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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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관하여’
윌 듀란트[William James Durant, 1885. 11.5~ 1981.11.7]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 애덤스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교육가이자 철학자로 1917년 컬럼비아대학 철학 강사, 1935년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철학의 즐거움>과 <역사 속의 천재 탐구> 등을 출간하여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미국의 저술가이다. 그는 1917년 <철학과 사회문제>를 출간하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 듀랜트는 2번째 저작 <철학 이야기>를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30여 년 동안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300만부 이상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그는 <철학이야기>를 발표한 이듬해인 1927년에는 <과도기>를 펴냈다. 이 책은 그의 유일한 소설로서, 자신의 청년기의 사회적·종교적·정치적 각성과정을 보여 주는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70년에는 평생 동안 문학 작품을 읽으며 써 온 자신의 주해들을 확대하여 <삶의 해석 : 현대문학개관>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일반 대중을 겨냥해 문학사와 작가들의 비공식적 이야기와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913년 뉴욕 시 페레 모던 스쿨에서 교수활동을 하던 중 제자 에이다 코프먼과 결혼했다. 그 이후 그들은 1935년부터 75년까지 전11권으로 구성된 <문명이야기>를 차례대로 발표하였다. 제 10권 <루소와 혁명>은 남편과 공동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이들 부부는 1977년 발간된 <두 사람의 자서전>에서 자신들의 공동 작업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저서들은 일반 대중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인류의 지식을 더 폭넓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특히 1953년에 발표된 <철학의 즐거움>은 고리타분한 상아탑 속에만 들어앉아 있는 철학을 대중들 앞으로 끌어내, 그것이 결코 인생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인생을 생각하는 철학자임을 가르쳐 준 획기적 명저이다. 뉴욕 타임스는 “그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로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의 찬란하고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여준다.”라는 서평을 실었다.
그는 동등한 급여와 여성 선거권, 노동자들의 좀더 나은 근로환경을 주장하였고 많은 토픽을 다루어서 썼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효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시도의 노력은 <철학이야기>와<철학의 향연> 그리고 그의 아내의 도움을 받아 저술한 <문명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그는 인간이 가진 약점이나 변덕스러움까지도 포용하는 인류를 보는 관점을 부드럽게 향상시켰다. 그는 유럽중심주의라는 편견과 역사는 그리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과 동양의 역사를 하나로 표현하는 편견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의 책에 쓰여진Mohanmmedan(이슬람교도)나 Negro(흑인)등의 용어는 명명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그의 아내가 뇌졸중으로 떠난 지 13일만인 1981년 11월 7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내와 나란히 로스앤젤레스에 잇는 Westwood Village 기념공동묘지에 묻혀있다.
철학이야기 통해 작가가 철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판적이지만은 않다. 철학자들의 오만함도 그에게는 단지 이해의 대상일 뿐 비판의 대상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론도 다시 살펴보자로 시작하는 작가에게서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랬기에 철학이야기를 이처럼 다정다감하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
철학이야기-동서문화사
네이버 백과사전
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614635&sid=E&tid=4
http://en.wikipedia.org/wiki/Will_Durant
구글 이미지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글-철학의 효용에 대하여
에머슨은 “제군은 참다운 학자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누구에게나 내가 배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의 학생이다” 라고 말합니다. [17]
➜ 그렇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좀 더 고민하고 세상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
처음에 철학은 자연학이었다. 그것은 물질세계에 주의를 기울여 무엇으로도 돌아갈 수 없 는 사물의 가장 궁극적인 성분이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20]
‘불가지론(不可知論)’ 즉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한 가지만을 안다’ [23]
➜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가 보다.
