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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일 11시 59분 등록

1.   저자에 대해서

 

앙드레 보나르, 역쉬 외국사람 이름은 어렵다기 보담은 입에 쩍쩍 안 붙는다. 그나마 이름이 세 글자여서 다행이다. 네 글자 넘어가면 외우는 게 불가능하다. 나에게 앙드레의 대유법인 인물은 돌아가신 디자이너 앙드레 김 옹이시다. 빠숑이 유명한 파리지엥이 떠오르는 앙드레는 프랑스풍 이름 같은데, 이 작가 역시 프랑스어를 쓰던 인가 하나 근거는 전혀 없다. 보나르, 보드레보드레는 우리 나라 말이지. 암튼 주말에 배흘림기둥이 있는 그 유명한 절로 놀러 간다고 자랑하는 이에게 나는 1 2일 동안 앙드레 보나르라는 남자와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카페에서 놀 거라고 했다. 팔팔이 카톡에서 앙드레 보나르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다는 걸 들었다. 나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뉴스다. 만세를 부르면서, 별 죄책감 없이 책 날개의 저자 소개를 디립다 타이핑한다.

  

그는 1888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났다. 로잔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1915~28년 로잔 중학교와 고전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6년 그르노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니까 28년까지 중고교 교사였다가 박사학위를 받는 36년 사이 8년동안에는 교사는 안하고 공부를 했다는 말이다. 이후 1957년까지 30년 동안 로잔대학 그리스어, 그리스 문학 교수를 지냈다. 스위스는 여러 나라 말을 쓰는 나라지만 그리스어를 쓰지는 않으니 그가 근무한 과가 스위스에서도 국문과는 아니겠다.

 

대학교수이자 작가로 여러 저작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에 생생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입히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글에서 지식인 사회 특유의 사변을 걷어내고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을 현재 작가들의 작품을 대하듯이 읽도록 가르쳤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했으며 <프로메테우스>, <그리스의 신들> <안티고네>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 <오이디푸스왕>, <비극과 인간> 등 그리스 관련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하는 참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자신의 작품 <프로메테우스><안티고네>등에서는 주인공에게서 저항과 참여의 정신을 찾고자 했다. 1949년 스위스평화운동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평화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으나 냉전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52년 국제평화수호자대회 참석차 동베를린으로 가던 중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소련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하여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의 혐의였다. 그러자 스위스에서도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외침과 함께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그를 지지하는 내용의 전단지 8만 장이 전국에 뿌려졌다. 1954년 재판에서 그는 소련의 스파이입니다는 검찰의 주장에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이적행위일 수는 없습니다고 맞섰지만,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 후 그리스 문명사 연구와 집필에 매진하다가 1959년 작고했다.

 

<그리스인 이야기 : 원제 Civilisatiion Grecque, 3) 은 그가 평생을 일궈온 그리스 관련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원제로 하면 그리스권 문명으로 번역되는 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헬레니즘을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헬레니즘은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운명을 지배하기 위해 벌이는 모험의 시기로 간주한다. 1954년에 1권이 나왔으며 1957년에 2권이 출간된 후 대학에서 은퇴했다. 스위스에서 불어판으로 나온 이 책은 같은 언어권인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포르투갈, 러시아, 루마니아, 일본 등지에서 일찍이 각국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그리스 문명사 분야의 세계적인 고전으로 자기매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위트와 재치가 넘쳐 흐른다. 딱 독자를 쥐고 찰싹 붙여서 데리고 다니며 요리한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한 김화균씨의 역자의 말에 의하면 문학을 할까 학문(그의 학문은 법학이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고 현재 대학의 법대 교수다)을 할까 하는 갈등을 이 책을 번역하면서 해갈했다고 했다. 무엇이 그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가능하게 했을까 싶을 만큼이 책은 재미가 있다. 이건 아마도 그의 방대한 호기심과 독서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책을 통해서 아테나이와 그리스 문명이 전성기였던 시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그 시절의 그리스에 대해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하면 보인다는 말, 이 사람에게는 그게 맞는 듯 하다. 

 

 

2.   내가 저자라면

 

1)    전체적 뼈대와 목차에 대해

 

그리스 문명 전반에 걸쳐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 문명의 황금시대였던 50년 전후, 주로 기원전 5세기 후반부를 주제를 정해서 다루고 있다. 3권이다. 이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 이 그리스문학 교수님의 관심사가 시인들의 비극이나 희극 작품에만 관련된 게 아니라 문명 전체를 훑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의 인명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다. 어디서? 철학과 서양 역사, 과학 부분에서다. 그만큼 그리스 문명이 우리에게, 이때의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를 기준으로 한 거지만 인류라고 보는 게 낫겠다,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밑줄 그은 부분만 공식적인 문학 작품이고 나머지는 문명 이야기다.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열번째 뮤즈, 삽포

솔론과 민주주의

노예와 여자

신과 인간

비극 : 아이스킬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시민 페리클레스

 

2

안티고네의 약속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과학의 탄생 :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판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지는 해

소크라테스의 수수께끼

 

3

쇠락과 새로운 발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나타난 비극성

비극 <박카이>

투퀴디데스와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

데모스테네스와 도시국가 시대의 몰락

플라톤의 정치적 대망

플라톤식 아름다움과 환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명체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성 또는 우애에 관하여

질서라는 탈을 쓴 무질서,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책의 전성시대, 알렉산드리아 : 도서관과 박물관

알렉산드리아의 과학 :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지리학 : 퓌테아스와 에라토스테네스

의학 : 아르키메데스, 헤론, 그리고 증기기관에 관하여

시로의 회귀 : 칼리마코스,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가 쓴 <아르고나우티카>

테오크리토스의 낙원

다른 형태의 도피 : 헤론다스와 사실주의 풍자 희극, 그리스의 소설 <다프니스와 클로에>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

 

2)    장점과 보완점

 

원제는 그리스 문명이다. 이렇게 그리스인 이야기로 번역이 된 건 문명이라는 무겁고 어려운 단어를 쓰면 잠재적 독자를 많이 잃어버릴 거라는 계산이 있었을 거다. 그리스인 이야기라니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또 작가의 필체가 워낙 가볍고 발랄하다. 무거운 주제라도 이 작가에게 가면 가볍고 만만해질 것 같다. 이 점이 가장 훌륭하다. 가독성이 좋다.

 

두번째는 저자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풍부한 인용문이다. 그는 힙포크라테스의 수많은 저작을 읽었음에 분명하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많은 인용문을 다룬다. 이 꼭지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다룰 때도 그랬다. 또한 그의 전공이었던 그리스 비극을 포함한 문학, 작가를 다룰 때는 그 동네를 매우 잘 알고 있고 사랑하는 이의 시선으로 안내한다. 평생 자기 분야 일을 한다고 해서 이 작가 같은 시선과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참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안내자를 모시고 그리스 문명을 들을 수 있어서.

 

보완점이라면 원본보다 더 긴 설명을 하고 있을 때 은근슬쩍 원본 자체의 담백한 맛을 보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시인 핀다로스의 시를 말할 때 그러했다. 짧은 것이라면 원문을 인용해 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또한 사진이 좀 더 보강되면 좋았겠다. 

 

3)    감동적인 장절

 

1권에서는 헥토르에 대해 말한 부분,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는 해석, 여성과 노예가 민주주의 구성원으로 제외되어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90 아킬레우스는 용감해지기 위해서 무슨 생각 따위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헥토르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그럼에도 사색과 품위 만으로 헥토르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용기는 더 깊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헥토르가 갖춘 품위는 그저 단어로서 존재하는 품위가 아니다. 헥토르의 품위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데 있고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죽는데 있고, 아내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데 있다. 헥토르의 용기는 현자들의 용기와 다르다헥토르의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용기다.

 

93 안드로마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헥토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그들 부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두 부부의 마지막 대화에는 고전문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사랑하고 존경한다. 헥토르는 아내를 사랑할 때도 아이들을 사랑할 때도 아내와 자식들을 한 사람으로 사랑한다. 살붙이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헥토르에게는 다른 것이 아니다.

 

295 <아가멤논>의 제 1부에 나오는 합창단은 여러 번 이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즉 신이 여러 번 아가멤논에게 운명을 피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아가멤논의 목숨과 영혼은 무사할 수 있었다. …아가멤논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일이다. 신탁이 그렇게 지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시험이었다. 장군으로서의 영예나 야망보다도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높게 여기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었다. 아가멤논은 시민들을 그런 전쟁에 내몰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스 시민들이 바람난 왕비때문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297 이피게네이아가 흘린 피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도 아가멤논은 계속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그에 대해서도 배상을 할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아가멤논에 대한 원한을 품은 채 그의 귀환을 기다렸다. 어린 자식들을 잃은 어민의 슬픔이 신의 분노와 합쳐져 아가멤논 위로 떨어진 것이다.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 것은 노예뿐만이 아니었다. 노예 바로 옆에 서서 노예만큼이나 대접받지 못한 존재, 그게 바로 여자였다. – 226

 

문제는 어떻게 해서 여성의 지위가 이처럼 낮아졌는가 하는 점이다….다른 건 몰라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언젠가 여성들이 한 번 크게 진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계사회의 지도자라는 지위에서 떨어져 그리스 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비천한 인간이 된 것이다. – 232

 

아테나이 민주주의는 허술한 민주주의다. 성인 남성의 민주주의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40만명 가운데 시민은 고작 3만명이었다. 바람 한 번 몰아치며 모조리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는 숫자다. 혹시라도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한다면, 그 발명품이란 어린아이의 입안에 난 이와 같다. 반드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였다. 곧이어 그리스는 죽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 235

 

2권에서는 힙포크라테스의 휴머니즘이 드러난 부분, 소크라테스가 사형이 확정된 후 찾아온 친구에게 원칙대로 하자고 하는 부분 등이었다.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 11

 

46 우리는 안티고네 이면서 동시에 크레온이며,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소포클레스의 천재성과 예술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그는 너무도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등장인물 각각의 삶에 동참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인물들이 우리 앞에 등장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동조할 수 밖에 없다.

 

64 예술가는 많은 시에서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표현된 신들에게 인간 남자와 여자의 형태를 부여했다. 이렇듯 신화는 단순히 그리스 예술의 병기창일 뿐 아니라 그리스 예술을 기른 젖줄이기도 했다.

 

85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몸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석조 조각가의 창조력을 이끄는 이중의 방향타다. 여기에다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도 덧붙여야 한다. 인체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지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도 덧붙여야 한다. 인체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지식을 낱낱이 키워가는 조각가의 의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조각가는 인체를 재현함에 있어서 항상 어제보다 발전된 지식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야말로 조각가가 신에게 바치는 첫째가는 봉헌물이다. 조각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루어가는 발전을 아낌없이 신에게 바친 셈이다.

 

245 고귀한 군주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최악의 잘못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다시 말해서 원숭이처럼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핀다로스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말한다. “너는 알게된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 원숭이는 아이들에게는 아름답다. 언제나 아름답지.” 이것은 말하자면 델포이의 주제인 너 자신을 알라의 도덕적 교훈 버전이다. “너는 알게 된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라는 핀다로스의 말을 가지고 괴테가 있는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 라는 멋진 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핀다로스는 자신에게로 돌아와 두번째 퓌티아제 송가를 자부심으로 가득한 말로 끝맺는다. 이 말은 아첨꾼들 (왕에게 원숭이 노릇 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시인에 대해서 지어내는 비방으로부터 시인 자신을 해방시켜 준다. 그들이 쏟아내는 비방이야 아무려나 상관없다. 핀다로스는 말한다. “나는 코르크나무처럼 씁쓸한 파도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그물 위로 떠다닌다.” 그는 솔직한 사람, 입바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핀다로스는 시모니데스와 박퀴릴데스를 겁내지 않는다. 이들은 고대인들에 따르면 그에게 피해를 주었고 그래서 여기서 지목되었다. 핀다로스는 딱 한 가지, 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두려워했다.

 

321 질병만 보지 않고 사람을 보다

 그의 저서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놀라움은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 욕심이다. 힙포크라테스는 우선 잘 바라보며 따라서 그의 눈은 날카롭다. 그는 질문을 하고 그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무려 일곱권에 달하는 <전염병> 총서는 의사가 환자의 머리맡에서 환자를 지켜보며 적은 방대한 기록일 뿐 별다른 내용은 없다. 이 일곱 권의 기록은 순회 의사로서 여정에서 만나게 된 여러 사례들을 특별히 분류하지 않고 되는 대로 소개하고 있다. 개별 환자에 대한 기록은 보편적인 성찰의 성격이 짙은 글들에 의해서 자주 끊어진다. 이러한 성찰들은 반드시 사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의사가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적어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의사의 정신이 항상 깨어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486 “자네의 부탁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군. 그것이 친구로서의 의무 때문에 하는 부탁이라면 말일세. 하지만 그 부탁이 압력이 된다면 그럴수록 불쾌해지고 말 걸세그러고는 평소에 늘 하던 방식대로 크리톤이 제안하는 도주가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평생동안 가르쳐온 원칙과 일치하는 지, 또 지금이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 시점인지를 살펴보자고 권유했다. 왜냐하면 불행이 그를 위협한다고 해서 원칙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다. 크리톤과 소크라테스 같은 노인은 평생 상상 가능한 일에 관해서만 대화를 나누었던 걸일까? 아니면 원칙이란 그 원칙이 진정한 것이라면 언제고 실천에 옮겨야 할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권

 

그리스 문명의 탄생

 

11 인간은 모두 원시인으로 시작했다.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원시 부족의 하나였을 뿐이다. 원시부족들은 천천히 성장해서 하나의 문명을 이루기도 하고,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다행히 그리스는 문명을 이뤘다. 문명을 이룬 데 그친 게 아니라, 화려한 꽃을 피웠다. 후세에 길이 남을 걸작이 수도 없이 탄생했다.

