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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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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7일 18시 22분 등록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 진진묘와 반가사유상

그 결과 한국인에게는 자기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자화상과 자기를 바꾸려는 자화상이 공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까닭이 세계인의 파이를 최소화하고 한국인의 파이를 최대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밖으로 행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귀환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향한 안테나를 내리고 안으로 향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겸재의 진경산수를 기점으로 사대적인 감수성에서 자주적인 감수성으로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무엇보다 한국인과 세계인이라는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대와 자주를 나누는 사고 자체도 식민사관의 산물임과 동시?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을 지닌 민족사관의 산물이다.
사대와 자주를 대립시킨 다음, 사대는 나쁜 것이고 자주는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국제정치학적 차원에서 현실적인 실리의 문제인 시대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명분의 문제로 오독(誤讀)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겸재는 동북아시아의 문화권 전체를 시야 속에 확보한 세계인인 동시에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을 시양의 중심에 놓은 한국인이었고, 겸재의 진경산수는 '밖으로 향한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결과 탄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진경산수 화폭에 자리잡은 낮익은 풍경에 대한 사랑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이십 세기의 담론을 되돌이켜 투사한 닫힌 자화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 대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같은 구별과 경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안아 한국을 피워올림으로써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였다.

'요컨대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김홍희 「백남준 vs 김홍희」『백남준과 그의 예술』)

이같은 '토속적인 자기'들을 폭넓게 받아들인 것이야말로 이렇다 할 '토속적인 자기'를 지니지 못한 오늘의 미국문화로 하여금 세계문화의 리더로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게 한 비결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세계성의 부재를 토속성의 과장으로 얼버무리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창조와 관련된 예술가인 이상, 그의 마음 속에 세계인과 한국인의 두 얼굴이 공존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것들은 결코 제로섬 게임과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며, 분열적인 모순이 아니라 통합적인 모순이다. 창조의 빛이란 세계인 윤이상과 한국인 윤이상이, 세계인 이응노와 한국인 이응노가 부싯돌의 스파크와도 같이 절묘하게 부딪쳐서 피워올리는 한 줄기 섬광이다.

토속적인 자의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겪어야 했던 지리멸렬한 모방의 역사를 되풀이해야 할 것이다.

p31 백남준의 판화

살아있는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되살아난 것이다. 살아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륵신앙이 현세적인 성격의 토속신앙과 만나면서, 지금 이곳의 현실에 이상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미륵 불국도(佛國土) 사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거룩한 부처님의 모습[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라한 여인네의 모습인 [진진묘]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닮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상(象)이 겹치기 때문이다. 원형적인 미의 심상.. 개인의 내면을 통하여 재창조된 개성적인 미의 심상..

하지만 오늘의 「만남」은 어제의 「방문」과는 별개의 것이다. 오늘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제의 유물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시대착오적인 딜레땅띠즘(dilettantism)대신, '기억 속의 심상'에 새로운 양식을 덧입히는 동시대적인 다이너미즘(dynamism)과 만난다. 바로 이 언저리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전통과 마주친다.


♤ 2. 기차가 있는 풍경
시간과의 경쟁 / 된장찌개와 샌드위치

기억은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이같은 기억상실이 발생한 배경은 무엇일까. 갑자기 들이닥쳐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한 제국의 군함이 던진 근대화라는 과제가 그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화(西歐化)에 일본화(日本化)를 겹쳐놓은 것이었다.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같은 조급함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는 혁명의 열기로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 만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조급함의 한국적인 양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혁명이나 일본의 팽창처럼 현실에서 자신을 관철시키지 못함으로써 더한층 강렬하게 끊어오른, 관념적인 조급함이다. 비등점에 가깝도록 뜨거원진 관념적인 조급함의 열기야말롸, '기차가 있는 풍경'의 안쪽에 자리잡은 지난 세기의 한국인의 내면 풍경이다. 그것은 기차의 방향에 따라 존재의 방향이 결정되며 기차의 속도에 따라 존재의 속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다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가끔식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근대 한국인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에 빠진 징후는 그들이 오랜 세월 손때 묻히고 눈도장 찍어온 낯익은 취향과 결별한 데서 찾아진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刹那)인 동시에, 어제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永劫)이다.
따라서 기억상실에 빠진 자들의 취향이란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와도 같이 무의미하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하다.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성찰을 토대로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모르고 한 잘못.. 그것이 더 나쁘다.. 잘못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줘버린다)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취향을 겹쳐놓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조선 도공의 무지와 일본 다인의 안목 / 일본인과 미의식의 위계질서