철학은 사물의 의심, 특히 자기가 소중히 마음에 고수해 온 신념, 즉 교리나 원칙을 의심하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들 신념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확고한 것으로 되었는지, 또 남모르는 소망이 사상의 옷갈피에 욕구를 집어넣어 어느새 그 확실성을 만든 것이 아닌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검토하기 전에는 진정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23]
우리는 단순한-이를테면 제화공 같은-어떤 일에 특별한 훈련을 거친 자만이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정치에서도 투표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자만이 도시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줄 안다고 플라톤은 탄식하였다. 우리가 병들면 용한 의사-전문 분야에 의술이 보증되는 경력을 가진 의사-를 부르지, 잘생긴 의사라든가 말 잘하는 의사를 부르지는 않는다. 국가 전체가 병들었을 때 왜 좀 더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의 봉사와 지도를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일까? [37]
플라톤이 말하는 귀족정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특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46]
관직은 ‘교육에 의해 선출된다’는 균등한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계급의 차별도, 지위나 특권의 상속도 없으므로 가난한 인재의 등용을 막는 것은 없다. 통치자의 자식도 구두닦이의 자식과 같은 평민에서 출발, 같은 취급을 받고 같은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47]
‘평화란 단순한 어휘에 지나지 않는다.’ [51]
완전한 사회란 모든 계급과 모든 구성원의 본성과 재능에 가장 적합한 일을 하고 있는 사회이며, 어떤 계급이나 어떤 개인도 서로가 남을 방해함이 없이 모두가 조화된 전체를 산출하기 위해 저마다 협력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일 것이다. [52]
진리는 자주 그 옷차림을 바꾸지만-아름다운 여인이며 누구나 그렇듯이-그 몸은 언제나 같다. [53]
➜ 얼마나 자주 옷차림이 바뀐 것만을 보고 진리가 바뀐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가.
그는 소심한 철학자들처럼 질서를 극히 사랑할 뿐이므로,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동요에 놀라서 개인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무시하게 된 것이다. [58]
정치가도 의사처럼 철저한 전문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두말없이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59]
그 자신도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을 그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러한 욕망을 그리는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보다 나은 세계를 상상하여 적어도 그 일부분이나마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계획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앞뒤를 살펴보고 없는 것을 간절히 동경한다.’ [60]
비록 우리가 이상하는 바를 그려만 놓는다 해도 그 그림은 우리들의 행동목표와 모범이 되어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빛을 좇는다면 우리의 유토피아는 언젠가 지상에서 실현될 것이다. [60]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
간단히 말하면 논리학이란 정확한 사고의 기술과 방법이다. 그것은 모든 학문과 과학 및 기예(技藝)의 방법이며, 음악 속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올바른 사고 과정은 어느 정도까지 규칙에 환원할 수 있으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므로 논리학은 하나의 과학이다. [71]
‘만일 나와 얘기하고 싶거든 우선 당신의 용어에 정의를 내려 주시오’ 하고 볼테르는 말했다. 논자들이 용어에 정의를 내려두기만 한다면 아무리 많은 논쟁이라도 짧은 말로 압축될 것이다. 진지한 의론에서는 중요한 모든 용어를 엄밀히 음미하고, 정의를 내려 두어야 된다. 그것은 논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논리학의 진수(眞髓)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사람의 정신을 가차 없이 시험하지만, 그러한 작업이 끝난 뒤부터는 편하다. [71]
➜ 이럴 수만 있다면 서로를 오해하는 일도 그 많은 분쟁들도 한층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자기 저서의 서문에 있는 주제에 대한 선인(先人)의 공헌에 대해 역사적인 스케치를 하고, 그 공헌의 어느 것에나 지독한 논박을 가하는 것은 우리 철학자의 습관이다. 바로 이 동포 살해광의 덕분으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지식을 대부분 얻고 있는 것이다. [77]
겁과 경솔함의 사이에 용기가 있고, 인색과 낭비 사이에 관대가 있으며, 게으름과 탐욕 사이에 명예심이 있고, 비하(卑下)와 거만 사이에 즐거움이 있으며, 비밀과 누설 사이에 정직(正直)이 있고, 무뚝뚝함과 익살 사이에 즐거움이 있으며, 호전성과 아첨 사이에 우정이 있으며, 햄릿의 우유부단과 돈키호테의 행동력 사이에 극기가 있는 것이다. [86]
탁월은 배움훈련으로써 얻어진 기술이다. 우리는 덕 혹은 탁월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르게 행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행위 했으므로 덕 또는 탁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86]
우리는 상당한 정도의 재산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가난은 사람을 인색하게 하고 욕심쟁이로 만들지만, 재산은 사람에게 ‘귀족적인 침착한 태도와 매력의 원천인 걱정과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87]
‘친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친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완전한 우정으로서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다.’ [88]
➜ 이 말을 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속상할 때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양에 대한 욕심을 여전히 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걸까?