 

21 그들은 어째서 그것들을 발명하고 발견하는데 매진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에게 득이 되고, 인간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누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리스 문명은 도시를 위한 문명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중심과 그 주위의 농지를 묶어 구획된 도시에만 문명이 있었다. 도시는 문명의 힘으로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은 평등하게 문명을 향유할 권리를 가졌다. 그리스의 도시는 이처럼 국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불완전하게나마 민주주의를 고안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33 도시들끼리 이처럼 자주 다퉜던 역사가 항상 나쁜 역사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다툼은 다양한 형태의 경쟁으로 나타났다. 도시는 운동으로도 겨루고, 문화로도 겨뤘다. 소위 게임이 성행했다.

갈등이 있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가 중요. 도시끼리도, 사람끼리도. 그런데 나는 갈등, 다툼 자체를 문제로 보고 피하려 하다보니 꼬이고 복잡해질 때가 많다.

 

37 그리스인들이 뱃사람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들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배를 만들고 바다로 나갔다.

 

40 이처럼 그리스인들이 가난하게 산 이유는 척박한 땅과 낙후된 기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분배의 불평등이다.

 

44 진실은 이렇다. 그리스 민족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그들이 수단을 가지고 문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신이 기적처럼 나타나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했을 리 없다. 문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분투해온 것들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 그리스 민족이 끼어 있을 뿐이다.

척박한 조건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다 보니 문명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걸 나는 개인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56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종래의 구전 설화를 문학작품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이전의 시들이 즉흥적인 것들이었다면 호메로스의 시는 정교하게 다시 만든 것이다.

 

58 인간을 여러 부류로 나누는 기술, 인간 각각의 특성, 배역, 의미, 행태(오늘날 언어로 바꾸면 디지털 정보)를 다르게 배열하는 기술로 치면 호메로스는 발자크나 셰익스피어와 동급이다.

이런 말투가 이 책의 가독성을 높인다. 고전에 대해 말하면서 할아버지를 어려워하지 않고, ~로 치면 ~와 동급이라는 말로 까불락까불락 거리고 있다.

 

61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용기는 묵직하다. 저항의 용기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시쳇말로 근수가 많이 나간다.

 

63 공격은 몰라도 수비에는 아이아스만한 전사가 없다.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는 죽으나 사나 자리를 지킨다. 말 그대로 단순하다. 경계석 같다. 돌처럼 서서 경계를 지킨다. 그가 있는 한 누구도 넘어올 수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그를 탑 혹은 벽이라고 부른다. 단단하기가 콘크리트 같다. 

뚝심이 대단하다. 이런 단순무식과격 뚝심, 용기, 배짱!

 

67 디오메데스의 용기는 아테네여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다. 그런 면에서 보면 디오메데스는 중세 기사를 닮았다.

 

69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파리스와 형 헥토르의 대립은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다. 헥토르는 말 그대로 영웅이고, 트로이아의 수호자인 반면 파리스는 나라의 수치이며 좀팽이였다.

문학 속의 영웅 혹은 좀팽이가 이번 달 커리큘럼의 제목이었다. 벌써 연구원 몇 달 째인가? 아직도 제대로 안 하고 못하고 있다. 일과 속으로 들어오는 데는 한 달이면 주도성을 실험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매번 월요일, 또는 이번처럼 못내서 죄송합니다. 오늘내로 보충하겠습니다는 데서 탈피를 못하고 있나? 한심천만  

 

72 파리스 안에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경솔하고 비루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한 신이다. 한편으로 파리스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몸에 담고 있다. 아프로디테의 충만함과 완전함, 경이로움이 그에게 있다. 파리스라는 인간의 생애는 결국 반쯤은은 신의 포로다.

 

74 헬레네는 남편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헬레네로 인해 사단이 나고, 두 나라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게 또한 호메로스의 재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러니는 호메로스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신들의 작품이다.

이성에게 무척 매력이 있다는 것도 분명한 달란트다. 그걸 아프로디테신이 준 재능이든, 디오니소스 남신이 준 재능이든 놀라운 달란트다.

 

여신에게서 태어난 아킬레우스라는 이자는 사람인가 짐승인가? 나는 아킬레우스가 기본적으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다. 그것이 아킬레우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열쇠다. 그는 우정에 약한 만큼 증오에도 약하다. 

나는 그를 아레스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에서 아레스 원형에 대해 읽어보고 싶구나. 내 주변에는 이런 남자를 보기가 어렵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원단 아레스가 한 명 있으면 좋은데. 원단 헤르메스 한 명 있고, 원단 아폴론도 한 명 있다.

 

87 특히 모범적인 인간을 고를 때 다른 누구도 아닌 헥토르를 고른다. 알다시피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고, 트로이아 전쟁에서 이긴 쪽은 그리스인이었고 호메로스도 그리스인이다. 호메로스가 제 아무리 공정하려고 해도, 그리스 민족주의를 통째로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호메로스는 제일 좋은 것을 적장에게 주었다. 호메로스라는 작가를 휴머니스트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영화에서 헥토르 역을 한 이를 봤었다. 그 때 나는 파리스나 헬레나보다 평범해서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두려움도 느끼고, 가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다른 갈등 속에서 선택하는 그를 보면서 굉장히 인상 깊었었다. 그 영화를 만든 이도 이 원작을 읽었음에 분명하다. 아마도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 작가의 이 책도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고전을 읽는 건 인류의 보물창고를 구경하는 일이구나. 창의력의 근원이 되는 그 거대한 수원과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구나. 

 

90 아킬레우스는 용감해지기 위해서 무슨 생각 따위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헥토르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그럼에도 사색과 품위 만으로 헥토르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용기는 더 깊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헥토르가 갖춘 품위는 그저 단어로서 존재하는 품위가 아니다. 헥토르의 품위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데 있고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죽는데 있고, 아내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데 있다. 헥토르의 용기는 현자들의 용기와 다르다헥토르의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용기다.

나는 무척 겁이 많고 뭘 못저지르고 못 다닌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면 헥토르도 그런데 사색과 품의, 사랑으로 용기를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다고 한다. ? 그렇단 말이지? 선천적으로 용기를 갖고 태어나지 못한 인간도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겠구나. 헥토르의 인격이나 에피소드가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건 또 인류의 집단무의식에서 솟아난 것일 테니

 

93 안드로마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헥토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그들 부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두 부부의 마지막 대화에는 고전문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사랑하고 존경한다. 헥토르는 아내를 사랑할 때도 아이들을 사랑할 때도 아내와 자식들을 한 사람으로 사랑한다. 살붙이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헥토르에게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딧세우스와 바다

 

99 문명은 노력과 업적의 기록이다. 호메로스의 두 번째 서사시는 인간이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용기와 인내, 지혜를 총동원해서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중심인물이 바로 오딧세우스였다.

 

106 오딧세이아에는 아버지의 귀환이라는 공식이 있다. 지중해의 개척자나 바다를 누비는 영웅의 이야기이기 전에 귀향의 기록이다. 전래동화가 다루는 주제 그대로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먼 길을 떠난다. 길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내는 끝까지 정절을 지키고, 돌아온 남편을 알아본다.

길을 떠나는 이야기 :

1)     남편이 아내를 찾아가는 이야기 오르페우스가 유리디스

2)     아내가 남편을 찾아가는 이야기 프시케가 에로스 / 금기 어긴 아내가 반인반수의 남편 (구렁덩덩새선비, 해의서쪽달의서쪽 곰 남편찾아간 셋째딸)

3)     딸이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 : 바리공주

4)     아내가 남편 기다리는 이야기 : 첫날밤에 도망간 남편 활옷 입은 채/ 망부석, 선녀바위

5)     남편이 아내 기다리는 이야기 : 나뭇군과 선녀

 

109 기원전 8세기, 뱃사람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처참한 삶이었고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다. 자연치고도 가장 혹독한 자연을 맨 주먹으로 맞서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 뱃사람들에게 오딧세우스는 영웅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그리스 민족의 식민지가 될 땅을 앞서서 밟고 다녔다. 

, 그리스 식민지가 될 땅을 미리, 이야기 속에서 떠났구나. 왜 영웅서사시인가 했더니 이래서였구나.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118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딧세이아는 뱃사람들의 시 그 이상이다. 오딧세우스도 그냥 뱃사람이 아니다. 자연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모범이다. 문제가 닥치면 오딧세우스는 늘 생각한다. 행동하기 전에 궁리한다.

이런 궁리가 바로 고전에서 지혜를 얻는 거지. 이거야 말로 공식 겸 고급 예제를 얻는 거지. 좋은 책을 읽는 시간을 일용할 양식을 섭취하는 일과로 밥 먹고, 잠 자듯이 일상 속에서 확보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겠구나. 사실 나는, 우리는 TV보고, 인터넷에서 가쉽기사 읽을 시간은 있는데 좋은 책을 읽을 시간은 내지 않는다. 이런 것처럼 양질의 것을 생활 속에서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만해도 인터넷 웹써핑 하는 시간을 줄이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책과, 고전과 친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읽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129 운다고 슬픔이 끝나지는 않으리니, 차라리 한바탕 축제로 이 슬픔을 다스릴 일이다. 바로 위와 같은 구절이 아르킬로코스의 진면목이다.

슬플 때 신나게 놀고 나도 쌓인 감정이 해소가 되나? 이 고대 그리스 시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133 아르킬르코스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사랑에 잘 빠지면서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상처 받기 쉬운 성격이면서 상처도 잘 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재주는 사랑과 증오에 걸쳐 있으면서 받아들이기는 잘 하지만 내치는 데도 주저 없었다. 게다가 한 번 증오로 방향을 틀자, 그의 에너지는 더욱 강하게 폭발했다.

그는 서자였다. 그런데 그리스 시대에는 커다란 차별은 없었다고 읽은 것 같은데? 사랑한 만큼을 분노와 증오로 되갚는 얇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 듯 하다. 바위처럼, 무쇠솥처럼 천천히 은은히 오래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는 얇은 사람인가 보다. 김형경씨 마음풍경에서인가 분노는 되오지 않는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고 읽은 듯. 나는 뜬금없이 이 시인을 위해 축원한다. 그가 그가 반석같은 여자를 만났기를, 또는 변하지 않는 어떤 반석 같은 것을 가졌기를. 근데 그는 시를 통해 그런 걸 써내는 사람이었으니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보다 나을 듯. 무엇이든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기 때문에 상처주기 쉬운 성격의 주인을 구원하리라. 그는 시로 승화해냈다.

 

나는 파랑색으로 쓰면서 문득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화를 낸다고 해석한 사람에게 돌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던지지 않았지만 이전에 다른 상황에서는 던졌다. 여러 가지를 깼다. 하지만 아직 사람에게 직접 공격을 한 적은 없다. 화가 나게 한, 또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를 향해 화풀이를 하려고 한다. 그게 안 풀어지면 불특정 누군가를 향해서라도 하고 싶어한다. 총기사고, 대구지하철 사고도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얇은 마음, 애착형성기, 돌봄 부족그뒷배경을 생각해보면 사회가 만들어낸 것일거다. 그런데 가장 보호막, 안전망을 갖지 못한 이들이 또 다 뒤집어쓴다. 커다랗게 이렇게 이해는 한다. 내가, 또는 내 가족이 특정 피해를 입었다면 그러지는 못하겠지.      

 

137 아르킬로코스의 독설은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는다게다가 아르킬로코스의 독설은 잔인하다. 그래서 적에게 주는 최선의 선물 그것은 죽음이라는 선언은 오히려 평범한 저주로 들릴 지경이다. 

 

138 아르킬로코스가 할 줄 아는 게 바로 상처 준 자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이다. 아르킬로코스는 그런 싸움을 하고 있다. 싸움의 와중에서 여린 아르킬로코스도 당연히 상처를 입겠지만 말이다.

 

140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의 시구들을 가득 채운 그 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명예는 봉건사회의 덕목이고, 우매한 대중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명예롭기 보다는 행복해야 한다. 즐거워야 한다. 그게 바로 아르킬로코스의 철학이다.

 

147 아르킬로코스를 기점으로 서사시가 막을 내리고, 참여시가 등장하게 된다.

 

열번째 뮤즈 삽포

 

157 삽포의 시는 솔직하고 과학적이다. 삽포는 사실만 적는다. 감정이 주가 아니다. 감정이 남긴 결과를 보고하는게 주다. 무슨 연애시처럼 형용사가 난무하지 않는다. 명사와 동사만 쓴다. 그걸로 모든 상처를 표현하고 모든 사건을 보고한다. 삽포의 시에는 슬픔, 괴로움, 그리움 같은 고상한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질투나 증오, 번민 같은 것은 삽포에게 전혀 힘든 게 아니다. 문제는 육체적 고통이다.

감정에 대한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것이 내 몸과 생활, 상황에 끼친 영향만을 가지고 뭐라뭐라 해보는 것 재미있겠다. 삽포의 시를, 또는 삽포처럼 시를 쓰는 여성시를 읽고 싶네. 누가 있지? 내가 아는 사람은 문태준, 김선우씨

 

171 나무와 동물과 자연과 바람을 삽포처럼 절묘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하는 재주는 없었다.

