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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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오프 과제
1. 나는 누구인가.
천국의 문 앞에서 신이 내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서울에서 살다 온 미나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김명자씨와 이상건씨의 첫째로 태어나 대체로 자유분방하게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힘들 때도 있고, 집안 사정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째로서 돈도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기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효녀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부모님 가슴에 크게 못 박을 만한 사고를 치거나 걱정을 끼쳐 드릴만한 일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젊을 때고, 결혼하고 애를 셋이나 낳은 후에나 한결같이 한량으로 살아온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저 역시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가족들이나 주변 환경보다는 제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대로 거침없는 결정과 선택을 했었죠. 네,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어요. 다행히 제 곁에는 이런 저를 잘 이해해 주시는 부모님이랑 가족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늘 당당하게 살 수 있었죠. 자유롭게 살아오긴 했으나,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들보다는 개인적인 관계들에서의 책임을 조금 더 중요시하면서 살긴 했어요.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책임 정도로 일을 만들었어요. 책임을 제대로 지지 못해서 남에게 피해준 적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두 번 정도 있는 것 같아요. 한 번은 대학교 4학년 때였어요. 아는 친구들이랑 음악공부도 하고 함께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워낙 음악을 오래 했고, 이미 뛰어난 사람들이라서 공부를 같이 하는 내내 정말 힘들었어요. 저는 전혀 아는 것도 없고, 음악적 이론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잠깐 들은 게 전부였거든요. 그래서 음악 이론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더라구요. 사실 배우는 것 자체가 힘들다기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그들과 같은 출발선에 섰다는 것 때문에 생긴 자격지심 때문에 힘들었어요. 워낙 모르는 것을 잘 모른다고 얘기하기 힘들어하는 성격이기도 하구요. 다들 잘 이해하는데, 혼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민폐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 날도 수업을 하는 날이었는데, 급히 대구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 가셔서 대구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전부터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난 아무래도 이 모임에서 빠져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이렇게 문자만 덩그러니 보낸 채 끝내 버리고 말았죠. 한창 공연을 준비하던 때라 친구들이 엄청 황당했을 거에요. 결국 제가 맡기로 했던 파트는 다른 분이 맡게 되었죠. 나중에 그 공연을 보러 갔는데, 내가 선택해서 중도포기하고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왠지 ‘저기에 내가 있었어야 하는데…’라고 아쉬움이 크게 남긴 하더라구요. 이 일이 지금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가장 찝찝하게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일이네요.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못했거든요. 다행히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자주 연락하고 얼굴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요..;;;
저는 평범하게 사는 게 참 싫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평범함이란 ‘남들이 하니까.’라는 단서가 붙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유행에 민감하거나 명품에 환장하거나 그래 본적은 없어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것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았죠. 그러니까 서른 살이 다 되도 백팩에 청바지와 운동화를 즐겨 입었겠죠.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개성이 있으되 멋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 때부터 패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물론 패션에 관심을 갖는다고 갑자기 패셔니스타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그리고 내게 멋있는 삶이란 남들과 조금은 다른 삶이었고, 어딘가에 매어 있고 구속 받는 것을 정말 싫어했으며, 정말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길 바랬어요. 하지만 내가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더군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었어요. 참, 제가 빚도 좀 있습니다. 가족들한테 짐 주기 싫어서, 죽을 때 보험금을 좀 남겨두었어요. 저희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상속 포기를 해야 할 정도의 큰 빚은 아니니 충분히 갚고 조금은 남을 거에요. 돈은 한번 왕창 벌어보고 싶었어요. 늘 하루살이 같이 살아서 넉넉하고 여유롭게 살아보고 싶더라고요.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재단도 만들고 싶었어요. 여성운동을 하면서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일을 하면서 노동관련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성관련 단체들이나 소수자 관련 단체들이 하고 싶은 활동을 마음껏 하고 활동가들도 노동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가져갈 수 있는데 도움을 졸 수 있는 그런 재단을 만드는 것도 하고 싶은 일중에 하나였어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이랑 함께 잘 먹고 잘 사는게 기분도 좋잖아요. 제가 평소에는 되게 순하고 말도 잘 듣고 그런데, 한번씩 욱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뭔가 내가 굉장히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일 때인 것 같아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도 그렇죠. 그런데 이럴 때마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해서 혼자 끙끙대고 무척 답답해 하는 스타일이에요 아마 제가 운동을 하고, 재단을 만들고 싶어했던 것도 그런 분노를 표현하고자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요. 물론 실제로 제가 분노를 표출할 때 가장 흔하게 썼던 방법은 그냥 혼자 펑펑 우는 거였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 밖을 보며 눈물 흘리기도 하고 참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웃을 일을 무작정 기다리기 보다는 웃을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 다니는 제가 되려고 합니다.