덕이 없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최악의 적으로서 고독을 두려워하나, 그는 자기 자신의 제일 좋은 친구로서 은둔을 즐긴다. [89]
‘복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자는 좋은 명령자도 될 수 없다. [94]
‘인간은 완성되면 가장 선한 동물이 되나 내버려두면 가장 악한 동물이 된다. 왜냐하면 부정이 무장되면 점점 위험해지는데, 인간은 날 때부터 극히 나쁜 목적에도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성격상의 특질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덕(德)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동물 중에서도 가장 맹악(猛惡)한, 탐욕과 육욕의 덩어리이다. [94]
예술품을 잘 평가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예술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때도 있다. [96]
‘다수 쪽이 소수보다도 부패되기 어렵다. 대량의 물이 소량의 물보다도 썩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은 노여움이나 그 밖의 격정에 지기 쉽고 그 경우 그 판단은 필연적으로 정도를 벗어난다. 그러나 다수의 인간이 모두 격정에 휩쓸려 동시에 길을 잘못 들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96]
프란시스 베이컨
‘혀로 맛보아야 할 책도 있으며 꿀꺽 삼켜 버려야 할 책도 있으나,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은 적다.’ [119]
무감동(무관심) 때문에 노후한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21]
➜ 이로 인해 연장된 생명은 너무도 끔찍할 것 같다. 무관심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과연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본성은 가끔 은폐되고 압도될 수 있지만, 소멸되는 일은 드물다. 강압은 그 보복으로 본성을 한층 광포하게 한다. 가르침이나 설교는 본성이 귀찮게 조르는 것을 조금은 누를 수가 있으나, 오로지 습관은 본성을 개조하고 정복하다.······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본성에 대한 승리를 과신케 하지 마라. 왜냐하면 본성은 오랫동안 묻혀 있겠지만, 가끔 유혹에 따라 소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처녀로 둔갑한 고양이가 정숙하게 식탁 앞에 앉았다가 쥐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는 거소가 비슷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전혀 그런 기회를 주지 않거나 자주 기회를 주어 마음이 너무 움직이지 않도록 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를 해야 할 것이다.’ [121]
➜ 누군가 태도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숨길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중 큰 자리를 차지한다고. 태도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습관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나의 하루가 과연 어떤 태도들로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
“젊은이들은 판단보다 발명에, 상담보다 실행에, 기초가 잡힌 일보다 새로운 계획에 알맞다. 왜냐하면 노련함은 그 연령의 범위 내에서 그들을 지도하지만, 새로운 일에서는 그들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평소의 행동 방법이나 처리를 보면 손에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끌어안으며(...) 노련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의를 지나치게 제기하고, 상담이 너무 길며, 모험이 너무 적고, 후회가 너무 빠른데다 웬만해서는 일을 완전히 완결 짓지 않고 흔히 중도에서 만족해 버린다. [124]
때때로 꿀과 가시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유로 관대한 마음의 불꽃을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30]
‘과학이 조금밖에 전보하지 못한 데는 또 하나의 유력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 그 자체가 올바른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로를 바르게 달릴 수 없다.’ [130]
최후의 순간까지 연구에 종사하였는데, 말하자면 전장에서 쓰러지고 싶었던 것이다. [148]
수필 <죽음에 대하여>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따뜻한 피가 흘러도 상처를 입은 순간에는 거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저처럼 그도 자기의 숙원을 이루었다. [148]
스피노자
그것은 단순히 면학과 충실한 교수만으로는 좀처럼 생계를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가마리엘(바울의 스승인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이 말했듯, 노동은 사람을 유덕하게 한다. 그러므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자는 결국 부랑인이 되고 만다’는 이유에서다. [160]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학자들이 그의 지혜 때문에 그를 존경했듯이, 순박한 사람들은 그의 다정함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철학자나 주회 의원들이 서민의 열(列)에 함께 서서 그를 최후의 휴식처로 보냈다. 그리고 갖가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묘소에 모여들었다.