나무와 동물과 자연과 바람을 좋아한다니 나도 어쩌면 이 시인을 좋아할런지도 모른다. 나도 이걸 몹시 좋아하니까

 

175 삽포를 끊임없이 들끓게 한 건 결국 젊음과 꽃망울이었던 것 같다.

 

솔론과 민주주의

 

181 그리스 문명이 이처럼 동쪽 끝 혹은 서쪽 끝에서 주로 시작한 이유는 그곳이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196 피를 보는 싸움 대신 타협안이 제기되었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 조정자를 한 명 지정해 그가 정치 경제 사회 적 개혁을 주도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솔론이었다. 평민들은 솔론의 정의감을 믿었고 귀족들은 솔론이 귀족출신이라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믿음은 배반당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었던 것이다.

 

203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노예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노예와 여자

 

213 문명국가로 보이는 그리스도 실상은 노예제 사회였다.

 

218 농업은 노예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분야이며 초창기 그리스 사회는 잘 알다시피 농업사회였다. 따라서 노예제도가 뿌리내릴 만한 토양이 아니었다. 반면에 산업이 발달하면 농예 또는 기계 둘 중 하나가 필요해진다

 

226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 것은 노예뿐만이 아니었다. 노예 바로 옆에 서서 노예만큼이나 대접받지 못한 존재, 그게 바로 여자였다.

 

232 문제는 어떻게 해서 여성의 지위가 이처럼 낮아졌는가 하는 점이다….다른 건 몰라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언젠가 여성들이 한 번 크게 진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계사회의 지도자라는 지위에서 떨어져 그리스 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비천한 인간이 된 것이다.

언제 크게 진 적이 있을까? 모계사회가 결정적으로 패배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제레미 테일러의 시에서는 과학적인 어떤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à 요 부분을 더 알아보도록 하시오!!!

 

결국 권리와 힘의 바탕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서 근본적으로는 출발한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안토니아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그 많은 식구들을 품어안을 수 있는 근본 힘은 그녀가 장원을 소유했고, 그걸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서였다. 현경이 히말라야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 용기때문이 아니라 유사시에 거기로 헬리콥터를 불러올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앨리스 워커와 함께 쓴 책 기사에서 읽은 듯 하다. 내가 직장을 다니며 내 밥을 버는 여자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악착같이 온전한 품값을 받는 상일꾼의 정체성을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 우위에 두던 내 어머니의 영향이다. 나는 누군가의 아내라는 정체성이 없다. 헤라는 내 안에서 가장 자리가 적어서 후천적으로 양육해내야 한다. 어머니, 모성 부분은 직업의 특성상 가지고 있고 표현하고 있다.

 

235 아테나이 민주주의는 허술한 민주주의다. 성인 남성의 민주주의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40만명 가운데 시민은 고작 3만명이었다. 바람 한 번 몰아치며 모조리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는 숫자다. 혹시라도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한다면, 그 발명품이란 어린아이의 입안에 난 이와 같다. 반드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였다. 곧이어 그리스는 죽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나는 노예에 대해 읽으면서 엉뚱하지만 보조선생님들에 대해 생각했다. 비정규직, 그리고 대개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들이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구나, 내가 그분을 부리며 지금 뻐기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본다. 나는 지각하고 나는 딴 짓 해도 되고, 그 분들은 안 그래야 되고..뭐 이런게 있지 않은지.

 

신과 인간

 

248 지하세계에 가면 더 행복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확실히 그리스 전통 종교의 문법이 아니다.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교가 태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엘레우시스 교단은 원래 한 가족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점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와 같은 개방성이 엘레우시스 교단의 특징이다.

 

251 여괴 카립디스와 스퀼라를 보자. 카립디스는 지나는 배들을 모조리 삼키는 소용돌이고, 스퀼라는 턱 세 개와 죽음처럼 시커먼 이빨이 달린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다. 뱃사람들이 보기에 자연이란 그런 괴물들처럼 끔찍하고 파괴적인 그 무엇이다. 하지만 키르케나 세이렌에 오면 자연은 조금 더 복잡한 모습을 띤다. 이 두 상징은 자연이 인간 앞에 설치해놓은 덫과 같다.

자연이 가설해 놓은 덫, 나는 pms 때 출러렁출러덩 거리면서 내 안의 사이렌의 소리를 듣는다. 나의 오래된 깊은 곳을 찌르는 그 소리에 이끌려 정말 바다로 뛰어들 때가 여러 번 있다. 단기적인 죽음이지. 두문불출로 끝나고 사회적인 관계만을 내 손으로 다 잘라낸다. 이번 연구원 6월 오프에서 스킬라로 붙기로 했다. 카립디스는 연애나 사랑, 결혼 같은 것이고, 배회하는 바위들은 이분법적인 사고였지.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한 일상인 사랑과 연애, 결혼이 내게는 카립디스처럼 느껴지다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이건 처해진 조건이다. 조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서 어떻게 해 나갈건지를 연구하는 게 낫다.

 

시즌 1 : 10가지 이 사람을 계속 만날건지를 결정하는 시간, 함께 좋아할 수 있는 활동, 놀기

시즌 2 : 7가지 이 사람과 결혼을 하면 어떨까 살펴보는 시간  

만약 시즌3를 하게 된다면 그 때는 실질적인 결혼 준비를 하게 되겠지.

 

255 아폴론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은 축제를 좋아한다.

내 삶에도 축제의 시간이 정기적으로 들어와 주면 좋겠다. 아직까지 그런게 없다. 내겐.

 

262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이후에 헤파이스토스가 불의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지키는 불은 번갯불이 아니었다. 부엌이나 대장간에서 쓰는 생산도구로서의 불이었다.

 

263 일하는 사람들의 축제 그리스 말로는 칼케이아 즉 대장장이들의 축제다. 하지만 단순히 대장장이들만 모인 것은 아니었다. 도공들도 참여했으며, 축제 전체를 지휘한 것은 다름 아닌 아테네였다. 아테네가 바로 일하는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투스가 아테네를 사랑했지. 거꾸로 아테네는 헤파이스투스에게 끌리나? 헤파이스투스는 내게 매우 매력적인 남신이다.

 

264 도공들이 만들어 불렀다는 노래는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기도로 시작한다. 화덕을 보호해주시고, 그릇이 제대로 구워지게 해주시고, 유약이 빛을 잃지 않게 해주시고

 

264 종교도 이쯤 되면 합리적이고, 생산적이며, 구체적이다.

 

265 헤파이스토스나 아테네와 비슷하게 인기가 있었던 신이 바로 돌무더기에서 진화한 헤르메스다.

 

266 모든 신이 다 의인화된 것은 아니다. 인간들은 영악한 존재라서 신들을 제멋대로 의인화해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제우스 혹은 아폴론을 그런 목적으로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의인화되지 않고 높은 곳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는 신이 있다. 지배계급이 숨겨놓은 건지, 인간의 인성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바로 운명의 신, 모이라 여신이다. 이 신은 인간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반대한다. 모이라는 단 한 번도 인간이 되어본 적이 없다. 우주의 법이고, 보이지 않는 질서인 그 신은 요지부동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신들이 흩뜨려놓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나는 이 모이라가 불교에서 배운 인연과의 법칙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267 모이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성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전혀 추측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비극,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275 액션의 주인공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표현대로 불과 몇 척밖에 안되는 인간, 즉 영웅이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운명과 대적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길 수 없다. 비극의 구도는 그렇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전사이고 우리의 대표자인 영웅이 있고, 반대편에는 그 영웅을 부수고 마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우리 편인 영웅은 성자나 성인이 아니다. 옳은 일을 위해 싸우지만 그 영웅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실수도 하고 감정에 흔들리고 경솔하며 폭력적이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속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어려운 줄 아는데도 도전하는 이에 대해 갖는 영웅으로서의 존경. 나는 언제 이런 걸 느끼지?

-à>좀 더 생각해 보자!!!

 1.엄지공주 그녀가 시험관 시술을 해서 자신의 유전병을 갖지 않은 아기를 낳았을 때 스스로 기르지도 못해서 친정 어머니한테 맡겨 기르면서, 앉아서 자지도 못하고, 아기가 자라면서 갈비뼈가 부러져가면서까지 굳이 그 어려운 도전을 해야 합니까?’ 하면서도 존경하는 마음, 응원하는 박수를 보냈다. 2.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원칙대로 하겠다는 이들을 볼 때-선거법을 위반하지 않고 선거법대로 한 후 떨어지겠다는 국회의원 3. 일상 속에서는 계속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시도하는 이들 : 새벽기도, 달리기  

 

275 한 비평가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비극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즉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 주인공의 액션을 내 액션으로 혼동하는 것이 비극이다.

 

276 싸움은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어려워도 불가능해도 싸울 것이며, 아테나이 시민들도 우리도 주인공 편에 서 있을 것이다.

 

278 정치적 평등을 위하여 사회정의를 위하여 오랜 세월 싸워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 비극은 관객들과 코드가 맞는다. 영웅이 운명과 대적하는 얘기가 대중들의 입맛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282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하늘의 권좌를 차지하려고 했을 때 그를 도운 공신이다. 제우스는 지금 공신을 내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제우스의 음모는 인간이라는 족속을 몰살하는 데까지 미쳤다.

 

285 아이스퀼로스가 읽은 신화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건네준 신, 그 이상이다. 그는 인간의 창의적인 정신을 대표한다. 기술과 과학과 발명을 통해 자연에 대적하는 인간이 바로 프로메테우스다….즉 지금 프로메테우스가 벌이는 싸움은 프로메테우스의 싸움이기보다는 인간의 싸움이다. 인간이 제우스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몰살시키고자 하는 자연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인간은 집을 지었고, 동물을 길들였고, 쇠를 만들었고, 천문학과 수학, 의학, 문자 등을 발명했다.

프로메테우스 그 비극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앙드레 버나드의 책을 읽은 후로 그리스비극이 더 사랑스러워졌다. 신곡을 3번 읽기로 할 지 그리스비극을 3번 읽기로 할 지 선택하자. 신곡을 놓치는 않겠지. 왜냐면 내게는 rose maria sister를 내 모닝페이지에서 내 얘기를 들어주는 인물로 상정하는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좀 있다. 사실 나는 그리스 비극 쪽이 훨씬 땡긴다. 하지만 게다가 이 책 <그리스인 이야기>를 여러 번 읽어서 내 안으로 흡수하게 되면 여러가지로 엄청 즐거울 것 같다. 그만큼 앙드레 버나드씨의 문체는 발랄하다. 가볍다. 나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으다. ! 그러자면 엄청 많이 읽어야겠네. 많이 읽는다고 이렇게 발랄가볍 통쾌한 시야를 갖는 건 아닌 듯. 그의 삶이 이랬지 않았을까? 그의 삶에 대해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좋은 책을 썼는데. 1888년에 태어나 1959년에 돌아간 스위스 사람, 앙드레 보나르. 울 할머니는 1926년 생이었다. 내가 만난 최고로 나이든 분은 우리 증조할머니셨는데 증조할머니가 태어난 즈음인듯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우리 나라가 구한말의 격동기를 겪을 때 할아버지시네. 오 앙드레 할아버지! (콧소리 섞어서 : , 글로만 애교를 부릴 수 있다. 글로 배운 애교)   

 

285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증오의 제물이라면 이오는 제우스의 사랑의 제물이다. 그런 이오를 보면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288 제우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분노를 거둠과 동시에 정의를 구현한 것이다. 반면에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대로 제우스 신에 대한 지나친 불손을 거두고 신다운 신으로 복귀한 제우스 밑으로 들어감으로써 제우스를 만족시킨다. 두 주인공 모두 자칫 세상의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충동을 거둠으로써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3천년 동안 신은 이렇게 변했다.

 

291 메넬라오스의 바람 난 아내를 데려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트로이아 전쟁에 나가면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거기에 딸의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그런 남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10년간 복수의 칼을 갈았다.

나도 트로이전쟁을 메넬라오스의 바람난 아내를 데려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미친 전쟁이라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런 사적인 남녀관계에 저런 많은 이들의 귀한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 오쟁이진 남편하고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결국 딸을 두고 애인을 따라 간 여자 둘이서 책임지면 되는 일이다. 대단히 분개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아가멤논의 관점이 내게도 있는 것 같다. 뭐가 중요한 지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292 그는 크리아모스의 딸이자 무녀인 캇산드라를 데리고 와서는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잘 돌봐주라고 말했다. 자신보다 더 예쁜 첩을 데리고 돌아온 남편에 대한 분노는 순식간에 극에 달했고 그녀는 주저없이 아가멤논을 살해하게 된다.

 

292 욕조에서 나온 아가멤논은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클뤼타임네스트라는 그런 남편을 도끼로 살해했다. 아가멤논은 욕조에 쓰러졌다. 욕조가 피로 가득 물들었다

, 이 장면을 상상한다. 공포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다.

 

294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가멤논을 대치시킨 것은 신의 작품이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에 아가멤논에 대한 반감이 자라왔다. 신들의 눈에 아가멤논은 죽어 없어져야 할 인간이었고, 클뤼타임네스트라는 그 역사에 동원된 수단에 불과하다. 쉽게 말하면 아가멤논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그 운명이란 조상 대대로 쌓아온 잘못에 대해 아가멤논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가멤논이 속한 아트레우스 집안의 죄를 아가멤논이 감당해야 했고, 게다가 그 스스로도 사람을 죽이는 우를 범했으므로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아가멤논은 간통과 동족살해라는 더러운 내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이스퀼로스 생각으로는 위 중 누구도 나의 죄만 지고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의 죄, 내가 속한 공동체의 죄도 지고 가야했다. 쉽게 말하면 위도 공범이다.

