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1년 1월 10일 03시 24분 등록
저자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때 우리는 실제로 살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의 힘중>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 신화 해설자, 신화학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 생소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기에, 명예도 얻고 돈도 벌었다. 생소하더라도, 최고가 된다면 성공이다. 

미국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집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후에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을 펴냈다. 프린스터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등의 저서를 썼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학문과 노력하는 분야에도 귀천이 없다. 켐벨 이전, 누가 신화 따위에 관심을 가졌겠는가. 하지만, 그는 신화의 중요성과 의미에 큰 뜻을 두었고, 그 의미를 만인에게 전파하는데 노력하고, 또한 성공했다. 그는 영원히 신화학자로서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나는 사업가로서 기억되기를 바란다. 묘비명에 이렇게 써달라. 김인건, 신의 직장을 못들어가는 대신, 신의 직장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치다. 

------------------------
1.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은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8
-->3년마다 일을 사업이나 보직을  바꾸어야 한다.  3년이면, 현재 일에  능숙해진다.  이 일이 세상의  전부인냥 생각한다.    

2.  젊은 사람들은 덥석 잡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지이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 신화는  변화의 이야기다.  통과의례가 있으며,  고통스러워도 나아가야 한다.  삶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화의 길을  알아야 하고,  그 길로 거침없이  나아가야 한다. 3년간  음식 장사를 하다.  더  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  좋든 싫든  떠나야 한다.  

3.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삶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7
--> 오늘이  딸아이 생일이다.  장사하느라 얼굴  본지도  꽤 되었다.  자녀와  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도  중요하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북극성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성취도 소통만큼  중요하다.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조화가 가능할까?

4.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모든  영웅은 고난을  겪는다.  모든 사업은  부침이  있다.

5.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74
--> 경영자는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  난 무엇을  추구해야하는가? 정진.  나에게  정진은  무엇인가? 성과를  향한 몸부림.  

6.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합니다. 89
--> 난  그리 기질이  강하지 못하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다보면,  하고  싶은 일도,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생기리라는  것이  내 믿음이다.  

7.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입니다. <푸른 수염>이야기를 생각해보세요.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아내는 그 금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6
-->금지된 것.  생각하면 혼란스럽다.  한 가족의 가장들중,  금지된 것을 거스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스른다해도,  철부지같아  보인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된다.  무턱대고 사표 쓸 일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실천한만한 일을 ,  용기  있게  행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겠다.  

8.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지금은  얼굴보면서 전화로 이야기한다.  기술은 발전했고, 라이프스타일도  변했지만, 소통에  대한 욕구는 변하지  않았다.  

9.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이라는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아는 것 같군요. 후자는 어쩐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낸 관념 같아서 말이지요.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원형이라는 것이 하의식下意識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107
--->밥벌이가 프로이트적 무의식이라면,  비지니스로 성공하겠다는 욕망은 생물학적이다. 

10.  아리스토파네스가 플로톤의 <향연>에서 조사하고 있는 그리스 전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아리토스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어요.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이들을 각각 둘로 갈랐어요. 하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들은 끊임없이 그 짝을 찾아서 원초적인 합일 상태를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진력한다는 겁니다.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나를  찾고자 함이다.  

11.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113
-->삶은  말이  아니라,  근육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기억된다.  

12. 브라마는 신의 에너지와 신의 영광을 상징하는 연꽃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연꽃은 비쉬누의 배꼽에서 자랍니다. 비쉬누는 잠의 신인데, 이 신의 꿈이 곧 우주입니다. 128
--> 잡기  전에는  놓을  수 없다.  빈손인데  무엇을  놓겠는가? 

13.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빌게이츠는  현역에 있을때, 1년에  2주 동안 휴가를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임에도,  2주 동안  휴가를  보낸다는 것은  손실이  크다. 그의  창조력과  결단력은 충분한  휴식에서 나온다.  진력을  다해서 일한다.  결과를  예상하며 일한다.  내가 할일은 손님을  끄는 것이다.  마켓팅이며,  영업이다.  

14.  이 성소가 우리에게, 초원이 사냥꾼에게 했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경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0
-->경제화, 실용화는 자연스러운 인간성과 어울리지 못한다. 일상에는 오아시스가 필요하다. 바쁜 생활중, 어떻게 성소를 만들 수 있을까?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내게는 성소다. 

15.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굼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0
--> 사람이 무능력해지는 것은, 너무 다양한 일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만 잘한다. 내가 탁월하게 잘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장의 일이란 무엇인가? 직원들을 관리하며, 손님을 끌고 오는 일이다. 

16.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
-->보통 사람이 사는 모습과 달리 살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혼자서 그 길을 가기란 어렵다. 보통 사람과 똑같은 살면서, 내 길을 나아갈 수는 없는가? 해야하는 일을 하다보면, 좋아하는 일, 내 마음에 드는 일도 생기지 않겠는가?

