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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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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6일 10시 28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9.

 

천의 얼굴.jpg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Ⅰ. 저자에 대하여 조셉캠벨

 

1. 신화는 나의 운명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904~1987.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조셉 캠벨이 어느 대담에서 ‘千一夜話천일야화’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이런 대목이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쟁기가 무언가에 걸렸다. 그는 무엇이 걸렸는지 보기 위해 더 깊게 파고들어가다가 고리를 하나 발견했다. 그 고리를 들어올린 순간, 그는 보물이 가득한 동굴을 발견했다’.

 

캠벨은 신화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동굴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 더 깊게 파고 들어가댜 하는 것이다. 캠벨의 책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의 초대이다.

 

나는 1904년 3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10년 남동생 찰리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러 갔다. 그 순간 아메리카 원주민이니 인디언들에 대한 평생에 걸친 관심이 촉발되었다. 그 날 본 인디언의 토템 포올과 가면 그리고 기둥에 매료당했다. 나는 미국 인디언 문화에 대한 책들을 즐겨 읽었고,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찾아갔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겼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했다.

바로 이 공부가 캠벨을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1913~1918년 나의 가족은 뉴욕의 뉴 로셀로 이사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굉징한 관심을 가졌던 캠벨은 공립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을 전부 다 읽었다. 11세에 성인 도서 서가에 출입할 것을 허락받고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 14세에 병이 걸려 한동안 집안에 머물며 자연 과학을 공부한다.

 

내 경우에는 열한 살 때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해 열광한 적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 인종국의 보고서인 <파크먼 전집>을 비롯해서 그 주제에 관한 갖가지 책들을 사 주셨다. 나는 제법 훌륭한 소규모 장서를 갖고 있었으며, 책버팀대로 사용하는 멋진 인디언 두상들이며, 나바호 족 깔개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19년 우리 집(뉴 로셀의 집)에 불이 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에게는 크나큰 재난이었다. 그 사고로 인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수집한 인디언에 관한 책이나 유물들이 불타버렸다.. <신화와 인생. 261p>

 

 

1919~1921년 코네티텃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 학교에 입학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생물학이었다.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2학년 때, 나는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di'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했다.

1924~1926년 육상팀이 주자로 나는 0.5마일 경주에서 콜롬비아 대학과 뉴욕 시의 기록을 세웠다. 또한 대학의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동양철학의 세계에 이끌린다.

 

1925년 콜럼비아 대학에서 문학 학사학위를 받고 샌 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AU 선수권 대회에 뉴욕 체육 동호회 육상팀과 함께 출전했다. 하와이에도 방문하고 워싱턴의 아카데미에서 열린 인디언 로데오에도 참가한다.

 

1926년 콜럼비아 대학으로 돌아와 육상팀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중세문학을 공부한다. 성배에 관한 석사논문 ‘가슴 아픈 일격 The Dolorous Srtoke'을 쓴다.

 

2. 우드스탁에서 나의 신화를 만들다

 

나는 일찍이 유럽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고 파리 소르본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번역자인 조지프 베디에르 아래서 로망스어, 문헌학, 고대와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라틴어 그리고 음유 시인의 시들을 공부했다. 유럽에 가서야 나는 현대 예술을 발견했다.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현대 문학인 예이츠, 엘리엇,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를 접했다. 나의 친구 안젤라 그레고리는 나에게 미학을 가르친 저명한 조각가 앙투안느 부르델의 스튜디오에서 나의 흉상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의 파리는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1928년 독일 뮌헨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괴테와 토마스만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또 저쪽에서. 그 당시에 내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 켈트 로망스에 관한 내 관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2주 전에 귀국했다. 나는 대학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나는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수강한 상태였고, 이제 그 망할 놈의 논문만 쓰면 땡이었다. 하지만 대학 측에서는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나는 박사논문을 접고 대신 여동생 앨리스와 함게 우드스탁 숲속으로 들어갔다. 1년에 20달러짜리 오두막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사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5년간이었다. 나는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그저 책만 파고들었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그 당시는 대공황의 오중이었다.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지만, 당시 뉴욕에는 스테처트 해프너라는 큰 서점이 있어서 나는 거기다가 책을 주문했다. 하지만, -특히 프로베니우스의 책들은 매우 비쌌다. 그 즉시 책값을 지불하지는 않았다. 대공황 때에는 다들 그랬다. 서점에서는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나는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 그야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나로선 지금도 감사해 마지않을 만한 일이다.

 

돈이란 내게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3주 만에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당시 내가 지닌 유일한 재산은 대학의 어는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해서 모은 것뿐이었다. 다해서 수천 달러가량 되었는데-그 당시에는 제법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이 완전히 바닥날 대까지 버텼다. 다시 말해 이후 5년동안 나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했던 것이다. ....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자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나는 융을 읽었고, 그의 사고 체계가 근본적으로 슈펭글러의 사고 체계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버무리기 시작했다.

 

내 경우 20대와 30대, 심지어는 40대에도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은 나의 스승이었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대담중인 모이어스가 질문을 했다.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삶에서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된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신화의 힘 197p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무얼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진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종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뭇가지는 이쪽으로 자랄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자랄 수도 있으며, 그리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자랄 수도 있다.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파르치팔은(성배 성에서 왕의 부상에 관해 질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고서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던 대로 행했기 때문에 오히려 망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1931~1932년 나는 진로를 구상하기 위해 혼자서 차를 몰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Model T Ford로 향해 간다. 가는 길에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들러 나의 오랜 친구이며 영양사인 아델데이비스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존 스타인백과 캐롤 스타인백 부부와 그들의 이웃이었던 생물학자 에드 리켓을 소개해 준다. 에드 리켓과 나는 알래스카의 브리티쉬 콜럼비아까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조수간의 동물군을 수집하는데, 이 여행은 신화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믿음을 재확인시켜줬다.

