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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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하여- 김소연
- 내가 저자라면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베트남전 한창이던 1967년 경주의 목장집 큰 딸로 태어났다. 천칭자리, B형 여자.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동네에서 사람보다 소 등에 더 많이 업혀 자라왔다. 그래서인지 눈이 소를 닮아 고장 난 조리개처럼 느리게, 열고 닫힌다. 그 후 무덤의 도시인 경주를 더나 서울로 이주했다. 줄곧 망원동에서 살았고 우기 때마다 입은 비 피해가 어린정신에 우울의 물때를 남겼다. 매일 지각하다가 시에 밑줄을 치게 되었다. 선생과 불화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마음과 몸이 분리되지 않고, 이 일과 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한 모노 스타일 라이프를 갖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고, 하기 싫은 일은 하기도 전에 고열을 동반한 몸살에 시달릴 정도로 몸이 거부한다. 이렇듯 놀라울 정도로 몸과 마음의 완벽한 일원론적 합체를 이루고 있어, 마음에 관해서 초능력에 가까운 신기를 보인다. 고양이처럼 마음의 결을 쓰다듬느라 보내는 하루가 아깝지 않고, 아무데도 관심 없는 개처럼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밥뿐만 아니라 잠조차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몇 밤을 그냥 잊기도 한다. 몸에 좋은 음식보다 아이스크림, 초콜릿, 커피를 주식처럼 복용한다. 게으르지만, 꼼꼼하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덕분에 첫 시집인 <극에 달하다>를 펴내고, 10년만에 두 번째 시집인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를 펴 내게 된다. 또 3년이 지나 세 번째 시집인 <눈물이라는 뼈>를 펴냈다.
가볍게 읽으려고 산 이 책을 읽으며 어려웠다. 다른 어떤 책보다 어려웠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내 마음에 정직해 본적이 별로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 속에서 느껴지고, 일어나는 감정들에 대해 계속 외면하거나, 억지로 꾹 누르며 살아왔다. 그런 내게 마음 사전에 있는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이 낯설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들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의 삶이란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 더불어 그녀가 쓴 시들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시에서 왠지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내 마음을 찾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친구에게서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나는 '모르겠다' 사전을 한 번 만들어볼까? 라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내가 누군가와의 대화를 할 때, 가장 많이 내 뱉는 말이 바로 '모르겠다'이다. 나도 나 자신을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알리는 만무하다. '모르겠다' 사전을 만드는 목적은 명확하다. 당시의 상황들을 되짚어 보고, 나를 되돌아봄으로써, 나의 감정들을 잘 알아차리고, 잘 표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형식은 <마음사전>처럼 키워드 위주는 아닐 것이다. '모르겠다'라는 하나의 단어로 책을 엮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 별로 전개될 것이다. 크게 목차는 관계를 기준으로 '가족, 친구, 일'등으로 정할 수도 있고, 감정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노, 자괴감, 자책감, 등' 모르겠다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상황들을 분류할 수 있는 감정들로 목차를 구성해도 좋을 것 같다.
1 오직 마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
유리와 거울
차 한 잔과 담배 한 모금
차가운 거울과 뜨거운 차 한 잔
2 마음에 존재하는 감각들
거부
방향
어둠
빛
깊이와 거리
잔상
착시
달다
향기
가벼움
마음의 절연체
차가움과 뜨거움
올가미
3 감정 < 기분 < 느낌
감정을 억압하고 참을성을 발휘할 때에 느낌과 기분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참았다가 터지는 (아무리 잘 참아도 언젠가는 터진다) 감정은 기꺼이 바보가 된다. 그 바보를 기분은 낯설고 수상쩍다고 접수한다. 그러나 느낌이라는 것은 영악하고 타협적이어서, 이내 그것을 낯익은 것들로 요약해버린다. 이미 이뤄놓은 집합들의 사례 중에서 거칠게 선택해버림으로써, 그럴 때의 느낌은 무딘 것이거나 폭력적인 것으로 표출되기 십상이다. 사실은 어딘가 자신이 없지만, 자신 없음을 감추기 위하여 자부심에 가까운 확신으로 위장하기 십상이다. '잘 모르겠네'라고 말했어야 옳았을 느낌이지만, 잘 모르겠다고 말해서는 안 될 때가 있다. 이런 오작동을 몇 번쯤 겪어본 자라면, 직관이나 직감을 믿지 못하게 된다.
→ 오랜 시간 감정을 억압하고 참을성을 발휘하며 살아 온 나는 늘 '괜찮다, 행복하다'는 등 느낌의 오류를 만들어냈나 보다.
