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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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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4일 19시 5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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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저자는 철학자의 눈으로 영화, 신학, 문학 등을 해석하고 창작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의 책은 철학과 인문학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어, 현대인의 삶과 인문학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지식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는 철학과 사회생각, 과학지식, 진화론,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소설은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는 그는 그렇기에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제법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같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그 감동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예술품이나 유적들안에 자리하면서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어떤 위대한 정신적 가치에서 나옵니다. 미술이든, 건축이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문학이든, 학문이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하는 것들의 심층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가치들이 반드시 들어있지요. 서구문명에서는 그것이 지난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신’이라는 이름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하여 나타났는데, 내가 이 책에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폭넓은 만남이 바로 그가 책을 집필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며 스스로 질문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하며 쓰는 글이기에 “시절이 수상하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는 어지럽다. 가슴에 어둠이 내리고 마음의 길들이 끊어졌다. 나누어가질 믿음이 말랐고 함께 간직할 소망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궁벽한 시절이 더 깊어질 것이라 한다. 하지만 삶을 위해 희망은 아니더라도 소망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작가가 전해주는 소망에 관한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책은 현제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철학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풀기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는 철학은 잘 만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과 사회를 크게 도울 수 있는데도 현실은 철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철학이 어렵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그는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 주고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도구로 영화나 소설같은 예술 작품을 자주 철학과 접목시킨다.

 사람이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김용규 선생님 뵈면서 처음 느끼게 되었다. 그런 따뜻함이 선생님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기에 철학이라는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우리 일상 곳곳에 철학이 자리하고 있으며 철학을 재발견함으로써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와 함께 그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라 하시며, 그 안에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애쓰실 수 있는 것 같다.

[참고]
책 앞부분 저자 소개
yes24 저자소개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211016008
http://www.d-voic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18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지은이의 말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서양문명이 특히 그렇지요. [8]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파스칼,<팡세>- [20]
➜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못하면 신의 손길이 오직 나만을 위해 비추고 있다는 덫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나만을 위해 우리 소수를 위해 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면 오만이란 늪에 빠져 나만의 세상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반면 내 비참함만 알게 된다면 거기서 어떤 희망의 줄기도 찾을 수 없어 세상은 나에게 암흑으로 다가 올 것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이 드러내는 특징이지요. [36]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可視的)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可知的)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41]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41]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데아가 이미 존재한다. 즉 그 모든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망각(Lethe)의 강을 건너며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이데아에 대한 기억들을 잊었다. 그렇지만 그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사물 안에 깃든 이데아를 상기, 즉 ‘다시 기억해 냄’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44]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개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45]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이같이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탐구했고,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들을 모사해 오게 했지요. 그 결과 성서 이야기를 다룬 이들의 작품에도 그리스 문화가 자연스레 혼합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신이 제우스의 모습을, 아담이 아폴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나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에서 성모가 아테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지요. [47]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이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omnipresence)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56]

"나를 떠나지 말 것", "등을 내게로 돌리고",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같은 표현들을 한번 보세요. 여기서 ‘떠남’, ‘등 돌림’, ‘돌아감’이라는 개념들이 바로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만 살 수 있고 물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새가 공기 없이 어찌 날 수 있겠어요! 요컨대 모든 존재물은 존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5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축복과 징벌을 묘사한 작품에는-위에서 본 것처럼 설사 그것이 은폐되었을지라도-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종교적 상징과 표현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비록 구약성서와 일부 서양 문학작품에서도 신은 종종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의인화되고, 그 행위가 신인동감적 표현으로 묘사되기는 해도 말이지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곧 드러나겠지만, 이 종교의 신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 계시했고 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파악해 왔기 때문이지요. [64]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만, [65]

2부. 신은 존재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75]

다만 당신이 여기서 기억할 것은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탁월한 중세신학자들도 신이 인간처럼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바다’와 같은 모습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입니다. [76]

1장 존재란 무엇인가

나의 원수인 것은 다만 당신의 이름뿐: 아,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하지만 이름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여전히 향기로운걸.
로미오는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가 지닌 고결함은 그대로인걸. [79]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이 본질(本質)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있음’이 곧 존재(存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84]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84]

그런데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자원이 될 수 없지요. [8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85]

만일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따라서 신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그것은 오직 ‘존재’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가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라고 말한 이유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까닭입니다. [86]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나는 그를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발설할 수 있겠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만물을 포괄하는 자, 만물을 보조하는 자, 그는 당신을, 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괄하고 보존하고 있지 않소?” [89]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to on, einia)가 곧 실체(ousia)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항상(eidos)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보존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과 갖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ipsum esse)’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이 그런 이유다. [93]

이름이란 본디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게 속한 것인데, 신은 그 어떤 존재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신이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계시했으므로 신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좋든 싫든-하나의 존재물처럼 인식되는 일 또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96]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97]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이유이며, ‘신’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97]

신의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창세기 3:19)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99]

신은 거룩한 ‘존재’이고, 인간을 포함한 그 밖의 만물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물’로 신과 갈라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부르지 않고 ‘존재자체(ipsum esse)’라는 용어로 표현했을 때도 바로 이런 구분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요컨대 “신은 존재물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99]

만일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이외의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 자체를 부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니라네. 또한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나는 말하겠네. [111]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 자체’는 ‘아름다운의 이데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한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며, 이 같은 원리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된다는 뜻이지요. [111]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습니다. [111]

같은 종류의 사물들 사이에도 이데아가 “많이 또는 적게” 들어 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성질에는 언제나 ‘더 또는 덜’ 같은 질적 차이가 ‘단계적으로’ 생깁니다. 역시 예를 들자면 같은 빨간 옷감들 사이에도 ‘빨강의 이데아’가 얼마나 들었느냐에 따라 더 빨갛거나 덜 빨갛고, 아름다운 여인들 사이에도 ‘아름다운 이데아’가 들어 있는 정도에 따라 더 아름답거나 덜 아름답다는 것이지요. [112]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 더 많은 이데아를 분유해서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안 변한다는 것, 더 완전하다는 것, 더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당연히 그에 대한 지식도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하게 됩니다. [116]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사다리는 “아마도 인간보다 더 우월한 또 다른 종류”에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모호하게 언급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분명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물의 계층구조’였고 그 정상에 인간이 있지요. [119]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에게는 피라미드식 존재의 계층구조는 단순히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체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엄격한 가치체계이기도 했습니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을 따라 존재의 체계를 가치의 체계로 가르쳤기 때문이지요. 그는 일자(신)는 참됨, 선함, 아름다움, 생명, 예지, 능력 등 모든 가치에서 최정상이지만 거기서 유출되어 나온 존재들은 계층구조의 밑으로 갈수록-마치 빛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듯이-점차 결핍된다고 교훈했습니다. [122]

신을 존재자체(ipsum esse), 진리자체(ipsa veritas), 선자체(ipsa bonitas), 아름다움자체(ipsa pulchritudo)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신이 이 모든 가치의 정점(頂點)에 있다는 의미였지요. 또한 그들이 존재물들을 존재의 결핍(privatio esse)으로, 거짓을 진리의 결핍(privatio veritas)으로,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esse)으로, 추함을 아름다움의 결핍(privatio pulchritudo)으로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22]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안셀무스처럼 부를 때 그것이 단순히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바치는 ‘공허한’ 찬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신을-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등등 - 어떠어떠한 가치들의 정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이 바로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며,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123]

자연과 사회 안의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마치 자연이 자연의 계층적 질서를 따라 조화를 이루듯이-인간이 사회적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이지요. -p.127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작업이 무엇이든-설령 아무리 비천한 것일지라도-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지요. [128]
➜ 소명을 찾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는 나는 언제쯤 의무에 충실할 수 있을지...

