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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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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8일 06시 51분 등록

[북리뷰 33] 이것이 영지주의다.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 스티븐 휠러

헝가리 출신으로 나치 대학살 때 고국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에서 영지주의와 칼 융의 심층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며, 특히 융의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를 접한 뒤 일생의 연구 과제를 정했다고 한다. 조셉 켐벨처럼 그의 연구 범위는 종교, 문화,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현재 미국에서 영지주의 교회의 사제로 일하고 있으며 로스엔젤레스의 Studies of the Gnostic Society의 책임자로 있다. 저서에 『The Gnostic Jung』및 『Jung and the Lost Gospels, Freedom: Alchemy for a Voluntary Society』등이 있다.

 

옮긴이 : 이재길

해남에서 태어나 한신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2008년 현재 아내와 함께 미국 메인 주에 살며 Bango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영성과 종교를 공부한다. 엮고 지은 책으로는 《성서 밖의 복음서》, 옮긴 책으로는 《이것이 영지주의다》《내 삶이 내 메시지다》 등이 있고,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의 영성을 일깨우고 북돋는 책들을 소개하고 옮기는 데 힘쓴다. 바른 번역가들의 모임인 바른 번역(www.translators.co.kr)의 회원이기도 하다.

2. 가슴에 무찔러드는 글귀들

 

책머리에

불과 50년 전만 해도, 최근의 영지주의 연구에서 보이는 대다수 주제들이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영지주의 연구를 반대한 주된 이유는 이랬다. 첫째, 영지주의는 오직 역사적 연구로만 접근할 수 있는 소멸된 종교 전통이다. 둘째, 영지주의는 우주적 염세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있으므로 진보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셋째, 영지주의는 이성이나 경험과는 무관한 사변적 공상 꾸러미에 지나지 않는다. p5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희망의 문턱을 지나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라는 책에서 “이른바 뉴 에이지New Age로 가장한 고대 영지주의적 사상으로의 회귀”를 인정한다.

... 수원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물은 더 맑아진다. 본래 모습 그대로 영지주의의 지혜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시도하려는 작업이다. p6

 

성서학계가 영지주의 문서의 가치를 깨달았는가 하면, 실존주의자와 현상학자는 영지주의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토대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영지주의 복권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위대한 심리학자 C.G. 융Jung(1875~1961)이었다. 융은 영지주의 경전 속에서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인식하고 영지주의 계시들의 환상적 기원과 내용이 믿을 만한 것임을 입증해 냈다. p7

 

융은 신화에 대한 자신의 상징적 해석이 곧 형이상학적 진리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히려 영지주의는 종교와 현대 심리학의 중간쯤 되는 특별한 지점-혼soul과 영spirit이 만나고 꿈과 환상vision이 해방의 경험으로 변화되는 곳-에 놓여 있다. 풍부한 상징과 은유를 지닌 영지주의 신화는 언제나 심리학적 의미와 형이상학적 의미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다. 종종 신화들은 끝없이 연결된 고리와 같아서, 심리학적 의미가 형이상학적 의미로 나아가고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통해 우리는 다시 개인의 심리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p8-9

 

1. 베일 너머에서 온 빛

 

오늘날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기원후 세 번째 천년의 문턱을 막 넘어선 지금 영지주의자들이 되돌아오고 있으며, 이제 그들은 과거와 달리 영지주의자들로서 머물 작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p18

 

영지주의자gnostic와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은 그리스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했으며, 보통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지식Knowledge'로 번역된다. 오랫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궁극적 실재나 관심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반反영지주의자-즉 불가지론자agnostic-로서 지내왔다. 이에 반해 영지주의자는 지식으로써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정의되곤 했다. p18

 

그리스 어에서는 이론적인 지식과 경험을 통해 직접 얻은 지식을 구별한다. 경험을 통해 직접 얻은 지식이 그노시스요, 이 그노시스를 얻거나 열망하는 사람이 바로 영지주의자이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유명한 저서 <영지주의 복음>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한 ‘그노시스’란 단어가 자기 지식은 물론 궁극적, 신적 실재들에 대한 지식까지도 아우르는 직관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노시스를 ‘통찰’로 번역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p19

 

E.R 도즈와 힐레스 퀴스펠, 게르숌 숄렘 같은 다수의 전문학자들은 영지주의가 원형 심리학과 종교 신비주의가 함께 어우러지는 심리의 경험에서 기인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신화의 심층심리학적 차원을 탐구한 C.G. 융, 칼 케레니, 미르치아 엘리아데, 조셉 캠벨과 같은 대학자들이 영지주의에 크게 공감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p19

 

이레네우스에서 오늘날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영지주의 비판자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바로 영지주의 가르침이 그노시스의 경험에서 직접 얻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p20

 

그노시스 경험

이 사람들은 인간이 처한 복잡하고 힘겨운 상황과 신성Divinity에 대해 알게 하는 해방의 지식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경험을 열망하고 또 직접 그런 경험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아는 자’들이 특별히 어떤 방법으로 이 같은 지식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다. p22

 

또 2,3세기 영지주의자들이 별들이 떠 있는 천구들을 지나 지구와 우주보다 훨씬 높은 영역으로 올라가려는, 그렇게 해서 신성한 빛이 충만해 있는 참된 영적 본향으로 의식적으로 복귀하는데-복귀는 영지주의에서 구원을 의미한다-비상한 관심을 보인 것에 깊은 관심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천상으로의 비상’은 영지주의자들이 열망하던 지식, 곧 인간을 해방시키고 신성하게 만드는 지식에대한 핵심 은유일 것이다. p22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믿는 거’이라고 지적했다. 수많은 신자들에게 믿음이란 다른 신자들-그들 중 어느 누구도 믿고 있는 대상에 대해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한테서 간접으로 전해들은 신앙일 뿐이다. p23

 

믿음은 지시하고는 그양상이 전혀 다르다. 따라서 전통 종교가 영지주의와 왜 그렇게 다른지 이해하기란 아주 쉽다. 영지주의 안에도 피스티스pistis라고 불리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 믿음의 형태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을 해방으로 이끄는 내부의 지식을 스스로 경험한다고 느끼는 변치 않는 믿음인 것이다. 영지주의의 신적 존재로서 여성의 형상을 한 소피아Sophia는 피스티스Pistis(믿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빛을 바라보는 신실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p23

 

블룸은 그노시스 경험을 다른 경험과 구별시키는 주된 특징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든다. 1)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계시는 하느님, 즉 그릇된 창조와 무관한 하느님에 대해 알게 해준다. 2) 인간의 깊은 본성이 창조(혹은 타락)의 일부가 아니라 과거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충만한 존재, 곧 하느님의 일부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이 하느님은 세상이 숭배하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인간적이며 또한 신적이다. p24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하느님은 ..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그노시스)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글쓰기 방식이 영지주의자들의 시적이고 환상적인 글쓰기 방식과 흡사하다는 데 놀랄 것이다. p24

 

그노시스와 영지주의

영지주의자들이 구약 성서의 하느님을 자주 입에 올려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이는 니체라든지 ‘신 죽음의 신학’ (1960년대에 전개된 신학 운동의 하나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초월자와 조물주로서의 하느님은 이제 죽었다고 외치면서 예수의 윤리적 교훈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재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옮긴이)을 주창한 알타이저와 해밀턴 같은 신학자의 사상을 종종 접한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신성모독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도 유용한 증거에 비추어본다면, 영지주의는 기독교를 반대할 목적으로 악마적으로 왜곡한 이단이니 온갖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교부들의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지주의를 바라보는 대다수 저자와 설교가의 시각은 너무도 오랫동안 영지주의가 이단이라는 편견에 물들어 있었다. p27

 

영지주의란 무엇이며, 영지주의와 그노시스 경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의 의식은 개념적 진공 속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마음의 환상적이고 합일적인 경험은 그 경험의 내용과 의미에 적합한 개념의 틀로 옮겨져야 한다. 환상과 황홀경으로부터 종교 교리와 철학 체계, 그리고 신학적, 신지학적인 개념이 생겨난다. 이는 원시 시대 샤먼들 이래 줄곧 그래왔던 것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 영지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계시된 경험들을 최초로 성문화 한 뒤로 각자의 종교 체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데서 주류적 종교 신앙(그것이 어떤 종교 신앙이건)과 영지주의가 갈린다. 전통적인 종교가 경전에 기록된, 자신들의 바탕 경험에 대한 이야기에 만족해 있는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처음 경험한 그노시스를 더욱 확장하고 확대시키려고 계속 노력한다. p28

 

성서가 표현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가슴이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결코 쉬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분리는 분리되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져야 한다. 지상에서 몸을 입고 살아가며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의미 있고 영속적인 어떤 것을 향한, 고통스럽고 때론 불분명하기까지 하 갈망이 이 깊은 분리를 넘어 다시 하나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첫걸음이다. 결과적으로 초월 의식을 낳는 해방의 지식이 분리의 유력한 목적이다. p31

 

이 빛이, 오랫동안 갈망해 왔으나 아직 깨닫지 못한 가능성들로 우리를 깨워 이끄는 그노시스의 빛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부르는 그 순간, 빛이 빛을 부르고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를 부르는 것이다. 이 세계에 드리워진 장막이 벗겨지고, 불꽃의 모습으로 잠시 유랑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근원인 저 끝없는 빛의 바다를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환상이다. p31