17.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신화는 우리에게 그만큼 더 수다스러워집니다. 종교 관념이나 신화 관념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것을 어린아이의 단계인 제 1단계에서 배운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 단계는 무궁무진합니다. 각 단계마다 신화가 드러내는 계시 역시 무궁무진합니다. 
-->신화는 씹으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 같은 일도, 그 안에서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만들 수 있다. 그 의미가 개인의 신화다. 

18.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하는 ,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런 무엇입니까?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일입니까, 삶입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렇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나 예수 같은 이들과는 달리,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여행을 떠나고, 우리 심층으로 내려가고, 용을 죽이는 이 일.....반드시 혼자 해야 합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3
-->사업은 안해본 일을 시도하는 것이다. 매출 증대는 기존의 방법이 아니라, 다른 시도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19.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잔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진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87 
-->어머니 밑에서 일한다. 어머니에게서 월급 받는 이상, 어머니 안에서 나올 수 없다. 성장도 없는 것이다. 새로운 사업은 온전히 내 힘으로 한다. 

20. 달라이 라마에게서는 원망이나 미움과 관계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그 교과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종교가 거기에 있었답니다.'293
-->사업가는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화를 내되, 원칙이 필요하다. 화를 낼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직원들에게 야단을 칠 수 있어도, 화는 낼 수 없다. 

21.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내'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47
-->나는 내 천복을 따르는가? 나는 지금 일에서 성공하고 싶다. 이 일이 나와 맞나, 안맞나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22. 어떤 결혼에서는 그렇고 어떤 결혼에서는 안 그렇죠.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성실이라면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365
-->진실성. 대박은 없다. 꾸준한 상승만이 가능하다. 

23. 물론이지요.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돈에 대한 명상, 사업가가 매순간 하는 일이다. 

24. 가족을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를 명상하는 것도 주요한 명상이지요. 그러나 명상 자체를 위한 명상도 있습니다. 가령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이런 명상에 잠기고는 하지요. 378
-->결국 자기 일에 몰입하고, 성심을 다하는 것이 명상이며, 이때 평온을 얻는다.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단식을 할 필요도, 산에 들어갈 필요도, 라이프 스타일을 바꿀 필요도 없다. 

25. 그래요. 쇼펜하우어는 그 명문<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요. 그의 생각은 이래요.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안다. 내 삶도 그러할 것이다. 내 삶은 내가 계획할 수 없다. 난 주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함으로써, 내 길을 찾을 것이다. 내길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서로 관련 없는 길도, 묘하게 연결될 것이다. 스티븐잡스가 맥킨토시를 만들때, 서체지식을 써먹었을 수 있었던것처럼. 

26. 자, 그렇다면 이 일관된 구성은 누구 손에서 이루어지느냐?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특정인은 때로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 모르게 그 특정인을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점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산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거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412
-->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뿐이다. 그것도, 열심히 하는냐, 없느냐만 결정할 수 있다. 나머지는 흘러간다. 계획하지 말라. 그 계획대로되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27.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 삶은 말이 아니라, 근육으로 나아간다. 근육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할 시간이 없기도 하다. 말만 하는 사람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 

 
28. 그에게 신화는 ,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 우리는 은근히 즐기면서 콩고의 주의呪醫가 부르는 '뭄보줌보의 노래를 듣거나, 신명나게 번역한 노자<도덕경>의 난해한 대목 대목을 읽거나, 아퀴나스의 논의라고 하는 단단하기 짝이 없는 호두의 껍질을 더러 깨뜨려보거나, 문득 기괴한 에스키모 민담이 지니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의미를 감청하거나 한다.
 
그의 상상력에 따르면 이 엄장하면서도 음산한 화성和聲은 우리 조상들이 끼리끼리 모여앉아 먹거리 삼아 죽인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죽은 동물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태동한다. 우리 존재의 가시적인 지평 너머, '어딘가 멀고 아득한 곳에 동물의 주님이 있는데' , 바로 이 동물의 주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삶과 죽음을 다스릴 권능을 넘겨준다. 만일에 이 동물의 주님이 동물을 인간의 손에 붙이지 않으면 사냥꾼의 일족은 굶은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냥이라는 행위는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가 되고, 사냥꾼은 그 동물이 희생하여 다시 한번 제물이 되어달라고 비는 마음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과 화합을 기도하는 일련의 몸짓을 보인다. 이 경우 공희제에 등장하는 동물은 저승에서 온 사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캠벨이 요약하는 바에 따르면, 이로써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 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이들의 예술(이들이 그린 암벽화)과 구비문학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충동에 모습을 부여하게 된다. 16.
--->손님과 사업가의 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다. '돕겠다'는 마음이 진실해야, 손님은 온다. 
 