“오, 인간이여! 그대의 존재를 그대 안에 한정시켜라. 그리하면 결코 더는 비참해지지 않으리라. 존재의 대연쇄에서 자연이 당신에게 할당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하면 아무도 당신에게 그곳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지 않으리라. [128]

부자는 최하위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지어다. 그도 자연의 연쇄 속에 있는 동등한 고리이니: 동일한 목적으로 노동하고 동일한 관점으로 합일되어 양자는 다 같이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29]
➜ 내가 조금 나은 위치에 있다고 내 잣대를 들이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내 아래 놓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구나 다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온 것임을 잊고 있었다. 그 고리 마다 연결되어 하나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

정신은 이러한 자기직관(self-intuition)을 통해서 플라톤이 ‘이데아(idea)’라고 부른 것, 즉 세계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idea)’을 자기 안에 만듭니다. 이 말을 플로티노스는 “정신 자체에 정신이 나누어 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표현했지요. 한마디로 플로티노스에게는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데 모범이 되는 틀(paradeigma)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질송은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들처럼 ‘세계의 창조주’라는 신(神) 개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신(nous)이 곧 신이다”라고 주장했지요. [134]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135]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해도 다만 ‘창조의 틀’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합니다.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지요. [136]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theoria)'이다.” [136]

빨강이라는 색은 끊임없이 자기동일적 빨강을 생성할 때에만 유지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퇴색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148]
➜ 불변을 위해서건 변화를 위해서건 어쨌든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작용하여야 하 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 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150]

개념을 산출하는 우리의 정신은 앵글의 노출시간을 ‘아주 길게’ 열어 놓은 카메라와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들로부터 불변하는 개념들을 얻어 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불변하는 존재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 밖에서의 모습’ 또는 ‘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바로 그런 예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 안에서의 모습’ 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예컨대 그들의 신 야훼(YHWH)가 바로 그렇지요. [151]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153]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신의 창조 활동과 함께 시간이 생겨났고, 따라서 신의 영원성이란 시간 안에서의 무한함이 아니라 시간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신은 세계에 대해 초월적 존재이자 동시에 내재적 존재이고, 모든 존재물은 세계 안의 존재라는 교리와 연결된다. [154]

신은 성질이 없어 선하며, 양이 없어 크고, 결핍이 없어 창조적이며, 지위가 없어 통치자이며, 외관이 없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장소를 갖지 않아 어디든지 있고, 시간을 갖지 않아 영원하며, 변함이 없어 변화하게 하고, 아무 작용을 받지 않아 모든 작용을 한다. [155]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場, field)'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YHWH)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ha֩ya֩)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157]

기독교 신학이 존재자체라는 용어로 계승한 신이기도 합니다. 중세신학자들이 이해한 ‘존재자체’라는 개념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지요.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에 가깝습니다. [158]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大海]”와도 같다고 묘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에도 이러한 역동적 신 개념이 들어 있지요. [158]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했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原物質)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163]

무와 물질의 중간에 있는-따라서 무는 아니지만 거의 무에 가까운-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163]

최고의 본질(신)이 어떤 시간과 장소에도 항상 존재하면서, 동시에 어떤 시간과 장소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그것이 모든 시공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시공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제기된 반론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164]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165]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키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기획투사(Entwurf)’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아가주망(engagement)’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은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78]
➜ 각자의 삶의 목적에 투신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나를 실현함과 더불어 신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 해도 실제적으로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185]

우선 ‘신은 현존한다’ 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인 ‘신은 현존하지 않는다’ 가 그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나요?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판단 명제가 아니고 종합판단 명제입니다. 당연히 논증의 타당성만으로는 그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칸트는 이렇게 했습니다. “현실적 대상은 나의 개념 중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나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도 덧붙였지요.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87]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만 사용되는데, 최고 존재[신]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초월적 사용을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199]

신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만을 준다는 가르침은-신의 침묵에 부단히 절망하는 우리의 경험상-믿기 쉬운 말은 결코 아니지요. 그렇지 않나요? 솔직히 나는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아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같은 의심은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단 하나의 예를 만날 때 순식간에 사라지지요. 보세요! 적절한 예 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사학적 논증법으로서 예증법이 지닌 힘이자 페일리의 논증이 가진 설득력의 비결이지요. [201]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 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203]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212]
➜ 개념 없는 상태에서 느끼게 되는 감성과 직관은 예상치 못한 화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성과 직관을 제대로 된 개념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그것이 설다 맞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면 그것이 어떻게 효용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신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일종의 오류라는 것이지요! 신은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단지 공허한, 즉 “내용 없는 사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 같은 “내용 없는 사고”들이 떠도는 영역을 “폭풍이 이는 광대무변한 바다” 또는 “가상의 본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가상(假象)’의 사전적 의미는 “주관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 현상”이지요. [212]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3]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바로 그 뒤에서 우리의 이성이 저지르는 온갖 오류가 생겨나지요.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213]

이율배반이란 서로 모순이 되는 두 명제가 진위(眞僞)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둘 중 어느 것도 경험적 확증 또는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214]

진리는 타당할(valid) 뿐 아니라 건전해야(sound)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18]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지요.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비롭거나 기적과도 같은 종교적 경험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데는 많은 학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습니다. [222]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이 겪은 숱한 전쟁과 고난이 역사가들에게는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사건이지만,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을 인도하고 훈련시키고 벌을 줌으로써 그의 목표를 이해시키는 과정이자 도구였던 겁니다. [229]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230]

찬란한 빛 같은 신비한 어떤 것을 보았든, 신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소리를 들었든, 아니면 스스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든 간에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삶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가면-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234]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235]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회의주의가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준비 단계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얼핏 매우 기이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요. 누구든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야 어떻게 초이성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250]

