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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연구 이부영(李符永: 1932.03.25 ~ ) 한국 융 연구원 원장. 한국 분석심리학계의
선구자로 불린다. 서울대 의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거친 후 스위스에 가서 융 연구소를 수료하여 융학파의 분석가 자격을 얻었다.
1977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울대 의대 정신과 교수로 일했고 정신과 주임교수, 서울대학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뉴욕대학의료원 대우 교수,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 석좌 교수 등을 역임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한국분석심리학회, 동아시아 문화정신의학회 등 여러 학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분석심리학의
전문수련기관인 한국 융연구원을 설립해서 원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분석심리학>, <한국민담의 심층분석>, <한국사상의 원천> 등이 있고, 역서로는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현대의 신화>, <C. 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현대의 신화>,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등이 있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머리말 23 “~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한 위험은 인간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큰 위험인데도 우리는 너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모릅니다. 아는 게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신을
연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근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동의한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더 크게 동의하게 되었다. 최근의 의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적다.
제1장 마음의 세계와 그림자 1. 마음의 세계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 30 어떤 사람에게는 말이나 표정으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들에게는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외향적인 서양인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말하지 않은 감정,
말하지 않은 마음은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되풀이해서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대체로 마음과 마음이 말없이도 통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비언어적 소통’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 뒤에 숨은 뜻을 생각하고 말없는 깊은 마음을 존중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마음이나 남의 속마음을 항상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지레짐작으로
잘못 판단하고 오래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서양인 뿐이 아닐텐데… 동양인, 우리나라 사람들도 겉으로 표현하고 말을 해야 알지 않나?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눈치가 없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 안해도 알거라고 생각해서 얼마나 많이 오해하고 쓸데 없이 맘 상하고 싸웠던가. 제 맘대로 해석해서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무의식의 발견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관 31 프로이트가 처음 환자들 가운데서 발견한 무의식의 내용은 현실의 도덕규범과
맞지 않아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억압된 여러 가지 충동이었다. 특히 억압된 성적 욕구와 유아적 충동, 여기에 더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감독 기능을 하는 부분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되었다.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억압된 성적 욕구를 무의식의 주된 특성으로 여겼으나 뒷날에는 ‘삶의 본능’ ‘죽음의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욕구와 파괴적 욕구의 양면이 무의식의 충동을 이룬다고 보았다. 33 융의 무의식관은 무의식이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다.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며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는 만큼, 진화의 흔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융이 말한 무의식의 자율성이 이거였다. 이렇게 해석을 보니까 훨씬 잘 이해된다. 마음의 구조와 기능 36 우리는 태어나면서 곧바로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갓난아이에게도 나와 비슷한 지각과 반응과 표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인식의 주체라기 보다 무의식적 형태 속에 가려진 잠재력의 한 표현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무의식상태에 있다. 무의식에서 ‘나’가 탄생한다. 무의식 속에 나의 싹이 있고 그것은 아이가 자라면서
싹트고 성장한다. 그러므로 나에는 극히 미약한 지각상태에서 고도의 의식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수준이
있다. 자라면서 나는 사회생활 속에서 취해야 할 일반적인 행동규범을 배운다.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 일정한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자아의식을 강화하고
그 영역을 넓히며, 이로써 의식과 무의식계의 대립과 긴장이 일어나게 된다. 36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할 때 쓰던 가면)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형이다. ‘나’는 ‘페르조나’를 배우고
여러 종류의 ‘페르조나’를 번갈아 쓰면서 사회 속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페르조나’는