29. 영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오늘날 중동과 북아일랜드에서 그렇듯)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이 '영원의 가면'은  그 '영광의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 - 창세, 처녀 수태, 신자 성육(神子成肉),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 - 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종교가 많아도, 진리는 하나이다. 삶의 양상은 다양해도, 삶은 하나다. 영웅은 편안한 삶을 버리고, 모험을 하며, 고난을 겪어서 성장해간다. 변화가 없다면, 영웅도 없다. 삶이 아니다. 
 
30.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 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38
-->경영인은 무엇에 프로페셔널해야하고, 어느부분에 잡학해야하는가? 경영인의 전공은 '사람'이다. 잡학해야하는 것은 '사업'이다. 
 
31. 그러다가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만 겁니다.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었지요.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들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39
-->부모님이 사놓은 책이, 결정적으로 캠벨을 신화학자로 만들었다. 가정내에 양질의 책을 사놓는 것이 필요하다. 의미는 몰라도, 어린 시절 양질의 책을 접한 아이들은 그것이 곧 교양이 된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들은 시공을 초월한 테마로서 어느 문화에도 있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테마가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문화는 이런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야기의 테마는 보편적이지만, 민족의 기질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겠군요?
 
그럼요. 테마의 대응 구조라는 것을 모르고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다른 게 아니에요.
 
선생님께서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이나 신화를 가르쳐왔습니다. 고마고만한 중류 가정을 배경으로 하여 대학에 온 젊은 처녀들에게 정통 종교와 다른 이 신화를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어떻게 신화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까?
 
32.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신화가 말하는 것은 이렇다. '떠나라, 그리고 자아를 완성하라' 지금 일에 익숙하다면, 그 일을 버려야 한다. 두렵고, 낯선 곳으로 떠나야 옳다. 
 
33.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42
--> 판사를 판사로 만드는 것은, 그의 법복이며, 그것을 입었을 때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는 3년간 음식장사를 했다. 나는 장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 허나, 손님들은 나를 장사꾼으로 만들었다. 나의 다짐 보다는, 그들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 
 
그래요. 엉뚱하게도 기계적인 방법으로 신비 체험에 뛰어들려고 해요. 나는 진짜 신비 체험과 정신 질환의 일종인 심리적 해리解離의 차이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회 같은 데 참석해본 경험이 여러 번 있어요. 심리적 해리를 통하여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진짜 체험이 아니에요. 해리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기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비 체험에 빠져드는 것은 신비가 헤엄치고 있는 물에 빠져죽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신비 체험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니다.
 
페요테(선인장의 일종. 혹은 그것에서 나오는 환각제 - 옮긴이) 문화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버팔로(들소)와 고유한 모습의 삶을 잃은 인디언들에게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 말씀입니다.
 
그래요. 우리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는 어느 문명 국가의 원주민의 역사 중에서도 최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아메리카 인디언은 사람이 아니에요. 심지어 인디언은 미합중국의 선거권자 통계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독립 전쟁 직후에는 걸출한 인디언들이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의 삶에 실제로 동참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조지 워싱턴은, 인디언은 마땅히 우리 문화권의 일원으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지요? 그들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어요. 19세기에 동남부 인디언은 깡그리 마차에 실린 채 군대의 경비 아래, 이른바 인디언 거주 지역으로 옮겨졌어요. 이 인디어 거주 지역이라는 것은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영구 거주 지역으로 준 땅입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인디어들에게서 이것마저 빼앗고 말았어요. 45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서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34.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명상이란 한가지를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를 깊이 생각하면, 삶은 변한다. 어떻게 깊게 생각할 것인가? 기록한다. 기록해야 집중한다. 


35.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뉴욕의 51번가와 5번가를 지나 성 패트릭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나는 대단히 번잡한 도시,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첨예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내 주위의 모든 것은 영적인 신비의 차원에서 나에게 말을 겁니다. 십자가의 신비....바로 이겁니다. 채색 유리는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47 합니다. 내 의식 역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옵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고대高臺에 섭니다. 그러다가 나는 밖으로 나와 거리의 군중과 합류합니다. 자, 이 경우 내가 성당 안에서 가지고 있던 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다가 거리로 나오면, 문득 내 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겠지요. 의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러한 신비는, 가령 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합니다. 이른바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8
-->돈에는 어떠한 에너지가 있는가? 돈에 욕심이 있다고,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욕심이 없으면 돈을 못버는 것은 확실하다. 
 