 

3. 우주의 가락에 춤을 춘 캠벨

 

1933년 85개의 대학들에 지원을 한 끝에 나의 모교였던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예비학교)에 취직했다.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치는 한편,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등에 대해 공부했다. 나는 그해 말에 은퇴하고 다시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에 열중했다.

 

1934년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이후 38년 동안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 그의 방대한 지식과 다양한 어학 실력 앞에서는 모두가 혀를 내둘렀는데 신기하게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했다.

캠벨이 로렌스 대학에서 재직할 당시에. 한 여학생이 캠벨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는 그 분이 내어 주시는 일 주일분의 독서량에 기가 막혔답니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서 그 분과-사라 로렌스 대학식으로-맞섰습니다. 그 학생이 그랬지요.

“선생님께서 이시다시피 저는 이 과목만 듣는 게 아니고 다른 세 과목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독서량을 할당하십니다. 도대체 이걸 일 주일에 어떻게 다 읽으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캠벨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이러시더군요.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 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팽생 읽으라는 것이네. ” ]

 

1938년 나의 학생(사라 로렌스 대학)이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나의 나이 34세였다. 유명한 무용가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어드먼은 훗날 일류 무용가로 명성을 떨쳤다. 나는 내가 쓴 것을 모두 진에게 읽어 주고, 그러면 아내는 내게 필요한 비판과 지원을 해 주었다.

 

1941년 인도연구자 하인리히 침머를 만났다. 침머는 나에게 볼링겐 시리즈이 설립자 폴 멜론과 메리 멜론에게 소개시켜준다. 나는 볼링겐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자 나의 첫 번째 출판물인 제프 킹 글, 모드 오크스 그림의 <그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 나바호족의 전쟁의례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 A Navaho War Ceremonial> 라는 주석본을 만들게 된다.

 

1942년 이후 3년 동안 스와미 니키라난다와 함게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The Gospel of Sri Ramakrishan> 과 < 우파니샤드 Upanishads >의 번역과 편집을 진행한다.

 

1943년 침머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캠벨인 나에게 침머의 유작들의 편집을 부탁한다. 나는 12년 동안 이 작업을 하여, 1946년 <인도이 예술과 문명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1948sus <왕과 시신 The King and the Corpse>, 1951년 <인도철학 Philosophies of India> , 1955sus <인도 아시아의 예술 The Art of Indian Asia>을 출판한다.

 

1944년 헨리 모튼과 함께 쓴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 가 출간한다. <그림 동화>의 주석을 쓰고, <댄스 옵서버 The Dance Observer>지의 편집진에 참여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의 집필을 시작한다.

 

1949년 두 곳의 출판사에서 수정 요구 및 거절을 받은 후, 볼링겐 시리즈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 출간된다. 이 책을 국립예술문자협회상을 받는다.

 

1953년 크리에이티브 영화 재단의 대표가 되었고,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열린 에라노스 협회에서 20여 년 동안 나온 회보를 모은 <에라노스 연감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나는 이 일로 스위스에서 칼 융, 마르치아 엘리아데, D. T. 스즈키 등을 만난다.

 

1954년 안식년을 맞아 인도, 스리랑카, 타이, 버마, 홍콩, 일본 등을 여행한다. 1956년 워싱턴 D.C. 의 국무부 외교연수원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1957년 그가 편집한 에라노스 협회의 첫 번째 회보, <의미없는 상징 The Symbol Without Meaning>이 출간된다.

 

1959년 나는 에라노스 협회에서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와 의례 Renewal Myths and Rites of the Primitive Hunters and Planters>를 출간하고,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 시리즈의 1권이 출간된다.

 

1967년 ‘예술, 종교, 현대 문화 학회’의 운영진이 된다.

1972년 뉴욕시의 쿠퍼 유니온에서 행한 강연을 모은 강연집,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이 출간된다. 캠벨은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퇴임하고 ‘종교학회’ 회장이 된다. 아이슬란드와 터키를 여행하고, 아내인 진 어드먼과 뉴욕 시에 ‘앨린 눈 극자 Theater of the Open Eye'을 세운다.

 

198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감독/ 새로운 영화 축제에서 <영웅이 여정; 조셉 캠벨의 세계 The Hero's Journey: The World of Joseph Campbell>의 시사회가 열린다. 10월 30일, 조셉 캠벨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한다. 캠벨은 존 F. 캐네디 암살 24주년이 되는 날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1987년 12월에 PBS에서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이 방영된다.

1988년 사라 로렌스 대학교에 ‘비교신화학의 조셉 캠벨 강화’가 개설된다.

1991년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조셒 캠벨으 생애나 저작, 강연기록 등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Joseph Campbell Foundation(www. jcf. 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에게 열어 준 많은 가르침의 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열린 세계 종교 학회에서 캠벨은 뉴욕의 사회철학자와 일본 신도의 신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 의례를 숱하게 보아 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 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인 신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갤르 가로 저으면서 응수한다.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캠벨의 인생철학은 이른바 ‘희열을 쫓으라 Follow your bliss’이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의 말을 하되 言外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길잡이로 잡았다. 많은 신화나 인류의 종교가 서로 다르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1948년 6월 10일 뉴욕에서.