 

295 <아가멤논>의 제 1부에 나오는 합창단은 여러 번 이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즉 신이 여러 번 아가멤논에게 운명을 피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아가멤논의 목숨과 영혼은 무사할 수 있었다. …아가멤논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일이다. 신탁이 그렇게 지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시험이었다. 장군으로서의 영예나 야망보다도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높게 여기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었다. 아가멤논은 시민들을 그런 전쟁에 내몰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스 시민들이 바람난 왕비때문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이 해석 부분에 눈이 번쩍 뜨인다. 누구지? <이피게네이아> 소설을 쓴 이는? 괴테든가, 단테든가. 읽어보고 싶다. 그거랑 <이탈리아 여행>이랑

 

297 이피게네이아가 흘린 피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도 아가멤논은 계속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그에 대해서도 배상을 할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아가멤논에 대한 원한을 품은 채 그의 귀환을 기다렸다. 어린 자식들을 잃은 어민의 슬픔이 신의 분노와 합쳐져 아가멤논 위로 떨어진 것이다.

 

300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궁 안에 있었던 하인의 입으로 왕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전하는 식의 진부함은 아이스퀼로스의 말투가 아니다. 대신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사건 자체를 생생하게 예견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캇산드라다. 그녀는 아가멤논과 누구보다 단단히 연결된 여인으로 아가멤논에게 닥쳐오는 운명을 예감하는 역으로는 제격이었다. 마차에 앉은 채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던 캇산드라가 갑자기 정신줄을 놓는다. 미친다는 말이다. 그러자 예언의 신 아폴론이 캇산드라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장차 일어날 아가멤논의 죽음과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게 해준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가지 장면이 보인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보이고, 과거에 일어났던 일, 즉 아트레우스 집안에서 벌어진 일도 보인다.

  

306 동시에 또 다른 조치가 내려진다. 이제부터 아트레우스 가족 안에서 일어난 범죄와 같은 사건은 개인이 직접 복수할 것이 아니라, 법정에 회부되도록 한 것이다. 아테네 여신이 주재하는 법원은 구성원들의 양심에 따라 유무죄를 가리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운명은 정의로 바뀌었다.

 

307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마지막에 이르면 신들의 잔인한 속성들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운명의 신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정의 운운하는 것이 민망한 일이겠지만 결국은 좀 더 선량한 속성을 띠게 된다. 즉 운명 대신 섭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307  아이스퀼로스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첨예한 싸움을 과감하게 건드린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아이스퀼로스는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들과 인간이 결국 조화 가운데 살아갈 거라는 믿음이다.

 

시민 페리클레스

 

311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펠리클레스의 시대가 있었다. 한 시대에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312 페리클레스에게는 네 가지 장점이 있었다. 그 장점들이 한 사람에게 집중됨으로써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우선 페리클레스는 머리가 좋다,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 예측 혹은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번째로 말을 잘한다. 남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페리클레스는 의회에서 연설을 할 때 늘 왕관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세번째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페리클레스는 사심이 없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하도록 설득하는 능력이 있으며 더구나 사심까지 없다면 이 정치가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313 지능과 웅변, 애국심, 성실성, 결정적으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를 잘 이해하고 있고, 아테나이가 필요한 게 무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사분오열된 아테나이, 더 나아가 모든 그리스 도시들에 공통의 목표를 설정해주고 단결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펠리클레스의 힘이다. 투퀴디데스의 글을 보면 페리클레스는 처음부터 아테나이가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하는 것 같다. 페리클레서가 진정으로 원한 바는 아테나이가 그리스의 중심 그리스의 심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30년 동안 아테나이를 중심에 세웠다. 조형예술을 발전시킨 것도 그리스 민족의 심장에 생명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아테나이를 그리스 자유정신의 메카로 세우고자 했다.

, 솔론 때도 그랬고 페리클레스 때도 그랬고 아테나이, 또는 그리스 문명은 이런 식으로 기획되고 계획적으로 건설된 거로구나. 감탄스럽다. 게다가 거기가 그렇게나 척박한 곳이었다니 더욱더 그러하다.

 

313 페리클레스는 갈래갈래 찢어진 그리스 사회를 아테나이 중심으로 모으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누구나 예견하지만 제대로 대비할 수 없는 죽음 때문이었다. 죽음이 계획의 완성을 방해했다. 또 한편으로는 페리클레스가 가지고 있던 애국심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르게 읽었기 때문이다. 즉 아테나이 제국주의로 읽은 것이다.

 

322 페리클레스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고, 심지어 시들게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324 이론적으로 보면 동맹국끼리는 평등한 관계였다. 하지만 맹주인 아테나이는 너무 강했고, 다른 동맹국들은 힘이 없었다. 그런 불균형 상태로 인해 동맹국들 가운데는 탈퇴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가 생겼고 그때마다 아테나이는 가혹한 진압에 나섰다.

 

327 아테나이의 문제는 단지 조공국으로 전락한 나라들을 통치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페리클레스는 어느새 참주가 되어갔고, 아테나이 사람들 스스로가 참주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투퀴디데스의 책에 보면 페리클레스가 시민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테나이가 싸우는 이유는 누구 하나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배력을 잃게 되면 억눌렸던 적들이 나타납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편안히 물러서 있을 수 없습니다. ‘ 이것이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의 실체였다. 이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노예들 위에 세운 민주주의다. 또한 조공국의 재산과 땀과 피 위에 세운 민주주의였다.

 

335 파르테논은 수학공식 속에 갇힌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건축물이다. 수학이 아닌 감성을 건드리는 건축물이다. 파르테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살아 숨쉬는 질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파르테논에 쓰인 직선은 실제 직선이 아니다. 마치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직선들이 완벽한 직선이 아닌 것과 같다. 원도 마찬가지다. 고르지가 않다. 파르테논에 구현된 수학은 딱 떨어지는 수학이 아니다. 조금씩 빗나간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예술적으로 약간씩 뒤튼 것이며 그럼으로써 각 면들이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파르테논을 살아있는 건축물로 만든 힘은 바로 이 비틀기에 있다.

 

336 게다가 천장을 떠받친 기둥의 크기도 다 제 각각이며 직각이 아니다. 기둥 사이의 거리도 모두 다르다. 도대체 이 건축물에는 어떤 것 하나 아귀가 맞는 것이 없다. 그게 오히려 건축물 전체에 안정감을 주고 역동성을 부여한다는 이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르테논은 한마디로 영원하다. 그것도 부동자세의 영원함이 아니라 움직임의 영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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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티고네의 약속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 11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로운 인간들의 교육이야말로 시인 본연의 임무였다. 비극은 원칙적으로 상당히 교육적인 장르다. 그렇다고 해서 비극이 현학적인 투로 잘난 척을 하는 경우는 없다. 합창단의 노래나 합창대장의 설명 또는 인물의 연설 보다는 행동의 재현을 통해서 비극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13

 

장애물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대다수 인간들의 척후를 자처하면서 스스로를 뛰어넘으려는 영웅은 인류의 수호신이자 인도자다. 영웅의  행동 덕분에 인류의 한계가 드러난다. 하지만 정탐된 한계는 더 이상 한계가 될 수 없다. – 14

 

일단 음속의 벽을 넘어선 영웅 앞에는 또 다른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연속되는 시련을 통해서 인간 조건이라고 하는 좁디좁은 감옥은 차츰 넓어질 것이다. – 16

 

크레온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다. 시신을 묻은 안티고네는 이제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아름다운 범죄 후에 찾아오는..아름다운 죽음이 될 것이다. – 17

 

소모적이지만 매우 풍성한 장면이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함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소포클레스가 비슷한 갈등 속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인물을 창조내하가는 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두 자매가 전염성이 강한 사랑이라는 덕목을 극명한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 19

 

다시금 사랑이 전염성을 행사하려는 판이다. – 19

 

하이몬은 이름값을 하는 남자에게 어울릴 법한 품위 있는 언어, 즉 감정의 언어가 아닌 법을 중시하는 이성의 언어로 말한다. 그는 아버지 크레온 왕에게 신중하면서도 정중하게 말한다. – 20

 

고대의 시인은 감상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거부한다. 그러기는커녕 아버지 앞에 선 하이몬의 입에서 행여 사랑에 대한 암시가 한마디라도 튀어나올가봐 노심초사한다. 하이몬이 안티고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에게 공동체의 이익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남자라면, 그런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그는 자신의 열정을 자제하고 이성의 소리 만을 입밖으로 토해낸다. – 20

 

한편 크레온 왕의 분노는 그 자신이 불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알려줄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집착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에 대한 집착, 아들은 언제까지고 아버지의 소유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식의 부성애는 그를 괴롭힌다. – 21

 

안티고네는 사형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형벌을 명한다. 산 채로 동굴 속에 가두라는 것이다. – 21

 

오직 불타는 듯한 하이몬의 열기만이 우리에게 안티고네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하이몬은 사랑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여인과 정의, 신들에 대한 충직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전염성, 세상과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확인시켜준다. . 에로스 – 22

 

비극에 으레 등장하는 주제, 즉 삶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죽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라는 인물을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5

 

동굴에서 자신의 베일로 목을 맨 안티고네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순간, 이렇게 공포가 첩첩으로 쌓인 바로 그 순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환희가 우리를 휘감는다. 안티고네가 우리 안에서 살아나면서 밝은 빛을 발한다. – 27

 

이제는 이해하는 일만 남았다.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건 반드시 지성만이 지니는 강박관념이 아니다. 오장육부까지 심하게 요동치는 우리의 감수성 또한 이 비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라야 하겠다고 아우성친다. 시인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라고 우리를 닥달한다. 안티고네는 가치관의 문제를 제기한다. – 27

 

29.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비수를 쥐고 싸운다. 어째서 두 사람의 대결은 그토록 광폭해져야만 하는가? 그들만큼 다르면서 동시에 닮은 사람이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성격을 지닌 정반대의 영혼, 타협할 줄 모르는 결연한 의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투지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불관용과 가차없음으로 무장한 의지

 

29. 안티고네는 타협할 줄 모르며 잔인하고 꾸밈없다. 또한 아버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두 눈을 찌를 정도로 지독했던 것처럼 딸 또한 스스로 목을 맬 정도로 지독하며, 두 사람 모두 남에게도 지독하다.

 

30.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각자가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충절심이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만큼이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다.

 

33. 안티고네의 침묵은 오로지 그녀가 오빠의 불행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며, 그녀의 예민한 몸에서 나오는 모든 힘을 오직 형제애를 위해 쏟 아붓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안티고네는 오로지 형제의 우애만을 고집한다. 폴뤼네이케스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그녀의 관심을 돌려놓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감정은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아니 적어도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밀어넣는다.

 

33.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를 사랑하며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란 것이 자신의 즐거움과 명예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의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이익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사랑일지는 모르나 어쨎든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사랑한다.

 

38. 안티고네가 자신이 오빠를 위해서 한 일은 남편을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목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안티고네에 따르면 오빠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여기엔 그저 심적인 궤변 외에 다른 것이라고는 없다. 영혼이 제일 먼저 끌리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의례적인 시도 (그리스 정신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시도)일 분이다. 상궤를 벗어난 이 같은 언어에서 안티고네를 방황하게 만들고 유일한 사랑의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열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되었다. 그런데 그냥 그녀에게는 이 사랑이 우선순위가 있는 거다. 흔히 비극적인 사연을 공유하는 형제들이 그러하듯

 

39 “나는 증오를 나누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나는 태어났다고 안티고네는 말한다. 이는 곧 이것이 나의 천성이다. 나의 존재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태어났는데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것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 사랑을 통한 교감 속에서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다.

 

41. 안티고네에게 모든 것은 사랑이거나 사랑이 된다. 반면 크레온에게 모든 것은 이기심이다. 나는 이 말을 고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이기심 말이다.

 

42 크레온에게 사랑이란 남녀간의 성관계를 제외하면 이성의 결여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그에게 아들의 약혼녀를 죽게 만들 참인지 물었을 때, 그가 어찌니 상스럽게 대답하는 지,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아이는 씨를 뿌릴 수 있는 다른 밭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오이렇듯 그는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며, 따라서 자신의 아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43. 크레온이라고 하는 인간은 자기 안에 고유한 진실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사랑에 저항하는 성격이 지니는 천성적인 불모성이 그가 지닌 진실함마저 불모로 만든다.

 

44. 오로지 자신의 권력, 그가 아는 유일한 대상인 권력, 그 권력이 자신에게 주는 강점만을 사랑했던(이른 과연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지는 모르겠지만) 크레온은 결국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아들, 아내, 권력, 그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44. 하지만 안티고네의 비장한 고독은 겉보기에만 외로울 뿐이다. 안티고네의 고독은 인간이라고 하는 모든 피조물이 생의 마지막 투쟁에서 보여주는 불가피한 고독이다. 그것은 영혼의 고독이 아니다. 안티고네는 이 순간 자신보다 먼저 죽은 이들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다. 사랑하는 오빠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안티고네를 완전한 신성과 하나가 되도록 이끈다. 반면 시인의 천재성이 탄생시킨 모든 고통받는 인물들, 그 인물들에게로 향하는 연민의 한가운데에서 크레온은 가장 참담한 고독을 맛보아야 한다.

