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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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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5일 08시 58분 등록

북리뷰43-신화와 인생 2번째 읽기-20110125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904 3. 26 미국 뉴욕 시~1987. 10. 31 호놀룰루]

 

캠벨은 미국의 유명한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로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그의 일생은 '신화에 대한 연구'로 말할 수 있다.

 

캠벨은 다양한 인류 문화 속에서 신화가 갖는 보편적인 기능을 검토하는 한편, 광범위한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신화적 인물을 연구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을 읽었던 캠벨은 영문학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신화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가 아메리카 인디언 민담의 기본 주제와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뉴욕 브롱크스빌에 있는 새라로렌스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생물학, 수학, 영문학, 중세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티어를 배우고 독일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할 정도로 그는 타고난 학자였다고 한다.

<그 두 사람에게 왔던 곳>(1969]에 실린 수필 〈영웅 The Hero〉에서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 속의 영웅 개념을 다른 민족의 것과 비교했다. 〈천의 얼굴을 지닌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1949]도 영웅의 원형을 연구한 책이라고 한다. 세계의 신화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4권, 1959~67]이 대표작이며, 그밖에 수필집 〈야생 거위의 비상 Flight of the Wild Gander〉(1969], 〈삶 속의 신화 Myths To Live By〉(1972]·〈신화적 이미지 The Mythic Image〉(M. J. 애버디와 공저, 1975]와 세계 신화의 역사적 도해서 〈동물적인 힘의 양상 The Way of the Animal Powers〉 제1권(1983]을 썼다. 〈신화·꿈·종교 Myths, Dreams, and Religion〉(1971]를 편집하기도 했다고 한다.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는데 1929년 유럽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콜롬비아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중세문학에 대한 연구 계획을 거절당하자,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여 5년 동안 캠벨은 하루 중 16시간의 시간을 4시간씩 네 단위로 구분하여 세 단위를 독서와 연구에, 한 단위를 휴식에 활용하는 생활을 철저하게 유지하며 고된 연구를 진행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캔터베리 스쿨을 거쳐,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이 교수가 된 뒤 신화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 사상에 기반을 둔 캠벨의 주된 전공은 비교종교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화 연구는 그러한 비교종교 학문의 추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며,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화가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 다시 말해서 신화를 통해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캠벨은 지독히 연구에만 몰두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자였지만, 정규학위과정을 그만두고 혼자 산속에서 책을 읽으며 연구를 진행할 정도로 자신의 희열을 따라갔던 소신과 열정을 가진 학자였던 것 같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검정색: 첫 번째 읽기

파랑색: 두 번째 읽기

빨강색 : 내 생각 50가지

 

들어가는 말: 켐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P. 7] 바로 이 장이라는 곳이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과학이 만나는 곳이다.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캠벨 찰학의 근간이다. 물질이란 없다. 모든 것이 장이다. 그러한 구별과 제한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뿐이다.

[P. 7]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P. 8] 이 책의 나머지는 세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각각은 의식의 세가지 층위 또는 단계에 상응한다.

[P. 9]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P. 9] 누군가 우리를 향해 이기적이라고 말할 경우 십중팔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 생각 1) 이렇듯 인간은 모든 중심에 자신을 둔다.

우리를 향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우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A가 남B에게 해가 될수 있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는데 그것이 판단하는 사람C의 이익에 맞다면 C는 A를 심지가 굳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두는 것이 모든 인간의 특성이다.

[P. 10] 최종 목표는 이 세계를 바로 잡기 위해 바깥으로 투사되었던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로잡는 스스로의 진로를 따라 나아가고 여러 세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춤추는 바로 그경지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내 생각 2) 따라서 사람은 결국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가 주관자가 되어가고 그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무기력해질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힘이라도 스스로 끄집어 낼수 있을 때 비로소 무기력에서 일어날 수 있다.

[P. 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 11] 그 한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 딛어야만 한다. 영웅의 여정은 탄생에 비유되어 왔다. 처음에는 안전한 장소에서 띠뜻하고 아늑한 상태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신호가 오고 그것이 점점 강렬해지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내 생각 3) 이 떠남의 신호중 무기력이 하나의 형태임을 알수 있다. 왜냐하면 무기력이란 예전의 방법이 통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바로메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함을 알 수 있다.

[P. 11]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곤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P. 12]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P.12] 조지프는 우리가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혹은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이라곤 의식의 전환 뿐이다.

(내 생각 4) 지금 바로 여기 자신이 가진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인지의 전환이다. 거창한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부터 just do it 하는 마음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P. 13] “자기 발견의 사자는 사사건건 ‘너는 할지니’ 라고 주문하는 그 용을 죽여야 한다”

(내 생각 5) 의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의무에 종속되면 노예의 삶을 살게된다.

 

도입의 단계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P. 19]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P. 20]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P. 21]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P. 21]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P. 21]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내 생각 6) 우리는 무기력에서 완전히 한 번에 나올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동안 성장할 수 있다.

(내 생각 7) 한 번에 피라미드를 다 만들려한다면 무기력을 느끼겠지만 벽돌 한 개를 만드는 것은 할 수 있다.

