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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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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7일 06시 39분 등록

* 원제 :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종교 교의는 녹아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5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서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6

 

저저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식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6

 

동양 및 서양, 현대, 고대 그리고 원시 전설의 차이를 개관하고 나서 추측해 낸 이 신화의 상사성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 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6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 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6

 

프롤로그

원질신화 The Monomyth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 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 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푸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 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5

 

당연히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지키주는 방벽은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제기간을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 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 dual unit 상황을 형성한다. 17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 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 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이원일체 Madonna and Bambino 상황이다. 17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다. 따라서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유아는, <좋은 것>, 혹 은 어머니의 <정상적인> 속성인 옆에 있고, 먹여주고, 보호해 주는 대상에게 애정을 쏟는 한편, 원래 <나쁜 것>, 혹은 <어머니가 없는 상태>에다 쏟던 공격의 화살을 아버지에게로 돌린다. 유아가 죽음(Thanatos: destrudo)과 사랑(Eros: libido)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포스 콤플렉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17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18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찬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使臣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21

à 무의식의 세계를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뇌관. 이 뇌관에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질서의 전복이 이뤄진다.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1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2

 

모든 통과 제의에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또아리의 구성원 모두가 의미 있는 체험을 하게 되어 있다. (각주) 22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3

à 융은 집단무의식이 상징으로 표출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상징은 개인적 제약상황을 극복하도록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염증은 이미 심장을 죄고 있었을 테고 한때 사랑의 유혹이었던 지복의 약속으로 부르는 것은 삶이 아니고 죽음일 터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tomb of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womb of tomb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25

à 시간이라는 유한성을 지니고 태어난 생명이 다시 영원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말한 것이리라. 남근으로 상징되는 아버지는 하나의 형체, 특정한 시간대에 한정되지 않고 우주속에서 끊임없이 생성을 반복한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이것이 아닐까.

 

전통적인 통화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神命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에거나 왕에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다. 28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使者. 28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길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 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29

à 니체가 말한 생성에의 반복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다.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寂然, viveka)>, 즉 분리의 과정이라고 한다. 32

 

꿈은 인격화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식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33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33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단테의 신곡 <지옥편>) 35

 

놀라운 것은 이꿈에는, 영웅이 체험하는 모험이 지닌 보편적 신화 양식의 기본적인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미심장한 위험과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입구가 보이는 하수도, 그 다음에는 풀 위로 흐르는 맑은 강의 횡단, 결정적인 순간의 조력자 출현, 강줄기 건너편에 있는, 높고 탄탄한 땅(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지상의 낙원)…….. 36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39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0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超絶性으로 읽히어야 한다. 객관적 세계는 과거의 형태 그대로이나 주관이 강조되면서부터는 변형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삶과 죽음이 투쟁하던 곳에서 이제는 영속적인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냄비 속에서 끓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偶有性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량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43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는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걸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5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0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50

 

<회귀와 사회화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 상태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흥미와 희망을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51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53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4

à 원래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원석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62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63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65

à 무자비한 웃음에서 아버지로서의 우주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태초의 질서 그 자체이며, 생성의 반복을 거듭한다.

 

1   영웅의 모험

1.  출발 Departure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71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71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대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73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73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81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8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82

à 확장된 힘이 개인의 영역에 갇히면 에너지의 파괴력으로 인해 개인을 파멸시킨다?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87

 

신경증적인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8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93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지주녀는 그 줄로써 태양의 운행을 통제할 수 있다. 우주 태모(cosmic Mother)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단테의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성모라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그레첸, 트로이아의 헬렌, 그리고 성모로 나타나는, 영웅의 보호령이다. 95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96

à 이 대목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섰던 장면을 묘사할 때 차용해야겠다. 나폴레옹 은 겨울 밤 자장가가 들려오는 어느 집 앞을 지나다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다.

 

드물지 않게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형태상 남성으로 나타난다. 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와 메르쿠리우스, 에집트에서는 토트(따오기 비슷한 신),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령이다. 97

 

그런 조력자를 맞은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번째 통고다. 그러나 <구원할 수 잇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에서 보았듯이, 영혼을 닫은 자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안내자가 오는 예가 있다. 99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105

 

근친 상간 리비도 libido와 부친 살해의 테스트루도 destudo,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위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사이렌)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107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111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 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0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123

à 자신을 확장하고 세계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기적멸의 과정이 필연적이다. 이 과정 없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23

à 나폴레옹은 전생에서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몰입했다. 그러나 환생한 후에는 티끌 같은 인간이 불멸을 꿈꾸며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생각이 모순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을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123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따라서 그들은 이 괴수들 손에 접근부터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자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3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어쩌면 영웅의 육신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구세주 오시리스처럼 정말 죽고, 해체되고, 땅이나 바다 위로 뿌려지는지도 모른다. 124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124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 가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125

 

남부 인도의 경우, 왕의 통치 기간과 생명은, 목성의 태양 공전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왕의 운명은 매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126

 

