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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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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8일 01시 27분 등록
. 저자 소개
 

저자 고병권 1971년 전담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서유럽에서 근대 화폐구성체의 형성』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다.

저서로는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등이 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등을 옮겼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1900.8.25]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니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나움부르크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음악과 시를 좋아했고 이미 14세 때에 「나의 인생에서」라는 자전적 소품을 썼을 만큼 조숙했던 니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권위주의적인 모든것에 저항적 태도를 보였고, 학교 수업 과정을 우습게 보고 그리스 철학 서적을 주로 탐독했다.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게 되지만,처음에는 공부보다는 술과 여자 등 쾌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금 엄숙하고 고독한 생활로 돌아갔다. 본 대학 문헌학 교수였던 유명한 처칠 교수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가자 니체 역시 친구 로데오와 함께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 라이프찌히 대학 시절에 그는 헌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 읽고서 충격적인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그가 평소 그 음악을 좋아해 왔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후기 낭만주의의 두 대표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은 청년 니체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186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이 바젤 대학 재임시에 그는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그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879년 그의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10년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고, 그 이후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약 10년간을 이탈리아 해안가나 스위스 산중의 요양지를 전전하면서 병과 고독과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중에서 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루 살로메와 사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5개월만에 헤어졌다.

 

병과 고독과 싸우는 이런 생활 중에서도, 점점 더 원숙해져 가는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진행성 뇌마비의 발병에 의해 정신 착란에 빠질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무르익은 사상들을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 쉴새없이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889 1월 튀린에서 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900년 8월 25, 바이마르 정신 병원에서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고 가장 친했던 누이 엘리자베드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니체(nietzsche)/약력 및 소개

 

1844 : 10 15. 독일의 작센 주 뤼첸 근교 레켄 마을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849 : 부친 뇌연화증으로 사망

1858 : 나움부르크 근교의 슐포르터 고등학교 재학

1861 : <트리스탄>의 피아노 발췌곡이 발표되어 바그너를 알게 된

          이 무렵부터 세익스피어, 괴테, 휠덜린 등을 애독

1864 : 슐포르터 졸업. 10월 본대학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

1865 : 10월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김. 쇼펜하우워 철학을 알게 되어 탐독

1867 : 나움부르크 야전포병대 기병대대에 입대

1868 : 10월 제대. 대학에 복학. 11 8일 라이프찌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됨

1869 :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원외교수로 강의

1870 : 바젤 대학의 정교수가 됨

1872 : <비극의 탄생> 출판

1873 : 두통으로 시달림. <반시대적 고찰>

           1 (신앙 고백자로서의 저술가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 라우스) 출판.

          단편 <그리스인의 비극 시대의 철학>이 쓰여지다.

1874 : <반시대적 고찰> 2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

          3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워) 출판

1876 : <반시대적 고찰> 4(바이로이트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 출판.

          병이 악화 되어 10월 대학을 휴직

1878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출판

1879 : 중병. 바젤대학 교직 사임

1880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 하권에 해당하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 출판

1888 :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코펜대학에서 니체에 대해 강의 <바그너의 경우>출판,

         <디오니소스 찬가>완성, <우상의 황혼>집필, <반기독교인>완성. 연말부터

         정신착락의 증후가 나타남 

1889 : 1. 예나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

1897 : 어머니 사망. 누이동생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

1900 : 8 25일 바이마르에서 56세로 사망. 고향인 뢰켄에 안장됨



.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책머리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 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로 답할 것이다. 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3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4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숭고한 현미경을 가진 신처럼 선분이나 미세한 조각들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또한 얼음 덮인 고산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사람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4

 

아마도 니체는 모든 개인은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헤겔의 고상한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예외자’, ‘탈주자’, ‘위험 인물’, 무엇보다 미래의 아들로 간주한다. 모든 철학자들이 시대의 아들로 규정된다면 그 어떤 사상도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Unzeit)’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5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5