니체는 어디에선가 최후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는 스피노자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164]
마음은 알면 알수록 자기의 힘과 자연의 질서를 더욱 잘 이해하고, 더욱 자기를 잘 지도하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은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쉽게 자기를 무용한 사물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68]
➜ 나를 이해한 만큼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말이겠지
철학서에는 뛰어넘어 읽어서 손해가 없을 만한 곳은 거의 없다. [171]
‘덕의 기초는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며, 행복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데 있다.’ [181]
후회는 덕이라기보다는 결함이다. ‘후회하는 사람은 이중으로 불행하며 이중으로 약하다.’ [182]
‘오만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남의 결점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이나 공적을 감탄하는 열등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기뻐하고, 끝내는 자기를 가장 잘 칭찬해 주는 사람들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오만한 사람만큼 아첨하는 말에 사로잡히기 쉬운 자는 없기 때문이다.’ [182]
➜ 결국 오만한 사람은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는 미움이란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라고 믿었다. 미움은 미움으로 갚는 것보다 사랑함으로써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간단하다. 왜냐하면 미움은 보복 당한다는 감정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미워하는 상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는-스피노자는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믿고 있는 것 같으나-사랑은 사랑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는 관계상 미움과 사랑과의 감정적 갈등에 고민한다. 그 결과 미움은 무너져 힘을 잃는다. 우리는 이길 자신이 있는 적을 미워하지는 않게 되므로, 미움이라는 것은 자기의 단점과 두려움을 자백하는 것이 된다. ‘바르지 못한 보복적인 증오로써 복수하려는 자는 비참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미움을 사랑으로 쫓아버리려는 자는 기쁨과 확신으로 싸운다. 그는 상대가 한 명이든 많은 사람이든 똑같이 대항하며, 거의 행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정복된 사람들은 기꺼이 그에게 복종한다.’ ‘정신은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너그러움에 의해서 정복된다.’ [182]
➜ 미움으로 가득찬 내 마음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채 가슴속에 분노의 감정을 가득 채우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상대방을 미움대신 사랑으로 극복할 수 없으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미움을 치유해야 했었다.
위대하다는 것은 인류의 위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없는 편파와 공허를 극복하여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185]
‘자유인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186]
볼테르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을 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204]
‘아무 결과도 생기지 않는 하나의 사건과 역사의 관계는 알맹이 없는 배낭과 군대처럼 방해물인 것이다. 우리는 사태를 크게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신은 대단히 작아서 사소한 사건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219]
과거는 문으로 쫓아내면 창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문제는 어떠한 변화에 의하여 우리들이 그 속에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불행과 부정을 감소시킬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일이다. [243]
칸트의 독일 관념론
모든 대상의 대부분이 우리들의 지각과 오성의 형식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270]
그대의 행복을 걱정하지 마라! 그대의 의무를 행하라. ‘도덕이란 결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을 알게 되는 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위하여 행복을 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완전성을 구해야 할 것이다.-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거나 고통을 가져오게 할지라도 너 자신 안에 완전을, 다른 사람들 안에 행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너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나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그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결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동하라’ [274]
<논리학>은 추리방법의 분석이 아니라 추리에 사용되는 개념의 분석이다. [291]
우리들의 모든 사고에 늘 쓰여지는 이 기본개념을 세밀히 분석하는 일, 그것이 철학의 기초이다. [291]
쇼펜하우어
위대했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나는 이처럼 철저히 끝나 버린 세계 속에서 내가 지금 젊지 않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고 괴테는 말했다.
“사람이 후세에 속해 있으면 있을수록, 다시 말하여 인류 일반에 속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시대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낳아 놓은 것은 특히 그 시대를 위해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즉 시대 자체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시대라는 것이 인류의 일부분인 경우에만 이 시대에 소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또 거기에는 시대의 빛깔이 칠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02]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것뿐이다. [305]
