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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3일 23시 0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은 1904년 3월 26일 미국 뉴욕 시에서 전형적인 중산계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교수, 작가이며 비교 신화와 비교 종교 분야에서 최고의 연사로 알려져 있다. 일생동안 계속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캠벨의 관심은 여섯 살 때 부친에게 이끌려서 메시든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미국 원주민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는 신화에 매료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인간과 모든 문화, 그 안에 녹아있는 신화들에 대한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캠벨은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대신 뉴욕 북부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서, 5 년 동안 독서에 빠져들어 지냈다. 캠벨은 하루 9 시간의 체계적인 독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었고, 이것을 통하여 삶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 신화에 이끌리게 된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신화가 많다는 것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를, 독일 뮌헨대학에서 산스크트어를 공부했다. 그는 한 때 뉴욕시 최고의 육상 선수였고, 색소폰 주자였으며, 대공황이 닥치자 5년 가까이 우드스탁의 숲 속에 은거하며 독서와 개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재즈밴드에서 색소폰을 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조달했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공부의 ‘황금시기’가 되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마친 캠벨은 생물학, 수학, 신화학, 종교학, 영문학 같은 다양한 학문을 그만의 방식으로 쌓기 시작한다. 캠벨은 이 시기를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고 회고한다. 캠벨은 모두 인류가 빚어낸 모든 문학과 지식을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은 신화학자이다. 그는 이 우주의 기원과 인간 종의 탄생과 고대 신화와 다양한 대륙의 역사를 두루 망라하면서 책을 쓴다. 그는 이성적, 과학적 언어로써 반과학적인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고 신화를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는 인류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파리와 뮌헨의 대학에서 고대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 연구과정에 들어갔고 독일어, 일본어, 프랑스어, 영어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도 배웠으며, 그 후 캠벨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의 연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신화 작업 안에서 융과 프로이드의 중추적인 논쟁점인 집단 무의식에 대한 다리를 찾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조각가 안토니 , 피카소, 클레 등의 작품에 노출되며, 예술 분야로까지 자신의 관심분야를 확장하게 된다. 그가 관심가지고 연구한 분야는 한마디로 방대함 그 자체이다. 어떤 한 분야 안에서 그 하위분야 하나만 연구하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느껴지는 나에게 그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화와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들 그리고 종교의 원초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화에까지 분야를 확장하여 하나의 연결고리로 만들어 가는 그의 작업은 경이로움까지 들게 한다.

 캠벨은 모두 인류가 빚어낸 모든 문학과 지식을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은 신화학자이다. 그는 이 우주의 기원과 인간 종의 탄생과 고대 신화와 다양한 대륙의 역사를 두루 망라하면서 책을 쓴다. 그는 이성적, 과학적 언어로써 반과학적인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고 신화를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는 인류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캠벨은 신화를 살아가면서 그 적합성을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확인한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신화를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야 할 때라고 그리하여 삶의 희열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참고>
http://blog.daum.net/jidam55/14563587
http://blog.ohmynews.com/booking/263881
http://cafe.naver.com/0zeropoin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28
작년에 썼던 북리뷰 중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1xplGaNWSoU
Joseph Campbell -To find your own way is to follow your bless.
; 조셉캠벨의 명언들을 그림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자기 자신을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별하는 것-가령 “어, 아니야, ‘우리’는 달라” 하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전체성에 대립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폭을 좁히고 우리 자신이 들어갈 감옥의 벽을 만든다.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duality)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7]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9]
→누군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내가 없어진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상대방의 말하는 의도에 관점을 맞췄다면 타인의 시선 또한 덜 의식하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9]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 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 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11]
→ 어쩌면 우리를 위해 이미 만들어진 길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우리가 보려하지 않고 넘어서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12]

조지프는 우리가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혹은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이라곤 의식의 전환뿐이다. [12]
→ 답은 늘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그 단순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 다. 아직은 덜 괴로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환희 속에서의 삶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일 까?