[P. 21]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 8)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솔직한 노력없이, 외부에 가장하여 자신은 완전한 삶을 사는 듯이 보이려 하는 자들의 가짜연극이 지천에 너무 많다.. 차라리 눈을 감고 묵상하라. 그들을 고쳐보겠다고 열정을 쏟는 순간 비판과 미움을 받을 것이고 곧이어 무기력이 동반될것이다. 왜냐하면 통제불가능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무기력 발생의 한종류이다. 따라서. 무시하고 자신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게 현명하리라

[P. 22]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니까

(내 생각 9) 스스로 계획해서 삶을 살아내려 할 때 무기력을 느낄 수 있다. 어린아이가 되어서 스스로 기쁨을 따라 할 일을 할때 비로소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P. 22]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내 생각 10) 현재가 보잘 것 없고 미래의 가능성이 절망스러울 때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게되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에 속지 말고 사실과 결과를 보라

[P. 22] 지옥이란 말라붙은 삶이다.

[P. 23]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 생각 11) 간혹 현상유지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 보이는 형상에 매달리는 우리는 결국은 그 형상마저 놓치게 된다. 썩어지지 않는 밀알이 열매를 맺지 못하듯

[P. 23]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내 생각 12) 그러므로 스스로를 파괴할수 있는 자만이 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P. 24]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P. 24]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내 생각 13) 버리는 것이 가장 먼저 여야 한다. 윌리엄브리지스도 전환을 위해선 버림과 포기가 제일 먼저라고 했다.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하지 말고 먼저 버리는 작업을 하라.

[P. 25]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P. 26] 우리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내 생각 14) 무기력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이제 다시 도약할 때가 되었음을 믿어봐라

[P. 27] 여러분 자신의 길을 따라 삶을 계속해 나아가는 동안에는 혹시 새동이 떨어진다 해도 그걸 닦느라 신경쓰지 마라

(내 생각 15) 누군가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듯 한다고 해서 두려워 말라.

[P. 27]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내 생각 16) 외부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되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P. 28]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내 생각 17)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에 고독해 하지마라. 자기의 길을 홀로 갈 때 비로소 희열이 따를 것이다.

[P. 29]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내 생각 18) 니체의 정신 변화 3단계 중 3번째 단계가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이다.

의무를 넘어서야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과도한 의무가 주는 무기력을 벗어나서 다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은 정신의 변화/ 의식의 진화가 일어난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P. 29]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에서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내 생각 19) 무기력에서 벗어나 성장의 단계를 밟아가는 사랑은 영웅의 여정과 흡사하다.

그는 그길에서 자신만의 희열을 느낄것이다

[P. 29]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날을 내팽개쳐라

(내 생각 20) ‘버림’ ‘놓아버림’ 자신의 어제를 놓아버림으로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라

[P. 30]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라. 영웅적인 삶은 ‘각자만의’모험을 실행하는 것이다.

(내 생각 21) 각자의 무기력을 벗어난 사람은 모두 한사람의 영웅이다.

[P. 30-31]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 22) 각자 무기력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모두에게 다른 형태이다. 단지 참고만 할뿐 누구도 진정한 지침을 주지는 못한다.

[P. 32] 보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 여정에 담긴 목표는 영혼에서 여러 층위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파헤쳐 마침내 여러분 자신이 붓다의 의식이며 그리스도라는 신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 여정이다

(내 생각 23) 결국 ‘의식의 진화’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된다, 인생의 여정은 의식의 전진에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나 붓다가 될수만 있다면 그의 생은 축복이다,

그러기 위해선 기쁨을 따라가야 하고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P. 33] 심연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내 생각 24) 마음속 깊은 곳에 깊이 들어갈 수 있어야 보물을 찾을 수 있다.

[P. 33]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여러분이 차마 들어가기 겁내던 바로 그 동굴이,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그 무시무시하던 저주받은 것이 바로 그 중심이 된다.

(내 생각 25)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곳이 우리가 찾던 보물이 있을 수 았다.

마녀에게 물동이를 뒤집어씌우자 마녀가 눈녹듯 사라져 버린 것 처럼.

[P. 33]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P. 35]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P. 36]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P. 36]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P. 37]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내 생각 26) 무기력에 압도당하지 말라 그 단계를 뛰어 넘으라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P. 42] 그럴 때마다 십중팔구 누군가가 한 사람 나타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로 작은 뱀 한 마리가 그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P. 43]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의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P. 43]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지구상 어디에도 에덴 동산은 없었고 뱀이 말할줄 알던 시절도 선사시대의 타락도 동산에서의 추방도 대 홍수도 노아의 방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P. 46] 배우자를 찾을 때 만약 여러분의 직관이 훌륭한 경우 적임자를 찾을 것이다. 만약 훌륭하지 못하다면, 계속해서 잘못된 사람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

[P. 48] 어머니가 마치 그 아들에게 있어서는 투사 형성 요인의 최초 보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그 딸에게 있어서 그렇다. 여성은 남성적 여소에 의해 보충되며 따라서 그녀의 무의식은 이른바 남성적 각인을 지니게 된다.