➜ 그 평범한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팽개치고 있는 것인지, 마음 속으로는 멋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진리는 언제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의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범한 사고방식으로 음미할 소수의 사람이 나타나 주기를 침착하고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그러나 인생은 짧고 진리는 멀리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가.“ [305]
이 책을 두 번 읽어 주기 바란다. 단 첫 번째는 많은 인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겸손이라는 것은 이것뿐이다. [306]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만약 우리들 자신이 정신의 궁극적 본성을 규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외계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게 될 것이다. [307]
우리는 욕구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면 어떤 것을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그 욕구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308]
“우리가 남과 다투고 있다고 하자. 여러 이유와 설명을 들어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애쓰는 데도 결국 상대방에게는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문제는 상대방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화나는 일은 없다.” [308]
언제나 지성은 욕망에 예속하고 욕망의 앞잡이인 것처럼 보여 지성이 의지를 대신하려고 하면 혼란이 일어난다. 오직 반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사람만큼 과오를 범하기 쉬운 사람은 없다. [308]
신체의 모든 부분은 의지의 표현인 모든 중요한 욕망에 대응할 것이며, 그러한 욕망들의 가시적 표현일 것이다. [309]
지성은 지치는 일이 있지만 의지는 결코 지치지 일이 없다. 지성은 수면을 필요로 하지만 의지는 수면 중에도 활동한다. [309]
➜ 마음의 열정은 끊임없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나는 지성이 채워져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살았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어쩌면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지는 살려고 하는 의지이고, 이 의지는 영원한 적은 죽음이다. 의지는 어쩌면 죽음조차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12]
진정한 역사 철학은 무한한 변화와 그 복잡다단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은 자기 동일적인 불변의 존재인 것이고, 그것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역사 철학자는 모든 사건 속에 동일성을······인식하고, 특수 사정, 즉 풍속·습관·관습은 아무리 다를지라도 곳곳에서 동일한 인간성을 보아야 한다. ·······헤로도투스를 읽었다는 것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미 충분히 역사를 배웠다는 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진정한 상징은 원이다. 원은 회귀의 도식이기 때문이다. [315]
‘만족은 행복보다도 불행을 낳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만족의 요구는 흔히 그 사람의 개인적 행복과 그것을 뒤엎어 버릴 만큼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체는 그 안에 분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즉 만족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고 그것이 충족되면 또다시 새로운 욕망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무한에까지 이른다. [317]
만일 모든 악이 제거되고 투쟁이 모두 그쳤다면 권태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관계로 인생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인간이 모든 고통과 번뇌를 지옥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천국의 손에는 권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들은 성공하면 할수록 권태를 느낀다. [318]
인생의 전경은 바라다보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럽다. 인생은 우리가 그것을 잘 모르고 있을 때만 살 수 있는 것이다. [319]
한가하면서 마음이 고요하기는 어렵다. 그는 욕심이 많게 이리저리 새로운 감각을 찾아 헤매며 결국 할 일 없는 부자나 분별없는 난봉쟁이에 가해지는 천벌, 권태에 정복된다. [323]
우리가 자기의 격정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격정이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적어지고 ‘자제만큼 우리를 외적 강제에서 지켜주는 것은 없다.’ 모든 불가사의 중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복자이다. [324]
➜ 세계보다도 자신을 정복하기가 어려운 것이구나. 결국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외부적인 조건보다도 자신을 정복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보다.
철학이란 경험과 사고로 해석해야 하며 단순한 독서나 수동적 공부로 알아서는 안 된다. [324]
독서한다는 것은 남이 자기를 생각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단순히 남의 정신적 과정을 반복하는 데 불과하다. ······그런 이유로 하루의 대부분을 독서로 소비하는 사람은 ······서서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의 경험은 일종의 본문이고, 성찰과 지식은 그 주석(註釋)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험이 적고 성찰과 지식이 많은 것은 가 페이지에 본문은 두어 줄 뿐인데, 주석은 마흔 줄이나 되는 책과 같은 것이다. [324]
➜ 방 안에서만 습득한 지식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나보다.
과학은 애써 모은 재료 수집과 신중한 논증에 의거하여 진척되지만, 예술은 직관이나 직감에 의해 일시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재능으로 할 수 있으나 예술에는 천재성이 필요하다. [327]
예술가에 있어 라인 강(江)은 황홀한 전망의 연속이며 그 경치의 아름다움은 감각과 상상력을 일깨우지만,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나그네에게는 ‘라인 강의 둑을 단지 하나의 가로줄로, 그 위에 걸려 있는 다리는 단지 이 가로줄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선(線)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328]
철학자들이 우울해지는 경향은 앉아서 일한다는 부자연성에 기인하는 것으로써, 너무 자주 인생에 공격을 퍼붓는 것은 배설(排泄)의 기술이 상실되었다는 증거이다. [333]
비극 없는 인생은 인간답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335]
➜ 비극으로 인해 인생의 열의를 불태우게 되는 건 아닌지.
