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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8일 02시 31분 등록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9기 연구원 10주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고운기,현암사,개정6)”

 

 

1. 저자소개

 

* 저자 : 고운기

1961년생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박사

1983년 신춘문예 등단

현 한양대학교 교수

주요저서 : 구름의 이동속도,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시인이자 교수. 국문학 박사 출신인 그는 삼국유사전문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대학시절 국문학을 전공하였고 박사논문의 주제를 향가로 택한 이유로 자연스레 삼국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존의 문헌적 탐구가 아닌, 현장중심의 필드형태의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지역들을 직접 탐방하고 지역설화를 채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채집하게 된 지역설화가 일연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질 때를 종종 접할 수 있었고, 그때의 희열은 상상 이상, 번개가 그의 정수리에 정확히 꽂혀 그의 육신과 정신을 일제히 멈추게 만드는, 짜릿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야말로 조셉캠벨이 말하는 ‘bliss’ 또는 매슬로우가 말하는 절정경험이었다. 그 후 고운기교수의 천복은 삼국유사가 되었고, ‘삼국유사에 천착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이치, 순리인지도 모른다. 그는 스토리텔링 삼국유사를 필생의 작업으로 택하고 집필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까지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2009), ‘삼국 유사 글쓰기 감각’(2010),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2011),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2012)’ 4권의 책이 출간되었고, 15년간 총 15권의 책 집필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일연 : 일연(一然, 1206~1289)은 고려 희종 2,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합격하였다.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에서 주로 수행하던 그는 44세 때 경상도 남해 정림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린다. 55세에는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를 저술, 주목을 받으며 중앙 정계인물과 교류를 하고 각지 사찰에 머물며 후학 양성에 힘쓴다. 그러던 중 1283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되었으나, 곧바로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주석한지 5년만인 1289 84세를 일기로 입각하였다. 그의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 양진 : 1966년 대전에서 태어나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부터 사진 동아리연영회에서 활동하며 사람과 자연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주로 찍어 왔다. 1991년부터 고운기와 함께 『삼국유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사진 작업을 했고, 지금은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담아내는 일에 빠져 있다.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며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1145)의 일이다.(4)

 『삼국사기』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총체적인 역사서. 김부식은 문헌존중주의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전제하고 쓰여졌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가 삼국의 흥망에 관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고조선시대로부터 삼국시대 말까지의 국가를 다뤘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김부식의 합리적인 역사관과, 일연의 연기설 중심의 불교사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연은 설화를 자료로 취했기 때문에 역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김부식이 다루지 않았던 불교적 신앙과 고승의 이야기, 사찰, 불상, 석탑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유교적 관점에서는 배제되었던 당시의 불교적 전통을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김부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역사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일연은 역사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은 힘을 강조하였다. 이를 신이사관(神異史觀)으로 칭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김부식의 합리사관에 반발하여 인연설에 기초한 불교사관을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대의 일화를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한국의 고대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전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는 불교의 신앙사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단순한 신앙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제외된 신라의 각 왕들에 대한 설화를 많이 전하고 있어 『삼국사기』를 보충하는 역사서다.

『삼국유사』를 민족지(民族誌)의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삼국시대 향가에 대한 기록 등 아주 소중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빼놓고 『삼국유사』만으로는 한국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한국의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 두 역사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전해주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두 고전의 이러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새롭게 해석할 때에야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사기 [三國史記] - 삼국 흥망성쇠의 과정을 밝히다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9.18, 휴머니스트)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5)

[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5)

이 땅의 첫 나라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11)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단군신화)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14)

2,000년 전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과 같은 때이다.(14)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16)

곰은 뜻한 바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단군을 낳게 되는 과정까지를 유심히 읽다 보면, 재미있게도 곰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환웅이 한 발 한 발 말려들더니, 드디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18)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21)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신화는 건국 신화다.(21)

다시 말하지만, 일연의 단군에 대한 관심은 신화로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22)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23)

⇒ 저자 고운기는 삼국유사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반면,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다소 야박하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나의 생각을 세우기 위해서는 [삼국사기]에 대한 독서와 지식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나라가 세워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신라의 건국이다. 그 이전의 일들은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23)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24)

