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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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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4일 21시 39분 등록

작가에 대하여

 

C.W. 체람의 본명은 쿠르트 W. 마렉(Kurt W. Marek)이며 1915120일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여 신문기자, 연극비평가, 로볼트 출판사의 저널리스트이자 편집장이 되었다.  C.W. 체람은 그의 필명이었고, 그 필명으로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을 출간했다.  그는 1972 412 57세의 나이로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20세기의 위대한 고고학 저술가로 꼽히는 C.W 체람은 순수한 열정으로 수백 년 전 정통 고고학의 탄생부터 고고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공중 고고학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의 발전을 정리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수메르에서부터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크레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문화적 연속성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고고학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쓸 당시 그는 고고학 역사 자체를 주제로 다룬 책은 어느 서점에 가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후, 그는 책의 구성에 대한 고심 끝에 1949 11월 ‘GODS, GRAVES, AND SCHOLARS <, 무덤, 학자들> 원제를 달아 고고학 역사를 주제로 다룬 그의 첫 저서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26개 이상의 국가에서 번역되어 500만부를 넘는 판매 기록을 세웠으며 전 세계 독자들 사이에서 고고학의 명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으로 출간되어 우리들에게 찾아왔다.

 

그는 발굴에 이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과정인 해석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문명만이 해낼 수 있는 과거의 재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런 그의 생각이 <발굴과 해독>이란 저서로 나왔다. 생생함을 공유하기위해 그는 책에 수록될 삽화사진과 자료를 많이 모았고, 2000장이 넘게 모은 사진들을 과감히 추려내고 주옥같은 사진과 인용문을 게재하여 글과 더불어 나온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1958 9월에 출간하였다. ‘낭만적인 고고학’ 보다 한 수 위라고 불려지는 이 책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고고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집트 이스완댐 건설로 이부심벨의 유적이 물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히타이트 문명 발굴을 위해 터키의 고고학적 발굴에도 참여하여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march of Archaeology>을 내놓았다.

 

18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고고학에서 발굴의 역사는 끝나고들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낭만과 모험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고고학에서 낭만적인 모험의 세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국 “상상력은 시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심층 읽기

 

머리말

 

작가가 자신이 쓴 이야기에 대해 재미있다고 확신하더라도,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장담하더라도 독자들의 반향은 늘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다.[18]

 

고고학은 모험과 낭만을 찾아 떠나는 결단려과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책과 씨름하는 성실성이 한데 어우러진 학문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 지구 전역을 활보하며 측량하는 학문이다.[19]

 

이 책은 고고학의 연구 결과와 그 통찰력, 불굴의 정신을 찬양하는 노래다.[19]

 

이 책은 ‘논픽션 소설’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오로지 사실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다.[20]

 

나는 가장 잘 쓴 논픽션 소설은 문학적인 요소는 단지 학문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만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학문적 사실이 언제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도록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22]

 

 

I.             조각상 이야기

 

1 : 고대의 땅에 오른 서막

 

역사에서나 일상에서나 사람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빠른 길인줄 알고 선택한 길이 알고 보면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29]

 

자신의 학문 세계에 갇힌 어리석은 학자는 그토록 끔찍한 재앙이 남긴 유물들을 학문적 서위한 훌륭한 자료로만 보고 좋아할 뿐, 경건한 마음으로 희생자를 애도할 줄 모른다.[33]

 

엄청난 유물을 바라보는 18세기 지식인들의 시각은 두 가지였다. 르네상스 이후에 태어난 사람답게 고대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사람과 정밀 학문의 태동을 느끼며 심미주의에만 빠지지 않고 사실 연구에 헌신하기를 열망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36]

 

2 : 빙켈만과 새로운 학문의 탄생

 

빙켈만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1762년에 첫 공개 보고서 <헤르쿨라네움의 발굴 유물들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이 공개 보고서의 가치는 그것이 베수비오 산 기슭의 발굴에 대한 세계 최초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데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빙켈만의 대작 <고대 미술사>가 출간 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엄청난 분량으로 늘어난 고대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참고할 ‘표본도 없이’ 고대 미술의 변천사를 최초로 기술한 책이었다. 대단히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체계를 세우고, 탁월한 통찰력으로 고대 사람들의 인식을 더듬어 나가며, 활력이 넘치는 필치로 고대의 정신을 전달했다. 그 결과 지식층에서는 고대의 이상을 추구하는 일에 헌신하려는 바람이 불었고, 나아가 고전주의 시대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41,42]

 

빙켈만의 업적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만이 난무하던 세계에 질서를 도입하고, 추측과 전설로 얼룩진 분야에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는 데 있다. 그가 열어준 고대의 세계를 바탕으로 괴테와 실러를 낳은 독일 고전주의가 싹틀 수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보다 더 오래된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고고학자는 빙켈만이 미리 준비해둔 연장을 사용해 손쉽게 어둠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 [43]

 

3 : 역사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

 

이 책에서는 고고학의 과정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발달 과정을 찬찬히 써 내려갈 뿐, 아무것도 지레짐작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방금 던진 물음들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답을 찾을 것이다.[46,47]

 

그 모습은 한 순간 반짝 하고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횃불을 비추자 불빛에 모든 것이 흐트러지는 듯했다. 수백년을 견딘 몸뚱이가 공기와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던 것이다. [47]

 

그 사람은 발굴자에게 자신의 얼굴과 몸에 단 한 번의 눈길을 허용하고는 스스로 부서져버렸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 발굴작들이 부주의한 탓이었다.[48]

 

유물은 끊임없이 문외한의 손에 파괴되었고, 도굴범들은 숨겨진 보물을 찾았다. 고고학자들이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과거를 만나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해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해석의 기술이 개발되었다.[49]

 

그렇다. 자료가 손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석은 쉽지 않다. 그런데 자료의 진위 자체가 의심될 때는 어떻겠는가?[50]

 

속지 않는 기술, 수많은 특징으로부터 작품의 진위 여부와 종류와 역사를 읽어내는 방법, 즉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해석학이라고 한다.[52]

 

고고학자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 사람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결론을 얻을 때까지 수사관과도 같이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해 퍼즐을 짜 맞추듯 돌멩이 한 조각 한 조각을 짜 맞추어 간다. [52]

 

오늘날에는 사진으로 실물을 정확하게 재현하지만, 이전에 사진 촬영을 해둔 유물은 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그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림에는 화가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실물을 자신의 주관에 따라 멋대로 해석했던 것이다. () 오인으로 말미암은 역사의 흔적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흘린 가짜 흔적 보다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53]

 

어느 시대에 속하건 고대의 작가가 쓴 문학작품은 해석학의 초석이 된다.[55]

 

4 : 가난한 소년이 쓰는 보물찾기 동화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일곱 살 때 어떤 도시를 찾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후 그는 꿈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도시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찾은 것은 도시만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보물도 함께 찾았다. 이 동화는 하인리히 슐리만의 일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고고학자들은 물론, 학문을 신봉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경탄할 만한 인물이었다.[57]

 

 

소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어른이 되면 트로이를 찾겠어요. 그리고 왕의 보물도 찾을 거예요!” 아버지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59]

 

슐리만은 언젠가 호메로스 이야기에 나오는 머나 먼 나라를 찾아내고 그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소년 시절의 꿈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59]

 

슐리만은 단 6주 만에 그리스어를 터득했다. 얼마나 노력하면 그럴 수 있을까? 6주 후에는 내가 쓴 편지를 플라톤이 받아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오로 공부했다. [61]

 

“하늘이 내 무역 사업에 기적과도 같은 축복을 내려 주신 덕분에 1863년 연말에는 내 야심을 능가하는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에 이어 내린 결론은 너무도 의외였다. 오직 하인리히 슐리만 자신만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무역 사업에서 손을 뗐다. [62]

 