 

2. 영지주의 세계관

 

하느님과 우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의 체계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세계는 불완전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불완전한 세계에 대해 어떤 제안을 하느냐에 따라 서로의 차이가 생겨난다. 수많은 인간은 악한 존재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주류 유대 기독교 사상에서는 최초의 인간 부부가 하느님의 법을 어김으로써 인류뿐 아니라 온 피조물의 타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지상의 삶에 따른 결함과 악은 이 타락의 결과이다. p33

 

이 문제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은 아주 놀랍고 독특하다. 그들은 이 세계가 불완전한 방법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함을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지주의는 지상의 삶이 고통과 덧없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삶은 힘들고 그래서 너희는 죽는다”는 격언에, 이 격언의 앞부분을 수정 교체하기를 바랄지는 모르지만, 동의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살리려고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하고, 그로 인해 다른 생명체에게 고통과 공포, 죽음을 선사한다. 이런 사실은 초식 동물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들도 식물의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이른바 자연의 재앙-지진, 홍수, 화재, 가뭄, 화산 폭발, 전염병-도 고통과 죽음의 흔적을 남긴다. 유기체의 구조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고통과 괴로움도 더 커진다. p34

 

이 끔찍한 사실들을 똑바로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을 어떤 의미에서 따듯하고 행복한 것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강한 심리적 욕구를 갖고 있다.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기꺼이 직시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자(와 불교인)에게는 종종 염세주의자니 세상을 혐오하는 자니 하는 딱지가 붙곤 한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나 불교인이나 모두 고통과 무지를 벗어나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은 바로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p34

 

영지주의자는 인간 마음의 주요 부분을 포함해 창조된 세계를 악한 것으로 여긴다. 그 주된 이유는 창조된 세계가 우리의 의식을 신성한 존재에 관한 지식에서 딴 데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p35

 

내적자기(영spirit, 그리스어로 프뉴마pneuma)만이 궁극의 신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경험의 장엣 초월이 이루어지는 지점은 바로 이 내적 자기이다. 초월의 경험을 통해서, 영지주의자가 진정한 ‘원죄’라고 여기는, 곧 신성한 존재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와 분리가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다. p35

 

영지주의자는 우주가 아니라, 유일신론자들의 언어로 이른바 ‘하느님’, 곧 우주의 바탕이 되는 궁극적 실재로부터 의식이 소외되는 것에 맞서 투쟁한다. 그노시스 없는 영혼에게 우주는 유일한 실재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주는 물질과 정신너머에 있는, 다시 말해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대용의 실재들 위에 있는 참 실재를 향한 의식의 상승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참된 목적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된다. p36

 

영지주의자는 인류의 조상인 타락한 부부가 온갖 악과 고통을 세상에 들여왔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이런 태도가 더욱 당당해 보인다-유일한 범죄자, 곧 조물주 하느님에게 그 책임을 떠넘겼다. 세계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불완전했다고 영지주의자는 말한다. p36

 

영지주의자들의 하느님은 창조된 세계 너머에 있는, 어떤 점에서는 창조된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궁극의 실재이다. p36

 

넓은 땅을 개발하려고 마음을 먹은 투자가나 땅주인이 있다. 하지만 땅주인이나 투자가가 직접 그 땅을 치우거나 정리하는 일, 건물을 설계하거나 짓는 일에 관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건축가와 기술자, 설계가 등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가 창조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불합리할까? p37

 

고대 영지주의자들에게 건축가에 해당하는 존재가 그리스 어로 ‘반쪽짜리 제작자’를 뜻하는 데미우르고스인데, 그것은 그가 세계의 틀만 만들었을 뿐 내면의 생명은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꾼과 장래의 경영자에 해당하는 존재들은 그리스 어로 ‘통치자’라는 뜻을 가진 아르콘archon들이다.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행동과 말이 대부분 데미우르고스의 기질과 일치한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야훼(구약 성서 하느님의 이름-옮긴이)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경멸감은 정확하게 이런 배경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p37

 

인간

영지주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물질세계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여긴다. ... 영지주의자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본질이지 이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용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이 고대 영지주의 시대에는 없었지만, 우리는 주류 기독교인들과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진화론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p37

 

그들은 인간의 몸이 지상에서 생겨나고 인간의 영은 아득히 먼 곳, 진정한 근본 하느님이 머물고 있는 충만의 세계에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썩어 없어지고 말 육체적, 심리적 요소들과 함께 신적 본질의 파편인 영적 요소-때로 신의 불꽃이라 불리는-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이원론적 본성-인간뿐만 아니라 세계의-을 인정하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p38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 안에 깃들어 있는 신의 불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이런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빛의 불꽃을 노예 상태로 가두어두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노예주 노릇을 하는 아르콘들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정신적 개념들을 포함해 지상적인 것들에 집착해 있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 열등한 우주 통치자들에게 우리를 계속해서 예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다수 인간은 낙원에서 잠자던 아담과 같다. p38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점에서 영지주의의 구원 개념은 힌두교와 불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해탈(해방)의 개념과 가깝다. 영지주의자는 죄(원죄나 그 밖의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죄의 원인이 되는 무지로부터의 구원을 바란다. p39

 

개인의 구원

영지주의는 그노시스와 구원의 잠재력이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으며, 구원이 대속적,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임을 인정해왔다. 따라서 주류 기독교가 주장하는 대속 신학(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교리-옮긴이)의 메시지는 영지주의자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p40

 

하지만 타인과 구별하여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선택된 무리라고 여기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엘리트주의와 엘리트적인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존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적 스승인 크리슈나무르티는 <선생의 발아래서>라는 이미 고전이 된 조그만 책에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 곧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라고 적었다. p41

 

사실 영지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지상의 삶을 어둠의 세력들에 예속된 상태로 여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이 고된 상태를 저절로 벗어나도록 해준다고 믿은 영지주의자는 아직 없다. 해방의 지식은 몸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얻어져야 하며, 그런 영적 해방에 이른 사람은 몸을 입고 있는 벗고 있는 상관없이 자유를 누린다. p42

 

죽음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죽음에 대해 묻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영지주의 복음서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에 보면 이와 유사한 물음에 예수가 아래와 같이 답한다.

태초를 알고 있어서 종말에 관해 묻느냐? 태초가 있는 곳에 종말도 있다. 태초에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끝도 알게 될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말씀 18) p42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은 신이나 신에 준하는 존재에 의해 계시된 법(예컨대, 마누나 함무라비, 또는 모세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견해에는 분명 심리학적 정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은 진공 속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의식 상태에서 나온다. 살인은 마음이 잔학한 상태의 결과요, 거짓말은 마음과 영혼 속에 온전함과 진실함이 결핍되어 있음의 표현이다. 위대한 영지주의자인 붓다는 바른 생각은 반드시 바른 행동을 낳는다고 말했다. p43

 

영지주의는 내면의 심령적 경험에 근거한 사고 체계이다. 이런 까닭에 영지주의가 그 본질과 중요성에 있어 행동보다도 마음의 상태를 더 우위에 두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늘 외적 행동이 아닌 의식이 도덕 가치의 참된 지표라고 주장했다. p43

 

윤리와 도덕이 규율들이 체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한, 영지주의자들은 그것들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면의 근거를 밝혀주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런 규율은 무익하다. 그러기에 수많은 영지주의자들이 구원은 오직 그노시스를 통해 오며 법과 규율 그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반면, 도덕이 우리 속 천상이 불꽃에 그 뿌리를 둔 광명에서 생겨나는 내면의 온전함이라고 정의된다면, 그런 도덕은 영지주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p44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주류 기독교에서 아주 빈번히 볼 수 있는 문자주의와 교조주의는 분명 영지주의에 반反하는 관점이다. 영지주의는 세계관은 가지고 있지만 믿어야 할 교리와 신학은 가지고 있지 않다. 영지주의 경전은 내용면에서 근본적으로 신화적이며, 모든 신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p45

 

그노시스라고 하는 ‘가슴의 지식knowledge of the heart’과 늘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영지주의 세계관은 영원한 매력을 자아낸다. 영지주의가 세 번째 천년이 시작되는 지금 이 시기와 특별히 잘 맞는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지난 천년은 시대의 질문을 감당해 내지 못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철저히 붕괴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p46

 

3. 창조에 대한 창조적인 관점: <창세기> 다시 읽기

 

19세기 초의 영지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둘이서 밤낮 성서를 읽어도 내가 하얀색을 읽은 곳에서 당신은 까만색을 본다.” p48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비극적인 불순종이 타락의 원인이 되고 후대의 인류가 그들의 타락에서 엄숙한 도덕적 교훈을 배우게끔 되어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창세기>를 이런 식으로 일게 되면 이르게 되는 한 가지 결론은 여성의 지위가 모호하게, 아니 저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여성은 낙원에서 불순종한 이브의 공모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p48

 