이 때 고려는 무신 정권 기간이었다. 무신란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통치 체계를 구축한 최충헌은 이후 4대에 걸친 최씨 정권을 이어가게 하는데, 몽고의 원나라 건국은 그들에게 하나의 복음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대 외교로 송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했던 문인 정권의 담당자들에게 비해 그들은 이 방면에 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송나라가 망하고 오랑캐족에 의해 원나라가 섰다. 천자의 나라를 넘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었고, 무인 정권이 내세웠던 새로운 질서라는 대의명분에 상당한 힘이 실렸다.(25)

위만조선이 세워진 것은 한나라 초기 곧 기원전 195년경이다.(29)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29)

위만이 연나라 출신임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그가 본디 조선족 출신임을 더 내세우고자 한 것이고, 거기에 위만의 차림새를 굳이 내세우다 보면 이러저러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일까?(29)

원봉 2(기원전 109)이었다. 한나라 사신 섭하가 위만 조선의  왕 우거를 설득하였으나 끝내 조서를 받들려 하지 않았다. …… 조선 사람들이 섭하를 원망하여 기습적으로 쳐들어가 섭하를 죽였다. ……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쪽 군대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30)

원봉3년 여름(기원전 108) 조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 그 백성들을 설득하고 성기를 죽인 다음에야 조선이 정벌되었다.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을 두었다.(31)

우리가 [삼국유사]의 첫 부분을 대할 때 유의할 점이 여기에 있다. 일연이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는 것이다.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4)

고구려와 북방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물리친 자리에 이른바 4군을 두는 때와 같은 시기인데, 나는 이것을 앞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 부르기도 하였다.(35)

그러나 민족의 처음 시대를 쓰면서 그다지 인색할 일은 아니었다. 분명 삼국으로 정립되기 전에 비록 왕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나, 한 단위를 이루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고 지고 했는데 말이다.(36)

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37)

금와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방안에 깊이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자 몸을 움직여 피하게 했으나, 해 그림자가 또 좇아와 비추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거니와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39)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었다. 골격과 겉모습이 헌걸차고 우뚝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헌칠하여 비상했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이면 백 명중이었다. 세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를 가지고 이름을 지었다.(39)

⇒ 고주몽(동명성왕, 東明聖王, BC58~BC19, 재위 BC37~BC19) B.C. 37년 고구려를 세웠다. 천제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를 부모로 두고 태어나 부여의 금와왕에게 붙어살았지만, 주몽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울 때에도, 주변 나라를 하나하나 복속하며 국력을 키워 갈 때에도, 이 자긍심은 변함이 없었다. 이는 그 후손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고구려는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를 다스리는 대국으로 컸다. 비록 40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대국의 주춧돌을 놓은 주몽의 일생은 결코 짧지 않다. (네이버 캐스트 인용)

그러나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을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43)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44)

얼마 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 깊이 뉘우치다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백제라 했다.(49)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52)

신라와 남방계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건국에 관한 일연의 기술은 [삼국사기]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대개 [삼국사기]보다 훨씬 자세하며, 적어 나가는 태도 또한 매우 자신감 넘쳐 있다.(53)

찾아가 살펴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겨 동천에서 몸을 씻어 주었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뭍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 때문에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거슬한이라 하였다.(57)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 몸만 남아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왕후 또한 죽자 사람드이 합하여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막는 것이다. 그래서 몸뚱이를 다섯으로 나누어 각각 묻고 오릉으로 만들고, 또한 사릉이라 이름지었다. 담엄사의 북쪽 능이 이것이다.”(62)

갑자기 산 개울이 비도 오지 않는데 넘쳐 흘렀다.…...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짝이 될 인연을 만나려 오줌을 눈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딻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 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66)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68)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용성국 출신이라는 기이한 남자 석탈해는, 헌칠한 체구에 꾀도 많고 덕망도 갖추었지만, 촌놈에서 출발해 왕의 사위에 이어 왕까지 된 신라 드림의 원초다.(70)

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재위, 57~80)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이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73)

나이로 치자면 탈해가 더 위다. 그런데 탈해가 먼저 기이한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73)

시림 한가운데에 매우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우는데, 구름 속에 황금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짝에서는 빛이 새나왔다. 또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우는 것이다.(86)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들이 대체적으로 처음에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는다는 그럴 듯하면서도 거창한 명제 아래 시작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92)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 그들이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정치적 의미로만 풀어서는 곤란하다.  ……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100)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101)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너무 가깝고 너무  쉽게 갈 수 있으니, 좋은  사이로  지내기도 하려니와  싸움도 잦았다.(106)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  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107)

왜의 침략을 방어하는 신라의 방법은 대체적으로 지공이었다. 간단히 쳐부술 정도면 모르되, 알천까지 깊숙이 쳐들어오는 적에 대해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렸다.(109)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112)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115)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에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119)

여자(도화랑)의 부모는  딸의  방으로  들어가게했다. 왕은 7일간 머물렀다. 늘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가득했다. 7일이 지난  다음 홀연 자취를  감추고 여자는 그로  인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술산을 하려할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아 이름을 비형이라 하였다.

