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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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저자 (저자라는 표현보다 논객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의 개인사에 대하여 이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은 처음 만난 것 같다.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더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시작도 좋을 것 같다. 일종의 관계형성이라고 해도 되겠다. 글쓰기도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그만큼 차이가 있을 테니까… 일단 시작이 친절해서 좋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두 명의 저자들이 그 동안 어떤 책들을 써왔는지가 궁금했다. 인터넷을 조금 뒤져보니, 도정일 선생은 본인이 책 앞에 고백한 대로 책을 내지 않는 것이 장기였다. 아마 내기 시작한다면 양도 속도도 엄청날 것이라 짐작 된다. 최재천 선생은 책에서도 간혹 인용되었듯이 여러 권의 저서와 번역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담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세하면서도 접근하기 쉬운 생물학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 놓았다. 두 서너 권 정도 끌리는 책이 있기에 서점에 가면 들춰 볼 생각이다.
도정일 선생은 일단 지식의 폭에서 압도될 만큼 박식했다. 인문학자의 대표 선수로 나오기는 했지만사실 그가 능한 분야는 비단 인문학 뿐은 아닌 것 같다. 시대를 두루 넘나들기도 했으며 영역을 가리지 않고 섭렵하고 있었다. 지식의 양도 양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해 깊게 뚫어 보고 있는 심안도 대단했다.
최재천 선생은 부드러운 과학자였다. 누구보다 깊게 들어간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막히지 않아 있었고 학문과 삶을 하나로 가져가고 있었다. 특히 최 선생의 부드럽고 친절한 설명이 나를 조금 더 매혹시켰다.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앎이 깊다는 것일게다.
뒤에서도 다시 얘기하겠지만, 이 책의 묘미 중 하나는 두 작가간의 ‘통섭’이다. 책의 뒷 부분에서는, 이야기의 내용만으로는 어느 작가의 주장인지 판단하기 곤란할 정도로 지식의 통합이 형성되고 있다. 대담이 이루어진 4년 동안의 진화라고 볼 수도 있으려나?
2. 내 안에서 재창조된 생각들
총 13合을 겨루는 동안에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예리하던 창 끝도 이미 무뎌져 상대방을 해할 마음도 이유도 없어진 지 오래다. 모든 대결이 끝날 즈음에는 서로 웃고 있었고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두 명의 고수가 벌인 흥미 진진한 싸움이었다. 밀리는가 하면 어느 새 밀고 있었다. 내공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절대 강자가 있을 수 없었다.
보고 있는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길지 못내 궁금하더니, 나중에는 둘 다 승자일 것 같았고 스승일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결 안에서 나는, 침팬치와 인간이 분화하던 600만년 전부터 2050년까지 다녀올 수 있었으며, 세계 곳곳의 다양한 환경과 이슈를 경험할 수 있었다. 거대함과 다양함을 동시에 접하다 보니 내가 점점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그 때부터 나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마디도 놓치기 싫었지만, 그들이 던지는 화두는 이미 내 머리보다 높은 곳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기에 정신 없이 따라가다가 지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 책은 누가 기획한 것일까? 두 선생 중 한 명이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순수한 지적 의도였든 흥미를 위한 상업적 의도였든 간에 이 책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론을 보여주었다. 사실 서로 다른 학문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서로의 기초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전제가 용납되지 않는데 어찌 그 아랫것들이 어여삐 보이겠는가? 이번 대담에서도 초반에 그러한 조짐이 있었다. 과학자에게 사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신화가 용납될 리 없었고, 하나의 원칙을 고수하는 생물학적 전제가 인문학자의 넓은 시야 속에서는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같은 쟁점을 가지고 페이지를 건너뛰며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그러한 부분이 잘 나타난다. 하지만 그 둘은 점차 진화를 했고 통섭을 이뤄냈다. 서로가 서로의 토대 위에서 더 근거 있는 사실을 발견해 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대담의 뒤로 가면 갈수록 인문학자는 점점 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고 오히려 생물학자가 따뜻하고 애정 어린 인간적 시선으로 달래주는 형국이 되었다.
나는 이 대담을 통해 앞으로 나를 변화시켜 줄 두 가지 큰 마스터 DNA를 건져 냈다. 두터움과 다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도정일 선생은 두터운 세계가 좋은 것이라 했다. 두터움이란 다양함과 통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개체들이 모여 스스로를 지켜줄 두께를 만들어 낸다. 두터운 세계는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정화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며 작다고 해서 먹어 치우지도 않을 것이다. 깊기 때문에 남이 쉽게 안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외부의 잣대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건강할 수 있고 스스로 창조적일 수 있다. 투명해서 좋은 것은 회계 장부 뿐이라 했다.
일단 나 자신의 두터움을 먼저 모색하는 것이 순서이리라. 내 밑에서 다양한 개체들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두께를 갖춰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왕성하게 다양한 세계를 만나보아야 한다. 책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내 몸을 통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두터움와 다양함의 원리를 직장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종이 다양해야 생태계가 건강하듯이, 직원이 다양해야 회사가 건강할 수 있다. 다양한 직원들의 다양한 역량들이 발현되는 직장, 하나의 목적에만 역량이 집중되어 그 이외의 상황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굳어버린 기계가 아니라, 온 몸이 꿈틀대며 저마다의 영역을 개척해 낼 수 있고, 외부의 충격을 견뎌내며 그것마저도 자신의 역량으로 개조해 낼 수 있는 두터움을 갖춘 조직, 그것이 바로 두터운 직장이 될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분야에 상관없이 10년 이상 꾸준히 정진하여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서로 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학문이 분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밑에 흐르는 가장 근본이 되는 부분은 서로 그렇게 많이 돌아서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이와 같은 대담을 주최할 수 있다면 어떤 분야의 사람들을 마주 앉히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나라면 아마 경영학자와 인문학자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의 경영학은 마치 과학의 한 분야처럼 미세하게 분화되어 있고 또 그 방법론에 있어서 과학만큼 정교화 되어 있다. 분명 경영학은 인문학에서 나온 분야인데 점점 인간적인 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효율만을 생각하게 하고 이익만을 바라보게 한다. 팔리는가 팔리지 않는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될 뿐이다. 삶의 대부분을 그 안에서 보내는 인간에 대한 고민은 바빠서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점점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장자莊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공이 초나라를 유람하다 진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 남쪽을 지나게 되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그 노력에 비해 효과가 별로 없어 보였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라는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이 낯빛을 붉혔다가 다시 웃음을 띄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경영학과 인문학의 대화는 이와 같은 또 다른 절충점을 이끌어 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한번 꾸며보고 싶다.