보석 같은 나그함마디 문서를 통해 확인되는 바 거룩한 문학의 유산을 남긴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창세기>를 교훈을 지닌 역사로 읽지 않고 의미를 지닌 신화로 읽었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 두 가지 심리 내적 원리의 전형으로 보았다. 아담은 프시케psyche, 곧 ‘혼soul’(생각과 느낌feeling이 생겨나는 마음-감정의 복합체mind-emotion complex)의 극적인 표현이다. 이브는 그보다 상위의 초월적 의식을 상징하는 프뉴마, 곧 ‘영spirit’을 나타낸다. p49

 

다른 하나는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첫 인간 한 쌍,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창세기>1:26~27)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기사는 조물주 하느님이 남녀의 성품을 모두 갖춘 양성적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두 번째 기사를 받아들여 거기에 다양한 해석을 덧붙여왔다. 이 기사가 여성과 남성의 평등함을 이야기한다면, 여성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기사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킨다. p49

 

뱀과 인간에 관하여

<진리의 증언>은 뱀의 지혜를 극찬하고 조물주에게 심한 비난을 퍼부으며 이렇게 묻는다. “이 하느님, 그는 어떤 종류의 신인가?” 이에 대해 과실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까닭은 인간이 더 높은 지식으로 깨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은 하느님의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대답한다. p51

 

<창세기>에서는 금지된 과실을 먹은 후 아담과 이브가 낙원의 은총을 상실했다고 말하지만, 영지주의 쪽 <창세기>에서는 “그들의 눈이 열렸다”-곧 그노시스를 가리키는 은유-고 말한다. 그 결과 첫 인간들은 자신들을 창조한 신들이 짐승 얼굴에 흉물스런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공포에 젖어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을 치게 된다. p52

 

영지주의 신화의 시작: 노레아와 세트

그러고 나서 아담은 “세트와 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그노시스를 경험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 또한 조물주로부터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담의 예언에 따르면 두 가지 큰 재앙이 이어질 텐데, 그것은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불에 타 파괴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재앙은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노시스의 지혜를 얻은 인간을 용인할 수 없는 조물주 데미우르고스의 질투와 분노 때문에 발생한다. p54

 

영지주의 해석의 특징

첫째, 일부 초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도 구약성서의 하느님을 당혹스럽게 여겼다. ... 하느님이 복수심과 분노, 질투, 타민족에 대한 혐오, 독재자의 허세 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의 자상하고 숭고한 성품과 그의 가르침에는 품위 있는 영지주의 철학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었는가!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분열로부터 구약 성서의 하느님이 우주의 열등한 존재, 곧 데미우르고스라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둘째, ...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성서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셋째, 영지주의자들의 <창세기> 해석은 영지주의적 환상 경험과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성한 신비를 탐험하고 경험해 봄으로써 영지주의자들은, 성서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창세기>에 언급되는 신은 유일한 참 하느님이 아니며 그보다 상위의 하느님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p57

 

영지주의자들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신화적인 것으로, 곧 별도의 해석이 필요한 신화로 이해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를 비유로 이해한 반면, 일반 대중은 신화를 준準역사적인 것으로 여겼고, 엘레우시스 신비의식 등의 입교자들은 환상 경험을 통하여 신화들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했다. 영지주의자들이 실제로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신화에 접근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p58

 

오늘날 자유주의적 입장의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설화들을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싼 혹은 자기 위에 있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신화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 관점이 맞다면 <창세기> 창조 신화의 모순은 단지 삶에 일반적으로 내재해 있는 모순의 반영에 불과하다. p58

 

영지주의자들에게 신화는 개별 영혼을 자극해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경험을 가져보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이란 물질과 마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p58

 

영지주의의 ‘두 신two Gods’ 교리는, 주류 유대-기독교의 유일신론자들이 지금까지 언급된 아주 분명한 모순들을 감추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것보다도 훨씬 더 인간 정신의 윤리적, 논리적인 상식에 부합하는 것 같다. p59

 

4. 소피아: 영지주의 원형인 여성의 지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소한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속물”과 같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유랑자는 어둠의 땅을 헤매고 있겠지만, 바로 그 어둠의 대한 자각이 자유로 나아가는 길에 빛을 비춰줄 것이다. 우리가 외따로운 존재라는 자각과 우리가 유랑자의 신분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위대한 첫걸음이다. 우리가 타락(추락)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상승하기 시작한다. p61

 

소피아: 가장 위대한 유랑자

소피아의 본성에서 기묘한 분리가 일어난다. 소피아의 높은 자기, 곧 본질적 핵은 깨어나 충만에게로 다시 신비롭게 상승하고 낮은 자기는 소외 속에 그대로 남는다. p62-62

 

낮은 소피아, 즉 아카모트Achamoth(히브리 어로 지혜를 뜻하는 호크마Chokmah의 철자를 바꾼 것)는 소외된 자신의 상황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녀는 몹시 슬퍼하고 서러워하고 분노하며 본래의 지위를 간절히 갈망한다. 고통 속에서 소피아는 나중에 응축하여 물질 우주의 재료-고대인들이 흙, 물, 공기라고 생각했던-가 될 힘들을 밖으로 방출해 낸다. 그녀는 또 의식의 잡종, 곧 사자 머리를 한 괴물을 낳는데, 그것이 창조된 세계의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된다. 소피아의 부정한 자식은 자신만의 왕국을 계획하는데, 그곳은 운명의 통치자요 영의 교도관인 시간의 일곱 통치자가 관장하는 일곱 하늘(행성)로 이루어진다. 낮은 자기 상태의 소피아는 일곱 하늘 위에 있는 여덟 번째 하늘에 숨는다. p63

 

영지주의 비판가들은 흔히 소피아의 자식인 데미우르고스가 악하다고 단정짓는다. 하지만 영지주의 경전을 잘 읽어보면 데미우르고스에게서 보이는 주된 특성이 악함이 아니라 무지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전들은 거듭해서 그가 자신 위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의 이런 무지는 오히려 유익하게 작용한다. 그의 무지 덕분에 소피아가 창조 세계 안에 자신의 계획을 끼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미우르고스는 그 계획을 자신이 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 결과 창조된 세계는 데미우르고스의 결함 있는 작업과 소피아한테서 온 천상의 지혜와 아름다움이 혼합된 것이 된다. p65

 

조물주는 무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조물주는 또 자만심과 무례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나)는 유일한 하느님이요 그(내) 위에 다른 하느님은 없다”고 믿는다. 화가 난 소피아는 데미우르고스의 말을 부정하면서, 그보다 위대한 다른 권능자들이 있으며 그는 단지 더 큰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서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피조물들에게 자신만이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이라고 계속 믿게 만든다. p65

 

여기서도 존재론적 또는 심리 내적 유비가 적용된다. 즉 자아(에고) 곧 낮은 자기는 (융이 모델을 사용하면) 대개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깊은 힘들에 대해 무지하고, 그래서 자신의 근원이 되는 원형의 모체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아는 자기 존재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가 자신뿐이라고 점점 더 믿게 된다. 따라서 자아의 자기중심주의는 조물주의 거만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결과이다. p65

 

소피아의 복귀

십자가라는 원형적 상징을 통해 소피아가 무의식으로부터 최초로 깨어난다고 하는 사실은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개성화individuation(융의 심층심리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자기 실현’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의식적 측면과 무의식적 측면의 통합, 곧 자아 ego 중심의 심리가 더 큰 자기self로 나아가는 것을 개성화라고 한다)의 과정에서 심리는 다양한 상징과 만다라 등의 경험을 통해 곧 닥칠 내적 해방을 준비하게 되는 바, 십자가의 가로대와 세로대의 결합은 심리/소피아에게 반대쪽에 있는 짝과의 결합이 필요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p67

 

오 빛이시여, 사자 얼굴을 한 권능자와 신적 거만에서 방출한 존재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오 빛이시여, 내가 믿는 빛은 당신이요 처음부터 나는 당신의 빛을 신뢰해 왔습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당신이시니... 오 빛이시여, 더 이상 혼돈 속에 나를 버려두지 마십시오.... 오 빛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저들 모두가 한꺼번에 “빛이 이 여자를 버렸으니 그를 붙잡아 그 속에 있는 모든 빛을 우리가 취하자”고 서로에게 말하며 나의 힘을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을 취하려고 했던 자들이 혼돈으로 돌아가 창피를 당하며, 속히 어둠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빛을 찾았던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 당신이시여, 오 빛이신 당신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 서둘러 이 혼돈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피스티스 소피아 Pistis Sophia> 32장 p68

 

그렇게 소피아의 이야기는 끝난다. 소피아는 영광스러운 충만을 떠나 소외와 혼돈으로 내려갔다가 자만과 무지가 안기는 공포에 시달림을 당했다. 힘 있고 마술적인 목소리로 빛에게 반복해 간구함으로써 그녀는 신랑 예수에게서 힘과 신성화를 선물로 받고 그의 거룩한 손에 인도되어 위대한 에온들의 왕국에서 자신의 지혜의 자리를 되찾는다. p69

 

모든 원형적 신화들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다는 초시간적인 특성을 보인다. 특별히 소피아 이야기는 심리적인 경험과 초월적인 경험을 결합시킨 보편적인 요소들을 알기 쉬운 형식으로 다룬다. 개인 심리의 발달(개성화)과 사회적인 문제들(사회적으로 여성의 해방과 지위 향상을 포함한), 그리고 신화적이며 형이상학적 관념들에 대한 통찰이 소피아 신화에서 얻어질 수 있다. p69