 

-> 신화는 은유다. 은유를 다양한 각도와 입체적인 차원에서 해독한다면, 미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삶이나 꿈도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라와 민족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성이 바로 인류가 꿈을 꾸는 것. 지역과 토양, 기후에 맞게 적용해 갔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 우주 에너지가 인류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신화인가. 인류 무의식속에 숨어있는 깊은 꿈, 나만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공통으로 꾸는 꿈이 문화로 나타나는 것이 유산이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 모두 모여 의식이나 제의를 치르는 것은 상징성을 부여한다. 쉽게 말해, 결혼식, 제사, 추석이나 설날에 드리는 세배, 또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만난지 100일 되는 이벤트 이런 모든 것들이 의식을 치름으로써 하나의 상징으로 서로의 공통점을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

민족마다 신화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단일성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25.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 tomb of the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 Womb of the tonb 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 쉽게 풀이하면, 인간은 어머니라는 자궁womb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을 때 가는 곳이 무덤tomb이다라고 이해했다. 동양사상으로 풀이하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이다. 그래서 인간은 흙을 떠나서 살면 인간성을 잃어버린다든가, 병을 얻는다는가, 정신적인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토인비 교수가, 6권에 달하는, 문명의 영고 성쇠의 법칙에 관한 연구서에서 지적했듯이,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란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육체적 죽음이 아닌 정신적 죽음을 자주 겪어야 한다. 자꾸 죽음으로써 부활하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을 보는 모습은 기쁨이다. 성장의 기쁨을 느낀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detachment>과 <변용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withdrawal 과정은, 외적이니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에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옳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 외부에서 내부로 내의식을 옮기는 작업이다. 위기가 생기면 외부를 탓하다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과거에 내가 어떤 행동으로 살아왔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이 시선이 이동이다.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의식이동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다.

 

30. 요컨대,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 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 原型心象, Archetypal images> 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힌두와 불교 철학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 viveka> 즉, 분리 discrimination 의 과정이라고 한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 꿈이 인격화한 신화라면, 그 꿈을 꾸는 개인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고민이다. 꿈은 개인이 해석할 수 있는 주관성이다. ‘꿈보다 해몽’인것처럼, 꿈속에 나타난 상징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래서 해석하는 사람의 일상의 태도나 사고가 작용한다. 성격대로 산다는 말속에 한 개인의 삶의 방향이 모두 들어있다.

 

33.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 (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4.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 아둡고 궃은 길은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둠속에서 헤매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좋고 나쁘고 상태의 양호 상태를 알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불화가 있어야 진정한 평화를 알게 되고, 비가 오고 폭설이 내리는 날을 봐야 햇빛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항상 늘 좋고 평안한 상태는 사람을 나태하게 하고 부패하게 만든다. 어려움에 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

 

36. 판다라의 상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신들의 선물인데, 이 안에는 존재의 고통과 축복의 씨앗뿐만 아니라 미덕과 희망까지도 들어 있다. 이 상자의 도움으로 꿈꾸는 사람은 강을 건너 반대편 강 언덕에 이른다. 그리고 이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 발견과 자아 발전을 꾀하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8.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 무엇을 만드는 장인은 그 무엇이 어디에 쓰일지 묻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주문한 것을 더 기이하고 정교하게 잘 만들것인가에 대한 완성도에 몰두한다. 왜 만들고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그 시대의 도덕률을 따지지 않는다고 정의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1차 2차 세계대전때 이름난 과학자는 납치되어서 강압에 못이겨 무기 개발에 참여하기도 한다. 무기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무기가 인류를 살상하는데 쓰이는 목적에 쓰이기 때문에 그 무기를 발명한 사람을 생각없음의 인간으로 취급한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알수 없는 게 삶이다. 힘든 것을 회피하기보다는 직면하면 그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보물은 겉으로는 가시밭길과 굴곡이 많아 보이는 그 길을 통과하다보면, 자신에게 뜻하지 않는 선물을 안겨주는게 삶에서 보여주는 과정, 영웅의 과정들이 우리들의 과정이다.

 

2. 비극과 희극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아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 행복한 가정은 비슷비슷 세상이 정하는 기준에 부합된 경우가 많다. 불행한 사람과 가정은 수만가지 이유가 가득하다.

 

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 두렴움은 두려움의 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두려워한다고 한다. 두려움이나 공포는 알 수 없는 형체나 그림자 때문이다. 알수 없기에 두렵다.

 

40. 길버트 머레이 G. Murray가 잉그람 바이워터 I, Bywater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Poetics> 번역판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비극적 카타르시스 tragic katharsis: 즉 연민과 공포의 체험을 통한 비극 관람자 감정의 <순화 purification> 혹은 정화 purgation는, 손발이 잘린 우두신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와 비의적秘儀的 연극의 기능이었던 초기의 제의적 카타르시스 ( ritual katharsis: 과거의 오점과 독소, 죄악과 죽음의 오염으로부터의 사회의 순화)에 상응한다.

비의적 연극에서, 명상하는 정신은, 죽을 팔자를 타고 태어난 육체가 아니라, 한동안 육체에 깃드는 영속적인 생명의 원리와 합일하며, 실재가 허깨비로 분장(고통 받는 자와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하고 있을 동안.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던 비극)이 우리 필멸의 육체를 찢고 해체할 때, 우리들 자신은 바로 그 밑바닥으로 녹아 들어간다.

 

42. 냄비 속에서 끊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偶有性우유성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 인 것이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오비디우스, 변신-

 

-> 순환적 우주관이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 죽은 것은 다시 태어나고, 생성한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순간 다시 태어나는 준비를 하는 것. 모든 기운과 운행은 반복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음으로 아래에 새로운 손자 손녀가 태어나고 죽음과 삶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다만 그 형체 그대로가 아니지만, 크게 보면 주기적으로 삶과 죽음이 반복된다.

 

43.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 형체는 사라지고 없어지지만, 정신과 영혼은 살아있고 남아있으며 세대에서 세대로 계속 이어진다.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전설이 실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라도 승리의 행위는 꿈같은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지 실물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뜷린 길인 것이다. ....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 신화는 오래전에 잊혀졌던 심연의 막강한 힘이 있음을 깨닫고 현실에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 삶은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3. 영웅과 신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 monomyth의 핵심 nu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 세계의 배꼽

 

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 외부에서 찾았던 신이 결국은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를 넘어선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이 결국은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55.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 진리에 가는 길은 수많은 길이지만, 진리에 도달하는 종착점은 하나이다. 종교에서나 신화에서 추구하는 최선의 진리는 결국은 하나이지 않던가.