어떤 일정 사회집단에만 통용되는 화폐나 지페와 같은 것으로 그 집단 밖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원초적 행동유형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페르조나가 이런 거였구나. 나는 지금까지 반대의 의미로 알고 있었다. 페르소나를 가장 많이
접한 건 영화배우와 감독의 관계에서이다. 그동안은 배우가 연기를 하는 캐릭터가 감독의 자아일 경우, 그 자아를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도
있지만 잘못 표현한 기자들도 많은 것 같은데… 38 그러나 사람은 물론 그러한 종교적 수행이나 무의식의 분석작업을 하지 않아도
무의식을 깨달아 나갈 수 있다. 그것은 무의식 자체가 그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서 의식을 자극하여 무의식을
깨닫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결코 범상한 생각이 아니다. ~ 그러나 무의식은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그것과의 대면을 피할 때,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의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아에게 준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 고통, 갈등, 절망, 상실의 아픔이 자기성찰의 귀중한 기회이며 성숙에의 의미 있는
고통이듯이 우리는 언제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창조적 자극의 영향 아래 있고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런 체험,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병고의 시련으로 표현된다. 자아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느냐 모르고 지나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아의 문제이다. 39 무의식은 자아의식이 외곬으로 나가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의식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의 이미지를 활발히 보내서 그것을 보상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이성적인 남자의 꿈속에서 그로 하여금 매우 비합리한 행동을
하게 하거나 평소와는 달리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만든다. 혹은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의 꿈에서 깃발을
들고 데모행진의 선두를 달리는 영웅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욕구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일방성을
깨우치고 의식이 소홀히 하고 잇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무의식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41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 그림자는 본래 의식에 가까운 개인적인 무의식의 내용이다. 그래서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性)의 대상에 투사되며 거기서 그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L양, 최모씨, S 언니, 이름모를 아줌마 등등. 많다. 내가 싫어했던 그들의 모습이 사실은 나의 부족한
모습 – 열등한 성격일지도 모른다니… 어쩐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44 내적 인격, 아니마, 아니무스는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면 다른 모든 무의식의 내용처럼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아니마, 아니무스의 부정적 작용을 목격하게
되는데 남성에서는 남자다운 남자의 변덕스러운 기분과 짜증 섞인 잔소리로, 여성에서는 융통성 없는, 따지는 버릇으로 표현된다. 45 많은 원형 중 가장 핵심적인 것,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로운 통합을 위해 스스로 조정하고 질서 지우는 우리 정신의 내적인 방향타(方向舵)이며, 나침반이며 고등종교에서
최고의 신,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징, 마치 태양계의
많은 혹성의 배열을 결정하며 운행을 조정하는 알 수 없는 궁극의 원리 같은 것 – 그것이 자기 원형이다. 한마디로 융은 인간무의식 속에서 하느님과 같은 신상(神像)을 발견한 것이다. 하느님이 하늘
위의 빛나는 왕좌에 계시고 안 계시고는 심리학의 한계를 넘는 형이상학의 물음이니 심리학자가 여기 대해 말할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인간들이 신이라 부르는 대상에 해당되는 것이 발견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47 원형이란 지리적, 인종적 차이, 문화, 시대사조의 차이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인간행태의 원초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자기원형이란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그 사람의 마음을 통일하여 숨은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하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융, 캠벨, 에니어그램, 구본형, 이부영, 신화….. 결국 이렇게 다 연결이 되는 구나. 47 무의식은 궁극적으로 무의식적이다. 자아가
전일(全一)의 경지인 자기의 경지에 근접할
수는 있으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언제나 자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곳에는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volkommener
Mensch)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vollstandiger Mensch)이 되는 것이다. 끝없는 무의식 앞에서 자아가 취해야 할 겸허한 마음의 자세를 암시하는 융의 이와 같은 견해는 선불교에서의 해탈의
선언과는 다소 그 모습을 달리한다. 심리학적 유형 50 융의 유형론의 묘미는 그것으로 어떤 인간을 어떤 유형에 명확하게 분류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의식의 전제와 무의식의 투사현상을 성찰하고 정신의 내면세계를 살펴나가는 그 모색의 과정에 있다. ~ 심리학적 유형에 관한 검사도구를 이용하여 연구할 수도 잇고 이를 자기인식의 참고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사결과로 그 사람의 진정한 개성을 알 수는 없을뿐더러 안다고 자만하는 것은 자기실현에 도움이 안 된다. 51 무의식의 열등기능은 의식에 대한 보상작용을 일으켜 의식을 자극하여 의식의
일방성을 제지한다. 혹은 그것은 외계로 투사된다. 그 보상작용의