 

소피아는 어디에서 왔는가

구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지혜를, 세계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예언자, 현자들의 환상적이며 직관적인 경험 속에 신비롭게 현존하는 하느님의 여성적 위격(방출물)으로서 언급한 곳이 아주 많다. ‘지혜wisdom’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호크마chokmah’인데, 헬레니즘 시기 이 단어는 소피아sophia라는 그리스 어로 번역되었다. p71

 

호크마-소피아는 <집회서>(24:3~6, 9)에서도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소개한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구름과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나는 높은 하늘에서 살았고 내가 앉는 자리는 구름 기둥이다. 나 홀로 높은 하늘을 두루 다녔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었다. 바다의 파도와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나는 지배하였다. ... 그 분은 시간이 있기 전에 나를 만드셨다. 그런즉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p72

 

오늘날 학계에서는 소피아가 유대교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주류 유대교가 가부장적 유일신론을 표방하기는 해도 유대교 역사에서 여신의 모습은 자주 나타난다. p73

 

그 후의 소피아

지혜 문학뿐 아니라 신구약 성서의 여러 편이 소피아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쉽게 무시되었다. <창세기>,<출애굽기>,<욥기>,<마가복음>,<요한복음>, 바울 서신 다수, 특히 <고린도전서>와 <데사로니가전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여기에 포함된다. p76

 

로마 가톨릭의 역사에서는 딱 한 번 소피아에 대한 예찬이 부활된 적이 있다. 12세기의 시토 수도원장이자 신비가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가 그 장본인으로, 그는 <아가서>에 바탕한 긴 논문을 신비로운 운문 형식으로 써낸 사라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소피아한테서 유래한 특징을 성모 마리아의 것으로 포함시켰기 때문에, 베르나르는 신비한 술람미의 여인과 성모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헌신적으로 소피아를 마음에 그렸고, 사람들은 그의 진실한 태도에서 감화를 받았다. p77

 

야콥 뵈메 및 그의 저서를 해석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아 형성된, 신비주의적, 오컬트적인 서구 문화의 또 다른 전통은 수세기 동안 소피아(종종 사피엔티아Sapientia라는 라틴 어 이름으로) 숭배 사상을 보존해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주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카발라주의자, 고급 마술의 실행자, 그리고 장미십자단원Rosicrucians(로젠크로이츠Rosenkreuz가 독일에서 창설했다고 전해지는 연금 마법의 기술을 부리는 비밀 결사-옮긴이)과 비교적인 프리메이슨Freemason(1717년 런던에서 창설된 조직으로 세계 최대의 박애주의 비밀 결사) 등의 비밀 형제단은 대개 소피아에게 매력을 느꼈다. p78

 

기독교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은 소피아에게 경의를 표해 붙여진 이름이며, 수많은 그리스 정교회와 여타 정교회들도 오늘날까지 소피아를 받들고 있다. p78

 

소피아는 페미니스트 또는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여신 신전에 모시고 싶은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노력 대부분은 영지주의 경전을 깊이 살피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소피아가 이방 종교의 달의 여신이나 땅의 여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온전히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지금껏 드러난 소피아의 여러 가지 모습(고대 영지주의자에게 나타난 모습, 술람미의 여인의 모습, 세키나의 모습, 연금술에 나타난 모습, 야콥 뵈메의 학파에게 나타난 모습, 그리고 동방 정교회에 나타난 모습 등)을 살펴볼 때, 소피아는 페미니즘과 뉴에이지에 등장하는 성적, 정치적으로 채색된 ‘여신’ 이미지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옳겠다. p79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gender은 신화적 존재들, 특히나 영지주의적인 존재들에 있어서는 결코 중요하거나 심오한 특징이 아니다. 영지주의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들의 변화무상한 세계에서는 남녀 양성적이거나 중성적인, 그런가 하면 성이 바뀌기도 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금이 아니듯이, 여성성을 지닌 신화적 존재라 하여 모두 소피아는 아니다! 옛날처럼 오늘날에도 소피아는 유랑하고 소외된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탁월한 원형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p79

 

반反영지주의자에게 소외감은 병적 일탈로 여겨지겠지만, 영지주의자에게 소외 의식은 값진 재산이다. 소피아가 어두운 혼돈 속으로 떨어졌듯이 우리의 의식도 불명료함과 의지가지없는 상태로 떨어졌다. 그리고 소피아가 머지않아 최고의 사자에 의해 구원받듯이 우리 또한 때가 되면 구원을 받고 진리와 사랑의 에온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p80

 

5. 영지주의의 그리스도: 구원자인가 해방자인가?

 

기적 설화와 수난, 죽음, 부활 기사와 더불어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한 말로 여겨지는, 영지주의 문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상당량의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요한복음>이 예수의 가르침의 영지주의적 특징을 보여주는 유일한 정경은 아니다. 예수의 말씀 상당 부분 중 적어도 일부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심지어는 <마가복음>에도 약간이나마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는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해석될 때 탁월한 의미를 드러내는 가르침이 많다. <마태복음>의 밀과 가라지 비유(13:24~30)가 좋은 예이다. 한 사람이 밭에다가 좋은 밀을 뿌렸다. 그런데 웬수가 밀 가운데다 가라지를 뿌리고 갔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일꾼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 하고 묻자 농부는 밀과 가라지가 쉽게 구별되는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에는 빛과 어둠의 씨가 섞여 있다. 비록 지금은 이 둘을 구별하기가 쉬비 않지만 때가 되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이 둘이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p83

 

영지주의 교사 예수

영지주의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사역을 실천했다. 첫 번째는 가르침의 사역이라 불일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입교적인 성격을 띤 해방의 시비 제의 같은 성례전 사역이다. p84

 

<도마복음>에 실린 예수의 말씀 대부분은 네 가지 주제, 곧 ① 인간의 조건에 관한 것 ②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 ③ 구원자나 해방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암시하는 것 ④ 신성한 존재를 알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기 앎’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말씀을 읽은 사람은 예수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아주 실용적이면서 실존적인 태도에 놀라게 된다. p85

 

많은 예를 보지 않아도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질적인 안녕 혹은 심지어 도덕적 성품에 대해서도 강박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라. 한계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그대를 기다리는 더욱 위대한 생명을 향한 여행에 나서라. 그대가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 음식에 대한 규정을 지키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나를 돌아온 엘리아로 생각하든 철학자로 여기든 아니면 한갓 목수의 아들로 보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자신을 알기 위해 참으로 노력하는지, 그리하여 해방의 그노시스를 준비하는지 하는 것이다.”... “나그네가 되어라” p86

 

그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의 생각보다는 그들의 깨어나기 시작하는 직관적 그노시스를 향해 가르침을 펼쳤다.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과 상상력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극하는 것이 예수의 말씀에 담긴 의도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연약하게 고난당하는 전통적인 예수와는 전혀 다르다. 이 예수는 제자들 안에 있는 비범한 의식 상태를 자극하기 위해 은유와 신화,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금언과 분명한 영지주의적 비유를 사용한다. p86

 

“너희는 너희 앞에 살아있는 자는 내버리고 죽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구나” (말씀 52) p87

 

“과거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지 말아라. 나를 예언과 성서, 그리고 기대하는 바와 관련시키지 말아라. 너희의 그노시스로 나를 보아라. 그러면 이해하게 되리라.” p87

 

영지주의 경전들은 적어도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가 제자들로 하여금 그노시스를 경험하도록 실제로 자극한 사실을 보여준다. <도마복음> 말씀 13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와 비슷한지 묻는다. 베드로는 선생을 의로운 천사에, 마태는 지혜로운 철학자에 비교한다. 오직 도마만이 비교하기를 거절하고 선생이 누구와 같은지 자신의 입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가 도마에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너의 스승이 아니다. 너는 취했고, 내가 준 솟아나는 샘물에 도취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도마를 따로 불러 귓속말로 세 가지 말씀을 속삭인다. 곧바로 다른 제자들이 그 세 가지 말씀이 무엇인지 캐묻지만 도마는 대답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시 것 중 하나라도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다면, 그대들이 돌을 들어 나에게 던질 것이요. 그러면 그 돌들에서 불이 나와 그대들을 불살라버릴 것이오.”

위 사건에서 도마의 역할을 뺀, 세상에 통상적으로 알려진 기사가 <마태복음>(16:13)에 있다. 도마는 ‘취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보통과는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그노시스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다. 이런 그노시스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자신의 그노시스를 드러낸다면 치명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수많은 영지주의자들이 가슴 아픈 운명을 맞이한 것은 알지 못하는 자가 아는 자에게 터뜨린 분노 때문이었다. p88

 

대속인가 해방인가?