그때에는 몇 가지 분명한 주제를 던져주고 싶다. 사실 이 책에는 13가지의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지만 대담 전에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화두에 따라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워낙 쟁쟁한 선생들이라 시작과 과정을 초월하여 의미있는 결론을 이끌어 냈지만 사실 읽어본 독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맥락을 잡기가 어려웠다.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분명한 ‘싸울 거리’를 던져 준다면, 보다 쉽게 나 같은 초보 독자들에게도 다가설 수 있으리라.
끝으로 누군가 나에게 이처럼 어딘가의 한 고수와 여러 해 동안 떠들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도 재미 삼아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 고민엔 무리수가 있다. 나의 전공이 분명해야 적수를 찾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도 억지를 부려 본다면 나는 종교인과 한판 붙어 보고 싶다. 그것도 절대자를 믿고 다음 세상을 철저하게 믿는 독실한 사람이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인간밖에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마치고 절대자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평안이 찾아 올지도 모르니…
4. 나에게 들어온 글들
<11>
인문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또한 그렇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학문이기 이전에 삶이라고 생각한다.
<14>
나에게는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가 있는 것 같아요. 부르주아도 많은 미덕을 지녔잖아요. 자기관리를 아주 철저히 해서 남에게 신세지지 않으려 하죠. 하지만 이해관계를 따져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매사를 이해관계의 잣대로 움직이는 인간, 제가 제일 경멸하는 형입니다.
<25>
깊은 곳으로 추락, 문학이란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추락과 상처, 상실을 처리하는 기술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문학은 추락을 무의미한 낙하가 아니라 상승으로 바꾸어 주는, 즉 하강이 동시에 상승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30>
그는 이성과 상상력은 함께할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포기해선 안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세상, 그런 복합적인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했다.
<31>
두터운 세계,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세계를 너무 얇고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32>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여러가지 방법 가운데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삶의 제 1조예요.
<63>
제가 있었던 미시간 대학 Society of Fellows에서는 연구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부담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연구비 줄 테니 당신이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거죠. 연구소 설립 당시 이런 방임주의를 걱정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내버려두면 모두 방만해지고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내버려둘수록 더 훌륭한 연구가 나온 겁니다.
<71>
우울함을 느끼는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진화의 산물이에요…생물학자들은 우울증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빋습니다. 우울증은 공포에 적응하려는 본성이고,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생물학자인 제 입장에서는 우리의 정신에 화학의 칼을 들이대는 약물들의 오남용이 굉장히 걱정됩니다.
<77>
누구나 행복하게 사고 싶어하죠. 행복의 욕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문제는 행복이란 게 저만치 어디에 있다, 그걸 내가 잡기만 하면 된다고 조바심치는 데 있죠.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그때그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매순간의 우리의 판단과 선택과 행동에서 행복을 얻기 보다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88>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활동들은 ‘성찰과 창조’라는 두 개의 축 위에 전개됩니다.
<91>
왜 우리는 이렇게 심하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경계가 뚜렷해졌는지 저도 참 신기합니다. 미국만해도 영문학과 학생이 생물학과로 옮겨가는 게 아주 자유롭거든요. 왜 우리는 이렇게 까지 경직된 구분을 갖고 있는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국성에 대한 얘기로 발전 가능한가?)
<93>
이 같은 추세에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한 이른바 환원주의가 특히 20세기를 거치며 인류에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제공해준 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환원주의 신봉모드에서 헤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04>
과학의 결핍은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적인 제도적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105>
인간 정신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과학 정신이고 이 정신이 사회 변화에 기여합니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가 바로 그 점, 곧 정신의 자유확장이 과학 정신이란 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일 겁니다… 서양 과학을 낳은 것은 과학을 가능하게 한 문화, 사고방식, 절차들인데 이것들은 다 생략하고 그 결과물인 과학기술만 도입하자는 건 안이한 생각이죠.
<109>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죠. 한국의 제도 안에서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생존의 게임자체가 시험처럼 획일화된 기준으로 기획되어 있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욕망은 그렇게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건 게임의 잣대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자연은 매우 다양하고 그 자연에 적응하여 사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다양한데 우리는 단 한 개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합니다. 인간이 만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동안 하나의 잣대에 맞추려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멸종하고 말았을 겁니다.
<120>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진화론 때문에 창세기가 휴지조각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생물학적 설명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가 거기 담겨 있습니다.
<120>
인문학은 확실한 결론보다는 문제를 열어두고 싶어합니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 확실성의 추구는 서구 근대 과학의 특징이죠…현대과학은 확실성과 완전성의 추구를 목표로 삼았던 근대 과학 전통과 정면충돌합니다…근대과학에 대한 현대과학의 이런 반란이 현대 과학과 인문학 사시의 통찰의 접점을 만듭니다. 수학이 또는 과학이 입증할 수 없는 진리도 있다, 이건 인문학적으로는 아주 매혹적인 주장입니다.
<130>
문화적 선택은 자연선택과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 혹은 생물학적 토대 위에 있으면서 생물학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죠. 말하자면 인간이 자연스럽지 않은 질서와 규범을 만들어 자연상태에 개입하고 자신의 행동과 존재방식을 바꾸어 사회적 진화를 이루는 것이 비생물학적 차원입니다.
<151>
학습능력을 갖추 동물이라 할지라도 대개 당대에 배워 써먹고 다음 세대는 나름대로 또 홀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 세대가 터득한 것을 문자로 다음 세대에 남깁니다.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은 세대마다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서 뛰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아예 출발선을 들고 옮기며 사는 동물인 셈입니다. 비교가 안되는 거죠.