도입의 단계-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게 전에

여러분이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19]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한 삶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20]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21]
→ 내 삶을 바로 잡는 것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나눌 수 있다면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아주 작은 보탬에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까.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22]바꿀 수 없는 과거에 매달려 있느라 내 삶이 썩어가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또한 계획대로 삶이 되지 않는다고 한탄만 하고 있는 것도 내 삶의 썩게 만드는 일일게다. 모 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을 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리라.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23]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무언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이 부서져야만 한다.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24]
→ 완벽해야만 뭔가를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부서지지 않는 한, 기꺼이 그 깨짐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나는 새롭게 나아갈 수 없음을 이제야 느낀다.

자신이 살 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취하라. [25]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26]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따라 삶을 계속해 나아가는 동안에는 혹시 새똥이 떨어진다 해도 신경쓰진 마라.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27]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28]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 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를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팽개쳐라. [29]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곳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31]
→ 적당한 누군가를 찾아 그의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리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더 뒤로 물러나게 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6]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37]

의식의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

배우자를 찾을 때, 만약 여러분의 직관이 훌륭한 경우, 적임자를 찾을 것이다. 만약 훌륭하지 못하다면, 계속해서 잘못된 사람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 [46]

여러분 속에 있는 힘을 자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다. [50]

어떤 여성이 자기 안에 있는 힘을 자각하면, 그때부터 그녀는 남성을 본인에게 결여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의 한 예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 객체로서 보기 시작한다. [50]

영혼의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써 여러분은 보다 넓은[삶의]기반을 찾은 셈이기 때문이다. 전념한다는 것은 범위를 좁히는 것이며, 그런 전념이 실패로 끝나면 여러분은 보다 넓은[삶의]기반으로 물러나, 그걸 부여잡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이다. [54]
→ 상처받을 때 이미 아픔을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기에 그 치유법은 한없이 부드럽기 만을 바랬었다. 그랬기에 그 치유법이 나에게 적용되고 있었음에도 전혀 자각할 수 없었고 그 저 그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 과정을 제대로 견디어 냈다면 보다 단단해진 나를 만 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이 견뎌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샘솟게 할 기회다. [55]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55]
→ 어려움을 극복할 힘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려움이 나에게 주어질 때 그것을 극 복할 수 있는 힘 또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여러분은 제 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61]

예배가 단순히 율법과 명령의 계율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할 때 종교적 체험은 크게 저하되고, 여러분이 시키는 대로 기꺼이(또는 억지로) 행동하는(또는 행동하지 않는)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의 자발적 관계는 그것과는 다른 범주다. [61]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이끄는 것이며, 열려 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67]

여러분이 사랑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실상은 욕정이었을 경우,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시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고결한 마음을 위해서는, 결혼은 우선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물리적 완성은 그 다음이여야 한다. [67]

고결한 마음의 발상이란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책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다. [68]

다만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단지 소유물을 취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과연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구축하려 하는 것인가? [68]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70]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은 발효되고, 융합되고, 분해되고, 부패되어야 한다. [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73]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77]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79]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에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83]
→ 행복해할 수 있다는 것에는 항상 만약 이러이러 하다면 난 행복할꺼야와 같은 전제조건 이 따랐었다. 그런 전제조건을 달기 전에 그저 삶의 흐름에 따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작 은 것부터 발견했다면 보다 빨리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 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에서부터의 잠재력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84]

하고 싶은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87]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이 열망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어떤 것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89]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여러분이[지금까지 지내 온]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일관적인]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 온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90]
→ 삶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다. 뒤돌아보면 내 계획대로 삶이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 흐름 은 너무나 완벽했다. 내가 그 순간순간을-계획을 벗어났다고 과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충실히 집중하면서 살아갔다면 내가 그렸던 모습 이상의 나를 만날 수 있었으리라.

그 무엇도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97]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99]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99]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100]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종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뭇가지는 이쪽으로 자랄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자랄 수도 있으며, 그러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자랄 수도 있다.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01]
→ 방랑하는 것도 삶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보면 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기에 방랑의 끝에는 삶의 아름다운 추상화를 그려낼 수 있을 거다.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105]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셈이다. 그 와중에 부딪치는 바위며, 좁은 관문이며, 그와 유사한 것들, 다시 말해서 예와 아니오, 즉 대립자의 쌍을 나타내는 것들을 지나가야만 한다. 이 세계를 둘러싼 벽들이 잠시나마 확 트이는 듯 한 순간이 있을 것이며, 여러분은[그 벽을]꿰뚫어 보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뛰어오르라! 가라! [113]
→ 뛰어넘지 않고 그 통찰력이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욕심이라는 사실도 모르던 때가 있 었다. 어두움을 해쳐나갈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확 트인 순간의 희열을 맛 볼 수 있고 통 찰력을 얻게 될 수 있는 거겠지.

