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素田 최영훈
- 조회 수 268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1. 프롤로그
사극이 뜨는 시대이다. 월화 이산(정조)과 왕과나, 수목(홍길동), 토일 세종대왕, 지금처럼 사극의 전성시대도 드물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왕의 투쟁을 읽으면서 보는 사극의 재미는 더하다. 묘하게도 왕의 투쟁에 나오는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의 시대적 배경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산과 세종대왕은 왕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라 이해하기가 쉽고, 한참 폐비문제와 어린 연산군이 나오는 ‘왕과 나’는 갈등이 높아가고 있다. 홍길동이 약간 애매하다. 실제 소설은 광해군이 맞으나, 드라마적인 요소를 감안해서 그런지 연산군의 시대를 약간 섞어놓은 느낌이다. 바빠서 모든 드라마를 볼 수는 없지만, 간간히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 알고 싶어 재방송을 기웃 거린다.
사극이 주는 묘미는 아무래도 극적인 요소에 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작가와 연출가의 의도대로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가 단연 압권이다. 한 사건을 두고 주인공과 반대편이 겪는 갈등, 그리고 반전이 한회나 두 회에 걸쳐서 나온다. 단 한 문장의 실록이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충녕대군의 애민정신과 국가관을 볼 수 있고, 사도세자를 뛰어넘는 정조의 역경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이라는 신뢰,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연출자의 의도적 연출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할 우려가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개개인의 노력으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새로운 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나, 보여지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사극은 나름대로 적당한 거리와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왕의 투쟁에서 사극을 정확하고 제대로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의 왕들을 막연히 꺼려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기로 하자. 그들은 비록 근본적인 모순을 안았을지언정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해내고자 한껏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람들이므로, 그리고 조선의 왕들을 겉보기로만, 사극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틀로만 보지 말기로 하자. 그들은 진보적 영웅이거나 수구적 악당이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우리가 실록에 남겨진 왕들의 고민과 울분, 감격과 희열을 있는 그대로 느낄 때, 그들과 그들의 신하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였는지 제대로 이해할 때, 그들이 남긴 역사는 비로소 제 빛을 찾을 것이다.(379p)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사극이라는 것을 통해서 오늘날의 관점과 갈등, 같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결국 일정한 틀로 묶는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광해군 만큼 역사적으로 철저한 응징을 받은 경우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의 역사적 재평가가 실제로는 우리 역사학도가 아닌 일본 역사학자에 의해 되살아났다. 우월론자나 극일주의자는 아니지만, 자기의 역사를 스스로 찾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나태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드라마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속으로, 역사적 사실만 가지고 프라이드를 지킬 수 없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다듬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2. 작가에 대하여
196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대학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저자의 맨 처음 전공은 법학이었다. 법학을 그만둔 것은 대학에 입학에서 한 첫 질문에서였다. “학문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기초적인 교양과 지식을 쌓으려면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하는 질문을 드리자, 교수님은 “법대에 들어왔으면 사법고시에 필요한 책만 봐라. 그것 말고는 볼 책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 학과를 바꾸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새로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대학을 다시 바꾸지 않았으나 전공은 자꾸 바꾸었다. 처음엔 행정학과로 입학했으나, 대학원은 정외과로 갔다. 정외과에서도 정치사상을 택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동양 및 한국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밥학과’라 불리는 법학과를 버리고 점점 돈이 안 되는 학과로 발을 들이게 된 ‘바보’라고 농을 치는 저자이지만 그 기간 동안 ‘역사와 그 속의 인간’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그의 저력은 그러한 겸손한 표현이 무색하도록 말과 글에 면면히 드러난다. 언제나 바뀌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을 바꾸고 마침내는 그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 버리는 힘인 사상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매혹된 그는, 앞으로도 계속 사상, 역사, 그리고 사람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분석하는 ‘바보짓’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나갈 것이다.