 

창조와 생성 그리고 변신이 그를 오해하게 만든다. 니체를 하나의 체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체계 바깥에서 웃고 있는 또 다른 니체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니체의 허물이나 가면들뿐이다. 문장들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것은 모호함 때문도 아니고 진정성의 결핍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과잉넘침때문이다.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6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7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사피엔스(sapiens)’라는 말의 어원 그대로 맛을 보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얼마나 맛없는 음식인지를 별도로 강의할 필요가 없다. 진리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8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 9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천 개의 젖가슴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19

 

5.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마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19

 

6. 천 개의 화살

아포리즘들은 다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GD; 21~26)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7.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JGB; 64)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20

 

1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철학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그러나 철학자가 철학의 가치를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철학자는 신의 가치를 묻는 신앙인보다도 훨씬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그는 기도와 신앙이라는 방패도 없이 제 자신의 질문과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신이 도달하지 못할 세계가 없는 것처럼 철학은 자신이 사유하지 못할 영토를 남겨두지 않는다. 26

 

진정한 철학이라면 자신의 체계를 벗어나는 사물이나 사건을 존재하게 놔두지 않는다. 헤결 역시 자연으로 도피하는 루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 정신의 훈풍이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다.” 26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모험가들은 어떤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27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27

 

니체는 온도나 습도 같은 기후 조건, 차나 포도주 같은 음식물을 대하듯 철학하는 일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평가한다. 28

 

철학에 대한 진단.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한다. 철학에 청진기(소리굽쇠)’를 대는 일”(GD, TJANS, 20)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FW, 2판 서문, 36) 28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29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this world)’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real world)’,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29

 

서구 철학의 거대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를 기소했던 그리스 법정은 그를 땅 아래와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는 기이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기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 세계에서 진리를 찾지 않고, 그 자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설교자라는 니체의 공격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정의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 역시 영혼은 죽음을 통해서만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영혼은 육체의 제약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이다. 30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M; 67)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30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GT; 30)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1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존재의 피안에 하나의 세계가 날조되었고 그것이 참된 세계로 불리게 되었다.”(WM; 35) 그리고 이 참된 세계는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GD; 41~42)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 자신의 초라함을 알라!’ 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33

 

그리스 신화 속에서 죄가 들끓는 곳은 이 세계가 아니라 신들의 세계다. 35

 

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자들이 / 소리 높여 신들을 책망하다니 / 괴이한 일이로다! / 오직 우리에게서만 악이 빚어진다고 / 그들은 말하네 ……(GM; 101) 36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신성모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니체는 신성모독이 일종의 위엄을 창안하려는 그리스인들의 욕구에서 나왔으며, 신성모독을 통해 그들의 고귀함을 구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FW; 192) 36

 

그리스인들은 삶에 죄가 있다는 죽음의 설교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삶이야말로 무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삶의 고통을 발견하며, 그것의 공포와 전율을 경험한다. 다만 그들은 그 비극성이 죄로부터 기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36

 

그렇다면 기독교인들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들이라고 부른다.그들은 소인족처럼 삶의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GT; 46) 그리스인들은 실레노스의 지혜를 과감하게 바꾼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37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FW; 341)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고통과 싸우기 위해 꿈과 환영까지도 무기로 이용했다.(GT;48, DW; 24) (……) 그리스의 비극에는 삶의 종말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그리스인들의 전략이 들어 있다. 37

 

아이스킬로스에게는 신들조차 운명의 여신인 모이라(Moira)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들도 인간처럼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38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GT; 76) 38

 

삶의 비극성은 삶에서 오지 않고 죽음에서 온다. 삶의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죽음이 주는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관계한다. ‘죽음을 위한 준비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죽음은 철학과 종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지도 모른다.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39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GT; 49)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40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변증법적 운동을 빌지 않아도 디오니소스는 개별성의 한계를 쉽게 넘어설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저기로 뛰어다니고 춤추는 존재였다. (……)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GT; 27)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41