최상의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소년 시절에 품은 꿈을 좇기 위해 자신의 업무용 선박을 모두 불태웠다. 머릿속이 호메로스 이야기로 꽉 차있던 그 사람은 역사성을 의심하던 학계의 견해에 맞서 호메로스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리고 문헌학자들의 펜이 수백 권의 책을 통해 흐려놓은 역사를 삽으로 직접 확인시켜주겠다면 일어섰다. 이것이 동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62]

 

<일리아스>는 위대한 시인이 쓴 신화와 전설, 신과도 같은 시인의 광휘가 번쩍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는 시인들 사이에서만 인정받았다. 차라리 트로이는 인간 호메로스의 문학적 영감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라고 믿는 편이 쉬웠다. [63]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오직 매료된 마음 하나만으로 성공을 일구어낸 사례가 있었는가? 거듭된 행운은 유능한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도 이 경우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일개 상업 견습생에서 백만장자로 성공하기까지 쏟았던 열정을 이제 꿈을 실현시키는 것에 쏟아부을 차례였다. 그는 신들인 듯 일에 몰입했고, 물자 또한 아낌없이 투입했다. [70]

 

슐리만이 도둑이었을까? 고대 유물과 관련된 터키의 법규는 모호했고, 법 집행은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한 가지 꿈 때문에 자신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나아가 유럽의 학문을 위해 그 보물을 지키고자 했다.[74]

 

5 : 아가멤논의 마스크

 

세상에는 일생 믿기지 않을 만큼의 큰 성공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훗날 이런 사람의 일생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화려하게 묘사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의 일생이란 뒤로 갈수록 더욱더 고조된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76]

 

중요한 점은 슐리만이 잃어버린 과거를 향해 또 한 번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학문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대단히 중요한 보물을 찾아냈다. 그 보물은 유럽 문화의 원조를 밝혀주는 값진 자료다. [82,83]

 

6 : 슐리만과 학문

 

오늘날에도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과 학계 양쪽에서 쏘아대는 공격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86]

 

슐리만이 불러일으킨 회오리바람은 교육받은 소수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불어닥쳤다. 빙켈만이 조각상을 묘사한 글을 미술 애호가들은 감동시켰다. 그들은 미술에 심취한, 미술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슐리만의 황금 유물을 같은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이 자수성가한 슐리만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의 편에 섰던 반면, 이른바 ‘정통파 학자들’은 그를 ‘고고학 애호가’일 뿐이라고 깎아 내리며 등을 돌렸다.[87]

 

정통파 학자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88]

 

“아마추어! 아마추어! 이 말은 학문이나 예술을 애정과 즐거움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해 알고 싶은 열정 때문에 추구하는 사람들을 생업으로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얕잡아 일컫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 일로 벌어들이는 돈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멸은 빈곤, 배고픔, 또는 기타 강한 욕구가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진지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천박한 신념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일반 대중의 생각도 같으며, 따라서 그들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전문가’에 대한 일반적인 존경심과 아마추어에 대한 불신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실 아마추어에게는 예술이나 학문 자체가 목적인 반면, 전문가들에게는 수단일 뿐이다. 학문이나 예술을 가장 진지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 자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 사람, 그래서 순수한 애정으로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최고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언제나 이런 아마추어들이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철학자 쇼펜하우어 [88,89]

 

성공한 ‘아웃사이더’에 대한 ‘전문가’의 불신은 일반인이 천재에게 보이는 불신과 같다. 안정된 인생행로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영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이런 멸시는 정당하지 않다. [90]

 

물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조건은 모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이 순수하다면 자격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아웃사이더’들을 특히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91]

 

슐리만의 초기 해석과 연대 확인이 거의 다 틀렸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콜럼버스도 처음에는 인도를 발견한 줄 알았다.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작아지는가? [92]

 

7 : 미케네, 티린스, 그리고 수수께끼의 섬

 

하지만 슐리만은 이번에도 고대 작가들의 글에 의지해 발굴에 착수했다.[95]

 

오늘날 우리는 이 문명을 크레타-미케네 문명이라고 부른다. 슐리만은 처음으로 그 문명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문명의 본체를 발견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97]

 

슐리만은 발굴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의 상인 기질이 고고학자로서의 관심을 눌렀던 것이다. 슐리만은 학문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투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1612그루의 올리브나무에서 얻을 기름을 손해본다는 생각 때문에 선사시대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를 포기하고 말았다. [99]

 

에반스는 슐리만이 그랬던 것처럼 전설과 설화의 흔적을 파나갔다. 슐리만이 그랬던 것처럼 궁궐과 보물을 발굴했다. 에반스는 슐리만이 그린 그림에 액자를 둘렀다. [101]

 

8 : 아리아드네의 실

 

무역과 전쟁을 민족 간 교류의 동력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큰 세계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작은 세계에도 평화와 약탈이 공존했다. [102]

 

그들은 풍요와 쾌락을 탐닉했고, 번영의 절정에 있을 때 이미 향락에 빠진 채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쇠퇴하는 문화는 이미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장미꽃잎으로 속을 채운 매트리스라 할지라도 그 위에 누워만 있으면 몸에 못이 박힌다. 경제적 번영은 곧 문화적 쇠퇴의 시작이었다. [105]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 크레타의 풍요로웠던 민족의 근원과 종말을 둘러 싼 문제는 고고학을 비롯해 역사 초기를 연구하는 모든 학문에서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110]

 

 

II.            피라미드 이야기

 

9 : 승리가 된 패배

 

나폴레옹 1세와 비방 드농은 이집트를 최초로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사람들이다. 이두 사람은 황제와 남작, 총 사령관과 예술가로서 인생의 일정 구간을 동행했다.[117]

 

카이로는 죽은 과거 속에서 마법을 걸어 미래를 손짓하고 있었지만 그들 앞에서 전쟁이라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119]

 

나폴레옹은 대중의 심리를 잘 아는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맞선 유럽인이었다.[119]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훗날 이집트를 정치적으로 개척하고 고대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120]

 

다재다능하고 어떤 점에서는 매우 놀랍기도 한 드농은 오늘까지도 그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훌륭한 업적 한 가지를 남겼다. 이집트를 총검으로 정복한 나폴레옹은 그 승리를 1년밖에 유지할 수 없었지만, 드농은 파라오의 나라를 제도용 연필로 정복해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의 그림은 이집트 역사에 새로운 영원의 시간을 부여했고, 우리의 의식을 눈뜨게 했다. [123]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도 표현주의도 모른 채 ‘수공업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어떤 세부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묘사했던 옛 동판화가들의 작품처럼 학문에 필요한 사실성을 철저히 지켰다. 이렇게 드농의 그림은 연구하고 비교하는 학자들에게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이 자료를 근거로 이집트학의 바탕이 된 <이집트 기록>이 완성되었다. [125]

 

프랑스는 헛수고를 한 것 같았다. 1년에 걸친 노력이 아무런 보람도 없는 듯했다. 이집트 눈병으로 실명한 학자들의 희생도 무의미해 보였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한 세대 동안 연구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파리로 가지고 왔다. 영국으로 인도된 이집트 유물을 한 점도 빠뜨리지 않고 복사했던 것이다. 이집트 원정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보존한 최초의 인물은 드농이었다.[126]

 

<이집트 기록> 1809년에서 1813년까지 4년 동안 출간되었다. 이 화려한 전집은 부자들만이 소장할 수 있었으며, 학문적 보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시대에 이 책이 갖는 의미를 요즘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에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발견을 할 때마다 그림이나 영화, 말과 소리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수백만 부가 출판되어 다른 책과 경쟁하게 된다. 누구나 살 수 있고 또 잊어버리며,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도 쉽게 옮겨간다. 오늘날에는 더는 아무것도 보존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이 가치 없는 것으로 쉽게 전락한다. 그 옛날 이 최초의 <이집트 기록>을 손에 넣은 사람이 어떤 흥분에 사로잡혔을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보고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을 읽고 상상도 못했던 삶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수천 년 전으로 눈길을 돌리게 만든 이 책이 현대인보다 경외심이 강했던 그 시대 사람들을 어떤 전율에 떨게 했을지 우리는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127]