문득 테세우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주제로 한 피카소의 작품<미노타우로마키>이미지가 떠오르는군요.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접근하는 거대한 괴물 소를 표현한 판화이지요. 이 판화에서, 철학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달아나려고 사다리를 오릅니다. 투우장에는 죽음을 당한 말이 한 마리 있습니다. 제물이 된 이 말의 잔등에는 역시 죽음을 당한 여성 투우사가 널브러져 있지요. 이 무시무시한 괴물고 맞서고 있는 것은 꽃을 든 가녀린 소녀 하나뿐입니다. 모이어스 씨가 조금 전에 말한 람보 인형과 양배추 인형이 바로 이 미노타우로스와 소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하나는 무시무시한 위협을 상징하고, 또 하나는 단순하고 순진하고 아기 같은 이미지를 풍기니까요. 당신이 이 두 인형을 인상적으로 본 것은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문제를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인 예이츠는 우리가 위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주기를 산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그는 시 <재림>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빙글빙글 하늘을 돌고 또 돌면서도/ 매는 매잡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중심이 잡아주지 못해서. /세상에 흔한 것은 무질서/ 피거품이 번진다./ 그리고 도처에서/ 순진무구한 의례가 익사한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으로 나오려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사람들의 구부정한 걸음걸이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모르겠군요. 적어도 예이츠 이상으로 알 도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차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가 있게 마련인걸요. 우리가 느끼는 위기, 모든 사람이 느끼는 위기....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전장 아마겟돈이라는 관념이 바로 이것일 테지요.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오펜하이머는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이 세계의 파괴자인 사신이 되었구나' 고 했다지요. 하지만 선생님 께서는 우리 세계가 이로써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실 텐데요? 51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야 말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면과 함께 아버지가 맡았던 기계의 역할을 벗겨버립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36. 기계는 우리를 도와, 세상을 우리의 이미지에 따라 빚는다는 우리의 오랜 이상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계에 대하여, 마땅히 기계가 맡아야 할 역할만을 요구합니다. 
-->컴퓨터의 힘으로, 인간의 능력은 확장되었다. 이 힘으로 어떤 성과를 올릴 수 있을까? 어떤 노력과 집중이 필요할까? 정보가 늘어날수록, 필요한 것은 행동이다. 

그렇지요만,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나는 얼마전에 놀라운 기계를 한 대 샀어요. 컴퓨터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신들을 섬기듯 심기고 있어요. 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이지요. 이 기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금제禁制만 잔뜩 요구할 뿐 자비로운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한군데도 없는<구약성서> 의 신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당시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 사이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요. 아마?
 
아이젠하워가 컴퓨터가 가득 차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는 이 기계에다 '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입력시켰다지요? 그랬더니 기계들이 일제히 불을 번쩍거리면서 돌아가다가 한참 뒤에 '이제는 있지요' 하더라잖아요?55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손톱만한 판금板金이 온통 천사들의 자리입니다. 가느다란 튜브....그것은 기적이구요. 나는 내 컴퓨터에게서 신화에 대한 하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있어요. 소프트웨어를 하나 사면, 거기에는 우리가 겨냥하는 바에 따라 컴퓨터를 부려먹을 수 있는 명령 신호signals가 있습니다. 다른 소프트웨어 체계의 명령 신호로 어떻게 해보려고 해봐야 컴퓨터는 말을 들어먹지 않지요. 
 
신화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비의秘儀의 메타포가 아버지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고, 이 세계의 지혜와 비의의 메타포가 어머니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을 경우, 각각에 맞는 다른 명령 신호를 입력시키지 않으면 접근이 안 됩니다. 양자는 완벽한 메타포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이 중 어느 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메타포이지요. 그것은 우주를 내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주를 내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누구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고 했어요. 
 
이때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성서에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길을 따르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이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의 기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이르려 한다고 칩시다. 그러자면 인도의 칼리 여신등을 통해서 여신을 찬송함으로써 이르는 편이 나을 테지요. 이것은 우리 삶의 신비에 이르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거지고 놀기를 좋아하는(그래요, 아주 잘 가지고 놀지요)나 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56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띕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그런데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마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이겠어요?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된느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닏.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그래서, 자연을 깔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것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자연을 통제하거나 복속시키려고 하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일본에서 겪은 경험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에서 일본이라고 말하는 곳은 에덴 동산이 무엇인지도, 인간의 타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땅으로서의 일본입니다. 신도神道경전을 보면, 자연의 프로세스는 절대로 사악할리 없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즉 절대무류인 것이지요. 자연의 충동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복종해야 할 대상, 가꾸어야 할 대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과 관련된 환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어떤 정원을 보면, 어디까지가 자연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이게 내가 일본에서 했던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지요. 
 
하지만 캠벨 선생님. 오늘날의 도쿄는 그런 이상주의가 언어도단이라면서 반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쿄는, 몇몇 사람이 가꾸는 조그만 정원을 제외하고는 자연이라는 것이 자취를 감춘 도시 아닙니까?
 