자신의 느낌을 신뢰할 수 있는 순간 속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공감 가능한 감정들만을 운영하고, 동감 가능한 기분들만을 영위하고, 기시감으로 충만한 느낌들 안에 정주한다. 더 이상의 모험은 없고 잘 아는 한도 안에서는 달인이 되므로, 지나친 자부심에 휩싸인 채로 자신의 느낌을 취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과시하기도 하며, 직관과 직감을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47
4 감정의 태초들
공포
공포의 감정은 '얼른 피히라!'라는 명령을 포괄한다. 이 명령을 즉각적으로 이행하는 한 우리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다. 51
죄책감
규칙이나 약속을 어기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 우리의 죄책감은 찾아온다. 53
이것은 나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하여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커질 때에 생기는 일차적인 감정인데, 적어도 덜 미안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종의 노력을 기울인 삶을 살아 가게 된다. 뼈저린 죄책감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진화한다. 54
5 작은 차이가 빚는 전혀 다른 결론
중요하다 : 소중하다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57
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약속과 소중한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중요한 약속에 몸을 기울이고 만다. 58
→ 그렇다.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 일적으로 중요한 약속과 사적으로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이 겹치면 늘 전자를 선택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후자를 챙겨야겠다고.
행복 : 기쁨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행복은 자잘한 알갱이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상태이지만, 기쁨은 커다른 알갱이들로 후두둑 채워진 상태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하지만, 행복은 전염되기 힘들다.
언제나 그렇지만, 빠르고 간단한 것들은 느리고 꼼꼼한 것만 못하다. 59
소망 : 희망
희망은 행운이 필요하고 소망은 신의 가호가 필요하다.
다른 소망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예전의 소망이 벌써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챈다. 그에 비하면, 희망은 이루어졌을 때의 자각이 분명할 뿐더러 희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60
평안하다 : 편안하다
편안하다는 것은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다.
→ 이런 뜻이라서 그런가? 왠지 편안하다는 말을 별로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평안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로 입 밖으로 내 본적이 별로 없다.
그리하여 어떤 욕구도 없이 이완되어 있다. 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이란 뜻이다. 평화도 안정도 태풍의 핵처럼 정지되어 있으나,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긴장감이 필요하다.
조금의 의욕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평안함은, 스스로가 속해 있는 관계와 장소, 시간 따위를 잘 영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어떤 욕구도 없이 이완된 편안함은 스스로가 속해 있는 관계와 공간과 시간 등을 돌보지 않는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처참하다 : 처절하다 : 처연하다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 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63
처참함 때문에 우리는 죽고 싶지만, 처절함 때문에 우리는 이 악물고 살고 싶어진다. 처연함은 삶과 죽음이 오버랩되어서 죽음처럼 살고, 삶처럼 죽게 한다. 64
정성 : 성의
선물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애정을 선물하는 것이다.
정성은 내키지 않으면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것이고, 성의는 내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가 있다. 65
동정 : 연민
동정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연민은 마음으로 표출된다. 67
은은하다 : 은근하다
은은한 사람은 과정을 아름답게 엮어가며, 은근한 사람은 결론을 아름답게 맺는다. 68
축하 : 축복
축하는 축하 받는 사람과 축하하는 사람의 자의식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축복을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이 포개진 자리에 존재한다. 또한 축하는 좋은 일에만 표출되고, 축복은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어느 때라도 우러나온다. 69
유쾌 : 상쾌 : 경쾌 : 통괘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며, 상쾌한 사람은 농담에 웃어줄 줄 알며, 경쾌한 사람은 농담을 멋지게 받아칠 줄 알며, 통쾌한 사람은 농담의 수위를 높일 줄 안다. 70
6 눈물, 우리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실제로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세균을 죽이는 라이소자임이라는 성분과 함께, 인간의 감정 농도에 따라 분비량이 달라지는 나트륨도 들어 있다. 하품을 하거나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눈물에는 없고, 슬프거나 기쁠 때 흘리는 눈물에는 있는, 더구나 분노 때문에 흘리는 경우에는 가장 많은 성분이 나트륨이다. 75
중국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눈물은 간을 비롯한 오장육부의 액체가 올라와 눈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무릇 비애, 웃음, 기침 때문에 화가가 격하게 되면 장부가 흔들리게 되고, 따라서 액도가 열려 눈물이 나오게 된다"라고 적혀 있다. 76
우리는 어떨 때 눈물을 흘리나, 눈물을 흘리는 당신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하나. 77
→ 어떨 때, 눈물을 흘리나. 눈물을 흘리는 내게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이것도 정리를 해 두면 좋을 것 같다.
슬프다 : 구슬프다, 애닯다, 비애, 애잔하다, 서럽다, 섭섭하다, 서운하다…
감격적인 순간에도 참회의 순간에도 환희의 순간에도, 우리는 알지 못할 슬픔에 둘러싸여서 눈물을 흘린다. 그럴 때의 슬픔은 정황에 대한 격리 때문에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격리, 세상에 대한 소외, 자신의 생을 입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소격 효과가 일어날 때…..