우리가 <고백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 따라서 “주여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로 시작하여 “모두가 당신에게 구할 일이요, 당신 안에서 찾아야 할 일이며, 당신만을 두들겨야 할 일 이오니, 이렇게 하는 데서만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입니다”로 끝나는 <고백론>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눈물로 쓴 기나긴 신앙 간증(干證)이자, 탁월한 신학자가 쓴 성서 해석서가 되었습니다. [266]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지요. [276]

수학에서는 무한의 세계를 다루는 방법으로 극한(lim) 개념을 이용하는데, 신학에서는 신을 모든 가치의 극한으로 규정하는 ‘긍정신학(theologia positiva)’이 그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신은 선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선’을 근거로 그것의 완전한 형태, 곧 선의 극한의 형태를 가정하고 하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서양문명에서는 신의 속성을 종종 무한 개념을 사용해서 표현한다. [287]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정하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유익과 은혜,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를 우리가 묵상케 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찾고 찬양하고 사랑하도록 자극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바, 그 사실을 그가 유지하는 질서를 통해 보여 주셨다. [292]

데카르트는 <철학원리>에서 "우리는 언제나 신의 힘과 선의 무한함을 직시해야 하며, 신의 작업이 지나치게 위대하다거나 지나치게 정당하다거나 지나치게 완벽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잘못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라면서 무한수로 존재하는 우주를 주장했다. [294]
➜ 지나치게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해서 잘못에 빠질까 걱정하는 것은 어떤 생각에서일까?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297]

현대과학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우주의 탄생과 함께 시간과 공간이 어느 한 순간에 생겼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점이 곧 우주의 태초입니다. [299]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301]

비드켄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forms of life)’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 는 것입니다. [302]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의미를 발생시키는 규칙이라는 의미에서 삶의 양식을 ‘문법’ 또는 ‘논리적 문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는 문법이 말한다” 라고 주장했지요. [303]
➜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와 의식, 삶의 양식 등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구나.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information)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insights)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304]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305]
➜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단계가 수반되어야만 소통이 바람직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나와 있는데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반드시 개종처럼 어려운 게 아니라 번역처럼 용이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유연해진 겁니다. [307]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incommensurable)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 강화” 하자는 것이지요. [308]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과 광장, 낡은 집과 새로운 집, 서로 다른 시기에 증축된 부속 건물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迷路);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309]
➜ 오래된 도시를 보수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재건축을 해야만 한다면 어려울 것 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어려운가 보다.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러지 않은 채 성급히 어떤 일치나 합의를 끌어낼 목적으로 하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거나, 획일화를 위한 강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설사 그것이 옳은 자가 그른 자에게 베푸는 선의라는 겉옷을 입고 나타날 때조차-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311]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고대의 철학이, 중세의 신학이, 근대의 물리학이, 오늘날의 생물학이 그러하듯이 진리 또는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오늘날에는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어느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진리라는 생각,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기인한 만행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아니며, 리오타르의 표현대로 “상이한 질서의 축첩(蓄妾)관계”를 맺으려는 행위이고, 해묵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며, 자칫 서로가 망하는 제로섬 게임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경거망동이지요. [313]
➜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자신의 의견이 수렴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로인해 어떤 일이 초래될지 한 번쯤 고려해보면 좋으련만 말이다.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니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좇지 않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하옵니다. [319]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319]

영원한 하나님조차 시간 없이는 살지 않는다. 하나님은 놀랍도록 시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성은 본래적인 시간성으로 모든 시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원성 속에서, 신성의 완전함 가운데 하나인 창조되지 않는 자존적 시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 어제, 오늘, 내일은 연속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321]

우리는 ‘있었다’거나 ‘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존재(adion ousia)에는 ‘있다(esti)’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지요.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생성·소멸하는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322]

영원이란 마치 하나의 점 안에 모든 것이 자리하듯이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동일성 안에 머물러 항상 자기이기에 언제나 변화가 없는 존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라고 하겠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존재, 즉 미래에 변모될 것도 없고, 과거에 변화된 것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인 일자(一者)에 속하지요. (플로티노스는 이 말을 “더욱이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 그의 존재를 휘돌기 때문에 신에게는 ‘이전의 것’도 ‘이후의 것’도 없이 단지 ‘항상’만 있을 뿐이다. 마치 ‘복됨’ 자체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에게는 결코 변화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 없다”라고 했다. [323]

불변하는 영원이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325]

본성상 영원한 신은 자신의 영원성을 피조물에게 부여할 수 없어서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을 만들어 그것을 세계에 자신의 내적 질서와 동시에 부여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단일성(hen)을 견지하는 영원을,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원의 모상(aionion eikon)으로 창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325]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존재물이 이데아의 분여(分與)에 의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존재하며 인식도 되고 이름도 갖게 되듯이,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된 것으

로나마’ 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수에 따라 진행되는 시간, 주야, 연월-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지요. [326]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보통 영혼(靈魂)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걸? 따라서 바꿔 말하자면, 시간은 영혼이 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신의 영원성이 들어 있기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327]

가령 당신의 마음이 지금 기쁘거나 슬프다면, 그건 대게 지금 바로 이 순간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분명 지나간 슬픈 일이나 다가올 미래의 기쁜 일과 연관된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vis memooriae)’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335]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337]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식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memoriae)’처럼-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갈파한 대로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 희망을 구성하게”한다는 것이지요. [342]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의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344]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피조물들과 부단히 관계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인도한다는 뜻이지, 우주공간 어느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352]

“하느님은 자신의 전능성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361]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363]

세계가 타락한다는 말은 뭔가 이상하지요.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용어를 도덕론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여 ‘불온전하게 됨’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신이 창조했을 때에는 세계든 인간이든 모두 온전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과 세계가 모두 불온전해졌다는 뜻이지요. [369]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계 질서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죄를 지음으로써 “우주 전체가 약화되고 실추되는” 결과를 빚었다는 것입니다.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타락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함이지요. [370]

예수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하는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고, 그 자신이 곧 ‘말씀(logos)’ 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발화와 동시에 언제나 그것이 뜻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행적(修行的)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387]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 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만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는 물론, 이념 못지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38]
➜ 어떤 일이든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안의 지식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진리도. 또 내 안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입으로만 떠들어 댄다면 아는 이만 못할 것이다. 모르면 몰라서 못한다고 하지만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오만한 자세를 낳을 뿐이다.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힘을 한 때 깨닫고서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그러나 믿음은 진실로 그 지점에서 더 진진해야 한다. 믿음은 창조주로서 알려진 하나님을 영원한 통치자와 인도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의 움직임을 운행하시며, 작은 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시고 유지시키고 먹여주신다. [394]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신의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의 성격을 늘 갖지요. [396]

"선이란 그것을 소유한 존재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며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설명했지요. ‘선자체’로서의 ‘일자’는 언제나 완전하게 자족적이기에, 그에게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398]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여!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서 완전하며, 당신 속에는
아무런 결핍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나이다.
그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자와 교제하여 결함을 서로 돕고 위안하고자 하는 것이리다.
당신은 본디 무한한 일자여서, 만물을 포괄하는 절대자시니, ······
당신은 은밀한 곳에 홀로 계셔도 당신자신과 가장 좋은 벗이 되며,
사교를 바라지도 않으시옵니다. [399]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쪽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400]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400]

씨 뿌리는 자와 수확하는 자가 항상 같으리라는 법은 없는 겁니다. [420]

제일 먼저 자연을 따르라. 당신의 판단을 항상 변함없는 자연의 기준에 맞춰라.