 

발라디에(Valadier)는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글에서 두 죽음이 갖는 의미의 차이를 잘 포착했다. 디오니소스가 삶을 찬미하고 그리스도가 죽음을 찬미했다는 식으로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차이는 순교한 것에 있지 않다.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2

 

독배를 들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 크리토! 나는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를 주어야 하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지키려 했다면 침묵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삶에 대한 자신의 복수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유언의 키워드는 아스클레피우스이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의술의 신이다. 그에게 닭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생이라는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런 것이다. “, 크리토! 인생은 질병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바로 죽음을 의사로 받아들였으므로(GD; 33) 43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44

 

니체에 따르면 원래 비극은 합창이었지, 연극이 아니었다.”(GT; 70) 44

 

철학자들의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그들의 사유 공간은 극장이며 그들이 세운 체계는 무대이고 개념들은 장치들이다. 45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45

 

그렇다면 철학은 왜 극장을 선호할까?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는 정신분석학에서 이 질문을 던졌다. 생산의 터전, 작업장, 공장이 있던 곳에 왜 하나의 극장 전체를 세웠는가?” 극장은 숨은 구조와 관계들을 구상화하면서 동시에 구조 자체를 등장시킬 수 있어 구조의 보편성을 드러내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극장이야말로 객관적 표상들을 되찾고 해석하는 데 편리한 모델인 것이다. 47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극장에 있어선 안된다. 극장에서 사람은 집단으로만 정직하다……극장에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에 놓고 간다. 스스로의 발언권과 선택권을 방기한다. 자기의취미도 버린다……. 가장 개별적인 양심도 최대다수로 평등화하려는 마력에 굴복한다.”(FW;339, NCW; 204) 47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49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 50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Sittlichkeit de Sitte)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M; 24)……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없게 된다. 51

 

역사는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트려왔다. 니체는 그것이 습속의 윤리를 뚫고, 무서운 호위자들이 만들어 낸 대사건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무서운 호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광기.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M; 27~29) 51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FW; 128)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2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FW; 301) 52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unzeit)’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53

 

현재가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가 상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가 미래를 건축하고자 할 때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U; 152) 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54

 

니체의 법정은 질서나 평화를 선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예고한다. 비판은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재판을 받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다.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니체가 기독교에 대한 심리를 마치고 심판하는 장면을 보자.(AC; 194) 심판은 죄를 추궁하는 장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그가 기독교는 유죄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심판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56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GD; 30) 57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7

 

사랑을 희생과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과 바그너가 공유하고 있는 사랑관이다. 그러나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 58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FW; 37)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FW; 361)이다. 59

 

삶을 바꿔 보라!’-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59

 

놀랍게도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해되어 왔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아마 그 자신에게도 사실 구세주의 삶에는 어떤 비난이나 원한도 없었으며,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줄 생각도 없었고, 그것을 초래할 만한 행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율법학자들과 대결했다. 그가 전하려 했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AC’ 154)

 

2.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가 가치의 가치라고 말했을 때, 첫 번째의 가치와 두 번째의 가치는 전혀 다른 지위를 갖는다. 두 번째 항은 첫 번째 항의 생존방식,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가치가 표현하고 있는 기반에 대한 물음이다. 니체의 질문은 도덕적 열매가 성장한 토양”(WM; 176)을 겨냥하고 있다. 61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이다.(GM; 32)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JGB; 109)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의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JGB; 108)이다. 도덕학자들은 진리를 다루는 철학자들과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열망. 그러나 그 열망은 철학자들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도덕학자들의 열망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어떤 절박함이 느껴진다. 이는 도덕 자체가 가치 판단 행위를 하는 영역이며, 칸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직접적인 실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악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이 오류인가라는 질문보다 훨씬 큰 위험성을 담고 있다. 때문에 이익을 다투는 어떤 전쟁도 가치들의 전쟁에 비한다면 사소한 것이 된다. 62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63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JGB; 119) 63