 

45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기막힌 실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크레온을 시인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각인시킨다. 이는 준엄한 경고라기 보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친 형제를 향한 측은지심에 가깝다.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그리고 특히 팽행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마지막 순간에 크레온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그는 물론 가볍지 않은 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렇고 그런 몇몇 추상적인 원칙에 의거해서 그를 손가락질하기엔 그가 저지른 실수가 우리가 늘 저지르는 실수와 너무나 닮은 꼴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아니 자신의 위치에서 옳았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들도 그랬을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실수였다고 해야 할까? 이런 말을 나의 실수에 대해서만 적용을 해 주었으면 바라고 있다.

 

46 우리는 안티고네 이면서 동시에 크레온이며,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소포클레스의 천재성과 예술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그는 너무도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등장인물 각각의 삶에 동참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인물들이 우리 앞에 등장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동조할 수 밖에 없다.

 

48 행동과 저급함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경우를 우리는 인간 조건의 필수적인 요소, 우리를 가장 짓누르는 인간 본성의 일부로 파악한다. 우리는 안티고네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에 앞서서 크레온의 묵직한 흙으로 빚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저항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극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운 가운데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 작가가 예술적 기량과 애정을 가장 발휘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같은 통찰력있는 연민이 담긴 대목이다.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59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근사하고 말없는 조각상들을 찬찬히 살핀다. 조각상들이 무어라고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전시실을 옮겨 다니는 동안 관람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각상들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린 다는 말이 좋다. 다른 모든 것들에도 그런데

 

61 고대 조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은 석재 조각가가 아니라 청동 조각가들이었다.

 

61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에 이어진 세기들은 이들 청동 작품 원본들을 보관하기보다는 녹여서 종이나 화폐, 심지어 무기 같은 다른 물건들을 만드는 편을 선호했다. 그리스 조형예술에 대한 우리의 무지(회화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가 어느 정도인지 그로 인해 우리의 연구가 얼마나 제한 받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간략하게나마 이 같은 사전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63 기원전 8~9세기 무렵 예술가들은 대리석과 같이 단단한 석재도 무른 석재도 쓰지 않았다. 이들은 나무를 잘라 조각했다. 돌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조각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스인들은 말하자면 오랫동안 학습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점진적이고도 장기적인 교육이었다. 우선 예술가가 재현하고자 하는 현실에 눈을 맞추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첫번째 연장, 즉 손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64 예술가는 많은 시에서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표현된 신들에게 인간 남자와 여자의 형태를 부여했다. 이렇듯 신화는 단순히 그리스 예술의 병기창일 뿐 아니라 그리스 예술을 기른 젖줄이기도 했다.

 

74 고대 예술은 하나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법칙은 이집트 예술 전반에 나타나며 그리스 예술은 500년 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법칙에서 탈피했다.

 

75 어떻게 경망스럽게 신에게 걸으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이는 신이 누리는 지고한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움직임을 재현하는 데 따르는 기술적 어려움은 예술가가 자신이 재현하려는 신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경외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한 가지 덧붙이자면 솔직이 조각상이 걷지 않는다고 해서 뭔가가 부족하다거나 결여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권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넘치는 에너지로 한껏 고무된 신을 느낀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79 그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예술가의 선택이 낳은 결과다. 옷을 입은 여인상, 즉 코레에서 예술가의 관심사는 여인의 인체라기 보다 복합적인 주름 연구였던 것이다. 의복의 주름은 천의 종류가 무엇인지, 어떤 스타일의 화장을 했는지, 몸의 어느 부분에 주름이 놓이게 되는 지에 따라 그 형태가 무궁무진하다. 어쨎거나 주름의 역할은 옷을 가리면서 동시에 몸의 형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81 남자와 여자의 몸 그것은 신에 대한 가장 나은 재현, 신의 가장 정확한 이미지였다. 

 

82 이제 규칙을 도출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에게로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규칙이다. 이 세상에서 젊은 청년의 벗은 몸이나 곱게 수놓아진 천으로 만든 의복을 걸친 여자의 우아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것이 인간들이 신에게 바친 것이며, 인간들이 신을 보는 방식이었다. 신들이란 바로 이런 존재였다.

그렇구나. 아름다운 것을 바치는 거로구나.

 

 85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몸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석조 조각가의 창조력을 이끄는 이중의 방향타다. 여기에다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도 덧붙여야 한다. 인체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지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도 덧붙여야 한다. 인체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지식을 낱낱이 키워가는 조각가의 의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조각가는 인체를 재현함에 있어서 항상 어제보다 발전된 지식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야말로 조각가가 신에게 바치는 첫째가는 봉헌물이다. 조각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루어가는 발전을 아낌없이 신에게 바친 셈이다.

이것이 나와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이런 태도로 교사 일을 하면 무척 즐겁고 보람있을 것 같다.

 

90 황금률이란 나뭇잎 또는 인체(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같은 자연의 비율이나 형태에서 두루 발견되는 객관적인 법칙을 가리킨다. 이런 생각은 제법 흥미롭다.

 

98 프리즈에 새겨진 신들의 집합체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신은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네 여신 즉 불을 다루는 기술의 신과 근면의 여신으로 아테나이 시민들이 마음속으로 가장 소중하게 모시는 신이다.

 

103 페이디아스는 그의 조각상을 통해서 제우스의 대중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전지전능하고 호사스러운 신으로서의 이미지와 당시 소크라테스나 페리클레스가 가졌음직한 가장 지고한 이미지, 즉 섭리와 선의의 신으로서의 이미지를 결합하려고 했음에 틀림없다. 이 같은 지고한 이미지는 온화하고 부성애 넘치는 듯한 얼굴 표정에서 드러난다현재 고고학자들은 페이디아스가 제작한 제우스상이 턱수염을 그린 예수의 모습을 만들어낸 기독교 예술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고 보니 왼쪽의 사진이 내가 흔히 성화에서 보던 예수상과 닮았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구나. 그럼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심상 안에 여러 전통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겠구나.

 

과학의 탄생 :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109 하나의 문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몇 몇 기술, 그러니까 먹을 양식을 수집하는 단계에서 생산하는 단계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잉여 양식의 확보는 모든 문명 탄생의 필요조건이다.

문명 만이 그럴까? 사람에게도 그럴 듯 하다.

 

110 금속의 발견은 약탈 전쟁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농업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금속은 귀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찾아나설 가치가 있었다. 청동과 철은 뮈케나이 문명에서 금과 은이 그러햇듯이 오래도록 사치스러운 욕구만을 충족시켜주다가 한참 후에야 무기와 연장을 제작하느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111 신석기 시대에 이미 인류가 자랑할 만한 몇몇 발견이 이루어졌다. 농업의 발명, 금속의 발견, 짐승의 가축화 등이다. 특히 가축은 처음엔 고기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만 간주되다가 차츰 농업을 위한 수단으로 쓰임새가 확대되었다.

오늘날은 당연한 이런 것들을 이렇게 읽으니 새롭다.

116 얼핏 보아서는 아르킬로코스의 시와 이오니아의 쿠로스, 그리고 탈레스와 그의 제자들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사상 사이에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 발명품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험난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자유로운 지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자유란 사고의 자유만이 아니라 행동의 자유까지도 아우른다.

그리스가 험난한 지형,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이루어 가는 것들이 더 소중한 것인 이유. 오히려 좋은 여건에서보다 이런 여건에서 더 많은 정신이 개발되는 것 같다.

 

118 여행하는 동안 탈레스는 크로이소스의 군사 자문 공학자로 일하면서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는 또한 매우 사변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120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연구를 진행한 방식이었다. 별들을 관찰하거나 물을 연구할 때 탈레스는 결코 신이나 신화를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는 별이나 물을 순전히 물리적이며 물질적인 대상으로 여겼다. 현재 화학자라면 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질문에 물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형성된다고 대답한다. 물론 탈레스의 대답은 이와 다르다. 무지는 그에게 너무도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그 자신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적어도 신화를 끌어다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는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서 자연현상에 부응하며, 언젠가 실험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는 법칙을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답변했다.

그야말로 과학자의 자세다. 그런데 저 사람이 신화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임을 생각하면

 

135 데모크리토스의 저작은 대단히 방대했으며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해지는 저작은 단 한권도 없었다. 반면 플라톤은 역시 방대하지만 데모크리토스보다 더 방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저작을 남겼는데 모든 작품이 한 권도 빠짐없이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오히려 작자가 의심스러운 저작까지 끼어들어 원래보다 더 많은 작품이 전해질 정도다.

 

136 그 후로는 기독교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대 저작들에 대한 박해 (6,7,8세기까지 무려 3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가 유물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이 작가에 대해서는 특별히 가혹하게 자행되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기독교 교회는 반대로 관념론의 창시자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다. 심지어 그로부터 기독교 신학 체계의 상당 부분을 차용했다. 

교회중심은 유물론 배격, 관념론 존중의 영향으로 전해지지 못하게 되는 원인도 되었구나.

 

137 그리스의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데모크리토스 역시 타고난 여행가였다. 그러니 그가 인도에서 힌두교의 나체 고행자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거릴 일은 아니다….플라톤도 그보다 더 여행을 많이 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의 현자들은 세계를 누비고 다녔으며 방랑 여행으로부터 많은 것을 생산해냈다. 소크라테스만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나름대로 이 점을 내세웠다.

 

139 졸리오 퀴리(프랑스의 핵물리학자-옮긴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의 내부에는 텅 빈 거대한 공간들이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의 크기를 감안할 때 이 같은 빈자리들은 항성 간의 공백에 비교할 수 있다

 

143 데모크리토스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 특히 죽음과 대면해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신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이는 모든 가설에 대해 열려 있는 그의 과학적 정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146 데모크리토스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가의 명철함과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물질에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다. 바로 그로 인해 데모크리토스의 명성에 금이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업적임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신체와 영혼의 결합물인 우리를 우리 자신과 화해시킨 것이다.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 운명에 화답하기

 

151 과학과 철학만큼이나 비극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한 방편으로 제시된다.

 

151 소포클레스는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하 없어도 신을 믿는 그에게 신앙심은 명백한 도덕이나 운명의 모호함보다 언제나 우선이었다. 하나의 신화가 유난히 장수했던 시인의 말년에 동반자 역할을 했는데 바로 오이디푸스의 신화였다. 다른 어느 신화보다도 끔찍하고 인간의 정의감은 물론 신앙심까지도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는 신화였다. 소포클레스는 15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두 번이나 이 신화와 싸움을 벌렸다. 기원전 420년에 처음으로 <오이디푸스왕>을 썼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15년 후인 기원전 405년 아흔 살의 나이에 그는 마치 젊은 시절 자신이 썼던 결말에 대해 주저하기라도 하는 듯 같은 이야기를 다른 형식으로 쓴 <콜로노스 오이디푸스>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신들은 과연 죄 없는 인간을 벌할 수 있는 지 없는 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마음이 발동했던 것 같다.

이러기도 참 어렵겠다. 70대 노장이 같은 주제에 천착해서 아흔에 다시 쓰다니. 내가 그 비극을 읽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164 진실은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장님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167 비극적인 울음을 운다는 것은 숙고하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머리로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극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169 소포클레스는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아폴론의 신탁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다. ..

 

169 의도만으로 모든 행위를 판단한다면 오이디푸스는 부친 살해, 근친상간, 두 가지 모두에서 결백하다.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인가? 잘못을 한 건 신이다. 신만이 어떤 합당한 이유도 없이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획책했으며 그 결과 범죄라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

 

171 분노 속에서 안주하는 것을 방해하는 첫번째 장벽은 합창단이다. 우리는 고대 비극에서 합창의 서정성이 지니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물질이 형태와 연결되듯 행위와 연결된 서정성은 극의 의미를 드러낸다. 비극 <오이디푸스왕>에서 신들을 향한 우리의 분노를 고조시키는 각각의 삽화가 마무리될 때마다 합창단은 신을 향한 흔들림없는 믿음을 고백하는 노래를 부른다. 또한 도시의 수호자인 왕을 향한 합창단의 충성심과 애정에도 변함이 없다.

 

172 합창단 다음으로 우리를 적개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또 한 명이 있으니 바로 이오카스테 왕비다. 이오카스테는 상당히 이상한 인물이다. 이 여자는 부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왕비는 신탁을 부정하고 자신이 이하지 못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대놓고 부정한다. 왕비를 스스로를 경륜이 많은 자라고 믿지만 사실은 편협하고 희의적인 정신의 소유자다….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을 맨다. 이오카스테의 자살은 우리에게 참담한 공포를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흘릴 눈물이 없다.

영화 <그을린 사랑>에는 레바논 내전 즈음, 기독교와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분쟁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헤매는 여자 아스완이 나온다. 그녀는 반군이 되어 기독교지도자를 암살한 후 감옥에서 15년 감금당했을 때 고문 기술자에게 강간당해 쌍둥이를 낳는다. 그 아이들이 어머니 사후 어머니의 유언장에 따라 어머니의 고향과 어머니의 아들, 그리고 어머니를 강간했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줄거리다. 아스완이 이오카스테 자리에 있다. 그러나 아스완은 죽지 않고 쌍둥이 아이들을 제 3국으로 망명해 잘 키워냈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엘렉트라콤플렉스가 이성부모에 대해 갖는 생애 초기 (원시적) 사랑의 방식이므로 인류에서는 이 주제가 내내 반복될 수 밖에 없겠다.