그러나 반드시 격리 때문만으론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격리'의 정반대 상황인 '합일'이 함께 작용되어야만 한다. 정황에 대한 격리와 더불어서, 격리된 정황에 합일 될 때에 슬픔은 온전히 가능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격리의 정황 앞에서 우리는 슬픔을 경험한다. 78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을 때에 슬픔은 깨달음처럼 찾아온다. 79
연민 : 가엽다, 동정심, 불쌍하다, 애처롭다, 딱하다…
연민은 대상에 대한 합일과 몰입이 진행된 후, 연민하는 대상과 자기 자신을 한꺼번에 이 세상에서 격리시킴으로써 생긴다. 80
분노 : 노여움, 역정, 원망, 원통, 분개, 치욕, 화, 성, 골…
낯설음에 대한 용서할 수 없음. 실망스러움에 대한 인정할 수 없음. 비겁함에 대한 치떨림. 거절당함에 대한 납득할 수 없음. 부당함에 대한 조건반사
→ 나의 분노는 주로 거절당함에 대한 납득할 수 없음과 부당함에 대한 조건반사에서 주로 나왔던 것 같다.
용서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상황에 대하여 치가 떨리고 노여운 것은, 상황 자체보다는 그 배후에 도사린 잘못된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릇됨을 응축하고 있는 자세, 그것을 볼 줄 알 때에 우리는 분노하며 운다. 83
감격 : 감동, 감화, 감개무량, 환희…
그토록 가깝지만 손에 쉽게 닿지는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이토록 감격스러워한다. 이처럼 대상과 나 이외의 것들은 안중에 없는 상태가 바로 청춘이다. 언제나 젊고 패기만만하며 자신이 젊다.
무언가를 궁리하고 노력하여 그 결실을 거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이가 어찌 됐든 청춘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 환기가 크면 클수록 감동적이며 눈물겹다. 한데 우리는 일상의 자잘한 감동을 알아채고 손에 꼭 쥘 줄 안다. 그럴 때의 따뜻함도 눈물겹다. 그 때만큼은 우리도 대상에 몰입했고 생 앞에서 겸허했다.
눈물은 긴장감으로부터의 해방감을 가져다 준다. 실컷 울고 나면 우리 몸은 중력을 줄인 것처럼 가벼워진다. 어쩔 때는 그것이 지나쳐서 물위에 뜬 스티로폼처럼 내 몸이 텅 빈 것 같아진다. 85
'눈물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현승은 눈물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고 노래했다. 기쁨이나 행복은 꽃처럼 피었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이라면, 마치 꽃 진 자리의 열매처럼 가장 나중에 남는 것은 눈물이라고 노래했다. 웃음보다는 눈물이라는 안식처가 보다 안정적인 것은 눈물이 나중에 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눈물이 갖는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내려앉는 삶의 자세 때문에도 그렇다. 87
7 '외롭다' 라는 말의 어저리들
외롭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는다.
그 말에는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이미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동사로 바꿔 놓는다. 91
쓸쓸하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바로 '쓸쓸함'이다. 92
권태
권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천장을 응시하며 벽지의 연속된 무늬를 하나하나 세는 것이다.
외로움은 약 없이도 회복되지만(정확히 말하자면, 회복되지 않더라도 약 없이 살아지지만), 권태로울 때는 최소한, 외로움이란 외투로 갈아입어야 마음을 회복할 기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94
심심하다
이것은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다. 어린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권태롭고 허전하고 공허한 상태를 '심심하다'라고 받아들인다. 95
무료하다
심심함은 무언가를 향해 손짓하고 잇지만 무료함은 아무것에도 아직 손짓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96
허전하다
무엇인가 있다가 없어진 상태. 혹은 있기를 바라는 그것이 부재하는 것 97
공허하다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더 나아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던 모든 손아귀에는 공허함이 묻어 있다. 98
→ 지금껏 내가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던 것에는 무엇들이 있을까?
적막하다
'외로움'의 농도가 가장 짙은 상태. 적막함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
'적막함'은 손을 잘라 떼어낸 '몸'이다. 모든 순간, 모든 사물들이 감옥처럼 늘 에워싼다. 100
결핍
공허는 의미 있게 생각한 것들이 움킨 손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상태라면, 결핍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의미를 자꾸 흘리곤 하는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와 같다. 102
허기
왕성한 소화력, 끝나지 않는 식사, 결핍감은 껌이라도 씹으며 순간을 모면할 수 있되, 허기는 고기를 씹는 그 순간에도 포만감이 없다. 허기는 마음의 에너지가 마이너스적 과잉 상태에 도달해 있으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도달해 있다. 104
평화
평화는 제 스스로 그 상황을 평화롭게 지속하기 위해서 초긴장의 상태를 견지하기 때문에, 이내 소진되고 만다.
