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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일 01시 04분 등록

1.‘저자에 관하여’

사진.jpg

조셉 캠벨(Joseph Campbell.1904.3.26∼1987.10.30)

캠벨은 신화종교학자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대공황 때 5년 가까이 우드스탁의 숲 속에 은거하며 독서와 개인 연구에 몰두하였던 시기가 그에게는 공부의 ‘황금시기’가 되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마친 캠벨은 생물학, 수학, 신화학, 종교학, 영문학 같은 다양한 학문을 그만의 방식으로 쌓기 시작하였고, 그 후 우리에게 천복을 따르라, 천복을 찾는 모험을 떠나라와 같은 메시지를 주는 다양한 책을 보여주게 되었다.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어느 텔레비전 방송의 사회자가 매우 도발적으로 "신화는 거짓입니다." 라고 말하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캠벨이 조용히 대답한다.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은유(隱喩, metaphor)입니다." 다시 사회자가 다그치듯 "신화는 거짓입니다." 하자, 다시 캠벨은 "신화는 은유입니다." 또 사회자가 세 번째로 똑같이 말한다. "신화는 거짓입니다!" 듣고 있던 캠벨이 사회자에게 천천히 묻는다. "은유가 무엇인가요?" 사회자가 머뭇거리자, 캠벨이 이어 묻는다. "내 친구 존이 매우 빠르게 달린다를 은유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자가 당당하게 말한다. "존은 사슴처럼 빠르다." 그러자 캠벨은 "그게 아니라, 은유로 하려면 '존은 사슴이다'라고 해야 하지요."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은유는 거짓이 아닙니다. 신화도 그렇습니다."

캠벨은 신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짚어보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고 우주 질서를 회복하는 기능이 신화의 주요 기능이라는 말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그는 영웅이 한 고비를 넘어도 또 다른 고비를 넘어야 하듯이 우리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시시각각 죄어 오는 불안감들이 우리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여정이 될 것이고 이 과정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공황 시기를 겪으면서 그 혼란함 안에서 또 다시 이런 시대를 맞게 되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도록 누군가는 사람들의 의식 안에 중심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캠벨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리라.

 

 

2.‘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보라색 - 두 번 읽기에 새로 들어온 구절

머리말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言外)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편집자(古文集編輯者)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6]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7]

→ 각 종족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신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저자의 말은

결국 우리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프롤로그 -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변화무쌍한 듯 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13]

→ 끈질기다는 것은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 각자를 향해 세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서 끊임없이 살이 불어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하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顯現)한 것들이다. [14]

→ 삶 자체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자의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서 유사점을

찾고, 그것들로 인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 지고, 겉보기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나의 어느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4]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는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使臣)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21]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1]

→ 나를 발견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것들이 나를 성장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알지만 선 뜻 나를 던지지 못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겪게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무의식에서 감지 하고 나를 던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날 바닥을 치게 하는 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게 도약시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잇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좇으려 하지 않는다. [23]

→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해 새로운 경험을 위해 도전하지 않는 것.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의식(敍任儀式)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神命)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匠人)에게나 왕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의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다. [28]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제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28]

→ 스스로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얻게 되는 힘이란 결국 제대로 소용되지 못하고 스스

로를 파멸시킬 뿐이구나. 어쩌면 자신의 손에 힘이 있는 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 힘을 제 멋대로 휘둘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혼란케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29]

→ 나를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이미 영웅이구나.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 다. [29]

영웅의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심상(原型心象, Archetypal images)>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1]

→ 처음부터 뭔가 큰 것을 해보려는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 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힘으로 내 유아기적 나약한 사고에서 벗어나 내가 속한 사회의 중심축이 되어 주고 있는 원형에 나를 던져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물러앉아서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찾고, 동화(同化)해 나아가야 할 원형은, 인류 문화의 연대기를 통해 제의, 신화 그리고 상상력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촉발해 온 기폭제다. 이러한 <영원한 꿈들>은 악몽이나, 고통 받는 개인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마구잡이 상징적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3]