⇒ 죽은 진지왕(진흥왕의 둘째 아들)과 도화랑 사이에 비형이 태어나다.

다음 날 북쪽 담당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꽃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135)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137)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140)

미시(흥륜사의 승려 진자가 만난 아름다운 소년, 미륵선화설화)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 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 준다.(150)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152)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 원효, 의상이다. (152)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159)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문희라는 이름을 다시 본 것이 [삼국유사]에서다.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159)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는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61)

고려의  국조로 불리는 보육에게는 두 딸이 있다. 둘째 따의 이름은 진의, 바로 이 딸이 15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언니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웠더니 온 세상에 넘치는 꿈을 꾸었다. (1166)

주지하다시피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경주로 와서 살았다. 그래서 유신은 신라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신분이 높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여 관직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169)

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춘추의 왕위를 포기하자는 것도 문희의 결혼을 말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었다.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루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 이었다.(170)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178)

사천왕사가 낙성된 해를 [삼국사기]는 문무왕 19(679)으로 적고 있다. 죽기 1년 전의 일이다.(183)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184)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189)

토함산으로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우람한 석탑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로 길게 뻗은 날카로운 철주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해질녘 감은사 터를 자주 찾았다.(193)

권력의 끝

김유신은 문무왕 13(673)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 5년 뒤의 일이다.(197)

한가하지 그지없는 김유신 무덤이다.  이런 고요를 꿇고 김유신과 40여 명의 무사들이 뛰쳐 나올 정도였다면 무언가 참지 못할 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199)

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으로 처들어왔다. 신라 쪽에서 힘을 다해 막았으나 버티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기이한 병사들이 달려와 도와주었다. 그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사귀를 꽂고,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적을 쳐부쉈다. 군사들이 물러간 다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사귀가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의 음덕이 공을 이루었음을 알았다. 이 때문에 죽현릉이라 불렀다.(201)

석씨인 유례왕 때 이서국의 침입을 혼령의 힘으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미추왕에  대한  미화로도 해석된다. 죽은  김씨가 살아 있는 박씨보다 낫다는 이야기인 셈이다.(202)

전쟁 영웅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지나 효소왕에 이르면 이(화랑들의 토사구팽)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한 단면을 죽지랑의 이 사건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211)

가 버린 봄응ㄹ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 할 뿐이다.(213)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신라의 진골은 대체로 진흥왕부터 시작된다고도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출발은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에 오르면서부터다.(219)

성정 왕후를 내보내면서 비단 500, 200, 1만 석, 집 한 채를 내려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저택을 사서 주었다.(220)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꺽어  바치오리라(226)

⇒ 수로부인의 수려한 자태에 반한 시골 사는 초라한 노인의 사랑노래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 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228)

첫 성전환증 환자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 이 때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237)

생사의 갈림길 /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 도 닦아 기다리리(241)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247)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어린 왕은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 좋아하였다. 도사 무리들과 놀았으므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249)

일종의 역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김춘추에게 왕위를 뺏겼던 내물왕계의 후손이다. 양상은 10세손으로 선덕왕이, 그리고 경신인 12세손으로 원성왕이 되었다.(251)

왕이 되는 자

두건을 벗은 것은 직위를 잃는 조짐이고, 십이현금을 낀 것은 형틀을 차는 징조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히는 징조이고요.”, “두건을 벗은 것은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 위에 없음이요,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십이현금을 낀 것은 열두 손대까지 이어질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움입니다.”(254)

사실 원성왕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되살리고자 애쓴 마지막 왕이 아닌가 한다….. 왕 즉위 4년에 실시된 독서삼품과는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볼 수 있다. (261)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를 고려조에 와서 공민왕, 조선조에 와서 영.정조 같은 이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신라의 원성왕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왕이었다.(261)

좋은 일 세 가지를 보았나이다.” …… “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262)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 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이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67)

나라가 망하는 징조

달도 차면 기운다.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오르지요.”(269)

원성왕 이후  신라가 망하기까지 150년이다.