위대한 영지주의 예언자인 페르시아의 마니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증언한다. 알 비루니Al Biruni(중세 아랍의 위대한 과학자요 역사가이며 수학자)가 <고대 국가들의 역사>에서 인용한 바에 따르면,

지혜와 선행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자에 의해 그때그때 인간에게 전해졌다. 한번은 붓다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인도에, 한번은 조로아스터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이라에, 한번은 예수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서방에 전해졌다. 그 후 이 계시와 예언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참 하느님의 사도인 마니, 곧 나를 통해 이 세대에게 전해졌다. p91

 

영지주의 전통에 속하는 많은 경전에서 예수는 로고소Logos로, 크리스토스Christos(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로, 그리고 소테르Soter(치료자, 구원자)로 불린다. 이 이름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가 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인간 예수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영적 그리스도가 그의 인격 속으로 임재했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 요약하면, 영지주의자에게 구원은 아들의 죽음을 통한 진노한 아버지와의 화해가 아니라, 지상의 삶으로 인해 야기된 무감각으로부터의 해방이요 그노시스를 통한 깨어남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죄를 포함한 어떤 죄도 전체 현실 세계의 타락을 야기할 만큼 강력하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이 결함을 지니게 된 것은 세상의 본성 때문이요, 인간은 결함을 지닌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그리고 이 속박을 불러오는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수는 사자와 해방자로 왔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신비 제의에 참여하는 자는 제자 도마처럼 그노시스에 의해 구원받는다. p92

 

부활인가 깨어남인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먼저 부활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어서 어떤 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말씀 79)

영지주의자들은 부활이라는 용어를 그노시스, 곧 참된 영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말로 간주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의식 상태로 깨어날 때 우리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영지주의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깨달음을 촉진시키는 신비로운 자극이다. 이런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허사가 된다. p95

 

우리가 겪는 불행과 고통을 십자가 수난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 본받음은 반드시 부활을 포함해야 한다. 영지주의의 입장은 훨씬 분명하다. 그노시스가 충만해지는 순간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신적 불꽃이 완전히 풀려나고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뤄진 이중의 무덤에서 일어나 영원한 영과 하나가 된다. 망각은 사라지고, 영의 진정한 모습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p95

 

우리가 겪는 불행과 고통을 십자가 수난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 본받음은 반드시 부활을 포함해야 한다. 영지주의의 입장은 훨씬 분명하다. 그노시스가 충만해지는 순간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신적 불꽃이 완전히 풀려나고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뤄진 이중의 무덤에서 일어나 영원한 영과 하나가 된다. 망각은 사라지고, 영의 진정한 모습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p95

 

6. 죄악의 비밀: 악에 대한 영지주의 관점

 

1991년 6월 10일자 <타임>지에.. 글쓴이는 랜스 마로우 Lance Morrow..

-하느님은 전능하다.

-하느님은 선하다.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우리가 이 세 명제 중 두 가지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세 가지 모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신은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도록 허락하는 전능한 하느님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하느님이 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 끔찍한 사건들을 멈추게 할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는 선한 하느님이 있다면 그 하느님은 전능하지가 않다. p101

 

중세의 탁월한 가톨릭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악의 존재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큰 반론임을 인정했다. 유일신론의 하느님 개념이 받아들여진다면 악에 대한 실질적인 해명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악이 존재한다면 서구의 주류 종교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유일신으로서의 하느님은 존재할 수 없다. p101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역사 속에서 여러 종교 전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악의 존재를 설명해 왔다. 첫째는 일원론으로, 둘째는 철저한 이원론으로, 셋째는 악을 무지와 관련시키는 것으로, 넷째는 악을 원죄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악의 존재를 설명했다. p101

 

악과 악의 기원에 관한 정교하되 비인격적인 관점은 인도에서 유래한 위대한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이 전통들에 따르면 악은 깨닫지 못한 존재 상태요, 무지avidya(無明)가 바로 악의 근원이다. 깨달은 의식 상태에 도달해 모든 분별을 넘어섬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카르마로부터 또 악이 작용하는 모든 조건으로부터 해방된다. 해방(해탈)이 필연적으로 윤회를 그치게 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가은 삶은 확실히 그치고 그와 함께 악도 그친다. 네 번째 범주에는 주류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유일신론이 포함된다. 앞 세 범주의 전통들이 악의 존재를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사악한 적수, 또는 인간의 무지 탓으로 돌리는 반면, 유대-기독교 사상은 악의 기원을 인간의 죄로 돌린다. p103

 

영지주의 관점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를 원죄의 결과가 아니라 본래적인 결합 때문인 것으로 여긴다. 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는 구조물의 일부다. 이 같은 현실 세계를 만든 조물주가 있다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분명 그의 책임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입장은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p104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변덕 부리고 분노하고 복수심에 불타며 정의롭지 못한 유일신적인 하느님의 상-그리고 신약 성서에 달라진 모습으로 나오는 하느님의 상-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렇게 분명한 결함을 지닌 하느님이 결함을 지닌 자신의 모습대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진실로 이 결함을 지닌 조물주가 선하고 참된 궁극의 하느님인가, 아니면 자기보다 위에 있는 권능자를 알지 못하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신적 권능자를 알기는 하지만 그 지고한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결심한 열등한 신인가? p104

 

우주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조화롭고 질서 잡혀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동양의 종교에 영향을 받아 카르마業의 법칙-이 법칙에 의해 그릇된 행실이 나중에, 혹은 다음 생에서까지도 불행을 야기한다-이 현실 세계의 불완전함을 해명해 준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영지주의자들은 카르마란 기껏해야 고통과 불완전함의 사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해 줄 따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질서가 애당초에 존재해야 하는지 카르마의 법칙은 말해주지 않는다. p105

 

제한적인 이원론

제한적인 이원론에는 철저한 이원론이 가정하는 선한 신과 악한 신 사이의 투쟁이 없다. 가단히 말해, 현실 세계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이 세계는 완전히 악하지도 완전히 선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악이 선이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지도 않거니와 선 또한 악이 현존하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지 않는다. p106

 

영지주의 교사 바실리데스Basilides가 여러 차례 말했던 것처럼, 그 이후로 “악은 녹이 쇠에 달라붙듯 창조된 존재들에 달라붙는다.” 창조물의 일부인 인간 또한 조물주들이 지닌 결함을 본성으로 지닌다. 인간의 몸은 질병, 죽음 등과 같은 악들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혼psyche또한 불완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직 인간의 본질 안에 깊이 숨겨진 영pneuma만이 악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참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p107

 

현대적인 결론

권좌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매일처럼 누군가를 고문하고 죽인다. 유대-기독교의 유일신을 믿는 자들과 카르마의 법을 따르는 자들은 “종국에는 악조차도 선으로 인도되기 때문에 이는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p107

 

눈앞에서 악을 목격했던 자들-유대인 학살이나 옛 소련의 굴락Gulag(강제노동수용소)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이런 식의 애매한 주장은 모욕적일 것이다. 그들에게 악은 악이며, 그 밖의 설명은 모두 한갓 핑계일 뿐이다. 더구나 지진이나 화재, 홍수, 전염병과 같은 끔찍한 사간들은 인간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도 있지만, 인간의 잘못과 상관없이 생기는 고통도 많다. p108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 따른 것이든, 인간을 유일한 환경 파괴자로 몰아붙이는 신전에 따른 것이든, 죄책감을 키우는 방식으로는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죄책감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불행을 낳는다.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자. 그리고 불행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악이라도 줄이도록 하자.

인간은 창조물과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악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계획과 기술로 우리 본성에서 악을 제거할 수 있었다면 오래 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p108

 

우리의 물질적, 심리적 자기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영pnuema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불완전한 우주 너머에서 다가오는 신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초월적 그노시스를 얻을 기회를 베푼다. p110

 

초월은 우리에게 운명 지워진 것이다. 이 세계를 초월할 때 우리는 악을 초월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악에서 선을, 어둠에서 빛을 구별하는 통찰력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p110

 

세상이나 우리 자신 속에서 악을 제거하기는 힘들지라도, 우리는 그노시스를 통해 악을 초월할 수 있다고, 아니 초월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해방이 성취될 때 진정으로 우리는 한낮의 사탄이나 밤의 공포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p111

 

7. 해방의 신비 의식: 영지주의의 입교적 성례전들

 

나는 <세계 종교로서의 영지 Gnosis 민 Weltreligion> (1951)라는 저서에서, 영지주의는 독특한 종교 경험의 표현으로서 신화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밝힌 바 있다... 분명, 중요한 영지주의 체계 중 최소한 일부는 강렬한 감정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영지주의가 철학도 아니요, 더욱이 기독교의 이단도 아니라는 점, 하느님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해 독특한 관점을 지닌 종교라는 점이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카벤디쉬편, <인간과 신화, 마술>중 '영지주의‘에서) p113

 

부적과 성례전

신화와 의식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영지주의 연구에 유리한 환경을 맞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철학이 단지 말로 끝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신화와 의식은 살아서 움직이는 실재라는 점을 점점 깨달아가고 있다. 철학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삶의 현상을 설명하지만, 신화와 의식은 철학이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을 창조한 근본 실재의 재현을 표현한다. 따라서 철학이 “왜?”라는 물음에 대답하려고 하는 반면, 신화와 의식은 “어디로부터?”라는 물음에 대답하려고 한다. .. 신화와 의식은 무의식적인 것과 맞닿도록 직접적이고 창조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함으로써 의식적인 자아의 세계가 의식의 베일 너머에 있는 심오한 권능의 영역과 결합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15

 