일본에는 '파도와 함께 흔들려라'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복싱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가격加擊 리듬을 타라고 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페리 제독이 일본의 문을 두드려 열게 한 지는 125년 밖에 안됩니다. 그 시절 일본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기계를 모아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일본에서 본 것은 일본인들이 기계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이 기계의 세계를 자기네 세계로 끌어들이는 광경이었어요. 겉을 보면 그렇지 않지만 일단 빌딩의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일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겉을 보면 뉴욕과 다름 없는 게 바로 일본이지만요. 
 
'머리를 싸매고'라는 표현이 재미있구요. 온통 도시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즉 영혼이 있고 내적인 자기 자신이 있는 세계에서는, 선생님 말씀대로 여전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러나 성서에서는 영원은 물러나고, 자연은 부패하고 타락해 있어요. 성서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추방된 채 살고 있지요. 
 
선생님과 여기에 앉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베이루트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한 폭탄 공격 소식이 연이어 들어옵니다. 기독교도 지역에 대한 회교들의 공격, 회교도 지역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공격, 기독교도들에 대한 기독교들의 공격....마셜 맥루언의 말이 과연 옳다 싶어서 섬뜩합니다. 맥루언은 텔레비전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을 만들 것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맥루언도 그 지구촌이 이 세상을 베이루트 꼴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몰랐겠지요? 여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63 리 현대 세계가 당명하고 있는,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치고 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이들은 저희의 신화학이 미래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64. 
 
37. 그런데 그런 독수리가 내려옵니다. 한 쌍의 대극對極이 병존하는 세상, 즉 행동의 장場으로 내려옵니다. 행동의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전쟁이고 또 하나는 평화이지요. 그래서 독수리는 한쪽 발로는 13개의 화살(전쟁의 원리를 상징하는)을 쥐고 있고, 나머지 발로는 열세 개의 잎이 달린 월계수가지(평화 회담을 상징하는)를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월계수 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합중국을 세운 이 이상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외교적인 관계 등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굴어라. 이런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외교가 안 통할 경우에 대비해서, 다행스럽게도 독수리는 다른 발로 화살을 그러쥐고 있네요. 
-->대극점. 현실에는 이상적인 것이 없다. 모두 불안정하다. 좋은 것은 항상 좋지 않다. 나쁜 것은 그리 나쁜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크게 실망할 일도 없다. 감정에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면 독수리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독수리는 머리 위에 보이는 빛나는 그림이 지닌 의미를 상징합니다. 언젠가 워싱턴의 외교연구원에서 힌두의 신화학과 사회학, 정치학을 강의한 일이 있습니다. 힌두의 치서를 보면, 군주는 마땅히 한 손에는 전쟁 무기를 상징하는 굵직한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단합을 상징하는 평화의 노래책을 들어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내가 그 두 개를 들고 있는 시늉을 하느라고 이렇게 팔을 벌리고 서 있었더니, 좌중이 웃음바다가 됩니다.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웃나 싶었을 뿐, 나는 그 이유는 몰랐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손가락질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더군요. 그쪽을 보았더니 바로 이 독수리 문장이 내 뒤에 걸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 독수리 문장 앞 독수리의 머리 위에 그려진 그림과 아홉 개로 이루어진 꼬리털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이 세상에 내린 신의 힘을 상징합니다. 삼종 기도 시간을 알리는 카톨릭 교회의 종은 아홉 번 울립니다. 68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상징을 오래 연구하셨고, 깊이 관심을 두셨기에 우리 국장을 이런 식으로 읽으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었던 당시 사람들이 자기네가 세우는 새 나라에 이러한 신화학적 함의를 투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왜 그런 상징을 이용했을까요?
 
그런 상징의 대부분은 프리메이슨의 상징 아닙니까?
 
상징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즐겨 썼던 암호 같은 것이지요. 피타고라스의 데트라키스는 수세기 전부터 일반에 알려져 있었거요. 아마 이들은 이 정보를 토머스 제퍼슨의 도선관에서 찾아내었을 겁니다. 어쨌든 대단한 박식들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박식한 신사들의 시대였지요. 하지만 우리의 근대 정치사에는 그런 박식한 신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사들의 무리가 권력을 잡고 그 시대의 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국가로 보면 대단한 행운이었지요.
 
이러한 상징과 프리메이슨 암호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초기 국부國父들의 상당수가 프리메이슨 당원들이었을까요? 프리메이슨 암호 역시 신화적인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이니시에이션(입문 의례)의 형식을 재정립시켜 영적인 지혜에 이르고자 하는 학문적인 노력의 소산입니다. 상당수가 프리메이슨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던 국부들은 실제로 이집트의 신화나 전설 같은 것을 공부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는 원초적인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연례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의 수위가 줄어들고 나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 무덤은 재생한 세계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국장이 암시하고 있는 것도 그것입니다. 72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면,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재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의 신화도 있고, 단혼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호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75
 
이제 과학자들은 공공연하게 가이아(대지의 여신) 이론을 입에 올리는데요?
 