 

뻣뻣한 자세로, 모든 동작에서 위풍당당하게, 항상 옆얼굴만 보이며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집트 사람의 삶은 죽음을 향한 여로였다.” 이러한 목표 지향성은 부조 벽화에 잘 강조되어 나타났다. 현대의 어느 문화철학자는 이집트 미술의 원초적 상징은 ‘길’로 그 의미는 유럽의 ‘공간’이나 그리스의 ‘인체’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131]

 

<이집트 기록>은 유럽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유럽에서는 이제 막 과거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어 연구에 불이 붙었고, 나폴레옹의 여동생 칼롤린의 주도로 폼페이를 다시 발굴했다. 학자들은 빙켈만에게서 고고학의 연구와 고찰 방법을 배웠으며, 배운 바를 실제로 써보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131]

 

학자들은 그 현무암 판에 상형문자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보았고, 그 판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신문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133]

 

10 : 샹폴리옹과 세 가지 언어로 쓴 새김글의 비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은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돌에 새겨진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에 넋을 잃었다. “이거 읽을 수 있어요?” 푸리에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제가 읽을 거예요! 몇 년 후 제가 크면요!” 어린 샹폴리옹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137]

 

이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소년이 또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제가 트로이를 찾겠어요”라고 말했던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샹폴리옹 또한 확신에 차서 신들린 듯이 목표만을 좇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얼마나 다른가? 두 사람이 소년시절의 꿈을 실현시킨 방법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슐리만은 전적으로 호자 공부했지만 샹폴리옹은 정해진 교육의 길을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 길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말이다. 슐리만은 전문적인 기본 소양을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로 작업에 착수한 반면, 샹폴리옹은 그 시대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으로 무장했다. [137,138]

 

신기하게도 샹폴리옹이 배우는 모든 것, 그가 하는 모든 일, 그에게 흘러드는 모든 영향은 이집트 마법의 손아귀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이집트’와 통했다. [138]

 

지금까지 생각해온 일, 줄곧 남몰래 품었던 희망이 그 순간 갑자기 분명해졌던 것이다. “나는 상형문자를 해독할 거야. 난 할 수 있어!” 상폴리옹의 갈색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140]

 

인류의 정신사에서 수많은 오류를 만들어낸 그 경직성이 이번에도 학자들의 뇌를 마비시켰다.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와도 같은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고수해온 전통의 궤도를 모두 벗어나는, 번갯불처럼 ‘번쩍!’하고 어둠을 밝히는 그런 착상 말이다. [143]

 

훗날 슐리만은 유럽의 모든 언어를 섭렵할 때까지 고대 그리스어 공부는 미루기만 했다. 고대 그리스어야말로 슐리만이 가장 동경하는 언어가 아닌가? 따라서 그 공부를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게 되리라는 사실을 슐리만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어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었다. 샹폴리옹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로제타석에 새겨진 세 가지 언어를 맴돌았다.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며 점차 고찰의 대상을 향해 좁혀 들어갔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속도는 점점 더 느려지기만 했다. [146]

 

이 일로 인해 샹폴리옹은 죽어 있는 그림에게 말을 시키는 일과 자신이 이미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49]

 

11 : 국가 반역 죄인이 해독한 상형 문자

 

샹폴리옹은 역사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실을 향한 갈망이라고 천명했다. 그가 말하는 진실이란 나폴레옹식 진실이나 부르봉 왕조식 진실이 아닌 절대적 진실이었다. 그는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학문의 자유를 요구했다. 여기서도 샹폴리용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였다.[151]

 

위대한 정신적 발견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끝없이 사고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정신을 훈련한 끝에 얻는 결과다. 따라서 그 발견의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 뚜렷한 집중력과 흐릿한 몽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번개처럼 스치는 착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무리 기발한 생각이라도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 쏟은 노력의 역사를 알게 되면 기발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일단 원리가 밝혀진 후에는 오류가 너무나 명백해지고, 착오는 찾을 수 없으며 문제도 간단해 보인다. [160]

 

위대한 발상도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163]

 

100년도 채 넘지 않은 과거에 같은 문화권에서 사용했던 문자도 알아보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그 시절 샹폴리옹은 낯선 문화권에서 3000년에 걸쳐 일어난 문자의 변천을 밝혀낸 것이다. [164]

 

샹폴리옹이 문자의 비밀을 풀었다. 이제 사람들은 삽을 들고 발굴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171]

 

12 : 4000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굽어보고 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를 해독한 이후 수십 년 사이에 네 사람이 이집트학 분야에서 위대한 발견을 했다. 그 이름을 이 책에서 서술하기에 편리한 순서대로 들자면, 이탈리아의 벨초니, 독일의 렙시우스, 프랑스의 마리에트, 영국의 피트리다. 벨초니는 수집했고 렙시우스는 정리했으면, 마리에트는 보존했고 피트리는 측량하고 해석했다. 이 네 사람이 유럽의 각기 다른 네 나라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네 사람은 같은 목표를 추구했고, 지식과 진실을 향한 욕구가 무엇보다도 강했다는 점에서 일치했으며, 한 가지 업적에 공동으로 기여했다. [172]

 

당시 사람들의 수집 열정은 대단히 뜨거웠지만, 그 열정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유물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발견보다는 파괴가, 지식을 얻기보다는 손해를 불러일으킨 경우가 더 많았다.[175]

 

렙시우스는 눈으로 본 것을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유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허로 여긴 그 곳에서 그는 최초로 이집트의 역사를 보았고, 변화를 인식했다.[179]

 

오스발트 슈펭글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대 사람들에게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없으면 역사의 기록도 없다. 이집트에는 역사가가 없었다. [180]

 

오직 연구와 발굴에 모든 관심을 쏟던 마리에트는 고고학의 미래를 위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바로 ‘보존’이었다.[185]

 

이집트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감독기관이었다. 이제부터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은 진지한 목적으로 발굴하는 사람, 고고학자, 모든 분야의 학자들에게 명예의 상징으로 선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연히 발견된 것이든 조직적으로 발굴한 것이든 모두 박물관이 소유하기로 했다. 이로써 마리에트는 골동품의 바출과 도굴을 중지시켰다.[193]

 

13 : 피트리와 아메넴헤트의 무덤

 

고고학계의 위대한 측량가이자 해석자인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피트리는, ... 열 살 때 이미 이집트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때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집트의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꺼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땅속에 묻히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지식욕을 잘 조절하여 이집트의 흙 한 알 한 알을 ‘긁어내야’한다는 말이었다.[194]

 

고대 유물을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는 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195]

 

피트리는 실제로 이집트 전역을 ‘긁어냈다’. 그러면서 3000년 역사를 활보했다.[197]

 

유일한 존재였던 한 사람을 위해 지은 무덤들. 자신의 이름을 수십만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시켜 하늘 높은 곳에 돌로 쓰고자 했던 사람들. 오직 명성을 얻기 위한 일이었을까? 단지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를 돌로써 표명한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의 주제를 망각한 권력자의 지독한 오만이었을까? [201]

 

이러한 믿음의 힘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든 이성의 목소리를 눌렀다. 파라오들의 피라미드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끝도 없이 치달은 이기주의의 산물이었다. 피라미드는 본질적으로 파라오만을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오직 그의 죽은 육신과 그의 ‘바’와 그의 ‘카’를 위해. [203]

 

여기서 파라오들의 오만은 비극으로 급변한다. 돌로 요새와 같은 무덤을 지은 사람들이 아니라 땅 밑 마스터바나 간단한 모래 무덤 속에 누운 사람들이 오히려 고인으로서 더 합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의 무덤을 대부분 도둑들이 그냥 지나갔던 것이다. [205]

 