성례전과 그것의 효과

일반 기독교인들이 오직 심리적인(혼과 관련된) 자질만으로 성례전을 경험할 수 있었던 반면, 영지주의자들, 특히 발렌티누스 학파에 속한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자질을 가지고서 성례전을 경험할 수 있었으며 그런 능력이야말로 그노시스의 증표였다. p118

 

관습을 따르는 가톨릭 신자에게는 세속의 중생에게 기적같이 임재하는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여겨지는 것이, 영지주의자에게는 영, 곧 ‘개인의 무의식 속에 내재한 신의 불꽃’에 뿌리를 둔 심리 내적 신비로 보인다. 가톨릭 신자는 구원을 받고 영지주의자는 입교를 하지만, 두 전통의 성례전 방편은 완전히 혹은 거의 같다. p119

 

신방: 신비 중의 신비

심층심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자면, ‘개성화’된 자아의 모범이요 온전함의 원형인 예수는 자신이 ‘둘이 하나로 합일된 존재’임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원형이요 또한 전형인 예수는 연합의 합일을 이룬 이상적인 양성 구유자로 예시된다. 그를 따르는 자는 반드시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자신 속에 이성의 형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남자는 자신의 여성적 자기와 연합한다. 그 연합을 이루기 전까지는 여자 안에 있는 이성의 형상을 오직 대리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 p120

 

성례전과 황홀경

그노시스를 찾는 오늘날의 탐구자에게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고대 영지주의 문서에 수록된 성례전과 의식에 관한 기록은 우리의 관심을 교리와 철학, 그리고 진리의 이론적 형식 같은 인식적 사고 너머로, 곧 상징과 신화와 의식에 더 친화력을 가진 심리적 실재에게로 인도한다. 기독교 전통 내에서 믿음가 계율 대신 영적 변형을 향해 노력한 최초의 사람들인 영지주의자들은 심리적 실재의 본질에 딱 맞는 수단과 열쇠를 가지고서 그 실재에게 다가갔다. p125

 

10. 영지주의적 특징을 지닌 종교들: 만다교, 마니교, 카타르 파

나머지 하나는 아주 분명하게 기독교적이다. 신기하게도, 비기독교적 영지주의 종교인 만다교는 성서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살아남아 있다. p171

 

만다교, 위대한 낯선 빛의 종교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적 신앙을 지녔으면서 셈 족에 뿌리를 둔 작고 조용한 집단이 거의 2천 년 동안 오늘날의 이라크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오늘날까지도 살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만다교인이라고 부르지만, 오늘날 이라크 사람들은 그들을 수바인Subba라고 부른다. 아람 어 ‘만다manda’는 그리스어 ‘그노시스gnosis’로 번역되며, 따라서 만다교인이란 문자적으로 영지주의자를 뜻한다. p172

 

만다교 경전에 따르면 모세는 가짜 신의 예언자요, 예수 또한 참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거짓 예언자에 속한다. 사실 만다교인은 “숨겨진 지혜의 수호자 또는 소유자”를 뜻하는 나조리언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일찍이 십자군 전쟁 이래 역사의 다양한 지점에서 만다교인과 마주친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성 요한의 기독교인’ 혹은 ‘요한을 따르는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p173

 

만다교의 침수 의식은 세례보다는 성만찬Holy Communication에 더 유사하다. 만다교인들은 흐르는 물에는 빛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며 영적인 실체가 그 어디보다도 많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p174

 

만다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식이 있다. 하나는 요단 강이라는 흐르는 물 속에서 거행하는 침수, 곧 마스부타masbuta이다. p175

 

마니교의 예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만물 위에 있는 빛이요. 나는 그 만물이다. 그 만물은 나에게로부터 왔으며, 그 만물은 나에게로 이르렀다. 나무를 쪼개어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다. 저 돌을 들어보아라. 너는 그곳에서 나를 볼 것이다.” (말씀 77) ...

단순한 언어적 비유가 아니라, 이루어져야 할 일, 곧 물질적, 자연적 대상 속에 흩어져 있는 신성한 빛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라는 요청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인간처럼 자연 세계는 성화聖化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p183

 

마니의 기본 가르침

마니의 우주론적 이원론은 방출 과정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뿌리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다. 마니는 태초부터 빛과 어둠의 왕국이 불안한 평화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빛은 어둠의 존재와 다투지 않고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는 데 만족하고 있었지만, 어둠은 그렇지 않았다. 어둠은 흥분과 분노에 사로잡혀 빛의 영역을 공격하고 침입하기로 결심했다. p184

 

마니교인들이 채식 성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르콘적인 기원을 가진 동물들의 살이 부정하다는 데 근거한다. ... 인간도 아르콘의 어둠과 오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담과 이브는 아르콘의 탐욕스러운 성교를 모방함으로써 많은 빛을 흩뜨려버렸고, 그 결과 그 회복이 아주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 마니교인들이 성애를 저급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85

 

마니교는 왜 미움을 받았는가

초기의 영지주의 학파들은 비교적 단명한데다 교양있는 엘리트에게 제한되었지만 마니교는 달랐다. 마니교는 수많은 신도와 정교한 위계 구조, 수도승, 사제, 예배 의식 그리고 경전을 갖춘 세계 종교로서 수세기 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무슬림, 유교인, 때론 불교인들조차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마니교인을 사회와 삶을 위협하는 자들로 여겼다. 한편, 마니교를 증오하도록 가르친 대부분의 종교들에도 남녀 수도승이 있었으며, 그들도 마니 교회의 ‘선택된 자’처럼 재산과 가족, 세상적인 일을 포기했다. 마니교 공동체의 이른바 ‘듣는 자’라는 평신도 계급은 일반 기독교 신자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p187

 

이런 점들로 볼 때 마니의 ‘빛의 종교’를 향한 적의에는 실제적인 근거가 없었다. ... 이들 선택된 자들이 지상의 무의식의 족쇄로부터 스스로를 효과적으로 해방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패권에 위협을 느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마니교가 몰락한 이유는 권세를 쥔 악한 영 족에 있었다. p187

 

11. 영지주의의 유산: 영지주의의 부흥

 

영지주의 전통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요소는 가르침과 예식에 관련된 전통이다. 적어도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분명한 형식을 갖춘 영지주의적 성격의 메시지가 존재했다. ...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요소에 비해 분명치가 않다. 이것은 마음가짐, 곧 심리적인 분위기와 관계된다. p200

 

기독교적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자는 이슬람교, 특히 수피즘(이슬람교의 신비주의 사상, 신에 대한 사랑과 합일을 역설한다)과 이스마일 파(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분파로, 일자 또는 신과의 합일을 중시한다) 같은 신비주의 학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언자 무함마드 또한 영지주의의 일부 사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는 이미 그 당시에 수많은 영지주의적 종교 집단이 있었던데다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함마드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참된 복음을 파괴하고 그 대신 타락한 복음을 가져다놓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201

 

그노시스와 종교 개혁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희박하나마 영지주의와 관련이 있다. 루터는 개인의 영적 체험에 관한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인 관심이 당시 가톨릭교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회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권력에 굶주린 독일 제후들과 생각 없는 루터교 성직자들의 부정한 결탁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의 심장부에서 꿈틀거리던 영지주의적 움직임은 이내 질식당하고 말았다. p202

 

뵈메.. 그는 인간의 영이 하느님의 본질에서 솟아나온 신성한 불이라고 가르쳤다. 어둠에 갇혀 있으면서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는 이 영은 신성한 존재의 원초적 빛과 다시 결합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인간의 영이 신적 근원에 도달하도록 끌어주는 이 결합의 힘은 다름 아닌 사랑의 불꽃이다. p203

 

계몽주의 시대의 영지주의자

괴테는 비교적 수련들, 특히 연금술을 공개적으로 행했다. 그는 카타르 파를 지칭해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여졌는가? 오, 저들이 그들을 잡아 불태웠다!”라는 유명한 시를 쓰기도 했다. .. 파우스트는 초기 영지주의 교사 시몬 마구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설정한 인물이다. 시몬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름 중 하나가 파우스투스였던 것이다. p210

 

소설 <백경>에 나타난 영지주의 사상은... 예를 들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이허브는 조물주 하느님을 이렇게 공격한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고, 그래서 당신 자신을 태어나지 않은 자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당신의 시작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당신 자신을 시작이 없는 자라고 부릅니다. 나는 나에 대해 압니다. 오, 전능한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을. 모든 영원성은 오직 시간적인 것일 뿐이며 모든 창조성은 기계적인 것일 뿐인 당신, 그런 당신 너머에는 가리어지지 않는 뭔가가 있습니다. p212

 

낭만주의에서 오컬트 그노시스로

낭만주의자들은 습관적으로 현세를 경멸하며 숭고의 이상을 동경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와 신플라톤주의자, 그리고 수피가 들었다면 호감을 느꼈을 정도로 인간의 상상력을 찬양했다. p213

 

영지주의자 블라바츠키

1831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H.P. 블라바츠키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영지주의의 부활에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기여를 했다. ... 그녀는 자신의 사상 체계를, 신플라톤주의자 암모니우스 사카스가 사용한 고대어를 부활시켜 ‘신지학’이라 불렀다. p215

 