평화는 그 이후 줄곧, '나태'로 변질되거나, '쓸쓸함'으로 변화된다. 105
'외로움'을 분절시키거나 가시화시키지 않고, 가지런히 돌볼 때 평화가 쉬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활달한 외로움보다 진실되지 않은, 싸늘히 식은 시체처럼, 부패를 진행시키기 직전의 '잠깐의 안식'일 따름이다. 106
8 다가갈까, 기다릴까, 지켜볼까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 아주 아주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좋으면 그냥 다가갔다.
그럴 때, 어떤 거부를 당했더라도 그 상처가 깊지 않았는지, 상처에 관해선 기억조차 없다.
언젠가부턴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게 됐다. 내가 실망을 하게 될 까 봐 다가가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가가기엔 수줍음이 너무 컸다. 다만 수줍기 때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109
→ 어린 시절의 나는 다가가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이 익숙했다. 처음에는 수줍음이었지만, 나중에는 실망할까봐 다가가지 못했던 것 같다.
열정이 무엇인지, 정념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된 때에, 그러니까 관계에 대해 눈을 처음 뜨게 된 그때에는, 언제나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고민하게 됐다.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꼭 잃을 것만 같아서 다가갔고, 다가갔다가는 꼭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아서 기다렸다. 서성이느라 모든 날들이 피곤했다. 110
이제는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됐다.
소중한 것들이 내 품에 들어왔던 기억, 그 기억에 대해 좋은 추억만을 갖고 있진 않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비애인 셈이다. 나를 충족시키는 경우보다 결핍 그대로가 더 나은 경우를 경험해 보았다.
바라던 것이 나에게 도래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던 것들이 줄 허망함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외면'이란 감정의 부축을 받으며… 111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때를 위해서 혹은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기에,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이토록 지켜만 본다. 이 사업은 많이 적적한 일이지만, 이 적적함의 속살에는 견딜 만한 통증을 수반하는 훈훈함이 있다. 112
9 '호감'에 대하여
존경
동경
흠모와 열광
'존경'에 '동경'과 '매혹'이 재빠르게 섞여들 때가 '흠모'다. 존경에 열정이 화학작용을 일으킬 때는 '열광'이다. 흠모는 열광보다 느리며 대상과의 거리도 멀다. 117
옹호
'존경'이 저절로 생긴 마음가짐이라면, '옹호'는 일종의 다짐이다. 118
좋아하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어쩌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호감이 어떤 형태인지 알기 싫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좋아한다'는 말은, 이런저런 것들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버려진 영역에서 싹을 틔우는 호감들을 아우르는 말임은 분명하다. 121
반하다
벼락처럼, 자연재해처럼 한 순간에 완결되는 감정이지만, 수습은 쉬운 일이 아니다. 122
매혹하다
'반한다'는 것이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해 불안정한 것이라면, '매혹'은 근거들의 수집이 충분히 진행된 상태다. 123
아끼다
사랑의 명백한 한 형태.
→ 얼마 전에 잘 모르는 사람에게 '아낀다'는 표현을 했다가 좀 당황해서 수습한 적이 있는데, 사랑의 한 형태라니 더욱 당황스럽다. ㅋ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는
말일 수도 있고, 도무지 효용성을 찾을 길이 없다는 낭패감을 은유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애틋하게 에워싸는 보호막과도 같은 호감, 손쓸 방법이 없고, 손댈 재간이 없는 대상을 향해 에둘러 포복해 가고 있는 구애. 125
매력
게을러서 아름다운 사람은 관계에도 게으르며, 섬세해서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방의 섬세하지 못함을 이따금 책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 덩어리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허하게 하거나 피곤하게 한다.
간혹, 매력 때문에 생겨난 호감의 양 날개를 뚝뚝 분지르며 걸어내려 가기도 한다. 127
보은
신뢰
10 심장에 문신을 새기다
손
기생충을 박멸하려는 듯한 연인의 격렬한 애무는, 깊고 깊은 우울마저 소독해낸다. 133
목소리
목소리에는 달콤함과 쓰디씀과 시원함과 저릿함과 애절함과 다정함과 굳셈과 갈증과 설득력과 단호함과 슬픔과 기쁨과 무서움과 비통과 환희가 담겨 있다. 135
뒷모습
체취
누군가와 뺨을 비비고 껴안고 잠들어본 자만이, 누군가 몸을 빼내고 떠나간 후 빈 베개에 코를 부벼본 자만이 체취의 사무침에 갇힌다. 137
11 말 ≤ 거짓말
말, 나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 사라지길 원해서 하는 말은 '발산'이고, 잘 기억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언약'이며, 마음을 얻기 위해 하는 말은 '애걸'이다. 141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은 분노를 방출하려 할 때에 가장 유용하다.