 

60. 태양은 희생 제물로 풍성한, 끊임없이 새 음식으로 가득 차는 신의 쟁반이고, 신의 살은 고기며, 신의 피는 마실 것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 대한 자양의 공급자다. 난로를 점화하는 햇빛은 신적 에너지와 세계의 자궁과의 교합을 상징한다. -축과 축이 만나면 두 바퀴는 회전한다. 태양문을 통한 에너지의 순환은 연속적이다. 신은 이 태양문을 통하여 하강하고 인간은 이를 통하여 상승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요한복음 10:19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복음 6:56

 

62.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

 

-> 자연은 악하지도 선하지 않다. 중립적이다. 다만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했을 때, 자연이 악하다 선하다 말할 뿐이다. 풀어 말하자면, 주방에 있는 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요리할 때 쓰이면 좋은 쓰임이요, 도둑이 들어와서 주방 칼을 휘두르면 흉기로 변하는 악한 것이 되는 원리와 같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헤라이클레이토스

 

-> 세상이 똑같다면 재미없을 것이다. 다름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조화를 이룰 것이다. 다툼에 의해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63.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편린들이다. -시인 블레이크Blake

 

-> <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서 잠깐 들여다보자.

나무와 풀이 돋아나는 봄기운이 나타난다. 나무가 자라나니 木의 기운, 초록으로 물든다.

여름은 더우니 불火의 기운이며 불은 빨간색赤의 열기다. 남쪽이다.

가을은 서쪽이며 金의 기운이며 백색이다.

겨울은 모든 기운이 잠을 자니, 흑색이다. 물의 기운이며 북쪽이다.

 

65.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한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이제 대지 위에서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즉 대지라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웃음 지으며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 -니체

웃음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제대로 직시하기 위한 수단이며 정신을 이완시킨다. 살아갈 수 있는 웃음은 허탈한 웃음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면서 자기 삶의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71.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 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 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 번째 조짐이다.

 

2. 소명의 거부

 

82.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87.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3. 초자연적인 조력

 

95. “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

꽃가루는, 서남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 믿어지는 심적 에너지의 상징이다. 이 꽃가루는 의식에서 악령을 몰아내고, 삶의 상징적인 길을 알아내는 데 널리 쓰인다.

 

4. 첫 관문의 통과

 

5. 고래의 배

 

123.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

 

제2장 입문

1. 시련의 길

 

142. 수메르의 신화는 서구 세계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 (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2. 여신과의 만남

 

148. 아르테미스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153.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잇다. 악타이온의 예에서, 정상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이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삶,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61. “ 한 방울 이슬로 녹이고, 누그러뜨리고, 풀기엔 이 역시 너무나 단단한 육체!

아니면, 영원의 신도 이 자기 학대자에겐 대포를 겨누지 못했음인가? 오, 신이여, 신이여!

 

이 세상 만사가

나에게 진부하고, 짜증스럽고, 무익한 허접쓰레기로 보이는구나.

싫구나. 참으로 싫구나. 자라서 씨앗을 맺을 이 잡초투성이의 뜰이.

자연 안에서 무성한 이 잡초가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 싫구나. “

-햄릿

 

165. 오, 은자여. 아름다운 은자여! ... 그대 내 어깨로 손을 얹어 보아요. 불 같은 화살이 그대 핏줄을 타고 지나는 것 같으리니, 아니, 내 몸의 더 비천한 곳을 점유하시면, 제국을 정복한 것 이상의 격렬한 기쁨을 맛보시리니. 그대 입술을 더 가까이.

 

4. 아버지와의 화해

 

185. 죽음을 당했다 부활한 디오니소스의 비문이기도 한 이 <다튀람보스>라는 말을, 그리스인들은 <두 문을 지난 사람>, 즉 재생의 무서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그리고 우리는 신(식물의 재생, 달의 재생, 태양의 재생, 영혼의 재생과 관련되어 있고, 새해의 신이 부활하는 계절에 섬김을 받언)을 찬양하는 주신의 송가와 어둡고 피비린내나는 의식의 고전적인 비극의 제의적 시작을 상징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대 세계에는 어디에나 그런 신화와 제의가 허다했다.

 

192.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자연계의 부수적인 양극성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이글거리는 태양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한 쌍의 대립적인 원소인 불과 물의 배후 에너지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191. 생수는 신의 눈물이다. 여기에서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비관적인 어느 수도승의 통찰은, <과연 생명>이라고 찬탄하는 아버지의 낙관적인 확신 속으로 수렴된다.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한 고통, 머리를 터뜨리는 듯한 미망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 참해적이로, 쾌락적이고, 분노에 떨고 있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192.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5. 신격화 Aptheosis

 

196. “옴마니 밧메홈(妙法蓮花, 즉 연화 속에 보석이 있다” 도 그 보살을 향한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 (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붙여지고 경계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空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갸 공에 들겟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즉 <만물에는 불성(不成)이 있으니>,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197. 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가 고통과 쾌락을 깊은 휴먼 상태로 구속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그는 8천 나르이 빛으로 잔 화환을 쓰고 있는데, 이 화환은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그의 몸은 자금(紫金) 빛이다. .... 그가 땅에다 발을 디디면 곳곳에 흩어진 금강석과 보석의 꽃치 사방을 뒤덮는다. 그의 얼굴은 금짗이다. 보석으로 만든 그의 존에는 키가 천리에 이르는 부처가 서 있다.

 

198. 관음은 범인과 현자에게 두루 신성한 존재다.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劫)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에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 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非二元的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훔>인 것이다.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6. 홍익

 

198. 중국 역사의 시원인 성녀 ,타이유완은 남성적 원리인 양(陽)과 여성적 원리인 음(陰)을 두루 갖추고 있다. -밝고 능동적이고, 남성의 원리인 양과 아둡고, 소극적이고 여성의 원리인 음은, 그 상호 작용으로 형상이 있는 모든 세계(만물)을 빚고 구성한다. 이 음양은 하나로 어우러져 <도(道), Tao)>, 즉 존재의 근원과 원리를 빚어낸다. <도>란 <길> 혹은 <방법>이란 뜻이다. <도>는 자연, 운명, 우주 질서의 <방법> 혹은 <진로>다. 따라서 <도>는 <진리>이며 <바른 행실>이다.