[P. 48-49] 나는 여성에 있어 투사 형성 요인을 정신이나 영혼을 의미하는 아니무스라고 불러왔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아니면 아니무스는 강력한 검을 뽑고 아니마는 환상과 유혹의 독을 내뿜는다.

[P. 51] 이렇게 사랑은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은 마음의 정찰병으로서 마음이 즐거이 가지고자 하는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눈과 마음이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이 둘이 하나의 결의로 단단하게 뭉칠 때, 그때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부터 환영받는 것에서 완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이렇게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태어나거나 시작되지 않으면 사랑은 다른 방법으로는 태어날 수도 시작될 수도 없다.

[P. 53]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 진다

(내 생각 27)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을 겪지 않는 일이라는 의미인가?

[P. 53]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P. 54] 깨어진 직후, 그러니까 아직 새로운 관계에 몰두하기 전, 삶에서 그 모든 가능성들이 박탈되었을 때 고통스러운 반응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 말로 위험한 시기가 된다.

(내 생각 28) 이런 상황은 중립지대와 비슷하다. 단절이 있고 난후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기 전의 그 무풍지대가 중립지대이다. 중립지대가 위험한 사람이있다

[P. 55]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마치 어마 어마한 실패인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준 사건들이었음을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 생각 29) 이 부분이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주장과 통하고 있다. 조셉캠벨, 니체, 융은 많은 점에서 교집합이 보인다.

[P. 55]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내 생각 30) 무기력으로의 추락은 성장과 상승을 위한 운명의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P. 55] 영혼의 어두운 밤이 지나야 곧이어 계시가 나타난다.

(내 생각 31) 인생의 사막이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다. 거기서 인생을 보게될 것이다.

[P. 55]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온통 어둠인 것처럼 보일 때 새로운 삶이 하나같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들이 나타난다.

[P. 57-58]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

[P. 59]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심지어 죄에 대한 기억조차 완전히 망각해야 했던 것이다.

(내 생각 32) 이 완전한 망각이 정신의 3번째 단계인 어린아이가 되는 길이다. 가장 진화된 정신이다.

[P. 60-63]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

두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가 [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사랑을 경험할 때 마다 여러분은 제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내 생각 33) 사랑조차도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점에서 비자발적인 사랑은 나약한 자의 자기 보호기술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P. 63] 스스로의 열정을 따를 때 사회의 도움은 사라진다. 여러분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니까

(내 생각 34) 결국 스스로의 열정을 따라갈 때 모든이에게서 지탄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P. 63] 다섯 번째 단계의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만 있을 뿐이다.

[P. 66]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찬식, 또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P. 67]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P. 67] 여러분이 사랑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실상은 욕정이었을 경우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P. 68]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러분은 과연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구축하려 하는 것인가?

[P. 69]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내 생각 35) 배우자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P. 70-71] 만약 결혼이 오히려 해독을 끼친다면, 여러분은 그 상황을 전환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만 한다. 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여러분은 필요한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가해 변화를 유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일종의 개인적 훈련을 통해, 사랑과 신뢰와 협동의 분위기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여러분의 삶이나, 심지어 여러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며, 그 상황이 변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방과의 관계를]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P. 72]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P. 73]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P. 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P. 75] 내가 보기에 공감이란 말 그대로이다. 즉 같이 고통받는 것이다. 그거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내 생각 36) 공감할수 있는 재능은 분명 훌륭한 자질이다. 그러나 상대에 따라 참여의 강도가 달라진다면 그건 공감에서가 아니라 이기주의에서 확대된것이다. 진정한 공감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공감하는 사람은 적들의 기아를 가슴아파할수 있는 사랑이다.

[P. 75] “나는 무엇에 대해서나 항상 공감할 수 있을까?”내가 보기에 공감이란 말 그대로이다. 즉 ‘같이 고통 받는’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P. 76] “나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내가 상관할 것도 아닌 고통이 마치 나 자신의 것인 양 내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며, 나로 하여금 행동에 돌입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

(내 생각 37) 이런 공감없이 사랑을 운운할 수는 없다, 해서도 안된다.

[P. 77]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P. 79] 신화는 우리 안에 있는 힘들을 합쳐줄 수 있는 실마리다.

[P. 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P. 80]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겐 반드시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어머니는 자연을 표상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사회적 관계로 인도한다.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P. 83]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 38) 마찬가지로 사랑을 따른다면 그 사랑마저 잃을 뿐이다. 누군가를 이끌어 갈려고 할 때 리더쉽이 생기지 않는다.

[P. 83 -84]

삶의 에너지로서 경험되는 돈은 실제로 명상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을 축적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한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돈에 몰두한 삶으로부터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우 놀라웠다.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행동을] 촉진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돈이 있다는 것은 마치 차에 기름이 있는 것과도 유사해서 만약 기름이 없었더라면 결코 갈 수 없을 장소에 갈 수 있는 것이다.

[P. 84]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으로부터의 잠재력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것이다.

(내 생각 39) 지금 바로 거기에서 무기력을 나올수 있는 방법을 찾을수 있다.