여러분이 뱀처럼 허물을 벗는데, 하필이면 그 중 일부를 꽁무니에 그대로 남겨 놓고 싶다고 치자.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뒤에 매달린 것이 바로 근심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떼어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거기 매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123]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이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일과 결부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깨달음 속에서 서로를 돕기 위해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정말로 아름다운 의례이다. [131]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람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138]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난다는 뜻이다. [139]
→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던 나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놓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겠지.

우리 역시 영원히 이승에 있는 것은 아니요, 잠시 다녀가는 것뿐이라. 우리의 삶이란 햇빛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느니라. [143]

오직 탄생-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팔링게네시아, palingenesia)'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144]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149]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 [155]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167]

신화-은유로 이해해야 적절한 듯한-는 여러분이 호랑이로서의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끔 인도해 줄 것이다. [170]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176]

만물을 ‘너’로 파악하며, 그것들의 삶을 깨닫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적인 명상에 함축되어 있는 최고의 진술이다. [185]

내 생각에는 세 가지 상태의 존재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상태다. 또 하나는 여러분이 잠시 멈춰서 그것에 관해 분석하고 생각하는 상태다.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 자연은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여러분이 분석을 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본성은 여러분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렇게 분석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여러분은 이제 자연처럼 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는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통제력, 더 많은 유연성을 지닌 상태다. [186]

여러분은 예감이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187]

여러분의 삶에 있어 크나큰 중요성을 지니게 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장차 뭔가 벌어질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매우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7]

우리 각자는 단지 나름대로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술은 여러분이 운하를 건너기 위해 사용하는 배의 구조를 잘 아는 것뿐이다. [189]

우주는 한 몽상가가 꾼 꿈이며, 그 꿈속에 나오는 모든 사람 역시 꿈을 꾸고 있다고 말이다. [189]

이른바 절대적인진리의 관념-즉 사고하려는 인간 정신의 상대성의 범위 너머에 이른바 절대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진리 발견의 오류’라고 부른다. [190]

만약 자신이 또는 자기 구루가 이른바 절대진리-“바로 이거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즉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써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190]
→ 내가 믿고 있는 진리가 절대적이란 믿음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을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치게 만드는 일일수도 있다는 것, 결국 그 진리 때문에 자긴만의 성에 갇혀 있는 사람이 돼버리고 마는 것이겠지.

“우리가 필연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저곳, 바로 저 우주에서도 타당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곳, 바로 이 우주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200]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붓다와 예수는 동등하다. 예수 역시 동산의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결국 그 스스로가 나무의 열매가 되었다.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5]

불교에서는 우리가 두려움과 욕망의 세계 속에서 다시 말해 마야, 즉 환영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도상학에서는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구원은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고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이 세상에 기쁘게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경험한다. [206]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206]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209]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에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211]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215]
→ 지옥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절대 포기하지 않음으로 나 스스 로를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지옥의 문제는 불이 여러분을 소진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변화의 불만이 그럴 수 있다. [216]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 오만? 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19]

사람이라면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222]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서의 변화 가능성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 [223]

여러분을 가로 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 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223]

그 상징이 도대체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명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며,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더 많이 지속될 것이다. [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230]
→ 내 삶의 중심을 내가 잡고 있었다면 타인의 말들에 그렇게 휩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의 권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매 순간 순간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징적 현상들 을 관찰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

여러분이 만약 세상 속에 하느님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인간 속에서 찾으면 된다.

즉 하나님을 향해, 우주를 향해, 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것을 향해 비난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236]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을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237]

하나님은 존재로서, 활동으로서, 힘으로서 만물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영혼 속에서만 자식을 낳는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흔적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형상이다.