 

200. 눈먼 선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이자 여성이었다.

 

200. 시바는 배우자인 샤크티와 한몸으로 결합된(시바는 오른쪽, 샤크티는 왼쪽)된 채 (반녀의 주)라는 뜻인 아르다나리사로 현현한다.

 

203. 여자의 질에서 나온 월경혈, 남자의 정액, 그리고 오줌과 물과 남성의 유두에서 나온 젖을 동시에 상징한다. 피가 흘러내린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탸낸다.

즉 그들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세계의 샘은 동일한 것이다.

 

204.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펑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머리를 자르는 습속이 있는 사회(가령 뉴기니아에서처럼)에서는 단순한 복수전이 아닌, 머리 자체를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뿐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도은 끊임없이 집단 폭력으로 발전한다.

아버지, 어머니적인 모든 <선한> 요소는 집단의 평화로 수렴되고 <악한> 모든 것은 외부로 투사된다.

 

205. 종족 및 인종적 토템과,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겨냥한 제의는 사랑으로 증오를 정복하는 심리적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나타낸다.

사랑과 증오의 두 원리가 서로 헤어지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210. 무한한 사랑이며, 전능한 보살인 관세음이 지각 있는 모든 존재를 포용하고, 굽어보고, 또 그 존재 안에 거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마음 안에는 평화가 있다.

이 분의 이름은 <내면에서 보이는 주 The Lord Who is Seen Withen>이기도 하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릭라 만나느 stkfka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싲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겨웅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운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3. 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 Nirvana 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 (三毒)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카라 마라는 미래의 부처를 적대했다. 이 카라 마라는 <욕망과 적의>, 혹은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마술사인 <사랑과 죽음>이다. 카마 마라는 다름 아닌 세 겹 불의 화신, 마지막 시련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고비의 화신, 열반을 향하여 여행하는 우주적 영웅이 극복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의 수호자다. .. 뜻밖의, 마지막 육신의 불길이 그를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불길이 다시 타느냐 꺼지느냐가 결정되는, 모든 것이 달린 순간이었다.

이 유명한 전설은, 동양의 지혜를 신화와 심리학과 형이상학에 밀접하게 관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본보기다.

 

213. 프로이드 학파의 용어에 따르면, 삶의 욕망(불교의 <카마> 즉 <욕망>과 일치하는 <에로스> 혹은 <리비도>과 죽음의 욕망(불교의 <마라>, 즉 <적의와 죽음>과 일피하는 타나토스thanatos 혹은 테스트루도destrudo는, 내부에서 인간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두 개의 추진력이다.

 

215.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寂滅)> 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싱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215. 별,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꿈,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216. 생각을 초월할 수 있는 진리<공(空)>의 안쪽에서 다시 바깥의 현상계를 바라보면서 보살은 이미 안에서 깨달은 동일한 존재의 바다를 바깥에서도 지각한다.

 

<형상色은 빈 것空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

 

217.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Jivan mukta,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 힌두교-

 

219. 일본의 다례(茶禮)는 도교 신봉자의 지상 낙원의 정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안식의 집이라고 불리는 다실은 시적인 직관의 순간을 감안해서 세운 가건물이다. <무위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이 방에는 장식이 배제된다. 혹 그림이나 꽃꽂이가 잠시 놓이는 수는 있다. 다실이 있는 건물은 <파격의 집>이라고 불린다. 불상(不詳)칭의 파격은 움직임을 암시한다. 의도적인 미완성 공간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공간이다.

 

손님의 뜰길을 따라 들어와, 허리를 구부리고 문을 들어서야 한다. 이어서 그림이나 꽃꽂이, 소리를 내며 물이 끊고 잇는 주전자에 예를 표하고 바닥에 정좌한다. 통제된 단순성에 의해 지배되는 극히 단순한 분위기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 안에서 무한한 존재의 비밀을 안은 침묵으로 일관된다. 손님은 자신과 관련된 경험을 묵상할 수 있다. 다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그 축소된 우주와 불사의 선인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깨다는 것이다.

위대한 다도의 달인(達人)은 천상적 경이를 체험된 순간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이어서 이 경험은 그 다실에서 가정으로 확산되고, 가정에서는 국가로 침윤했다.

 

222. <나무, 바위, 불, 물,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이다. >

어느 나이 많은 아파치가 한 말이다. 불교도들은 이것을 <무정물에 대한 설법>이라고 부른다.

 

223. 보살 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사)이 두 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223. 티베트 어의 <윰 yum>은 찰나로, 즉 <얍yab>은 영원으로 보아야 한다. 이 양자의 결합은 이 세계를 창출한다. 이 안에서는 만물이 찰나적인 동시에 영원하며, 만물이 스스로를 아는 남성과 여성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다. 입문자는 명상을 통해 자기 내부에 있는 이 형상들 중의 형상yab-yum에 대한 기억속으로 끌려든다. 이 입문 의식의 목적은 열반(영원)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양자가 번갈아 찰나와 영원으로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고, 각자가 그들이며, 이원적인 형상 yab yum으로 보이는 것은 환상 때문이지만 이것이 또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224. 벼락은 질서이자 영원성이며, 방울은 <교화된 마음>이다. 방울소리는 피조물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 듣는 영원의 아름다운 소리다. 따라서 이 소리는 내면의 소리다.

 

6. 홍익(弘益)

 

226. 샘은 세계이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成)은,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불이 꺼진다는 것 역시 죽음을 상징한다.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음식은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형체를 만드는 우주적 근원의 권능을 상징한다.