[P. 86]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 40) 열등감은 자존심의 다른 얼굴이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애쓰는 사람은 실상 열등감에서 그리 행동하는 것이다.

[P. 87] [대신]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P.87]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내 생각 41)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면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권한을 부여하지 말라.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내 생각 42) 우리는 모두 부속품이 아닌 스스로 하나의 섬이다. 부속품이 되어 기계의 어느 부분으로 존재하는지 모를 때 지금 자신의 행위가 어떤 제품을 만들어 내는 지를 모를때 무기력을 역시 경험하게 된다.

[P. 88]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내 생각 43)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숲속으로 가는 분리 같은 그런 비 일상성을 가질수 없는 사람은 우선 현실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은후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그것을 흉매낼수 있을지 모른다.

[P. 89] 물론 가끔은 나도 거의 -정말‘거의’-‘젠장, 차라리 누가 나보고 뭘 해야 한다고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이 열망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어떤 것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P. 90]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일관적인]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온 과정을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P. 90]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 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내 생각 44) 무기력하게 흘려보낸 시간조차도 그 속에서 투쟁과 노력이 있었다면, 후에 그 무기력에서 보낸 삶이 자신에게 남겨주는 유산의 혜택을 볼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P. 92] 사람이 어찌할바를 모를떼에는 정말로 어찌할수 없다.

(내 생각 45) 무기력 상태에서 느끼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정말 어찌할수 없다.

[P. 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무엇을 학성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한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P. 100]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내 생각 46) 조직에서 자신을 어찌볼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조직생활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자신의 본능을 따라 움직일 때 성과도 있고 희열도 있다. 그러니 너무 많은 눈치를 보지 말라. 때로는 모든 사람과 반대의 편에 설수 있을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생의 주인이 된다. 비난 때문에 아파하지 말라. 다만 옳은 일을 하고도 비난받는 자신을 연민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것을 경계하라. 진화를 위해선 홀로 가라. 큰 고기는 떼를 지어 몰려다니지 않는다.

[P. 103] 성배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영적 성취이다, 각자의 삶에는 여러 가지 높은 성취들이 있으며 그 각자의 삶은 성배로부터 은총을 부여받는다.

(내 생각 47) 그러므로 각자에게는 성배가 다른 종류일 것이다. ‘다양한 성배’를 인정할수 없다면 자신의 성배만을 고수한다면 그는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P. 104] 무엇이 여러분을 영적 성취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가? 나는 애 삶이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바로 내 삶의 진정한 중심잡기로부터 나를 탈선시키는 어떤 업적이나 시스템과의 관계에 내가 과도하게 집착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 정도를 걷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속에 가진 것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것들과 만사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이다.

(내 생각 48)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을때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발성의 다른 얼굴이다.

[P. 104]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역시 내게는 황무지이다. 이것은 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이 내게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껏 자 자신의 소망에서 비롯된 충동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온갖 종류의 행동에 관해서는 강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을 일종의 지침으로 삼아 왔다.

[P. 105]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황무지를, 즉 "너는 할지니“의 세계를 회피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 49) 자발성을 갖게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질때 그대 바로 영적 진화가 일어난 것이다. 누구도 무엇도 우상이 되게 하지 마라. 완전한 자유의지만 존재하게 하라.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을 앉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를 볼 때면 정말이지 섬뜩하다.

[P. 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P. 103] 성배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영적 성취이다, 각자의 삶에는 여러 가지 높은 성취들이 있으며 그 각자의 삶은 성배로부터 은총을 부여받는다.

(내 생각 50) 조셉 캡벨은 살아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P. 108] 영혼에게“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하는 그물이라도 또 다른 사람, 즉 자신의 한가운데[중심]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향후의 모험을 위해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옷이 된다.

[P. 109]“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 그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P. 109] 내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P. 111]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땅’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제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번도 손댄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그렇게 하는 건 너에게 충분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

(내 생각 51) 부름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영웅이 될수 없다. 그는 변하지 않는 바위 같은 사람이다. 계속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는 자는 영웅의 순례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P. 111]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가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내 생각 52) 좋아, 영웅의 출발을 했다 치자.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맞딱뜨려질 것이다. 이전에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무기력이 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무기력이 존재하는 지점이다. 인생의 사막이다.

 

[P. 112] 우리가 [부름에 응답해 여정을]떠나지 않을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 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지금 본인에게]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내 생각 53) 자신의 현 위치를 계속 고수한다면 무기력 따위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성장에의 지향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무기력하게된 사람이 갖게될 강력한 무기이다.

[P. 112] 하지만 만약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올해는 모두들 이 여행을 나설 예정이라고 하니, 나도 그냥 따라가야지” 하고 말한다면, 인도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 54) 인생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결코 성장의 성배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번도 무기력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고정되어 있는 못과 같다. 그냥 그곳에 박혀있고 늘 달력이나 모자 따위를 거는 용도이외에 별로 쓰임이 없다.

[P. 113]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을 향한 부름이며,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안전도, 아무런 규칙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생각 55) 아무런 규칙도 보장도 없이 위험한 곳이 인생의 사막, 황무지 이다.

[P. 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것이다.