염세관은 자의식이 많고 자존심이 강한 청년기의 사치품이다. 청년기는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품에서 개인주의적 경쟁과 끝없는 이욕의 차가운 분위기 속에 들어가 어머니의 가슴을 사모하는 시기이며, 세계라는 풍차의 화근(禍根)에-돈키호테처럼-미친 듯이 덤벼들어 슬프게도 유토피아와 이상의 껍질을 해마다 벗어 버리는 시기이다. 그러나 스무 살 이전에는 육체의 기쁨이 있고, 서른 살 이후에는 정신의 기쁨이 있다. 스무 살 이전에는 보호와 안전의 향유가 있고, 서른 살 이후에는 자신의 가정과 자식의 기쁨이 있다. [337]
스펜서의 불가지론
‘나쁜 일 속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있다.’ [353]
전쟁이 추방되고 극복될 때까지 문명은 파국에 낀 불안한 막간의 만담인 것이다. ‘고도한 사회상태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전쟁의 소멸에 달려있다.’ [365]
“사회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노동의 통제는 강제에서 벗어난다. 여기에 우리는 협동노동과 모순되지 않는 강제가 최소한도까지 축소된 형태를 발견하게 되며, 각 성원의 대다수에 의해 세워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규칙에 따를 뿐이다. [367]
진정한 ‘인권’이란 대체로 생활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및 만인과 평등한 조건 아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이다. [372]
만일 누구나 모든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도 타인의 이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중하게 사양하는 도가니 속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372]
이타적 행위는 사회적 효용의 덕택으로 자연도태에 의하여 본능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본능활동과 같이 강요되는 일 없이 유쾌한 감정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사회의 자연적 진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완전한 국가로 접근시킨다. [373]
프리드리히 니체
인생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절이 아니라 힘, 겸손이 아니라 긍지, 이타심이 아니라 확고한 지성이라는 것, 평등과 민주주의는 도태의 본질에 반대된다는 것, 민중이 아니라 천재가 진화의 목표이며, ‘정의’가 아니라 권력이 모든 싸움과 운명의 심판자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384]
‘나는 자기에 대한 성실과 결부되어 있지 않는 어떤 위대함도 인정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발견하자마자 인간의 성공 따위는 나에게는 전혀 무가치하게 되어 버렸다. [392]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나의 정식(定式)은 운명애다. ······필녕적인 것을 단지 참고 결딜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394]
나는 앉아서 기다렸노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면서.
선악의 저편에 때로는 광명을 때로는 그늘을 즐기면서.
지난날은 오직 호수와 한낮과 끝없는 시간뿐.
그때 돌연히, 벗이여, 하나는 둘이 되어
차라투스트라 내 곁을 지나가도다. [395]
‘무엇이든지 네 능력 이상을 탐내지 마라. ······네 능력을 지나쳐서 유덕(有德)한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확신에 반대되는 일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마라.’ [398]
‘······사랑은 모든 감정 속에서 가장 이기적이다. 따라서 상처를 입었을 때는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 진리애 속에서마저 진리를 소유하려는 욕망, 대개는 최초의 소유자가 되려는 욕망, 즉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진리를 발견하려는 욕망이 움직이고 있다. 겸손은 권리에 대한 의지의 보호색이다. [401]
혁명의 선이라는 것은 투쟁의 시대가 개인에게 충분한 자극과 기회를 주어 개인의 숨은 위대성을 표면에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동에서 반짝이는 별은 생기고, 프랑스 혁명의 동란과 우행 속에서 나폴레옹은 생겼고, 르네상스의 폭력과 무질서 속에서 유럽이 지금까지 거의 몰랐던, 그리고 이제는 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개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406]
아마도 우리들 중의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은 될 수 없는 자(즉 초인)의 예언자는 될 수 있으므로, 그의 오는 길을 준비해줄 수는 있다. 우리는 어디에 살거나, 어느 때에 살거나 이 목적을 위해서는 설령 아무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공통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숨은 조력자-즉 초인의 이러한 애인들-의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고뇌 속에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오늘 고독을 느끼는 자, 그대들, 격절(隔絶)된 자여, 그대들은 언젠가 하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선출한 그대들 속에서 하나의 선민은 태어나고, 그 선민 속에서 초인은 태어나리라.’ [407]
‘현재 모든 국민들의 광기를, 그들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여 부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맹수가 되어 서로 틈을 노리고, 무엇인가를 빼앗는다.-그리고 그들을 이웃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온갖 쓰레기에서 사소한 이득이라도 주우려고 한다.’ [412]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기를 바라며, 그런 후에 몰락해 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423]
그는 ‘지혜의 성장은 쓴 맛이 감소됨에 따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것을 자신의 펜에 확신시킬 수 없었다. [423]
‘난 인간이 왜 웃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423]
그는 언젠가 누이동생이 자기를 보고 울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물었다. “리스베드, 왜 우느냐?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느냐?”