지은 책에 『다시 쓰는 간신열전』, 『역사법정』, 『세상을 움직인 명문vs명문』이 있고, 논문에는 「예의 정치적 의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등이 있다.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록펠러 가의 사람들』, 『마키아벨리』, 『팔레스타인』등의 번역서도 다수 있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프롤로그>
(7)왕의 투쟁, 그것은 가장 극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실제의 그것은 보통의 드라마, 흔한 사극에서 보여주는 투쟁구도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이중적이며, 때로는 모순적인 구도를 가진다. 그 재발견을 통하여 그 구도를 올바로 이해하고, 투쟁의 의미를 되새길 때, 우리는 옛 사람들만의 독특한 모습을,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세종>
(15)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거의 모든 것의 골조를 세운 이가 세종이다. 세종에 대한 깊이는 이해 없이 조선 초기의 실상이 제대로 포착될 리 없고, 나아가 조선 500년에 대한 기본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한후,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2003)
(22) 결국 태종은 충녕을 선택했다. 아직은 대외팽창에 나서기에 국가가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의 호걸 황제, 영락제가 요동과 만주에 대한 관심을 추지 않아, 마침내 그동안 한편으로 삼으려 애썼던 오도리 여진이 명나라에 조함으로써 만주 탈환이 크게 어렵게 된 점도 그의 결단을 도왔을 것이다. 곰과 호랑이 중에서 하늘의 선택을 받은 쪽은, 끝내 어둠속에서 묵묵히 자기계발에 힘쓰던 곰이었다.
(37) 이렇게 볼 때, 훈민정음의 첫째가는 창제목적은 한자음을 바로 읽는데 있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은 중국말을 배운 적이 없으므로, 중국에서 책을 수입해 읽을 때, 뜻으로는 이해해도 소리를 읽어내는 데는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 시대 경연장에서 학식 높은 경영관들조차도 특정 한자의 발음을 잘못 읽어서 당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음률을 바르게 하는 것은 유교적 성왕의 중요한 과업중 하나이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제작은 성리학적 명분에 더 없이 충실한 것이었다.
(46) 일반적인 행정업무를 재상들에게 대폭 위임한 결과 생긴 여유를 세종은 혁신 업무에 투자했다. 다름 아닌 앙부일구나 자격루 발명, 아악의 정리, 고려사 편찬,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등 앞서 얘기한 ‘문화대국 프로젝트’들의 지휘업무를 맡은 것이다.
(50) 그것은 세종의 치세 내내 대간과 왕이 정면으로 충돌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세종이 신하들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왕에 대항하지 못하게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 테크노라트(technorat)로 교묘히 나누어 놓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책에서나 보던 성군의 위업을 실제로 눈앞에서 이뤄가고 있는 왕의 모습, 그 과정에서도 자신도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설익은 비판을 수그러들도록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종은 감동의 리더십을 더할 나위없이 발휘했다. 그의 치세는 감격시대, 전설의 시대였다.
(77) 세종이 세운 친명사대, 여진배척의 대외전략, 그것의 변화 필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 왕이 광해군이었다. 위임을 선호하고 공론을 중시하는 세종의 국정운영방식, 그 한계를 절감하고 극복하려 애쓴 왕이 정조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종의 잘못일 수 없다. 세종이라는 높은 산을 넘기 꺼려하고, 세종이라는 편안한 바위에서 떠나기 싫어한 후손들의 잘못이리라. 민족사를 통틀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최후의 최후까지 모든 힘과 정성을 기울인 사람을 단 한 명 꼽는다면, 그 누가 세종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말할 것인가
<연산군 1476-1506>
(78) 연산군의 폭정은 나라와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그런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연산군의 실정은 그가 한 일 보다는 하지 않은 일에 주로 연관되어 있다. 연산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였다.
(83) 왕조는 바야흐로 안정기에 접어들어, 경제는 활발하고 문화는 융성했다. 명나라·여진·일본과의 외교관계도 사소한 마찰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양호했다. 다만, 한 가지, 성종 대에 비명에 죽어간 그의 생모, 폐비 윤 씨의 그림자만이 새로운 왕의 치세에 불안한 그림자를 살짝 드리우고 있었다. 아주 살짝.