[P. 113] 여러분은 손발이 잘릴수도 가진것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이 어머니-즉 세상-를 더나 아버지 -즉 영-에게 간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고래뱃속에 들어간 요나이며 이때 고래의 아가리는 바로 대립자의 쌍이다.

(내 생각 56) 이것이 성장을 위한 몰락이고 영웅의 길에서 만나는 무기력이다. 성장하기를 원했으나 결과적으로 무기력해진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P. 113-114] 이제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여러분은 더 많은 도움은 물론이고 점점 더 어려운 시험과 마주칠 것이다.

(내 생각 57) 이 어려운 시험이 무기력을 벗어나는 시험이 될 것이다. 과거의 습관을 버려야만 한다.

[P. 114] 여러분은 자신이 계속 해서 매달려 왔던 것들을 점점 더 많이 포기해야만 한다. 그 마지막은 완전한 포기 전적인 양보이다.

(내 생각 58) 완벽한 포기가 있어야 새로운 것을 채울수 있다. 채우기 전에 버리는 것은 윌리엄브리지스와 같은 맥락이다.

[P. 114] 그 무엇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마법의 도움이다. 영웅은 이곳에 이르러서 자신의 초인적인 여정 내내 자신을 도와준 자비로운 힘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내 생각 59) 성장을 원했으나 결과적으로 무기력하게 되어버린 자는 스스로 노력하는 중에 신의 축복의 성배를 만날 것이다. 마법이 사라진 사막에서 만나는 새로운 마법이다. 이 새로운 마법은 나머지 사막을 건너갈 안내자로 남은 인생동안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동반자가 될 것이다.

[P. 116]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황무지에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성 없이 살아가는 곳으로.

[P. 116] 그 선물을 도로 가져와서, 그것을 합리적인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오히려 지하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여러분이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에 결여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걸 가지러 간 것이다-

[P. 117] 또한 그것이 결여됨으로써 이 세계는 그것을 가져야 할 필요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P. 118] 이 세계가 마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을 때, 여러분 자신의 희열에 매달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남는 삶이니.

(내 생각 60)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 자신의 희열을 따라가보자

[P. 118-119]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 자유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이 묵직하게 한 곳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쾌할하게, 가볍게,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돌고 뛰어 다닌다고 주장했다.

[P. 120] 일본 속담 중에 인간의 성장에 있어 다섯 단계를 설명한 것이 있다. “열 살에는 짐승, 스무 살에는 미치광이, 서른 살에는 실패자, 마흔 살에는 사기꾼, 쉰 살에는 범죄자.” 나는 여기에 덧붙여, 사람이 예순 살에는 [그때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칠 것이므로] 친구에게 충고하기 시작하고, 일흔 살에는[그동안 들은 것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고 현자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다. 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든 살에 나는 나의 자리를 알고 굳게 섰다.”

[P. 12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는 힌두인들이 말하듯 “마르가[marga]'를 따라가서”-여기서 ‘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이 발자취를 말한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P. 121] 삶의 첫 4분의 1은 학생의 삶이며, 그 다음 4분의 1은 순종-단테의 말마따나 “외모의 버젓함과 품행의 선량함”-으로, 이는 사회가 요구하는 유형에 대체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간은 니체가 낙타의 기간이라 부른 것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낙타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자기 등에 짐을 실어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4분의 1은 집주인의 삶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성인의 삶의 책임 속으로 움직여 간 것이다.

(내 생각 61) 니체의 정신의 3단계 변화와 같은 맥락이다.

[P. 122] 이 기간은 [니체식으로 비유하자면] 용의 시기에 해당되며, 그 모든 척도는 “너는 할지니” 라는 말로 장식된다.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착하게 굴면 이득을 얻고, 나쁘게 굴면 벌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뒤처진 것이다. 그들의 유아적 자아 중년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적절치 않다.

(내 생각 62) 낙타에 이은 2번째가 사자의 삶이다. 니체가 말하는 이 다음 단계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삶이다.

[P. 123]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든지 옛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P. 123] 첫 번째 점진적 출가다

(내 생각 63) 준비하고 변화하는 것이 림보를 만들지 않는다. 무기력을 경험하지 않는다.

두 번째 갑작스러운 출가다

(내 생각 64) 이 경우 무기력을 만난다. 물리적 변화를 심리적 변화가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중간지대가 발생한다.

[P. 127] “허약해지면[늙음으로 허약해지든, 병으로 허약해지든]사람은 망고나 무화과나 딸기가 가지에서 놓여나듯, 그렇게 사지四肢에서 해방된다. 이제 그는 다시 근원의 문과 그 근원 자체를 경유하여 삶으로 되돌아온다.

[P. 128] 여러분은 차라리 자신의 삶을 위한 의례를 갖추어야 한다.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

[P. 128]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 준다.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기도는 지금 먹게 될 음식이 한때는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준다.

[P. 129] 여러분이 취하는 동물의 생명을 돌려주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P. 131] 여러분 또한 기꺼이 먹힐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도 음식 재료이기 때문이다.

[P. 137]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moksa)’ 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내 생각 65) 결국 포기함이 우리에게 해방을 주고 성장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P. 137-138]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P. 139]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난다는 뜻이다.