과오가 있을 수 없는 자연은 신의 빛을 드러내 보이나니, 그것은 분명하고 변함이 없으며 보편적인 빛으로 모든 것에 생명과 힘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느니라. [420]
➜ 과오가 있을 수 없는 자연을 우리는 과오를 만들게끔 얼마나 많은 해를 입히고 있었는지... 그로 인한 자연재해 앞에서도 인간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속할 뿐이다. 언제쯤이면 자연 앞에 겸허한 자세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후반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424]

자연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는 분명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지요. 자연과는 달리 인간과 사회는 언제나 가치 지향적이고, 또 항상 그래야만 합니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지요. [425]

크로포트킨은 스펜서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이렇게 주장하지요. “경쟁이란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세계에서나 진화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물들 사이에도 번식기 같은 극히 예외적 시기로 국한되며······진화의 더 나은 조건은 협동에 의한 경쟁 소멸에 의해 만들어진다.” [427]

일찍이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교훈했듯이 나쁜 선택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요. [427]
➜ 선택한 것은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결과에 대해 불평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내린 선택들로 인해 얻게 된 결과들도... 나쁜 선택으로 인해 얻게 된 결과를 놓고 나를 얼마나 괴롭히며 살았는지. 그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나를 컨트롤 하지 못하고 저지르듯이 한 선택들로 인한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와 나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둘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내 삶에 빛이 조금은 더 밝게 들어올 것 같다.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회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여긴다." [443]

“모든 운동(kinesis)은 가능태(dynamis)를 현실태(energeia)로 바꾸는 현실화이며 영혼이 생물에 내재하는 이 현실화의 원리를 성취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반듯하게 가공 된 석재(石材)에 대해, 들판의 돌덩이 하나는 가능태이며 가공된 석재는 현실태이다. 그러나 가공된 석재는 지어질 석탑(石塔)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능태다. [451]

요컨대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현실화 원리’라고 하든 ‘자연법’이라고 부르든 ‘제2원인’이라고 하든, 아니면 ‘영원한 법칙’이라 이름 짓든-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 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454]

칼빈은 신의 계시는 당대의 문화와 형편에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점을 참작하여 성서를 적절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지요.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연설가 비유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즉 훌륭한 연설가가 청중을 미리 알고 자신의 연설을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듯이, 신이 계시를 할 때도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춘다는 것이지요. 신이 자신을 팔과 입을 가진 존재물로 묘사한 게 바로 그런 예라는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계시는 신이 오래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춘 것으로 간주하고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맞게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교훈했지요. [461]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서·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텍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461]

철학자들에 의하면 신이 ‘일어날 어떤 일(A)’을 예정해 놓았을 때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설 틈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예정이 그 일(A)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신이 어떤 일(A)이 일어날 것임을 예지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침해받지는 않습니다. 이때 신은 그 일(A)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A)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지하는 것이거든요. [468]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사실이 전혀 없다면 모르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길이 없다. 우리가 욕망하면서도 만일 의지자체가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다면 물론 우리는 욕망하지 않는 셈이다. 욕망하면서 욕망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면, 욕망하는 사람에게는 의지가 엄존한다.” [473]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474]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신)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474]
➜ 우리의 존재가 무한영역에서 얼마나 작은 것임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만 있다면 자연 앞에서도 경건해 질 수 있을 것이고, 부질없는 욕심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무의미한 집착 역시...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유했듯이 “마치 높은 망대에 오른 사람이 여행자들의 여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에 직관하는 것처럼” 인식하지요. 한마디로 신과 인간의 인식은 판단의 범주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474]

“신은 세계를 자연법칙이라는 자신의 일반섭리에 맡겨 운용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특정한 유전자적 변이의 기초가 되는 양자역학적 과정에 개입, 작용함으로써 자신의 특별섭리를 개진한다. 내 말의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일반섭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특별섭리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적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신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478]

내(신)가 제한받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니 나의 선을 나타내지 않지만, 이는 하든, 안하든 자유요, 필연과 우연은 내게 접근하지 못하니, 내 뜻이 곧 운명이니라. [478]

단지 신의 필연성이 자연의 우연성을 창조하고 지배하여 이끌어 간다는 의미일 뿐이지요. 한마디로 ‘필연과 우연은 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니, 신의 뜻이 곧 운명’이라는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담겨 있지요! [479]

신이 행하는 일은 모두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서이며 (신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구하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大洋]에 대해 물방울 하나가 무엇이란 말인가? [482]

당신께서는 지선하시니, 피조물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당신의 행복에는 아쉬울 것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다듬어 주신 것은 무슨 아쉬움에서가 아니라 넘치는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당신의 즐거움이 그것들로 인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불온전한 피조물들이 온전하신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고, 도리어 그것들이 당신에 의해 완전케 되어야만 당신의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485]

4부 신은 인격적이다

전투복을 차려입은 네로는 자신이 무엇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자신이 기독교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게 분명합니다. 그가 기독교인들을 가능한 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은 단지 로마시민들의 관심을 화재에서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는 왜 하필 전사처럼 차려입고 전차 위에 서 있었을까요? 자신이 꾸민 연극을 실감나게 감상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지요. 네로는 모든 향락주의자들이 필히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불안과-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는-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490]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그는 친구들에게 인간의 삶을 연회(宴會)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민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제 그가 연회를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498]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498]
➜ 우리는 각지 앞에 놓인 삶 앞에서 많은 것들과 싸우고 있다.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의 갈등과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세속적인 것들을 많이 가진다고 사람들과의 갈등이 사라진다고 내가 원하는 위치에 올라선다고 해서 내가 싸울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이 나타날 것이고 난 거기에 대항에서 어떤 행동이든 취하려고 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무엇인지... 나도 삶의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면 살아가고 싶다.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 있으며, 아무도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지요. [500]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항상 살아 있어서 왕의 법령이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법, 곧 자연법입니다. [500]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며 각자의 수명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오. 또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물의 영속적 질서가 개체와 전체를 모두 지배한다오.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무엇이 그대를 기쁘게 하고 무엇이 그대를 울게 할지가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으며, 개개인의 인생이 서로 아주 달라 보여도 결과는 마찬가지라오.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이든 사라질 것이며 우리 자신도 사라진다는 것이오. 그런데 왜 우리가 분개하며 무엇 때문에 불평해야 하는 거요?" [503]

가난을 무시해라.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해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해라. 죽음은 너희의 고통을 끝내 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504]

➜ 영원한 것은 없다.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처럼 집착했던 것일까? 한 번 떠난 것들은 다시는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오지 않을까봐,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까봐 두려워서 그랬다. 내 앞의 단 일분도 예측할 수 없으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예상하고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나를 감싸고 다녔던 것이다.