 

나는 궁금했다. 친족 성폭력을 피해에 의해 친아버지의 아이를 출산한 그 소녀들의 아기들, 손쓸수 없이 늦게 알게 되어(이 때의 손쓰기는 합법적 낙태) 태어난 그 아이들은 바로 외국으로 입양되었다. 좋은 부모를 만나게 되길 소원한다. 아무런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입양된 그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 지 궁금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라 부모 대의 어떤 일의 결과로 죄를 갚게 된 오이디푸스왕처럼 그 아이들도 어떤 심리적, 육체적 손상이 있을까?

 

사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목을 맨다. 살아있는 게 죽기보다 더 어려웠을 거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또 다른 그녀를 존경한다. 그녀가 승리한 여인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왠만한 여자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뎌냈다. 그녀는 자살을 하지 않고, 그 가난하고 치욕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중요한 것을 놓지 않으며 살아 있었다. 그녀보다 강인한 인격이 그 주변에는 없었다. 자발적 희생에는 남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초인적인 의지나 고요함으로 견디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녀는 진정 그러하였다.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을 본받고 싶다.            

 

173 우리가 신들에 대해 마냥 분개할 수 없도록 만드는 예상 밖의 마지막 장벽이 세워진다. 바로 오이디푸스가 신들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74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신들의 행위에 대한 그의 전적인 존중, 자신을 시련 속에 던져 넣은 신들의 권위에 대한 그의 전적인 복종은 그가 자신의 운명이 가지는 의미를 간파했으며, 우리에게도 그걸 찾아보라고 권유하는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당자사인 오이디푸스가 분통해하지 않는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분기탱천한단 말인가?

 

179 두 눈을 찌르는 행위는 그 엄청난 결과로 인해 우리를 극의 가장 심오한 의미, 의미의 정점으로 이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무대에서 드러나는 순간 어째서 관객들은 공포로 경악하는 대신 희열로 전율하게 되는가? 피투성이가 된 두 눈에서 우리는 공포로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오이디푸스가 운명에게 전하는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장님이 되는 쪽을 택했다. 그는 말한다. “아폴론이 나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나는 낸 두 손으로 직접 내 눈을 찔렀다.” 운명이 그에게 마련해놓은 벌을 그는 스스로 요구했고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그가 한 최초의 몸짓이었다.

 

180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힘들이 존재하며 그 힘들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하는 객관적인 사실의 인정에 근거하고 있다.

 

181 오이디푸스는 장님으로 사는 편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깨달음, 즉 불행을 통해 신의 행위에서 얻은 깨달음에 부합시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신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의 뜻에 보내는 이 같은 지지, 성찰을 통한 용기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이 지지는 어느 정도의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인 사랑. 여기서의 사랑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현실과 그 현실이 부과하는 조건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살아있는 피조물이면 모두가 느끼는 삶의 향한 도약을 뜻한다.

 

186 <오이디푸스왕>은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운명이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자신의 위대함과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2 오이디푸스는 세 가지 덕분에 시련 속에서도 버텨왔노라고 딸에게 말한다. 세 가지 중 첫째는 인내다. 그는 사랑하다의 의미도 담고 있는 이 용어를 선택하여 제일 앞에 두었다. 두 번째로는 체념을 꼽는다. 이 체념 또한 존재와 사물들에 대한 사랑과 혼동될 수 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이면서 가장 효과적인 덕목은 영혼의 단호함, 즉 불행마저도 어쩌지 못하는 자연적인 고귀함, 관대함이다.

아이에게 이 세 가지 덕목을 유전시켜주려면 어찔할 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 아이들은 같이 살면서 보고 배운다. 따라 배운다.   

 

192 노인은 몸을 떤다. 행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신탁에서 그의 죽음의 장소로 지목된 곳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그에게 휴식을 가져다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193 그의 성스러운 몸은 죽은 후에도 이 에우메니데스의 숲에 머물러야 한다. 신들의 저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수하게 된 치욕으로 더럽혀진, 불순한 동시에 신성한(원시부족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것이다) 육신은 이제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될 터이다. 그의 육신은 마치 성유골을 보관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축복의 원천이 될 것이었다.

 

198 처음 쓰인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모든 책임을 진다. 그런데 나중에 쓰인 작품에서는 시종일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200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개인적인 잘못이라기 보다는 무지의 소치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는 모든 존재가 대면하게 마련인 삶의 법칙에 의해서 벌을 받았다.

 

201 오이디푸스가 영웅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은 그의 공적이나 덕목 등을 감안해서 오이디푸스 개인에게 내려진 영예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고통 받는 인간이기 때문에 내려진 영예다. 첫번째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는 완벽한 행위의 상징이었듯이, 콜로노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작품에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극한을 상징한다. 나는 오이디푸스가 겪는 아픔, 그의 고통의 목록을 줄줄이 늘어놓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203 오이디푸스는 신성한 숲에서 여신들에게 간청한다. “이제 나에게 삶의 종말을 허락해주십시오. 나의 존재에 결말을 허락해주십시오. 당신이 보시기에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면 말입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고통받는 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선한 하인처럼 말한다. 그는 말하자면 죽음이 주는 평화라고 하는 합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것이다.

 

205 오이디푸스의 죽음이 지니는 공적인 의미는 노인이 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가르침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오로지 테세우스 국가의 수반만이 자신의 죽음을 지켜볼 것이며 후계자들에게 오이디푸스가 털어놓는 비밀을 전달할 것이다. 이렇듯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이미 그 자신이나 그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했던 이들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이제 사적인 일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왕의 소관이다….이 죽음은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그를 경외하는 아테나이인들을 위해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나이와 그리스를 수호하는 일련의 영웅 집단에 합류했다.

조상신이 되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듯

 

판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216 이 시는 간략한 가운데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심오한 원천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 원천이란 다름 아닌 우아함의 여신(카리테스), 즉 세 미녀에 대한 사랑이다. …그가 언급한 덕목, 재능, 아름다움, 영예는 세 미녀로 대표되는 덕목들이다. “, 아글라이아(영예를 관장한다), 조화에 이끌리는 에우프로쉬네(지혜를 의미한다. 판다로스는 모든 지혜가 시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대 사랑의 노래를 전파하는 탈리아(아름다움과 젊음, 환희를 주관한다.)…이 처럼 축하해야 할 모든 요소를 세 미녀의 공으로 돌린다. 판다로스의 세계는 관능과 쾌락의 세계가 아니다. 아프로디테의 왕국이 아닌 것이다그의 왕국은 세 미녀의 왕국이었다.

 

전쟁보다 운동 경기가 관심

217 그만이 아니라 그리스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한다. 기원전 490년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480년과 479년에 페르시아 전쟁을 겪게 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자. 핀다로스는 그리스 민족의 역사에서 페르시아 전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한참 지난후에야 어렴풋이 이해했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그는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해에는 거의 서른 살이었고,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 때는 거의 마흔 살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적지 않은 작품들에서는 1차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아무런 반향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마라톤이라는 지명이 언급되기는 한다. 이 이름은 여러 번 등장하지만 이러저러한 선수가 거든 승리와 관련해서 언급될 뿐이다.

아하하하, 나는 이 시인 핀다로스가 좋아질라 한다. 모든 사람이 정치적이고 개념 있을 필요는 없다 싶으네. 제 생긴 꼴대로 살면 될 듯. 나도 내 생긴 꼴대로 편안히 살고 싶다.

 

218 핀다로스의 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운동 경기에서의 승리가 그에게는 적어도 전쟁 승리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19 운동선수들과 과거 영웅들의 찬미 전문가인 핀다로스가 그리스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재앙,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자유를 위한 혈전 속에서 무심하게 팔짱만 끼고 있었다는 건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일이다. 정말로 권투나 판크라티온 시합의 승리가 살라미스 해전 승리보다 그를 더 흥분시킨단 말인가? 하긴 필다로스도 후회와 회개의 기운이 감지되긴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살라미스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항상 거북함이 느껴진다…..그는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그 자유를 위해 싸운 자들 덕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간접적으로 암시할 뿐이다.

 

220 다른 회개의 구절들은 다루지 않겠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용감하게 싸운 아이기나인들을 찬미한 핀다로스는 아테나이가 그 중대한 몇 해 사이에 그리스 전체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가 받은 교육과 그의 재능으로는 학문적인 탐구의 장이며 철학의 장으로 변한 도시를 이해할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래도 괜찮구나. 시인이 모두 철학적이고 똑똑하지 않아도 인류의 중심과 연결되는 자신의 중심-을 가지면 시인이 되는 거로구나. 모두가 같을 필요는 없구나. 그러니까 어떤 시인의 시, 어떤 소설가의 글이 어렵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는 거구나. 그이는 스킵, 나는 내 맘에 와 닿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식으로 작품을 쓴 이를 읽어대면 되는거로구나. 뭐냐? 이 핀다로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 뜬금없는 결론은.   

 

220 핀다로스는 5세기 중엽까지도 철학에는 문외한이었고, 아마도 이것이 그가 아테나이에 친구를 만들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이오니아 학자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이 세상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있는가/ 일식 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은 핀다로스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동향 출신 시인인 헤로도토스와 아폴론 신을 섬기는 신앙에 의해 해결된 문제였다. 학자들이 의문을 던지는 현상들이란 신이 이룬 기적이었다. 그러니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도 의문을 품을 일도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 단순무식한 시인에게서 왜 이리 해방감을 느끼지? 똑똑해지지 않아도 된다. 나를 이렇게 만든 신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막 이러고 있다.

 

229 군주와 자신 사이에 신뢰를 토대로 한 친밀감을 쌓은 후에야 핀다로슨느 비로소 충고의 말을 건넨다.

 

230 핀다로스에게는 좀더 깊이 있는 겸손함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겸손함도 자부심도 신들이 인간에게 정해준 법칙을 인지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233 전지전을한 아버지 제우스 신은 폴뤼데우케스에게 어려운 선택을 요구했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투로 신이 운을 뗐다. “내가 너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겠다. 네가 죽음과 끔찍한 노화를 면하고 싶다면 나와 함께 올림포스에서 아테네, 무서운 창을 든 아레스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너는 그럴 권리가 있다. 만일 네가 죽음에 직면한 형제를 구하는 쪽을 원한다면 상반되는 너희 둘의 운명을 하나로 만들어라. 네 삶의 반은 지하에서 그와 더불어 살 것이며, 너와 더불어 그의 삶의 반은 하늘의 황금 궁전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폴뤼데우케스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생각을 거듭했다. 카스토르의 감긴 눈을 다시 뜨게 할 것이며 그의 활기찬 목소리를 다시 들을 것이다. 40행에 지나지 않는 이 신화의 아름다움을 어디에도 견줄 수 없다.

이 신화를 원본 그대로 읽어보고 싶다. 40행 이라면 전문을 인용하는 것도 좋았겠다. 이 책은 그런데 앙드레 보나르의 해석이 원본보다 더 길다.

 

 234 핀다로스는 비극적인 정서를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신들의 선의와 신성함을 말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 전체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희망하는 방향으로 경도되어 있다.

 

241 두 명의 핀다로스란 있을 수 없다. 믿고 희망하며 잊어버리고 지혜와 선의만으로 만족해하는 시인, 요컨데 신학자가 아닌 모순으로 가득한 시인이 있을 뿐이다. 그는 신학자가 아니라지만 신앙인임에 틀림없는 시인이었다.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는 날, 아무것도 알수 없는 날, 그래도 그는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신들은 적어도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45 고귀한 군주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최악의 잘못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다시 말해서 원숭이처럼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핀다로스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말한다. “너는 알게된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 원숭이는 아이들에게는 아름답다. 언제나 아름답지.” 이것은 말하자면 델포이의 주제인 너 자신을 알라의 도덕적 교훈 버전이다. “너는 알게 된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라는 핀다로스의 말을 가지고 괴테가 있는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 라는 멋진 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핀다로스는 자신에게로 돌아와 두번째 퓌티아제 송가를 자부심으로 가득한 말로 끝맺는다. 이 말은 아첨꾼들 (왕에게 원숭이 노릇 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시인에 대해서 지어내는 비방으로부터 시인 자신을 해방시켜 준다. 그들이 쏟아내는 비방이야 아무려나 상관없다. 핀다로스는 말한다. “나는 코르크나무처럼 씁쓸한 파도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그물 위로 떠다닌다.” 그는 솔직한 사람, 입바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핀다로스는 시모니데스와 박퀴릴데스를 겁내지 않는다. 이들은 고대인들에 따르면 그에게 피해를 주었고 그래서 여기서 지목되었다. 핀다로스는 딱 한 가지, 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두려워했다.

 

247 히레온에게 바친 첫번째 올림피아 송가에서 펠롭스가 영웅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 펠롭스는 기도한다. “커다란 위험이란 두근거리는 마음이 없는 투사는 원하지 않는 법이다. 어차피 죽어야 하는 목숨이라면 어째서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서 모든 모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무기력하게 늙어가기만을 기다린단 말이냐?”