아메넴헤트 왕의 무덤을 발견한 일은 피트리에게 명예를 안겨주었다. 학자로서의 만족도 있었다. 그러나 발굴연구자인 그를 유혹한 일은 따로 있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어느 길로 뚫고 들어왔을까? 도둑들은 건축가의 발자취를 더듬었고, 피트리는 도둑의 발자취를 추적했다.[212]

 

14 : 왕가의 계곡을 누비는 도둑들

 

왕은 자신의 미라를 위신에 걸맞게 값비싼 장식품으로 치장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유혹은 너무도 컸다. 부자가 되고픈 욕망을 채우고도 남을 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물은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은 사람의 차지였으며, 도둑은 이르든 늦든 그 길을 찾고야 말았다. [225]

 

도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225]

 

15 : 미라

 

왕의 무덤은 비록 도굴되고 파괴되고 버려졌지만, 그 마법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골짜기는 여전히 ‘왕들이 잠든 신성한 계곡’이었다.[228]

 

‘너는 오늘 처음으로 내 앞에 왔다. 이번에는 가도 좋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와서는 안 된다. 명심, 또 명심하라. [234]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모래와 공기가 무균상태이다. 그래서 모래 속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관도 없고 내장을 제거한 흔적도 없었지만 방부처리한 시신에 못지않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241]

 

잘한 일일까? 울음을 토하며 자신의 가슴을 치던 그 사람들의 눈에는 브룩시 또한 도둑이 아니었을까? 3000년 동안이나 왕들의 무덤을 훼손한 무도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을까? 학문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이 충분했을까? [245]

 

16 : 하워드 카터, 투탕카멘을 발견하다

 

이 투탕카멘 고분의 발견은 고고학 발굴의 역사상 거두었던 모든 성공의 절정인 동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 슐리만은 몸소 삽을 들어 땅을 판 최후의 위대한 아마추어였으며, 독자적으로 활동한 천재였다. 그 후 크노소소와 바빌론을 발굴할 때부터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지휘부가 투입되었다. ()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지금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룬 개개의 업적과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경험들이 훌륭하게 통합되었다.[247]

 

하워드 카터는 정밀학에 대단히 심취했으며 동시에 학문적 방법론의 엄격성, 정확성, 치밀성을 최상의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로써 카터는 고고학 제국의 위인 반열에 들었다. 그들은 오직 보물을 찾기 위해, 혹은 죽은 왕의 시신을 파내기 위해 삽을 들고 나선 사람들이 아니다. 인류가 찬란한 고대 문명의 모습과 표정과 성격과 정신을 발견한 이래 모든 수수께끼를 파헤친 사람들이었다. [248]

 

학문의 역사에서 흔히 일어났던 일이 이때에도 일어났다. 카터는 갑자기 어떤 영감이 떠올라 한 지점에 삽을 꽂았다. 그 지점은 사실상 정확히 고른 지점이었으며, 발굴을 위해 파야 할 땅의 최소 면적이었다. [252]

 

이 정도의 자료를 근거로 투탕카멘의 왕의 고분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다니! 아니, 직관에 근거한 확신을 얻다니! 이는 자신의 성공에 대한 투철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54]

 

“모든 것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틀림없이 그 통로 뒤에 있었다. 그러니 당장 문을 부수고 발굴을 계속하고 싶었고, 그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극기가 필요했다.” 카터는 문에 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어다본 후 이렇게 기록했다. 집으로 향하는 나귀의 발걸음은 평온했지만 커터는 충동과 조바심, 엄청난 발견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맞서 싸워야 했다.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위대한 발견을 눈앞에 둔 고고학자가 고분을 다시 메우고 후원자이자 친구인 카르나본 경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 일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257]

 

카터는 천천히 몸을 돌린 후 홀린 듯 대답했다. “네, 굉장해요!” 영혼의 깊은 바닥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발굴의 역사를 통틀어 지금 우리의 전등 빛에 비친 광경만큼 멋진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262]

 

17 : 황금의 벽

 

투탕카멘의 고분 발굴이 이집트 유물 발굴사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사건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정확하고 철저한 작업 방식에 있었다. 그러나 발굴 초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쏟아진 도움의 손길과 헌신적인 봉사가 없었다면 하워드 카터도 이토록 치밀하게 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266]

 

철저한 작업은 시간을 요구한다. 투탕카멘 왕의 고분에서 유물을 꺼내는 일은 여러 해가 걸렸다.[268]

 

“그것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작은 화환이었다. 청상과부가 된 왕비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작별의 인사였다. 이 초라한, 아직 한때의 고운 빛을 희미하게나마 간직한 몇 송이 마른 꽃잎 앞에서 호화롭고 화려한 왕의 자태와 번쩍이는 황금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그 화환은 수천 년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절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277]

 

“이번에도 또 무덤의 신비는 우리를 압도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그 앞에서 삼가고 조심해야 했을 만큼 그들은 여전히 막강했다. 고고학자는 자신의 연구를 순전히 기술적으로 증명할 때조차 이러한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277]

 

 

III.           탑 이야기

 

18 : 성서 구절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성서 구절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으며, 그 구절을 쓴 글자조차 신성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더불어 비판이 시작되면서 모든 유물철학이 성서를 비판했고, 그 결과 성서의 구절은 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성서의 핵심에 얼마나 많은 사실이 담겨 있는지 밝혀주는 증거도 나타났으며, 후대의 기록자들이 많은 부분을 멋대로 과장했을 가능성도 인정하게 되었다.[293]

 

알라와 그이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는 그들은 이 땅을 가리키는 성서 구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일에는 어떤 예감과 의구심, 서구인의 추진력이 필요했다. 삽을 들어 땅을 파는 사람 말이다. [294]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제왕들>의 서문에서 마이스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이름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풍부한 색채로 물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색채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승된 자료가 필요하다. [295]

 

19 : 보타의 니네베 발견

 

구약성서에서는 두 강 사이 땅의 북부 지방을 아람 나하라임, 즉 강 사이의 시리아라고 부른다. 그 땅에 신의 분노가 쏟아졌다. 아람 나하라임의 니네베와 니네베 남쪽의 대도시 바빌론을 통치했던 잔혹한 왕들이 하느님 외에 다른 여러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땅에서 쫓겨났다. 여기가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오늘날의 이름은 이라크이고, 그 수도는 바그다드다. [298]

 

거듭 허탕을 치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확실한 정보 하나 없이, 단지 이 언덕을 파면 가치 있는 유물이 나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날이 가고 달이 가도록 파고 또 파도 나오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기호로 덮인 금간 벽돌 몇 점과 엉망으로 파손되어 도저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조각품 파편 또는 너무도 유치해서 아무런 상상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토르소 몇 점뿐이건만, 그럼에도 여전히 삽을 놓지 않는 일이 어떤 일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1년 내내 그 상황은 지속되었다. [301]

 

아시리아 궁전을 처음 발견한 일은 유럽의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일급뉴스였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인류의 발생지를 이집트로 추정했다.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기록은 성서뿐이었다. 19세기의 학자들에게 성서는 단지 ‘전설 모음집’일 뿐이었다. 성서보다는 고대 작가들이 쓴 희귀한 기록을 더 믿었다. 보타의 발견은 메소포타미아에 적어도 고대 작가들이 쓴 만큼은 오래된 문명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서를 더 믿기로 한다면, 그보다 더 오래된 옛날에 문명의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303]

 

20 : 설형문자 해독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의 일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실한 삶이었다. 어떤 탈선이나 별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로테펜트가 스물일곱 살 때 어느 술자리에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내기를 하게 되었다. 설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312]

 

천재란 무엇보다도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볼 수 있고, 복합구조에서 원리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로테펜트의 진실로 천재적인, 결정적인 착상은 놀라우리만치 단순한 것이었다. [315]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상형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의 이름은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는 반면 그로테펜트의 이름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한 위대한 유물에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발견을 꼽자면 단연 그로테펜트의 설형문자 해독이며, 최초라는 수식어는 오직 그에게만 해당된다. [320]