→ 신화 안에 문제와 해결책이 뚜렷이 제시되어 있다면 그 문제가 발단된 원인 또한 모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은 대부분은 욕심이 아니었을까? 그럼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지나침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한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3]

→ 평범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만 그 안에는 그의 경험이 살아 숨 쉬고 있기에 그가 경험한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 우리 또한 그의 삶을 따라 보다 쉽게 영웅을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처에서 영웅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7]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37]

→ 아주 큰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리아드네와 같이 뭔가 거창한 것만이 나를 이끌어

줄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실타래는 대단한 물건이 아니지만 이것이 없으면 시작자체가 불가능하다. 작은 것일지라도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허비하는 시간은 그 만큼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의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38]

→ 예상대로 미래가 흘러가지 않는 것이기에 삶이 다채로울 수 있는 것이겠지.

2. 비극과 희극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39]

→ 행복하기 위해서는 따로 거창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지만, 불행은 모든 것을 그 이유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해피 앤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한,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39]

→ 모든 드러나 보이는 것들을 보면 그 안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인다. 드라마

안에서도 개인의 홈페이지 안에서도 모든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세상의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에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0]

풍자로서의 희극은 있을 수 있고 유쾌한 도피처로 우리에게 재미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행복을 다루는 동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42]

→ 동화 속 세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아이들에게 많은 혼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을 처음하게 된다. 굳이 동화속의 이야기들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그 존재자체로 충분히 순수하고 맑은데 그 아이들 자체가 동화인데 어떤 이유로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세상은 험한 곳이니까 마음 한편에 숨 쉴 수 있는 공간 마련해 주고자 했던 것일까?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며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43]

→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하는데서 비극이 시작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으로부터 환

희가 시작된다. 나를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나를 채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비극과 희극은 같은 뿌리구나.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전설이 실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라도 승리의 행위는 꿈같은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지 실물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43]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地上的)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면적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摩損)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44]

→영웅으로 가는 길은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발견하는 과정.

3. 영웅과 신

수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當代)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50]

대개 동화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당하는 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53]

우주 발생적 순환은 모든 나라의 신성한 문헌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것은 영웅의 모험에 새롭고 흥미로운 전기를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내 신적(神的)인 권능을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肉化)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4]

→ 결국 영웅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존재를 발견하여 깨워주는 일이구나. 하지만 그 여정은 내 내면만을 열심히 파고든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이것과

더불어 세상과 부딪치면서 얻게 되는 경험이 녹아들어야만 영웅이 육화되어 나오겠지.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니니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55]

4. 세계의 배꼽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至聖所)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62]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사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62]

닮지 않는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62]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72]

→ 익숙해진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부왕(父王)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사바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입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神性)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73]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시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 뿐 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77]

→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그 순간이 바로 나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그때부터가 여정의 시작이 되겠지.

2. 소명의 거부

현실 생활에서는 자주, 신화나 민간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81]

→ 당장 눈앞의 장애물을 피할 궁리만 하느라 그 뒤에 펼쳐진 새로운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구나······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파멸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동그라진다. [81]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이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82]

→ 소명을 거부한다는 것이 보장된 나의 이득을 저버린다는 것이라면 그걸 찾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되겠구나.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아, 사랑스럽되 눈멀고 약한 자여, 내가 바로 그대가 찾던 그이니라! 나를 몰아내던 그대는, 그대 내부로부터 사랑까지 몰아내었다. [83]

→ 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내 안에 있는 영웅을 발견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것에 매달려 있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말겠구나. 영웅을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85]

3. 초자연적 조력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護符)를 준다. [93]

영웅이 빠져드는 환각은 곧 안식처이며,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 모태 안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유호하다. 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케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따라서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존재,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96]

→ 일단 세상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구체적인 지도는 없지만 여정을 향

해 나아간다면 체험 안에서 소명을 통해 무엇을 완성할 수 있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내 안 저 깊은 심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의 힘을 모두 끌어올 수 있다면 그로인해 발생하는 힘은 상상 그 이상이 될 것이다.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98]