[P. 140] [......]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P. 140] 다만 변화를 위한 노력의 근저에는 ‘마음 편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 141] 육신이 전구라면, 그리고 전구가 나가 버린다면, 더 이상은 전기가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에너지의 원천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육신을 내버리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바로 원천이기 때문이다.

[P. 141-142]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 모든 사람의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결코 죽지 않는다. [......] 그것은 무기로도 베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도 태우지 못한다. 그것은 물로도 적시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으로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같다. [......] 모든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피조물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 - ‘바가바드 기타’

[P. 142] 우리는 원기회복을 위해 죽음으로 내려간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잘린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됭 뿐인 것이다 -오비디우스-

[P. 144] 오직 탄생- 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 만이 죽음을(진정으로) 정복할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의 내부에 끊임 벗는 ‘탄생의 재현’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땅에서 오래 잔존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P. 149]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영원한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지금, 여러분안에 여기 있기 때문이다.

[P. 150]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P. 151] 여러분이 공감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의 죽음을 고통으로 느껴서는 안된다. 여러분의 집착은 그 관계에 있어 일시적인 국면이다. 오히려 여러분의 공감이 바로 영원한 국면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모든 것이 상실되고 나서도 결코 상실되지 않는 어떤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상실감을 상쇄시킬 수 있다. 그 상실되지 않는 어떤 것이란 바로 여러분의 몸과 모든 것을 형성하는 의식이다. 분화되지 않은 의식으로의 돌아감이야말로 귀환이다.

 

의식의 두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P. 155]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

[P. 155] 훈련되지 않으면 정신은 가만히 있질 못하는데, 요가는 그런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P. 163]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놓인 최후의 장벽은 여러분이 신이 되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P. 164] 신을 버리고 신을 취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보기에는 매우 또렷한 표현이다.

[P. 169] 진정한 가르침과 마주하고 캑캑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호랑이는 그것을 자기 핏속에, 자기 몸속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올바른 본성을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다.

 

[P. 170]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 모두가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라는 것이다.

[P. 170]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 없는 것들만 먹는다.

[P. 171]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P. 175] 꿈의 비밀이란 주체와 객체가 똑같다는 것이다.

[P. 176]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P. 176] 의식은 무의시적이지만 신체는 의식적이다.

[P. 177] “[그것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마지막 말이다.

[P. 179] 모든 인간에게는 자동 본능시스템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P. 190] “진리란 곧 유용한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P. 191] 이상은 위험하다

그러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이상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수 있으니

[P. 192] 여러분의 악덕을 포기하지 마라. 그 악덕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게 하라.

여러분이 오만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오만을 없애지 마라.

그것을 여러분의 영적 탐구에 활용하라.

[P. 20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 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P. 202] 여러분이 하나님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말을 상기하라.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P. 205]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P. 20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P. 205]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나 구원의 관념은 어딘가를 통과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P. 206]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 로렌 아이슬리

[P. 207] 관계의 종교는 추방의 종교다

[P. 208]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이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P. 209]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P. 211]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P. 211] 불교에서 삶의 목표란 니르바나(열반)적인 삶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쁨으로 참여한다”

[P. 211] 전사[戰士[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P. 212] 여러분이 자신의 삶의 어떤 사소한 세부사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 소멸에 대해서도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P. 213] 단테는 심지어 지옥의 불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P. 214] 사탄은 뭔가를 범할수 있는 자아의 축도다

[P. 215]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P. 216] 이제는 더 이상 절망이란 없다. 성스러운 공간 또는 도피처를 갖게 되려면 우선 여러분은 어떤 작은 행동의 땅, 또는 그러만한 장소를 찾아야만 한다.

[P. 216] 기쁨이 있는 장소를 찾으라. 그러면 기쁨이 고통을 태워버릴 것이다.

[P. 219]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 무지? 오만? 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P. 221] 문턱에는 항상 위험이 있게 마련이다.

[P. 222] ‘악마’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P. 222]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을 의식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P. 225] 상징이 구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해석될때 그것들은 계시를 낳게된다.

[P. 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P. 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P. 232] 이 세계의 모든 신들은 힘이 아니라 은유다.

[P. 233] 하나님은 환영이 아니라

그 자신의 너머에 있는 것을

즉 하나됨(속죄)의 신비에 대한 자각을 지시하는 상징이다

[P. 241] 부활절 또는 부활에 있어서 항상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힘이다. 여러분이 부활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P. 243]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 그가 아버지에게 간 것, 성령, 이 모두는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P. 258]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 거듭 찾을 수있는 장소다.

[P. 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 - 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낳는 기쁨이 아니라, 즉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 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P. 259]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늘어나는 기쁨이 된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P. 259]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 하나는

어떤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매사가 그 순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P. 260]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P. 260-261]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긴장, 정직의 결여, 그리고 비현실적인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P. 262]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P. 262]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성스러운 공간의 정신은 바로 시바춤이다. 모든 의무를 벗어던진 것이다.

[P. 264] 성스러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이야기하는 곳 말이다.