<173>
기술이 어떤 미래를 열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으니 “이건 안돼” 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하자 하자”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없는 경우가 바로 생명과학시대의 딜레마 같아요
<175>
바로 거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지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방법인가를 따집니다.
<176>
사회는 종종 우리 과학자들을 너무 지나치게 단순한 사람들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고민합니다. 우리도 인류에게 좋은 공헌을 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날 구속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나를 구속하고 그걸 남이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우리 과학자들이 충분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7>
생물의 번식력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겁니다. 누군가가 죽어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
<180>
기독교의 뿌리가 된 히브리 서사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크게 두가지죠. 하나는 영생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지식의 욕망입니다. 근대 서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보세요. 나는 무한히 오래 살고 싶다, 나는 무한히 많이 알고 싶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욕망입니다.
<186>
과학을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인 ‘실험군이 있으면 대조군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
<187>
우리는 과학을 너무 급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기술이 먼저 들어오고, 과학이 그 뒤를 미처 따르지 못했죠.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비합리성이나 비리 등은 과학적 사고가 결여된 상태에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봅니다.
<189>
한국인은 두개의 시계를 차고 있다, 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선 왕조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다,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맞춰 행동하고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고도의 경쟁주의 사회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파벌,학벌,연줄,서열,신분 같은 전근대적 비효율의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다 갉아먹고 있습니다.
<191>
학위라는 게 그 사람이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다고 주는 게 아니 잖아요. 홀로 설 수 있다는 자격증을 주는 건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 대학들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홀로 서는 연구자 (independent researcher) 키워내기 , 그것이 대학원 과정의 목표죠.
<192>
그 친구가 돌아서서 나갈 대면 '그거 하지 말고, 이거해'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나오죠. 연구 아이디어 들은 제 컴퓨터 파일에 잔뜩 들어있거든요. 제가 연구하고 싶은게 아주 만항요. 이것 좀 생각해보라고 하나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꾹꾹 참고 삽니다.
“저는 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자식한테 설명할 수 있는 생물학을 하고 싶습니다.”
… 그런 과정을 거치며 얼마쯤 지나고 나니까 자기 일이라는 만족감, 성취도, 자부심이 정말 다르더라고요… 알고 하는 연구와 그저 남 뒤나 따라가는 연구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저는 그런 게 좋다는 거죠.
<194>
무엇을 연구하고 공부할지 문제를 제 힘으로 찾아내고 그 연구의 의의와 중요성을 스스로 정당화 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부터가 훈련입니다.
<196>
달마게이트라는 말이 있죠? 학생들이 어떤 것의 중요성에 눈뜨는 일종의 '깨침문' 말입니다.
<206>
요즘은 창조론(creationism)이란 구식 명칭 대신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햇습니다.
<221>
우리는 우리가 나날이 비윤리적이 돼간다고 말합니다.정말 그럴까요?...생명과학의 발달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존재로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까다로운 생명윤리의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239>
그리스 문화에서는 '인간에게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은 일찍 죽는 것'이라는 말이 지혜로 유통되기도 했어요.
<255>
다윈이 말한 진화의 핵심은 한단어로 말하면 다양성 입니다. 한국인은 여태껏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고, 또 다양한 개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겁니다.
(만일 동일한 유전자로 이루어진 사회가 된다면) 참으로 묘한 모순이 생깁니다. 유전적으로 볼때 개인은 월등해지는 반면, 집단은 완전히 열등해지는 길로 들어서는 거죠.
<298>
어떤 영화를 보니까, 한번도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는가? 라는 대사가 나와요. 아주 공감이 가던데요.
<312>
저는 이제 인간의 자연 서식지는 기계문명이 만들어낸 이 새로운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도시 문명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겁니다.
<315>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 (Life will find a way)' 진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 있다면 생명이란 가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한다는 겁니다. 그 어떤 힘도 생명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338>
음악이 제사용 목적으로만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사 이상으로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전투,모방,통합입니다.
<348>
요약하면 한국 남자들이 이쑤시개형을 선호하는 것은 자연선택도 성선택도 아니고 미적기준의 변이현상도 아닌, 사회,경제적 부자 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라 말할 수 있죠.
<352>
기술은 '쓸모'를 찾아가고 예술은 '쓸모'를 떠납니다.
<354>
우리 인간이 고령화하면서 나이 든 여성들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고 젊은 여성들이 낳은 자식들을 돌봐줄 수 있게 되어 삶의 여유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문자를 개발할 수 있게 했고, 그로 인해 예술과 문화가 탄생했다는 설명입니다. <할머니 이론>
<361>
새로운 것을 내고 싶어하는 것도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일겁니다. 과학은 새로운 표현을 내놓고자 하죠. 그래서 예술과 과학에는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395>
남성은 더 많은 여성을 찾아다니려는 동물인데, 그런 일부다처제 성향을 상당히 줄여준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여성의 배란 은폐입니다...어떻게 보면 이것이 결혼과 가족의 유래일 겁니다.
<423>
미래 사회의 사람들은 기술이 열어놓은 가능성과 그 가능성 때문에 잃어버려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아마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겁니다.
<439>
저는 오히려 그들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어차피 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다 번식을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저는 우리에게 좀 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변이일 뿐이고 그래서 그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늘 있어왔으며, 또 그들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없어져야 한다고 열을 올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478>
그러니까 방법은 철저히 과학적으로 하되, 머리는 신화적으로 돌리는 게 과학의 묘수가 아닐까요? 즉 프로이트의 ‘신화들’이 비록 비과학적이라 해도, 거기서부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이 비상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립니다.
<483>
프로이트식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말기 증상의 일부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반성은 귀중한 거지만, 프로이트가 촉발한 서구의 자기 반성과 해체 충동은 유럽 문명의 조락과 황혼을 알리는 징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명의 맥이 빠져 자빠지기 직전에 일어나는 병적 창조성의 마지막 불꽃 같은거 말입니다….유럽은 자기를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고, 미국은 자만과 무감각에 빠져 있습니다.