→ 소명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나는 세상의 움직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105]

4. 첫 관문의 통과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105]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05]

→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다른 집단 안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에 인류 보편적인 믿음만을 담아 둔다면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111]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2]

→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쨌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필요하다.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게 되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수호자의 꼬리를 감추게 하는 능력이 아닐까.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 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118]

→ 세상 안에서 우리가 얻어 가장 오래 쓸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지혜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 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명(名)과 형(型)이라는 현상계(現象界)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117]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0]

→ 나를 버린다는 것이 결국 극히 위험하다는 경계선의 수호자를 뛰어넘는 것.

5. 고래의 배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을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나는 나장이, 날개 달린 소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정 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그는 뱀이 허물로 싸여 있듯이 이 신전을 허물로 삼는다. [123]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구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124]

→ 세상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럴 수 있다면 내 안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데 두려움이 없겠지.

제2장 입문

1. 시련의 길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로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128]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理想)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2]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133]

앞서간 자들의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139]

고대의 상징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는 같은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3]

→ 이 적대자는 내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 아닐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어쩌면 영웅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143]

→ 뭐든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은 없다. 영웅은 한 번에 큰 성취를 이루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아무나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한 단계씩 밟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아무래도 어렸을 때 동화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2. 여신과의 만남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의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젋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148]

→ 잠자는 공주의 볼에 입맞춤하는 여전사의 모습은 어색하다. 그럼 보편적으로 신화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웅의 여정 마무리 관문에서 그를 막기도 하면서 도와주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이미지가 강한 듯하다.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4]

→ 왠지 여신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섬세한 여성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신화 안에서는 여성은 영웅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데 큰 영향을 주는 존재로 드러나기만 하고 왜 여성의 여정은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56]

→ 영웅의 여정은 꽃길로만 가득차 있을 수는 없는 것인데 난 늘 꽃길만을 다니려고 했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도깨비란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理想)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60]

4. 아버지와의 화해

대부분의 신화에서 자비와 은혜의 이미지는 정의와 분노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이 정의와 분노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인간은 파멸을 겪는 대신 어려움을 근근이 이겨나간다. [168]

시바 신의 오른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이는, 신이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바의 표정에 떠올라 있는 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부동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존재, 세상의 행복과 고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품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169]

<화해>즉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의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170]

하늘과 땅이 똑같은 열을 받을 수 있도록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않도록 하여라. 너무 높이 올라가면 하늘이 탈 것이요, 너무 낮게 내려오면 땅에 불이 붙을 것이어서 하는 소리다. 그 한가운데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175]

→ 모든 것의 정도를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정도의 점을 어디에 두는 것이 아닐까? 내 정도와 타인의 정도를 맞춰가는 것 또한 영웅의 여정의 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래야만 세상에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테니깐.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 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178]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178]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 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180]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190]

→ 결국 모든 여정을 마친 자의 내면에 있는 지혜를 통해서만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노시스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따라서 비차코챠는 이런 식으로 자기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천명하면서 지고한 만유의 신들에 동참한다. [191]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191]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腱)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2]

→ 아킬레우스 건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나를 뛰어넘지 않는 이상 제 아무리 힘든 영웅의 여정을 거쳤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나를 극복함으로써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2]

5. 신격화 Apotheosis

세상에는 도처에 보살(존재와 본질이 대각에 이른 자)이 있고, 보살의 광명을 받고 있지만,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이 세상, 즉 연화를 들고 있다. 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가 고통과 쾌락을 깊은 휴면 상태로 구속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197]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를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207]

얼음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208주석]

→ 내 영웅의 여정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나는 나아가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 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인하고, 자위적이고, 고통 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211]

30년간 위대한 신은 나의 거울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내 거울이다. 하자면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고 위대한 신은 그 자신의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나 자신의 거울이다. 신이 내 입으로 말하고 나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211주석]

종교는 욕망, <에로스Eros>와 적의, 즉 <죽음Thantos>를 바로잡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이렇게 되면 새로운 미망의 상태가 만들어질 뿐이다.> 저 유명한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215]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욕심이 없고, 대자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217]

→ 나를 놓고 그 집착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겠지. 그리하여 내 안의 신을 만나게 되면 외부적인 그 어떤 환경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리라.