어느 날, 그녀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그러자 그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기쁨에 넘친 어조로 말했다. “아! 나도 좋은 책을 몇 권인가 썼었지.”-그리고 맑은 정신의 순간은 지나가 버렸다. 니체는 1900년에 죽었다. 자기의 천재성 때문에 이토록 높은 대가를 치른 사람도 없을 것이다. [424]
현대 유럽의 철학자들
1. 앙리 베르그송
지식이 너무 많으면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고, 나이가 젊은 신봉자는 대개 배신자가 되기 쉽다. 젊었을 때의 죄인이 늙어서 성자가 되듯이 말이다. [428]
‘지속이란 과거가 미래를 갉아먹고 살이 쪄서 나아가는 연속적 진전이다.’ 그것은 ‘과거는 그 전체가 현재 속에 연장되어 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과거 어느 작은 부분만을 가지고 사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체를 가지고······욕망하고 뜻하고 행동한다.’ 시간이 쌓여 있는 이상, 미래는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발짝마다 새로운 축적이 생기므로 ‘한 순간도 단순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아직 예견하지 못한 어떤 것이다.[429]
‘의식적 존재자에 있어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이란 스스로를 무한하게 형성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모든 사상(事象)은 시간과 지속, 생성과 변화일 것이다. [430]
삶은 목표, 유전적 성질 및 기억이 풍부해짐에 따라 자유스러운 선택의 영역이 넓어져, 여러 반응방법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의식이 생긴다. 의식이란 반응의 예행연습이다. ‘의식은 생물의 선택 능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식은 행동을 둘러싼 가능력(可能力)으로 범위를 비쳐 준다. 의식은 하고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격을 막는다.’ [430]
선택은 창조적 활동이며 창조적 활동은 힘들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며, ‘편안히 자족하는’ 동물들의 선택이 없는 기계적인 생활을 힘없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당신 밑의 개가 공자님과 같은 태평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그것이 철학적 평정, 즉 깊은 연못의 조용한 수면은 아니다. 그것은 본능적 확신이며 선택할 필요도 없으며 선택할 수도 없는 동물의 평온이다. [431]
우리들이 1마일을 생각해 내는 것은 반마일을 생각해 내는 것과 똑같이 쉬운 일이며, 사고의 일순간은 전 세계를 일주할 수도 있다. [433]
생명이란 창조적인 힘,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고집함으로써 기관을 형성해 나아가는 힘이다. [442]
2. 베네데토 크로체
역사를 적는 철학가는 우주의 계획을 뒤쫓을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관계를 발견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또 역사를 적는 철학자는 현대에 의의가 있고, 현대를 계발하는 과거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사가들이 역사를 자연의 묵시(黙示)로 하여 인간의 거울로서 서술한다면, 역사는 마침내 나폴레옹이 이름 붙였듯이 ‘유일한 진리의 철학 및 심리학’이 될 것이다. [449]
예술은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대상을 확실하게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지도 정의하지도 않고 느낌으로써 표현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449]
예술의 불가사의는 사상의 외적 표현이 아닌 사상을 잉태하는 데 있다. 외적 표현 따위는 기계적인 기교 문제, 손재주 문제에 불과하다. [449]
3. 버트란드 러셀
자유는 가장 좋은 선이며, 자유 없이 인격은 있을 수 없다. 생활과 지식은 오늘날 매우 복잡해졌으므로 다만 자유 토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오류와 편견 사이에서 진리인 그 포괄적인 관점에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교사들까지도-제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하여도 상관없다. 이렇게 정반대의 견해로부터 소신의 이성적 상대성은 생기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쉽사리 무기(武器)에 호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와 전쟁은 주로 교정된 사상이나 독단적인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시원한 바람처럼 ‘현대’정신의 노이로제와 미신을 날려버릴 것이다. [458]
현대 미국의 철학자들
1. 조지 산타야나
‘사람들이 다른 사고방식을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결코 나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만일 자기가 할 수 있으면-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조망이 더욱 선명하게 전개되도록 마음의 창문을 잘 닦아야 한다.’ [466]
나는 토론할 때 이외에는 믿지도 않는 견해에 찬성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내걸고 생활하는 것과 다른 의식에서 싸우는 것은 부정직하고 비겁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므로 내 눈으로 볼 때 스피노자를 제외한 근대의 저작가들은 모든 철학자가 아니다. [467]
우리가 사람인 것은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필경 꽃과 그 종자, 아이와 그 웃음은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기계보다 그 이상으로 우주의 신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아마도 자연을 죽음의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생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470]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전혀 맹목적이고 타성적인 것이 아닌 이상 나라의 현재 상태와 나라 고유의 이상과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474]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가장 필요한 전제이다. 만약 그렇게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을 수 없을 것이다.’ [478]
‘지혜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묻고,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한쪽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세상을 적대시하지 말고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 아름다움도 고통도 순식간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순간의 고통을 슬피 탄식하는 것.’ [478]
➜ 세상에 늘 시선을 두고 있되 세상을 벗어난 꿈을 꾸는 것도 놓치지 않고 살게 되면 삶에서 맞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지혜롭게 맞이할 수 있겠지.