궁파(장보고)는 술을 마시며 즐거이 놀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염장은 궁파의 긴칼을 뽑아 목을 베어버렸다. 아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로 서울에 이르러 왕에게 보고하였다. “궁파의 목을 베었나이다.” 왕은 기뻐하며 상으로 아간(육두품) 벼슬을 내렸다.(276)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277)

서울의 밝은 달밤 / 밤 늦도록 노닐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구나 / 둘은 내 것인 것 / 둘은 누구인가 /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281)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식을 성골과 진고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287)

배를 타고 가던 일행이 풍랑을 만나가, 일종의 제비뽑기로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요나 이야기와 닮았다. (293)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엎드려 노비로라도 살려 주길 구걸했고, 견훤은 군사를 풍어 공사간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 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으며, 첩들은 그 아랫것들에게 수난을 입었다. 견훤은 왕의 집안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296)

천 년을 이어온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끝을 맺는다 찬란하게 꽃피웠던  서라벌의 문화도 이제 쇠락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299)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다까?” ⇒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경순왕에게 하는 말. (301)

서리리 [시경]왕풍에 나오는 노래, 망한 주나라의 신하가 예 서울을 지나다 그 곳이 메기장 밭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것인데, 신호의 조래는 그마저 없어졌으니, 천 년 사직은 말뿐이요. 무상하기만 하다.(305)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 난센스다.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315)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차츰 중국의 말을 익히더니, 왜라는 명칭을 싫어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325)

⇒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7년 뒤, 670여년, 이 같은 천지왕의 선언은 백ㄷ애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이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325)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 서동은 우리 고대사에서 만나는 맹랑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327)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러셔의 이름은 서동인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줬다. 늘 마를 캐서 팔아다  생활했으므로, 이 곳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329)

선화공주님은 / 남 모르게 짝지어 놓고 / 서동 서방을 / 밤에 알을 품고 간다 (330) – 서동요

선화공주가 공주의 신분으로 쫓겨난다는 점에서  [바리데기 설화]의 바리공주와 비슷하다. (335)

⇒ 바리는 불락국(佛樂國)의 일곱번째 공주로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려진다. 그러나 바닷가에 사는 노부부에게 발견되어 길러지게 된다.

바리데기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인 대왕이 병에 걸렸는데 점치는 이가 서천 서역국의 약물을 구해 먹어야 낫는다고 하자 그의 여섯 딸들에게 부탁을 하지만 모두 그 곳에 가기를 거절한다.

이 때 부모를 찾아헤매던 바리데기가 대왕을 만나게 되고, 그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러 서천 서역국으로 약물을 얻기 위해 떠난다.

서천 서역국으로 가는 도중,여러 가지 시련이 있었으나 모두 극복해 내고 마침내 그 곳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약물의 임자인 무장승의 청을 들어 주고 그와 결혼한 뒤 약물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부모의 장래식이 치뤄지고 있었다. 바리데기는 깜짝 놀랐으나 약물을 그의 입에 떨어뜨려 넣자 소생하게 된다. 그제서야 대왕은 바리데기 공주를 알아보고 은공에 감사하고, 바리데기 공주는 죽은 이의 죄를 씻어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살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리데기 (시사상식사전, 2013, 박문각)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므로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38)

이런 뺏고, 빼앗기는(미륵보살을 말함) 쟁탈전 속에 나라가 강성해지고 왕이 선다는 해석은 언뜻 보면 희극 같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깊이 뿌리 박힌 미륵 신앙과, 그것에 국가적 명운을 걸던 분위기를 감안하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더축이 선화공주가 미륵보살을 만나고 그 발원으로 미륵사가 서는 데에 이르러 보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346)

견훤, 비운의 영웅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353)

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대체로 깨끗한  여자는 두 지아비를 모시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엇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를 보겠소?”(361)

왕건은 자기에게 오는 이를 누구도 말리지 않은 사람이다.(363)

신비의 왕조, 가야

가야는 규모 면에서 작은 나라였다. 나라의 이름만 아니라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으며, 다만 아홉 사람의 9간이 다스리는 100호에 7 5,000명의 인구가 전부였다. ‘가락국가의 시작과 끝은 작은 나라만큼이나 그렇게 소박하다.(370)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밀어라 / 내밀지 않으면 / 구워서 먹을 테다(370) – 구지가