그녀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전통적인 유일신 개념을 맹렬히 공격하고 그 대신 완전히 초월적이고 비인격적인 근본 하느님Godhead-영지주의의 궁극적인 하느님alethes theos 혹은 참 하느님True God과 비슷한-신앙을 변호했다. “구약 성서의 하느님은 데미우르고스”라는 영지주의의 개념은 블라바츠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예컨대 “여호와는 사탄이다!”라고 대담하게 선언하는 일부 진술들에서 그녀는 “영지주의를 넘어선다.” p217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Anthroposophy(신지학의 변형)과 블라바츠키의 신지학은 둘 다 힌두교의 옷을 걸친 순수한 영지주의라는 융의 진술은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p218

 

융과 영지주의적 심리학

융은 스스로를 영지주이자라고 밝힌 펠레몬이라는 이름의 영적 인물과 관련된 일련의 환상을 경험했다. 융은 필레몬이 전해준, 상징의 의미에 관한 가르침을 책 속에 담아냈으며, 이 책 때문에 융에 대한 프로이트의 마지막 불만은 폭발하고 말았다. p220

 

융은 영지주의를 심리학으로 바꾸기 위해 그것을 전유한 적이 없었다. 융의 저술을 보면, 영지주의 안에 어떤 다른 의미가 숨어 있든지 간에 그와는 별도로 자신은 심리학자로서 거기에서 심리학적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p222

 

융이야말로 고대 신화와 가르침을 현대적 관점에서 제시하고 영지주의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남긴 현대의 영지주의 대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특히 융의 책 <욥의 응답>에 수록된 신화는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고대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확장시킨다. 융은 마지막 영지주의자라고 불린다. 이런 말은 영지주의 전통이 끝났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지주의가 사라졌다고 선언된 것이 수차례지만 그런 선언은 늘 성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융이다. p222

 

12. 동서양의 영지주의: 진정한 영지주의자가 생길 것인가

헤럴드 블룸은 “공개적으로 영지주의 교회라고 말하는 교회는 아무도 세우지 않을 것이며, 그런 교회는 결코 비과세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썼다. ... 영지주의 교회는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에 존재했으며, 20세기에 이르러 미국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 마니교와 보고밀 파, 카타르 파 사이에서 번창했으며, 만다교에는 지금도 그런 교회가 남아 있다. p223

 

영지주의와 동양 종교

주요한 요가 전통 중에 즈나나 요가가 있는데, 이는 ‘지식을 통해 하나가 되는 길’이라는 뜻이다. 영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지식의 전수는 수준 높은 요가에서는 일반화된 수행으로서 인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점에서 영지주의는 힌두교라고 알려진 인도의 고대 종교와 아주 유사하다. 힌두교는 여러 종파들의 집합체로, 서구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종교와는 다르다. p227

 

영지주의와 힌두교를 하나로 묶는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다. 첫째로, 인간의 영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한 존재에 관한 가르침이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한 본성을 지니는데, 이는 우주적 신성이 모든 인간 속에 축소된 형태로 현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 힌두교인과 영지주의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자기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둘째로, 영지주의와 힌두교는 궁극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 사이의 중간 세계에 수많은 신적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p227

 

셋째로, 힌두교에서는 이원론적인 특성과 비이원론적 특성을 함께 언급하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 ... 또한 영지주의는 동양의 또 하나의 위대한 종교인 불교와도 유사성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최종 목표-영지주의의 궁극 목표에 정확히 상응하는-는 몸을 입은 존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미래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에 있다. ... 유명한 불교학자 에드우드 콘즈에 따르면 영지주의와 불교-특히 대승 불교-는 다음과 같은 공동점을 보인다.

- 구원은 그노시스(즈나나)를 통해 얻어진다. 현실 존재들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 곧 해방이다.

- 무지가 악의 진짜 악의 뿌리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아그노시스agnosis, 불교에서는 아비디아avidya라고 말한다.

- 영지주의와 불교는 사실보다 신화를 선호한다. 붓다와 그리스도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원형적 존재로 제시된다. p228-229

 

영지주의 정의의 어려움

영지주의는 의식의 비일상적 상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하는데다 곧잘 그 경험에 의해 수정되고, 그런 만큼 신학적인 엄격성을 거부하는 사고 체계이기 때문에, 영지주의를 정의하기는 늘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영지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던 탓에 각자의 종교적 기반에 따라 영지주의도 달리 해석되었다. p230

 

고대 영지주의를 재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은 한스 요나스이다. 1930년대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인 요나스는 영지주의자들의 지혜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들 가운데서 실존주의 철학과 비슷한 사상을 발견해 냈다. 현세의 삶에 대한 염세적 경향, 이론이 아닌 경험에 대한 높은 평가 같은 실존주의 철학의 선조 혹은 가족뻘 되는 사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p236

 

영지주의에 대한 정의

1.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하나의 영적 통일체가 있고 그로부터 수 많은 발현물이 방출되어 나왔다.

2. 물질과 마음으로 구성된 지금의 우주는 근원적인 영적 통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열등한 권능자들을 거느린 영적 존재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3. 이 조물주들의 목적 중 하나는 통일체(하느님)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4. 인간은 복합체이므로 내면은 궁극의 신적 통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불꽃이지만 외면은 열등한 조물주들의 작품이다...

7. 인간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신적 본질에 대한 자각은 ‘그노시스’라고 불리는 구원의 지식을 통해 얻어진다.

8. 그노시스는 믿음이나 고결한 행위나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기껏해야 해방의 지식을 위해 인간이 준비되도록 도와줄 뿐이다....

14. 신비 의식의 영적 수행과 그노시스를 향한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노력을 통해 인간은 물질이나 그 밖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p239

 

자신의 정체성을 영지주의자라고 밝히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교의 대부분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해석을 문자적으로 하느냐, 심리학적으로 하느냐, 철학적으로 하느냐 혹은 다른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내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는 단지 내가 그걸로 의미하고 싶은 딱 그것만을 의미할 뿐이야. 더도 덜도 아니지” 달걀 인형 험프티 덤프티가 말했다.

“문제는, 네가 단어들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다른 의미를 갖게 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앨리스가 대답했다. p241

 

13. 영지주의 문학: 신화, 진실, 설화

 

영지주의 문서의 단편들

세 가지 영지주의 사본 중 19세기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세 번째 사본은, 이 사본이 발견된 이집트의 지명을 따라 아크밈 사본이라고도 불리는 베를린 사본이다... 칼 슈미트가 이 사본의 일부에 대한 번역을 준비하긴 했으나 오랫동안 그 내용은 출판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문서는 예수의 신비한 행동과 가르침에 관해 막달라 마리아가 들려주는 <마리아 복음Gospel of Mary>이다.... 막달라 마리아에 관련된 중요한 영지주의 작품 중 하나인 이 문서에는 현대적인 연구와 비평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어조와 때론 성적이기도 한 미묘한 상징적 표현들이 들어 있다. <베드로 행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같은 다른 문서들에 대한 연구는 더 진척되어야 한다. p248

 

옛 동굴에서 비친 새로운 빛, 나그함마디 경전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복음서Gospel’라는 제목을 단 경전은 오직 네 개(<도마복음>,<빌립복음>,<진리복음>,<이집트인 복음>)뿐이다. 이 중 가장 접하기 쉽고 대중적인 것은 <도마복음>이다. 성서의 4복음서와 달리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고 있다. 말씀의 일부는 4복음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지만, 다른 많은 부분은 분명하게 영지주의적 특징을 띤다. p252

 

<베드로묵시Apocalypse of Peter>라는 제목의 문서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을 때 웃으며 기뻐했다. (<요한행전>의 이야기에서처럼)는 흥미로운 본문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군중이 예수의 심자가 처형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하는 데 낙담하여 예수가 대답한다. “내갖ㄴ에 너에게 ‘눈먼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어라’ 하지 않았느냐?” p254

 

이 시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영지주의 자료가 2천년 만에 처음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 온 초기 기독교 시대에 관한 그림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일한 어떤 ‘위대한 교회’도 없었고, 이른바 ‘영지주의적 이단’이 일부러 고집스럽게 분리해 나온, 그 원뿌리 되는 정통 기독교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는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종류의 신앙과 해석,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그노니스의 집합체였다. qdud지주의 기도교가 다시 수백 개의 분파로 쪼개지고 있는 지금, 또다시 그릇된 비난과 외면을 당하는 ‘이단자’, 곧 영지주의자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림은 변하고 있고, 변화의 힘은 사막의 모래에서, 조그만 노란 먼지 구름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뿜어낸 오래된 붉은 점토 항아리에서 우리에게로 왔다. p256

 

14. 영지주의와 탈현대 사상

 

우주의 질서와 법칙과 장엄함은 대부분 위조된 것이다. 불변하는 질서와 인과율이라는 덮개 아래 있는 우주는 무질서하고 임의적임에 틀림없다.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진술에 대해, 영지주의자는 “오, 지금도 하지 않는가?”라며 반어적으로 대답할지도 모른다. 데미우르고스의 가장 일반적인 이름 중 하나인 얄다바오트는 ‘유치한 신’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조립한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존재의 특징에 딱 들어맞는다. p261

 