 

도덕이 지나칠 정도의 일반화를 추구하는 데는 가치들 간의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63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JGB; 108) 63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Z; 215) 66

 

계보학자는 반듯해 보이는 평면의 굴곡들을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평면에 주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계보학자는 쟁기를 든 농부나 땅을 파 내려가는 광부를 닮았다. 기원이라는 심층을 향해 파 내려가서 그들이 확인하는 것은 이질성과 다양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층은 표면이 됨으로써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광부는 심층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표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표면을 심층으로 환원하는 역사철학자들과 달리 니체에게 사건의 의미는 여전히 표면에서만 생겨난다. 계보학자에게는 땅 밑이나 하늘 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67

 

니체는 도덕을 화폐위조에 비교하곤 했다.(WM; 215.237) 68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 위조 행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가 가치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9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69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안에도 가치를 심어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본다. 69

 

문명을 자연의 야만성에 대한 승리로 보았던 볼테르와 문명을 인간을 타락시킨 악으로 보았던 루소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은 선인가, 악인가?”(WM; 83) 볼테르든 루소든 니체가 볼 때 문제는 도덕화 자체다. “인간(과 자연)의 도덕화, 그것이 바로 문제다.”(WM; 83) 70

 

19세기가 18세기보다 조촐하나마 조금이라도 나아간 것이 있다면 자연의 비도덕성을 승인한 것이다. 70

 

니체는 자신의 위대한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배타적 관계에 들어선 이유가 도덕의 가치 문제에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GM; 25) “진실로 모든 철학자들의 일치를 끌어낼 수 있는 근본적 원칙이나 명제를 꿈꾸었던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인 열망도 문제였지만,(JGB; 108) 결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그의 도덕관에서 묻어나는 병적인 징후였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가치중에서 니체가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하고 신성시해서 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73

 

그는 쇼펜하우어의 도덕에서 허무에로의 유혹, 종말의 발단, 죽음과 같은 정체, 회고적 권태, 삶을 부정하는 의지, 궁극적으로는 병의 우울한 징표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유럽 문화의 무서운 징조이기도 했다. 73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고귀한 자, 강한 자, 그리고 귀족, 주인 등으로 불리는 자들의 덕이 좋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를 어원학적으로 살펴본다.(GM; 34~38) 그는 도덕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들이 동일한 개념의 변형에서 기인함을 알아냈다고 말한다. ‘좋음(Gut/Good)’고귀한  혹은 귀족적인등의 개념을 기본으로  해서 변형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평민적인비속한저급한등의 개념이 나쁨(Bad)’의 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이때의 나쁨에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단지 귀족적인 것과 대비하여 소박한 것, 평민적인 것을 지칭했을 따름이다. 76

 

노예의 도덕은 귀족의 도덕과는 판이하다. 귀족이 좋음을 스스로 낳고, 그로부터 나쁨’ ‘열등함을 끌어낸 것과 달리, 노예는 외적인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GM; 43) 노예는 자신과 대립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먼저 (Evil)’이라고 규정하고 그와 상반되는 자기 자신을 (Good)’이라고 정의한다. 이리하여 좋은 것/나쁜 것(우등한 것/열등한 것)’이라는 (윤리적) 구분이 선한 것/악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로 바뀐다. 77

 

여기서 평가 양식상의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잇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77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GM; 53)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GM; 33, JGB; 205)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노예의 도덕에서 거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78

 

빚을 갚은 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양심의 가책과 이것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다. “형벌은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GM; 91) 그러나 원죄는 채무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3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 active)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 reactive)이다.84

 

들뢰즈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84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WM; 197) 84

 