 

228. 주술사의 두 번재 신조는 이를 투사하는 것이다. 즉 ‘너의 몸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사람들 몸속에 병원체를 쏘아넣는 다른 마법사’라는 것이다. 세 번째 신조는 복원이다. 즉 ‘나는 사람들의 내부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고 복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귀중한 육체적 내용물의 원초적 요소가 이 치료 행위에 도입된다. 즉 빨아내거나, 문지름으써 환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231. 육체와 영혼의 양식, 마음의 평화는 다름 아닌 만병 통치약, 즉 마르지 않는 젖꼭지가 내리는 은혜다.

 

244. 그들은 바다를 건넜다. 해변에 이르자 길가메쉬는 시원한 웅덩이에서 몸을 씻고 그 옆에서 쉬었다. 그러나 그가 잠들어 있을 동안 뱀이 그 풀의 향내를 맡고 다가와 풀을 물어가 버렸다. 이 풀을 먹은 뱀은 권능으로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잠을 깬 길가메쉬는 퍼질고 앉아 통곡하니, <눈물이 그의 콧등을 타고 내렸다>

 

248.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동자를 크게 해서, 육체와 그 종자(從者)인 개성이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럿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인 것이다.

 

<나무의 정의>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逸, 고요할 정, 없어지고 달아날 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魔)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道)다. 도는 영원ㅇ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248.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發願)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물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空)에 대한 자각이다.

 

 

제3장 귀환 Return

1. 귀환의 거부

 

255. 무추쿤다 왕은 크리슈나를 둘러싸고 있는 광휘로 대번에 그가 신의 화신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무추쿤다는 구세주 앞에 무릌을 꾾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렸다.

“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215. 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276.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은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도들이 크리스마스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동지는 태양의 귀환하는 순간, 혹은 재생하는 순간이다. 동지에 집 안에다 나무를 장식하는 풍습은, 현대 독일어로는 여성 명사인<태양Sonne>을 섬기던 게르만 이교도들 제사에서 유래한 유쾌한 풍습이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282. 밤에 꿈을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282. 립 반 윙클 이야기는, 귀환하는 영웅이 처하는 미묘한 상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야기갇. 립 반 윙클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때 그러하듯이 무의식적으로 모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힌두교도들은, 깊은 잠 속에서 자아는 통일되고, 따라서 지복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깊은 잠을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순지 상태, cognitional state>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간에 근원적인 흑암의 세계 방문을 통해 우리는 원기를 얻고 정신을 충전시킨다고 해서 우리 삶 자체가 그로 인해 개혁되는 것은 아니다.

 

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Purana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올림포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인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으믕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직접적인 지상의 고통과 기쁨을 무릅쓰고 어떻게 이 같은 우주적 관점이 유지되겠느냐는 것이다.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겁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놓는다. 이렇게 되면 균형은 무너지고 정신은 비트적거리며 이윽고 영웅은 타락하고 만다.

 

289.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은, 신에 버금가는 사람은 발로 땅을 밟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신성성, 주술력, 터부, 혹은 신성한 인물, 또는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에게 충만하다고 믿어지는 신비스러운 힘의 성질에 대해, 고대 철학자들은, 그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라이든 병(甁, 단지, 항아리)에 전기가 충만해 있듯이 신성한 인물에 충만해 있는 물질적 실체 혹은 액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라이든 병의 전기가 양도체와 접촉하는 경우에 방전하는 것처럼, 신성한 인물 속에 충만한 이 신성성, 주술력도, 훌륭한 양도체와 다름없는 대지와의 접촉으로 방전, 고갈되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예에서 우리는, 신성한 인물의 절연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가 속한 사회를 위한 예방책으로 권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293. 여자의 욕정은 남자의 욕정보다 더 사나운 법,

 

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대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 분모가 엿보인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립 반 윙클에겐 이런 반지가 없었다. 이 반지는 또, 일상의 현실은 저승의 현실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생시의 믿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카라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5. 두 세계의 스승

 

298.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이 영원한 순간아. 자기 개인의 운명에 대한 카마르 알 자만이 로맨틱한 자각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두 세계의 문턱을 넘나드는 훌륭한 통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심연을 꿰뚫어보는, 심오한 참으로 심오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관심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300. 아르쥬나가 주에게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보이라고 말했다.

“나의 모습은 수십만 가지닌, 그 종류와 형상이 가지각색이니라. 볼지어다. 모든 신들과 천사들을, 일찍이 인간이 보지 못했던 수많은 경이로움을 볼지어다. 바로 오늘, 너는 나의 이 몸 안에서, 살아 있는 것들과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이 모두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우주를, 네가 보고 싶어하던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허나, 네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내 너에게 영험한 신의 눈을 줄 터인 즉, 볼지어다. 궁극적인 내 요가의 권능을...”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차원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케나 우파니샤드’에-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변모는, 개인적 의지를 소각시켜 버린 추종자들, 즉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인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익히 보아온 모습을 보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베다經典를 공부한다 하더라고,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고,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고,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잇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예수는 똑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이러한 무애적(無碍的, 방해할애)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6. 삶과 자유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09. 절망한들 이득이 없는데도

사람은 저에게 득될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313.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이로써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제 4장 열쇠

 

317.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死者)

 

317.

유입된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위적이든, 우연히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이러 저러한 이유에서 이야기의 어떤 요소는 무의미하게 되거나, 때로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부수적인 해석이 첨가되기도 한다.

 

321.