그노시스와 허무주의

영지주의자들은 종교적으로 또는 세속적으로 인정된 규율이 사회에 무익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바르게 행동함’으로써 구원과 천복의 권리를 살 수 있다는 개념에 반대했다. 하지만 도덕률 폐기론(법을 반대하는 것)의 책임이 계속해서 영지주의자들에게 돌려졌다. 그 뒤에는 영지주의자를 향한 비난이 허무주의, 주로 도덕적 허무주의에 대한 고발로 바뀌었다. p263

 

유대교의 핵심 가르침인.. 윤리적 유일신론에서는 늘 사회적 규범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법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벌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p264

 

역사적으로 말하면 최후의 가장 위대한 사자인 예수는 모세의 옛 율법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 영지주의자들이 사랑의 법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율법을 세웠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는 예수의 말씀을, 영지주의자들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 또는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영지주의자들은 사회의 법을 이차적인 실재, 곧 영적 실재의 위조품 정도로 여긴다. 영적 통찰을 갖춘 수준에 오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사회의 법을 신성시하여 ‘신의 법’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면서 자신들의 규율과 제도가 초월적 실재인 양 투사한다. 법이 종교의 최우선 목표가 되게 함으로써 인간은 그노시스의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한편 영지주의자는 영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영에 대해서는 “그것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한복음 3장 8절>라고 씌어 있다. p264

 

영지주의자는 어떤 점에서 허무주의자와 다른가

확실히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것이 영지주의적인 것이든 혹은 다른 종교의 것이든 간에, 그것이 보증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이 따르고, 그 위험의 일부는 신비가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 신비주의는 때때로, 기독교 십자군과 종교 재판, 그리고 이란의 이슬람 혁명조치같은 현상이 증명해 보이듯이, 광신주의로 귀결되기도 한다. 수많은 십자군 수도사들이나 종교 재판관들은 나름의 신비가로 분류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다소 잔인한 율법학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지주의 전통을 따르던 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p267

 

문화에 대한 틀에 박힌 관념들을 부정하는 것이 허무주의를 뜻한다면 영지주의자는 떳떳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정직성을 늘 유지해 왔다. 그들은 어떤 사회를 향해서도, 제도를 숭배하는 자들이 즐겨 바치곤 하는 무조건 적인 찬양을 바치지 않았다. p267

 

영지주의의 <빌립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과 똑같이 인간도 자신이 찬양할 자신의 신들을 창조하는 방법으로 화답했다고 반어적으로 말한다. p267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초월하는 데에 관심했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하지 않았다. p268

 

정보화 시대에 대한 영지주의적 관점

우리 사회는 정보의 포화상태에 이르러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더 많은 정보를 갈망한다. 정보를 많이 수집하면 할수록 삶은 점점 덜 실재적으로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현대인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과학 기술에 의해, 그리고 그 과학 기술을 통해 얻은 정보에 의해 혼란스러워한다. p271

 

에필로그

하지만 민감하고 훨씬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밤의 시력은 낮의 밝음에 압도되고 만다. 하늘의 발광체들은, 비록 존재하긴 하지만, 낮의 밝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낮에는 별빛은 완전히 가려지고 아주 가끔 달의 윤곽을 볼 수 있을 뿐이다. p273

 

우리는 한낮의 햇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란한 의식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사실들을 수집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직껏 더 큰 행복을 얻지는 못했다. 우리는 갈수록 더 작은 것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신비로운 빛을 품고 있는 밤하늘을 볼 줄 아는 영지주의적 시력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경험의 비물질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중요한 조화와 귀결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근시를 앓고 있으며, 그래서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시공간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p274

 

실패한 신들

칼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려고 시도했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둥, 폴 포트 같은 그의 추종자들은 동료 인간을 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몰살했다. 히틀러는 인종주의와 영토 확장을 통한 구원을 강구하며 자국민을 포함해 약5천만 민중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겼다. ... 정치적 구원의 신은 실패한 신으로 판명되고 있는 것이다. p275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는 또 다른 신은 환경 보호주의라는 신이다. 과학 기술의 계속적인 발달에 놀란 우리는 자연 세계-혹은 우리가 역설적인 이름을 붙인 ‘환경’-를 걱정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환경’이라는 말은 자연 세계를 인간을 둘러싼 무언가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 용어이다. p275

 

영지주의자와의 마주침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리 문화의 두 가지 입장과 철저하게 대조된다. 첫 번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고 자연 세계는 단지 인간의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하느님은, 적어도 존재한다면, 부적절한 존재이다. .. 두 번째 이보다 최근의 입장에 따르면, 자연 세계가 모든 가치의 근원이고 인간은 우주 생태계의 침입자이며 하느님은 적어도 존재한다면, 자연 속에 내재하며 사실 자연과 구별할 수 없다. 영지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 질서는 참된 가치가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멀어졌기 때문에 어느 것도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오직 인간의 의식이 분리의 심연 너머로 뻗어 올라 하느님과 맞닿을 때만 참된 가치가 파악될 수 있다. p279

 

영지주의자들은, 우리를 만나서 우리가 강 건너편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노를 젓는 뱃사공과 같다. 영지주의자는 자신이 강 건너편 지역에 밝다고 말할 것이고 우리를 확신시킬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의 나룻배를 타기 위해서는 현재 머물고 있는 대지를 떠나야 한다고 우리를 일깨울 것이다. p279

 

영지주의 경전은 인간의 곤경을 무지와 잠, 만취, 그리고 망각과 동일시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다가온다. 우리는 그런 곤경에 갇혀사는 삶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문이 열려도 우리를 떠나기를 거부하는 짐승과 같다. 그노시스가 가져다주는 자유보다는 차라리 잠자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지금의 삶의 방식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p280

 

영지주의의 사상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뿌리 깊은 신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 사회가 강요한, 검증되지도 않은 가설들에 불과한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지주의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때론 분개를 촉발시키기까지 한다. 영지주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따라온 것들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다. p280

 

3. 내가 저자라면

 

굳이 융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영지주의 문서와 처음으로 마주친 때를 회상하며 그는 “마침내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들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버틀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소개된 수 많은 책들 가운데 나는 왜 이 책을 고르게 되었을까.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겠다. 하나는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왔던 책들, 신화와 영웅들의 이야기, 철학, 심리학 속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은 반복되어 거론되어 왔다. 때로는 저자들의 삶 속에 가려져 있기도 했고, 그의 생각들 속에 녹아져 있기도 했다. 융을 읽으면서 그랬고, 조셉 캠벨의 저작이나 이윤기의 삶 속에 강한 영감들을 불러 일으키고 지나간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늘 궁금했다. 연구원 일정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면 꼭 봐야겠다고 생각해 둔 주제가 ‘영지주의’, ‘신지학’이었다.

 

또 하나는 러셀이 철학사를 정리하면서 했던 말 중에,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이들에게 철학을 쉽게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동기에 따른 분류라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종교철학과 이론철학, 실천철학으로 나누는 것이 철학의 체계와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중 지난 2천년 동안 우리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꼽는다면 단연 종교철학이다. 특히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이 바로 ‘바이블’이다. 그만큼 절대적으로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고, 때론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더 많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뛰어 넘어야 할 벽에 부딪쳐 있다. 어찌보면 시장의 위험보다도, 봉건적 정치보다도 더 심각하면서도 더 중요한 문제가 종교적 이유로 빚어지는 문제들이다. 문명의 충돌과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전이라는 이름의 테러 그것은 핵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광기를 갖게 하기도 하고, 심연보다도 깊은 사랑을 하게도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양날의 칼을 가진 종교철학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피해갈 수 없는 것으며, 그 근원으로 접근해갈수록 영지주의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왔던 탓이다.

 

뉴에이지의 열풍과 ‘다빈치 코드’나 ‘장미의 이름’을 통해 언뜻 언뜻 비쳐져 왔던 ‘영지주의’는 최근에 와서야 ‘영지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껏 위험한 일로 여겨지고, 이단에 대한 종교적 편견과 탄압이 그치지 않고 있다. 장승을 세우는 일조차 우상숭배라며 거품을 물고 드러눕는 이들에게 몽둥이도 약이 될 수 없고, 그 어떤 신사적인 처우도 <사탄의 후예들>로 비쳐지곤 한다. 블로그들을 검색하다보면 당당히 ‘영의 전쟁’을 선포하는 목사들의 목소리가 높고, 영지주의를 사탄의 행동으로 단죄하려는 험악한 분위기도 여전하다. 정말이지 비틀즈의 노랫말처럼 ‘차라리.. 종교가 없다면..’하는 심정에 공감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영지주의 입문서로 영지주의의 개괄적 흐름과 주요한 개념들 그리고 타 종교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체의 개방성과 다양함을 설명해내고 있다. 또한 그 흐름을 이끌어 왔던 이들에 대한 소개와 주로는 정통 주류인 기독교와 쟁점이 되는 부분들에 대한 영지주의적 입장을 소개했다. 어렵지 않지만, 자신의 고민이 없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무지로부터 그노시스를 통해 영적 체험을 하고, 해방(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하고 고민한 만큼 일 것이다. 다만 융의 말처럼, 내가 앓아왔던 종교적 질문들-질문조차도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에 대한 해답을 얻어가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물주와 창세기, 구약성서의 신에 대한 정의와 예수에 대한 외경들의 이야기들은 통렬하기까지 했다. 또 하나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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