[P. 265]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P. 271-272] 명상을 할 때에는 여러분 자신의 신들에 관해 명상하라

삶의 목표란 뭔가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탈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눈을 저 높이에 즉 대립자의 쌍들 사이에 고정시키고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놀이’를 바라보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조이스의 말마따나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 채로 남아 있으라

[P. 274]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신을 죽여야 한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모든 고정관념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P. 286]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무엇에나 정점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정점에 있을때, 여러분은 최대한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P. 289]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저편 물가(彼岸)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정상적인 삶의 경험과 니르바나의 저편 물가 사이를 가르는 강물을 건너갔으며, 모든 대립자의 쌍을 넘어섰으며 모든 둘됨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P. 290]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P. 295]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 이웃 속에 적들 속에 자신 속에

편재하는 신들의 현존에 관한 깨달음 속에

[P. 297]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또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P. 299]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P. 299] 두려움과 욕망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불멸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P. 300]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P. 300] 일시적으로나마 삶을 뒤로 함으로써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바치는 것이다

[P. 301] 두려움과 욕망이 사회적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회가 그런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P. 302] 의무는 여러분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여러분에게 부과할뿐이다. 의무는 곧 다르마다, 다시 말해 다르마는 사회적 다르마로 이해해야 한다.

[P. 302] 여러분의 판단이 오는 곳에서부터, 여러분의 한계도 온다.

[P. 304]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P. 305]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

[P. 305] 만약 내 안에 이런 종류의 힘, 즉 역사의 물결에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는 그[역사의 물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P. 310]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P. 320] 남성의 기능은 행동하는 것이다. 여성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그것’이다. 여성은 어머니 지구이다.

[P. 329-330] 남성은 반드시 행해야만 한다. 남성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곧 고통의 길이다.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P. 334]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P. 335] 완전 무장한 기사가 위험한 침대를 향해 다가간다. 그 안에 누우려고 할 때마다, 침대는 펄쩍 뛰고 반항하며 움직인다. 위험한 침대는 여성의 기질을 표상한다. 만약 남성이 그냥 매달릴 수만 있고, 남성이 견딜 수만 있다면, 그 침대는 얌전해지고, 남성은 그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P. 342]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P. 348] 공포와 욕망은 또한 예술가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이 인식할 준비라 된것을

드러내는 시가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P. 351]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P. 370]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P. 371] 행동에 있어서는 가령 여러분이 의도하는 바가 단순히 행동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유능하게 행동하려는 것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긴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잘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피카소처럼 유능한 화가가 되려는 것인가? 여러분이 삶에서 달성하려는 목표가 바로 가기 인가? 그것이 진정한 삶의 희생이다.

[P. 371]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간에 거기에는 학습과 분석의 기간이 있으며, 여러분이 행동하고 있지 않을 때, 여러분의 몸은 움직이고 있지 않은 셈이다.

[P. 372]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P. 372-373] 책을 한권 쓰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자나야 하는 지역을 맞딱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또한 운동에서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나면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일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여러분은 아직 자신에게는 자발적이지 않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만도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P. 373]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난 다음에야, 여러분은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고, 그 모두를 깨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 374]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P. 374] 여러분이

학교로 돌아가려고 시도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P. 376] 춤이란 생명 그 자체의 지고한 상징이다.

[P. 377] 예술은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한 쌍의 날개다.

[P. 378]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P. 379]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P. 380]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여러분을 궁지에 빠뜨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나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거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P. 380]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 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P. 381] 그리고 나서 여러분이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여러분의 고용주는 여러분을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려 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직업에 바쳐야 하며, 여러분은 더 많은 봉급을 받겠지만, 새로운 책임으로 인해 여러분의 자유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P. 381]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P. 382] 그러기 위해서는, 즉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며,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P. 383] 창조적 모험은 항상 무모하다

[P. 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P. 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P. 38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

[P. 386]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P. 386]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詩]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P. 387]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1인치도 더 움직일 필요가 없다. 기억하라 붓다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다르마” 즉 의무이며 남들이 여러분에게 하라고 기대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것은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다.

[P. 388]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면 후회하리라

[P. 389] 여러분이 마을 안에 머무를 경우, 마을이 여러분을 돌봐 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모험을 떠날 경우, 시의적절한 때에 가는 것이 분별 있는 행동이다. 여러분이 삶에서 무엇인가 뒤늦게야 압도된 경우라든지, 불이 켜졌을 때 이미 여러 가지 책임을 떠맡고 있을 경우라면, 이것은 진짜 문제가 된다. 자기 삶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의 삶까지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고갱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

그의 여정은 영웅의 여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P. 390] 상업예술가들은 그런 말을 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 나는 그것을 줄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재능의 수용은 다음과 같은 뜻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P. 390]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P. 400] “예술가의 방식과 신비주의자의 방식은 비슷한데 다만 신비주의자에게는 기예가 결여되었다는 점이 다를뿐이다.”

[P. 402] 여러분이 만약 선과 악을 구분할 경우, 여러분은 예술을 잃는 셈이다. 예술은 도덕 너머로 나아간다. 여러분의 공감의 범위가 곧 여러분의 예술의 범위다.