이 물의 신성(神聖)이 재생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성령이라는 남성적인 불에 영성적인 응감된 여성적인 물은, 모든 신화의 심상적 체계에 익히 알려져 있는, 기독교식 변형의 물 water of transformation이다. 이 의식은 힌두교의 링감(남근상)으로 상징되는 비의인 세계와 남성을 생성, 재생시키는 근원적인 작용으로서의 신성한 결혼의 변형이다. 이 세례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뜻하며, 그 표면을 휘젓즌 것은 밤-바다로 열린 문턱을 넘는 것을 뜻한다. 물이 머리에 뿌려지는 순간 아기는 상징적으로 그 여행을 경험한다. 이 여행의 목적은 부모와 함께 영원한 자아 enteral self, 성령 the spirit of God, 그리고 은총의 모태Womb of Grace를 방문하ㄴ데 있다. 이 상징적 행위가 끝나면 아기는 다시 육신의 양찬에게로 되돌아온다.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Emanations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326. 기담(奇譚, 전설적인 영웅의 생애, 조물주들의 놀라운 능력, 죽은 자들의 혼령, 집단의 토템적 조상을 즐겨 그리는)을 통해 인간 행동의 의식 패턴을 이루는 무의식적 욕망, 공포, 그리고 긴장은 상징적 표현을 획득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誤讀)되어온 심리학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 <호모 사피엔스>의 수수께끼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 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全景)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32.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332. 신은 잠자는 공주, 즉 영혼을 깨우는 편의수단이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332. 상징에 대한 명상은 -형이상학, 심리학 등-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티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우주의 순환

 

333.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38.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제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즉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339. 살아 있는 존재의 일상적 실제 체험이나 살아 있는 우주의 광대한 양상은 같은 것이다. 잠의 심연 속에서는 에너지가 재충전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이 에너지는 고갈된다. 우주의 생명도 고갈되면 재생되어야 한다.

 

339. 힌두교에서는 성스러운 음절인 <옴 AUM>으로 이 신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A>는 깨어있는 의식을 나타내고, <U>는 꿈 의식, <M>은 깊은 잠을 나타낸다.

 

3. 허공에서-공간

342.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348.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356. 동양 신비주의자는 자기 내부로 명상해 들어감으로써, 원초적인 양성 상태인 이 심오하고 영속적인 존재를 만난다.

 

357. 플라톤의 향연에 나온다.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전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361. 수메르의 설형문자로 된 점토판에 유사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먼저 태고의 바닥 있고, 이 태고의 바다가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우주적 신을 생성시킨다.

 

366.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적인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제2장 처녀의 잉태

2. 운명적 모태

 

388. 호수 바닥에서의 대화는, 영원과 찰나의 대화,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결정적인 대화>다.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 내 오랏줄을 받는다. 즉 행동이 시작된다.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389. 신화는 어느 곳에든, 갖가지 얼굴로 존재한다.

 

제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397. 창조 신화가 전설에 자리를 물려준다. 형이상학은 선사학에 자리를 물린다. 이 선사학은, 처음에는 모호하고 불분명하나 차츰 그 형태가 자세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웅은 점차 우화적인 성격을 일탈하다가 다양한 지방적 전승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전설은, 기록되는 시대라는 빛의 세례를 받게 된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1. 제1부 <영웅의 모험>에서, 우리는 심리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첫 번째 관점에서 그의 구원적인 행적을 검토해 보았다. 두 번째 관점에서 영웅의 행적은, 형이상학적 비의의 상징이 된다.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영웅 자신의 행적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전사로서의 영웅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事象)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現狀, status quo)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22.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422.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가.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440. 심령에 의한 조형(유출)과 무(無)로의 소멸,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 형상을 창조하는 생명력과 타성적인 죽음의 중압은 영원히 갈마드는 것이다. 생명이 태동하고 이어 형상이 빚어지면, 쇠퇴가 따르고 이윽고 운명에 농락당한 잔해만 남는 것이다. 현명한 황제가 통치하는 황금기는 삶의 순간순간의 충동에 딸라. 폭군이 지배하는 황무지 시대가 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창조주였던 신도 종국에는 파괴자가 된다.

 

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7. 성자로서의 영웅

 

443. 성자, 고행자, 출가자로서의 영웅이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444.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 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제4장 소멸 Dissolutions

1 소우주의 끝

 

458.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466. 신들은 영혼이라는 존재 자체가 투사된 것이다. 이 영혼이 참 상태로 돌아갈 때 신들도 모두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명계의 대기를 마시고, 명계의 물을 지배하는 장>에서 영혼은 스스로를, 우주적 알의 수호자라고 선언한다.

 

2. 대우주의 끝

 

468.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Myth and society

1. 변신 자재자

 

477. 신화 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 proteus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478. 신화체계는 현대으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린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륷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가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479.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79.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무명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개인이 속한 세대는 사라지고, 시간을 초월한 형상만 남는다. 이러한 초개인 super individual을 수렴하려는 비전의 확대를 통해, 개인은 이전보다 더 고상해지고, 풍부해졌으며, 또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480.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2. 중세의 성자들 및 인도의 요기들의 고행, 헬레니즘 문화의 비의, 고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개인의 의식적인 관심을 그 외부적 의상에서 돌리는 기술이다. 명성에 드는 입문자는 준비 작업으로서 자기 마음과 정신을 세속적인 사건에서 분리시키고, 자신을 존재의 핵으로 몰고 간다. 그는 이렇게 명상한다.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그런 경지에서는 되돌아나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경지에서 미합중국, 어디어디에 사는 모모 씨라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사람도 없다. 요컨대 사회와 의무는 분리된다.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이것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계이며, 부처가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하는 단계다. 그러나 이 단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필요한 단계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 이 둘은 하나다. 이때부터 은거, 은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그에겐 세상을 보는, 완전성에 이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분리 및 은둔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랄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3. 오늘날의 영웅

 

484. 현대인은,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듯, 새벽의 태양이 어머니 밤의 자궁을 빠져나오듯이, 현대인은 고대의 무지로부터 빠져나왔다.

 

이제 신들에겐,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탐색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484.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485.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재하고 또 그만큼 효과적인, 보편적인 신인(神人)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86.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국부적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선전이 난무하는 것이다. 난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488.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Ⅱ. 내가 저자라면

 

2-1. 제목에 대하여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타이틀이다. 캠벨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에 나오는 신화나 영웅들의 행적을 적었다. 민족이나 종족에 나라에 따라서 영웅은 그 지리나 환경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들이 부르는 영웅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이 말에서 캠벨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2-2.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라.