당신 안에서 탄생을 촉진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선과 모든 위로와 모든 행복과 모든 존재와 모든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에게 오는 것은 진정한 존재와 안정성을 줄 것이다. 탄생 없이 당신이 무엇을 구하거나 파악한다면, 어떤식으로 하든 그것은 소멸해 버릴 것이다. [239]

“그 생명의 샘은 개인의 핵심이며, 그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찾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 샘을 뒤덮어 가린 덮개를 찢어 버릴 수만 있다면.”[240]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우리의 기대에 부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불러낸다.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여기 있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 광휘를 목도한다. 부활절의 계시가 바로 거기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241]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243]

오해는 다름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화적인 상징을 마치 그것들이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고 독해함으로써 생긴다. [246]

이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 즉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여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실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시대적인 종교에 대해 거듭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지평선도 없다. 이것이 우주 시대의 의미이다. 우리는 신비스러운 미래 속으로 자유낙하를 한다. 이것은 매우 유동적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스러운 것이다. 여러분은 낙하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만 알면 된다. [247]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259]

나이 지극한 사람들은 자기 삶의 경험과 깨달음을 갖고 놀거나, 자신들이 떠올리기 좋아하는 생각들을 갖고 놀게 마련이다. [259]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 하나는 어떤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매사가 그 순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259]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260]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260]

긴장, 정직의 결여, 그리고 비현실적인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261]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262]

성스러운 공간에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이야기하는 곳 말이다. [264]

예배란 곧 성스러운 장소다. 하지만 여러분이 예배에만 집착한다면-가령 여러분이 ‘이 장소에 있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면-그건 좋지 않다. 여러분은 여전히 훈련 중에 있는 것이다. [267]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 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 [271]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 채로 남아 있으라. [272]
→ 나만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주위의 것들을 탓하기보다 그것들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모든 고정관념을 없애 버려야 한다. [274]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는 있다. [278]
→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내가 없애고자 했던 세상의 슬픔을 조금은 줄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법에만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명상을 하는 중에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되고 변화되면, 그때 가서 여러분은 모든 길들이 타당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283]

여러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이기느냐 또는 지느냐가 아니라, 오로기 경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기느냐 또는 순위 안에 드느냐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구속 없는 참여인 것이다. [286]
→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착했기에 나를 깨고 나오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건 아닌지.

하지만 여러분이 그 정점을 잃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오로지 자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된다. 가령 여러분이 경기에 나서면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맨 앞으로 달려 나가고, 만약 그럴 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면 아에 마라톤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 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관념이다. [286]

여러분이이 하는 일에는 무엇에나 정점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정점에 있을 때, 여러분은 최대한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286]

교리의 탈것은 너희를 저 물가로 데려다주기 위한 방편이며, 일단 저편 물가에 도달하고 나면, 너희는 뗏목을 버리고 모두 잊어버려야 마땅한 것 이니라. [292]

라마크리슈나의 말마따나 “당신이 사랑하는 꼬마 조카가 바로 당신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 놀라운 원칙은 역설적으로 여러분-삶에 염증을 느낀-이 단지 똑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것도 단지 여러분의 의식의 단계가 이동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294]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또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297]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298]
→ 내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그 후 생 각은 걷잡을 수 없이 사방팔방으로 날개를 펼치고 난 그 생각만으로도 지쳐버리곤 했었 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인정만 해도 편해질 수 있음을 그로인해 전혀 다 른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난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298]

두려움과 욕망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불멸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299]

여러분의 판단이 오는 곳에서부터ㅡ 여러분의 한계도 온다. [302]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는 있다. [304]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 되면, 여러분의 자아는 발전하지 않는다. [307]

여러분이 자기 속에서 성스러운 장소의 대응물 격인 중심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굳이 숲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 중심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의 평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닐 수 있다. 결국 여러분은 그 중심에 근거하고 살아가면서, 여전히 세상과 관계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308]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10]

남편을 잃은 여성은 그 남성의 역할을 대신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것을 그 여성 자신의 에너지에 낯선 무엇인가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319]