유기체로서의 지구 말인가요?
 
모신母神으로서의 지구일 테지요. 이 이미지에서 새로운 신화가 태동할까요?
 
할 테지요.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도리 것이야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77
 
시대를 달리하고 나타날 적에는 옷만 바꾸어 입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말하자면 지방에 따라 그 지방 연기자가 그 지방 옷을 입고 나와서 똑같은 옛날의 연극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f fascinan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으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도니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세상을 보되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것으로서 세상을 보는 견해가 중세에 있었지요?
 
그랬지요. 신화가 바로 이 메세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신화는 우리 인류에게 전형적인 어떤 것을 일러주니까요.
 
예를 들면요?
 
38.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 가장 어두운 곳을 경험한 사람은 강하다. 
 
'어둠의 순간에 눈이 보기 시작한다'는 레트커의 시구처럼 말씀이지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신화가 바로 이 같은 의식을 선생님께 준해준 것 같은데요?
 
39. 나는 신화와 같이 삽니다. 신화는 나에게 늘 그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 같은 순간에 은유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시바Shiva 신과 동일시해도 좋겠지요. 나는 시바신이다. ....이것은 하말라야 요가 행자들이 수행하는 명상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86
 --> 이 말은 당신안에 부처가 있다'는 불교 사상과 상통한다. 불성을 드러내는 것이 성불이다. 모든 이는 자신의 일과 역할을 통해서, 성불할 수 있다. 

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꿈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40.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꿈을 스스로 해석한 것에 믿음이 가지도 않고. 곱씹어볼 정도이지, 기록하고 분석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니까, 은퇴하기 전까지는 꿈을 꾼 기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너지를 집중시킬 곳이 없어지니까 매일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리 현대 사회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꿈의 의미를 되씹어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판된 이래로 많은 사람이 꿈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그전에도 해몽解夢이라는 것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꿈에 대해 약간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가령, 내 꿈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신화는 왜 꿈과 다릅니까?
 
41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이다. 이 신화에는 참고 견디면, 볓뜰날 있다는 내용이다. 그때문인지, 한국인들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민족이다.  

역시<창세기>1장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형상,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중략)....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
 
서아프리카 바사리족의 전설을 읽어보지요. '우눔보테가 인류를 창조하였다. 인류의 이름은 사람이다. 우눔보테는 그 다음으로 영양을 만들고는 영양이라고 이름하였다. 우눔보테는 뱀을 만들고는 뱀이라고 이름하였다. ...(중략)....우눔보테는 그들에게 이르되, '이 땅은 아직 다져지지 못했구나. 그러니 가서 앉아 땅을 부드럽게 다지거라.'우눔보테는 그들에게 온갖 종자를 주면서 이르되, '가서 이것을 심어라....'
 
<창세기>2장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느님 지으신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 끝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다시 피마 인디언 이야기를 읽지요. '내가 세상을 만들었으니 보라. 세상 짓기가 끝났구나. 이렇게 내가 세상을 지었으니 보라! 세상 짓기가 끝났구나!'
 
이번에는 <창세기>1장입니다. '하느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42. <우파니샤드>에서 읽지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내가 지었구나, 무슨 까닭이나 내가 낳았음이라' 이로써 그는 그 지은신 이가 되었더라. 진실로 이 짓는 일에서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창조주이니라'
--> 안좋은 일이 생기면, 그 일은 직접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어도,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이 표현은 상투어구가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을 알면 이 세상에 와 있는 하느님의 힘인 창조의 원리를 아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이런 뜻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94
 
43. 섹스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썩은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에덴 동산은 걱정 없는 곳이다. 고뇌도 없다. 금기를 깨는 순간, 그들은 힘들어하는 대신, 지혜를 얻었다. 에덴동산은 현실에도 많다. 안이한 생각, 직장, 등이 모두 에덴 동산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쫓아내지 않는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와야 한다.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신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시원한 석양의 바람을 쏘이다가 그곳에 들른 야훼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아요. 동산은 뱀의 본거지였으니까요. 물론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원전 3천 5백년 경에 만들어진 수메르의 봉인이 있어요. 이 봉인에는 뱀과 나무와 여시놔 남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나그네인 남자에게 생명의 과실을 주고 있지요. 태곳적의 여신 신화가 여기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래전에 한 영화에서 아주 굉장한 장면을 보았어요. 산길을 오르면서 비내리기를 빌던 미얀마 뱀 사당의 여사제가 동굴에 있던 킹코브라를 불러내어 코에다 진짜로 세 번이나 입을 맞추는 겁니다. 이때의 코브라는 생명을 베푸는 존재, 비를 내리는 존재입니다. . 그것은 긍정적인 신성을 상징하지 결코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닙니다. 98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잇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지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인류가 놀랍게도 공통의 신화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모든 이야기에 여자라는 이름의 금단의 사실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을 신화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가령 어떤 신화, 어떤 창세 신화에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금제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금제가 있기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필경 금제를 어기고, 그러고는 쫓겨나옵니다. 몇 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권의 이야기에도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푸른 수염>이야기를 생각해보세요.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아내는 그 금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된는 것이지요.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유사성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과, 같은 본능,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이 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아는 것 같군요. 후자는 어쩐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낸 관념 같아서 말이지요.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원형이라는 것이 하의식下意識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일시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이점이지요. 107
 
