄하게 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슬쩍 건드리는 식의 비평은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 5]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시인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명료성이 바로 이 책의 미덕이다.
(3) ➜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시인할 수 있는 정직성을 보면 그가 절대 오만한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료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 까지 명료하다고 역자가 말하는 것은(나도 동의하지만) 그에게 있는 진리에 대한 열망, 그리고 통찰에서 오는 자신감 등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그럼에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은 그가 알고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한 우리의 깊은 신뢰로 이어진다. 간혹 모르면서 아는 체, 오류투성이의 논지를 빡빡 우기는 사람,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정말 짜증나는 광경이다.
[P. 5] 뛰어난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저자의 고유한 철학적 관점을 드러내면서 수 많은 철학자의 사상을 일관되게 해석하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철학과 사회 정치 환경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 했는지 보여준다는 점이다.
[P. 5] 고대와 중세와 근현대를 지배한 철학적 주제를 각각 찾아내 자유자재로 다루며 쏟아 놓은 논평 속에는 철학적 통찰력과 예리한 분석력이 번뜩인다.
[P. 5] 러셀은 각 시대의 철학을 종교, 수학, 과학 같은 다른 분야의 발전이나 사회 정치 상황과 연결하여 서술한다.
[P. 5] 따라서 러셀의 철학사는 그 자체로 훌륭한 비판서이자 흥미진진한 철학 이야기이다.
[P. 5-6] 러셀의 해석에 따르면 철학은 그리스 문명 속에서 처음 과학과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탄생했는데, 두가지 경향이 그리스 문화를 지배했다. 하나는 열정을 중시하고 종교에 몰입하며 신비를 표방하고 내세을 믿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을 중시하고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다양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려는 경향이다. 전자의 경향은 오르페우스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플로티노스를 거쳐 헤브라이즘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한 축으로 편입된다. 후자에는 헤로도토스와 초기 이오니아 자연 철학자들을 비롯해 어느 정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포함된다. 경험을 중시하고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경향은 중세시대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철학 속에서 되살아난다.
[P. 6] 기하학은 그리스인의 독창적인 발명품인데, 기하학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은 성립할 수 없었다고 한다.
[P. 6]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과학적 지식은 사실의 관찰과 가설의 수립, 그리고 수립된 가설의 시험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P. 6] 러셀은 철학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하는 방법의 측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진리 추구의 열정을 품고 기존의 모든 지식을 비판하는 활동이었으며 분석적 방법을 통해 명료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여정이었다.
[P. 6] 그 여정 속에서 거의 모든 철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탐구하고 저술했기 때문에, 오늘날 중요한 철학적 관점들은 대부분 특정한 시기에 쓴 러셀의 여러 저작에서 검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6] <러셀 서양철학사>는 이러한 진리 탐구의 여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러셀은 바로 분석적 방법을 통해 고대, 중세, 근현대의 대가들을 차례 차례 명료한 언어로 비판한다.
[P. 7] 일정한 시기에 사회 통합에 기여한 철학도 사회 정치 환경이 바뀌면 영향력이 약해져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다른 철학이 형성되면서 기존 철학을 대체한다. 이런 대체과정은 반복된다,
(4) ➜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특정시기를 지배했던 사상이 그의 변화에 따라 지대하게 변경된다, 그 대체과정을 진화로 이루기위해서는 깨어 있는 자각이 필요하다.
[P. 7] 근대 철학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과학적 권위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P. 8] 과학 기술의 발전에서 영감을 받은 철학이 바로 힘을 강조하는 철학이며,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단지 가공되지 않은 재료로 생각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P. 8] 철학하는 사람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갑자기 깨닫는 순간에 지적 희열은 느낀다.
(5) ➜ 우리는 누구나 깊이 생각하면 어떤 문제에 대해 통찰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순 튀어 오르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 문제는 얼마나 깊이 얼마나 오래 생각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P. 8] 철학의 독창성은 기존의 사고 방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통찰하는 데서 나온다. 러셀은 철학사 전체를 꿰뚫으면서 각 철학적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비판함으로써 독창적인 철학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은이 서문
[P. 9] 우리는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책을 쓰는 사람은 한 저자나 짧은 시기에 집중하여 연구한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어느 한 부분에 할애하지 못한다.
[P. 9] 역사의 변화과정에 통일성이 있으며, 먼저 일어난 일과 나중에 일어난 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고 하자. 이점을 밝혀내려면 앞선 시기와 나중 시기를 한 사람의 정신속에서 종합해야 한다. 루소에 정통한 연구자가 플라톤과 플루타르코스가 서술한 스파르타와 루소의 연관성을 올바르게 평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P. 9] 스파르타를 연구한 역사가가 홉스와 피히테, 그리고 레닌을 의식하거나 예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련성을 드러내려면 폭넓게 개괄해야 할 터이다.
[P. 9] 철학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P. 9-10] 그들은 각자 처한 사회 상황과 각 시대의 정치와 제도의 결과물이다. ‘
(6) ➜ 현대의 개인에게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 개인은 각자 처한 환경과 교육받은 결과물로 나타난다. 철학자의 사상이 그 결과물로 드러난다면, 범부들의 생각 역시 자신의 한계를 나타낸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한계를 알고 나면 다른 이의 생각에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각자가 되어 후대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나중의 결과 일 것이고, 우선은 변하고 변하고 변해야 한다. 한계 인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P. 10] 대부분의 찰학사에서 철학자는 저마다 진공 속에 있는 듯이 등장한다. 그의 견해는 고작해야 이전 철학자들이 내놓은 이런 저런 견해와 아무 상관없이 나열될 따름이다, 이와 반대로 나는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철학자를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 문화적 환경의 산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유되지만 모호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진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며 집중하는 한 인간으로 조명했다.
[P. 10] 철학은 매초부터 학파들, 곧 소수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철학은 공동체의 삶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는 바로 이 부분을 고찰하려 애썼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서론
[P. 17] 인생과 세계를 표현하는 ‘철학적인’ 사상 체계는 두가지 요소에서 생겨난다. 하나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체계와 윤리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과학적’탐구이다. 두 요소가 각기 다른 철학자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정도에는 큰 차이가 있으나. 철학은 두 요소를 다 어느 정도 포함한다.
[P. 17] 내가 말하려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명확한 지식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무인지대 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이다. 사변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대체로 흥미를 느낄 만한 문제에 대해 과학은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며, 신학자의 확신에 찬 대답도 이전 세기와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7) ➜ 내 개인의 경우를 볼 때도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들이 복합되어 너무나 과학적인 결과물에 의존하지만, 간혹 혹은 자주 신에 대한 경외감과 운명의 미지감,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신비주의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다. 이것들이 속에서 서로 충돌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그것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인지적 틀이 만들어 질 때 나는 스스로 주도하여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되는 것이리라.
[P. 17-18]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는가? 만약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 정신은 물질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독립적인 힘을 가지는가? 우주는 통일성 혹은 목적을 가지는가? 우주는 어떤 목표를 향해 서서히 진화하는가?
(8) ➜정신이 먼저인가 물질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현재에도 논쟁되고 아마 인류역사가 계속되는 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노벨상의 스페리와 에델만의 뇌 연구가 의식의 메커니즘을 조금도 알아내지 못하는 현대 과학의 한계가 언제쯤이면 이 문제를 알아낼 수 잇을까? 어쩌면 이 부분은 신의 영역이라 감히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영역이 아닐까? 복제 인간이 만들어 질수 있다. 그러면 그 복제 인간은 본래 DNA제공자와 동일한 인물인가? 다른 인간인가? 그의 생각은 본체와 동일한가? 전혀 다를 것인가? 이문제 역시 윤리학을 하는 사람, 가치철학자, 뇌의학자, 인지과학자들이 끊임없이 탐구해왔던 문제이다. [P. 18] 자연 법칙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오직 질서에 대한 선천적 사랑 때문에 자연 법칙을 믿게 되는가? 인간이란 천문학자의 눈에 보이듯이 작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행성 위로 무력하게 기어다니는 불순물이 섞인 탄소와 물로 구성된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한가?
[P. 18] 한 시대와 한 민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각각에 속한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철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철학자기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철학을 거의 결정하며, 거꾸로 사람들이 형성한 철학이 환경을 거의 결정한다.
[P. 19]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약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 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P. 19]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 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P. 19] 종교와 과학이 그렇듯이 사회 결속과 개인의 자유는 전 시기에 걸쳐 갈등을 빚거나 불안정한 타협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스에서 사회 결속은 도시 국가에 대핸 충성심에 의해 보장되었다.
[P. 20] 옛 시대의 사상 가운데 몇몇은, 특히 종교적 색채를 띤 사상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획득했다. 합리적인 사상은 시대정신에 더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 후기에 등장한 이교도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그리스도교 교리 속에 편입하려고 적정 수준까지 다듬고 수정해나갔다.
[P. 21] 즉,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국가에 대한 의무 보다 더 중대한 명령어라는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교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보다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이후까지 살아남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초기의 황제들이 아리우스파 신도였거나 아리우스주의에 기울었기 때문이다.
[P. 22]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은 성직자와 속인 간의 갈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 국가와 북부 야만인 국가 간 갈등의 재현이기도 했다, 교회의 통일은 로마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흉내냈다.
[P. 22] 군주들이 진정으로 경건하다면 후회하고 회개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회개 자체가 정열을 표현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 한번도 오늘날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요구해서 통용되도록 만든, 선행의 평온한 규칙과 질서를 군주들의 마음에 심어주지 못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술을 마시고 살인하고 사랑하지도 못한다면 그들이 세상을 정복한들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득의양양한 기사단을 거느린 그들이, 학문에 열종하고 군대도 보유하지 않은 데다 독신생활을 하는 자들의 명령에 왜 따라야 하는가?
[P. 22-23] 모든 군대가 왕들의 편에 섰는데도 교회는 마침내 승리했다. 교회가 승리한 이유는, 일부는 교회 성직자들이 교육을 거의 독점했기 때문이고, 일부는 왕들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지배자와 민중이 다 같이 교회가 바로 천국의 문을 여는 힘을 가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왕이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내야 할지, 지옥에서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했다. 또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할 의무를 면제해주는 동시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하기도 했다.
[P. 23] 단테 이후 정치적 이유와 지적인 이유 둘다 때문에 중세 철학은 더는 종합되지 않았다. 중세 철학이 계속 종합되는 동안에는 정연한 논리와 소규모의 완결된 체계로 정리되었다.
[P. 24] 이러한 정치적 헌란과 무질서의 양상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타나 있다. 사람을 지도할 원칙이 없어지면 정치는 적나라한 권력 투쟁으로 변모한다. <군주론>은 이런 정치 놀이에서 성공을 거둘 방법에 대해 예리하고 빈틈없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P. 25] 종교개혁은 주로 다시 살아난 로마의 지배에 반대한 북부 유럽 민족의 반항이기도 하다. 종교는 북방 세계를 복종시킨 힘이었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종교가 붕괴되었다.
[P. 25] 게다가 군주들은 영토 내 교회가 민족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 교회를 지배하기 쉬워져, 교황과 지배권을 나눠가질 때 보다 자기 영토 내에서 힘이 훨씬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혁신적인 신학 사상은 유럽 북부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지배자와 민중에게 두루 환영을 받았다.
[P. 25] 가톨릭 교회는 세 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성스로운 역사는 유대교에서, 신학은 그리스 사상에서, 지배방식과 교회법은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로마 법제에서 유래한다.
[P. 25]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신의 계시는 성서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매개로 대대손손 이어지며, 교회의 가르침에 복종할 의무를 개인에게 부여했다. 이와 반대로 개신교도는 교회가 계시의 매개자라는 설을 거부했다. 진리는 오로지 성서 속에서 찾아야만 하며, 저마다 단독으로 성서를 해석해도 되었다, 만약 사람들 간에 성서 해석에서 차이가 나더라도 논쟁을 해결하도록 지명된 신성한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P. 26] 개신교 이론에서 영혼과 신 사이에서 어떤 매개자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9) ➜ 영혼과 신 사이에 직접적인 교통, 이것이 다양한 이단사상을 만들어 내게 된 원인중 하나이다. 각자의 속에 신이 있다는 사상은 각자가 판단하는 것이 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신념으로 나타나고 이것에 대한 추종자들이 이단을 만들어 낸다, 현재의 종교에서도 이런 현상이 부지기로 일어난다.
[P. 26] 이러한 변화는 심상치 않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진리는 더는 권위자에게 물어서 확인하지 않고, 내적 성찰을 통해 확인했다. 더불어 정치계에서는 무정부주의로, 종교계에서는 신비주의로 빠르게 발전하는 경향이 생겨나지만, 이런 경향은 언제나 가톨릭의 정통 체계 속에 편입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한 하나로 통일된 개신교가 아니라 개신교의 여러 종파가 갈라져 나왔다.
(10) ➜ 내적 성찰을 통해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했고, 개신교내에서 여러 종파가 만들어진 현재의 상태를 만들어 버렸다.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사상결과를 야기한 ‘내적 성찰‘은 그 깊이에 따라 사상의 깊이도 달게 만들듯 무정부 주의의 위험도 그들이 무정부. 주의라 하여 무조건 선한 의도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기업 이익을 위해 무정부주의를 택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의 현실한계를 숨기기 위해 무정부주의에 가입하는 비겁자도 있다.
[P. 26] 주관주의는 초창기 다방면으로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자유를 부여했지만, 결국 건전한 사회. 생활에 적대적이고 해로웠으며 개인을 사회에서 분리하는 데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11) ➜ 이것이 현재 개신교가 다각도로 욕먹는 이유인지 모른다.
[P. 27] 어떤 행동은 결과가 좋거나 도덕 규범과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구런 행동을 하도록 고취한 감정으로 인해 찬미되거나 칭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태도에서 칼라일과 니체가 표현한 영웅예찬과 어떤 종류이든 격렬한 정영이라면 예찬하고 숭배하는 바이런의 경향이 발전했다.