[P. 404] 일단 여러분이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여러분은 역시 어디에나 상징을 볼 수 있으리라.

[P. 404] 신들의 현시는 편재하고 있건만,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못 볼 뿐이다. 상징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

[P. 405] 때로는 상징조차도 우리의 눈을 열어 주지 않고, 오히려 닫아 버린다.

우리가 상징을 구체화하면 우리는 거기 집착하게 된다.

[P. 406] 뱀과 달은 모두 옛것에 대해서 죽고 각자의 그늘을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난다

[P. 409] 경외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P. 409]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P. 409]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P. 410]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라”

[P. 410]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P. 413]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P. 414] 여러분은 반드시 희열을 느끼고 돌아와 그것을 통합해(서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P. 415] 귀환은 어디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P. 420]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P. 421] 여러분 만의 희열을 느껴라

[P. 4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 425]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마치 디오니소스가 표범에 올라타고도 갈가리 찢기지 않은 것처럼.

[P. 426]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P. 426-427]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 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없이] 하나가 되어-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두 번째 읽기 리뷰

(내 책 주제 무기력과 관련된 리뷰)

두 번째 읽기를 통해 조금 더 알아간 조셉캠벨의 ‘신화와 인생’은 인간의 생을 영웅의 여정에 비유한 점이 다시 새로웠다. 인간 하나 하나의 태어남과 부름을 통한 모험, 역경, 귀환, 노년은 하나의 영웅의 여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그 어떤 순간에도 절망은 아직 이르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영웅의 여정에 동반되는 문턱을 넘지 못해 생기는 절망이 ‘무기력’을 야기하는 하나의 현상과도 일치함을 보았다. 영웅의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보다 나은 생을 추구하는 모험가는 반드시 어느 시점에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태에 맞닥뜨려 진다. 그러나 자신의 희열을 따라 살아간다면 신의 축복에 의해 언젠가 성배를 찾을 수 있다는 캠벨사상은, 무기력한 사람이 그 상태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을 하는 동안 원래의 자신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음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인생은 그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다시 알게 해주었다.

“쇼펜하우어-니체-융-조셉캠벨”의 사상 고리 속에 존재하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신조차도 거부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기력한 사람에게 한번 더 참아보라는 가르침을 남겨준다. 칠흑같은 어둠에서 속에서 절벽으로 느껴지는 공간을 향해 어쩔수 없이 한발 더 내 딛어보았을 때, 그곳에 바로 가나안임을 보게되는 축복을 만날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열을 따라 영웅의 여정을 떠나라는 그의 외침에 다시 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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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읽기 리뷰

이 책은 1983년에 에설린 연구소에서 조지프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 K. 오스본의 필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선집이라고 한다. 원제는 ‘조지프 캠벨 편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캠벨의 강의록으로서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한다.

 

내가 어딘가에서 이 책 신화와 인생에 대해 쓴 어떤 기자의 평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말이 ‘웬만한 자기계발서 100권과 맞먹는 책이다’ 라고 극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절절히 느꼈다.

캠벨을 잘 몰랐다는게 부끄럽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진 ‘신화학자’로서의 캠벨의 모습이 아닌 ‘인간’ 캠벨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진솔한 고백은 평생을 신화와 종교와 은유의 해석에 바친 노학자의 인생철학 인 듯하다.

 

캠벨의 철학은 ‘희열을 좇으라’ 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점이 내게는 혁신을 요구한다.

희열을 따라 사는 것을 죄악시까지 하던 나로서는 이 말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요구하는 근원부터 바꿔야하는 난제이다.

그런데 최근 선생님께서 쓰신 ‘변화를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을 버리라’고 하신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의 가르침 역시 같은 맥락인 듯하다.

변화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고

매순간 하나의 변화를 할 때 마다 감수했던 엄청난 고통은 억지로 변화를 추구함으로 인해오는 부작용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데이비드 홉킨스가 말한 Power가 아닌 Force에 의해 강요된 변화였기 때문인 것 같다.

 

즐거움을 따라가며 내면에서 변화될 때 아름다운 변화가 아주 쉽게 일어날 것 같다.

 

캠벨은 인간의 인생을 영웅의 여정에 비유했다고 옮긴이가 말했다. 사람마다 짧고 길고의 차이는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태어남과 부름과 모험과 역경과 귀환과 노년으로 이루어지는 영웅의 여정이라는 것인데 그런 방식이 특히 마음에 든다. 나 역시 인간의 마음의 진화되어가는 여정에 대해 알고 싶고 쓰고 싶기 때문이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인 깨달음을 향한 길이 다 이해되지 않았고, 세 번째 단계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는 더 이해되지 않았다. 한번 읽고 다 이해되는 것이 당연히 어렵겠지만 글을 엮은 다니엔 K. 오스본이 조금 더 친절하게 쉽고 단계적으로 풀어갔더라면 나 같은 캠벨 초보독자도 많이 이해했을 것 같다. 내가 엮은이였다면 종교와 관련된 글을 언급할 때 사전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배려를 베풀었을 것 같다.

너무 좋은 음식인데 거칠어서 소화하기 힘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 두고 두고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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