 

21 : 베히스툰 바위의 새김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문제가 그 순간 멋지게 해결되었다. 네 사람의 번역은 본질적인 점에서 모두 일치했다.[328]

 

22 : 님루드 언덕에 묻힌 궁전

 

이제 성서에서 악습의 본고장이자 부패의 온상으로 그토록 많은 저주를 받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도시가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는지 소구 사람들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드넘 박물관에 처음으로 고대 아시리아의 유물을 전시하는 대형 전시관이 설치되었고, 어마어마한 성벽의 전면도 복원되었다. 그 전까지 단지 전설, 민담, 고대의 작가들이 쓴 미심쩍은 여행기, 그리고 성서에서만 등장했던 건축물의 모습을 실제로 접한 사람들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이 전시를 마련한 사람은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였다. [330]

 

레이어드의 삶은 보타나 롤린슨의 삶과 흡사했다. 모험심이 넘치는 동시에 출세도 했고,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세상물정에 밝았으며, 정치에도 참여했다. 사람을 다루는 기술 또한 대단히 노련했다. 레이어드는 청년 시절부터 동방을 꿈꾸었다. 머나먼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페르시아..... 스물두 살의 청년은 곰팡내 나는 런던의 변호사 사무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단조로운 일상. 앞날의 여정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고, 그를 손짓하는 것은 오직 법정에서 쓰는 가발뿐이었다. 청년은 일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꿈을 찾아나섰다. 레이어드는 발굴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자신이 한 일을 빼어나게 묘사한 훌륭한 작가로서도 인정받았다.[331,332]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곤 한다. 우리는 새벽에 조촐한 오두막 또는 아늑한 천막을 빠져나와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해질녘이면 아랍인 대상들이 오두막을 지은 고색창연한 폐허나 지금은 그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쇠락한 마을에서 밤을 보냈다.  [333]

 

양각 부조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모든 나라, 모든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관람객들은 대부분 잠시 흘끗 보고 지나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부조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부조에 표현된 내용은 극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몇십 점만 자세히 관찰하면 성서에서 전하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의 삶, 특히 그 통치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341]

 

고고학의 개척자들 가운데 어떤 방해도 없이 작업을 완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탐사에는 모험이, 연구에는 위험이 따라다녔으며, 간교한 훼방에 맞서 헌신적인 투쟁도 감수해야 했다.[343]

 

23 : 조지 스미스의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로마였다. 막강한 도시, 대도시, 세계적인 도시였다. 어마어마한 궁전과 거대한 광장,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였고, 전대미문의 신기술이 승리를 자랑한 도시였다. () 아시리아의 도시들은 유일신을 섬기지 않았다. 수많은 신들을 섬겼으며, 때로는 아주 먼 옛날의 신들을 모시면서 그 신들이 지닌 창조적인 힘을 거세시켰다. 거짓과 선동의 도시들이었으며, 정치를 영구적인 사기술쯤으로 생각하는 도시들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니네베였다. [363,364]

 

이 점토판들 가운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문학작품이 있었다. 세계사 최초의 장면 서사시인 그 작품은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길가메시는 3분의2가 신이고 3분의1이 사람인 존재였다. () 길가메시 서사시의 발견은 단지 문학적으로만 흥미로운 사건이 아니었다. 그 서사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과거에 환한 빛을 던지는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370]

 

스미스가 해독을 시작하자마자 그의 온 마음을 빼앗은 것은 그 이야기, 내용이었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이었다. 일어난 사건이었고, 형식이 아니었다. 스미스는 힘센 길가메시의 위대한 행적을 좇았다. [373]

 

설형문자로 기록된 이 길가메시 서사시는 조지 스미스의 시대에 충격적인 물음을 던졌다. 성서에 나온 사실이 가장 오래된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얼마나 더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가?[377]

 

24 : 포화 속을 뚫는 콜데바이

 

이런 고고학에 콜데바이는 애정을 쏟았지만, 고고학을 향한 애정이 세상을 향해 열린 그의 시각을 흐리지는 못했다. 그는 나라와 민족에 대해, 상황에 따른 유혹이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즐거움에 대해 언제나 열린 마음을 유지했으며,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유머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았다. [381]

 

운명의 길은 어둠에 싸여 있고, 앞날로 이끄는 별빛은 흐리니

잠자리에 들기 전 코냑 한 잔을 나는야 즐거이 비워낸다네! [382]

 

“나는 내 속에 누군가 들어 앉아 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 콜데바이, 이제 이것과 저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사막에서 도둑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기승을 부려도 도둑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386]

 

25 : 바벨탑 에테메난키

 

콜데바이가 발굴한 이 성벽은 세계 역사상 단연 최대의 도시 방어 시설이었다. 이 성벽은 바빌론이 중동 전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니네베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94]

 

그것은 당시에 사용되었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침입할 수 없는, 최고의 방어 기능을 갖춘 요새였다. 그러나 바벨은 정복되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설명은 한 가지 뿐이다. 적은 외부에서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적은 끊임없이 장벽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내정은 혼란을 거듭했고, 적이 성내로 들어와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기 바라는 정파도 늘 존재했다. 이 태도는 때로는 정당할 수도, 때로는 부당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굳건하기가 비길 데 없던 바빌론 요새가 무너졌던 것이다. [395]

 

피라미드는 통치자가 자신의 일생에 걸쳐 지었다. 그들 가운데는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의 미라와 자신의 ‘카’를 위해 피라미드를 지었다. 그러나 계단식 탑은 여러 통치자가 세대를 이어 쌓아 올렸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공사는 손재 대에 와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곳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지구라트를 지었다. 지구라트는 민족의 성전이었다. 신들의 제왕 마르두크 신을 받들었던 수천 명의 행렬이 향하는 목적지였다.[399]

 

바벨탑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오만을 상징한다.[402]

 

또 다시 성서에 담긴 사실의 핵심이 전설의 껍질을 벗어 던졌다. 이곳 바벨에서 사자의 골짜기에서 들어간 다니엘은 야훼의 기적을 경험했고, 신 앞에는 용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신은 더 위대한 신, 천 년이 지나면 세상의 신이 될 신이었다. [405]

 

26 : 대홍수

 

검은 고양이가 길을 가로막으면 재수가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는 미신이 떠오를 때, 십진법만 사용하는 우리가 열두 칸으로 나뉜 시계를 볼 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리의 운명을 행성과 연관시킬 때, 우리는 바빌로니아를 생각하는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일부는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빌로니아 민족이 아니라 바빌로니아 땅에서 유래했다.

발굴 현장에서 새로운 유물이 출토될 때마다 고고학자들은 놀랄 따름이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우리의 사고와 감정 속에 얼마나 많은 바빌로니아의 정서가 남아 있는가? 더 충격적인 사실은 바빌로니아의 지혜가 다른 민족에게서 전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할수록 비빌로니아의 문화는 그곳의 셈족보다 더 오래된 민족, 심지어 이집트인들보다 더 오래된 민족에게서 유래됐으리라는 가설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 [408]

 

수메르 문명은 바빌로니아 이전으로 멀리, 훨씬 더 멀리 이어졌다. 그 민족의 시원은 실제로 인류의 발생과 거의 일치하는 듯했다. 성서에 나와 있듯이 신이 내린 대홍수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 시대의 인간들과 일치하는 듯 보였다. [413]

 

수메르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문화유산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나쁜 유산은 미신이다. 그들은 미신을 통해 매우 사소한 일과 행동을 신비성의 좁은 틀에 가두었다. [421]

 