정도가 적절한 경우에는 열등기능이 의식계로 떠올라 활성화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 있는 발전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잇다. 열등기능이 외계로 투사되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향형은
외향형더러 속에 든 것 없이 겉치레만 좋아한다고 흉보고, 회향형은 내향형을 고집불통의 독선가, 비현실적인 이상론자라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열등기능을 찾아서 그것을 살리고 발전시키면 그것은 이미 열등기능임을
그친다. 그리고 모든 정신기능을 가능한 한 골고루 발전시킨다는 것은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열등기능의 의식화 –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자기실현이 상당히 진행되면 각 유형간의 차이가 점점 줄어든다. 이를테면 내향성을 존중하는 외향형이, 또는 외향성을 발휘할 줄 아는
내향형이 된다. 융의 책에서 무의식 부분을 읽을 때, 왜 무의식을 찾아서 의식화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갔었는데,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융을 다시 읽어야 하는 건가? 헛 읽었던
것 같다. 2. 마음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그림자의
자리 52 그림자는 의식에 가까이 있으면서 자아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모르고 있는 인격부분을 깨달아가면서 성숙해 가는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무의식의
요소이다. 그것은 성숙한 마음에 이른 첫 관문에 버티고 있는 수문장이다. 우리는 그 험악한, 비굴한, 또는 야비한 자신의 그림자의 모습을 보고 기겁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자기실현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용기를 가지고 그림자를 대면하고 이를 통과하고 지나가야
비로소 자기실현의 다음 과제인 아니마, 아니무스를 아니무스를 의식화할 수 있는 조건이 다소라도 생길
수 있다. 모르고 살아도 된다면 그냥 모른 채로 살고 싶다. 나야말로 나의 그림자 안의 험악하고 비굴하고 야비한 내 모습을 보고 기겁하여 도망칠 것 같다. 53 살아 있는 한 그림자는 만들어지게 마련이고 그림자문제는 계속된다. 다만 그림자는 인식하기가 비교적 쉽고 자기인식의 첫걸음이기 때문에 무의식의 다른 내용에 앞서 그림자문제부터
다루게 되는 것이다. 53 정신의 전체성이란 빛과 그림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다. 겉보기에는 열등한 그림자 속에 또한 창조와 성숙의 씨앗이 있다는 점을 융은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자는 상대악적(相對惡的) 위치에 있어 그것이 의식화하여 의식에 동화할 때 그것은 분화하여 창조적 기능으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자를 의식화해 나가노라면 우리 정신의 어둡고 밝은 면을 모두 다루게 될 것이다. 54 그림자는 바다 표면 가까이 뜬 해초와 같으나 일단 끄집어내기 시작하면 정신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보배, 또는 비밀을 건드리게 된다. 제2장 그림자의 원시적 관념과 분석심리학적
개념 1. 살아 있는 그림자 – 원시심성과 민속에 표현된 그림자 원시인에게 살아 있는 그림자 57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 이미지란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무시할 수 없고 의식화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그림자’로서 그것은 원시 종족의 그림자관과 맥을 같이 한다. 어떻게
보면 원시종족은 우리가 오늘날 무의식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정령관(아니미즘)에 따라 다른 구체적인 언어로
인지한 것이다. ~ 흔히 그(야만인)는 그의 그림자나 영상을 그의 영혼이라고 보거나 어쨌든 자신의 살아 있는 부분으로 간주했으며 그런 만큼 그것은
그에게 위험의 근원이기도 했다. 58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림자가 없거나 아주 희미한 그림자를 가진 사람은 곧 죽는다고
생각한다. ~ 말라야의 다도해 사람들은 그림자가 무덤, 나무, 기타 혼이 살고 있는 대상에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그것들이
그림자를 흡수해서 그림자의 임자를 죽음으로 이끈다고 믿기 때문이다. ~ 고대 아라비아에서는 하이에나가
사람의 그림자를 밟으면 사람의 말하고 움직이는 힘을 빼앗아간다고 믿고 있었다. 이렇게 그림자는 사람이나
짐승의 살아있는 부분이며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전설 같은 무서운 이야기들도 많고 이런 전설이나
괴담을 바탕으로 한 공포 영화도 많다. 어느 특정 지역의 전설인 줄 알았는데, 세계의 많은 지역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집단 무의식의
하나라고 하지만 신기하다. 59 적도(赤道)에 가까운 과거 홀란드령이더너 암보이나(Amboyna)
섬과 율리에이스(Uliase) 섬에서는 한낮에 그림자가 없어지거나 매우 짧은데 이곳 사람들은
대낮에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의 그림자를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레이반도에서도 대낮에 죽은 자를 묻는 것을 금한다. 이 시각에는
그림자가 작아져서 사람들이 단명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서아프리카에서는 사람은 네 개의 영혼을 가지는데 그 중 하나가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림자의 영혼을 잃지 않으려면 대낮에는 그늘에 있어야 한다. 영혼은 해가 진 뒤에는 쉬고 아침에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나온다. 적도에 가까운 열대 지역에서 한 낮에 밖에 나가면
너무 더워서 열사병에 걸릴까봐 못 나가게 하려고 이런 말을 지어내서 퍼뜨린걸까? 창조적이긴 하다. 그림자의 주술 60 그림자에 접촉하면 해를 입을 수 잇다는 것도 원시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생각이다. 슈스왑(Shuswap) 인디언은 상(喪)을 당한 사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 몸에 던져지면 그 사람이 병을 앓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그림자에게 징벌을 가함으로써 속죄를 하게 하는 그림자배상(Schattenbube)도 성행하였고 그림자가 밟힌 사람은 제외되는 아이들의 그림자놀이가 남부 독일에 남아 있었다. 나도 어렸을 적에 그림자 밟기 놀이 했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겠지. 61 터키 사람들에게는 “그대의 그림자가
결코 적어지지 말고 결코 그대로부터 떠나지 말지어다”라는 인사말이 있는가 하면 “그대는 이제부터 어떤 그림자도 던져서는 안 된다”는 저주의 말도 있다. 미묘체로서의 그림자 62 북부 캐나다의 인디언들은 죽을 때 그림자와 영혼이 나누어지고 둘다 신체를
떠난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