하느님이 곧 창조 그 자체이고, 개인이 그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느님이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개인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 신에게는 두 측면이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태초에는 하나였는데, 이 하나가 분리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여자와 남자가 생겼다는 아주 기본적인 신화 모티프는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였던 시대로부터 이렇게 쫓겨나오게 되었던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게 쫓겨나온 것은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다. 먹지 말라고 하는 실과를 먹었거나 하느님에게 망령된 말을 했거나 해서 하느님이 노하시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이런 것이겠지요. 어쨌든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 영원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
 
44. 그런데 이와는 다른 테마도 있어요. 즉 인간은 천신天神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주제이지요. 이런 이야기에는 종종, 사람들이 기어오르는 거대한 사다리 혹은 밧줄 같은 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마지막으로 기어오르려는 사람들은 몸집이 대단히 크고 무거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밧줄을 당기면, 투욱, 밧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서 멀어졌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렇게 근원에서 멀어진 것은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그 끊어진 밧줄을 다시 잇는 것이 되지요. 110
-->어떻게 현실에서, 자신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을까? 사표 쓰거나, 현업을 버리는 것이 능사일까? 그것은 아니다. 신의 뜻도 아니다.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은유가 무엇입니까?
 
45.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는 도토리이다'라고 할 경우,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정말 글자 그대로 도토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도토리'는 '얼간이'의 은유인 것이지요.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은유를 남발하면, 은유에 갖힌다. 말로 떼우게 된다. 밥과, 돈, 연료가 있어야 삶은 돌아간다. 말이 아니라.  

46.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죠. 예수는 승천했습니다. 이 말은 명시적으로는, 예수라는 분이 정말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의 진의를 좇으려고 할 경우에는 언어라는 껍질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머리 위에는 예수가 갈 만한 데가 없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가 정말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물리적인 존재를 수용할 만한 물리적인 하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광속光速으로 승천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은하계 안을 맴돌겠지요. 천문학과 물리학은 하늘을 문자상의, 단순한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116.
-->은유이지만, 진실로 믿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우리가 민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화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즐기기 위해, 혹은 위대한 영적 순례의 차원에 조금 못 미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이야기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민담은 그저 듣고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인도에는 두 종류의 신화, 즉 민간의 관념과 근본적인 관념을 다타내는 아주 멋진 말이 있어요. 민간의 관념이 지니는 측면은 '데시desi'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 생활로 나서고, 들판으로 나가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응, 군인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사회를 위해서 군인이 되어 싸워야지', 젊은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47. 문명은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중세의 문명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救贖, 구속의 영광을 통하여 사람을 성사에 이르게 하는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한국의 문명은 참고 견뎌서, 마침내 사람이 된다는 단군 신화에 있다. 
 
성당은 성사의 중심이고, 성城은 성당을 보호하는 세력의 중심입니다. 이 양자에서 두 지배권이 형성되는데, 하나는 정신에 대한 지배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삶에 대한 지배권입니다. 이 양자는 하나의 바탕, 즉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바탕과 조화를 이룹니다. 122
 
48.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해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돈을 버는 이유가, 과시나, 컴플렉스때문이라면 잘못된 태도다. 건강한 사업은 '성장'에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목적과도 같다. 
 
49.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게 마련입니다. 인류는 선악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정당함과 부당함, 이것과 저것, 빛과 어둠까지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한 쌍의 대극은 남성과 여성입니다. 이 경우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수용적이며, 남성은 전사戰士이고 여성은 몽상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역과 전쟁의 영역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에로스(사랑)와 타나토스(죽음)라고 하지요.
-->현실에는 대극점이 있다. 좋은 것도 좋은 것이 아니며, 나쁜 것도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온전한 악은 없다. 악과 선이 한쌍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35
 
사방으로 뻗어 있는 머리카락은 흡사 사자의 털 같습니다. 첫번째 괴물은, 두 번째 괴물이 자기를 먹으려 하는 것을 알고는 기겁을 합니다. 자, 이런 상황에 처하며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인도의 전승은, 이 경우 신의 자비를 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래서 괴물은 시바 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바 신이시여, 이 몸을 신의 자비 앞에 던지나이다'
 
그런데 이 시바 신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자비 앞으로 몸을 던지면 자비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바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냐, 내가 너에게 자비를 내린다. 그러니 깡마른 괴물餓鬼이여, 그 괴물을 먹지 말아라.'
 