기원전 3천년대에서 2천년대까지, 그러니까 초기 제정 일치 시대 말기의 고대 국가에서는 이러한 대속물의 희생제가 관례였던 듯하다. 126

 

2.  입문 Initiation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128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128

 

꿈꾸는 사람의 특수한 정신병적 장애는 곧잘 감정적인 성실성이나 힘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13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148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 <>을 통합한다. 152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다른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153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4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59

 

<화해 atonement>,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 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0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171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1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몬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177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177

à 아버지의 신화적 의미를 회복하는 것은 삶의 주인공으로서 주도권을 갖는 것과 같다.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c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도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178

 

위대한 아버지의 뱀의 몸<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성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180

 

정액의 사출을 보류하는 것은 멸종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순간 존재하던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주)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192

à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시간이다.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유한성을 지닌 생명은 소멸을 위해 달리다가 또 다른 생명의 양분으로 거듭난다.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2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2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194

à 아버지의 유산을 스스로 소화해야지만 그는 눈물의 골짜기를 벗어나 행복에 이를 수 있다.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196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197

 

보살의 양성구유적(兩性具有的, androgynous) 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198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 coincidence of opposite>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200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cosmogonic cycle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200

à 영원한 하나가 둘로 분열되며 생명과 시간이 탄생한다. 분열을 거듭하던 존재는 다시 하나가 된다.

피가 흘러 내린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그들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세계의 샘은 동일한 것이다. 203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며,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204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1

 

우리의 보호자인 사랑하는 어머니는 우리를 저 위대한 아버지 뱀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준 필멸의, 현실적인 육체는 그의 무서운 힘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211

 

보살에 대한 첫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213

 

보살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三毒)을 끈다>는 뜻이다. 213

 

독자들은 이미 혼의 역학에 대한 이 고대 신화적 이론이 현대 프로이트 학파의 주장과 흡사한 데 놀랐을 것이다. 프로이트 학파의 용어에 따르면, 삶의 욕망(불교의 <카마> <욕망>과 일치하는 <에로스> 혹은 <리비도>)과 죽음의 욕망(불교의 <마라>, <적의의 죽음>과 일치하는 <타나토스Thnatos>) 혹은 <데스트루도Destrudo>, 내부에서 인간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두 개의 추진력이다. 214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寂滅)>(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215

à 생각은 실체가 아니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에 연연하여 나를 생각에 꿰 맞추거나 잡아두지 말자.

 

보살 신화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어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23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49

 

3.  귀환 Return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253

 

아득한 옛날의 신화가 아직까지도 문화 속에 존재하고 있는 예는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275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281

à 대극이 하나가 되는 순간, 보이는 세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진다.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282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288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겁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놓는다. 289

 

라이든 병의 전기가 양도체와 접촉하는 경우에 방전하는 것처럼, 신성한 인물 속에 충만한 이 신성성, 주술력도, 훌륭한 양도체와 다름없는 대지와의 접촉으로 방전, 고갈되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290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291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반지는 또, 일상의 현실은 저승의 현실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생시의 믿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294

 

예수는 똑 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6

 

심리적인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자기 화해 self-aton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306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308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鬪士)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상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13

 

4.  열쇠 The keys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317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317

 

이런 식으로 불을 일으키는 행위는 성적인 행위를 상징한다. 두 개의 막대기(암 막대기 수 막대기)는 각각 여성과 남성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불빛은 새롭게 잉태된 생명이다. 영웅이 고래의 배 안에서 불을 일으키는 행위는 성스러운 결혼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318

 

헬레니즘 시기의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대의 고대의 신들은 단순한 시민들의 수호신, 집안의 애완물, 문학의 소재 정도로 전락했다. 319

 

중국의 예도 흡사하다. 인본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유교가 자기네 고대 신화에서 웅대 화려한 요소를 모조리 비워버린 중국에서는, 오늘날 신화라고 치부하는 이야기들이 고작 이러저러한 행적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그 사회의 인사치레를 통하여 국지적인 신으로 추앙받는 정치가들의 아들 딸들 이야기가 고작이다.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319

 

성령이라는 남성적인 불에 영적으로 응감된 여성적인 물은, 모든 신화의 심상적 체계에 익히 알려져 있는, 기독교식 변형의 물 water of transformation이다. (……) 그 표면을 휘젓는 것은 밤바다로 열린 문턱을 넘는 것을 뜻한다. 321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322

 

2.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Emanations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심리학에 의해) 326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326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라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특히, 이른바 원시적인 민간 신화 체계의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326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mana>,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wakonda>,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libido>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변화인 것이다. 330

 

명상의 조건이 완비되면 개인은 홀로 남는다.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천국, 지옥, 신화적 시대, 올륌포스 산 및 그 밖의 신들의 거처는 모두 무의식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항을 바꾼, <무의식=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보아라,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타락 이미지의 의미는 초의식superconsiousness이 무의식 상태로 흘러갔음을 뜻한다. 우리가 우주적 능력의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이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징표로서 세상을 창조한다. 구원은 초의식으로의 귀환과, 이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우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울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330~332

 