 

248 어째서 이와 같은 열정과 확신이 가능할까? 그것은 시인의 봉사와 군주의 봉사가 모두 신을 위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253 마침 그는 자신의 저술에 히스토리아이 historiai’ 즉 당시로는 조사라는 의미만을 지녔던 단어로 제목을 붙였다. 헤로도토스 이전에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책이기도 하고 지리책이기도 한 자신의 저술에 조사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헤로도토스는 과학적인 조사의 토대 위에 이 두 학문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렇기는 해도 헤로도토스는 기질상 지리학적이나 민속학적인 연구에 먼저 끌렸으며 역사적 사실 연구는 그보다 뒷전이었다. 이 같은 특징은 그의 저술에서 시종일관 감지된다. 헤로도토스는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궁금했을까? 이 질문에는 주저하지 않고 대번에 정답을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254 각기 다른 나라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토록 애정을 쏟았다는 점에서 헤로도토스는 고대 인본주의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254 헤로도토스는 남의 말을 너무 쉽게 믿는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사실 그는 성실한 조사자다운 굳은 의지 못지 않게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도 겸비했다.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성질은 그의 호기심만큼이나 끝이 없으며,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255 헤로도토스의 역사서는 그러므로 과학적 개연성과 무비판적인 믿음이 뒤섞여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직하게 진실을 추구하며 진실을 찾아 세상 끝까지 따라다니느라 열심히 발품을 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진기한 일이라면 귀를 쫑긋 세우는 어린아이 같은 치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그가 찾는 진실이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진기한 성격을 띠기를 원했다.

 

260 지리학은 배고픔, 대부분의 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독한 기아에서 탄생했다. 고대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가장 활동적이었던 민족 중의 하나인 그리스 민족은 배고픔 때문에 비옥하지 못하고 경작이 어려우며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 땅을 박차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곡물 산지 세 곳은 스키타이(현재의 우크라이나),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다.

 

266 이처럼 다양한 예를 통하여 볼 때 그리고 당시는 메디아와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임을 상기할 때 내가 처음에 헤로도토스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대 도시 바빌론이 되었건 페르시아 문명의 도덕적 분위기나 기후가 되었던 여하튼 당시 그리스의 직접적인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놀라움이 되고 심지어 감탄이 되기도 한다. 이집트와 이집트가 지닌 진기함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오랜 애착과 깊은 관심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270 요컨대 점술의 진실은 다수결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286 이집트에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강이 있었다. 봄에 소나기가 퍼부을 때만 잠깐씩 물이 불어날 뿐, 여름 내내 반쯤은 말라붙는 실개천만 아는 그리스 출신에게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강 유역을 비옥하게 만들며 게다가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수원지의 비밀을 지닌 나일 강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헤로도토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으며 지적 허기에 대한 자극이었다. 그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291 “이집트에는 포이닉스라고 부르는 신성한 새가 있다. 나는 이 새를 그림으로만 보았다. 아주 드물게 보이는 새이며, 헬리우폴리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새는 500년 만에 한 번씩 그 나라에 나타나는데, 아비 새가 죽을 때다. 만일 이 새의 생김새가 그림과 닮았다면…” , 얼마나 헤로도토스의 신중함과 정직함을 잘 들어내는 대목인가? 그는 포이닉스를 그림으로만 보았으며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전설적인 새를 묘사하면서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실수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302 간략하게 말하자면 <힘포크라테스 전집>은 주로 세 부류의 의사들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이론에 치중하는 의사들, 즉 모험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철학자들 부류다. 두 번째는 이들의 대척점에 위치한 크니도스 학파에 속한 의사들로서 이들은 사실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 번째는 힙포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즉 코스 학파의 의사들이었다. 이들은 관찰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관찰 결과만을 가지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총력을 기울렸다. 세번째 부류의 의사들은 말하자면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들로서 자의적인 추측을 거부하고 항상 이성에 의지했다. 이 세 부류의 저자들은 성소 중심의 의학에 반대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세번째 부류의 의사들만이 유일하게 의학을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308 그렇다고 해서 크디도스 학파 의사들이 질병을 분류함에 있어서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질병에 대한 묘사는 넘치는 반면, 그에 대한 치료는 빈약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제시하는 치료법이란 항상 하제를 복용시키거나 토하게 하거나 우유를 마시게 하거나 소훼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 언제나 빨간약, 또는 손 따기, 또는 단식으로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인가? 한국인은 뭘 먹어야 낫죠?’ 이렇게 많이 물어본다.

 

310 이 정도면 충분하다. 크니도스 학파의 의술은 의심할 여지없이 수많은 사례에 대한 엄격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이 늘 실행해 오던 기술을 체계화하려는 의사들의 노력이 빚은 결과였다. 하지만 이 점만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데 이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들 의사들이 세운 가장 큰 공로라면 검증이 불가능한 철학적 가설이 주는 매력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누구든 징검다리는 될 수 있다. 어떤 진실한 노력이라면

 

314 학문이란 진실과 적절한 통찰력, 시행착오 같은 것들이 절묘하게 혼합되는 가운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축적되어 간다. 학문의 축적은 아주 오랜 세기가 지나도록 바벨탑 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학자들이 저지른 실수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적절한 통찰력만큼이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수란 언제나 수정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317 힙포크라테스 의학의 조상을 찾고자 한다면 일단 사제나 자연철학자들은 일단 제쳐두어야 할 거이다. <고대 의학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치료의 기술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나 신비주의 계통의 철학으로부터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도 그는 강조한다. 그는 철학자(또는 사제)와 의사와의 모든 연계를 부정한다. 그는 의사의 조상이라면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실증적이면서 소박한 임무에 전념하는 사람, 그의 표현대로로면 요리사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321 질병만 보지 않고 사람을 보다

 그의 저서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놀라움은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 욕심이다. 힙포크라테스는 우선 잘 바라보며 따라서 그의 눈은 날카롭다. 그는 질문을 하고 그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무려 일곱권에 달하는 <전염병> 총서는 의사가 환자의 머리맡에서 환자를 지켜보며 적은 방대한 기록일 뿐 별다른 내용은 없다. 이 일곱 권의 기록은 순회 의사로서 여정에서 만나게 된 여러 사례들을 특별히 분류하지 않고 되는 대로 소개하고 있다. 개별 환자에 대한 기록은 보편적인 성찰의 성격이 짙은 글들에 의해서 자주 끊어진다. 이러한 성찰들은 반드시 사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의사가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적어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의사의 정신이 항상 깨어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 이렇게 하고 싶다. 만약 내가 하루 중 아이들의 어떤 행동을 이런 식으로 적고 사진으로 찍어서 기록을 하고, 그것과 곁들인 통찰들을 꾸준히 일기 형태로 쓰고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사례연구가 되고 교단 일기가 될 거다. 농원일기를 30년 넘게 꾸준히 쓰는 성실한 농부처럼 나도 연구해 가면서 내 직업에 임할 수가 있다. 이게 프로그레스 노트고 이게 아이피다. 이건 하려들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일과를 마친 후 학교에서 이런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학교 아이들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개인간차, 개인내차가 매우 다양한 장애학생, 또는 가족들의 다름을 보는 게 매우 흥미로왔다. 그런데 지금 매우 지쳐있다. 이런 연구가 꾸준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쉽성 기사를 읽으며 스트레스를 풀어야하지 않겠나? 그리고 사례연구 밖으로 내는 것은 1년에 딱 1개만 도전하자.

또 연구원 공부든, 이 과정을 통해 내 일과로 들어오길 희망하는 아침읽기 시간(1시간이든 1시간 30분이든) 이든 매일 읽어대고 그걸 정리한다면 그 시간이 나름대로 통찰의 시간이 될 거다. 그런데 왜 자꾸 이런 몰아치기, 빵구가 반복되는 거지? 아니다. 나는 원래 이런 몰아치기 식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마감일 하루, 일주일에 하루는 아침에 읽지 않나?

 

321 힙포크라테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격언>은 힙포크라테스가 환자를 검진하던 중에 섬광처럼 떠오른 단상들을 즉석에서 기록해두었다가 한꺼번에 묶어서 내놓은 모음집이다.

 

325 힙포크라케스는 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보다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325 환자가 속한 사회적 생태계, 그중에서도 물리적 환경이 의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힙포크라테스는 사회적 생태계가 거기 속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뛰어난 통찰력과 확고한 의지로 밝혀낸다. 유럽과 아이사의 상당수 나라가 그의 연구 결과를 풍성하게 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328 힙포크라테스는 대부분의 경우 성찰이라는 말을 정신의 항구적인 태도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이를 지속을 의미하는 시제와 함께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하다는 항상 마음에 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힙포크라테스는 그의 내부에서 관찰하게 된 사례들, 즉 눈을 통해서, 청진을 통해서, 촉진을 통해서 의미를 지니게 된 자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고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이를 자양분 삼아 사고를 키워나갔다. 힙포크라테스는 어려운 문제와 정면대결을 가능하게 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인 인내심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성찰하다 = 항상 마음에 품고 있다 = 화두

 

333 힙포크라테스의 목표는 자연의 치유 행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얼핏 보기엔 매우 소박하다. <전염병>에는 자연은 질병을 고쳐주는 의사라는 대목도 나온다. “자연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길을 열어준다. 자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혀는 혼자 알아서 모든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은 자연이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알아서 이행한다.” 이런 대목도 있다. “자연은 스승없이 행동한다.” 인간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임무인 의사는 말하자면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신체 속에서 그를 도와주는 자기편을 만난다. 환자에 대한 일상적인 치료는 그러므로 의사 역할을 하는 자연의 행위에 적당한 길, 개별적인 각각의 사례에 적합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신체는 고유의 적극적인 활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의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하려고 하는 인체의 행위에 대해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는 절대로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수두룩 하기 때문이다.

 

335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유동적인 경험의 현장에서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의사는 겸손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생명 제조자라 할 수 있다. 시인이 무가 아닌 현실에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의사도 그가 환자의 몸에서 발견한 것, 즉 관찰되고 활용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부터 건강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338 스위스 형법 제 321조는 직업상의 이유로 알게 된 의료 비밀을 폭로한 자는 수감이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339 제네바 의사들의 서약인 제네바 선서는 힙포크라테스 선서 유형에 훨씬 가깝다.

 

의료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부터

나는 평생 인류를 위해 봉사할 것을 엄숙하게 선서합니다.

나는 나의 스승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것입니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첫째 가는 관심사로 여길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의탁한 자의 비밀을 준수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힘이 닿는 데까지의 의료계의 명예와 고귀한 전통을 유지할 것입니다.

나의 동료들은 나의 형제들입니다.

나는 국가와 인종, 정당이나 사회적 신분 같은 요소들이 나의 의무와 환자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을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절대적으로 존중할 것입니다.

어떠한 위협이 있더라도 나는 나의 의학 지식을 인류애 정신에 반대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엄숙하게 자유의사에 따라 명예를 걸고 이 서약을 합니다.

아름답네 

 

341 교양인으로서의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겸손이다. 이는 지적, 도덕적 겸양을 모두 포함한다. 의사도 틀릴 수 있다. 이럴 경우 의사는 실수를 깨닫는 즉시 이를 인정해야 하며, “사소한 실수라면 환자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의사는 오랜 기간 양식있는 스승 밑에서 수련을 거쳤으므로 대체로 심각한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로 인해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면 환자 앞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환자의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기록으로 남겨 후배들이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364 의학에서는 노예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인간 피조물일 뿐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결론을 대신해서 조명할 만한 가치가 있다. 확실히 노예를 소유한 주인은 이 인간 재화를 오래도록 보존해야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열한 살짜리 마부는 얼마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까? 의사에게 지불해야 할 치료비 정도의 가치도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의사가 환자를 판단하는 어조가 환자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동일한 것을 보면 힙포크라테스의 인본주의가 추구하는 학문적인 관심과 인간에 대한 호의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세기에 출편하게 되는 위대한 두 명의 철학자가 살아있는 연장(바로 노예를 가리킨다)” 에 대해 가졌던 경멸을 상기해보라. 지식에 대한 놀라운 식욕, 이성적인 추론에 의해서 생생한 활력을 얻는 연구의 엄정성,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을 향한 헌신, 모든 인간에게 차별없이 베푼 우정으로 말미암아 힙포크라테스 의학은 당당히 기원전 5세기 무렵의 인본주의가 표방하던 가장 높은 고지를 차지한다. 아니 적어도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는 그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우애 정신만큼은 그 고지 마저도 훌쩍 뛰어넘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349 요컨대 두 가지 중요한 웃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분노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웃음이다.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나이가 위치한 사회적 체제 위에서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어리석음과 부조리함을 낱낱이 파헤치고 박살내는 웃음이다.

 

351 풍자극은 제국주의적 민주주의가 빠져들고 있는 모순을 가차없이 고발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참화, 민중들의 비참함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이 웃음을 역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순웃음도 있음을 잊지 말자. 시골에 대한 사랑, 빵과 포도주, 평화 등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가장 기본적인 재화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웃음이다. 순웃음은 우리 안에서 나무와 꽃의 아름다움, 농장과 숲 속에서 노니는 짐승들의 그늘진 우아함을 일깨워주며 새들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에 귀 기울이게 해준다. 순웃음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몸짓, 사랑의 몸짓과 더불어 만개하는 생리적인 웃음, 기쁨으로 충만한 서정적인 웃음이다.

 

352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 중에서 웃을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라블레는 그의 작품 <가르강튀아>의 서두에서 이를 아주 근사하게 재해석했다. “웃음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말이다.

 

352 풍자적인 웃음과 서정적인 웃음, 이렇게 두 부류의 웃음은 분리하기도 어렵지만 공통된 기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치유의 기능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칭 아테나이 사회의 선생님, 아테나이 민중을 가르치는 교육자였다. 웃음은 그가 제공하는 치료법의 한 부분이다.  

 

354 우선 잘난 척, 아는 척하기를 좋아하는 현학자, 즉 타지인 박사의 가면이 있다. 이 유형은 라틴 계통의 익살극에도 등장하며, 주로 도센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곱사등이 학자로 묘사된다. 이탈리아 극에서는 일 도토레, 즉 박사님으로 나오며 대개 법의학자거나 의사다.