마천루로 가득 한 도시를 건설한다거나, 달에 로켓을 보내는 등의 극적이고 현저한 남성적 활동을 우리가 매우 강조함으로 인해, 이제는 여성들조차도 오로지 남성의 목표와 미덕만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남선의 업적만이 모두에게 적절한 목표이며 중요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319]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 안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320]

여성이 상징하는 삶 속의 그 힘을, 그 특징을, 그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모두가 곧 생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화적 이야기에서 여성의 성격의 아름다움 또는 특징이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여성이 그 힘을 지니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 힘은 여성의 존재 바로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320]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룬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 뿐이기 때문이다.[329]

남성은 반드시 행해야만 한다. 남성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곧 고통의 길이다.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330]

목표는 여러분 자신의 모험에 나서는 것이어야지, 대체물을 지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332]

우리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포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339]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342]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무지(차단하는 힘)가 실재를 은폐한다면, 상상력(투사하는 힘)은 현상을 전개한다. “이 투영하는 힘은 모든[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을 창조한다. 그것이 신의 모습이건, 우주의 모습이건.” [346]

나는 믿나니 우리가 어떤 욕망과 공포도 없이, 아픈 나라들의 폭풍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도시의 분노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만큼 강하기만 한다면, 바닷가 옆에서, 연인의 꿈속에서, 아이의 것처럼 맑은 또는 혼자 춤추는 소녀의 숨과도 같은, 그 목소리들을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니 [348]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351]

대상-즉 유형의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예술을 그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대상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을 부추기는 예술은 교훈적이라고 한다. [352]

심미적 도취는 이러한 초점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다. 하지만 이러한 초점의 변화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내적 깊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삶의 목표를 완전히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자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성스러운 공간은-가령 전통 문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공간의 경우-입문과 명상을 위한 장소다. [362]

여러분이 이런 내적 깊이를 달성하면 온 세상이 열리고, 여러분이 삶에서 하던 놀이는 이 광휘로 가득 차게 된다. [362]

신화의 장 내에서 상징적 세부사항은 사실상 지역적인 물질적 역사와 환경을 반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어떤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이성의 기능에 의해서 영적 통찰의 표현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366]

성모는 결코 추기경들이 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368]
→ 내 안에 정신의 깊은 질서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이들이 정한 규칙은 저 뒤로 보내도 되 는 것 일 테지.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372]

책을 한 권 쓰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73]

이 모든 것을 따져보게 되면 자발성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난 다음에야, 여러분은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어, 그 모두를 깨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73]

여러분이 아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단순히 자신의 지식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움직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373]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374]

예술을 통한 치료요법의 실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놓는, 그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은 자연의 조화다.” [375]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은 이른바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실시하는 사람 본인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예술이 아니다. [375]

예술은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한 쌍의 날개다. [377]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379]

만약 여러분이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꺼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이 혹시 직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380]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381]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3]

부정적인 것들이야 계속해서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이 일찍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을 계속 열어 두어야 한다.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385]
→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어떤 비판도 없이 시작하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 다. 일단 시작하는 것, 나를 움직이는 동력을 찾아 시작하는 것이 비판 없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 필요하리라.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 가령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그 작은 눈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말을 걸어 보라. 그들을 위해 글을 써 보라. 책 속에서 여러분은 종종 그 책이 누구를 위해 쓴 것이라고 밝히는 진지한 헌사를 만나게 된다. [385]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1인치도 더 움직일 필요가 없다. [387]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랬어야 했다며 후회하리라. [388]

완점함이야말로 예술의 함의된 성취이고, 그는 그것을 달성했다. 반면 불완전함은 곧 삶이다. 삶의 모든 형태는 불완전하고, 예술의 기능은 광휘가 불완전함을 관통해 나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392]

고통은 감상적인 예술가들이 분투해야 할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들의 모든 정력을 성스럽게 넘쳐나는 활동에만 바치고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도출되는 것이다. [398]

그들은 사회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에, 가령 이 세상이나 자기 스스로를 고치는 데 필요한 일종의 교훈이 들어있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들의 예술적 대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그 정의상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401]

여러분이 만약 선과 악을 구분할 경우, 여러분은 예술을 잃은 셈이다. 예술은 도덕 너머로 나아간다. 여러분의 공감의 범위가 곧 여러분의 예술의 범위다. [402]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세상에서도 우리의 대중적 종교 상징이 그 권위를 잃고 시들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상징들이 한때 지지했던 삶의 방식 역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405]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409]