바울에게 신의 예정은 신의 자유롭고 기쁜 뜻에 근거한 것이므로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이며(로마서 9:16, 에베소서 1:5,9,11), 영원불변적이고(에베소서 1:4, 디모데후서 1:9, 2:19, 로마서 11:29), 불가항력적이지요(빌립보서 1:6;2,13). [512]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논할 때, 이 말이 하나님께서 천국에 안일하게 앉아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관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모든 사건에 대처하려고 키를 잡은 배의 선장과 같은 분이다. [518]

그것[섭리]은 측량할 수 없는 신의 위대함이다. 그는 한 번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신다. 그러므로 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고백하면서, 신은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지 않고 하늘에서 한가히 지내신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은 요망스럽게도 신에게서 그의 능력을 앗아가는 사람이다. [528]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뜻하는 것처럼, 신은 만물을 창조할 때 완전성의 정도가 높은 것부터 낮은 것까지 계층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여했지요. 그 결과 존재의 세계에는 신과 유사한 높은 존재들부터 덜 유사한 낮은 존재들까지 계층적으로 구성된 피라미드형 존재의 사다리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 피조물들에 각인된 이 사다리를 인식함으로써-마치 ‘야곱의 사다리’를 올라가듯이-존재의 사다리를 올라가 궁극적으로는 신에게 도달할 수 있었지요. [537]

칼빈도 자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 이자 “하느님을 발견하는 장소”로 이해했고,“가장 아름다운 무대에서 열리는 명백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작품에 대한 경건한 기쁨을 가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라고 교훈했지요. [541]

그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의 신, 즉 ‘신적인 너(the divine Thou)’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언제나 ‘나와 그것(I-It)’이 아니라 ‘나와 너(I-You)’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요.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에 의해 극대화되어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시선을 누구보다도 예수에게 집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히 신의 초월성보다 인격성이 더 부각되었고 신과의 사귐이 더 친밀해졌지요. [546]

"어떤 것을 당신의 것이라고 특별히 주장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특별하게 아버지시고,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아버지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만을 낳으셨고, 우리들은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549]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신이 영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베일에 감춰 둔 채 주로 인격적 존재로 스스로를 드러냈고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도록 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지혜로운 절제(self-limitation)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성서에 나타난, 신에 대한 신인동형적 내지 신인동감적 표현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자신을 인간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계시 또는 선포하려는 지혜에서 나왔을 뿐, 신이 인간처럼 생기거나 인간처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556]

신이 존재인 한 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의 존재에 ‘이미 그리고 언제나’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이 생성·작용하는 한, 신은 피조물들의 모든 변화를 ‘이미 그리고 언제나’ 이끌고 있지요. 그럼으로써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556]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하면서 “유지하며 초월하고 포괄하며 관통하는” 존재론적 원리를,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와 하께 하리라”(출애굽기 3:12)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함께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존재론적 표현이지요. [556]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신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560]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능하고 신실하여, 설사 내가 “이 눈물 골짜기에서 악한 일을 당하게 하실지라도 그것이 변해 선이 되게 하실 것”을 믿고 의심치 않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지요. 사도 바울이 세 번씩 기도하며 자신에게 박힌 ‘육체의 가시’를 뽑아 달라고 기도 했지만 그 간구가 이뤄지지 않자,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심이라”라고 간주하면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고린도후서 12:7~9). [563]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로마서 8:28;9:11)과 ‘뜻’(로마서 9:19)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과 뜻은 하나의 ‘신비’(로마서 11:25)로 세상에 감춰져 있는데 그 신비 속에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로마서 11:29)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지요. [563]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까닭은 너를 해롭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너는 그것을 내 품에서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일어나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564]

토마스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petitio decentium a Deo)”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종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우리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신율적(theonomy)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래야만 기도가 신을 우리처럼 속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닌, 우리를 신처럼 거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567]

예수가 말한 신이 더해 줄 “모든 것”이란 ‘신이 보기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이지(마태복음 6:7,32),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직 그의 섭리에 다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뜻이지요. [571]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물질적 풍요가 ‘신이 보기에’그에게 궁극적으로 좋다면, 그래서 그것이 신의 섭리 안에 예정되었다면,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차고 넘치게” 내려 줄 겁니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해롭다면, 그래서 신의 섭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571]

예수가 말하는 ‘좋은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이 아니라 신이 생각하는 좋은 것입니다. [571]
➜ 그것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나에게 유익할 수 있음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나는 별수 없는 나약한 인간인가 보다.

아우쿠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 대로 된다”라고 교훈했고, 토마스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잘라 말했지요. [574]

신으로부터 [무엇을]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576]
➜ 내 마음만 바꿀 수 있어도 내 앞에 보이는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칼빈도 “기도의 옳고 유일한 목표는 신의 약속이 우리에게 효력 있게 된다는 한 가지 일에 있다” 라고 압축했지요. “하지만 그건 자족이 아니라 일종의 체념이 아닌가?”라고 당신은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건 분명 체념입니다! 그것도 무한한 자기체념이지요. 알고보면 신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 자기체념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시니 그분께로 가라. [577]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밀이 부서져 빻아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빵이 되겠습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그러나 버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577]
➜ 제대로 부서질 수 있게 해주는 신과 거기에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제대로 나아갈 수 있겠지.