 

354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익살극에 등장하는 또 다른 전형적 인물로는 방탕하고 질투심 강한 구두쇠 늙은이를 들 수 있다.

 

357 나는 앞에서 카다란 입에 긴 이빨을 가진 흡혈귀 요리사에 대해서 운을 뗀 바가 있다. 이 요리사는 폭식가인 데다 매우 잔인하다.

 

357 자 이상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희극에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 요소로 지적한 일련의 허풍선이들이다. 이들 허풍선이들은 대개 사기꾼이며, 항상 성가신 방해꾼이다….이들은 항상 비겁하고 어디에서나 얻어맞는다.

 

358 허풍선이들 중 한 명인 병정에 대해서는 특별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희극의 역사에서 병정의 가면은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라는 인물만큼이나 널리 애용되었다.

 

358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은 이런 가면들로 가득차 있다….그는 동시대를 주름잡던 아테나이의 역사적인 인물들, 실제로 객석에 앉아 극을 관람할 수도 있는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극중에 등장시켜 이 전통적인 인물의 가면을 씌웠다. 말하자면 전통을 젊게 재 해석했다.

 

361 아고라크리토스는 돼지고기 장수이며 타고난 선동가이다. 무식하지만 목소리 큰 이 연설가는 아이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귀신 같은 요리사를 상기시킨다. 그는 어린 시절 요리사의 조수 노릇을 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다. “난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주먹세례를 받으면서 컸지. 내가 요리사들을 붙잡고는 말했지 자 보세요. 형님들 무너가 보이지 않나요? 봄이 왔다구요. 제가가 왔다니까요. 그러면 요리사들은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 그 사이에 나는 고깃덩어리를 슬쩍 하곤 했다니까이 인물이 풍기는 가장 감칠맛 나는 이미지는 역시 요리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 민중이여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그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내 몸을 산산조각 내서 고기스튜로 만들어 버릴지어다. 내가 만일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 탁자 위에서 나를 잘게 채 쳐서 치즈를 넣고 마늘 소스로 버무려 버릴지어다.” 돼지고기 타령에서 정치 이야기로 넘어가지만 아고라크리토스는 여전히 요리사에 머물러 있다. “민중의 지배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잘 섞고 주물럭거리고 여러 가지 재료를 한꺼번에 범벅을 만들고 대중들에게 말을 하는 거라니까아고라크리토스는 흡혈귀처럼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나한테 소의 주름위롸 돼지의 뱃가죽을 주시오. 그것들을 다 먹어치우고 국물까지 몽땅 마셔버린 다음 입도 닦지 않고 연설가들을 물어뜯어줄테니까그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데모스의 호감을 얻어낸 것도 요리 대회였음을 상기해보라. 뿐만 아니라 극이 끝나갈 무렵 데모스(주권자 민중)을 회춘시키는 것도 요리를 통해서 였다.

 

368 남근숭배의 노래에서 희극의 한 원천을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런 노래는 비록 농담이 슬쩍슬쩍 가미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주 건전한 웃음이며,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신들의 에덴동산 같은 평온함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원죄나 율법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 즉 호메로스적인 웃음으로 빛난다.

 

370 세 번에 걸친 전쟁으로 아테나이가 황폐해지고 인근 시골까지 초토화되었던 기원전 5세기의 마지막 4분기에 우리의 시인은 동시대인들에게 신선한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것을 상상했다. 아테나이의 가장 진정한 현실에 약간의 산초만 섞어서 잘 버무리면 되는 일이었다. –

 

371 아리스토파테스는 언젠가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게 되기를, 잔칫날처럼 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한가로운 시골에서 산책을 즐기게 되기를 소망했다.      

 

373 전쟁을 비판하는 또 다른 희극인 <뤼시스트라테>를 보자전쟁(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전쟁이란 기본적으로 강한 성, 즉 남성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이다.)에 치욕을 가하고 전쟁을 저주하며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리고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말해서 모든 그리스인들은 물론 시켈리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그 때까지 알려져 있던 모든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류애적인 우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아리스토파네스는 작품의 중심에 여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여자를 내세웠다. 바로 고집스러운 생각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아테나이의 여인 뤼시스트라테였다. 그는 이 여장부의 추진력을 빌려 엉뚱한 상상력을 발동시켰다. 전쟁 중인 나라의 모든 여인들이 남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항하기 위해 똘똘 뭉쳐서 남편 또는 연인들을 대상을 잠자리 거부 운동을 벌이기로 맹세한다는 것이다.

현경 <미래에서 온 편지>의 아이디어가 여기서 왔구나! 아님 같은 생각을 했던가 거기서도 사안은 잊어버렸는데 뭔가에 대한 항의로 이런 걸 하면 어떨까?

 

377 그는 희극에 등장하는 합창단의 도움을 받는다. 합창단은 모든 참전국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장이 드러난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나라의 민중들은 너나없이 평화를 원한다는 것이다. 트뤼가이오스는 합창단에는 민중들은 농부와 수공업 장인, 노동자, 상인들이 대다수임을 분명히 한다.

 

지는 해

 

401 이제까지 그리스 문명 황금기의 몇몇 작품을 소개했다. 이 황금기는 더는 아니고 고작 50년 정도 지속되었으며, 주로 기원전 5세기 후반부를 가리킨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50년이라고 하면, 어느 여름날 하루 정도나 될까어쩌면 여름날 하루보다는 좀 길어질 수 있다. 절정에 접어든 여름 한철 내내 정도로 해두면 어떨까

 

403 오포라는 막바지에 접어든 여름의 영광을 뜻한다. 오포라는 동시에 이제 막 시작되려는 가을을 의미한다. 태양은 이제 지평선을 향해 내려간다.

 

403 하나의 문명은 역사가 재미삼아 즐겨보는 일종의 놀이, 미래의 학자들에 의해 분류되어야 할 관습과 작품의 덩어리가 아니다. 하나의 문명이란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 자신들과 남들을 위해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기회, 아니 일련의 기회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회와 상황은 인간의 손에 의해 야무지게 가다듬어져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 공동체에 균형을 가져다주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인간적인 세상, 각자가 자신이 지닌 인류애를 더욱 완벽하게 꽃피울 수 있는 세상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경부터 그리스 문명에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한 쇠락과 급격한 방향 전환을 확인해보면 이미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 전조를 보여왔던 건 아닌 지 자문하게 된다.

끊임없는 전쟁과 내부 분열

404 우선 전쟁의 상시화를 들 수 있다. 전쟁은 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5세기의 후반 3분기 내내 아테나이를 필두로 활력을 잃고 기진맥진했다. 이 전쟁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적절한 이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전쟁은 고대 사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404 또 다른 전쟁, 그러니까 아테나이가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의 토대를 공고히 하며, 연합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펠로폰네소스전쟁에 앞서서 발발하여 1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니 거의 40년 동안이나 전쟁은 황금기와 공존한 셈이다. …이 전쟁들은 어느모로 보나 제국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410 페리클레스는 권좌에 앉자 마자기원전 451년에서 450년 무렵부터 시민의 직계 아들이나 딸이 아닌 사람에게는 시민의 자격 부여를 거부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시민의 자격은 이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작 2만명 남짓한 기존 시민들만을 위한 일종의 특혜로 변질되었다. 참고로 당시 아테나이 인구는 약 40만명이었다. 여기에 거대한 제국 전체의 주민을 더한다면 시민 수를 2만 명으로 제한한 정책의 의미가 확실하게 다가온다.

 

413 말하자면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과 아테나이라는 도시를 생산한 자들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고삐 풀린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붕괴

 

소송망국 아테나이

416 소송은 고발이 있어야 성립된다. 선동가와 판관들 사이에는 암묵적이지만 다분히 의도적인 협약이 존재한다. 이 하층 공무원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기 위해서 정치가들은 수없이 많은 소송을 걸거나 당한다.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사람에 대해서 굴욕적일 정도로 감사한 마음을 보이는 민중들은 의회에서 자신들에게 소송거리를 제공하는 자들의 정책을 지지한다.

 

시민의 감소와 노예의 급증

쇠락하는 도시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435 소크라테스는 동시대인들에게도 그랬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기 힘들 것이다. 참으로 희안한 아니 괴짜이면서 동시에 매우 상식적이며 엄격한 논리 추종자였던 이 인문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놀라게 하며 가르침을 주고, 그가 발견한 지식과 그 못지않게 소중한 무지를 나누어 준다.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했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죽음이 가져온 엄청난 다산성이다.

 

445 그는 신동이 아니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그나마도 신이 그에게 신호를 보냈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게 되었다. 그는 끈끈이대 나물 껍질 같은 피부속에 들어 있는 괴상망측한 정신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는 이 영혼,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가진 이 이방인이 누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 그리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그 글귀를 읽었다. 이리저리 한눈파는 순례자의 눈으로 한 번 쓱 읽은 게 아니었다. 젊은 시절 내내 그의 마음 속에서는 너는 누구냐? 너는 무슨 쓸모가 있느냐? 너는 무엇을 아느냐? 네가 아는 것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등의 질문이 메아리쳤다. 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열렬하면서 동시에 숙고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449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다수는 평범한 집안의 아들들로서 적지 않은 이들이 그저 한가로운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를 따라다녔다. 소크라테스는 노동자인 민중에게서 태어났으며 그 역시 노동자였다. 산파였던 어머니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한 셈이다. 아버지는 파르테논 신정을 세운 석조 블록을 각지게 자르고, 모서리를 갈고 닦는 석공이었다.    

 

453 오전 10시 장이 서는 광장. 소크라테스의 포교생활 30년 중의 어느 하루,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돼지고기 장사꾼은 순대를 사라고 외치며, 기병대 장교는 청어 장수 앞으로 철모를 내민다. 이발소 앞 환전상들이 탁자 주변에 모여 아테나이 시민들은 수다를 떤다. 소크라테스가 지나간다. 모두가 그를 알아본다. 사실 그를 몰라보는 것이 더 어렵다. 그는 아테나이에서 제일 못생긴 추남이다. 넓적한 얼굴에 납작한 코, 지나치게 넓고 벗겨진 이마, 두터운 눈썹 아래로 툭 튀어나온 딱부리 눈은 황소 같은 시선을 던진다. 이 세상 모든 코 중에서 가장 덜 그리스적인 코에 듫린 두 개의 콧구멍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름거린다. 듬성듬성 난 턱수염은 물어뜯는 용도로 생긴 것처럼 보이는 입을 가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 제자는 평한다. 당나귀 입보다도 더 미운 입이라고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예 한 술 더 뜬다. 땅딸막한 두 다리 위에 놓인 건장한 상체, 추남 소크라테스의 신상명세는 대충 이 정도다.

추남, 추녀들의 희망이로세. ()가 인류를 위해 공헌할 가지고 있는 것은 외모와는 상관이 없구나. 

 

454 이 못생긴 남자는 차림새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잘 씻지도 않았다. 그가 체력 단련장을 자주 찾은 것은 세월의 시계를 되돌리고 불어나는 살덩어리들을 덜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위해서였다.

 

458 아테나이인들은 소크라테스가 행정 관리를 선발하는 투표 방식 간단히 말해서 제비뽑기를 비판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도시의 대표를 선택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투의 비판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시민의회가 되는 대로 결정을 한다고 말했다. 통치행위는 아주 어려운 일이므로 소수의 적임자들에게만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462 궤변술은 아첨술에 지나지 않으며, 편식하는 아이들을 위한 요리사의 편법에 불과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의술을 행하는 셈이었다. 그가 부과하는 의심은 병든 조직을  태우는 소훼처럼 영혼의 고장난 부분을 파괴함으로써 태어날 때의 건강과 비옥함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이제 시간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적 혁명을 통해서 가능해진 깨달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 부류에서 완전히 떼내어 그가 소피스트들에게는 없는 지적, 윤리적 위대함을 지닌 위인이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466 기원전 423년에 공연된 작품에서 두 가지 죄목 (무신론과 젊은 층의 타락)을 거론하여 그에게 선고를 내렸듯이 기원전 399년 법정에 제출된 기소장에도 이와 똑 같은 두 가지 죄목이 명시되어 있었음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무신론자 소크라테스,

 

474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지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나이인들이 아직 유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아이가 변덕스러우며 진실 앞에서는 분노하고 아첨 앞에서는 갖은 애교를 부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479 단신들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그 결정은 내가 아닌 당신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483 그는 우선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관들을 상대로 말했다.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올 겁니다.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만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486 “자네의 부탁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군. 그것이 친구로서의 의무 때문에 하는 부탁이라면 말일세. 하지만 그 부탁이 압력이 된다면 그럴수록 불쾌해지고 말 걸세그러고는 평소에 늘 하던 방식대로 크리톤이 제안하는 도주가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평생동안 가르쳐온 원칙과 일치하는 지, 또 지금이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 시점인지를 살펴보자고 권유했다. 왜냐하면 불행이 그를 위협한다고 해서 원칙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다. 크리톤과 소크라테스 같은 노인은 평생 상상 가능한 일에 관해서만 대화를 나누었던 걸일까? 아니면 원칙이란 그 원칙이 진정한 것이라면 언제고 실천에 옮겨야 할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489 그러니 죽은 사람에 대해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육신의 해체가 그의 삶의 종차역이 아니며, 그가 제자들의 영혼 속에서 지속하게 될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말이다. 이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그 후 그를 기리는 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새롭게 태어난 곳, 끊임없이(소크라테스식으로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비록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앞세운 이성을 타파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말이다) 지식 탐구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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