“인간의 노력을 단지 그 성과만으로 평가한다면, 수메르인들은 뛰어난 지위에 오르지 못할지언정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인간의 노력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평가한다면, 수메르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에 올라 마땅하다. 그들의 문명은 깊은 야만성에 빠져 있던 세계에 빛을 던졌고, 역사적 발전의 동력을 세계 최초로  가동시켰다. 우리가 성장한 때는 모든 예술의 근원이 그리스에 있다고 믿은 시기였으며, 그리스 자체는 아테네 여신처럼 올림포스 산에 사는 제우스신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피운 문명의 꽃씨를 리디아인, 히타이트인들이 전해주었다는 사실을, 페니키아, 크레타, 바빌론,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문명의 뿌리는 그보다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민족들에 앞서 수메르인이 있었다. [422,423]

 

 

IV.           층계 이야기

 

27 : 몬테수마 2세의 보물

 

코르테즈와 몬테수마 2세 황제는 눈빛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말로만 번드르르한 인상를 주고 받으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세계가, 두 시대가 마주 보고 선 순간이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역사상 위대한 발견에 있어 처음으로 유럽 사람이 기독교 문명과는 다른, 폐허의 잔해로부터 찬란한 문명을 복원하는 노력 없이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를 만나는 사건이었다. [429]

 

“이 문화의 소멸은 폭력에 의한 파멸의 유일한 예다. 그 문화는 시들지 않았다. 억압당하거나 저지당하지도 않았다. 절정의 화려함을 뽐내던 시기에 목이 잘린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꺾어버린 해바라기꽃처럼! [429,430]

 

발견에는 연구가 뒤따를 수도, 뒤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에는 반드시 정복이 뒤따랐다. 신대륙은 상상도 하지 못한 부의 원천이었다. 국제무역의 새로운 시장인 동시에 약탈을 기다리는 보물창고였다.  [430,431]

 

이성과 종교, 정치와 모험이 제시하는 과업은 서로 비슷했다. 천문학과 지리학의 발달과 그로 인한 항해술의 발달은 ‘해가 지지 않는’ 유럽 제국의 확장 정책에 수단을 제공했다. 광적인 신앙 또는 신성한 깃발을 앞세우고 달리는 모험가를 낳기에 충분했다. 꿈꾸기에 지친 이달고(스페인의 하급 귀족)들은 서슴없이 이 꿈을 좇아 내달렸다. [431]

 

 

28 : 목이 잘린 문명

 

아즈텍 문명은 전체적으로 보아 다신교였지만, 우이칠로포크틀리와 케트살코아틀 두 주신을 중심으로 일신교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역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징이 매우 뚜렸했다. 역학은 아스텍 문명의 바탕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세계에서 이와 같은 종교는 세계종교나 구원종교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443,444]

 

16세기 초에는 교회를 떠나서는 어떤 예술도 없었고, 교회 없이는 학문도, 삶도 없었다. 서구의 세계관은 기독교였다. 이와 같이 폐쇄적인 세계관에서는, 정당성과 영원성, 구원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어쩔 수 없이 배타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아니면 무조건 사교였고, 그들과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야만인이었다. 16세기 사람들의 이런 기본 사상은 다른 문화, 다른 세계관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데 절대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이와 같이 수직 관계만 알고 수평관계는 모르는 서구의 사상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의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444]

 

아스텍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개입되는 한 굴욕을 참지 않는 민족이었다. 스페인 군대는 무서운 무기를 앞세워 온갖 잔혹한 행위를 일삼고도 아스텍의 신전과 신들을 모독하지 않는 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유일한 예외마저 무시했다.[445]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성처녀 마리아의 기적도 아니고 성자들의 기적도 아닌, 에르난 코르테스의 기적이었다. 그의 기적은 모든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영웅의 노래로 찬양할 만했다. [453]

 

백인 정복자의 손에서 휘날리는 승리의 표시를 본 아즈텍군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 눈에 정복자는 분명 그들이 받드는 신들보다 더 강해 보였으리라. 그 순간, 에르난 코르테스가 깃발을 흔든 그 순간 멕시코는 패배했다. 마지막 몬테수마 제국은 이렇게 사라졌다.[454]

 

29 : 도시를 산 스티븐스

 

낯선 숲 어딘가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세계를 증명하는 옛 건축물의 일부를 찾는 일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에 자극을 준다.[462]

 

제단 앞의 유물 주변을 빙 둘러서 나무가 자라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숲은 그 유물이 마치 성물인 양 그늘을 만들어 보호하려는 듯했다. 유물은 마치 신처럼 보였고, 사라져간 민족을 숲의 엄숙한 정적 속에서 애도하는 듯했다. [466]

 

“폐허가 된 도시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난파한 조각배와도 같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돛은 날아가고, 이름은 사라지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익사했다. 그 배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배인지, 얼마 동안 항해했는지, 왜 침몰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배의 모양으로 미루어 어느 나라의 배인지 짐작할 뿐, 정확한 사실은 어쩌면 결코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469]

 

<멕시코 정복>은 무엇을 말해 주었는가? 아스텍 민족과 마야 민족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를 테면 이 두 민족의 종교는 매우 많은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아즈텍 문화는 가장 찬란하게 꽃피운 상태에서 코르테스에 의해 ‘목이 잘린’반면, 스페인 정복자가 마야 제국의 해안에 상륙했던 당시 마야는 문화적, 정치적 절정기가 지난 지 이미 수백 년 뒤였다. 그 민족은 소멸하기 직전 최후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상태였다. [477,478]

 

“그 베일은 생명이 유한한 인간의 손으로는 들춰볼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같은 결론은 지나치게 용기를 잃은 태도다. 생명이 유한한 인간의 손은 오늘날에도 파헤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수백 년 전에는 뚫을 수 없는 베일에 싸여 있던 비밀도 오늘날에는 이미 그 베일을 벗어던졌다. [479]

 

30 : 막간극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로 온 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최초의 주거지를 정하고,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서만 번성한 문명이 아니라 나일 강과 더불어 번성한 문명이었다. 이들 민족에게 이 강들이 있었다면, 고대 그리스에는 좁다란 에게 해가 있었다. , 과거의 위대한 문명은 모두 운하문명이었다. 고고학에서는 문명 발상지의 전제조건으로 흔히 강을 꼽았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문명은 운하문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문명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전제는 고대 문화민족들은 주로 농경과 축산을 주산업으로 했다는 점이다. 마야인은 비록 나름의 특별한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농경을 했다. 그런데 축산은? 마야 문명은 실제로 가축이나 짐 끄는 짐승이 없는 유일한 문명이다. , 수레 없이 이룩한 문명이었다. [481,482]

 

중앙아메리카의 탐험가들에게는 세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첫째, 이 문명이 지닌 독창성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문 투성이였으며 둘째, 오직 방대한 자료가 마련되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비교 연구가 불가능했고 셋째, 그 땅의 지형적인 특징이 신속한 후속 연구를 가로막았다. [483]

 

31 : 버려진 도시의 비밀

 

학자들은 머지않아 밝혀진 마야의 숫자에 관한 지식으로 무장한 후, 디에고 데 란다의 스케치를 손에 들고 신전과 층계와 기둥과 프리즈 앞에 섰다. 그리고 운반용 가축이나 수레도 없이 돌연장만으로 깎은 돌을 정글 한 가운데 쌓아올린 이 마야의 건축물에는 날짜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장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485]

 

마야의 모든 석조 건축물은 돌로 만든 달력이었다! 어떤 배치도 우연이 아니었다. 미학은 수학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있었다. 그전까지는 무시무시한 석상의 얼굴이 반복되거나 갑자기 단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이상스럽게만 생각했다면, 이제 그 현상이 특정한 수나 달력의 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87]

 

마야 민족은 정확한 천문 관측을 복잡한 수학적 기술과 결합할 줄 알았다. 매우 합리적인 사고력을 지닌 민족이었다. 동시에 병폐가 매우 심한 신비주의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었다. 마야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달력을 고안하고는 그 달력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489]

 