의기양양한 노예들의 반란, 그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병약한 짐승들의 출현이다. 타자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시작한 변증법은 헤겔의 말처럼 주인에 대한 노예들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노예들은 모두 병들어 죽어가기를 갈망한다. 노예적 가치 평가의 변증법, 그 귀결점은 허무주의다. 87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Virtus)”이라고 말한다.(WM; 206) 르네상스적 덕(Virtue)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88~89

 

이 점에서 악이란 해로운 만남에 불과하며, 일종의 소화불량 같은 것이라고 본 스피노자야말로 탁월한 사상가였다. 스피노자를 통해서 우리는 도덕의 판단을 넘어선 곳에 덕에 대한 판단, 윤리적 판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에티카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가치 판단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사실상 니체가 말하는 좋음나쁨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 그의 선/악 개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90

 

니체는 『에티카(윤리학)』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잇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 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윤리)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WM; 191) 91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ㆍ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95

 

다시 말해서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제우스의 의중에 있기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95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차이를 봉합하거나 승인-보존하려 할 뿐 증식시키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96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다. 상호주관성은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 간다. 그는 이상적 조건의 담화 상황안에서는 서로를 접근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100

 

그렇다면 하버마스는 차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차이는 합의를 향한 출발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 진리를 가장한 초월적 가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택했다. 상호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의 운동은 서로의 공통성을 찾아 나선다. 의사소통은 변증법적 운동이며, 모든 변증법이 그렇듯 차이를 해소하는 운동이다. 하버마스는 본인이 헤겔의 계승자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102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perspektivismus).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크게 보기도 하고 어떤 것을 작게 보기도 한다. 마치 풍경화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은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니체는 스핑크스의 눈을 빌어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내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진리에게 있어 넘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은 왜 동일한가? 니체는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우선 니체는 객관성을 믿지 않고 있다.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베티에게서도 보았듯이 대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시한다. 주체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서의 사실들’ 104

 

우리의 습관화된 관찰은 여러 현상들을 단일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실들(Factum)이라고 부른다. 또 이 사실들과 다른 사실들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각각의 사실들을 고립시킨다.(MA-;438) 그러나 현상에 머물러서 있는 것은 오직 사실뿐을 외치는 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나는 말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WM;303) 104

 

대상을 절대화하는 것만큼이나 주체를 절대화하는 것도 허구이다. 104

 

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WM; 336~338) 물자체니 실재계니 하는 것이 하나의 허구라면 이제 현상계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허구가 된다. 주체를 포기하면 그 결과로 야기되는 객체도 포기하게 된다. “지속이나 자기 동등성, 존재 등은 이제 주체에도 객체에도 속하지 않게 된다. 그것들은 사건의 복합체이며……이는 사건의 템포에 있어서의 차이,……사실상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105

 

이로써 객관주의와 주관주의가 모두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며, 진리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상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 하나의 퍼스펙티브의 지위로 내려앉는다. 해석학자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헤르메스에게 요구하지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적 도구들 자체가 모두 날조되고 조작된 것이다. 고립된 대상도 없으며, 그것을 해석할 주체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계와 현상계도 하나의 허구이다. 106

 

니체가 그들을 허구적이라고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보존의 유용성이 문제가 된다면”(WM; 303) 얼마든지 허구조차 이용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니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때 표현되고 있는 의지. 왜 그들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전체화하려고 하는가? 왜 그들에게는 해석에 있어 진리성이 문제되는가?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혹은 동일화의 의지)를 발견한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WM; 313)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존을 위한 하나의 투시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WM; 177)이다. 바로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Wille zu einer Optik)’라고 부른다.(WM; 182)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GD;41)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고와 판단, 지각의 활동은 동등의 것으로 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WM; 311)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 107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Z; 117)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WM; 370)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점에서-필자)”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WM; 303)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의 미로가 아니겠는가. 세계의 카오스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징후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WM; 369) 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M; 256)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0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111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2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112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MA-; 154) 113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U; 151)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14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114

 

해석은 결코 단순한 소란 피우기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발명이며, 세계를 그 둘레로 회전시키는 것이다.”(Z; 173) 114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MA-; 229)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5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115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 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116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18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118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119