살기 위해서는 죽음보다 생을 생각하고, 완전한 것의 까마득한 희망뿐 아니라 바로 눈앞의 현실도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476]
2. 윌리엄 제임스
Muliverse는 결정된 다음 번복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행위가 중대한 관계를 갖는 세계이다. 일원론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죽은 세계이다. 완성된 Universe에서는 개성은 망상이다. 우리는 모두 ‘정말은’-하고, 일원론자는 우리에게 보증한다-어느 하나밖에 없는 모자이크 풍의 실체의 한 조각이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는 자기가 연출하는 역할의 몇 행은 자기가 쓸 수 있고,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를 어느 정도까지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일 수 있다. 그것은 기회의 세계이지 숙명의 세계는 아니다. 무엇이나 ‘말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존재와 행위는 이러한 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487]
‘결론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결론을 도대체 누가 끄집어냈는가. 말할 수 있는 예언도 없으며, 들려줄 조언도 없다. [490]
3. 존 듀이
어떤 의미에서 학교는 정신적 성장의 수단을 제공할 뿐이고, 나머지 일은 경험의 흡수와 해석에 달렸다. 참다운 교육은 우리가 학교를 졸업한 위에 시작되는 것이니, 우리가 죽기 전에 교육을 그만둘 이유는 전혀 없다. [492]
변화와 성장을 인식할 수 있는 한계는 없으며, 사고가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은 없다. [494]
➜ 사고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신일 테니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구나.
나쁜 인간이란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리 선하였더라도 현대 타락하고 있는 -즉 선인이 아닌- 사람이다. 좋은 인간이란 비록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무가치했더라도 현재는 좋아지고 있는 사람이다. [495]
➜ 과거의 그 사람도 미래의 그 사람도 아닌 현재의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이구나.
또 선량하다는 것은 단지 온순하고 사람이 좋다는 것만은 아니다. 능력 없는 선량은 절름발이며, 만약 우리에게 예지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덕도 우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무지는 지극히 덕이 아니라 무자각(無自覺)이며 예속이다. 다만 예지만이 우리를 자기의 운명 형성의 협력자로 하는 것이다. [495]
3. ‘내가 저자라면’
<철학이야기>는 그 양식으로 본다면 일종의 철학 서적이지만, 이 책을 전문적인 철학서로 보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집필 의도가 먼지 낀 서재에서 잠자는 철학을 해방시켜 대중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유명 철학자들의 생애를 통해 철학에 다가가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소개할 때 그들 자신의 말, 곧 원전을 이용하며, 독자들에게 뛰어난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여 그들의 사상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초연한 자세로 사색하는 듯 하던 철학자들이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과 나란히 고요한 숲 속에서 다정하게 인생을 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이렇듯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난해한 용어나 논리에 집착함이 없이 쉬운 수필을 읽는 것처럼 철학사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듀랜트는 뛰어난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슬기로운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의 학설을 빌려서 쓴, 듀랜트의 ‘인생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자라면 철학가들의 성격에 따른 그들의 사상에 관해 살펴보고 싶다. 이 책에 나온 철학자들을 보면서 많은 철학자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는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스피노자와 같이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다정함으로 인해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모여들었다는 것을 보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괴팍하지 많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철학가와 그들의 사상이 있듯이 그만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철학가들이 있을 것이다. 철학가들의 성장기가 그들의 성격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인해 형성된 성격이 무엇인지. 어떠한 철학사상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철학사상이 특히 영향을 미치게 된 부류에 대한 이야기들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