마야에는 시민에 속하는 중간계층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귀족계급은 매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알메헤놉’이라고 일컬었다. ‘조상이 있는 사람들’, 즉 족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계층에서 시제도 나왔고 세습영주도 나왔다. 세습영주는 ‘흘라치 우이닉’, 즉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들 ‘조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온 백성이 일했다. 농부는 수익의 3분의1을 귀족에거, 다른 3분의1은 성직자에게 바치고 나머지 3분의1만을 자신이 가졌다. 이렇게 냉혹한 사회구조는 10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이완되지 않은 듯하다. 그 속에서 멸망의 씨앗이 싹텄다. 수준 높은 문화와 사제들의 학문은 어쩔 수 없이 밀교와도 같은 성격을 점점 더해갔다. 그들의 지식은 결코 아래로 전달되지 않았다. 경험 교환은 없었다. 마야 학자들의 예리한 사고력은 점점 더 하늘의 별만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탱해줄 힘의 원천인 농경지는 잊어버렸다. 무서운 재앙을 막을 도구를 고안하는 일도 잊었다. 그토록 훌륭한 학문적, 예술적 업적을 이룩한 민족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간단한 연장 하나가 없었다. 마야에는 쟁기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에 대한 설명은 오로지 마야 지식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정신적 자만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495]

 

이로서 마야 민족이 짧은 기간 내에 굳건한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설명된다. 밭은 지력을 잃었다. 마야의 위대한 문명은 그 기반인 농부들이 도시에서 멀어지면서 끝이 났다. 기술 없는 문명은 가능해도 쟁기 없는 문명은 가능하지 않으니까![496]

 

32 : 우물로 가는 길

 

“어느 날 아침, 첫 햇살이 먼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 나는 이 신전의 지붕에 올라섰다. 아침의 정적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밤의 소음은 사라지고, 낮의 소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위로는 온 하늘이, 아래로는 온 땅이 숨을 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때 크고 둥근 태양이 떠올랐다. 빛나며, 이글거리며, 세상은 순식간에 노랫소리와 흥얼거림으로 가득 찼다. 나무 가지의 새들과 땅의 벌레들이 다 함께 찬미가를 불렀다. 자연은 최초의 인간에게 태양을 숭배하라고 가르쳤고, 인간은 그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 오늘날까지도 따르고 있다. [499]

 

모든 민족의 민요에서 우물로 가는 소녀들의 모습은 때로 심오한 뜻을 내포하기는 해도 줄곧 삶에 대한 긍정, 삶의 즐거움을 묘사한다. 그러나 신성한 세노테로 가는 마야의 어린 소녀들은 죽음의 길을 걸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소녀들이 우물 앞에 선다. 곰팡내 나는 물은 소녀의 몸을 삼키고, 비명마저도 삼킨다. [500]

 

그러나 모든 사물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역사가들이 과거로 파고드는 이유는 건축 기사가 땅을 파는 일과도 같다.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일이다. [513]

 

33 : 숲과 용암에 덮힌 층계

 

고고학의 역사에서는 엄청난 역경 속에 겨우 완성한 역사의 그림이 새로이 발견된 사실로 인해 한순간에 일그러질 위기에 처하는 사간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학자들이 기존의 그림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거나. 마치 뜨거운 수프 접시 주변을 빙빙 도는 고양이처럼 대단히 소심하게 주변만을 맴돌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학문의 자기 방어적인 성질이 작용한 결과다. [519]

 

건축물에 새겨진 달력으로 52년마다 외피 한 겹을 지었으며, 이 건축물 하나만을 짓는 데도 400년 이상 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522

 

“이토록 절대적인 어둠에 싸여 있으면서 어떤 물음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땅이 있는가? 이 모습을 본 사람은 경탄과 당황 가운데 어떤 느낌이 더 클까? [524]

 

세 민족의 문화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민족 모두 신, 태양, 달을 향해 층계를 쌓은 피라미드를 지었고, 이 모든 피라미드는 밝혀진 바와 같이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역법의 철칙에 따라 축조되었다. [525]

 

달력의 순환은 세 민족의 머리 위에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칼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들은 52년만에 한 번씩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사제들의 권력을 낳았다. 위협하는 재앙을 막을 사람은 사제들뿐이었다. [526]

 

“아스텍 문명과 마야 문명의 특징은 종종 서구의 고대 세계와 비교를 통해 부각되는데, 이러한 비교에 따르면 아스텍은 로마에 해당되고, 마야는 그리스에 해당된다. 이 비유는 전체적으로 보아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야 민족은 실제로 여러 공동체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 공동체는 서로 반목했고, 때때로 공동의 적과 싸워야 할 때만 단결했다. 마야 제국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조소, 건축, 천문, 산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다. 이에 반해 아스텍 민족은 호전적이었다. 톨텍인들은 아스텍 민족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톨텍인들은 에트루리아족에 비견될 만하다. [527]

 

톨텍 또는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에 살았던 종족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맡은 역할은 수메르인과 마찬가지로 발명가였다. 마야 민족은 바빌로니아 민족과 같이 우수한 발명품의 혜택을 누리며 문화제국을 건설했다. 아스텍 민족은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과 나란히 세울 수 있다. 그들은 발달한 학문으로 이익을 챙겼지만, 그 학문은 순전히 권력으로 활용되었다. [527] 

 

 

V.            아직은 할 수 없는 이야기

 

34 : 고대의 땅에 펼치는 현대의 연구

 

발굴 사례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네 개의 이야기를 통해 지역 별로 소개함으로써 네 개의 독립된 문화권, 즉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에 대한 윤곽이 자연스럽게 잡히도록 했다.

소개된 문명들은 ‘고고학 소설’이라는 이 책의 제목에 어울리는 문명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문명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다 보면 정말로 낭만적인 모험을 즐길 수 있으리라 판단되는 문명들이다. [535]

 

미지의 말이 미지의 글로 새겨진 경우 같은 내용을 잘 아는 다른 언어로 쓴 글이 없으면, 즉 번역본에 해당되는 글이 없으면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문헌학의 기본명제는 그 사이 부정되었다. [536]

 

보써트는 1947년에 현재 터키의 카라테페 산에서 두 언어로 쓴 새김글 부조를 발견하고, 학계에서 3세대에 걸친 연구로도 풀지 못했던 히타이트어 상형문자를 해독해냈다. [536]

 

고고학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유물이라고는 나올 것 같지않은 대도시 중심부나 얼음으로 덮힌 산꼭대기에서 발굴에 성공해 대중을 놀라게 하는 일이 거듭 일어났다. [540]

 

멕시코의 알베르토 루스는 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지만 고대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신전의 받침돌일 뿐이라는 확실해 보이는 명제에 도전했다. [543]

 

현대인들을 질식시킬 듯한 일상의 문제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탈진 상태에 이른 현대인들은 과거로 눈을 돌렸고, 지난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551]

 

현대인들을 질식시킬 듯한 일상의 문제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탈진 상태에 이른 현대인들은 과거로 눈을 돌렸고, 지난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고고학적인 문제에 관한 일반인의 참여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지고 그 요구가 더 절실해졌다. 이런 관심은 이집트에 건설할 댐으로 인해 일부 유물이 안타깝게도, 대단히 안타깝게도 물에 잠길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힘을 발휘했다. [552]

 

발굴은 전 세계에서 계속될 것이다. 미래의 100년을 차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5000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552]

 

내가 저자라면


책의 본문에 충실한 나의 시각

 

원제 ‘GODS, GRAVES, AND SCHOLARS (, 무덤, 학자들)이란 제목이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이란 번역 제목보다 더 강하게 다가온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긴장감과 긴박함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담비 털을 손에 쥐고 어렵게 찾아 낸 유물들이 손상될까 살살 묵은 먼지를 털어 내는 장면에서는 숨을 참고 있었고, 언제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는 돌과 흙더미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에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병마에 노출된 열악한 환경과 부실한 장비들을 가지고 떠난 발굴현장은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이러한 여행은 단순히 산책 정도의 느낌이 아니었다. 긴장으로 연속된 모험과 탐험의 이야기였다. ‘그럼 만약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달아 본 다면 무엇이 좋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고고학자들과 함께 떠난 고대유물의 발굴여행’ 난 그들과 시간, 세기를 넘어 함께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런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몰론 이런 제목은 판매부수를 올리는 데는 약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작가가 친절히 알려준 경로대로 피라미드 이야기에서 조각상을 거쳐 탑 이야기와 층계이야기로 따라 가 보았다. 읽는 내내 가슴이 뛰고 있었다. 도둑이 먼저 훑고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직감 하나와 근거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책의 한 줄을 가지고 목숨 걸고 떠난 그들에게 어떤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책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굴의 결과 뿐만 아니라 발굴과정에서 겪어 온 참여자들의 땀의 흔적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불굴의 정신은 금도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라는 것이 마지막 장 ‘아직은 할 수 없는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낸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들이 믿는 신도 만나 보았고, 무덤 밑도 내려 가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모험에 성공한 학자들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 보면서 그들의 성공의 키워드를 찾아 보았다.