<496>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려거든 그들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찾아보라고 말이죠.
<499>
경제 발전보다 수십배 더 어려운 것이 정치발전이고 민주주의예요. 사회 민주화는 제도나 법률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는 수직 서열 사회죠. 이 수직성의 사회를 수평성의 사회로 바꾸고 합리성을 확장하는 일, 이것이 ‘사회적 근대’의 알맹이입니다.
<500>
한국인은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뭐든 잘 바꾸고 잘 바뀌죠. 한국적 ‘변화의 현상학’은 연구거리 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바뀌지 않는 거대한 관습적 심리구조와 구시대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행이 꽈리를 틀고 있습니다.
<502>
개인주의의 타락은 사실 한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채택한 사회들에서 지금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속화 현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세계적 현상은 정신의 ‘비속화’ 일겁니다. 개인과 사회가 끝도 없이 천박해 지고 있어요
<505>
어쩌면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볼 때 변화가 빠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전국민이 똑 같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하나의 똘똘 뭉친 집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완전히 거국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거죠. 스위핑 체인지죠
<509>
한국인에게 유독 변화에 민감한 유전형질이 생물학적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화적 유전의 영향이 아닐까?
<515>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탁월성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틀림없이 이기적 동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기적 성향을 거스를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이기성과 비이기성 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과 싸움을 감당할 능력, 거기에 인간의 탁월성이 있다는 생각이죠. 두 번째 생각은 인간이 ‘지금 여기’에 매어 있으면서도 그 결박을 넘어 자른 것을, 지금 여기의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여기’를 넘어 다른 곳, 다른 세계, 다른 가능성, ‘저기’를 보는 거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른 것들과의 ‘연결’을 시도 합니다.
<517>
우리사회는 빠른 적응에 성공하기 위해서 긴 적응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521>
사회 문화적 다양성이나 생태계에서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자연계라는 거대한 생태 창고 안에는 인간이 아직 모르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인간이 모르는 문제,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 문제들이 미래에는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어요. 그 미지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소리없이 저장해 놓고 있는 것이 생태계입니다. 그런데 그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해 버리면 인간은 제 손으로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잃어버리게 되죠.
<528>
우리가 남의 자식을 품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 허구에서 온 게 아닌가? 우리 민족처럼 핏줄이라는 것에 엄청나게 매달려 있는, 수수한 혈통이라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민족이 있을까?
<540>
유전자의 발현 가능성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발현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면 바로 여기, 여기가 자유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542>
만일 인간도 자꾸 한방향으로 우리의 유전자들을 몰아가면, 스스로를 무척 취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543>
하나의 문명이나 문화권, 사회 안에서도 별 녀석이 별 소리 다하고 별 생각 다 해보는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문화가 창조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문화는 왕성하게 다양성을 유지하는 문화일 겁니다. 유럽여행자들이 가장 인상깊게 보고 오는 것 중에 하나가, 같은 유럽 문명권이고 그 밑바닥에는 기독교 문명이 흐르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도시의 성격이나 특성,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예요. 거기 비하면 우리 도시들은 너무 똑같아요.
<554>
시장은 다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면 온갖 것이 다 있다는 게 바로 다양성이죠. 그런데 세계화 시대의 시장은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시장이 오히려 다양성을 죽이는 쪽으로 움직이니까요. 시장근본주의는 ‘시장가치’ 하나만 내세웁니다. 시장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고 줄을 세우는 거죠.
<557>
지금은 시장의 세계화가 저항할 수 없는 흐름 같아 보이지만, 인간이 자연을 바꿔온 것처럼 시장 체제도 어떻게 관리하고 만들어가는가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장이 다양성만 지킬 수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요.
<562>
신화전통에서는 모순대립물의 공존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신화의 특성이죠. ‘모순의 통일성(coincidentia oppositorum)’이 그것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대립하는 것들이 떨어져 있지 ㅇ낳고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564>
두터운 세계는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입니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때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닙니다.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죠.
<569>
저는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된 것 말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더 대규모로 자연과의 공생을 실천에 옮긴 동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파괴만 한 동물은 아니라는 거죠. 함께할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했는데 성공이 지나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공생의 지혜를 잃어버린 거예요.
<572>
기업집단에도 최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윤리적 감성을 가진 개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체의 차원에서는 모두 그런 윤리적 감성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집단의 단위로 올라가서 어떤 정책을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되면 개체들의 윤리적 능력은 힘이 쫙 빠집니다. 기업은 이윤을 내야하는 집단입니다.
<579>
19세기 영국 사회사상가들이 생각해낸 꾀가 있어요. 사람들의 이기적 성향을 욕만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하라, 그런데 이기적 행동의 결과가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게 유도하라는 게 그 비결입니다. 뒤집어 놔도 됩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나한테도 최고로 이익이더라, 기업이 윤리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기업 이윤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면 되다는 소립니다.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역설이 나오게 말이죠.
<584>
남자든 여자든 사는게 참 힘들어진 세상입니다…예전에는 사회가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경쟁을 하더라도 규모와 강도가 아주 작고 약했죠.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요. 작은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가닥 할 수 있는 거리가 굉장히 많았다는 거죠. 지금은 모든 사람이 타이거 우즈에게 비교당하고 전지현에게 비교당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597>
‘경쟁을 넘어 협동으로’.. 제가 말한 두터운 세계와 최 선생님께서 말한 호모 심비우스의 세계가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지점도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이곳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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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저자라는 표현보다 논객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의 개인사에 대하여 이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은 처음 만난 것 같다.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더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시작도 좋을 것 같다. 일종의 관계형성이라고 해도 되겠다. 글쓰기도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그만큼 차이가 있을 테니까… 일단 시작이 친절해서 좋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두 명의 저자들이 그 동안 어떤 책들을 써왔는지가 궁금했다. 인터넷을 조금 뒤져보니, 도정일 선생은 본인이 책 앞에 고백한 대로 책을 내지 않는 것이 장기였다. 아마 내기 시작한다면 양도 속도도 엄청날 것이라 짐작 된다. 최재천 선생은 책에서도 간혹 인용되었듯이 여러 권의 저서와 번역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담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세하면서도 접근하기 쉬운 생물학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 놓았다. 두 서너 권 정도 끌리는 책이 있기에 서점에 가면 들춰 볼 생각이다.