(85) 나중에 폭군 이미지로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당시의 연산군은 노련한 대신들을 존중할 줄 알았고, 아랫사람의 고충을 살필 줄도 아는 착실한 젊은 임금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86) 아니, 한켠에서는 이미 환멸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종 때 기틀이 잡히고, 세조 때 잠시 주춤했으나, 이후 다시 힘을 키워서 성종 대에는 한껏 확장되어 있던 ‘언론권력’, 다시 말해서 대간과 홍문관의 비판이 이제 막 즉위한 왕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97) 왕과 언론의 대결에서 왕이 끝내 물러서지 않으면 언론이 취할 길은 하나뿐이다. 패배를 인정하거나, 벼슬을 놓고 물러가는 것이다. 대간은 연산군 즉위 이후 4년 중반까지 총 81차례나 사직했다. 세종조 32년 동안 사직 총회수가 총 14회였던 데 비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아마도 조선왕조에서 최고 기록일 것이다. 그것도 사표를 던진 대간을 다시 부르면 오자마자 바로 다시 물러가고 또 부르면 문지방에 발만 걸쳤다가 또 돌아가고 하는 식이라서 왕명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판이었다.
(98) 생각해보면, 왕으로서 신하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연산군의 오기와 정치적 미숙함이 이 언론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에 일어난 파행의 잘못은 7대 3정도로 언론 쪽에 더 많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9) 연산군대의 언론전쟁이 미친 또 다른 영향은 이렇다 할 개혁이나 정책의 개발없이 내내 현상유지에만 그치고 마는 정책의 ‘불임시대’를 가져온 점이다.
(103)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신하들 등살에 “임금 못 해먹겠다.”는 심정이 들더라도, 왕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나도 모르겠다고 돌아설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고 구슬러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끔 노력했어야 한다. 그것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임인 것이다.
(107) 끈질기게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려온 언관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여서 사형장으로, 혹은 유배지로 끌려갔다. 김종직의 제자이긴 했으되, 뜻이 맞지 않아 의절했었던 재야의 명사, 김굉필 역시 화를 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관료도 아니고, 김종직과의 연관성도 없지만, “무리지어 다니면서 술 마시며 시국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재야의 선비들이 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것이 무오사화였다.
(108) 무오사화는 계획적으로 진행 되었다기보다는 몇 가지 우연히 겹치며 진행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수위를 한참 넘고 있던 신권에 대해 왕권이 변칙적으로나마 효과적인 견제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긍정할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변칙이 원칙처럼 인식되면서, 정치 과정에서 필요악으로만 쓰여야할 폭력이 절대선인 양 쓰이게 된 계기, 무오사화는 그런 계기마녀 마련하고 말았다.
(126) 연산군 10년 이후의 연산군은 그 이전의 연산군과는 마치 다른 사람인 듯 여겨질 만큼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그의 여러 행동들도 단지 정치적 계산의 결과로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부분이 많다. 그런 점에서 갑자사화 이후의 연산군은 어떤 이유에서든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 광기는 나름대로 ‘조리 있는 광기’였다.
(132) 유교에서 예란 행동을 가지런히 하여 참된 질서에 합치되도록 하는 법식이며, 악은 모든 것이 올바른 질 서속에 돌아가 두루 화평하게끔,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정돈해주는 감화의 수단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꽃과 달을 희롱하며 시문을 짓는 일을 예라고 하고, 흥청, 운평의 흥겨운 가무를 악이라 했다. 즉 악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게 본질이며, 예는 그러한 흥취를 절도 있게 표현해내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137) 성리학적 이성계를 조선 땅에 실현하려고 했던 세종에 비해, 연산군의 사상과 정책은 모든 면에서 거꾸로 뒤집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연산군은 세종이 만든 집현전(홍문관)을 혁파하고, 한글교육을 금지한 외에, 경복궁 남쪽에 설치되어 있던 보류각을 뜯어서 창덕궁에 갖다 두고 간의대는 아예 부숴버렸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실익이나 명분이 있는 행동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세종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142) 온갖 사치를 다 부린 궁궐에서 연회로 나날을 보내다가, 졸지에 시골 산속의 움막에 들어앉게 된 연산군은 얼마 안 있어 화병이 들었다. 자신의 아들, 폐세자가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폐위된 지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1506년(중종1년) 11월 16일, 향년 31세. 죽기 전 남긴 말은 “중전이 보고 싶다.”뿐이었다고 한다.