그러자 아귀가 항변합니다.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나는 배고파 죽겠어요. 신이 나를 이렇게 허기지게 했으니 이 괴물을 먹겠소'
 
이 말에 시바 신은 이렇게 명합니다.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그래서 이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굴 하나만 덩그렇게 남게 되지요.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지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터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이름하리라'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臺座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137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138
 
50.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 부모를 뛰어넘어야 나의 신경증도 사라지리라. 

---------------------------
구성, 
작년에 가장 손때를 많이 묻친 책이다. 선생님께서 좋아하는 작가인 이유도 있다. 어림풋했던 '신화'에 대한 개념도 나름 자리 잡았다. 내가 이해하는 '신화'의 개념은, 모든 삶에는 프로토콜이 있다는 것이다. 부침이 있고, 새옹지마이며, 좋은날도 있고, 나쁜날도 있다. 어려운 시기가 있으면, 반드시 볓뜰날도 있다. 그러니, 어렵다고 힘들어하지 말고, 좋다고 너무 경솔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천복에 대한 나의 개념도 정리를 했다. 아니, 정리중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작년은 내 의식을 커다란 국자로 휘젓는 나날들이었다. 정리되었던 것이, 일순 부유했다가, 다시 자리를 잡는가하면, 또 다시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나마 알수 없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렇게 부유하고, 불안정한 상태가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고정불변하는 북긍성을 찾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된다. 그 보다는,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나를 이루는 것이 순서라고 결론내렸다. 

여전히 읽기는 어렵지만, 이 책에는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 천복을 찾는 여정을 나섰다. 그 발걸음은 어제 했던 그 일과 같은 선상에 있다. 같은 길을 가지만, 그 마음은 다르다. 어떤 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가? 이 질문은 가까우면서도, 멀다. 현대 직장인이 자신을 이루는 길은, 지금 일에서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현실적'은 '이상적'이지 않고, 계산적이라는 이유다. 사다리 없이 어떻게 하늘을 오르겠는가? 오히려 이상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현실주의자다. 

사업을 해서, '거상'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다. 내 전문분야는, 직원을 관리하고, 손님을 끌고, 새로운 트렌드에 발맞추어 변신하는 것이다. 


IP *.123.110.1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692 43.<포트폴리오 인생> 찰스 핸디 [2] 박미옥 2011.01.17 2425
2691 [리뷰] 행복의 정복 최우성 2011.01.17 3003
2690 [북리뷰 43] 프로페셔널의 조건 신진철 2011.01.17 2092
2689 첫 번째 읽기- 코끼리와 벼룩/ 찰스 핸디 이은주 2011.01.17 2240
2688 북리뷰 68 : 한국인의 웰 다잉 가이드라인 - 한국 죽음학회 범해 좌경숙 2011.01.17 3609
2687 북리뷰 43.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_조셉 캠벨(민음사) 박상현 2011.01.17 2196
2686 <코끼리와 벼룩> - 찰스 핸디 김연주 2011.01.16 2082
2685 [북리뷰] 포트폴리오 인생. 찰스 핸디 이선형 2011.01.16 2273
2684 북리뷰 67 :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 헨리 나웬 [1] [2] 범해 좌경숙 2011.01.11 8449
2683 42. <필살기> 구본형 박미옥 2011.01.10 2537
2682 [북리뷰]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오병곤, 홍승완 이선형 2011.01.10 2929
2681 [북리뷰 42] 행복의 정복 Conquest of Happiness 신진철 2011.01.10 2355
2680 북리뷰 42. 신화의 힘_조셉 캠벨(심층 읽기) 박상현 2011.01.10 2228
2679 두 번째 읽기-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이은주 2011.01.10 2276
2678 북리뷰42 <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2번째 읽기 [1] 박경숙 2011.01.10 1907
» 신화의 힘 맑은 김인건 2011.01.10 1902
2676 두 번째 읽기 : <신화의 힘> -조셉캠벨 김연주 2011.01.09 2303
2675 [리뷰] 나를 가슴뛰게 하는 에너지, 강점 [1] 최우성 2011.01.09 3001
2674 북리뷰 66 :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 김용규 [2] 범해 좌경숙 2011.01.07 7944
2673 북리뷰 65 : 스피노자의 윤리학 연구 - 박삼열 [2] [2] 범해 좌경숙 2011.01.04 5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