 

4.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 정치 체제가 어떤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안정성을 해칠 힘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 122

 

니체가 미래를 낳은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

 

니체식으로 보자면 순응주의 사회, 즉 사람들이 한 무리의 가축떼로 전락한 사회는 오래 지속되어온 서구의 형이상학과 기독교 그리고 그것이 습속화된 삶이 도달한 곳이다. 근대성이란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이다. 니체는 근대(현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은 붙은 소절에서 그것을 하나의 쇠퇴 형식이며 소멸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는데(GD; 97) 정치는 그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근대란 정치의 쇠퇴 형식’, 혹은 정치의 소멸이다. 124

 

허무주의 극복이 철학이나 도덕의 과제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과제일 수 있는 이유는 허무주의가 바로 정치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역의 위축’, ’정치의 쇠퇴야말로 근대사회를 표현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근대 정치 비판에서 비판이라는 말이 향하고 있는 곳은 정치라기보다는 정치의 상실, 즉 근대성이다. 125

 

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위대한 정치(great politics)”가 도래할 것이다.(JGB; 139) 125

 

공동의 가치, 공동의 선을 찾아 나서는 근대 정치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방식, 무엇인가(What is……)”라는 질문을 던진다. 무엇(What)’에 해당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보편적 가치들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어떤 것인가?(Which one……)”혹은 누구의 것인가?” 이처럼 추구하는 가치들의 질과 유형을 묻고, 그것의 소유자나 지지자를 묻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물음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26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Universal-Mensch)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U; 139)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singularity)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3

 

니체는 루소의 사상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사회주의 비판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 두 가지 특징이란 바로 인간의 자연적인 선한 본성을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 태도와 사회에 대한 원한의 정신이다. 136

 

민주주의는 여전히 신이 부여한 삶을 살면서 어떤 믿음도 갖지 못한 허무주의 운동의 종착역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허무주의 운동의 본질이 실현된 체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38

à 근대적 인간의 전형을 보여 준다.

 

니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GD; 97~98) 138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8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U; 156)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MA-; 82)……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Zahmung)’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Zuchtung)’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GD; 58) 142

 

그리스인들은 덕을 가치 평가를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했으므로 그것을 강자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소크라테스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은 이러한 비루투스(virutus)’의 의미를 바꾸어 오히려 베이툼(veritum)’, 금지된 것이라는 의미가 되게 했다. 이들에게 덕은 금지들의 모음이며, 그 위반에 대한 처벌들의 나열일 뿐이다. 149

 

5.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자연학+윤리학

 

클리나멘이란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그로부터 이탈해서 편위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편위는 원자들의 새로운 충돌과 거기서 기인하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낸다. 에피쿠로스는 편위야말로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차적 원리라고 생각했다. 원자의 운동을 낙하와 충돌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편위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162

 

에피쿠로스는 클리나멘이 원자의 일차적 성질이고 그로부터 다양한 사건들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자가 자신의 운동을 변형시킬 차이를 자신의 본질 안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그런데 클리나멘은 세계에 대한 기계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세계에 대한 역학적 계산을 이상한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이 방해하고 있다. 162~163

 

힘을 사유했던 니체 역시 자연과학적 법칙화에 반대했다. 니체에게 중력은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164

 

힘 안에 있는 내적 의지는 힘의 질을 규정한다. 내적 의지의 본질은 지배와 명령에 있다. 모든 힘은 자신의 방향과 작동방식을 다른 힘에 명령한다. 우리는 의지라는 표현에 속지 말아야 한다. 자연학 바깥에서 자연학을 표현해야 했던 에피쿠로스가 영혼이라는 달갑지 않은 용어를 써야 했던 것처럼, 니체의 의지라는 용어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 능력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힘 안에 내재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이다. 유기체들의 힘뿐만 아니라 만유인력조차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만유인력 법칙이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만유인력이 자연에 자신의 명령을 관철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65