그래서 그는 쾌락에 매달린다. 온 세계의 지혜가 그를 위하여 새로운 쾌락을 창안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쾌락의 순간에만 안정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락의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는 다시 권태 속에서 허덕인다.······네로는 로마의 반을 불태워 버리지만 그의 고뇌는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이제 더는 그의 마음을 달래 줄 것이 없다. 물론 한층 더 차원이 높은 쾌락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 자신에 대해서 그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불안이 바로 그의 본질이다. [582]
➜ 불안이 쾌락으로 얼마나 감춰질 수 있을까? 세상이 갈수록 끔찍한 사건들로 물드는 것도 사람들의 억눌려 있던 불안이 터져 나오고 있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같은 방식으로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런 득도 없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같이 살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네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불안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지요. 네로의 스승이자 신하로서 그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세네카도 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쾌락과 불안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세네카는 네로 같은 향락주의자들은 “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죽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평했지요. 그래서 이들은 항상 삶에 대한 불안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고도 주장했습니다. [582]

사람들은 대부분 무절제한 욕망으로 허덕이는 ‘폐허 속의 삶’에 절망해 언젠가는 뉘우치게 되지요. 그런데 바로 이 ‘뉘우침’이 <심미적 단계>의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아래 서게 한다는 말인데요.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583]

여기에서 뉘우침은 그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뉘우침이 나를 고립시키지만, 나의 인생이란 시간 속에서 무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면에서는 뉘우침이 나를 전 인류와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를 뉘우칠 수 없다고 한다면 자유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583]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 “그러니 이제 그대여 절망하라”고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오히려 권하지요.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교훈했습니다.

그러면 그대 속에 깃들인 경솔한 마음이 그대로 하여금, 요동치는 정신처럼 그리고 망령처럼, 그대에게는 이미 상실된 세계의 폐허 속에서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할 것이다.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록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세계로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585]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마치 “국토 없는 왕”처럼 일체를 외부에 의존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는 신조로 사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스스로 갖지 못하며,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진실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지요.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끝 간 데 없는 병적 불안감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이에 반해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그는 매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과업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지체 없이 행동을 취하지요. 따라서 실수를 하거나 장애물에 부딪힐 때에도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586]
➜ 모든 선택의 권한은 나에게 있다. 왜 그 권한을 다른 이에게 넘기려고 했었는지. 나를 못 믿지 못해서 다른 이들의 선택이 더 제대로 된 것처럼 보여서 그랬던 것일까?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았다. 그건 내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음을... 내 주권을 쥐고 한 선택에는 신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

(심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가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이에 반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그의 ‘자기’인 것이다. [586]
➜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나 자신일 것이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은 중요치 않을 것이다. 나를 다독여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윤리적 단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은 내면에서 울리는 이성의 소리에 따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탓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오는 절망은 <심미적 단계>에서 겪는 절망보다 더 처절하고 깊을 수밖에 없지요. 종전의 절망은 ‘외부적인 것, 순차적인 것 또는 쾌락적인 것에 대한 약함에서 오는 절망’이지만, 이제부터의 절망은 ‘내면적인 것, 영원한 것 또는 이성적인 것에 대한 약함에서 오는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키에르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절망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자기와 신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악마적 폐쇄성에 도달한다. 이것을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591]

일찍이 괴테가 적절히 언급했듯이 빛이 밝은 곳에서는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지요. [592]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마치 밤이 깊어야 이윽고 새벽이 오듯이 키르케고르에게 “무한한 체념은 믿음에 앞서 있는 마지막 단계”이지요. 무슨 소리냐고요?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593]

바로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무엇보다도 세계와 신의 모순성 때문에-자신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596]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 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아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불신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 낸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백 살 넘어 얻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으로 자식을 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604]

주님이 기다리신다면, 그것은 우둔한 지체가 아니라 지혜입니다.
주님을 기다리시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고, 우리를 도와주셔야 할 때를 미리 아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이 기다리신다면, 그것은 인색함 때문이 아니고 적절한 대에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안전한 곳에 준비해 두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경이십니다.
주 우리 아버지시여!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런 날에는 주님께 부르짖고, 기쁜 날에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608]
➜ 이것을 믿고 불안을 버리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절한 때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안전한 곳이 어디일지 지레 짐작하며 실망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이성적·윤리적 영웅들이 가졌던 것은 ‘윤리적 우월감’이지 ‘죄의식에 의한 절망감’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인간에게는 ‘윤리적 우월감’이 있을 수 없고, ‘윤리적 우월감’을 가진 이들에게는 ‘신에 의한 구원’이 없습니다. 이 말을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실존자는 고뇌를 통해 현실성을 갖게 되며, 고뇌가 없어지면 그의 종교적 생활도 함께 끝나는 것이다”라고 했지요. [608]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恩寵)의 본질입니다. [60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609]

기도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자기체념으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욥이나 하바국이나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구원 곧, 자신마저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을 신이 용납하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아니, 우리의 이야기에 맞춰 좀 바꿔 말할까요?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지요.[610]

헤르만 헤세 <기도>

주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에게는 절망하지 말게 하소서.
혼미한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소서. 모든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부끄러움과 욕됨을 맛보게 하시고 내가 나 자신을 가누는 것을 돕지 마옵시며
내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살피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아가 파괴되었을 때는 당신이 그것을 파괴하셨고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으신 사실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 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
오직 당신 품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610]

5부 신은 유일자다

<국가>를 쓰기도 한 플라톤은 천상세계 뿐 아니라 지상세계에도 아주 큰 관심을 보인 반면, 플로티노스의 관심은 온통 천상세계의 영혼과 영원한 시간에 쏠려 있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는 플라톤의 개념과 사상들을 자기 취향에 맞게 변형해서 가르쳤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617]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이 일자를 선자체로 규정한 일은 학적으로 보면-사실상 해서는 안 될-무모한 곡예였다는 것이지요. 이미 살펴보았듯이, 일자란 그 정의상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면 더는 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일 누구든 ‘일자가 선이다’라고 정의하면 일자는 곧바로 ‘선(A)’과 ‘선이 아닌 것(~A)’으로 나뉘어 둘 중 하나로 머물기 때문에 더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가 아니게 되지요. [630]

플라톤이 논리적 오류를 고의로 범하면서까지 일자와 선자체를 동일시한 것은 ‘존재론적 목적’이 아닌, 오직 ‘도덕론적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앞서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초월적인 ‘천상의 세계’만 동경하던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그의 철학체계에서는 한 것 헛된 것인-‘지상의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 철학자였지요. 그래서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선자체로 정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 선한 삶을 끌어내는 데 전념했던 겁니다. 플라톤 철학의 진짜 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였던 것이지요. [636]

플라톤은 자신의 사유를 ‘일자’라는, 더없이 높고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끌어올렸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자를 ‘선자체’라고 정의함으로써 곧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영역으로 발길을 되돌린 것입니다. [637]

삼위일체, 곧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성자·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의지·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이 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구속경(oikonomia)의 새로운 뜻을 간직하자. 이 신비로운 뜻은 하나의 본질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셋은 지위(status)가 아니라 정도(gradus)에서, 본질(substantia)이 아니라 형식(forma)에서, 능력(potestas)이 아니라 외양(spesies)에서 나뉜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정도와 형식과 외양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하나의 본질이며 하나의 조건이며 하나의 능력을 갖는다. [659]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332년경에 건설한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2세기 말엽부터는 로마, 안디옥과 함께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지중해 동쪽 끝으로 나일강과 홍해에 인접한 국제적 교차로였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에서 대상(大商)들이 모여들었지요. 특히 기원전 306년 프톨레미 소테르가 여기에 도서관을 세우고 많은 장서와 훌륭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권장한 이래,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로마와 안디옥을 뛰어넘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도시였습니다. [667]