인사동에서 구입한 일제시대 미술교과서..거기서 쉽게 볼 수 있다.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려 했던 것이 위계질서임을.
중요한 것은 한국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 자체가 아니라 그같은 사랑 뒤에 숨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라는 것이 모든 것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가 한국인에게서 주체에 걸맞는 '인격'을 박탈한 대한 주체에 미달하는 '사물적인 격'을 부여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의식, 무작위, 무기교의 미 - 이같은 격하의 이면에는, 이것을 최고의 미로 격상시킴으로써 왜곡의 면죄부를 스스로 발행하는 교묘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장착되어 있다.


♤ 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비애의 미와 거세된 일본인

일본의 국학은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해되는 마고코로(眞心)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이것을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으로 이해되는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비시킨다 이들이 카라고코로를 추종한다고 여겨지는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면서 그들의 모든 것을 오로지 자민족 중심주의에 따라 재단하거나 폄하한 것은 필연적이다. 일본문화 특유의 미의 범주에 시부사라는 것이 있다. 야나기에 따르면 시부사에서는 '조작을 떠난 고요함' 즉 '자연스러움의 정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시부사의 아름다움이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것은 한마디로 함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시부사의 말 뜻은 감즙의 '떫은 맛'에서 감색의 '차분함'으로, 다시 차분함의 '내면적인 깊이'로 확장된 것이다.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씌운 '무작위의 미'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 3. 선과 미와 야나기의 환상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진 것은 장마철의 집중호우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빗물을 빨리 배수시키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 4. 일본의 기교(技巧)와 한국의 격(格)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이고 일본의 격이란 위계질서의 표현인 격식(格式)을 의미한다.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추사의 수식 득격이란 식을 최소화해야 격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 부작기격 염화취실이란 화(華, 형식)를 거두어야만 실(實, 내용)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격식만을 좇는 기이한 격식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사의 글을 통해 우리는 격에 대한 한국인의 애증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형(形)의 격, 육체의 격을 멀리하고 상(象)의 격, 정신의 격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진선미를 종합한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한국 예술에서 민예성을 발견한 것은 象의 미의식을 일본인의 形의 미의식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다. 본래 상과 형은 한데 어우러져 사물의 형상을 이루되, 근본적으로 양자는 서로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난행을 무릅쓰고 자력의 일문을 빠져나가는 일본인의 근대적 미의식과, 자유니 의식이니 하는 것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타력의 성불에만 의존하는 한국인의 전근대적 무의식의 선명한 대비, 그같은 선명함을 한층 도드라지게 만들어준 근대의 눈부신 태양 앞에서 아득히 자신을 놓아버린 사람들. 야나기가 마련해준 조선 예술의 천진한 민예성, 조선 도공의 순박한 무지 따위로 자신의 누추함을 가까스로 가리운 근대 한국인의 슬픈 자화상, 이제는 이같은 식민의 담론과 결별할 때가 되었다.

♤ 6.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3부. 한국인의 미의식

♤ 1.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화강암의 아름다움과 원경(遠景)미학

♤ 2. 아졸미(雅拙美)와 고졸미(古拙美)


♤ 3. 발효맛과 생기의 마감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맛

- 난데없는 화가 치밀어 책속에 소개된 한국의 미에 대한 사진자료들과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한 언급도 많은데 일본인이 언급한 대목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IP *.229.12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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