 

귀족과 노예 혹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니체의 구분은 양적인 것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양이 얼마나 되어야 귀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끊임없이 대비시키는 것은 행위 양식이고, 가치에 대한 평가방식이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66

 

Macht’가 능력을 의미하고, ‘Wille’가 명령을 의미한다면, 권력의지(Wille zur Macht)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권력의지가 결합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171

 

6.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전에게는 반복이 기쁨일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180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시각은 자연 철학의 전통에서 두드러진다. 181

 

아낙시만드로스는 생성소멸로서 처벌되어야 할 불의라고 생각했다. 생성은 죄이며, 소멸은 처벌이다! 183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보았던 고통으로 일그러진 세계에 대해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성된 것의 처벌이 아니라 생성의 정당화를 보았다. ……나는 생성 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착각하지 말라! 너희가 생성과 소멸의 바다 한가운데 어디선가 확고한 육지를 본다면 그것은 너희의 짧은 시선 때문이다.”(PG; 125) 헤라클레이토스는 무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성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185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PG; 132) 185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영겁의 시간(Aeon)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PG; 135)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성의 세계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학자들처럼 동일한 것이 언제 출현할 지 계산하고 있는 게 아니다. 188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문제다. 191

 

그는 두 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Augenblick)’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Z; 199)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Z; 150~151) 196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unzeit)’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Z; 160) 197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200

 

『차라투스트라』에서 구토와 반대되는 것은 웃음이다. 웃음은 완전한 건강의 회복을 뜻한다. 201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주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U; 152) 205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208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209

 

7.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니체는 인간자연’, ‘인간세계사이에 끼어 있는 (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5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버맨쉬, Ubermensch)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216

 

니체는 인간의 유일하게 위대한 점은 곧 몰락할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하나의 과도(U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Z; 54)이다. 217

 

인간이 진화를 주장한다면 초인은 변신과 변용(Metamorphosis)을 주장한다. 변신이나 변용은 진화가 아니다. 인간적 경향의 발전이 초인을 가져올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제1부를 이 변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Z; 65) 218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EH; 296)을 알지 못한다. 그는 -(I-a)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Ja, 긍정)’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219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너는 해야만 한다(당위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219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WM; 549)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Z; 67) 219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낙타의 양적 강화가 결코 사자를 결과하지 않으며, 아이가 낙타와 사자의 통일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219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FW; 184)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221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더 이상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신앙)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AC; 154, 159)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Z; 119) 222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나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239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increscunt animi virescit volnere virtus)’(GD; 19) 247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0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EH 191) 252

 

2

 

베버-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베버는 근대인들이 주술로부터 벗어나 과학의 시대로 이행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탈주술화야말로 무덤에서 나온 또 다른 신의 주술이라는 것을 포착했던 것이다. 259

 

합리성이라고 불리는 이 탈주술화된 주술은 근대인의 모든 생활 질서 속에서 나타난다. 259

 

베버는 근대를 근대인들의 삶의 방식으로서 포착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근대 사회의 성격과 한계점이 근대인의 성격과 운명으로 나타난다. 260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PV; 105) 의지나 정신을 포기함으로써 본래의 의지나 정신이 원했던 것을 생산해내 주는 합리적인 시스템, 그것은 분명히 기계라 할 만하다.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놓은 계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266

 

오늘날 식이요법을 가리키는 단어인 다이어트(diet)’의 어원인 그리스의 ‘diaita’는 환자들에게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체액들의 균형을 맞추라는 의학적 처방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균형을 이루라는 정치적 처방이기도 했다. 269

 

베버는 신체를 계획된 것,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의 발생지를 수도원과 군대로 본다. 270

 