<나무, 바위, 불, 물,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無情物)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 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222]

→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 참 크다는 것인데도 그런 것들을 순식간에 파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6. 홍익(弘益)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33]

이 머리는, 달을 따라잡으려고 그때부터 영원히 달을 좇아 하늘을 떠다니게 되었다. 라후가 달을 따라잡으면 잔이 그 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235]

만물은 나아가고 ,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溢)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魔)가 인다. [248]

→ 답은 각자의 내면에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찾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니 찾으려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런지.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적이 도(道)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248]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정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49]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말이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당했다. [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250]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내부의 뚜껑을 열어젖힐 수 있을 때 그렇다. [250]

→ 많은 시간 답을 찾을 수 있는 열쇠를 내 손에 꼭 쥐고 그 열쇠를 찾아 헤매게 된다. 시

각을 달리하여 내 손에 열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내부에 숨겨져 있는 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귀환

1. 귀환의 거부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 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53]

→ 영웅은 자기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그를 통해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에도 도움이 주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결국 나를 구하는 길이 궁극적으로는 내가 속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는 것.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56]

→ 결국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면 그것으로 하여금 파멸되게 된다는 말일까? 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영웅의 여정이 한편으론 단순해 보여도 내적인 고통은 누구나 다 겪게 되나 보다.

2. 불가사의한 탈출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263]

세계 전역에서 채집되는 수백 가지의 비유적 전설들은,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 쪽에서 애인과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69]

→ 인간적인 성공을 볼 수 있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위기 또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드리게 되겠지. 그러고 보면 내 일이 아니면 그저 무심히 지나쳤던 수많은 사건 사고들 안에는 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져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3. 외부로부터의 구조

신은 만물에 내재하기 때문에, 부엌의 냄비나 접시에서 천황에 이르기까지 만상은 신으로 여겨져야 마땅하다는 것, 이것이 신도(神道), 곧 <신의 길>이다. 천황은 최고위에 있기 때 문에 최대의 존경을 받지만 이 존경이라고 해서 만상에 대한 존경과 그 유(類)가 다른 것 은 아니다. <엄숙한 신은 그 스스로를 현현하되, 나뭇잎 한 장, 풀잎 한 장에 있어서도 그 러하다. [276각주]

→ 어느 곳에나 신이 모습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뭐 하나 예사로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없을 것 같다. 해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가까이에 있나보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1]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281]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 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282]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뿐이다. [288]

→ 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일도 줄어들겠지.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294]

→ 위험을 그저 감정적으로 체념적인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라는 수동

적자세가 아닌 적극적으로 그 위험을 맞부딪히고자 하는 힘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겠지.

5. 두 세계의 스승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297]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인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305]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305]

→ 상징을 하느님의 생각과 같은 선상으로 바라본다면 상징을 내 주관대로 해석하는 일은 줄어들겠지.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306]

→ 매 순간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不動)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貴人)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307]

→ 내가 겉에 걸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고 내면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인가 보다.

6. 삶의 자유

영웅이 불가사의한 여행을 끝내고 귀환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영웅은 햄릿이나 아르쥬나처럼, 불가피한 죄악의 거부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307]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07]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벨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 없고, 시들게 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은 모든 존재의 심연에 두루 퍼져 불변이요, 부동이다. 따라서 이 ‘실재’는 언제나 하나이니라.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308]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이다. [313]

→ 죽지 않고는 새롭게 변할 수 없는 거겠지. off 수업 첫 주제가 장례식이었던 이유가 이제야 들어온다. 정신적으로 내가 제대로 죽지 못한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성장 할 수도 없을 테니깐.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13]

→ 사라지는 것이 없다면, 내가 없애고자 하는 것들을 어떻게 새롭게 변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 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313]