이렇게 받은 알 여섯 개를 9간 중에 아도간이 집으로 가져갔다…… 불과 15일쯤 지나 사내아이들은 키가 9척이나 되어, 마친 은나라 탕왕이나 한나라 고조 유방, 요임금, 순임금 같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처음 나타난 이를 수로라 했고, 나라 이름은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렀는데, 여섯 가야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찾아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3372)

불교로 보는 역사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389)

문제는 아도의 최후다. 우리가 참으로 놀라마지 않을 대목은 그런 아도가 마지막에 자결을 택했다는 것이다. ….. 신라의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이로부터 뒷날 100여 년이 흐른 다음, 법흥왕이 불교를 세우자 했을 때도 이차돈의 순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불교의 큰 나무, 신라의 인고는 만만치 않았다.(398)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399)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겠고 매도 굶기 수 없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406)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었다 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 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이다.”(409)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 어느 덧 한 칼에 몸을 사라진 뒤 /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411)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413)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414)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417)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 쪽은 무간지옥을 보여주더라고(436)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고 몹시 괴롭다는 지옥. 아비지옥(阿鼻地獄) 또는 무구지옥(無救地獄)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이 곳에 떨어지면 그 당하는 괴로움이 끊임없기[無間]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오역죄(五逆罪)를 범하거나, 사탑(寺塔)을 파괴하거나 성중(聖衆)을 비방하고 시주한 재물을 함부로 허비하는 이가 그 곳에 간다고 한다. 옥졸이 죄인의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어, 훨훨 타는 불 속에 죄인을 집어 넣어 몸을 태우며,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 ,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간지옥 [無間地獄] (두산백과)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440)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444)

들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쐈다. 그 중 한 마리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고 가 버렸다. 거사가 그 깃털을 집어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들로 보였다. 그런 까닭에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신효 거사) (452)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고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프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454)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 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458_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데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기면서 느낀 바 있어 이 땅을 살펴보라 하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관청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에 하고 그 땅에 절을 지었다. 이름을 영취사라 하였다.(470)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476)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484)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485)

낙산사의 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488)

이국 땅 먼 하늘 아래서 고국의 승려를 만나 간절한 부탁을 하던, 그리하여 무심한 스님의 꿈속으로까지 찾아오던 한 쪽  귀가 잘린 소년 사미승과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인생의 모진 인연의 실체이고 숙명이다. 거기에다 소년 일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보았을 터이다.(502)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당신이나 나나 어찌 이다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뭇 새가 함께 주리기보다 차라리 외짝 난새가 마주볼 거울을 가지는게 낫겠지요. ….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 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지 합니다.”(506)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508)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508)

운문사 이야기

육재일과 봄과 여름에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때를 가림이다. 기르는 동물 곧 말,,,개를 죽이지 않는 것과, 자잘한 동물 곧 한 번 저미지도 못할 것을 죽이지 않는  , 이는 대상을 가림이다. 이 또한 오직 필요한 만큼만 하고, 너무 많이 죽이지 말아야 하리니, 이것이 세속에서 좋은 계이다.(523)

육재일이란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재일로, 8,14,15,23,29,30일을 가리킨다고 한다.(523)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527)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이라고 (530)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533)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534)

⇒ 이 말을 알아들은 태종 임금은 과부로 지내고 있는 요석공주를 염두하고 원효를 부르고, 임금에게 가는 도중 일부러 물에 빠진 원효는 옷을 갈아입는 명목으로 궁으로 들어가고 그로 인해 설총을 낳게 된다.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지 길로 나고 죽는다.”(537)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 원효가 오늘 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537)

태어나지 말 것을, 죽음이 괴롭구나 / 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구나.(541)

사복이 글이 번거롭군요하더니, 고쳐서 말했다. “죽고 남이 괴롭구나.”(541)

의상, 화엄의 마루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552)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552)

원효가 그랬던 것처럼, 의상 또한 이미 의상이었다.(558)

의상은 이에 열 군데 사찰의 가르침을 전했다……. 나머지 찬술한 것들은 없지만,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한 것이다. (564)

무성한 꽃들 고국에 심었으니 / 종남산과 태백산 똑 같은 봄이로다.”(568)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버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진 모짐이다.(571)