 

캠벨은 프롤로그에서 인류가 가진 신화에 대한 정신과 풀이를 설명한다. 그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로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해탈detachment>과 <변용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첫 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withdrawal 과정은, 외적이니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에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옳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캠벨은 신화에 나오는 인물을 묘사하고 설명하면서 그 심층에 있는 인류의 원형인 무의식을 이야기한다. 이는 신화속에 나오는 영웅을 바라보는 민족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심리학, 예술, 미학, 종교학, 철학, 민속이나 민화속의 이야기들과 함께 풀어나갔다.

 

제1부 영웅의 모험이다. 영웅은 순환적인 모험을 하는데 출발->입문->귀한->열쇠를 가지고 돌아온다. 영웅의 출발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영웅으로서의 소명을 받든가, 거부함으로써 겪게 되는 일상의 생활이 힘들어진다. 영웅을 도와줄 조력자다 나타나 첫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로써 영웅으로 입문한다. 시련의 길을 거쳐 여신이나 남신을 만나게 되고 신격화하게 된다. 귀환에서는 귀환을 거부하든가, 시련을 겪으면서 탈출을 하게 되고, 외부로 도움을 받으면서 귀환관문의 통과의례를 치르게 되면서 열쇠를 가지고 돌아온다.

즉 제1부 <영웅의 모험>에서, 심리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구원적인 행적이다.

 

제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에서 영웅은 형이상학적 비의의 상징이 된다. 즉 영웅 자신의 행적이 재발견되고 재해석된다. 신화에서 보여주는 상징이나 명상은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티포를 말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캠벨은 신화가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대해 여러 자료를 근거로 말하고 있다. <신화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가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2. 비극과 희극

3. 영웅과 신

4. 세계의 배꼽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2. 소명의 거부

3. 초자연적인 조력

4. 첫 관문의 통과

5. 고래의 배

 

제2장 입문

1. 시련의 길

2. 여신과의 만남

3. 유혹자로서의 여성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홍익

 

제3장 귀환

1. 귀환의 거부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4. 귀환 관문의 통과

5. 두 세계의 스승

6. 삶과 자유

 

제 4장 열쇠

 

제2부 영웅의 모험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2. 우주의 순환

3. 허공에서-공간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5. 하나에서 여럿으로

6. 창조의 민화

 

제2장 처녀의 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4. 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3. 전사로서의 영웅

4. 애인으로서의 영웅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6. 구세주로서의 영웅

7. 성자로서의 영웅

8. 영웅의 죽음

 

제4장 소멸

1 소우주의 끝

2.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3. 오늘날의 영웅

 

역자후기

찾아보기

 

2-3.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아유로 불행하다.”-톨스토이-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뜷린 길인 것이다.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

 

480.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

 

216. 생각을 초월할 수 있는 진리<공(空)>의 안쪽에서 다시 바깥의 현상계를 바라보면서 보살은 이미 안에서 깨달은 동일한 존재의 바다를 바깥에서도 지각한다.

 

<형상色은 빈 것空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

 

217.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Jivan mukta,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 힌두교-

 

   2-4. 인상적이고 탁월한 착안점

 

세계 인류의 방대한 자료를 모두 한곳에 책으로 엮었다는데 캠벨의 탐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신화는 인류가 존재하면서 지니고 있던 무의식의 발로다. 역사, 심리, 예술, 문학, 종교, 사회의식, 사회제의, 인류의 모든 문화유산과 무형의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신화라는 것을 알았다. 신화속에 나타난 영웅은 결국 우리 개개인이 추구하고 성취해나가야 할 자신이라는 것이다. 한번 읽고 나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고두고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어보고 곱씹어보아야 할 책이다. 평생을 신화연구에 한평생을 바쳐온 캡벨의 연구를 한순간에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한 권의 책에 나타난 영웅들의 행적을 다시 살펴보면서, 삶에서 겪게 되는 좌절이나 힘든 시기는 결국은 나 자신이 영웅으로의 초대되고 있다는 자신만의 해석을 하게 해본다.

 

2-4. 보완점(편집인에게 바란다)

 

앞 목차에 보면 제 1부 영웅의 모험 제2부 영웅의 모험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책 323페이지에 보면 제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이라고 나온다. 책의 목차와 책속에 있는 목차가 일치하지 않았다. 편집에 좀더 세밀한 면이 요구된다. 중간중간에 오타가 있어서 읽는데 다시 확인하게 만들었다. 글씨가 일반 책보다 약간 작아서 읽는데 불편함을 느꼈다.

 

  2-5. 내가 저자라면

 

한 영웅이 이페이지 저 페이지에 나와서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정리가 안되었다. 처음 읽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몇 번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영웅의 이야기로 산발적으로 여기 저기에 펼쳐놓기보다는, 어떤 주제 아래에 한 영웅의 행적이나 어록 또는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적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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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8 19:09:22 *.11.178.163

이번 책이 조셉 캠벨의 책으로 3번째인데도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해요.

이게 읽을 때는 모호하던 것이 나중에 이해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다음에 또 보고 읽어야 한다면, 이번에 꼼꼼히 정리한 가슴을 치는 글귀를 먼저 후르륵 읽고, 조셉 캠벨의 다른 책을 읽어서 모호하게 이해되는 것들을 서로 맞추는 것은 어떨까요?  <신화의 힘>이나, <신화와 인생>은 캠벨 사상의 요약본이라서  <신화의 세계> <신화의 이미지>를 보시면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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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2 00:11:41 *.185.21.47

그런 좋은 방법도 있었네요. 

신화 이야기가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나와 읽기 쉽지 않았는데

다음 신화 이야기 읽을 때는 제시한 방법으로 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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