베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베버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변형이라면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코기토가 아니라 코기토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반성하는지그리고 누가 반성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284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두고 잇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적 거리(차이)만이 유의미했던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가치 생산자들에게 있어 거리는 다양화된다. 이전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된 가치들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하며, 내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한다. 287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인륜(Sittlichkeit)이라는 말은 막연한 보편성을 가정하는 도덕(Morality)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도덕이 현존하지 않는 것을 실현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를 부여하는 반면 인륜성은 실정성(positivity)을 갖는 것으로 그가 소속한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인 도덕적 의무를 갖게 하는 것이다. 실정성이란 헤겔이 말하듯이 사람들의 의식에 알려져 있고, 현실적인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정성이란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의 구체적인 의무들로 나타난다. 299~300

 

전쟁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공동체주의자들에게 문제는 병적 상태였다. 대중들의 소외,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 전통적 가치들의 해체와 같은 병리적 상태가 공동체주의자들이 인식하는 문제다. 서구의 자유주의는 가치들의 투쟁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주체들의 무능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309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가 중립적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형태의 삶을 장려하고 어떤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중립적일 수 없고 반드시 윤리적 국가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체주의자들의 강한 국가에 대한 요구가 나온다. 312

 

. 내가 저자라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삼중당 문고에서 출간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서시시 같던 문체만 기억에 남는다. 20여 년이 흘러 서점에서 다시 『차라투스트라』를 펴들었다. 과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니체에 대한 막연한 끌림, 그것이 실체가 있는 유혹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발을 담그기로 했다. 연초에 사서 꽂아 둔 고병권의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을 폈다. 광명이 찾아 왔다. 고병권의 차분하면서 편안한 안내를 받으며 니체 속으로 들어갈수록 말 그대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길을 예비한 그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비록 고병권의 프리즘을 빌려 니체를 봤지만 니체를 이해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해머로 두드려 맞은 느낌이 니체 고유의 힘 때문이라면 고병권은 헤르메스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한 셈이다.

 

니체는 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철학을 생각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에게 철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어떤 것이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니체는 철저하게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니체가 단박에 마음을 치고 들어온 이유는 인간 을 철학의 대상에서 철학의 주체로 원상복귀 시켰다는 데 있다. 그리스 시대 이후 이데아와 원죄와 진리는 베이스캠프에서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바라보듯이 있는 힘을 다해 도달해야 할 선험적 가치였다. “산이 저기 있으므로 오른다는 듯이 왜 올라야 하는지, 그 산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 필요도 없이 인간은 낙타와 같이 묵묵히 그 산을 올라야 했다.

 

니체는 바짝 조인 고삐를 풀고 자유를 주었다. 산을 오르든 바다를 향하든 당신에게 좋은 것이 진리라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진리보다 중요한 것은 인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다. 창조와 생성을 통해서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건강한 삶이다. 진리는 과거라는 벽돌을 미래를 건설하는 데 얼마나 창조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평가된다. 그는 권력을 획득하거나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는 의도로 보편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가축떼를 따르지 말고 삶에 주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역동성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니체는 신의 죽음이 복음이라고 말했다.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으로 신앙을 대체할 것이므로.

 

그의 철학은 혁명적이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뒤엎고 우리가 전진하지 못할 때 나열했던 수 많은 때문에들을 풀어 주었다. 일단 머리 속에 각인된 가치는 좋고 나쁨을 따져 제거하기가 어렵다. 다수가 따르는 가치라면, 더욱이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가치라면. 니체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싸웠다. 무모한 싸움으로 인해 그의 말년이 편안치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우리는 그의 정신적 유산을 향유하고 있다.

 

이 유산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 삶의 터전에서 과제 하나를 풀어야 한다. ‘Ubermensch(초인)로서 삶을 놀이로 만드는 법이 그것이다.

 

IP *.212.98.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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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11.08 09:17:49 *.30.254.21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인간은 행복마저도 배워야 하는 존재...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꼭 한번 오르고 싶은 산인데,
나중에 상현의 도움을 받아 오르면 훨씬 쉽겠는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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