4 열쇠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제1장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誤讀)되어 온 심리학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성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326]

신화와 꿈도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가능하다. [326]

마음과 감각이 감지할 수 있는 형상과 관념은 초월적인 진리와 개방성을 암시하도록 제시되고 조정된다. 이어서 명상의 조건이 완비되면 개인이 홀로 남는다.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공(空),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330]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31]

→ 신에 의지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로로 하여 나 홀로 내면의 상징들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영웅의 여정이 아닌가 한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332]

2. 우주의 순환

신들은 세계의 새벽과 더불어 태어나 석양과 더불어 소멸된다. 신들은, 밤이 영원이 계속된다는 의미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비현현의 숙면 영역에서 비롯, 꿈을 통하여 깨어나 있는 대낮, 그리고 다시 꿈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한 어둠에 이르는 보편적 의식의 통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존재의 일상적 실제 체험이나 살아 있는 우주의 광대한 양상은 같은 것이다. 잠의 심연 속에서는 에너지가 재충전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이 에너지는 고갈된다. 우주의 생명도 고갈되면 재생되어야 한다. [339]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可視)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340]

3. 허공에서-공간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 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342]

신화 속에서 마음은 정상적인 가치 체계에 안주하지 못하고 뜻밖의 각성 체험을 통하여 끊임없이 모욕을 당하거나 충격을 받는다. 마음이 정상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마음이 좋아하는 이미지나 전통적인 이미지에 안주하려 할 때 신화 체계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미지가 메시지 자체라고 옹호하면 안 된다. [343]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우주란의 껍질은 공간에 떠 있는 세계의 뼈대요, 그 안에 있는 풍요한 생식력은, 식을 줄 모르는 자연계 생명력의 역동성을 나타낸다. [353]

그는 두려웠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불행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로 인함이다. [355]

5. 하나에서 여럿으로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과(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366]

6. 창조의 민화

어느 관측자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들은, 신은 선하고 만인의 행복을 바라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멍청한 아우가 있어서 언제나 신의 일에 훼방을 놓는다고 말한다.>그들의 이러한 가정은, 어느 정도 진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의 멍청한 아우는, 만일에 대해 무한한 선의를 가진 전지 전능자가 설명하지 않는 삶의 어려움 및 터무니없는 비극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372]

→ 한 때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악한 것들로 가득차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신에게 멍청한 아우가 존재함으로 인한 것이라면 왜 신은 그 아우가 실수를 연발하게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신의 팔도 결국 안으로 굽는 것일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본다.

제2장 처녀 잉태

1. 어머니 우주

내가 모르는 문을 통해, 내게 생소한 길을 통해, 나를 가두고 있는 이 작은 둥지에서, 이 같이 비좁은 이 처소에서, 나그네가 찾아가는 땅으로, 그 맑은 바람 속으로 나를 인도하소 서.(...) 이윽고 그는 문을 밀었다. 손가락하고도 네 번째 손가락으로, 그러고는 왼발 발가 락을 세우고, 뼈마디 사이의 문을 열고, 무릎걸음으로 문을 나왔다. 머리 하나 가득 물을 뒤집어 쓴 채, 손으로 파도에 저항하여, 이윽고 인간은 바다로 나왔다. 이윽고 영웅은 파도 위에 나왔다. [379]

2. 운명적 모태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80]

3. 구세주를 낳은 자궁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392]

4. 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정열의 절제, 예술의 폭발적인 발달, 경제 구조의 태동, 문화적 기관의 대두를 통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월우(月牛)의 화신이나, 운명의 팔괘라는 초월적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 정신이었다. 따라서 우주 발생적 주기는, 다가오는 시대의 인군(人君)의 전형이 될 인간의 형상을 한 황제의 손으로 넘어갔다. [398]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 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 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것이다. [400]

참회를 시작하면서 그는 사슬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를 바다에다 던져버렸는데 이 열쇠는 그의 참회가 끝날 즈음 물고기 뱃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일은 참회가 끝났음을 알리는 하늘의 섭리로 받아들여졌다. [403]