자연히 세계 각국에서 여러 종류의 학문, 예술, 종료가 이곳으로 모였고 이것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색깔의 새로운 학문과 종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젊고 새로운 피인 기독교가 늙은 거인인 그리스 철학과 만났지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전적으로 예정된 것이었고, 역사적 안목에서 본다면 전적으로 우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만남이 ‘젊고도 활력 있는 것인’을 탄생시켜 서양문명에 기독교 사상이라는 새로운 대지를 개척한 것입니다. [668]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고 해도 그것은 오직 창조주 한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구원이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곧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도-그것은 오직 불멸자나 영원자인 하나님이 한 분만이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세주란 당연히 신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신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신은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이 같은 주장이 ‘신의 세속화(kenosis)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theosis)’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지요. [682]

하나님 안에 마치 사람들처럼 서로 분리된 세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이교도들처럼 여러 신을 섬기게 된다. 오히려 마치 샘과 그것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비록 두 가지 형태와 이름을 지닐지라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옳다. [물론]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다.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시고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샘이 시내가 아니고 시내가 샘이 아니지만, 둘은 하나이고 같은 물이 샘에서 시내로 흐르는 것같이 신성도 구분 없이 성부에게서 성자에게로 부어진다. [683]

신은 초월적 존재지만 세계의 창조자로서 지금도 피조물의 세계에 부단히 직접 관계하므로 신과 세계 사이의 중간자는 필요 없다고도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아들도 신이며, 기독교는 유일신교하는 것이지요. [684]

아, 그러나 말이란 얼마나 약하며, 생각에 비해 또 얼마나 모자란 것인가. 내가 본 것에 비하면, 그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리라. [691]

신성은 고유한 것이며 아버지 됨은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을 결합하여 ‘나는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들을 고백할 때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과 고유한 것을 하나로 묶어서 ‘나는 성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해야 옳다. 이와 같이 성령에 대해 말할 때도 호칭에 알맞게 불러 ‘나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한 분 신성 안에서 하나 됨이 온전하게 보존되며, 이와 동시에 각자에 대해 인지되는 고유한 것들의 차이를 통해서 위격들의 고유성이 고백된다. [705]

“오, 유일하신 주 하느님,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의 것인 이 책에서 제가 당신에 대해 한 말을 당신께 속한 자들이 인정하게 하소서. 그러나 만일 그 안에 제 자신의 생각이 들어 있다면, 당신과 당신에게 속한 백성들 모두에게 용서받게 하소서. 아멘”이라는 기도로 끝나지요. [708]

하나님에 대한 말이 모두가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 같은 것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들이 있어야 아들이라고 부르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관계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상대에 대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12]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 안에는 오직 관계에 따른 구분만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했을 때나, 근대에 칼빈이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아들이라고 불린다” 라고 교훈했을 때, 그들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말했던 것이지요. [712]

예컨대 당신의 손에 종이 한 장이 쥐어졌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 종이의 앞면과 뒷면은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어느 면이 먼저 생기고, 어느 면이 나중에 생겼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한 면을 ‘앞면’이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한 면이 ‘뒷면’이 되지요. 이와 마찬 가지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나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지요. [712]

에로스란 대상이 가진 무엇(예컨대 참됨, 선함, 아름다움, 부귀, 권력 등) 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여 ‘동일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지요. 따라서 보통 ‘······ 때문에 하는 사랑’ 또는 ‘인간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동일한 하나’가 되기 위한 강제가 크든 적든 들어 있게 마련인데, 몰트만이 말하는 ‘동종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하지만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됨’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흔히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또는 ‘신적 사랑’이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 통일을 이루는 조화만 있을 뿐 합일을 위한 강제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요, 몰트만이 말하는 ‘이종사랑’이 바로 이런 겁니다. [726]

“에로스를 낭만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타인 속으로 자신을 용해한다든가 더 높은 통일 속으로 타인과 함께 용해되려는 욕망 속에서 성립한다. 이와 달리 아가페는 용해를 넘어서서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들의 세계 속에서만 자리 잡을 수 있다. 요컨대 아가페는-마치 여러 악기가 서로 다른 자신들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polyphony)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내는 교향악(symphony)처럼-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이지요. [726]

"그들의 흘러넘치는 [이종]사랑 덕분에 성부·성자·성령은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와 화해와 구속 안에서 유한하고 모순된 도덕적 피조물인 타자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신다. 그 결과 자신의 영원한 삶 안에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제한해서 그들이 자신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728]

"하나님의 세 인격이 상호내주를 통해 하나의 공동공간을 형성하는 것처럼, 피조물 차원의 공동체 역시 상호 자기발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729]

누구든지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대지는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고 만일에 모래펄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여라.
어느 누구의 죽음일지라도 그 역시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상호침투된 존재이 기 때문이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그를 위하여 조문할 사람들을 보내지 말라. 종 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730]
➜ 나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다른 이득을 취하는 것이 멀리 내다보았을 때 결국 나의 것을 미리 취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느낀다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일은 없을 텐데...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모두 서로 서로 손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같이 드린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기대는 가져볼 수 있는 거니깐.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 땐 이미 그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일 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732]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적게 생각하는 자는 쉽게 말한다.(Qui pauca consuderat, facile pronounciat)”라는 중세 격언의 교훈. [738]

신이 유일자인 교설에서 신을 다신론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신’이라는 하나의 특정 맥락에서 이야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요. 다시 말해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745]

신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현세욕(concupiscentia)이 생기고,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그 현세욕을 충족시키려고 숱한 우상을 신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746]

이스라엘의 역사 흐름에 따라 야훼가 감정이 격한 절대적 폭군에서, 스스로 세운 계약에 충실한 입헌군주를 거쳐,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748]

당신을 찾는 이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해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은 이들은 당신을 형상과 모습에다 결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치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성숙함에 따라 당신의 나라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허영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당신과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나를 위해 기적을 베풀지 마소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바르게 따를 수 있도록. [749]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이야기와 연관해서 해석한다면, 릴케가 말하는 신의 나라와 법칙의 성숙이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신의 성숙일 뿐입니다. [750]
➜ 인간이 성숙해지는 만큼 인간이 바라보는 신도 성숙해 지겠지. 그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성숙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나 보다.