방출이 아니라 분출일 경우에는 그 대가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기에, 더더욱 기술이 필요하다. 방출이 정상적인 출구를 사용하는 내보내기라면, 분출은 예정되지 않은 곳에서 함부로 터져 나오는 내보내기다.
준비된 출구를 통해서, 알맞은 압력이 쌓였을 때에 이뤄지는 내보내기는, 기분 전환을 제대로 만끽하게 해주며,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정화'를 결과물로 선사해준다. 142
거짓말, 당신을 위하여
거짓말을 가장 확실하게 실천하는 관계는 가족과 연인이다. '사랑' 이라고 하는 매개체를 통하여 굳게 맺어진 이 관계는,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한다고 말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가장 많은 약속을 하면서 영위되고 있다. 약속은 범람하면 할수록 지켜질 수가 없다. 144
→ 약속이란 신중하게 해야겠다.
속아지진 않지만 속고 싶다는 생각도 우리는 한다. 좀 제대로 속여보라고 말하고 싶다가도, 속을 줄 아는 자세를 더 이상 갖출 수 없는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한다. 145
12 유대감들
엄살
엄살하는 자는 엄살의 힘으로 산다. 엄살을 안으로만 삼켜온 자는 엄살하는 자의 엄살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엄살하지 않는 자의 귀는 타인의 엄살 앞에서 언제나 오작동 번역기계가 된다. 엄살에 불과한 그것을, 지나치게 안쓰러워 한다. 149
엄살하지 못하는 자가 "있잖어….."하고 운을 뗄 때마다 상대방은 "아프다 그러려고 그러지, 내가 더 아퍼"하고 그 입을 막곤 해왔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150
한 번도 제대로 내비쳐본 적 없는 그 엄살이 독처럼 몸에 가득할 때, 누군가의 엄살을 들어주는 척하며, 자신을 포함한 두 사람을 함께 위로한다.
→순간, 내 얘기인가 싶었다.
평생을, 그렇게.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 틈을 타서 운다. 151
위로란 언제나 자기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형태대로 나오는 것이다. 152
→ 위로, 내게 어떤 위로가 필요한 지조차 알지 못할 때는 어찌해야하지? 이게 문제였나? 내가 받고 싶은 위로를 모르니까, 남들에게도 위로를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른다.
걱정
걱정은 유대의 힘을 엄청나게 발휘한다. 153
공감
공감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 영향에 우리를 열어둠으로써, 그들에게 설득당할 목적을 세워둔다.
"네가 옳아" 혹은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같은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우리는 길고 긴 하소연을 할 때가 많은 것이다. 154
상처의 전시회
누군가 상처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나면, 타인의 이미그레이션 게이트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비자가 그에게 발급되곤 한다. 155
→ 상처의 전시회라는 말이 참 좋다.
비밀
비밀은 우리를 따뜻하게 결속시켜주지만,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기도 한다. 비밀은 단열은 잘 되고 방음은 잘 되지 않는 여관방 같기 때문이다. 156
농답
농담을 잘하는 사람은 대화를 하며 상대방을 그네에 태운다. 다가올 때마다 등을 힘껏 밀어 높이 띄워준다. 마주 앉은 자리보다 훨씬 높고 먼 곳으로 가게 한 다음, 더 크게 자신 쪽으로 오게 하기 위해서다. 158
경청
경청은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건너고 나면, 그 어떤 유대의 표현들보다 훨씬 더 자애로운 힘을 지닌, 튼튼한 다리 하나가 너와 나의 뒤에 놓여 있다. 160
13 사랑, 그 불가항력의 낭비에 대한 보고서
사랑의 시작을 여는 필수조건에는 '실수'가 있다. 그 실수를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말하고, '필연'이라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실수일 뿐이다. 실수의 첫 발이 사랑을 점화시킨다. 163
언제나 대기조처럼 부르면 달려가고 달려가면 반기게 되는 것도 갓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강령에 속한다. 또한, 매일매일, 오늘은 당신이 유독 예뻐 보이는(멋있어 보이는) 날이기 때문에, 천장에 매달린 모빌을 바라보는 갓난아이처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165
14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마음들
기대
기대하는 마음은 기대하는 대상을 조금씩 갉아먹어 가면서 무너뜨리며 동시에 자신도 무너져 내리게 한다.
기대는 채워지면 더 커지고 도착하면 더 멀어지는 목표점이다. 173
진실
진실을 알기 위하여 사람들은 무덤을 판다. 진실을 캐기 위한 삽질이 결국은 제 무덤을 파는 것으로 이어진다.