[P. 27] 호랑이는 양보다 더 아름답지만, 우리는 오히려 창살안의 호랑이를 좋아한다. 전형적인 낭만주의자는 창살을 제거하고 호랑이가 양을 사냥할 때 보여주는 비할데 없이 멋진 도약을 즐기며 기뻐할 터이다. 그래서 인간 자신이 스스로 호랑이라고 상상하도록 권하지만, 그럴 경우 나타날 결과가 전적으로 유쾌하지는 않다.
(11) ➜ 양보다 아름다운 호랑이를 있는 그대로 이름답다고 하는 자는 우선 호랑이를 다룰수 있거나 제압이 가능한자의 경우에만 해당될 것이다. 창살이라는 감옥에 갇힌 호랑이의 포효를 듣는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호랑이는 사냥을 해야 아름답고, 양은 호랑이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므로 호랑이를 가두려 말고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낫다.
[P. 28] 공동체를 이룬 사회라면 대립하는 두 가지 위험 요소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한쪽에는 너무 강력한 규율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존경 때문에 경직될 우려가 있고, 다른 한족에는 개인주의 성향과 개인의 독립심 때문에 협동과 협력의 토대를 상실하고 결국 분열되거나 외부 세력에게 정복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대체로 중요한 문명은 고정된 엄격한 미신 체계와 더불어 시작되어, 그 체계를 점차 완화해가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뛰어난 천재들의 시기를 맞이한다.
[P. 29] 자유주의 학설은 지금까지 말한 끝없이 반복되어온 동요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로서 등장한다.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
제l장 그리스 문명의 발흥
[P. 34] 모든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 문명의 돌연한 발생만큼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은 없다.
[P. 34] 그리스 인들이 예술과 문학에서 이룩한 업적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지성의 영역에서 훨씬 비범하고, 이례적인 업적을 성취함으로써, 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을 처음 만들어 냈고, 단순한 연대기가 아닌 역사를 최초로 기록했다. 또 그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에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계의 본성과 인생의 목적에 대한 사유를 자유롭게 펼쳐나갔다.
[P. 35] 철학은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 철학과 과학은 원래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기원전 6세기 초에 동시에 탄생했다.
[P. 35] 이집트 신학과 바빌로니아 신학의 차이는 컸다. 이집트인들은 죽음 문제에 몰두해서, 죽은자의 영혼은 지하세계로 내려가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다라 오시리스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P. 36] 바빌로니아의 발전 과정은 이집트보다 훨씬 호전성을 드러냈다.
[P. 36]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종교는 고대의 다른 종교처럼 풍요제였다. 땅은 여성이고 태양은 남성이다. ....바빌로니아에서 땅의 여신으로 추앙된 이슈타르는 여성을 대표한 신들 가운데 최고 여신이었다, 서아시아 전 지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대모신을 숭배했다.
[P. 37] 신들은 통치권과 결합되면서 도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신이 입법자에게 법전을 부여했기 때문에 법위반은 불경으로 간주되었다.
[P. 37]바빌로니아의 종교는 이집트와 달리 내세의 행복보다 현세의 번영에 관심이 더 많았다.
[P. 37] 해적 행위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 여건과 정치적 조건이 적당하게 안정된 곳에서는 교역이 더 많은 이득을 낸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P. 39] 그리스인은 연이어 크게 일어난 세 파도를 이겨내고서야 그리스에 닻을 내릴수 있었다. 첫 파도는 이오니아족의 침입이고, 두 번째 파도는 이카이아족의 침입이며, 세 번째 파도는 도리아족의 침입이었다.
[P. 40] 그리스 본토는 산악지대로 대부분 메마른 불모지였으나, 계곡에는 비옥한 땅이 많았다. 계곡은 바다로 접근하기 쉬운 반면, 산으로 가로막혀 계곡과 계곡을 이어줄 쉬운 육상 교통로가 없었다.
[P. 41] 처음에 거의 구별되지 않던 교역과 해적 행위가 그리스인들에게 초래한 가장 중대한 결과는 문자 기술의 획득이다.
[P. 42] 그리스 문명에서 주목할 만한 최초의 결실은 호메로스 였다.
[P. 42] 호메로스의 시는 중세 후기의 궁정 소설과 마찬가지로 교양을 갖춘 귀족 계급의 관점을 대표하며,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온갖 미신을 서민적이고 비속하다고 해서 무시한다.
[P. 43] 원시 종교는 어느 곳에서나 개인 보다 종족이나 부족을 위해 생겨났다. 일정한 종교의식은 공감에 의한 마술적 힘을 불러일으켜 부족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의도로 거행되었다.
[P. 44] 길버트 머리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신은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그렇지 않다. 신들이 행한 일은 대부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왕국을 수중에 넣었을때 무슨 일을 하는가? 정치에 참여하는가? 농업을 증진하는가? 무역과 산업에 종사하는가?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그런 정직한 일을 하겠는가? 그들은 세입으로 살면 더욱 쉽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세금을 내지 않는 민중에게 벼락을 쳐서 위협하면 만사형통이다, 그들은 정복을 일삼는 족장이거나 왕권을 손에 넣은 해적들인데, 싸우고 축제를 벌이고 놀이를 즐기며 음악을 연주한다.
[P. 44-45] “아시아 왕조의 창시자 탄탄로스는 신들의 화를 돋우려 노골적으로 무례한 짓을 저지름으로써 끔찍한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P. 46] 그리스는 수많은 작은 독립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 나라마다 경계면에 소규모 농경지가 자리잡은 도시로 이루어졌다.
[P. 48]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주로 사려prudence,좀 더 의미가 넓은 용어를 쓰자면 예상forethought이다. 문명인은 장래의 쾌락을 위해, 설령 장래의 쾌락이 꽤먼 미래에 주어질지라도 현재의 고통을 기꺼이 참아낸다.
(12) ➜ 우리는 문명인가? 문명이라 할수 잇는가? 지금도 ‘예상’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눈 그에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말것이다. 아이에게 가르칠것은 씨뿌리지 않은 농부는 결실할 것이 없다는 자연의 법칙이고, 인간이 수렵 채취에서 경작을 하면서 규모를 가지게 되었고, 이대부터 문명인이 되기 시작했다.
[P. 48-49] 이러한 인내 습관은 농업의 발생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동물과 야만인은 다가올 겨울의 식량을 모으기 위해 봄에 일하지 않으면, 벌이 꿀을 만든다거나 다람쥐가 호두를 땅에 묻는 따위로 드물게 나타나는 행동도 순전히 본능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문명인에게 나타나는 예상의 결과가 아니라 직접적 충동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이며, 나중에 이를 관찰한 인간이 유용하다고 설명한데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예상은, 충동과 아무 상관없이 이성이 장래의 어느날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사냥은 현재의 쾌락을 즐기려는 것이므로 예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작은 노동인데, 자연적 충동에 따라서는 경작을 할 수가 없다.
(13) ➜ 인류는 경작을 시작하며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갔고, 충동적인 수렵 채취가 아닌 경작을 위해서는 내일의 고통을 오늘 당겨서 미리해야 만하는 노동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능에 따른 충동으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문명화 될 수 없다. 자기 경영은 농부의 마음으로 노동을 하는 단계가 들어가야 가능한 작업이다.
[P. 49]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인생을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을 몸에 익힌 개인이 점점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기 현재를 희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14) ➜ 그러나 절대로 현재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과정은 수전노의 경우처럼 지나치게 멀리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더라도, 사려하면 인생에서 맛보아야 할 최선의 요소들 가운데 일부를 쉽게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15) ➜ 문명인으로서의 미래대비가 수전노의 지나침이 되지 않기 위해 검열과정을 거쳐야 한다.
[P. 49]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사려에 맞선 반동 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도취 상태에 들어가 사려 탓으로 훼손된 강렬한 감정을 회복한다. 그가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세계를 알아보자나자, 상상력은 일상적인 걱정이나 근심이라는 감옥에서 갑자기 해방되면서 자유로워진다.
(16) ➜ 근심과 기쁨 사이의 조화, 그것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 도취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정신의 몰입이 징신병질을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을 생각하면, 몰입의 단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육체적 운동이 그것을 막아주는 방어막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 인간은 육체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정신에너지 덩어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둘다의 건강을 위해 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 인지적검열 과정을 항상 거쳐야 할 것이다.
[P. 49] 인간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업적에는 도취의 요소, 즉 사려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열정의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있다.
(17) ➜ 열정이 들어가야 위대한 것이 만들어 진다. 이 열정이 몰입의 과정과 비슷하다.
[P. 50] 사려와 열정 사이에 나타난 갈등은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어느 한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갈등은 아니다.
(18) ➜ 우리의 내부 갈등 역시 현재와 미래, 사려와 열정 사이의 전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충동적인 아직 야만의 상태라면 그런 갈등이 있을 수 없겠으나, 문명화되어 갈수록 이 갈등은 커지고 딜레마를 느끼게 될 것이다.
[P. 50]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사상의 영역에서 문명이란 대체로 과학괴 동의어이다. 그러나 순수과학만으로 문명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는데, 인간에게는 열정을 비롯해 예술과 종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P. 50] 과학은 지식에 한계를 그을 수는 있지만, 상상력에 한계를 그어서는 안된다.
[P. 50] 종교적 성향이 강한 철학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바쿠스 종교의식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다.
[P. 50] 디오니소스 숭배의 원형에는 야만적 요소가 스며들어 여러면에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P. 53] 무덤 속에서 발견된 오르페우스교의 석판들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음 세상에서 길을 찾는 방법과 스스로 구원을 받을 만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지침을 적어놓았다.
[P. 53] 또 다른 석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만세! 고통을 참고 견디어낸 그데 ....그대는 인간에서 신이 되었네” 또 한 석판에는 “행복하고 축복받은 그대는 죽지 않는 신이 되리라”고 적혀 있다.
[P. 53] 죽은자의 영혼이 마시면 안되는 샘물은 망각을 일으키는 레테Lethe의 강물이다. 다른 샘물은 므시모시네Mnemosyne즉 기억의 강물이다. 영혼이 다음 세상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망각해서는 안되며 반대로 자연의 한계를 넘어선 기억력을 유지해야 한다.
(19) ➜ 오르페우스교는 기억을 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기억하는 것이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P. 54] 그리스 인들은 감탄할 정도로 침착성과 마음의 평정을 보여주며, 침착성을 유지한 채 격정을 바깥에서 관조할 수 있기에 격정이 드러낸 아름다움을 알아채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여 올림프스의 신과 같은 지위에 이르기도 했다.
(20) ➜ 침착성에서 오는 마음의 평정과 격정의 관조가 올림포스 신들과도 같은 지위를 부여해 줄 수 있다면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일 것이다. 평정에서 야기된 침착함을 가질 수 있다면 문명이면서도 극도의 사유가 가져올 비극을 피해갈수 잇을지 모른다
[P. 57] 오르페우스교도에게 현세의 삶은 고통이고 따분하며 지루할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 끝없이 반복되는 주기로 돌아가는 수레바퀴 아래 갇혀 산다. 우리의 진정한 삶은 도달하기 어려운 천상의 삶이지만, 우리는 지상에 묶여있다, 우리는 정화와 포기와 금욕 생활을 통해서만 삶의 고단한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마침내 신과 일체가 되는 황홀경에 도달할수 있다.
[P. 57] 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 신계 나의 모든 고통을 말하려네
[P. 57] 그리스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정열적이고 부랭햇으며 지성이 인도한 길과 열정이 인도한 길에 내몰려 자신과 싸우고, 천국을 생각하는 상상력과 지옥을 만들어내는 고집 센 자기 주장으로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P. 57] 그들에게는 “어떤일도 너무 지나치지 않게 하라”는 격언이 있었다.
[P. 57] 그러나 실제 삶에서 그들은 순수 사유의 측면에서나ㅡ 시나 종교나 도덕족인 죄 같은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행동했다. 위대한 업적을 암긴 경우에 한해, 그들은 바로 지성과 열점을 결합함으로써 위대해졌다. 어너 하나만으로는 그들이 변모시켰던 만큼, 다가올 모든 시대에 이르도록 세계를 변화 시키지 못했으리라.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원형 신화눈 올림포스의 제우스가 아니라 불을 천상에서 훔쳐내 인간에게 전해준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이다.
(21) ➜ 지성과 열정의 결합, 이것은 믿음과 의심의 결합과 같은 형태이다, 이것의 양립이 될 때 위대한 것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냉정과 열정의 조화, 믿음과 의심의 영날칼을 잘다룰수 있을때 우리는 평범함을 넘어 비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P. 57] 사실 그리스 문화를 지배한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열정을 중시하고 종교에 몰입하며 신비를 표방하고 내세를 믿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명랑하고 경험을 중시하며 합리주의를 내세우고 다양한 사실에 대해 지식을 획득하려는 경향이다.
[P. 58] 종교적 기질이 두드러진 사람은 오르페우스교를 믿었던 반면, 합리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은 혐오하거나 경멸했다. 오르페우스교의 지위를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감리교파의 경우와 비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22) ➜ 종교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 미래에 대한 열정과 믿음이 강한지 모른다. 그들이 나약해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해서 신의 힘조차도 빌고자 하는 것이지 모른다.
제2장 밀레토스 학파
[P. 61] 철학사마다 첫부분에서 철학은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 탈레스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과학자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P. 63] 탈레스는 이집트를 여행한 이후 그리스에 기하학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P. 63] 탈레스는 그리스 일곱 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유명하며, 일곱 현자는 저마다 현명한 격언 한마디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격언으로 유명하지만, 이 가정은 오류이다.
[P. 63]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는 물이 근본 물질이며 물에서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땅이 물위에 떠있다고 주장했다. 또 탈레스는 자석이 철을 움직이기 때문에 자석 안에 영혼이 있으며, 만물에 신들이 깃들여 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P. 63] 만물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술은 과학적 가설로 간주해야 하며 결코 어리석은 주장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P. 63-64] 탈레스의 과학과 철학은 모두 투박하고 불완전하지만, 그 자체로 사상의 형성과 관찰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P. 64] 그는 만물이 제일 실체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은 탈레스가 주장한 물이 아니며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실체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나이를 먹지도 늙지도 않는 실체로서 “여러 세계를 에워싸고 있다”고 말한다.