 

★ 폴 에밀보타 (1902-1870) 보타가 거둔 성공의 요인으로는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강인한 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멘스(1775-1853) 이 시람의 일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실한 이었다.

★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1817-1894)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노련했고, 그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을 찾아 나섰다.

 

★로베르트 콜테바이(1855-925) 그는 상황에 따른 유혹이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즐거움에 대해 언제나 열린 마음을 유지했으며, 그에게 넘쳐흐르는 유머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의 추진력 사람을 부리는 능력은 꺼낸 칼로 한 번에 잘라버리듯 선이 분명하고 단호했다.

 

★조지 스미스 (1840-1876) 누구도 따르지 못할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노력파 학자였다.

 

★윌리엄 히클링 프레스코트(1796-1859) 믿기 어려운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에드워드 하버트 톰슨 (1856-1935) 누구라도 굴복했을 난관 앞에서 끈질긴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인리히 슐리만 (1822-1890) 고고학자들은 물론, 학문을 신봉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경탄할 만한 인물이 슐리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포기할 수 없는 열정으로 고대 트로이를 발견해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고고학의 역사에서 위대한 발견을 이루어 낸 고고학자들은 학문의 상아탑에서만 지내던 학자들만이 아니라 의사, 법률가, 정치가, 외교관 등 다양하고 화려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또한 평범한 상인이었던 슐리만도 있었다. 이것은 고고학이 어떤 학문적 과정의 결과보다도 오히려 학문적. 직업적 편견이 없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 포기 할 수 없는 열정, 성실함, 믿기 어려운 노력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상력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성공까지 이루어 내었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내리꽂은 삽자루를 놓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한 자리를 파헤치고 들어갔던 열정’이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삽 끝이 황금에 부딪쳐 울리는 극적인 울림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시대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하고 변화를 시도해 성공을 거둔 진정한 변화 경영자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러한 이들의 ‘열정’이 오늘날의 ‘고고학 역사’를 만들어 냈다.

 

내가 본 책의 장점과 단점

 

장점: 모르는 길을 좀 더 편안하게 가고자 이용하는 내비게이션처럼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추적하며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체계적인 안내를 머리말에서 해주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피라미드 이야기>부터 읽기 시작해서인지 아니면 고고학의 전체의 그림을 그리기보다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문학인‘논픽션 소설’의 형태로 서술된 글이 복잡한 학문적 문제를 이해하기 쉬워서인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또한 고고학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의 맨 뒷부분 부록에 연대표를 실어 놓아서 고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처음 일었을 때부터 오늘날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사건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이는 참고할 부분을 찾음에 있어 좋은 자료가 되었다.

 

단점: 그 글에 알맞은 현장감 있는 사진들이 글과 함께 각 장에 소개되어 있으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더욱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될 만한 지도와 사진들은 각 챕터가 끝나는 부분에 한꺼번에 삽입한 상태여서 보기에도 다소 불편했고, 이미 지나간 글과 사진이 매치 되지 않아 가독성도 떨어졌다. 사진과 글이 따로 놀지 않도록 그 둘의 결합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의 형태를 갖췄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이집트 왕의 무덤의 이야기들, 신화처럼 존재하던 트로이가 발견되는 순간의 사실적인 묘사와 설명들은 사실 있는 그대로 제시하였음에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방대했다. 그렇게 전개되던 이야기들은 3장 탑 이야기에서 학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4장 층계 이야기에서는 중앙아메리카의 거대한 마야문명은 울창한 숲에 가려져 은폐되어 버리듯 덮어지는 느낌이었다. 자료를 찾던 중 “중앙아메리카 답사는 한 번쯤 옆길로 벗어나고픈 충동의 결과였음을 밝혀둔다”라는 글을 읽고 작가의 의도는 이해는 되었지만 마야문명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시 읽고 느낀 점

 

다시 읽어도 감동의 연속이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문명 연구, 발견의 한 페이지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마저 하다. 이집트 문명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상형문자이다. 지금 상형문자는 해독이 되어 이집트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지만 그 상형문자를 해독한 사람이 누구였으며 어떻게 해독을 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상형문자는 샹폴리옹이라는 한 천재 소년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구를 통해 해독한 것이었다. 자신의 삶 전체가 이집트를 향해 있었던 ㅇ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이라는 거대한 석판을 통해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되는데 마침내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하던 그 순간의 감동이 책을 읽는 나에게도 전달 되었다.

 

태고의 세계를 직접 열어 보여주었던 슐리만

 

그리스 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슐리만의 생전 집은 그 유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박물관으로 공개 되고 있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 천정이 높은 커다란 방을 둘러 보며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그가 발굴한 유물들 중 금화가 거의 방마다 가득 전시 되어 있었다. 먼 나라 그리스에가서 그의 유물을 직접 보았던 느낌이 다시 읽는 책에서 생생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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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 [북리뷰 45] 미래의 조직 신진철 2011.01.31 2044
2711 [리뷰] 영적인 비즈니스 최우성 2011.01.31 2035
2710 낯선 곳에서의 아침 아침 / 구본형 [2] 이은주 2011.01.31 2677
2709 프로페셔널의 조건 맑은 김인건 2011.01.31 2116
2708 북리뷰-<내 삶에 변화가 찾아올때:윌리엄브리지스> [2] [2] 박경숙 2011.01.31 2709
2707 [북리뷰]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 심층읽기 이선형 2011.01.31 1971
2706 <피터드러커 자서전> - 피터드러커 김연주 2011.01.30 2083
2705 북리뷰 45. 사람에게서 구하라_구본형(을유문화사) 박상현 2011.01.30 2696
2704 [북리뷰] 행복수업 [2] 이선형 2011.01.27 2745
2703 북리뷰 71 : 윤리란 무엇인가 범해 좌경숙 2011.01.26 3283
2702 44.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구본형 [2] 박미옥 2011.01.25 2557
2701 북리뷰 44. 인간과 상징_칼 구스타프 융(열린책들) [1] [3] 박상현 2011.01.25 4337
2700 [북리뷰 44] 피터드러커 자서전 신진철 2011.01.25 2075
2699 북리뷰43-<신화와 인생>-두번째 읽기 박경숙 2011.01.25 1696
2698 <내 인생의 첫 책쓰기> - 위즈덤하우스 김연주 2011.01.24 2208
2697 [리뷰] 할아버지의 기도 최우성 2011.01.24 2477
» 두 번째 읽기-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 CW. 체람 이은주 2011.01.24 2662
2695 [북리뷰] <컬처코드> 심층읽기 이선형 2011.01.24 1936
2694 북리뷰 70 : 내공 - 공병호 범해 좌경숙 2011.01.20 3122
2693 북리뷰 69 : 영화관 옆 철학카페 - 김용규 [1] 범해 좌경숙 2011.01.17 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