일연은 순례자들에게 시를 한 수 바쳤다. “천축 길 하늘 너머 만첩 산인데 / 가련타 순례자들 힘써 오르네 / 외로운 배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던만 /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 돌아옴을 보지 못했네.”(579)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580)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금산사로 돌아온 진표는 가르침을 펼치다 강릉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는 만들어 바다 속으로 모시고 가, 법을 들으며 계를 받았다.”고 하였다.(586)

스님은 묵묵히 대담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에 오르더니 땅에다 몸을 거구로 처박았다. 그렇듯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참회하였다. 그제야 스님은 교법을 베풀고 이마에 물을 부어주며, 가사와 바리때를 주었다.(596)

밀교의 한 자락

삭발한 승려를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슬픔부터 느껴진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승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그 번뇌 속에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603)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604)

산 복숭아 시냇가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오솔길에 봄이 깊자 양쪽 언덕에 꽃이 피었네 그대가 우연히 수달을 잡았던 인연으로 나쁜 용은 서울 밖으로 멀리 쫓게 되었네. (617)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미타신앙에도 미륵신앙에도 여러부면이 있거니와, 전자가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에, 후자가 혼란한 시기의 고통받는 층에 왕성히 퍼져나간다는 정도로 이해해 두자.(625)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628)

(엄장)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모습이다.(633)

호랑이와 처녀와의 사랑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 꽃다운 입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 마디 /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644)

부부의 정 깊으나/ 산중에 둔 뜻 깊어만 가고/ 세월이 변하거든 백년 가약 그리움/ 두려웠네, 저버릴까봐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668)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경계 삼을 사표로 세울까? (670)

숨어 사는 이의 멋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나고, 없으면 숨는다…… 예기에서는 도가 행해지는 사회르 대동사회, 그렇지 않은 사회를 소장사회라 하였다.(672)

같이 수련하던 이들이 시신을 들어다 석실 안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모두 뜯어먹고 오직 뼈만 남았는데, 혀는 그대로 있었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오갔건만, 혀는 그대로 붉고 부드러웠다.(672)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674)

구름을 헤치고 달을 읊으며 매양 서로 찾아다녔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중의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해 엎드려 마치 맞이하는 것 같으니, 관기가 그것을 보고 갔다. 관기가 도성을 부르고자 해도 또한 이와 같이 북쪽으로 엎드려 곧 도성이 이르렀다.(682)

주먹을 날리기 이전의 잽이다. 잽은 적정한 거리를 재기 위한 첫 손질이 아닌가. 그 다음에 날아올 정타를 연회는 아직 모른다……. 이제 날아오는 레프트 스트레이트.(684)

불교가 보는 효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일연의 나이는 79세였다. 어머니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아들을 보았다는데, 일연이 여덟 살 나던 해 산으로 공부하러 떠났으니, 무려 스물다섯 살부터 돌아가시기까지 70년을 홀로 사신 분이다. (690)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잡수실 것을 뺏어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료.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부르도록 해야겠소.”(691)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드의 고유 정서, 이것을 담아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제망매가],[원왕생가]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열어제치자 / 벗어나는 달이 /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 백사장 펼친 물가에 /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 일오천 자갈벌 / 낭이 지니시오던 / 마음의 끝을 쫓노라 / , 잣나무 가지가 높아 /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711) - 찬기파랑가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712)

  마음의 / 모습이 볼 수 없는 것인데 / 일원조일 달이 난 것을 알고 / 지금은 수풀을 가고 있습니다. / 다만 잘못 된 것은 강호님, / 머물게 하신들 놀라겠습니까 / 병기를 마다하고 / 즐길 법일랑 듣고 있는데 / 아아, 조그만 선업은 / 아직 턱도 없습니다.,(720) – 우적가

일연, 혼미 속의 출구

그가 제기한 문제점은 세 가지다. 일연이 시대의 사조에 빠졌다는 것, 사상과 신앙 모두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가지산문의 현풍을 떨치기에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724)

그러나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726)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 숨어 있다.(728)

일연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은 [삼국유사]의 편찬이다. 내외적으로 불어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 [삼국유사]는 그것은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 (734)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에 맞는다든지 도록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736)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의 극치다.(738)

 

3. 내가 저자라면

차례

머리말

들어가며-2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_ 11

고구려와 북방계 _ 35

신라와 남방계 _ 53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_ 70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_ 88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_ 103

밤에 찾아오는 손님 _ 120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_ 139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_ 159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_ 178