[P. 64] "사물들이 정해진 대로 다시 한번 발생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까닭은 사물들이 시간 순서에 따라 부정의를 서로 상쇄하거나 서로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P. 65]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세계의 불, 흙, 물은 당연히 일정한 비율로 존재할 테지만, 신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각 요소는 제각기 지배권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런데 각 요소가 영원히 균형을 유지하도록 작용하는 일종의 필연성 또는 자연법칙이 있다.
[P. 66] 그(아낙시메네스)는 제일 실체가 공기라고 말했다. 영혼은 공기이며, 불은 희박해진 공기이다. 공기가 응축되면 처음에 물이 되고, 더욱 응축이 일어나면 흙이 되고, 마지막단계에 이르면 돌이 된다. 그의 이론은 서로 다른 물질들 간의 차이를 오로지 응축의 정도에 따른 양적인 차이로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P. 66] 그는 지구가 둥근 탁자 모양이고, 공기가 만물을 에워싼다고 생각했다. “공기로 이루어진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숨과 공기가 전 세계를 에워싸고 있다.” 세계가 숨을 쉬고 있다고 여긴 듯하다.
제3장 피타고라스
[P. 68] 증명하는 연역 논증이란 뜻의 수학은 피타고라스와 더불어 시작되며, 색다른 형태의 신비주의 사상 역시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학이 철학에 미친 영향의 일부는 피타고라스에서 기인하며, 이후 심오하지만 유감스러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P. 70] 그(피타고라스)를 간단하게 아인슈타인과 에디 여사를 뒤섞은 복잡한 인물로 묘사해도 좋으리라. 그가 창시한 종교의 주요 교리는 영혼이 윤회한다는 가르침과 콩을 먹는 것은 죄라는 가르침이었다.
[P. 73]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바로 올림픽 경기에 모인 세 종류의 사람들이다. 가장 낮은 계급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며, 그 위의 계급은 경기 참가자들이다. 가장 높은 계급은 단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다.
(23)➜모든 곳에도 이런 세 부류의 인간이 있다. 물건을 팔기위한 사람들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들은 전체의 공익이나 이벤트의 목적과 상관없이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그런 자들의 곁에 있게 되면 착취를 당할 수도 있다. 경기에 직접 임하는 자들은 정직한 양심가들이다. 가수인 그들은 노래의 우수함과 가창력으로 승부할려고 할 것이고, 학자인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여 한다. 식당주인인 그는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영화감독인 그는 작품성을 추구할 것이다. 두 번째 부류의 그들에게는 그들이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일류로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다. 그런데 단지 구경하러온 세 번째 부류는 즐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즐기기 위해 영화를 찍고 요리를 한다. 이미 그들에게는 작품의 질이나 요리의 훌륭함은 관심 밖이다. 집착이 사라진 그 자리에 평온이 들어설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제일 위의 계급인 것이다.
[P. 73] 그러므로 모든 정화 가운데 최고 단계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공평한 학문이 제공하며, 그론 학문에 헌신하는 자는 가장 효율적으로 자기 자신을 ‘탄생의 수레바퀴’에서 해방시키는 철학자이다.
[P. 73] 피타고라스에게 ‘정열과 공감에 휩싸인 관조’는 지성적 관조이며 결국 수학적 인식에 해당한다.
[P. 73] 경험만을 믿는 철학자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에 매달리는 노예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 순수한 수학자는 음악가처럼 질서 정연한 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존재에 가깝다.
(24)➜ 경험만을 믿는 철학자가 올림픽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 대비될때, 자유로운 순수한 수학자는 구경하는 관객에 대비될 수 있다.
[P. 74] 현대인들은 축구 시합에서 단순한 구경꾼보다 선수가 더 근사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국가에 대해서도 구경꾼에 불과한 사람들보다 시합의 출전자들과 같은 정치가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가치의 변화는 사회세계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25)➜그러나 다시 미래에는 구경꾼과 같은 부류가 권력을 쟁취하게 될것이다, 그들은 소유하지 않고 누리며, 정착하지 않는 유목인들이다. 그들은 죽어라 일해 소유권을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 소량의 금액만 지불하고 임대하며 나머지 시간과 돈으로 인생을 즐기며 사는 구경꾼이다.
[P. 74] 과학은 대부분 초기에 일종의 그릇된 신념과 연계되어, 허구적 가치를 부여하기 일쑤였다.
[P. 74] 천문학은 점성술과 관련되고, 화학은 연금술과 관련되었다, 수학은 좀 더 세련된 오류 유형과 결합했다. 수학적 지식은 확실하고 정확한 지식으로서 실재 세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P. 75] 또한 수학에 근거하여 사유가 감각보다 우월하고 직관이 관찰보다 우월하다고 가정했다.
[P. 75]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이다”라고 말했다 이 진술은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지만, 그가 말한 바를 정확히 알아보면 무의미하지 않다, 그는 음악에서 수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발견했으며, 음악과 수학 사이에 확립된 관계는 수학의 전문 용어인 ‘조화평균’이나 ‘조화수열’로 살아남아 사용된다.
[P. 75] 그는 세계가 원자들로 구성되며, 물체는 갖가지 모양으로 배열된 원자들로 이루어진 분자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P. 77] 나는 수학이 초감각적인 지성계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영원하고 정확한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발생시킨 주요 원천이라 생각한다.
[P. 77-78]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수학과 신학의 결합은 그리스와 중세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근대 시기까지 종교 철학의 특징을 형성했다.
[P. 78] 사상의 영역에서 피타고라스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은 더 없을 것이다. 플라톤 사상처럼 보이던 점이 분석을 거치고 나면 실제로는 피타고라스 사상으로 드러난다. 지성에는 드러나지만 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순수하고 영원한 세계의 착상은 피타고라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피타고라스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여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4장 헤라클레이토스
[P. 80] 사실 그리스 인들은 추상적 사유에 더 오래 지속되는 불변적 가치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 기하학이 없었다면 근대 현대과학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P. 80-81] 어떤 철학자를 연구할 때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그를 숭상하지도 경멸하지도 말고 가운데서 믿을 만한 점을 일아낼 때까지 우선 일종의 가설로서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판식 태도를 회복할 수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가능한 한 이제까지 주장하던 의견을 포기할 수도 있는 정신 상태를 닮아야 한다. 경멸은 가설로서 공감을 표현하는 데 방해가 되면, 숭상은 비판적 태도의 회복에 방해가 된다.
(26) ➜ 이런 태도가 철학할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마음을 오픈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악인일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선하고 어느 정도 악하다. 따라서 자신의 결점을 말하는 비평가를 경멸하는 태도로 내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을 숭상하는 우매한 자를 자기편이라고 좋아하는 일도 그 인간의 약함 만큼 위험한 믿음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P. 81] 두 가지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연구할만한 가치를 지닌 의견이나 이론을 내놓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추었다고 할수 있지만, 아무도 어떤 주제에 대해서 완결된 최종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27) ➜ 아무도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 그 누구도 선에 도달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지성도 갖추었다고 말할만한 연구할 가치있는 의견제시도 못하면서 자신이 완결된 진리 배포자인양 구는 사람은 도대체 ... 보고 있노라면 분노와 함께 슬픔이 느껴진다.
[P. 81] 어떤 지성인이 분명히 불합리한 견해를 표현할 때, 우리는 그의 의견이 어떤 식으로 참인지 입증하려 해서는 안되고, 어떻게 참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는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적 상상력과 심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활동은 동시에 우리의 사고 폭을 넓혀주며,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린 여러 편견이 다른 정신적 기질의 지배를 받는 시대에는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지 깨닫게 한다.
[P. 83] 인류를 경멸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오로지 강제력을 동원해야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을 위해 행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축들은 매로 쳐서 목초지로 몰아가야 한다” “당나귀는 금보다는 짚이나 먹는 것을 좋아하리라”
(28) ➜ 강제력이 아니지만 인간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동기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 동기가 먹이가 될 수도 있고, 삶일 수 있으며, 진리추구 일수도 있다. 스스로 짚의 노예인 당나귀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동기를 검열할 필요가 있다.
[P. 84] "누구나 자신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욕망에 맞서 싸우기 어렵다. 그러나 욕망하는 바가 무엇이든 영혼의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모두 얻는 것이 그들에게 좋지만은 않다."
(29) ➜ 기도한 것을 얻고도 영혼이 파리하게 되어버린다면 얼마나 무서운가? 신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 또한 우리가 취할 것이라고도 분명 말했다. 욕망한 것에 대한 영혼이 치루는 댓가를 생각하면 우리 눈에 좋아 보인다고 아무것이나 원해서는 안될 것이다.
[P. 85] 또 사람들은, 마치 어떤 사람의 가족과 대화를 나눈 듯이, 신이나 영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신상이나 영웅상에 대고 기도한다.
[P. 86] 만물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는 학설보다 훨씬 더 중시한 학설이 하나 더 있었는데, 대립물의 혼합 학설이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변하는 존재가 어떻게 자신과 일치하여 조화를 이루는지 알지 못한다. 조화는 활과 리라 처럼 대립하는 힘의 긴장을 조율하는 것이다”
[P. 86] “쌍을 이루는 사물은 온전하면서 온전하지 않고, 함께 모이면서 떨어지며, 조화로우면서 조화되지 않는다”
“선과 악은 하나이다”
(30) ➜ 그러므로 인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사람속의 조화도 허영이다. 선이 자신을 끌고 간다고 주장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거나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자이다. 악한 자기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하고 부조화인 인간의 한계에 슬퍼하면서 매일 전진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을 속이거나 가족을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오래동안 속일 수는 없고 자신은 언제나 스스로를 알며 신도 역시 그러하다. 그냥 인정하면 안되는가? 자신은 악함의 덩어리라고 가슴치며 통곡하던 세리가 되어 천국으로 들어가면 안되는가?
[P. 87] "신에게는 모든 일이 공평하고 선하고 옳지만, 인간이 어떤 일을 그르고 어떤 일은 옳다고 주장한다. " “오르막길 내리막길 똑같은 길이다.”
[P. 87] 신이란 따져볼 것도 없이 우주적 정의의 화신이다.
[P. 8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틀레이토스가 “어떤 존재도 항상 똑같지 않고 만물은 생성하며”(플라톤 평가), “아무것도 고정 불변하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고 가르쳤다는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P. 88] 인간을 철학으로 이끄는 깊은 본능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려는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은 당연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나 위험을 피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불운이 겹치는 격변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는 본능이 더욱 열정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31) ➜ 영원한 존재 추구를 향한 열망으로 철학을 하게 된다. 그것이 철학하는 이유이다.
[P. 89] 종교는 두가지 형태, 즉 신과 영혼 불멸을 통해 영원성을 추구한다. 신에게는 변화 가능성도 변전의 기미도 없으며, 사후 생명 역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
(32) ➜ 철학에서 답을 찾지 못한 경우 종교에서 의미를 찾으려고도 한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영원성 추구이다. 변화지 않는 대상인 신에 의지하여 자신의 존재 추구를 하여 평화를 얻고자 한다.
[P. 89] 지상의 삶에 절망하게 되면, 평화를 구할 곳은 천국뿐인 셈이다.
흙, 공기, 불, 물 이런 이유로 많은 종교인이 내세 혹은 천국을 구원의 장소로 믿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층으로 갈수록 심해지고 현실에서 승리하지 못한 패배자들이 승리가 있을 것이라 믿으려하는 장소이다.
[P. 89] 그런데도 시간 속에서 나의 시는 희망을 품고 서있다.
시간의 잔인한 손아귀에서도 너의 가치를 찬미하며,
[P. 89] 철학적인 성향이 두드러진, 시간 속에서는 무엇이나 덧없음을 부인할 수 없었던 신비주의자는 끝없는 시간을 거친 영속이 아니라 시간의 전체과정 밖에 있는 영원성 개념을 발명했다.
[P. 90] 헤라클레이토스는 스스로 만물이 변한다고 생각했지만 영속하는 면도 인정했다 끝없는 지속과 대립되는 영원성의 사상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철학 중심에 자리 잡은 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제5장 파르메니데스
[P. 92] 그리스인들은 이론에서든 실천에서든 온건한 입장이나 중용을 취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변한다고 주장했고, 파르메니데스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P. 94] 만약 언어가 정말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단어들이 어떤 존재를 의미해야 한다. 또 단어들이 다른 단어를 의미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존재하는 무엇을 의미해야 한다.
[P. 96] 이렇게 낱말의 의미가 끝없이 변한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낱말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 낱말이 포함된 명제의 진리와 허위에 어떤 차이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숨겨왔다.
제6장 엠페도클레스
[P. 100] 엠페토클레스는 공기가 분리된 실체substance임을 발견함으로써 과학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P. 101] 그는 원심력을 입증하는 적어도 한가지 사례, 즉 물잔에 줄을 달아 돌리면 물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 101] 흙, 공기, 불, 물을 4원소로 확립한 사람이 바로 엠페도클레스이다. 이 각 원소는 영원히 지속하지만 각기 다른 비율로 혼합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에서 발견하는, 변화를 겪는 복합 실체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복합실체들은 사랑의 힘으로 결합되고 다툼의 힘으로 분리되었다.
[P. 101-102] 엠페도클레스에게 사랑과 다툼은 흙, 공기, 불, 물과 같은 수준에 속한 근원적 실체였다. 사랑이 상승하는 시기가 있는 반면에 다툼이 더 강성해지는 시기가 있으며 사랑이 완전히 승리를 거둔 때가 바로 황금시대였다. 황금시대에는 사람들이 키프로스의 아프로디테여신만을 숭배했다.