우주적 상징이 종잡기 어려운 역설로 표상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의 왕국은 내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잠자는 공주, 즉 영혼을 깨우는 편의수단이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웅변적인 상징이 바로, 고난을 당하는 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제물로 바친 신일 것이다. 332

 

신은 인간의 삶을 떠맡고, 인간은, <대립물이 합일하는> 순간, 즉 신과 인간이 서로 먹이로 각각 하강하고 상승하는 길목으로서의 태양의 문턱에서 만나는 순간, 제 내부에 있는 신을 방면한다. 332

 

신화의 메타포에서도 우주는 시간을 초월한 배후에서 떠오르고, 원기를 회복하다 다시 소멸된다.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의식의 어둠으로부터 깨어 있는 시간대로 흘러나오는 생명력의 질서 정연한 흐름에 달려 있듯이, 신화에서도 우주질서의 연속성은 근원으로부터의 통제된 힘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333

 

아즈테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4(사대, 곧 물, , 공기, )가 각 세계의 주기를 끝맺는다. 즉 물의 시기는 홍수로, 흙은 지진으로, 공기는 바람으로, 그리고 현재의 주기는 불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333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338


우주발생의 순환은, 현현의 세계로 나아갔다가 미지의 침묵이 지배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힌두교에서는 성스러운 음절인 < AUM>으로 이 신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A>는 깨어있는 의식을 나타내고, <U>는 꿈 의식, <M>은 깊은 잠을 나타낸다. 이 음절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은 미지의 것으로, 그저 <네번째>로만 불린다. 339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342

 

한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Self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I am he)>라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 >라는 말로 서두로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354

 

이 싸움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혼돈의 괴물인 티아마트는 스스로 자신을 해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티아마트의 형해는 각각 그 놓여야 할 곳으로 이동한다. 마르둑과 그의 뒤를 잇는 신들은 티아마트라는 존재의 부분에 다름아니다. 365

 

2. 처녀 잉태 The virgin birth

월인의 아내들과 딸들은, 월인자신이 운명의 화신이며 참전물이다. 세계를 창조하는 의지의 진화와 함께 여신인 어머니의 미덕과 외모는 변형되었다. 사대적 자궁에서 태어난 첫 아내, 두번째 아내는 전인간적, 초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우주 발생의 순환이 진행되고, 원초적인 형태에서 인류사적 형태로 성장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우주적으로 탄생한 여황들은 물러가고, 무대는 여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조물주는 자기의 속에서 형이상적 구닥다리 존재로 타락했다. 결국 그가 단순한 인간인데 넌더리를 내고 윤택했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세계는 그의 충격적인 반응 때문에 한 차례 몸살을 앓았지만 곧 여기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주도권 아이들의 사회로 넘어갔다. 상징적이고 몽상적이었던 부모의 모습은 원초의 심연으로 함몰했다. 풍요한 대지에는 오직 인간만 남았다. 순환은 계속 진행되었다. 389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389

 

3. 영웅의 변모 Transformation of the Hero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396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0

 

 첫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名劍)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을 얻는 것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432

 

아버지의 집에서는 두 단계의 이니시에이션이 구분된다. 첫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이 두번째의 보다 높은 자각에 이른 영웅은 구세주, 한 차원 높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지고한 존재의 화신이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그들의 언어는, 권위의 홀장과 율법서의 영웅이 뱉어낸 어떤 말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437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Myth and society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신화 체계에 대해) 478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 밖에 없다. 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479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480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그 힘을 잃었다. 이 비의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심성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서양 학문의,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17세기 천문학에서 19세기 생물학으로의),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20세기 문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488

 

인간은 그러나 <>가 아닌 <>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488

 

역자후기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토마스 만) 490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즉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491

 

■ 내가 저자라면

 

조셉 캠벨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작정하고 쓴 듯 하다. 상당히 오랜 기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했음을 목차를 보면 느낄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영웅의 모험 과정에 맞춰 세심하게 목차를 구성해 놓았다. 주해 중에는 본문보다 내용이 긴 부분도 눈에 띈다. 영웅에 대한 다양한 사례 수집과 논리적인 글쓰기로 봤을 때 캠벨은 이 책을 통해 영웅신화를 집대성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노력 덕분에 신화 속 영웅이 판타지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우리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독자와의 소통에 장애로 작용하기도 했다. 딱딱한 문체와 중간에 흐름을 끊어놓은 잦은 사례 안내가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몰입도를 떨어뜨렸다. 캠벨은 무궁무진한 이야기 보따리를 가진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신화가 논리로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을 품고 있음에도 독자가 흥미진진하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신화를 야들야들하고 보들보들하게 변용해 독자들이 먹기 좋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캠벨은 45세에 이 책을 썼다. 학자의 피가 한창 왕성할 때가 아니었을까. 그 후에 쓴 책들과 비교할 때 신화를 바라보는 시각 면에서 특별히 변화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논리보다는 직관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태도가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인다. 신화라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도 글쓴이의 태도에 따라 다른 느낌이 만들어진다. 책을 쓸 때 타겟 독자와 다른 책들과의 차별성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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