‘신’이라는 단어에는 변하지 않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기보다 서로 모순되고 심지어는 상호배타적이기까지 한 의미들이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융통성이 없었더라면 신 관념은 결코 인간의 위대한 개념의 하나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에 대한 어떤 하나의 생각이 의미나 적절성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조용히 폐기처분되고 곧바로 새로운 신학으로 대체되었다. [751]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753]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769]

“(플라톤에 의해) 존재로서의 존재, 즉 존재자체의 개념은 모든 것 속에 내재하는 힘, 다시 말하면 비존재에 저항하는 힘을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있으며, 또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의 힘, 바꿔 말하면 존재의 무한한 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론[神論]에 대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과 존재의 힘을 굳이 동일시하지 않는 신학은 군주론적 유일신교다.” [775]

그렇다면 절대적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틸리히는 바로 이 같은 절대적 초월자이자 절대적 포괄적인 존재자체를 믿는 신앙을 ‘절대적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존재자체(being-itself)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규정했지요. 그것은 한마디로 주체-객체의 관계가 없는 상태이며, 일체의 구별과 루터의 역설을 받아들이는 상태이자 “용납될 수 없는 자가 용납되는” 상태지요. 그래야만-다시 말해 절대적 무구별, 절대적 무차별, 절대적 초월, 절대적 포괄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의롭지 않는 자가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공식, “용납하는 누구(somebody) 혹은 무엇(something)이라고 하는 용납의 주체가 없는 용납”이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776]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을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그의 유일성을 삼위일체 신의 본질인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 포괄성과 통일성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인간 공동체 원형’으로 나타난다면, 틸리히의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그러한’ 신을 ‘그렇게’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778]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781]

다시 정리하면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라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these)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781]
➜ 서로를 알려는 노력만으로도 변화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그렇지만-또한 그렇기 때문에-그 안에 불가분 내재되었다고, 심지어 기독교인조차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 같은 터무니없는 오해가 지난 2000년 동안 온갖 분쟁과 탄압의 빌미로 이용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전쟁과 테러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보더라도 이제 더는 묵인할 수 없는 과오지요. [783]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그가 유대교이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을 믿는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798]

예컨대 중세 십자군원정의 동력은 성직자들의 종교적 타락, 황제와 왕들의 정치적 야심, 귀족과 상인들의 경제적 탐욕, 평민들의 개인적 모험심, 상품과 전리품에 대한 기대 같은 저급하고 세속적인 욕망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했기 때문에, 이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은 자신들을 ‘순례자들(peregrini)’또는 ‘십자가로 서명한 사람들’ 이라 불렀고, 숱한 살인과 강간, 약탈, 방화를 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원정이 신성한 과업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1980년 이후 발생한 모든 자살폭탄 테러를 면밀히 연구한 시카고 대학의 로버트 페이프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들의 자살폭탄 테러 실상도 이와 다르지 않답니다. [798]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들 마음 속에서도 진정 신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심스럽다.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다렸을 겁니다. [799]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또 논리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지요. 이미 수차례 밝혔듯 어떤 것이 만물의 ‘궁극적 포괄자’라면 그것은 ‘유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79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갖고 있지요.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heterologous love)’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800]

이를 예수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는 말씀으로 가르쳤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성령)을 통해 우리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라고 표현했고, 몰트만은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이 가진 포괄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유일성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유일자입니다. [800]

맺음말 -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우리가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를 따라 신을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규정한다면, 신을 배제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을 배제한 이성, 사회진보, 민중해방이 아니겠어요? 무가치한 이성, 무가치한 사회진보, 무가치한 민중해방 아니겠어요? 이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이성, 진보, 해방이 아니지요. 학문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며, 문명 자체가 매일반입니다. [804]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805]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 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 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던 레닌의 팔은 잘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 겁니다. [806]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이지요. 우리가 변하는 동안 세계도 변했습니다.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806]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지요. 사냥꾼은 “오직 한 명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나 또는 많은 무리 중 한 무리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로서 사냥터나 다른 동료야 어찌 되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 갑니다. [807]
 
➜ 단지 살아남기 위해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만행들이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더 악독한 일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정말 큰 이야기,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시대이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 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이다. 이 네 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안에서는 자기 자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809]

3. ‘내가 저자라면’

 바티칸 시스타나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보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최후의 심판’을 살펴보는 것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다음 네 개의 명제 ‘신은 존재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다’ 를 바탕으로 서양문명에서 신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며 이와 관련된 서양의 철학적, 신학적 배경과 그로부터 파생된 서양 문명의 자취를 훑어간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20세기 신학까지 포괄하는 동시에 플라톤 철학에서 시작해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키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의 현대 철학까지 살펴보며, 특히 신에 대한 탐구가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현대 물리학의 빅뱅이론과 같은 자연과학적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핀다. 여기에 예술가와 작품, 고전문학의 걸작들이 곁들어지고 우주론과 진화론, 스티븐 호킹,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등 무신론을 주장하는 오늘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까지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전문용어 대신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표현하는 ‘디아트리베’ 라는 수사법을 사용하여 서술함으로써 독자와 1대1로 대화하듯 묻고 챙기고 요점을 정리해주면서 다정하게 다가오는 저자의 모습을 새롭게 시도했다는 점이다. 친절한 설명과 함께 중간 중간 싯구를 인용한다거나 다양한 작품의 일부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더불어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부분은 철학책이 주는 부담감을 덜어주고 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이해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는 부분에서는 다시 한 번 풀어서 설명해주는 부분에서는 최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가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고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또한 기독교인들만 읽는다고 생각하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점이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거부감 없이 이 책을 읽어나가게 끔 해주고 있다.
 
마지막에 저자는 오늘날 서양 문명을 위기로 몰아넣는 주된 원인이 신이 점차 잊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 그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사라져 감으로써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을 맞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유일성을 지닌 종교(기독교에 한정된 종교가 아닌)가 필요하며, 이것이 저자가 신에 대해서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한 이유가 저자의 개인적인 종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이 특정 종교를 생각나게 해 저자가 말하는 신의 의미-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인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위대함 등-를 왜곡해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라고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서양문명 안에서의 문제만을 보았을 때는 기독교 안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서양을 넘어 인류가 직면한 문제로 보았을 땐 기독교를 넘어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므로 한 챕터 정도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어떻게 융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 있었으면 유일신의 보편성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덜 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저자라면 현재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일대일의 방식으로 철학과 접목시켜 보고 거기서 보다 구체적인 해결책은 없는지 찾아보고 싶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생각들이 잘못 됐기 때문에 갈수록 세상이 더할 수 없이 악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철학과 함께 풀어내고 철학과 함께 그 해결 방향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젠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될 것 같고, 자연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욕심일 뿐이라는 것이 더욱 와 닿는 요즘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사람들에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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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1.07.25 10:27:59 *.113.130.40
미선, 정성을 다해 책을 읽었군요.
다시 읽어보니...어렴풋하던 개념들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
플라톤의 도덕론적 목적이네요. 오늘아침에 새겨들은 말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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