[P. 102]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목적의 지배를 받지 않고 단지 우연의 힘과 필연의 힘으로 변할 따름이다, 거기에 주기가 있어서 원소들이 사랑으로 완전히 결합하면 다툼이 점차 원소들을 다시 분리하고, 다툼이 원소들을 다 분리하면 사랑이 원소들을 재결합 시킨다.
(33) ➜ 결국 사랑이 제5의 원소로서 모든 것을 결합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목적에 지배 받지 않고 우연과 필연이 지배하는 우주의 법칙이 진리이라면 의지가 들어갈 곳은 어디인가? 더욱이 ‘사랑의 의지’ 는 어찌할 것인가?
[P. 103] 그들 가운데 진귀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 온갖 지혜로운 일들을 제일 능숙하게 처리하는 사람, 최고로 풍부한 지혜를 깨달은 사람이 살았다네. 그는 온 마음을 바쳐 애쓸 때는 언제나 수월하게 열사람 아니 스무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일을 전부 보기도 했다네.
[P. 104] 플라톤이 이세상을 동굴로 비유하며 우리는 동굴 속에서 지 위 밝은 세상에 속한 실물들의 그림자만 본다고 말한 유명한 구절을 엠페도클래스가 미리 말한 셈이다.
[P. 105] 엠페도클래스가 과학 분야 밖에서 보여준 독창성은 4원소설을 내놓고 사랑과 다툼이라는 두 가지 원리를 이용하여 변화를 설명한 데서 찾을 수 있다.
[P. 105] 그는 일원론을 거부했으며, 자연의 변화 과정은 목적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점에서 보면 그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보다 더 과학적인 성향을 띤다.
제7장 아테네의 문화
[P. 107]이러한 황금시대를 출연시킨 힘의 균형은 위태로워서 안팎으로 위협을 받았다는데, 안에서는 민주정치가 그리고 밖에서는 스파르타가 호시 탐탐 노리고 있었다.
[P. 108] 아테네는 단지 두 위대한 두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을 남김윽=로써 철학에 이바지했다.
[P. 108] 노동할 필요가 없었던 젊은이들은 여유 시간의 대부분을 과학, 수학, 철학 연구에 썼다. 그들은 거의 암기할 정도로 호메로스의 시에 능통했으며, 직업적인 시 낭송자의 가치와 장점을 비판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제8장 아낙사고라스
[P. 111] 아낙사고라스는 만물은 무한히 나뉠 수 있으며,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네 원소의 일부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사물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원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컨대 만물은 얼마간의 불을 포함 하지만, 불원소의 양이 더 많은 경우에만 불이라 부른다.
(34) ➜ 그런 면에서 인간은 드러나는 단서로 평가할 수 있다. 정직이 많은 사람은 누르면 정직이 제일먼저 튀어나오고, 교활한 자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교활함이 드러난다. 우리내부에 선한 것으로 채울 수 있을 때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함이 외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P. 111] 그는 선대 철학자들과 달리 정신nous이 생물의 일부로 들어가 죽은 물질과 구별시켜주는 실체라 생각했다.
[P. 112]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정신은 모든 운동의 근원이다, 정신이 회전 운동을 일으켜 점차 세계 이곳 저곳으로 퍼져나가다가 가장 가벼운 것들은 경계선 주위로 흩뜨리고, 가장 무거운 것들은 중심으로 모은다. 정신은 한결 같아서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똑같이 완전한 것이다.
(35) ➜ 아낙사고라스의 사상인 정신이 운동의 근원인 면은 동의할수 있다. 그러나 동물에게 정신이 있다는것은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동물에게 정신이 있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 없다고 어떻게 실험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한 가지 면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이론에 동의할수 없고 또한 정신이 한결같다는 사상역시 합의되지 않았기에 동의할 수 없다. 안간 개인의 역사를 볼때 어떻게 정신이 한결같다고 할 수 있는가?
제9장 원자론자들
[P. 114] 원자론의 창시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두 사람이었다,
[P. 116] 원자들이 늘 운동했다고 하지만, 처음에 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주석가들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 어떤 주석가들 특히 첼러는 원자들이 늘 떨어지며 더 무거울수록 더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더 무거운 원자가 더 가벼운 원자의 속도를 따라잡아 충돌이 일어나면서 당구공처럼 비껴나가게 된다.
[P. 117] "무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밑바닥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P. 118] 기계론적 설명이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주도한 반면에 목적론적 설명은 그렇지 못했다. 원자론자들은 기계론적 질문을 했고, 또 기계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제10장 프로타고라스
[P. 126] '소피스트란 말은 원래 나쁜 의미를 포함하지 않고 ‘교수’나 ‘교사’라는 말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였다'
[P. 130-131] 객관적 진리를 불신하게 되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는 다수가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법과 관습과 전통 도덕을 옹호한다.
[P. 132]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알려질 수 없으며, 또 그것이 존재하고 어떤 한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다 해도 그는 그것을 타인에게 결코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제 2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 11장 소크라테스
[P. 146]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고결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빼앗고 해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2장 스파르타의 영향
[P. 153] 스파르타는 그리스 사상에 이중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현실과 신화가 제각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P. 154] 노예들은 국가가 허락한 경우 해방되지만 주인이 해방시킬 권리는 없었다.
[P. 155]훈련의 목적은 강인하고 고통에 무심하며 훈육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P. 160]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어서 스파르타인들의 탐욕을 고발했는데, 이러한 탐욕을 재사닁 불평등한 분배 탓으로 돌렸다.
[P.163] "학문으로는 소년들에게 유용한 것을 배웠다. 학문을 배우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 소년들은 복종하는 법과 고통을 없애는 법과 노역을 참는 법을 배우고 싸움에서 이기는 법까지 배웠다. "
13장 플라톤 사상의 근원
[P. 166]플라톤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다섯가지 이다. 첫째는 이상향, 둘째는 이상이론, 셋째는 영혼불멸을 지지하는 논증, 넷째는 우주론, 다섯 번째 지각이 아닌 상기로 간주되는 지식개념이다.
제 14장 플라톤의 이상향
[P. 171] 플라톤은 시민을 세계급, 즉 평민계급, 군인계급, 수호자 계급으로 나누면서 시작한다.
[P. 179] '이상‘은 자기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욕구하는 사람이 그밖에 누구나 욕구하기를 바라는 욕구의 대상이라고 정의 내려도 좋다.
제 15장 이상이론
[P. 185] 플라톤의 이상이론을 요약한다. 철학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우선 어원에 따라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철학자는 ‘진리를 통찰함’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진리통찰이란 무엇인가?
[P. 185] 그저 아름다운 사물만 사랑하는 사람은 꿈에 빠져 있는데 반하여 절대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은 완전히 깨어 있다. 앞사람은 의견opinion을 지닐 뿐이지만 뒷사람은 지식knowledge을 얻는다.
[P. 186] 의견은 아름다운 개별 사물과 관계하지만, 지식은 아름다움 자체와 관계한다.
제16장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
[P. 201]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든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P. 203] "철학자는 가능한 한 육체에서 멀어지고 영혼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P. 203] 철학자들은 도덕적 노력을 기울여 탐닉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는 말이다,
[P. 205] 진정한 철학자는 선의 이상에 도달했기 때문에 선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따라서 이상계가 곧 실재계라고 추론할 수 있게 된다.
[P. 206] 만물을 다 바꿀 수 있는 진짜화폐는 지혜라네
[P. 207] 플라톤은 인간이 욕구를 최소로 줄이면 아주 작은 돈으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맞는 말이다.
[P. 209] 케페스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한 증명의 절반, 즉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아직 증명이 필요한 다른 절반은 영혼이 태어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죽은 다음에도 생존할 것이란 점입니다.”
[P. 210] 진정한 철학자의 영혼은 사는 동안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보고, 죽은 다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 신들과 더불어 천국의 기쁨을 누리려할 것이다.
[P. 212] 소크라테스는 속세에서 추구하는 성공에 고나심이 없었으며, 임종하는 순간에도 평온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기지를 발휘하여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진리라고 빋는 바를 더 염려했다.
제 17장 플라톤의 우주
[P. 214] 신은 영혼 속에 지성을, 육체속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신은 세계 전체를 영혼과 지성을 갖춘 살아 있는 생물로 만들었다.
[P. 219] 죽지 않는 영혼은 머릿속에 있고, 죽는 영혼은 가슴속에 있다.
제 18장 플라톤의 지식과 지각
[P. 221-222] "세계는 무엇을 인식하는 사람은 인식하는 사물을 지각하며, 지금 아는 한도내에서 지식은 지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듯합니다 "
[P. 227] 실존은 만물에 속한 일부이기 때문에, 정신이 홀로 파악한 사물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실존을 파악하지 못하면 진리를 파악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P. 230] 플라톤은 소리와 색에 관하여 “ 두 감각은 합하면 둘이고 각각은 하나다” 라고 말한다.
제 19장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P. 233]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사상을 꽃피운 가장 창조적인 시기에 성장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는 필적할 만한 철학자가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2000년이 걸렸다.
[P. 235]그는 오늘날의 교수처럼 글을 쓴 첫 인물이다. 그가 쓴 논문은 체계를 갖추어 토론 내용이 항목별로 분류되어 있다.
[P. 236] 아리스토텔레스가 범한 오류는 습관이 형성한 편견에서 자유로울 리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그는 상세한 서술이나 비판의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기초의 명확성이나 티탄의 광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
[P. 23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상식으로 희석된 플라톤 사상이라고 묘사해도 괜찮다.
[P. 239]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은 플라톤의 이상 이론에서 한 단계 진보한 이론이라 확신하며, 철학의 진정한 문제를 다룬 매우 중요한 이론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를 추종한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용어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본질’이라는 용어이다. 본질essence을 결코 보편자와 동의어가 아니다, 당신의 본질은‘당신이 바로 당신의 본성에 따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이다. 본질은 당신의 속성들 가운데 당신 자신이 아니게 되지 않고서는 잃어버릴 수 없는 속성들이며, 개별 사물뿐만 아니라, 종도 본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다,.종의 정의는 그것의 본질을 언급해야만 가능하다,
(36) ➜ 본질은 변하지 않는 요소라고 할 때 본질이 가진 한계로 인해 고통이 야기된다면 r 고통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자기 경영은 본질의 한계타파까지 가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P. 240]원자가 사물이라면 원자는 제 각기 다른 원자들과 구분되어 한계가 정해짐으로써 어떤 점에서 ‘형상’을 지니게 된다.
[P. 242] 그는 실체에는 세가지 종류, 곧 감각되고 소멸하는 실체, 감각되지만 소멸하지 않는 실체, 감각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P. 243]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피노자 처럼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신은 부동의 원동자로 정의될 수 없다.
[P. 247]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 가르치고 나중에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친 개인의 영혼 불멸을 믿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인간이 이성을 지니는 한, 불멸하는 신성에 참여한다고 믿었을 따름이다. 자신의 본성 속에 깃들인 신성한 요소를 늘리는 일은 인간에게 열려 있으면, 신성한 요소의 증대가 바로 최고 덕이다.
제 20장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P. 249] 선은 행복이며 행복은 영혼의 활동이라고 한다.
[P. 249] 덕에는 두가지 종류, 곧 영혼의 두 부분에 상응하는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이 있다. 지적인 덕은 가르쳐서 얻고,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키워서 얻는다.
시민들이 좋은 습관을 길러서 선량해지게 하는 일은 입번자의 직무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워지며, 다른 덕들도 행동함으로써 얻게 된다.
(37) ➜ 좋은 습관을 길러서 선령해지도록 하는 일이 입법자의 직무라는 이 주장을 보며 우리는 교사와 부모로서의 우리 역할의 핵심이 습관함양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좋은 습관하나만 가르치면 그 습관이 아이를 인도할 것이다.
[P. 249]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제로라도 좋은 습관을 들이면 때에 맞추어 좋은 행동을 할 경우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햄릿이 어머니에게 말한 다음 대사를 떠올린다.
미덕이 없다면 있는 척이라도 하셔야죠
습관이란 괴물은 온갖 감각을 먹어치우는지라
악마 같은 습관들도 이점에서는 천사죠
정당하고 착한 행동을 버릇 삼아 행하면
똑같이 성직자복 또는 제복을 주어
어울리도록 입혀주니 말입니다
(38) ➜ 악마조차도 습관을 자기편으로 한다면 성직자가 될 수 있고, 성직자였던 자도 습관을 적으로 만들었기에 그리되었을 것이다. 우선 습관을 만드는 일이 최우선이다.
[P. 249-250] 어느 덕이나 양극단의 중용이며, 양극단은 각각 악덕에 속한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다. 후함은 방탕과 인색함의 중용이며, 적당한 긍지는 허영과 비굴의 중용이고, 재빠른 기지는 저속한 익살과 상스러움의 중용이며, 겸손은 수줍음과 파렴치함의 중용이다. 그러나 어떤 덕은 양극단의 중용이라는 도식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데, 예컨대 진실성truthfulness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성이 허풍과 거짓 겸손의 중간 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단지 자신에 관한 진실성에만 적용된다. 넓은 의미의 진실이 어떻게 양극단의 중용이란 도식에 맞추어지는지는 모를 일이다.
(39) ➜ 덕은 양극단의 중요이다. 양극단은 악덕이다. 이 명제를 보면 치우침의 위험을 알 수 있다. 냉정함을 유지하며 중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또 진실성의 경우 이 공식이 맞지 않다 했다. 그러면 허풍과 거짓 겸손의 중용으로서의 진실성은 자신의 경우 외에 그 어떤 경우도 맞지 않다는 말인데, 이유가 무엇인가? 허풍과 거짓 겸손 양극단으로 이루어진 시소에서 그 중심의 진실성은 과연 덕이 될 수 있는가? 만들고 있는 재료가 악덕인데 그 재료를 합한다고 덕이 될수 잇는가? 허풍과 거짓 겸손이 섞이면 물리적 변화가 일어나는가?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가?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화학적 변화는 없을 것이고 단연코 물리적 변화만으로는 악덕이 덕이 될수 없으므로 이 주장은 오류가 잇다.