영웅이 그들과의 교통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따라서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은총, 즉 그들을 유지시켜 주는 물질의 위력인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409]

여러분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신이 주의를 집중하려는 신들에 상응하는 의식의 층위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410]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410]

겉으로는 따로따로인 듯 보이는 사물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에 불과하다. [411]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귀환은 어디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415]

땅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땅에 속한 것이다. 만물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주는 피와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일 뿐이다. 그가 그물에 대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일이다. [416]
→ 다만 한 가닥일 뿐인 인간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지, 결국 그 해 악은 우리가 고스란히 다 받게 될 것인데...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세상은 날로 황폐해져만 갈 것이다.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껴라. [421]

어떤 것도, 신(神)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더 크지는 않다. 공감 없이 걷는 자는 수위를 입고 제 장례식에 가는 자와 같다. 어떤 일이건 직종이건, 젊은이가 종사함으로써 위인이 되지 않을 것이 없다. [421]
→ 내가 희열을 느끼는 분야가 어디이건 상관없는 것이다. 소위 유망직종이 아니어도 대기업에 속하지 않아도 나의 희열을 느끼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장소가 어디이든 상관없으리라.

어떤 미약한 물건도 우주의 수레바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나는 모든 남녀에게 말한다. 백만 개의 우주 앞에서도 냉정하게 침착한 영혼을 세우라고 [422]

신은 (나와)다르고, 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이처럼]자신과 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자라면 신들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423]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425]

모든 신화가 삶을 현대의 삶에 맞도록 가공하기 위해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한때는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던 우리 자신과 우주-우리가 곧 그 귀와 눈과 정신으로 작용하는-의 경이를 향한 지각의 문을 정화하는 것이다. [426]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 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없이) 하나가 되어-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427]

옮긴이의 말

캠벨의 인생철학은 이른바 ‘희열을 좇으라.’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430]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희열’을 따라,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한 것뿐만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것까지도 포용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갈아야 하는 것이다. [431]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구성은 네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도 강한 흡인력을 가진 도입의 단계에서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금의 삶의 넘어서서 희열을 쫓으며 살아가라는 말을 중심으로 그런 여정을 지나가는 과정에 만나게 될 어려움들과 그것들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는지를 짧은 시구들이지만 강한 메시지를 주는 문장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두 번째 현세에서의 삶에서는 현제를 살아가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랑, 결혼, 돈에 대해서 그것들과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소명을 받고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들 그리고 떠나게 되더라도 어떤 단계를 거쳐 떠나는 것이 제대로 된 떠남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세 번째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는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은 장소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라도 자신의 의식의 단계가 변화함으로써,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상징을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을 찾고 그 안에서 탄생을 촉진해야만 그것을 통해 진정한 안정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네 번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에서는 처음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규칙을 배우고 흡수한 다음에 거기에서 자발성을 이끌어내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의 중요한 통로는 다름 아닌 예술임을 여러 예들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의 접근방식들, 창조적 모험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글쓰기를 시작함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들과 같은 구체적인 것들을 제시해 주면서 우리안의 신을 깨워 희열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라고 캠벨은 말하고 있다.
 
아쉬움 점은 두 번째 단계에서는 요가에 관한 설명으로 글이 시작되는데 인용구가 많고 ‘차크라’라는 생소한 용어가 나오는데 비해 거기에 대한 설명은 미흡해 이해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보안점으로는 의식, 상징, 성스러운 공간, 은유, 정점에 관해서는 따로 챕터를 구성해서 나누면 깨달음을 향한 길이 좀 더 확실하게 다가 올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심리학과 신화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책이 더 흥미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재구성 해보자면
도입의 단계
의식의 첫 번째 단계
-사랑
-결혼
-자아실현
-돈
-성배
-영웅의 여정
-죽음

의식의 두 번째 단계
-의식
-상징
-성스러운 공간
-은유
-정점

의식의 세 번째 단계
-예술의 기능
-예술가
-글쓰기
-모험
-세상으로 들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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