도정일 선생은 일단 지식의 폭에서 압도될 만큼 박식했다. 인문학자의 대표 선수로 나오기는 했지만사실 그가 능한 분야는 비단 인문학 뿐은 아닌 것 같다. 시대를 두루 넘나들기도 했으며 영역을 가리지 않고 섭렵하고 있었다. 지식의 양도 양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해 깊게 뚫어 보고 있는 심안도 대단했다.
최재천 선생은 부드러운 과학자였다. 누구보다 깊게 들어간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막히지 않아 있었고 학문과 삶을 하나로 가져가고 있었다. 특히 최 선생의 부드럽고 친절한 설명이 나를 조금 더 매혹시켰다.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앎이 깊다는 것일게다.
뒤에서도 다시 얘기하겠지만, 이 책의 묘미 중 하나는 두 작가간의 ‘통섭’이다. 책의 뒷 부분에서는, 이야기의 내용만으로는 어느 작가의 주장인지 판단하기 곤란할 정도로 지식의 통합이 형성되고 있다. 대담이 이루어진 4년 동안의 진화라고 볼 수도 있으려나?
2. 내 안에서 재창조된 생각들
총 13合을 겨루는 동안에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예리하던 창 끝도 이미 무뎌져 상대방을 해할 마음도 이유도 없어진 지 오래다. 모든 대결이 끝날 즈음에는 서로 웃고 있었고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두 명의 고수가 벌인 흥미 진진한 싸움이었다. 밀리는가 하면 어느 새 밀고 있었다. 내공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절대 강자가 있을 수 없었다.
보고 있는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길지 못내 궁금하더니, 나중에는 둘 다 승자일 것 같았고 스승일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결 안에서 나는, 침팬치와 인간이 분화하던 600만년 전부터 2050년까지 다녀올 수 있었으며, 세계 곳곳의 다양한 환경과 이슈를 경험할 수 있었다. 거대함과 다양함을 동시에 접하다 보니 내가 점점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그 때부터 나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마디도 놓치기 싫었지만, 그들이 던지는 화두는 이미 내 머리보다 높은 곳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기에 정신 없이 따라가다가 지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 책은 누가 기획한 것일까? 두 선생 중 한 명이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순수한 지적 의도였든 흥미를 위한 상업적 의도였든 간에 이 책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론을 보여주었다. 사실 서로 다른 학문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서로의 기초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전제가 용납되지 않는데 어찌 그 아랫것들이 어여삐 보이겠는가? 이번 대담에서도 초반에 그러한 조짐이 있었다. 과학자에게 사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신화가 용납될 리 없었고, 하나의 원칙을 고수하는 생물학적 전제가 인문학자의 넓은 시야 속에서는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같은 쟁점을 가지고 페이지를 건너뛰며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그러한 부분이 잘 나타난다. 하지만 그 둘은 점차 진화를 했고 통섭을 이뤄냈다. 서로가 서로의 토대 위에서 더 근거 있는 사실을 발견해 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대담의 뒤로 가면 갈수록 인문학자는 점점 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고 오히려 생물학자가 따뜻하고 애정 어린 인간적 시선으로 달래주는 형국이 되었다.
나는 이 대담을 통해 앞으로 나를 변화시켜 줄 두 가지 큰 마스터 DNA를 건져 냈다. 두터움과 다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도정일 선생은 두터운 세계가 좋은 것이라 했다. 두터움이란 다양함과 통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개체들이 모여 스스로를 지켜줄 두께를 만들어 낸다. 두터운 세계는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정화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며 작다고 해서 먹어 치우지도 않을 것이다. 깊기 때문에 남이 쉽게 안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외부의 잣대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건강할 수 있고 스스로 창조적일 수 있다. 투명해서 좋은 것은 회계 장부 뿐이라 했다.
일단 나 자신의 두터움을 먼저 모색하는 것이 순서이리라. 내 밑에서 다양한 개체들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두께를 갖춰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왕성하게 다양한 세계를 만나보아야 한다. 책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내 몸을 통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두터움와 다양함의 원리를 직장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종이 다양해야 생태계가 건강하듯이, 직원이 다양해야 회사가 건강할 수 있다. 다양한 직원들의 다양한 역량들이 발현되는 직장, 하나의 목적에만 역량이 집중되어 그 이외의 상황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굳어버린 기계가 아니라, 온 몸이 꿈틀대며 저마다의 영역을 개척해 낼 수 있고, 외부의 충격을 견뎌내며 그것마저도 자신의 역량으로 개조해 낼 수 있는 두터움을 갖춘 조직, 그것이 바로 두터운 직장이 될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분야에 상관없이 10년 이상 꾸준히 정진하여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서로 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학문이 분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밑에 흐르는 가장 근본이 되는 부분은 서로 그렇게 많이 돌아서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이와 같은 대담을 주최할 수 있다면 어떤 분야의 사람들을 마주 앉히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나라면 아마 경영학자와 인문학자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의 경영학은 마치 과학의 한 분야처럼 미세하게 분화되어 있고 또 그 방법론에 있어서 과학만큼 정교화 되어 있다. 분명 경영학은 인문학에서 나온 분야인데 점점 인간적인 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효율만을 생각하게 하고 이익만을 바라보게 한다. 팔리는가 팔리지 않는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될 뿐이다. 삶의 대부분을 그 안에서 보내는 인간에 대한 고민은 바빠서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점점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장자莊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공이 초나라를 유람하다 진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 남쪽을 지나게 되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그 노력에 비해 효과가 별로 없어 보였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라는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이 낯빛을 붉혔다가 다시 웃음을 띄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경영학과 인문학의 대화는 이와 같은 또 다른 절충점을 이끌어 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한번 꾸며보고 싶다.