[P. 251] 대범한 사람은 큰일을 할 만하기 때문에 최고로 선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층 더 유능한 사람은 한층 더 뛰어난 일에 알맞고, 가장 훌륭한 사람은 가장 큰일에 알맞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정으로 대범한 사람은 틀림없이 선하다. 온갖 덕을 탁월하게 지녔다는 점이 대범한 사람의 특징인 듯이 보인다. 또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 팔을 휘저으며 도망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는 일은 대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터이다. 아무도 자기보다 위대하지 않은데 무슨 목적으로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대범함은 덕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종의 왕관 인듯하다. 왜냐하면 대범함은 덕들을 한층 더 위대하게 하며, 덕들이 없다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대범해지기 힘든 까닭은 성격이 고귀하고 선하지 않으면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범한 사람은 주로 명예와 불명예에 관심을 기울인다.
(40) ➜ 성격이 고귀하고 선해야 대범해 진다는 논지에서 성격의 고귀함은 무엇인가? 진실을 드러내는 성격은 그 결과로 인해 지탄받는다 그렇다고 악한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진실을 감추는 이들은 우선 겉으로는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진실을 숨기는 그들의 성격이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따라서 성격의 고귀함을 도대체 알 수 없는데 대범함의 측도로 성격의 고귀함을 논하는 것은 모순이다.
차라리 명예와 불명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결과로서 대범을 체크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강도가 명예를 신경쓰는가? 성격좋은 사기군은 있다. 그러나 명예를 지키려는 사기군은 절대 없다. 따라서 명예수호가 대범의 측도가 되는것은 동의한다.
[P. 252] 대범한 사람의 특징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거나 거의 아무 요구도 하지 않지만, 서슴없이 도와주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엄하게 대하고 중간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지 않다는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앞에서 당당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고상한 일이고, 지위가 낮은 사람앞에서 당당해지기 쉽기 때문에 지위가 높은 사람을 대하는 당당한 태도가 버릇없이 자란 사람의 특징이 아니지만, 비천한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한 태도는 약자 앞에서 강한 태도 만큼이나 비속하다.
.......또한 대범한 사람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까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일 다시 말해 진리보다 대중의 생각을 더 염려하는 일은 비겁한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41) ➜ 여기서 또 한번 볼 수 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감정 표출 정도가 이 대범함의 측도임을. 그런데 대범함의 정도가 비슷한 자들의 집합은 문제가 없는데 간혹 대범함의 아웃라이어가 발생하면 나머지들의 집단 공격이 그를 사냥감으로 만들어 버린다. 환멸을 느낀 아웃라이어는 그 집단을 포기하거나 떠나려하거나 숨어버린다.
감정 표현에 자유로운 대범함을 가진 자를 정말로 만나고 싶다. 그에게서 나의 온갖 추한 단점을 다 들을 수 있다 해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나의 추함을 정화할 수 있을 방법도 들을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런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 나의 추함, 나의 약점을 말해주는 사람은 그 만큼의 책임을 가지고 시도하기에 그 책임이 그로 하여금 나의 결점에서의 탈출로도 알려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에 얽매이지 않는 까닭은 사람을 경멸하며 빗대서 평민에게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진실을 말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42) ➜ 그렇다면 말을 숨기고 포장하는 자는 거짓을 보여주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거짓으로 포장하는 사람은 해악이고, 특히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남을 이용하는 자들의 해악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잉크가 퍼지듯 악이 번져간다. 따라서 말을 듣기 좋게 하는 사람은 진실이 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우선 듣기 좋다고 그 말에 의지했다간 자신이 최초 희생자가 될터이다.
[P. 253]대범한 사람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지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에게 속한 여러 특성이 사회안에서 나타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P. 255]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목적, 말하자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을 받아 들인다. “목적, 우리가 바라는 바, 우리가 숙고해서 선택하는 수단, 수단과 관련된 행위는 선택이나 자유의지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덕 실행은 수단과 관련된다.”
[P. 256] 그리스도교 윤리학자는 유덕한 행동의 결과는 대개 선하지만 유덕한 행동 자체만큼 선하지 않으며, 유덕한 행동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P. 258 ]행복은 유덕한 행동에 달려있고, 완벽한 행복은 최선의 활동인 관조에 달려 있다. 관조가 전쟁이나 정치나 다른 어떤 실천 경력보다 더 나은 까닭은 삶에 여유를 주기 때문이며, 여유는 행복의 본질적 요소다. 실천적 덕은 이차적인 행복을 제공할 뿐이다. 이성은 발휘해야 최고 행복에 이르게 되는 까닭은 이성이 다른 무엇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온통 관조만 하며 살 수는 없지만, 관조하는 한 신성한 삶에 참여한다. “은총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신의 활동은 관조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인간 존재 가운데 철학자의 활동은 신과 가장 흡사하므로 최고 행복이며 최선의 활동이다.”
제21장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P. 264] 정치학은 국가의 중요한 가치를 지적하며 시작한다. 국가는 최고 단계에 이른 공동체로서 최고선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P. 264] 본성의 측면에서는 가족에 우선하고 심지어 개인보다 우선한다.
[P. 265]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복종할 운명을 타고나고, 어떤 사람은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다. 본성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소유물인 사람은 본성에 따라 노예가 된다. 그리스인들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정신 능력이 낮은 열등한 인종은 당연히 노예가 되어야 한다. 길들인 동물들은 인간의 지배를 받을 때 훨씬 행복하며, 자연적으로 열등한 사람은 우월한 사람의 지배를 받을 때 훨씬 행복하다.
[P. 266] 그러므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옳고, 패한 자는 그르게 된다. 만족스러운 결과 아닌가?
[P. 269] 좋은 정치 체제에 속하는 세 종류는 군주정치, 귀족정치, 입헌정치(또는 시민 정치)이다. 나쁜 정치 체제에 속하는 세종류는 참주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이다.
[P. 271] 성경의 시편 작가는 의로운 사람이 구걸하는 모습을 결코 본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사람이 아주 많지도 아주 적지도 않은 수입을 정당하게 얻는다고 생각한다.
[P. 271] 참주는 뛰어난 공로를 세운 인물의 입신을 작기위해 필요한 경우 처형이나 암살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또 공동 식사 사교 모임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높은 교육은 금지해야 한다. 문학 모임이나 문학 토론을 허용해서도 안된다. 참주는 민중이 서로 잘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자신이 다스리는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살게 해야 한다. 그는 시라쿠사의 여자 염탐꾼 같은 정보원도 고용하는 것이 좋다. 또 분쟁의 씨를 뿌리고 백성들을 피폐한 지경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집트 왕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건설했듯이 백성들이 대공사에 몰두해 일하게 해야 한다.
(43) ➜ 참주정치의 폐단이었던 이런 특징은 지금도 우리 조직들에 남아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지위 유지를 위해 위와 같은 행위를 민주주의 하에서도 자행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없다. 부와 명예와 지식과 심지어는 영어능력조차 권력인 세상에 그것을 갖지 못한 자는 언제나 밟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탓하고 돌 던지고 스트라이크하기 전에 우선 힘을 가져라. 그리고 힘을 갖지 못한 자신을 한탄해라.
[P. 272]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의 사악함에는 끝이 없다고 결론짓기는 하지만, 참주제를 유지할 다른 방법으로서 유화책이나 허울뿐인 종교도 있다고 말한다.
[P. 272] 생계를 유지하려 일하는 사람을 시민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제22장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P. 277]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삼단논법 학설이다.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결론 세 부분으로 구성된 논증이다. 삼단논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각에 스콜라 철학자들이 붙인 이름이 있다. .... 바르바라, 켈라렌트, 다리이 페리오
[P. 285] 나는 이번장에서 관심을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삼단논법 형식이론을 제외하면 전부 거짓이라고 결론짓는다.
제23장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P. 288] 본성은 어떤 사물이 되기 위해 작용하는 원인들의 집합에 속한다.
[P. 289]"내적 원리에서 기원하는 연속 동작을 거쳐 완성에 이른 사물들은 ‘자연스럽다’. "
제 24장 초기 그리스 수학과 천문학
[P. 296]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지금까지 저술된 위대한 저술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인의 지성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P. 302]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장점은 진리성이 아니라 단순성에 있다. 운동의 상대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진리 문제가 개입될 필요는 없다.
제 3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철학
제 25장 헬레니즘 세계
[P. 304] 고대 그리스어 문화권에 속한 세계의 역사는 세시기로 나누기도 한다. 첫시기는 자유도시국가 시대이다. ....둘째 시기는 마케도니아 통치 시대이다. 미지막 시기는 로마제국시대이다. 둘째시기가 헬레니즘 시대로 알려진다.
[P. 308] 역사 속에 실존했던 영웅가운데 어느 누구도 안렉산드로스 만큼 신화 형성에 적합한 능력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없었다.
[P. 310] 전문화는 학문의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당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는 특징이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에 그리스 자치도시들의 경우 유능한 사람이란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갖춘 인재였다. 유능한 사람은 경우에 따라 군인, 정치가, 입법자다 되거나 철학자가 되기도 했다.
[P. 312] 마음이 머물 곳은 마음뿐,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이 천국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지옥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P. 315] 당신이 저축해둔 돈이 내일 전부 없어질지도 모른다면 검약이란 소용이 없어진다. 당신이 정직하게 대한 사람이 당신을 속인 게 확실하다면 정직이란 어떤 이득도 주지 않는다.
(44) ➜ 정직하게 대하던 이에게는 상대의 정직도 요구한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어깨를 부딪치면 서로 미안하다고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사람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줄때 받는 자는 그것에 상응하는 것은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감사함은 가져야 한다. 그것이 안될 때 관계 지속은 불가하다.
대의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안정된 상황에서 승리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단호하게 대의를 고집하는 일도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비위나 맞추는 변절만이 생존과 행운을 가능하게 만든다면 진실을 놓고 발이는 논증이란 헛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45) ➜ 자기의 이익 여부에 따라 변절과 배신과 속임수를 밥먹듯하는 이에게 줄 것은 냉정함 뿐이다. 그들에겐 단 하나의 증명도 해줄 필요가 없다. 진실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그들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순수하게 세속적인 사려를 제외한 어떤 것도 덕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용기가 있다면 불확실한 세상에서 모험가가 될 터이고, 용기가 없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천하고 비겁한 사람이 될 것이다.
[P. 315] 메난드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네.
타고난 악당은 아니었지만
불운이 겹쳐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46) ➜ 시대를 잘못 태어나 죽음에 이른 영웅을 우리는 역사에서 부지기로 만난다. 불운이 겹쳐 악당이 된 사람은 지금도 교도소마다 득실댄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주변 사람에 따라 언제든 악당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곳이 할렘인지, 비버리힐즈인지를 보아야 한다. 무장 없이 할렘을 걷다가 강도를 만나 착취당하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발 딛는 곳이 할렘이 아니길 기도할 뿐이다. 혹 비버리힐즈에도 강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체포될 것이고 그 마을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채 추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곳을 비버리힐즈로 만들어야 한다. 영혼의 비버리힐즈!
[P. 316] "형이상학은 뒤로 물러나고, 윤리학이 당시에는 개인 윤리가 최고 중요한 분야로 등장한다. 철학은 이제 용맹한 소수의 진리 탐구자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불기둥이 아니었다. 철학은 생존 투쟁의 흔적을 뒤따르며 병약자와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 병원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47) ➜ 병약자와 부상자가 넘쳐나는 현대의 전쟁터에서 그들을 치료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철학이다는 논지는 결국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깊이 사고하는 것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
제26장 키니코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
[P. 317] 뛰어난 지성인과 사회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행운이 따르는 시대의 지성인은 대체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개혁안을 제안하면서 자신들의 제안이 환영받으리라 확신할 뿐만 아니라 설령 개혁되지 않더라도 세상을 혐오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운이 따르지 않은 시대의 뛰어난 지성인들은 혁명적인 성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일부는 자신들이 지지한 결과로 가까운 장래에 변화가 일어나리라 기대한다,
이도저도 아닌 시대의 뛰어난 지성인들은 세상에 절망한 나머지 무엇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변화할 가망은 없다고 체념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쉽게 절망감을 느끼고 현세의 삶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에 빠져듦으로써, 오로지 내세나 신비스러운 변용에서 선을 구하고 희망을 찾게 된다.
(48) ➜ 행운이 따르는 시대는 살아간다는 것은 운명에 의해 결정될 사항이라 개인의 능력밖의 일이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은 시대와 이도 저도 아닌 시대의 구분은 모호하다, 따라서 그가 혁명가로 살든 염세주의로 살든 그건 순전히 그 개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행운이 없긴 마찬가지이나 세상을 바꾸었거나 절망하다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어느쪽을 택할지 선택하는 몫은 개인의 의지이다.
어떤 시대에는 위에서 말한 삶의 태도들이 같은 시대에 사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한꺼번에 나타났다. ... 괴테는 현실에 만족한 편이고 벤담은 개혁가이며, 셀리는 혁명가이고, 레오파르디는 염세주의자이다.
[P. 321] 세상은 악하니 세상에 의존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외부의 좋은 것들은 위태로운 행운의 선물로서 우리 자신이 노력한 끝에 얻은 보상은 아니다. 주관의 노력으로 성취한 좋은 것들, 즉 덕이나 체념하여 얻은 만족은 잃어버릴 염려가 없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의 가치만 인정할 것이다.
[P. 321]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학설과 마찬가지로 실망감 때문에 자연스런 열정마저 잃어버린, 기진맥진한 사람들에게나 호소력을 갖는 학설이었다.
[P. 323] 과학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확실치 않다”고 말한다. 지적인 호기심이 강한 사람은 “나는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내고 싶다”고 말한다. 철학적 회의주의자는 “아무도 모르며,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고 말한다. 회의주의 체계는 이러한 독단론적 요소 때문에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제27장 에피쿠로스학파
[P. 334]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P. 336]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현자의 목표는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없애는 일이라 생각한다. 위는 사물의 근원이며 위통의 고통이야말로 탐식의 쾌락을 능가한다.