주시
우리는 대상을 주시하며 사랑을 강화한다. 사랑 받는 대상은 그 주시의 눈빛과 몸짓 때문에 처음에는 황홀하다. 그렇지만 일정 정도 진행된 후의 사랑에서, 주시만큼 거추장스럽고 피곤한 것은 없다. 175
고독의 독한 커피와도 같은 힘
파리하고 근원 없는 고독은 언제나 사랑할 것들을 찾기 위해 자기를 가둔 감옥을 부수며, 근원적이고도 큰 고독은 언제나 해안을 얻고 생을 통과한다. 176
질투는 혹시
배신의 개운함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지라도
불안한 마음은 언제나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게 된다. 어떤 것에 손을 뻗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는 한없이 불안하지만, 무언가를 결국엔 손에 잡게끔 하는 힘이 있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갈등하지 않는다. 손 닿기 쉬운 것에만 손을 뻗을 뿐이다. 179
살의
이것은 절망의 고속도로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희망의 길로 돌아설 수 있는 방법이다. 181
이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과 신앙
도덕과 헌신
그럼에도…
15 진짜와 가짜
이기심 : 자기애
'이기심'은 타인에게 사랑 받는 그 순간을 가장 기뻐한다면, '자기애'는 자신 바깥을 둘러 볼 때에 스스로를 사랑할 힘이 생긴다. 189
이기심이 원하는 것이 많아 관계에서 불만을 축적해가는 동안에, 자기애는 주고 싶은 것이 많아 관계에서 미안함을 축적해 간다. 사랑에 빠졌을 때에, 이기심은 비로소 자기를 사랑해줄 사람을 얻은 것이지만, 자기애는 자기가 사랑할 사람을 한 사람 더 얻은 것이 된다. 이기심은 스스로가 언제나 강자처럼 착각돼서 자신이 줬을지도 모를 상처만을 상상하며 자책하고 있다. 190
표정 : 눈빛
표정은 그러나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 표정은 얼마든지 가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정이 '읽힌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191
그에 비해 눈빛은 속일 수도 없고 속아지지도 않는 어떤 것이다.
눈빛은 품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92
자존심 : 자존감
자존심은 차곡차곡 받은 상처들을, 자존감은 차곡차곡 받은 애정들을 밑천으로 한다.
자존심은 누군가 할퀴려들며 발톱을 드러낼 때에 가장 맹렬히 맞서고, 자존감은 사나운 발톱을 뒤로 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길고 긴 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존심이 강한 자는 이기심이라는 커다란 호주머니를 달게 되고, 자존감이 강한 자는 자기애라는 목도리를 목에 감게 된다. 193
16 버림받은 말들을 어루만지다
사실과 진실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사실은 언제나 사실과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
머그잔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감각들을 동원하면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않게 되고, 그러므로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여기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이 진실보다 더 애매하다.
진실은 언제나 매복해 있다. 매복해 있기 때문에 불쑥불쑥 드러나며, 드러나지 않을 때도 많다. 198
순진함과 순수함
순진함은 때가 묻지 않은 상태다
반면, 순수함은 묻은 때를 털어낸 상태다.
순수함은 성숙함의 한 속성이며, 현명함에 대한 하나의 근거다. 순진한 사람은 속기 쉽지만 순수한 사람은 속지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조종하기 쉽지만 순수한 사람은 조종할 수 없다. 199
솔직함과 정직함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200
솔직한 행동은, 하는 사람은 편하고 대하는 사람은 불편할 때가 많다. 정직한 행동은, 하는 사람은 조금 불편해도 대하는 사람은 편하다. 201
질투와 시기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시기는 남의 것을 뺏거나 얻으려던 것을 못 얻으면 자기 것마저 잃게 한다. 202
반항과 저항
저항은 근본을 뒤바꾸는 혁명을 꿈꾸지만, 반항은 근본을 외면한 채 탈주만을 꿈꾼다.
→ 나는 지금껏 저항보다는 반항만을 해 왔던 것 같다.
착함과 선함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은, 선하게 살도록 배려되지 못한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인내하거나 해결하려고 용기를 내지만, 착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도록 배려되지 않은 환경에서 인내력도 없고 해결력도 없이 무력해지는 경우가 많다. 204
위선과 선악
위악은 욕망하는 바가 분명하지만 그것이 거부당하는 환경 속에서 쩔쩔매다가 주눅이 들어, 욕망하는 바를 억압하여 엉뚱하게 발산된다.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에게보다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더 쉽게 위악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도 선명한 욕망이 위악의 근거이기 때문에 그렇다. 205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선은 나의 식은 사랑과 당신의 식지 않은 사랑의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필요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악은 나의 식지 않은 사랑과 당신의 식은 사랑을 견뎌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17 집단, 정의, 마녀사냥
전쟁을 일으키고 독재와 학살을 일삼는 권력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개인이 취하는 이성의 목소리를 외톨이로 만드는 일이다.