→ 참회의 시작에도 끝에도 그리고 그 과정 안에도 신은 우리가 함께하고 있나보다.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과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412]

섬김의 도는 멀고,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 익히 알려져 있고 섬기는 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이란 만물에 내재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지성으로 섬기면 신으로 현현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외부 세계에 있는 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도 섬기는 자에 내재하는 그 신이다. [412주석]

→ 특별한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 안에서 존재하는

신을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시각을 갖기 위해 영웅의 여정이 필요한 것일까?

3. 전사로서의 영웅

영웅이자 전사의 칼날이 창조적인 근원의 에너지로 빛난다. 이 칼날 앞에서 낡은 것의 껍질이 떨어진다. [421]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事象)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現狀)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22]

→ 영웅이 내면으로의 여정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를 옹호하는 자신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것인가 보다. 과거를 옹호하는 힘은 내가 그것에 얼마만큼 집착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로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事象)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다. [422]

4. 애인으로서의 영웅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428]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방법이다. [431]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6. 구세주로스의 영웅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40]

7. 성자로서의 영웅

삶의 마지막 장(章)으로 넘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영웅의 유형이 있다. 즉 성자, 고행자, 출가자(出家者)로서의 영웅이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色)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안에서 살고, 소식(小食)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용,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443]

이 십자가의 관문 너머에 신 안에서의 천복이 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길(태양의 문)이어서 그렇다. [445]

8. 영웅의 죽음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445]

제4장 소멸

1. 소우주의 끝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산 산을 들어 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458]

→ 영웅의 여정은 내면에 잠들어 있는 영웅을 깨우는 것이 가장 주된 목표가 되겠구나.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459]

신화는 무수한 장애물을 돌파해야 하는, 영혼의 여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460]

2. 대우주의 끝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468]

에필로그 -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하늘높이, 태양의 궤도 위에 솟아 있는가 하면, 문득 바닷물 속에서 이 해신은 솟아난다. 그의 말은 진실하다. 그는 서풍의 숨결을 거느리고 나타나는가 하면 바다의 짙은 빛깔의 물결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478]

→ 뭐든 한 번에 되는 것은 없나보다. 나에게 지혜를 줄 누군가를 만나게 되더라도 그가 나 에게 내가 원하는 답을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도 여정의 한 부분이 되는 거겠지.

2. 신화, 제의(祭儀), 명상의 기능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키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0]

→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회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회로부터 단절되는 사람은 그 만큼 많아지고 있는 것 일게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가상공간에 나를 맡긴 채 내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떠도는 우리들은 참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사는 것 같다.

3. 오늘날의 영웅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484]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485]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488]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시, 공간을 떠나 많은 이야기들이 비슷한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게 다가왔다. 좋았던 점은 다양한 이야기들 즉, 신화, 옛 이야기, 동화, 민간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 등을 책 한권 안에서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너무나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기에 이해를 한 번에 하기는 무리가 있다. 두 번 읽어도 여전히 어렵다.

아쉬운 점은 프롤로그가 조금 길게 느껴지고 중간 중간 들어가 있는 그림들이 책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상들과는 일치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또한 영웅의 여정이 남, 여를 가르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 여정을 떠나는 이들이 남성만의 예가 나온 것은 아쉽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대자대비한 보살을 여성의 형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놀라웠지만 여성의 위치가 많이 격상된 지금에도 이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내가 여성에 대한 시선을 실제보다 못하게 갖고 있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캠벨은 우리 모두가 영웅의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 여정은 다름이 아닌 자신 내부로의 여정이다. 그 여정에는 도움이 필요하다. 시선을 조금만 넓게 잡으면 우리도 조력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이들이 나타나듯이 말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해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에 있다고, 그리고 영웅은 어떤 특별한 핏줄을 타고 난 사람들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영웅의 여정 그 과정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는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길은 혼자서 외로이 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도움이 함께 한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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