[P. 338] 무엇보다 두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살라
제28장 스토아 철학
[P. 347] 스토아 철학은 초기 순수한 그리스 철학들과 달리 정서적인 면에서 편협하고 어떤 점에서 광신적인 특징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당시 세계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인들이 제공하기 힘들어 보였던 종교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P. 349] 개인의 삶 속에서 유일한 선은 덕이다.
[P. 349] 참으로 선할 뿐인 덕은 완전히 개인에게 달려 있다.
[P. 350]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유덕한 삶을 통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경우 덕을 갖추기 위한 삶에 열성을 다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P. 353] "악이 없어도 선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선과 악은 정반대 존재이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대립 속에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P. 356] 세네카의 최후는 교훈이 되고도 남았다. ........... 그는 슬퍼하는 가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지상의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 덕이 높은 삶의 본보기를 남긴다.”
[P. 363-364] "인류를 사랑하라. 신을 따르라. .... 또 법칙이 만물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29장 로마 제국의 문화
[P. 371] 그리스의 정치 체제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은 두가지였다. 첫째 원인은 도시마다 절대 주권을 주장한 것이고, 둘째 원인은 도시들 대부분의 내부에서 부자 계층과 빈자 계층 간에 벌어진 가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다.
제 30장 플로티노스
[P. 387] 우주에 관한 사색을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만이 형이상학 이론을 이루어낸다. 인간은 명랑한 염세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우울한 낙천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P. 388] 행복은 결국 도달한다고 해도 감각적으로 느끼는 인상들과는 거리가 먼 사물에 대한 사색을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
[P. 390]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은 일자 정신 영혼의 성 삼위일체에서 시작한다.
[P. 395]물질은 영혼이 창조한 것이며 독립된 실재도 아니다. 영혼마다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P. 396] 영혼은 어떤 물체의 질료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지만, 그 물체의 본질이고 본질은 영원하다.
[P. 400-401] 한편 플로티노스의 철학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면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조장하는 결함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안을 들여다볼 때 신성한 정신을 보게되고, 자신의 바깥을 바라볼때 감각계의 불완전한 면을 보게된다.
제2권 가톨릭 철학
서론
[P. 407] 봉건 귀족은 대체로 무지하고 우둔하고 야만적인 특징을 드러냈다. 그래서 평민들은 지성, 도덕성, 무정부 상태에 대처하는 능력이 귀족 계급보다 뛰어난 교회의 편에 섰다.
[P. 408]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사려 깊은 사람들은 현세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겪으며 불행에 빠져드는 경향이 매우 강했고, 더 나은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견디어 나갈 따름이었다.
[P. 408-409] 파괴로 점철된 수세기 동안 삶은 위험에 노출되어 불안정하고 가혹한 고난으로 채워졌다. 좋지 않은 현실 상황에 더하여 암울한 미신들이 유행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스고교도의 태반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사람들은 순간 순간 온갖 악령에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마법사와 마녀의 책동에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에 사로 잡혔다.
(49) ➜ 지금도 종교인들 중에 이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만물에서 악령의 존재를 감지하고 모든 사건 발생 배후에 신의 의도와 악령의 개입을 이야기 한다. 심지어 자신의 의지조차도 성령(혹은 부처)과 악령(혹은 마구니)의 배후 조종이라고 분류한다. 그리고 악령 혹은 마구니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한다. 그건 자기 최면에 불과할 수 있다.
제 1부 교부 철학
제 1장 유대교의 발전
[P. 414]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시기를 전후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종교의 관점에서 처음에는 이스라엘 종족과 주변의 다른 종족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우선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을 각별히 보살피는 부족 신이었을 분이고,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다른 신을 숭배하는 관습도 인정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첫째 계명은 바빌론 유수 직전에 일어난 혁신에 대해 말해준다.
혁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초기 예언자들의 다양한 성구들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P. 415] 예언자들은 당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야훼의 은총이 꼭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기면 야훼께서 은총을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레미야와 에제키젤은 특히 유대교 이오;의 종교들이 모두 거짓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상 숭배를 벌하신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50) ➜ 제일 계명에 따라 축복의 공급이 일어난다는 선언은 지금도 모든 교회가 인정하는 제일 교리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제일 계명이 하나님이 아닌 특정 교주가 되기도 하고 담임목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야훼가 들어갈 자리에 아무개목사가 들어선다. 이단이 형성된다.
[P. 417] 유대 민족과 다른 고대 민족을 구별하는 특징은 유대인들이 보여준 불굴의 민족적 긍지였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정복당하면 외면 뿐만 아니라 내면으로도 복종하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독 민족적 탁월성을 계속 믿으며, 자신들이 겪는 불행이 신앙과 종교의식의 순수성을 잃은 탓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확신했다.
➜ 우대의 선민 사상은 현재 기독교도들 내에서도 팽배해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교만으로 드러나고 타 종교나 무신론자의 질타를 받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 교만은 개인의 역사에서 오히려 퇴보를 일으키게 만들수도 있으므로 위험하다. 모든 종류의 교만은 전부다 위험하다. 비록 야훼가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교만을 취하는 순간 은총에서는 멀어진다. 야훼는 교만을 제일로 싫어한다고 성경 곳곳에서 가르친다.
제2장 초기 그리스도교
[P. 431] 신약성서에서는 참된 신앙인은 마니교에 맞서야 한다고 경고한다.
[P. 433] 성 부울로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라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망치지 못하도록 조심하십시요”
[P. 434] 정신이 타락하면 영혼이 되고, 영혼이 덕을 갖추면 정신이 된다
[P. 439] 신의섭리에 따라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처음 유대인들에게 일어나고 다음에는 그리스도교도에게 일어났다.
제3장 교회의 세 박사
[P. 443] 서방 교회의 박사로 불리는 네 사람은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다.
제4장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
[P. 466]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가운데 순수 철학에 속한 최고 작품은 고백론 qqrnjs이다.
[P. 466] 세계란 물질에서 창조되지 않고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은 질서와 배열 뿐만 아니라 물질도 창조하셨다. 무에서 일어나는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그리스인의 견해는 그리스도교 시대가 지나는 동안 간헐적으로 등장해 범신론으로 이어졌다.
[P. 467]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면 알지만,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모르게 되고 만다,”
➜ 고백론의 이 유명한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만든다, 의식의 문제 역시 동일한 질문을 하게 한다,
[P. 467] 시간은 기대하고 고려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P. 469] '신국'은 중세 시대를 관통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교회가 세속 군주들과 투쟁하는 경우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P. 474] 학한 의지는 결과를 낳는 원인이 아니라 결핍을 일으키는 원인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악한 의지는 결과를 산출하는 힘이 아니라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P. 477]부활에는 두가지, 곧 죽을때 일어나는 영혼의 부활의 심판 날에 일어나는 육신의 부활이 있다.
[P 478] 악한자들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유혹을 당하고, 유혹을 당하기에 죄를 짓게 된다.
[P 478] 악한 자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신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악해진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듯하다.
제5장 5세기와 6세기
[P. 488] "인간은 신성을 획득함으로써 행복해진다."
제6장 성 베네딕투스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P. 495] 6세기 이후 수세기에 걸친 끝없는 전쟁으로 문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던 시기, 무엇보다도 교회는 살아남은 고대 로마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가장 위대한 성직자들조차 광신과 미신에 물들어 세속 학문을 사악한 것으로 치부했던 탓에, 교회는 로마 문화를 불완전하게 보존했다. 그렇지만 교회 제도는 후대의 학문과 세련된 예술의 부흥을 가능하게 만든,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제2부 스콜라 철학
제7장 암흑기의 교황 체제
[P. 514] 만약 교황들이 계속 그리스 황제들의 지배를 받았더라면 가톨릭 교회의 발전은 아주 양상이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
제8장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사상
[P. 527] 그는 아일랜드 인이며, 신플라톤학파에 속한 학자이자 그리스어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고, 펠라기우스주의자이자 범신론자였다.
[P. 533] "성삼위는 우리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을 사랑한다, 성삼위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움직인다."
제9장 11세기 교회 개혁
[P. 536] 11세기에 이룩한 개선과 진보는 오래 지속되었으며 다채로웠다. 이러한 진보는 수도원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다음 교황 체제와 교회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P. 541] 수도원 개혁가들에게는 대단한 용기와 정력이 필요해다. 그들이 성공을 거둔곳에서도 세속 권력자들의 지원도 뒤따랐다. 이 개혁자들과 개혁 지지자들은 먼자 교황체제의 개혁을 이끌었고, 그 다음은 교회 전체의 개혁을 선도했다.
[P. 548] "있을수 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존재한다"
제11장 12세기
[P. 562] 우리의 흥미를 끄는 12세기의 네 가지 양상은 다음과 같다.
1. 황제권과 교황 체제의 갈등
2. 롬바르디아 도시들의 발흥
3. 십자군
4. 스콜라 철학의 성장
[P. 567] 자유도시들의 발흥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투쟁에서 비롯된 최후의 가장 중요한 결과였다.
[P. 569] 십자군 운동 이전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동방 물품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십자군 운동이후 유대인 박해의 결과로 동방 물품의 무역은 대부분 그리스도교도가 장악했다.
제12장 13세기
[P. 578] 중세 시대는 1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P. 578] 13세기의 위해한 인물들은 정말로 위대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 성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 2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유형에서 최고 권위를 갖는 대표자들이다.
제13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
[P. 591]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P. 593] 우선 ‘지혜’의 의미를 고찰해보자. 사람은 특별히 추구하는 어떤일, 예컨대 집을 짓는 일에서 지혜로울 수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이 특수한 목적을 성취할 수단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든 특수한 목적은 우주의 목적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지혜 자제는 우주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이제 우주의 목적은 지성의 선, 즉 진리이다.
[P. 595] <신학 대전>에서는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이 제시된다. 첫째, 위에서 말한 부동의 원동자 논증이다. 둘째, 제1원인 논증으로서 다시 한번 무한 후퇴의 불가능성에 의존한다. 셋째, 모든 필연성의 국극적 기원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논증이다. 이것은 둘째 논증과 거의 같은 논증이다. 넷째, 우리가 세계에서 여러 가지 완전한 것을 발견하고 이 완전한 것들이 완벽하게 완전한 무엇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논증이다. 다섯째, 생물만이 내부에서 생겨나는 목적을 가질수 있으므로 목적이 외부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무생물조차 어떤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한다는 논증이다.
[P. 596] 신은 선할 뿐만 아니라 선 자체이다.
[P. 602] 신을 아는 세가지 길이 있는데, 이성으로 통하는 길과 계시로 통하는 길, 그리고 오직 계시로 미리 알려진 중요한 것을 직관함으로써 통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는 셋째길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신비주의 경향을 띠는 저술가는 다른 두가지 길보다 셋째 길에 대해 말을 더 많이 했을 테지만, 아퀴나스는 신비주의보다 이론을 따지기 좋아하는 철학자이다.
[P. 604] 그는 철학을 시작하기 전에 벌써 진리를 알고 있다. 진리는 가톨릭 신앙안에서 선언된다.
제14장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스콜라 철학자들
[P. 606] 로저베이컨은 무지의 원인이 네가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부정하고 부적합한 권위의 사례이다, 둘째, 관습의 영향이다. 셋째, 무식한 군중의 의견이다. 넷째, 외견상의 지혜를 과시하며, 무지를 은폐하는 짓이다.
[P. 609] 사물에는 세가지 종류, 곧 저절로 알려진 원리 경험을 통해 알려진 사물 우리 인간 자신의 행위가 있다. 그러나 신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P. 615] 오컴의 면도날.....“존재들은 필요 없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더 작은 수로 할 수 있는 일을 더 큰 수로 하는 짓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P. 617] 오컴에 따르면 장차 일어날 우연한 사건에 관한 명제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P. 619] 오컴의 윌리엄 이후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15장 교황 체제의 쇠락
[P. 620] 13세기로 접어들면서 철학, 신학, 정치, 사회 모든 측면을 아우른 위대한 종합에 이르렀는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는 과정을 거쳐 천천히 이루어졌다.
제3권 근현대 철학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까지
제1장 일반적 특징
[P. 638] 보통 근대라고 부르는 역사적 시기의 정신적 전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주세에 속한 사고방식과 달랐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과학의 권위가 향상되었이 점점 더 기술로 변해간 끝에 세계의 본성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측면은 점점 무시되었다.
제 2장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
[p. 650] 르네상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은 운동이 아니었다
제3장 마키아벨리
[P. 654] 그의 정치철학은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학설로 사태를 지시하며 스스로 경험한 것에서 나온 결과물인데, 목적의 선악 여부와 상관없이 정해진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내는데 관심을 두었다.
[P. 661] 정치학에서는 수단도 중요한 문제이다, 실패할 것이 뻔한 방법으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해봐야 헛된 일이다. 만약 목적이 선하다면 마땅히 목적 달성에 적합한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제5장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P. 677]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둘 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이 지적인 문명의 발전에 앞선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반항이자 신학적 반항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교황이 천국 여뢰의 권능으로 요구하던 조공을 더는 바치지 않았다. 반종교개혁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자유에 맞선 반항일 따름이다. 그래서 교황의 힘이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한편, ................대략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동시에 종교 전쟁은 대부분 스페인과 적대국들간의 전쟁으로 스페인의 국력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 벌어졌다.
제6장 과학의 발흥
[P. 681] 근대와 근대 이전 시대의 차이는 17세기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서 비롯된다.
[P. 685]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에게 성령의 권위보다 더한 권위를 주겠는가? "
[P. 686] 케플러는 천부의 재능을 갖춘 천재가 아니면서도 끈질긴 노력 끝에 과학자로 성공한 가장 대표적 모범 사례로 꼽힌다.