18 순교와도 같은
두려움
연애
부모자식
나는 당신의 숨겨놓은 독, 엎질러진 약병, 완벽하지 못한 타인, 나는 당신의 내부의 내부, 나는 당신이 잃어버린 한쪽 머리, 댕강댕강 잘려나가던 단종된 참수형 처형기계… 216
시
19 길고양이가 쓰레기통을 헤집듯, '사랑해'라는 쓰레기통을 헤집다
처음 말해지는 '사랑해'
'사랑해'라는 말에는 반드시, '당신은?'이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도 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전제하지 않는 첫 고백은 없다. 221
'사랑해'라는 말에는 특허청에 등록을 할 때와 같이, 내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도용할 수 없다는 독점의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222
'사랑해'라는 말이 두 번, 세 번.. 반복될 때
'사랑해'라는 말에는 애초에 내용이란 없다. 그 내용 없음은 사랑하는 두 사람에 의해 각각의 방식으로 섣부르게, 주관되게, 함부로, 무책임하게 채워진다. 226
마지막에 하는 '사랑해'라는 그 말
마지막에 던져지는 '사랑해'라는 말은 '미안해'와 '고마워'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 228
20 이별의 능력
개운하다
'정든다'는 말처럼 단단한 지옥은 없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 정들이기 좋아하는 우리는 날마다 감옥을 짓고, 무덤을 만든다.
정든다는 것은 병든다는 것이다. 잠깐잠깐의 훈훈한 정기를 마취제처럼 흡입하여, 병들었다는 사실을 잊고자 한다. 정든 곳이란 상처와 같다. 상함이 거하고 있는 장소와 같다. 그러나 정을 버리고 나면, 비로소, 드디어 찾아오는 한결 다른 안정감이 있다. 233
미련이 남다
추억하다
추억하는 건 관조의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에 가능하다. 그리고, 관계에서 섭취한 것들의 영양분 때문에 포만감이 느껴질 때에 가능하다.
추억 속에 반성과 참회라는 덕목이 함께 있다면, 추억하는 자는 추억함으로써, 날마다 계몽된다. 237
도착하다
정복하다
마음의 공황
사랑의 순간에는 생의 하중을 가볍게 하며 생을 상쾌하게 지나갈 수 있게 했다면, 이별 이후, 생의 하중을 있는 그대로 다 견뎌내야 한다. 이별한 후, 존재는 어디든 있으나, 아무 데도 없게 된다. 242
망각
사랑하는 동안 급하게 흘러갔던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무능하게 바라보면서, 시간의 완급을 수십 번 되풀이하여 바라보면서, 흉터가 비로소 흔적으로 남는다. 그것을 우리는 망각이라고 말한다. 243
21 깊은 밤을 날아서
기억할 수도 없고 기억하기에는 맥락조차 없는 희미한 대화들을 오래도록 나눈 후에 전화를 끊으면,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된다.
깊은 밤을 날아서, 못 만나던 나의 심연이 나를 찾아온다. 심연에서는 물고기들이 통통해진 살을 자랑하듯 내 앞에서 헤엄친다. 작디작은 감정의 알갱이들을 심연에 비벼 뿌리며 물고기들에게 밥을 준다. 깊은 밤을 날아서 차마 못다 했던 일생의 말들이 속속 도착을 한다. 247
깊은 밤을 날아서, 묵혀두었던 진실들이 불어 닥친다. 248
깊은 밤에 나는 온전히 내 감정의 주인이 된다. 내 감정들은 더할 나위 없는 충복이 되어 나를 섬기고 나를 따르고 나를 위해 무릎을 꿇는다. 249
밤새도록 오로지 진실과 진리를 직조하는 직물기계였던 나는, 숙제를 말끔히 끝내고 내일의 책가방을 머리맡에 미리 싸둔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로 침대에 눕고 이불을 덮는다. 251
22 잔인한 아침
눈 뜬 아침, 간밤에 내가 어땠나, 어제의 일을 떠올린다. 간밤 꿈을 떠올리거나, 오늘의 할 일을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255
친밀했던 김에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간에 마음속에 쌓아둔 불만을 약간의 욕설을 섞어서 해보았을 뿐이건만, 그 모든 것을 참 교류로 나아가기 위한 해소로 보아주지 않고, 술을 못 이긴 객기로만 받아들이다니, 그래서 이토록 쩨쩨하게 낱낱이 나에게, 내 자신의 죄를 일러바치고 있다니, 그 목소리가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자는 굳은 결심을 하지만, 해질 무렵, 노을이 찬연히 깔릴 때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싶어 간절할 때에, 무슨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그 때에, "술 한 잔 할래?" 하는 친구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래, 가볍게 딱 한 잔만 하자"는 대답은 그러나 지켜지지 않는다.