그때에는 몇 가지 분명한 주제를 던져주고 싶다. 사실 이 책에는 13가지의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지만 대담 전에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화두에 따라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워낙 쟁쟁한 선생들이라 시작과 과정을 초월하여 의미있는 결론을 이끌어 냈지만 사실 읽어본 독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맥락을 잡기가 어려웠다.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분명한 ‘싸울 거리’를 던져 준다면, 보다 쉽게 나 같은 초보 독자들에게도 다가설 수 있으리라.
끝으로 누군가 나에게 이처럼 어딘가의 한 고수와 여러 해 동안 떠들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도 재미 삼아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 고민엔 무리수가 있다. 나의 전공이 분명해야 적수를 찾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도 억지를 부려 본다면 나는 종교인과 한판 붙어 보고 싶다. 그것도 절대자를 믿고 다음 세상을 철저하게 믿는 독실한 사람이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인간밖에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마치고 절대자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평안이 찾아 올지도 모르니…
4. 나에게 들어온 글들
<11>
인문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또한 그렇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학문이기 이전에 삶이라고 생각한다.
<14>
나에게는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가 있는 것 같아요. 부르주아도 많은 미덕을 지녔잖아요. 자기관리를 아주 철저히 해서 남에게 신세지지 않으려 하죠. 하지만 이해관계를 따져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매사를 이해관계의 잣대로 움직이는 인간, 제가 제일 경멸하는 형입니다.
<25>
깊은 곳으로 추락, 문학이란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추락과 상처, 상실을 처리하는 기술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문학은 추락을 무의미한 낙하가 아니라 상승으로 바꾸어 주는, 즉 하강이 동시에 상승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30>
그는 이성과 상상력은 함께할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포기해선 안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세상, 그런 복합적인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했다.
<31>
두터운 세계,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세계를 너무 얇고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32>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여러가지 방법 가운데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삶의 제 1조예요.
<63>
제가 있었던 미시간 대학 Society of Fellows에서는 연구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부담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연구비 줄 테니 당신이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거죠. 연구소 설립 당시 이런 방임주의를 걱정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내버려두면 모두 방만해지고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내버려둘수록 더 훌륭한 연구가 나온 겁니다.
<71>
우울함을 느끼는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진화의 산물이에요…생물학자들은 우울증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빋습니다. 우울증은 공포에 적응하려는 본성이고,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생물학자인 제 입장에서는 우리의 정신에 화학의 칼을 들이대는 약물들의 오남용이 굉장히 걱정됩니다.
<77>
누구나 행복하게 사고 싶어하죠. 행복의 욕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문제는 행복이란 게 저만치 어디에 있다, 그걸 내가 잡기만 하면 된다고 조바심치는 데 있죠.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그때그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매순간의 우리의 판단과 선택과 행동에서 행복을 얻기 보다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88>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활동들은 ‘성찰과 창조’라는 두 개의 축 위에 전개됩니다.
<91>
왜 우리는 이렇게 심하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경계가 뚜렷해졌는지 저도 참 신기합니다. 미국만해도 영문학과 학생이 생물학과로 옮겨가는 게 아주 자유롭거든요. 왜 우리는 이렇게 까지 경직된 구분을 갖고 있는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국성에 대한 얘기로 발전 가능한가?)
<93>
이 같은 추세에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한 이른바 환원주의가 특히 20세기를 거치며 인류에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제공해준 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환원주의 신봉모드에서 헤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04>
과학의 결핍은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적인 제도적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105>
인간 정신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과학 정신이고 이 정신이 사회 변화에 기여합니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가 바로 그 점, 곧 정신의 자유확장이 과학 정신이란 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일 겁니다… 서양 과학을 낳은 것은 과학을 가능하게 한 문화, 사고방식, 절차들인데 이것들은 다 생략하고 그 결과물인 과학기술만 도입하자는 건 안이한 생각이죠.
<109>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죠. 한국의 제도 안에서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생존의 게임자체가 시험처럼 획일화된 기준으로 기획되어 있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욕망은 그렇게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건 게임의 잣대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자연은 매우 다양하고 그 자연에 적응하여 사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다양한데 우리는 단 한 개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합니다. 인간이 만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동안 하나의 잣대에 맞추려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멸종하고 말았을 겁니다.
<120>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진화론 때문에 창세기가 휴지조각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생물학적 설명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가 거기 담겨 있습니다.
<120>
인문학은 확실한 결론보다는 문제를 열어두고 싶어합니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 확실성의 추구는 서구 근대 과학의 특징이죠…현대과학은 확실성과 완전성의 추구를 목표로 삼았던 근대 과학 전통과 정면충돌합니다…근대과학에 대한 현대과학의 이런 반란이 현대 과학과 인문학 사시의 통찰의 접점을 만듭니다. 수학이 또는 과학이 입증할 수 없는 진리도 있다, 이건 인문학적으로는 아주 매혹적인 주장입니다.
<130>
문화적 선택은 자연선택과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 혹은 생물학적 토대 위에 있으면서 생물학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죠. 말하자면 인간이 자연스럽지 않은 질서와 규범을 만들어 자연상태에 개입하고 자신의 행동과 존재방식을 바꾸어 사회적 진화를 이루는 것이 비생물학적 차원입니다.
<151>
학습능력을 갖추 동물이라 할지라도 대개 당대에 배워 써먹고 다음 세대는 나름대로 또 홀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 세대가 터득한 것을 문자로 다음 세대에 남깁니다.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은 세대마다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서 뛰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아예 출발선을 들고 옮기며 사는 동물인 셈입니다. 비교가 안되는 거죠.
<173>
기술이 어떤 미래를 열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으니 “이건 안돼” 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하자 하자”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없는 경우가 바로 생명과학시대의 딜레마 같아요
<175>
바로 거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지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방법인가를 따집니다.