[P. 688]갈릴레오는 근대 과학을 정초한 과학자들 가운데 뉴턴을 제외하고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P. 688] 갈릴레오는 역학에서 가속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P. 689] 갈릴레오는 최초로 박하 물체의 법칙을 입증했는데, ‘가속도’개념을 추가하면 가장 단순한 법칙이 된다.
[P 692]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가 닦아 놓은 길위로 걸어가서는 그들의 과학적 작업을 완성하고 최후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7장 프랜시스 베이컨
[P. 699]베이컨은 근대귀납법의 창시자요, 과학적 탐구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려 노력한 선구자로서 영원히 기억할 만하다.
[P. 702] 그는 네가지 우상을 제시한다. .............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제8장 홉스의 리바이어던
[P. 705] 홉스는 경험론이나 합리론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철학자이다 .그는 로크, 흄과 마찬가지로 경험론자였지만, 그들과는 달리 순수 수학 뿐 아니라 응용 수학과 관련된 수학적 가치를 안정한 철학자였다,
[P. 710] 의지란 숙고 속에 남은 지속적인 기호나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제9장 데카르트
[P. 710 ]르네 데카르트는 흔히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는데, 내 생각에도 옳은 평가이다.
[P. 736]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P. 728] 우리가 아주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내용은 모두 진리이다.
[P. 731] 데카르트 철학은 그밖에도 두가지 점 때문에 타월성을 인정받았다. 첫째, 플라톤이세 시작되어 대개 종교적 이유로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발전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완성했거나 거의 완성했다.
제10장 스피노자
[P. 733] 스피노자는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서 고결한 품성을 갖춘 매력 넘치는 인물이다. 지적인 면에서 그를 능가한 철학자가 몇사람 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아무도 따르지 못할 최고 수준에 이른 철학자이다.
[P. 736]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일은 절대적이고 논리적인 필연에 따라 정해진다. 정신 영역의 자유의지나 물질계의 우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 739]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
[P. 739] "인간이 작용인으로 영향을 미쳐 일어난 모든일은 필연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외부 원인을 통해 일어난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에게 악이란 생기지 않는다. "
[P. 740] 만물이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살을 이해하고 나면 정신은 감정들을 조절할 능력도 획득하게 된다. “명석하고 판명하게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한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마련이다.”
[P. 741]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의사랑을 바라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제11장 라이프니츠
[P. 747] 라이프니츠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최고 수준의 지성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칭찬할 만하지 않다.
[P. 751] 라이프니츠는 자신을 스피노자와 대비하며 자신의 체계 안에서 자유의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그의 체계에는 이유옶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충족이유율’이 포함되어 있다.
제12장 철학적 자유주의
[P. 765]정치학과 철학 뷴야에 일어난 자유주의의 발흥은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검토하기에 적합한 소재를 제공한다.
[P. 767] 초기 자유주의의 낙관적이고 활력에 넘치는 철학 사상으로서, 점점 성장해가는 신흥 세력을 대표하면서 별 어려움 없이 승리를 거두고 인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중 듯했다.
[P. 769]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점차 발전시켜 나간 새로운 운동은 루소와 함께 시작되어 낭만주의 운동과 민족국가 원리의 유행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제13장 로크의 인식론
[P. 774] 존 로크는 역사상 일어난 혁명 가운데 가장 온건했으며 전무 후무한 성공을 거둔 1688년 명예혁명의 주창자이다.
[P. 775] 로크는 철학자들을 통틀어 최고 행운아라고 말해도 좋다.
[P. 781] 관념은 두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a)감각과 (b)정신의 활동인 지각인데 지각을 ‘내감 internal sense’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관념을 수단으로 이용해야만 생각할 수 있고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우리가 획득한 어떤 지식도 경험에 앞설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P. 781] 로크는 지각이란 “지식에 이르는 첫 단계이자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재료가 모이는 입구” 라고 말한다.
제14장 로크의 정치철학
[P. 798] "사람들이 이성의 명령에 따라 더불어 살며 그들 사이에 재판을 담당할 권위를 가진 공동의 우월한 자가 없는 상태가 바로 자연상태이다. "
사회계약론에서 정부는 계약에 참여한 당사자로서, 만약 계약 내용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804]
제15장 로크의 영향
[P. 820]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형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친절하게 대한다면 도덕적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
[P. 821]쾌락이 곧 선은 아니지만 유덕하고 고결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제16장 버클리
[P. 833] 상기는 우리가 자연스레 ‘정신적’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나타나는 어느 정도 고유한 효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불에 데여본 아이는 불을 두려워하지만 불에 달구어진 부지깽이가 불을 두려워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P. 837] 관념론자는 ‘정신’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유물론자는 ‘물질’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제17장 흄
[P. 838] 흄은 매우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로크와 버클리의 경험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냈고, 일관성을 보여줌으로써 경험주의 철학이 대단한 사상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P. 840] 인상과 관념은 지각의 두 가지 종류인데, 그 가운데 인상은 강하고 격렬한 지각이다. 관념은 사고활동과 추론 활동 속에 나타난 인상에 대한 희미한 심상이다.
[P. 845]믿음이란 ‘현재의 인상과 관계를 맺거나 그 인상으로 인해 연상된 생생란 관념이다.
[P. 851] 모든 개연적 추리는 일종의 감각일 따름이다.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제18장 낭만주의 운동
[P. 858] 18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술,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학도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 운동의 특징인 감정이나 격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P. 858]초기 낭만주의 운동은 철학과 아무 관련도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철학과 연결되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또한 루소에 의해 처음부터 정치학과 이어져 있었다.
[P.861] 낭만주의 운동 전체의 특징은 한마디로 공리적 기준을 미적 기준으로 대체한 것이다. 지렁이는 유용하지만 아름답지 않고, 호랑이는 아름답지만 유용하지 않다.
제19장 루소
[P. 870] 루소는 18세기 프랑스어의 의미에 따르면 계몽철학자였으나 오늘날 말하는 의미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문학, 취미, 예법, 장치뿐 아니라 철학에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한 영향을 주었다.
[P. 886] 일반 의지가 언제나 옳다고 말하는것은, 일반 의지가 각양 각색시민들이 자기 이익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을 대표하기 때문에, 공동체에 가눙한 자기 이익 가운데 가장 큰 만족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P. 889] 헤겔은 이 책에 기술된 철학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의 절대 정치를 지지하는데 이용했다. 루소의 철학이 실제 정치 현장에서 거둔 첫 결실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였다. 러시아와 독일의 독재 정치는 부분적으로 루소의 가르침의 성과로 볼 수 있다.
제20장 칸트
[P. 893] 일반적으로 칸트는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생각한다.
[P. 894]칸트의 초기 저작들 가운데 철학보다 과학에 관한 들이 더 많다.
[P. 89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칸트에 대한 논평에 따르면, “그는 결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의 학문적인 연구 습관을 노년기까지 유지하며 살았다.”하면
[P. 898] ‘순수이성비판’의 대부분은 공간과 시간, 또는 범주들을 경험되지 않은 사물들 자체에 적용함으로써 발생한 오류들이 무엇인디를 보여준다,
[P. 899] 그는 신, 자유, 영혼 불멸이 ‘이성의 세가지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P. 901] 너는 오직 네 의지의 격률이 동시에 일반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혹은 네 행위의 격률이 네 의지를 통해 마치 일반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
제22장 헤겔
[P. 923] 헤겔은 칸트와 더불어 시작된 독일 철학 사조의 정점에 위치한 철학자이다. 헤겔은 자주 칸트를 비판했지만, 칸트가 없었든들 자신의 철학 체계를 결코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P. 924] 헤겔 철학은 난해하며 위대한 철학자들 전부를 통틀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철학이다.
[P. 924] 실제는 이성적으로 존재하고 이성은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P. 928] 헤겔은 “이성은 실재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의식의 확실성이다”
[P. 931] "그런데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하나의 동질성을 가진 불변하는 무한자, 즉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둘째 국면에서는 자신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이둘째 측며을 자신과 정반대인 대립물로 만드는 존재, 말하자면 보편자와 대조를 이루는 대자 존재이면서 즉자 존재이다. "
제23장 바이런
[P. 945] 그는 그대들처럼 살거나 그대들처럼 죽으려하지, 죽어서 자신의 재를 그대들의 것과 섞이게 할 것이네.
[P. 947]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견딜수 있을까!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긍지를 낮추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으로 판단해야 한다.”
제24장 쇼펜하우어
[P. 952] 쇼펜하우어는 어느 면에서 보든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염세주의 길을 택했지만, 다른 철학자들은 대부분 어떤 의미로든 낙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P. 959] 쇼펜하우어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두 가지로 압축하면, 하나는 염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가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학설이다.
[P. 960] 의지가 우월하다는 학설은 염세주의보다 더욱 중요하다.
의지의 학설이 염세주의와 필연적인 논리적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쇼펜하우어 이후에 염세주의를 주장한 사상가들은 염세주의 안에서 낙관주의의 기반을 찾ㅇ내기도 했다. 의지가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학설은 여러 현대 v=철학자들이 주장했는데 그 가운데 니체 베르그송 제임스와 듀이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 학설은 전문 철학자 사회 밖에서 더 유행했다. 의지의 규모가 커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지식의 지위는 더 낮아졌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기질에 나타난 가장 특출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제25장 니체
[P. 961] 니체는 여러 면에서 특히 학설의 일관성과 정합성의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뛰어났다.
[P. 968]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마음을 길들이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잘못이다. 야수는 야생에서는 광채를 내지만, 길들면 빛을 잃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교제한 죄수들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 보다 더 우월한 까닭은 그들 자신을 더 존중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정신착란주기라 부른 회개와 속죄를 혐오한다.
[P. 968] “우리는 그리스도교 안의 무엇과 싸우는가? 그리스도교는 강자의 정신을 약화하여 권태롭고 허약해진 순간을 이용해 자랑스러운 확신을 불안과 양심의 가책으로 바꿈으로써 파괴하려 한다. 또 고귀한 본능을 약화하여 그러한 본능의 힘, 즉 힘에의 의지가 본래의 성질과 달리 내부로 항할 때까지, 강자가 과도한 자기 비하와 가지 희생으로 소멸할 때 까지 병들게 하는 방법을 안다. 섬뜩한 소멸의 길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는 파스칼이다.”
[P. 969] 니체가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비난한 까닭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하고 용감하다면 나는 내가 당연히 느낀 경멸감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야 한다.
[P. 970]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이 땅에 공포를 불러오리라.
[P. 975-976] 부처는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고통을 사랑하고 삶에 대한 사랑을 부끄럽게 여기는 당신이야 그럴테지요 그러나 아무도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행복할 수 없을 테지만 정말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해질 겁니다”
제26장 공리주의자들
[P.979] 벤담은 선이란 쾌락이거나 행복이고 악은 고통이라고 주장하는데, 쾌락과 행복을 동의어로 사용했다.
[P. 980]민법의 목표는 네가지로서 생존, 부, 안전, 평등이다
제27장 카를 마르크스
[P. 990]철학자들은 ‘진리’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다를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리는 어떤점에서 누구나 받아들여야 하는 목적이다. 모든 철학이 이성이 결여된 편견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느 누구도 철학 연구에 관여하지 않았을 법하다.
제28장 베르그송
[P.1000] 최고 상태에 이른 본능을 직관 intuition이라 부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직관은 사심없이 자기를 의식하고 대상을 반성하면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본능을 의미한다. ”
지성은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생명 없는 고체를 주요 대상으로 삼아서” 비연속적이고 활동력이 없는 대상이라는 명석한 관념을 형성할 따름이다.
[P. 1000] “지성의 특징은 자연 그대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P. 1001] 물질과 지성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개념은 독창성이 돋보이며 보충해서 이해할만한 가치가 있다.
[P. 1001] 지성이 공간과 관계하듯이 본능이나 직관은 시간과 관계한다.
[P. 1001] "생명체가 존재하는 어디에나, 어딘가에서 작동되기 시작한, 생명의 시간을 기록하는 자동 기록기가 있게 마련이다.
[P. 1003] " 기억은 원리상 물질과 완전히 독립된 힘이라고 해야 한다, 그때 정신이 실재라면 우리가 정신과 경험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지점도 여기 기억 현상이다.“
[P. 1008] 베르그송이 이 세상에 실현되기를 소망한 선은 활동을 위한 활동이다.
제29장 윌리엄 제임스
[P. 1009] 윌리엄 제임스는 ‘근본 경험주의’라는 학설을 창안했고 ‘실용주의’나 ‘도구주의’로 불리는 이론을 주창한 세 주역 가운데 한사람이다
[P. 1009] 윌리엄 제임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철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하나는 과학적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심이었다. 과학적 측면에서 의학 연구는 제임스 사상을 유물론적인 경향으로 기울게 했지만, 종교적 장서가 그러한 경향을 저지했다. 그의 종교적 감정은 개신교의 특색이 짙었고, 민주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인간적인 친절이 우러나는 온정으로 가득했다.
[P. 1010] 제임스의 근본 경험주의 학설은 1904년 [‘의식’은 존재하는가?] 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공표되었다.
이 논문의 주요 목적은 주제와 객체 관계가 근본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부정하는데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학자들은 ‘인식활동 knowing'이라는 일종의 사건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한 존재, 즉 인식하는 자 혹은 주체가 다른 존재, 즉 인식되는 사물 혹은 객체를 의식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 의식이 존재하느냐 라는 문제는 제임스 이후 100이 지난 지금도 자주 제기되는 문제인데 아직도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뇌 속의 시냅스의 결합으로 우연히 정신이 만들어 질것이라는 상향식 접근과 물체와 분리되어 정신이 따로 존재하며 그 정신이 인간의 모든 것을 관장해 간다는 하향식, 어느쪽이든 물질 속에 정신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은 계속 승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P. 1010] 인식하는 자는 정신 혹은 영혼으로 생각되었고, 인식되는 객체는 물체, 영원한 본질, 타인의 정신이고 자기 의;식의 경우에는 인식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 ‘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이후 인식의 문제가 정신의 존재증명의 단서로 생각되어왔다. 책을 보고 있는 나를 내가 보고 있고, 그런 나를 나는 인식한다. 라는 자기의식이 정신의 존재라는 키라면, 사진을 찍는 카메라가 카메라 스스로를 찍고 있을때 자기 의식과 유사한 형태를 보게되는 것이고 이 피드백의 무한 반복에 따라 기계는 자의식을 가질수 있다는 논지는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것이 현대 철학과 인식론이 인지의 문제와 결합되는 하나의 유형이다.