나 아니면 누가 나를 달래랴 싶은 마음으로 시작된 혼자 술 마시기는, 우울을 끝까지 확장시킨 다음에, 우울이라는 손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자며 방을 하나 내어줄 때가지 계속된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는 않아서, 헛일했다는 공허함으로 뱃속이 허하게 채워진다. 259
23 무심함의 일곱빛깔
따뜻한 무심함
호방한 무심함
이기적 무심함
유니크한 무심함
작전상 무심함
무심한 무심함
무심하기엔 너무 째째한 당신
24 시간, 박약한 세계에 주는 은총
십대
이십대
그대는 터널처럼 외로운 날들을 통과하며, 터널 밖의 외로움이 더 헛헛할까 봐 미리 불안해 하고, 그 터널 속에서 손전등이 방전될까 봐 더더욱 불안해하지만, 또각또각 일보일보 전진한다. 276
질서와 의외성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프랙탈의 이론에 그대는 밑줄을 치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관장하는 질서에 대하여는 뉘우치고, 자신의 개성을 진두지휘하는 의외성에 대하여는 망설인다. 277
토끼들아, 멀리 뛰어라. 우리들의 고통이 사회적인 고통이 될 때까지, 피할 것은 피해가며, 예민하게 아파하며 뛰어라. 내일이면 또다시 소심찬 하루가 시작된단다."
삼십대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같은. 곧 먹구름이 끼어도 상관없고, 곧 억수비가 쏟아져도 상관이 없는듯한 무심.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미세한 진동과 떨림이 있는, 서러움을 속옷으로 껴입은 듯한 추위가 있는. 어떤 순간에도 겉옷을 벗지 않을 무뚝뚝함. 279
그렇게 되기 전에 그녀에게 묻고 싶다. 한 시절 열망하고 열망하던 어떤 것이 일순간 맥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무엇이 보였는지를 말이다. 무의미함의 자리를 대신할 어떤 커다란 깨달음 같은 것 말고, 오랜 열망의 결실이 무의미 그 자체일 때에 어떤 것이 보였는지를. 그 깨끗한 체념의 얼굴로 그녀가 대답을 해 주면 참 좋겠다. 무의미함이 가장 알맞은 형태의 유의미함임을. 막연하게 그러리라 내가 짐작하고 있는 이따위 말고, 그녀가 살아냈던 또렷한 흔적들을 통해서 말이다. 282
사십대
차마 표현하지 못한 채로 비워져 있는 문장의 자리. 안타깝고 어리석게 모든 것을 쏟아서 문장을 쓰고, 그리고 지워버린 자리. 283
나를 잘 몰랐던 시절, 내가 바라는 내 자신과 감추고 싶은 내 자신 중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알기가 두려워, 일부러 혼탁하게 섞여놓았던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럽게 나를 뭉개놓은 다음에 나는 내 자신에게 지독한 관심을 가졌더랬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285
나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는 힘으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거짓말투성이의 세상과 인간 너머의 세계를 보기 위해 애쓰며 글을 습니다.
그저, 터널에 갇혀 깜깜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님을 조용히 긍정합니다. 어둠 속에 갇혀서도 한사코 어둠 자체가 되는 일만큼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286
25 여행은 어땠니
여행을 가면 엽서를 보내게 되는 사람이 있다. 많이 반가워하지도 않고 동시에 조금도 뜬금없어하지 않을 사람.
그런 날은 엽서를 쓰는 데에 하루를 다 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오늘이 며칠인지를 생각하지. 그리고 오늘은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한다. 갈 만한 곳은 다 가보았고, 그렇다고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는 날에, 오늘은 엽서를 써야겠다 생각한다.(이런 날은 내가 내게 '너 오늘 외롭구나?'하고 묻지만, 못들은 척한다.) 289
그냥 그것은 외롭다는 것인데, 외롭다는 것을 절대로 발화해선 안 되는 공간이 있다면 아마도 혼자서 떠난 여행지일 거다. 290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92
여행은 어땠느냐고… 해질 녘이 되어도 한가롭게 날기나 하는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를 탕진했지. 그 재미는 눈물나게 좋은 거더라. 하루는 이렇게 쓰는 게 옳다는 조용한 희열도 찾아오니까. 이렇게 일생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란 생각에 혼자 빙그레 웃곤 하니까. 294
26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우리는 살면서, 인류가 겪은 사랑의 역사를 각자가 개별적으로 요약한다.
고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출구로, 영원을 믿어보기 위한 실험으로 사랑을 쓸모 있게 받아들인 적도 있다. 298
동질감의 다음 정류장은 이질감이며, 공생의 다음정차 역은 기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299
평범하게 살아야만 들키지 않을 첩보원처럼,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생활을 하며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첩보원의 첫 번째 계율은 사랑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임을 명심하며.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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