<176>
사회는 종종 우리 과학자들을 너무 지나치게 단순한 사람들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고민합니다. 우리도 인류에게 좋은 공헌을 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날 구속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나를 구속하고 그걸 남이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우리 과학자들이 충분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7>
생물의 번식력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겁니다. 누군가가 죽어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
<180>
기독교의 뿌리가 된 히브리 서사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크게 두가지죠. 하나는 영생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지식의 욕망입니다. 근대 서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보세요. 나는 무한히 오래 살고 싶다, 나는 무한히 많이 알고 싶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욕망입니다.
<186>
과학을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인 ‘실험군이 있으면 대조군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
<187>
우리는 과학을 너무 급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기술이 먼저 들어오고, 과학이 그 뒤를 미처 따르지 못했죠.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비합리성이나 비리 등은 과학적 사고가 결여된 상태에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봅니다.
<189>
한국인은 두개의 시계를 차고 있다, 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선 왕조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다,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맞춰 행동하고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고도의 경쟁주의 사회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파벌,학벌,연줄,서열,신분 같은 전근대적 비효율의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다 갉아먹고 있습니다.
<191>
학위라는 게 그 사람이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다고 주는 게 아니 잖아요. 홀로 설 수 있다는 자격증을 주는 건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 대학들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홀로 서는 연구자 (independent researcher) 키워내기 , 그것이 대학원 과정의 목표죠.
<192>
그 친구가 돌아서서 나갈 대면 '그거 하지 말고, 이거해'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나오죠. 연구 아이디어 들은 제 컴퓨터 파일에 잔뜩 들어있거든요. 제가 연구하고 싶은게 아주 만항요. 이것 좀 생각해보라고 하나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꾹꾹 참고 삽니다.
“저는 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자식한테 설명할 수 있는 생물학을 하고 싶습니다.”
… 그런 과정을 거치며 얼마쯤 지나고 나니까 자기 일이라는 만족감, 성취도, 자부심이 정말 다르더라고요… 알고 하는 연구와 그저 남 뒤나 따라가는 연구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저는 그런 게 좋다는 거죠.
<194>
무엇을 연구하고 공부할지 문제를 제 힘으로 찾아내고 그 연구의 의의와 중요성을 스스로 정당화 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부터가 훈련입니다.
<196>
달마게이트라는 말이 있죠? 학생들이 어떤 것의 중요성에 눈뜨는 일종의 '깨침문' 말입니다.
<206>
요즘은 창조론(creationism)이란 구식 명칭 대신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햇습니다.
<221>
우리는 우리가 나날이 비윤리적이 돼간다고 말합니다.정말 그럴까요?...생명과학의 발달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존재로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까다로운 생명윤리의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239>
그리스 문화에서는 '인간에게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은 일찍 죽는 것'이라는 말이 지혜로 유통되기도 했어요.
<255>
다윈이 말한 진화의 핵심은 한단어로 말하면 다양성 입니다. 한국인은 여태껏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고, 또 다양한 개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겁니다.
(만일 동일한 유전자로 이루어진 사회가 된다면) 참으로 묘한 모순이 생깁니다. 유전적으로 볼때 개인은 월등해지는 반면, 집단은 완전히 열등해지는 길로 들어서는 거죠.
<298>
어떤 영화를 보니까, 한번도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는가? 라는 대사가 나와요. 아주 공감이 가던데요.
<312>
저는 이제 인간의 자연 서식지는 기계문명이 만들어낸 이 새로운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도시 문명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겁니다.
<315>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 (Life will find a way)' 진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 있다면 생명이란 가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한다는 겁니다. 그 어떤 힘도 생명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338>
음악이 제사용 목적으로만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사 이상으로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전투,모방,통합입니다.
<348>
요약하면 한국 남자들이 이쑤시개형을 선호하는 것은 자연선택도 성선택도 아니고 미적기준의 변이현상도 아닌, 사회,경제적 부자 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라 말할 수 있죠.
<352>
기술은 '쓸모'를 찾아가고 예술은 '쓸모'를 떠납니다.
<354>
우리 인간이 고령화하면서 나이 든 여성들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고 젊은 여성들이 낳은 자식들을 돌봐줄 수 있게 되어 삶의 여유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문자를 개발할 수 있게 했고, 그로 인해 예술과 문화가 탄생했다는 설명입니다. <할머니 이론>
<361>
새로운 것을 내고 싶어하는 것도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일겁니다. 과학은 새로운 표현을 내놓고자 하죠. 그래서 예술과 과학에는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395>
남성은 더 많은 여성을 찾아다니려는 동물인데, 그런 일부다처제 성향을 상당히 줄여준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여성의 배란 은폐입니다...어떻게 보면 이것이 결혼과 가족의 유래일 겁니다.
<423>
미래 사회의 사람들은 기술이 열어놓은 가능성과 그 가능성 때문에 잃어버려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아마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겁니다.
<439>
저는 오히려 그들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어차피 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다 번식을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저는 우리에게 좀 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변이일 뿐이고 그래서 그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늘 있어왔으며, 또 그들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없어져야 한다고 열을 올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478>
그러니까 방법은 철저히 과학적으로 하되, 머리는 신화적으로 돌리는 게 과학의 묘수가 아닐까요? 즉 프로이트의 ‘신화들’이 비록 비과학적이라 해도, 거기서부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이 비상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립니다.
<483>
프로이트식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말기 증상의 일부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반성은 귀중한 거지만, 프로이트가 촉발한 서구의 자기 반성과 해체 충동은 유럽 문명의 조락과 황혼을 알리는 징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명의 맥이 빠져 자빠지기 직전에 일어나는 병적 창조성의 마지막 불꽃 같은거 말입니다….유럽은 자기를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고, 미국은 자만과 무감각에 빠져 있습니다.
<496>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려거든 그들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찾아보라고 말이죠.
<499>
경제 발전보다 수십배 더 어려운 것이 정치발전이고 민주주의예요. 사회 민주화는 제도나 법률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는 수직 서열 사회죠. 이 수직성의 사회를 수평성의 사회로 바꾸고 합리성을 확장하는 일, 이것이 ‘사회적 근대’의 알맹이입니다.