[P. 1010]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은 철학에 포함된 내용은 거의 대부분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 관조적 이상, 그리고 전통적인 ‘진리’개념은 모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기본적인 것이 아니라면 근본적으로 재고해보아야 한다,
➜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그 정신의 발현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강아지는 의식이 있는가? 그러면 쥐는 의식이 있는가? 혹은 잠자리는 어떤가? 지렁이는 아메바는 삼엽충에게는 의식이 있는가? 인간만이 의식이 있다는 주장은 일부 똑똑해 보이는 동물에게서 혼란을 가져오게 되고 우리는 의식의 수준을 낮추고 낮춰서 아메바까지 물어볼 수 있다
[P. 1011]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란 “실재하지 않는 것의 이름이며 제일 원리들 가운데 하나가 될 정당한 자격이 없다. 의식에 여전히 집착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메아리, 철학의 대기 중에서 사라져가는 '영혼'이 뒤에 남긴 희미한 풍설에 집착하는 셈이다”
➜의식이 실재하지 않는 것의 이름이라면 우리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 주체는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P. 1011]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물체와 대조를 이루며 물체에 대한 사유가 만들어지는 원래부터 있던 재료 혹은 존재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사유가 인식의 기능을 수행하며 그 기능을 ‘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가 부정하는 견해는 조잡하게 표현하면 의식이란 하나의 ‘사물’이라는 견해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존재가 구성되는 근본 재료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근본 재료를 ‘순수경험’이라 부르며, 인식활동은 순수 경험의 두 부분 사이에 맺어지는 특별한 관계라고 말한다. 주체와 객체 관계는 파생된 관계로서 “내 생각에 경험은 그러한 내적 이중 관계를 갖지 않는다”. 주어진 경험의 나뉘지 않는 부분은 한 맥락에서는 인식하는 자이고 다른 맥락에서는 인식되는 무엇이다.
[P. 1011] 그는 ‘순수 경험’을 나중에 하게 될 반성의 재료를 제공하는 생명의 직접적 흐름으로 정의한다.
[P. 1012] ‘경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경험된 사건과 경험되지 않는 사건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리는 비를 보거나 느끼면 비는 경험되지만 생명체가 살지 않는 사막에 내리는 니븝 경험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생명이 없는 곳에는 경험도 없다는 첫째 논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경험은 생명과 외연이 같지 않다. 내게는 알아채지 못한 많은 일이 일어나며, 그러한 일이 경험된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분명히 나는 기억나는 것을 경험 하지만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일들이 내가 지금도 가진 습관을 형성했을지도 모른다.
[P. 1013] <믿으려는 의지>에서 제임스는 우리가 실제 삶속에서 적합한 이론적 근거가 없는 경우에도 어쩔 수 없이 결정하게 되는 일이 흔한 까닭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조차도 하나의 결정이가 때문이다.
[P. 1013] 진실을 말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는 동등한 두 가지 계율 ‘진리를 믿으라’와 ‘오류를 피하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 진리를 믿으라와 오류를 피하라 우리는 모든 것에서 이두명령을 늘 생각하
[P. 1015] “관념은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유익하기만 하면 ‘참’이다.” 진리는 선(좋음)의 한종류이지 독립적인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 진리는 관념에서 생기며, 사건들에 의해 참으로 만들어진다.
[P. 1015] “진리는 긴 안목과 전체 과장에서 볼 때 사고방식의 방편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달리 말하면 “진리를 추구해야 할 의무는 보수를 지금 해야 할 일반적인 의무의 일부이다.”
[P. 1015]“ 진리는 긴 안목과 전체 과정에서 볼 때 사고방식의 방편일 뿐”
[P. 1016] 제임스의 학설은 믿음은 그것의 결과가 좋다면 ‘참’이라고 가정한다.
[P. 1016] 우리는 (a) 선이 무엇인지, (b) 이런 저런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든 ‘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앞에서 말한 (a)와 (b)를 알아야 하는 까닭은 믿음의 결과가 선하다고 결정한 후에만 ‘참’이라고 말할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다.
[P. 1016] 당신은 먼저 콜럼버스가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믿음의 결과가 무엇이며, 그 결과가 콜럼버스 가 1491년이나 1493년에 항해했다는 믿음의 결과와 어떻게 다른지 탐구해야 한다.
[P. 1017] "만약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만족스러운 효과를 낸다면, 그 가설은 참이다. "
[P. 1017] 신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면 그 믿음은 ‘참’이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철학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숭배의 대상을 바라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그는 “만약 내가 신을 믿는다면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기를 바란다. 또 신을 믿을 때 루스벨트나 처칠이나 히틀러의 존제를 믿듯이 신을 믿는다, 그에게 신은 현실적인 존재이지 좋은 결과를 내는 한갖 인간적인 관념은 아니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지 제임스가 제안한 알맹이가 빠진 대체믿음이 아니다.
제30장 존 듀이
[P. 1019] 존듀이는 1859년에 태어났으며, 일반적으로 미국을 이끄는 살아있는 철학자로서 인정받는 인물이다.
[P. 1023]듀이는 탐구를 진리나 지식이 아니라 논리의 핵심으로 삼는다.
“탐구는 미정의 상황을 원래 상황의 구성요소들이 통일된 전체가 되도록 특징과 관계가 결정된 상황으로 변형시키는 통제된 과정이다.”
제31장 논리 분석철학
[P. 1030] 피타고라스 시대 이후 철학사에서는 주로 수학에서 영감을 받아 사유를 전개한 철학자와 경험과학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은 철학자 사이에 대립이 존재했다.
[P.1032] 프레게의 연구에서 산수, 그리고 순수 수학은 일반적으로 연역 논리의 연장일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P. 1035]물리학이 물질을 덜 물질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사이에 심리학은 정신을 덜 정신적인 대상으로 만들었다.
[P. 1035]만약 '지각'이라 불러도 좋은 어떤 현상이 존재한다면, 지각은 어느정도 지각된 대상의 결과일 수밖에 없으며, 지각이 지각 대상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라면 대상과 다소라도 유사할 수 밖에 없다.“
[P.1036] 객관적인 철학 방법을 실천에 옮기면서 획득한, 주의깊게 진실을 말하는 습관은 인간 활동의 전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객관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어느 곳에서나 광신행위는 감소하고 공감 능력과 서로 이해하는 능력은 증가하게 될 것이다. 철학이 독단적인 일부 주장을 포기한다고 해서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까지 멈추지는 않는다.
3. 내가 저자라면
(1) 1독 때의 리뷰
일단 이 책은 그 두께에서 우리를 압도하였다. 철학과 대학원생들이 한 페이지 가지고 두세시간 토의를 거뜬히 해낼만한 주옥같은 글들을 러셀은 1038페이지에 거쳐 계속 쏟아내고 있었다. 러셀의 지성에 놀라고, 나의 무지에 놀라고, 러셀의 비판정신에 감탄하고 나의 의식없음에 절망하며 읽어야 했다.
저자의 방식과 장점
러셀은 한없는 지식욕구와 비판정신을 가진 학자였던 것 같다. 일반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춘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했고, 이런 점에 반하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사회현실은 과감히 비판하는 학자라고 느껴졌다. 객관적인 진리 추구, 어떤 권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회의주의와 비판주의, 무신론, 이성을 중요시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참여, 과학의 가치를 믿는 진보주의, 그리고 이런 사상을 복합적으로 담을 수 있는 논리성과 통찰력 등을 이 책 ‘서양철학사’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러셀은 철학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하는 방법의 측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같았고, 러셀에게 철학은 진리 추구의 열정을 품고 기존의 모든 지식을 비판하는 활동이었으며, 분석적 방법을 통해 명료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여정이었다는 역자의 평가가 정말 맞는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러셀은 철학사 전체를 꿰뚫으면서 각 철학적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비판함으로써 독창적인 철학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특히 사상사를 정치 사회적인 변화 과정과 연관 지어 바라볼 줄 아는 시대정신을 가지고 철학사를 서술했다는 점이 이 책을 쓴 러셀의 탁월한 시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한 그는 수학자이자 철학자라고 하는데 글을 풀어 나가는 문학적 재능이 상당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덕분에 노벨문학상도 받았겠지만, 곳곳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탁월한 표현방식에 자주 자주 탄복했다.
내 생각을 조금 추가하자면
솔직히 내 능력으로 러셀을 비판하지 못하겠지만, 억지로 이 책의 부족한 점을 나열해야 한다면 일단 한권으로 된 것을 고대철학, 카톨릭철학, 근현대철학 세권으로 나누는 것이 보기 편했을 것 같다는 점을 먼저 들고 싶다. 물론 합본이 주는 보관과 참고할 때의 편리성 등은 있지만, 두꺼운 한권이 주는 지루함과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는 심리적 요인등을 감안할 때 차라리 세권으로 나눠져 있었더라면 지루함은 줄고 긴장감은 더해지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러셀의 방식에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철학자와 시대위주로 정리된 목차를 ‘철학의 분야’별로 재편집하고, 그것을 다시 시대 순으로 정리했다면 철학의 문외한들에게 좋은 이해력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러셀이라면 가능했을 것 같다.
두 번째는 각 챕터의 말미에 각 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하여 박스 형태로 한 페이지 정도 씩 요약해주는 노고를 해주셨다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도 매번 벅찼는데, 수십 챕터를 전부 이해하고 논평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몇 달 준비해야 할 작업이라 여겨졌다.
이 책에서 러셀은 철학자들을 거의 전부 다 비판했는데, 가문 대대로 영광을 누려온 영국의 귀족출신으로서의 ‘영국철학’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독일 철학과 역사에 대해 심한 폄하를 하게 만든게 아닌가하는 의혹이 든다. 그의 비판 의식은 정확했으나 그 비판을 가져온 심리적 원인은 분석해볼만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역자가 다른 철학자들의 비평과 러셀의 비평을 비교 분석하여 챕터 말미에 추가하였다면 그것 역시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물론 그 작업만으로 ‘러셀 비평’연구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정도가 만들어지겠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두께 만큼이나 귀중한 지식을 내게 남겨줬다. 책상 위 손이 닿은 곳에 놓고 두고 두고 참고하며 계속 읽고 싶은 책이다.
(2) 2 독의 리뷰 추가
총3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고대 철학, 가톨릭 철학, 근현대 철학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 고대 철학은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에서 그리스 문명의 발흥, 밀레토스 학파,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테네의 문화, 아낙사고라스, 원자론자들, 프로타고라스등에대해 다루고 있다.
제2부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소크라테스, 스파르타의 영향, 플라톤 사상의 근원, 플라톤의 이상향, 이상 이론,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 플라톤의 우주론, 플라톤의 지식과 지각,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초기 그리스 수학과 천문학
등이 나온다.
제3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의 부분으로 헬레니즘 세계, 키니코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철학, 로마 제국의 문화, 플로티노스등이 다뤄지고 있다.
제2권 가톨릭 철학은 제1부 교부 철학에서 유대교의 발전,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세 박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 5세기와 6세기, 성 베네딕투스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 다뤼지고 있다. 제2부 스콜라 철학에서는 암흑기의 교황 체제,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사상, 11세기 교회 개혁, 이슬람교 문화와 철학, 12세기, 13세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스콜라 철학자들, 교황 체제의 쇠락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3권 근현대 철학은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까지에서는 일반적 특징,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과학의 발흥, 프랜시스 베이컨, 홉스의 리바이어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철학적 자유주의, 로크의 인식론, 로크의 정치철학, 로크의 영향, 버클리, 흄등을 다룬다.
마지막 제2부에서는 루소에서 현대까지 다루고 있는데 낭만주의 운동, 루소, 칸트, 19세기 사상의 흐름, 헤겔, 바이런, 쇼펜하우어, 니체, 공리주의자들, 카를 마르크스,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논리 분석철학 등이 나온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전체 리뷰 하는것은 책을 20독정도 하고 난후에나 가능할 듯하다.
두 번째 읽는 것이 더 부담되고 힘들었다. 인도주의적 이상과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러셀의 넓은 사상을 따라가며 다시 읽고 그것을 생각하는 작업은 고통을 동반했다.
이 책에서 러셀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분석철학까지 철학사를 짚어가며 정치 경제 등 역사의 흐름과 함께 철학사상을 연구분석 하였다. 서양철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철학자의 주요 사상을 그가 살아가던 사회, 정치적 배경과 연결하여 러셀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썼다. 러셀은 철학이 사회 공동체의 삶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며, 철학자가 사회 문화적 환경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자는 서문에서 러셀을 “비판은 거침없고 신랄하며 어떤 부분은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시인한다. 비판적인 자세, 명료성, 솔직함이 이 책의 미덕이라”고 말한다.
명료성이 있음은 그가 이해하고 썼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의 깊이가 오묘해서 이해되지 않는게 아니라 내용이 모호해서 이해 안되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 글 쓰는 자는 항상 자신이 명확히 알고 경험한 것을 독자에게 전달해야 할 것인데 그런 점에서 러셀의 방식은 그의 이해의 정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학파와 의견의 대립을 뛰어넘어 최고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소중한 책이다.”
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책은 평생 소장하며 들춰볼만한 책이다. 사상의 깊이는 사람을 변하게 할 수도 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보면서 이 정도의 깊이와 넓이를 지닌 동양철학사를 편찬하는 저자가 왜 없는지 안타까웠다. 동양사상을 집대성한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만한 사상의 깊이를 가진 책이 나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동양철학사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