2. 내 첫 책에 들어갈 프로필
작가 김이미나는 변화에 개방적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이다.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 제2, 제3의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 얼마나 대담할 수 있는지, 이후에 직업을 바꿀 때에 이렇게 개방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녀는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있다가,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대학 4년 내내 단 하루도 집에 하루 종일 있어 본 적이 없었을 만큼이나 무척이나 활동적인 대학생활을 했다. 여성주의를 만나면서 그녀는 그녀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찾았고, 자연스럽게 소수자, 노동자, 여성 등을 둘러싼 사회적인 문제들과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장애인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로써의 아버지가 아닌 ‘사회적 소수자’로써의 아버지를 인식하게 되면서, 언니네트워크라는 단체에서 활동가로 1년간 활동을 하게 되면서, 노동자로써의 삶을 영위하면서, 그녀는 대학 생활 동안 이론으로만 접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실제적인 경험과 접목 시킬 수 있었고, 더 깊은 고민을 할 수가 있었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집안 사정이 힘들어졌을 때, 만화방을 하면서 자식 넷을 키운 외할머니를 보며 자란 어머니로부터 강인한 생활력을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사업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가족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사업가 마인드를 자연스레 체득할 수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던 가정 환경은 그녀에게 힘들고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을 길러주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2006년, 정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일을 하면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일반 직장 생활과는 거리가 먼, 100% 인센티브 제도를 자랑하는, 어느 정도의 나이와 경험을 겸비한 사람이 시작해도 10명 중 5명은 1년 만에 포기해 버린다는 보험회사 영업직을 첫 직업으로 정했다. 그리고 4년 8개월간 보험 영업을 했다. 억대 연봉도, 시간에 비해 많은 고객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매주 일요일마다 ‘다음 주는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까’라는 설레임과 ‘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기쁨, 그리고 직업상 특성인 ‘자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하면 즐겁게 일을 한다. 하지만 5년차에 접어든 2010년 그녀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오게 된다. ‘이 일이 과연 내게 맞는 일인가?’, ‘내가 사람 만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고 있는 것인가?’란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의 실적은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고, 5년간 단 한번도 두 달이상 최저실적 미달성이 된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3개월 이상 최저실적 미달성’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평생 직업’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일을 2010년 12월에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신은 항상 그녀에게 닫혀진 문을 뒤로한 채 또 다른 문을 열어 준다. 소셜커머스와 스마트폰이 한창 붐이던 시기에 할인쿠폰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한 벤처 기업에서 또 다른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쉽게 5개월만에 그 문마저 닫혀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라이브스팟-어플리케이션 이름- 영업을 하면서 만났던 인연으로 라임팩토리라는 회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3개월이란 시간을 채우지 못한 채 끝이 난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2개 회사의 경험은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라는 고민으로 이어졌고, 구본형 선생님과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을 하면서 고민의 깊이를 더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다. 이 고민과 연구원 과정이 지금의 이 책을 쓸 수 있는 큰 동력이 되어 주었다.
3. 다섯줄로 나를 표현하기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조선에서 제일 지멋대로 사는 놈’이라고.
여동생이 말했다. “언니처럼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도 없을 거라며? 집안 걱정 조금이라도 하냐”고.
남동생이 말했다. “술은 무슨… 맨날 백수야? 이제 다시 일어서라구!!”
친구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찌질한 면모를 혼자만 알 권리가 있다. 사람들 앞에선 언제나 당당하자!”
나는 말한다. “있잖아, 왠지 나는 정말 잘 될 것 같아.” 2NE1의 노래 “내가 젤 잘나가”가 마치 내 주제가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