<500>
한국인은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뭐든 잘 바꾸고 잘 바뀌죠. 한국적 ‘변화의 현상학’은 연구거리 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바뀌지 않는 거대한 관습적 심리구조와 구시대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행이 꽈리를 틀고 있습니다.
<502>
개인주의의 타락은 사실 한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채택한 사회들에서 지금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속화 현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세계적 현상은 정신의 ‘비속화’ 일겁니다. 개인과 사회가 끝도 없이 천박해 지고 있어요
<505>
어쩌면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볼 때 변화가 빠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전국민이 똑 같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하나의 똘똘 뭉친 집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완전히 거국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거죠. 스위핑 체인지죠
<509>
한국인에게 유독 변화에 민감한 유전형질이 생물학적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화적 유전의 영향이 아닐까?
<515>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탁월성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틀림없이 이기적 동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기적 성향을 거스를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이기성과 비이기성 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과 싸움을 감당할 능력, 거기에 인간의 탁월성이 있다는 생각이죠. 두 번째 생각은 인간이 ‘지금 여기’에 매어 있으면서도 그 결박을 넘어 자른 것을, 지금 여기의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여기’를 넘어 다른 곳, 다른 세계, 다른 가능성, ‘저기’를 보는 거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른 것들과의 ‘연결’을 시도 합니다.
<517>
우리사회는 빠른 적응에 성공하기 위해서 긴 적응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521>
사회 문화적 다양성이나 생태계에서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자연계라는 거대한 생태 창고 안에는 인간이 아직 모르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인간이 모르는 문제,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 문제들이 미래에는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어요. 그 미지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소리없이 저장해 놓고 있는 것이 생태계입니다. 그런데 그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해 버리면 인간은 제 손으로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잃어버리게 되죠.
<528>
우리가 남의 자식을 품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 허구에서 온 게 아닌가? 우리 민족처럼 핏줄이라는 것에 엄청나게 매달려 있는, 수수한 혈통이라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민족이 있을까?
<540>
유전자의 발현 가능성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발현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면 바로 여기, 여기가 자유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542>
만일 인간도 자꾸 한방향으로 우리의 유전자들을 몰아가면, 스스로를 무척 취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543>
하나의 문명이나 문화권, 사회 안에서도 별 녀석이 별 소리 다하고 별 생각 다 해보는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문화가 창조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문화는 왕성하게 다양성을 유지하는 문화일 겁니다. 유럽여행자들이 가장 인상깊게 보고 오는 것 중에 하나가, 같은 유럽 문명권이고 그 밑바닥에는 기독교 문명이 흐르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도시의 성격이나 특성,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예요. 거기 비하면 우리 도시들은 너무 똑같아요.
<554>
시장은 다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면 온갖 것이 다 있다는 게 바로 다양성이죠. 그런데 세계화 시대의 시장은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시장이 오히려 다양성을 죽이는 쪽으로 움직이니까요. 시장근본주의는 ‘시장가치’ 하나만 내세웁니다. 시장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고 줄을 세우는 거죠.
<557>
지금은 시장의 세계화가 저항할 수 없는 흐름 같아 보이지만, 인간이 자연을 바꿔온 것처럼 시장 체제도 어떻게 관리하고 만들어가는가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장이 다양성만 지킬 수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요.
<562>
신화전통에서는 모순대립물의 공존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신화의 특성이죠. ‘모순의 통일성(coincidentia oppositorum)’이 그것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대립하는 것들이 떨어져 있지 ㅇ낳고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564>
두터운 세계는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입니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때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닙니다.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죠.
<569>
저는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된 것 말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더 대규모로 자연과의 공생을 실천에 옮긴 동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파괴만 한 동물은 아니라는 거죠. 함께할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했는데 성공이 지나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공생의 지혜를 잃어버린 거예요.
<572>
기업집단에도 최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윤리적 감성을 가진 개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체의 차원에서는 모두 그런 윤리적 감성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집단의 단위로 올라가서 어떤 정책을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되면 개체들의 윤리적 능력은 힘이 쫙 빠집니다. 기업은 이윤을 내야하는 집단입니다.
<579>
19세기 영국 사회사상가들이 생각해낸 꾀가 있어요. 사람들의 이기적 성향을 욕만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하라, 그런데 이기적 행동의 결과가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게 유도하라는 게 그 비결입니다. 뒤집어 놔도 됩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나한테도 최고로 이익이더라, 기업이 윤리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기업 이윤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면 되다는 소립니다.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역설이 나오게 말이죠.
<584>
남자든 여자든 사는게 참 힘들어진 세상입니다…예전에는 사회가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경쟁을 하더라도 규모와 강도가 아주 작고 약했죠.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요. 작은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가닥 할 수 있는 거리가 굉장히 많았다는 거죠. 지금은 모든 사람이 타이거 우즈에게 비교당하고 전지현에게 비교당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597>
‘경쟁을 넘어 협동으로’.. 제가 말한 두터운 세계와 최 선생님께서 말한 호모 심비우스의 세계가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지점도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이곳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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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경빈님, 공들여 쓴 독후감 잘 읽었어요.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저와 거의 겹치지 않아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 하나의 '다양성'인 셈이지요. ^^;
11일자 조선일보 '386 출판인들의 고민'이라는 기사에 '대담'을 펴낸 휴머니스트 출판사 대표 김학원에 대한 내용이 실려서 참고가 되었어요. 안산에서 8년간 노동자로 일한 경력의 386운동권 출신이랍니다.
그 기사에서는 최봉수 웅진씽크빅 출판부문 대표의, 한국에도 매출 1000억원대 거대 출판사가 나와야 고사 위기의 우리 출판계를 살릴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하여, 2,30년을 한 분야에 매진하는 출판 인력 시스템의 개척에는 출판사의 규모보다 다양한 출판사가 살아 남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했네요.
'대담'처럼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지적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주체에 대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막 '대담'을 읽은 뒤라 반갑게 읽은 기사여서 한 번 써 봤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글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VR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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