권력의 끝 _ 196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_ 214

첫 성전환증 환자 _ 234

왕이 되는 자 _ 252

나라가 망하는 징조 _ 269

지는 해 뜨는 해 _ 289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_ 307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_ 327

견훤, 비운의 영웅 _ 347

신비의 왕조, 가야 _ 364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_ 385

순교의 흰 꽃 이차돈 _ 400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_ 416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_ 437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_ 455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_ 472

낙산사의 힘 _ 487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_ 509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_ 530

의상, 화엄의 마루 _ 549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_ 569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_ 581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_ 603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의 감동적인 이야기 - 621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_ 637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_ 653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_ 671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_ 687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_ 704

일연, 혼미 속의 출구 _ 723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 감동적인 장절

- 권력의 끝 : 화랑의 토사구팽 : 죽지랑, 득오, 익선의 에피소드 (p.208)

- 편지로 싸운 한판 (p.354)

-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의 꿈 : 조신의 꿈 이야기 (p.506)

 

* 내가 저자라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이하 우정삼’)’ 20년 이상 삼국유사에 대해서 연구해온 한양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이자 시인인 고운기씨가 집필한 일종이 삼국유사 해설서이다. 처음 삼국유사의 내용이 그대로 있을거란 내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렇기에 조금은 당황하였고, 저자의 필체와 느낌을 따라가는데 약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우정삼은 친절한 삼국유사 해설서이다. 어찌보면 꽤 어려울 수 있는 원서의 내용을 중요한 주제 별로 선별하여 보여주고 그 주제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이나 본 저자 일연의 입장 등을 고운기씨가 자세히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은 문체로 풀어쓰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라는 13세기에 집필된 고전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현대적인 예(자신의 경험 또는 생각)들을 같이 연결시켜 풀어 쓴 부분은 꽤 인상적이었으며, 현대의 독자와 과거의 삼국유사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효과적으로 허물어 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연오랑 세오녀에서 히미코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 프로레슬러 히미코를 언급한 부문, 김춘추의 아내이자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부인을 설명하는 장의 도입부를 60년대 영화배우 미워도 다시 한번의 주인공 문희의 충순 가련한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부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저자 고운기씨는 글을 가지고 마치 즐기듯 가볍고 재미있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양손 스트레이트에 나가떨어진 연희에서 사용된 스트레이트와 잽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추억과 경험이 곁들어진 현대적인 예를 가져오거나, 역사서에는 맞지 않는 조금은 가벼워 보이지만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역사서라는 딱딱한고정관념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렸다.

위의 예를 보면, 저자 고운기씨는 고정관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글 속에 여과없이 반영하는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다(이는 그의 책을 조금 더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양날의 검이라고 했던가. 그의 이런 고정관념 타파’,’문체의 자유분방함등 자신의 문체에 자신의 스타일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다보니, ‘삼국유사에 심취한 삼국유사 전문가 답게 삼국유사(또는 일연) 찬양일색의 결론은 조금 부담스럽게 또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모름지기 역사서는 객관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이 또한 나의 고정관념인가?!) ‘삼국유사를 위에, ‘삼국사기를 아래에 놓고 비교하는 부분이나, 일연이나 삼국유사에 쓰여진 내용들을 애써 좋게 마무리 하는 부분들은 불편함을 떠나  (심하게 이야기하면) 궤변으로 까지도 비추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하나의 종교에 심취하여, 그 종교가 모든 세상의 사람을 구원해줄 힘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교인 같은 분위기랄까.(아래가 그 몇몇 예이다.)

그런데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연은 [삼국사기]를 떠나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는데,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오늘 우리는 사실을 따지는 것이 중요할까, 사실이 무엇이건 거기 실린 순교한 자의 마음을 고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까? – 순교의 흰 꽃 이차돈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신라 사회의 힘이다.’

 

단군신화란 건국신화를 끌어들여 조선에 주체성을 부여하고, 다양한 (민간)설화를 들려주는 등 국가차원에서 쓰여진 정사인 삼국사기가 하지 못한 (또는 할 수 없었던) 부분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의의는 충분히 알겠으나, 저자의 이런 편향적인 집필방향이나 문체는 자칫 독자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전반적인 구성이나 문체, 삽입된 에피소드와  해설 그리고 사이사이 첨부된 사진작가 양진의 사진까지도 꽤 맘에 들었다. 다만 내가 저자라면’ (삼국유사를 찬양하고자 한다면) 조금 더 영리하게 그리고 조금 더 담담하게 풀어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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