(144) 혀는 자신의 몸을 베는 칼(舌是斬身刀) 그는 말조심을 하라든 뜻에서 이 문구를 새긴 목패를 관료들 목에 걸고 다니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꽤나 흐뭇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 관료들의 목에 걸린 글귀를 실제로 읽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그 글귀가 경고를 보내고 있는 사라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광해군-1575~1941>
(146)광해군은 쑥밭이 된 국가를 다시 일으킬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띠고 왕좌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재건과 개혁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믿게 하는 능력이었다.
(149) 조선왕조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했던 당시, 이처럼 ‘안전’에 사로잡힌 사람이 왕이 된 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전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쳤다. 그 결과 빚어진 정치불신, 리더십의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과 나라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5) 광해군의 중신들도 사직 상소를 올리고 임금이 극구 만류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강화했다. 또한 정치판이 복잡해질 때마다 사직소를 던지고 물러나 있음으로써, 스스로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일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166) 결국 당시의 정국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고, 개혁이기대치를 밑돌게 된 것은 신하들끼리의 당쟁과 반목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끌려 다님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리더십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177) 광해군은 조선조 왕들 중에서 몇 개의 최고기록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는 앞서 말한 최다 공신배출 외에 최다존호 보유가 있고, 대조되는 기록으로는 경연의 최저개최(단 경연의 기틀이 잡히기 전인 세종 이전, 그리고 예종이나, 인종처럼 재위기간이 극단적으로 짧았던 임금은 제외 할 때 그렇다.) 와 친국의 최다시행이었다.
(179) 이러한 광해군의 행태는 안전에 대한 끝없는 집착, 그로 인한 광기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생애에 걸쳐 불안과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18세의 나이로 얼떨결에 세자가 되고, 곧바로 전쟁터를 누비며 ‘임시정부’를 운영해야 했다. 그가 잘하면 잘할수록 아버지인 왕의 태도는 싸늘해져갔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더한 바늘방석이었다. 아버지의 눈치, 젊은 새 어머니의 눈치, 코흘리개 이복동생 눈치, 자신을 몰아내려는 반대 당파들의 눈치, 명나라의 눈치까지 보고 살아야 했다.
(181) 그러나 이러한 대북사상이 진정 ‘근대적’인 사상으로서 조선 사상의 주춧돌을 대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2퍼센트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2퍼센트였다. 즉 대북의 사상은 유난히 의(義)와 명분을 강조한 사상이기도 해서,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는 강직한 정신은 서인-노론을 능가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대북 출신의 의병장이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강직함은 국난을 극복하거나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데는 반드시 필요할지 몰라도, 대화와 타협을 이루고, 그에 기초하여 새 시대를 함께 이루어 가는 데는 오히려 부적당한 요소였다.
(189) 그렇다면 대북파는 왜 광해군과 정면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친명배금에 매달렸던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대북파의 사상적 성향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중앙의 대북파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하는 하삼도 사람의 영향력 하에 움직이고 있었기에 이런 ‘무분별한’ 정책이 가능했다. 하삼도에서는 북방의 상황을 잘 모른다. 보는 것은 평온한 일상이며, 읽는 것은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에 앞서 대의를 생각하라”는 경전의 가르침, 북쪽 오랑캐를 쳐부순 성왕들을 묘사한 역사서의 내용이다.
(191)광해군의 마지막 2-3년은 철저한 불신과 환멸의 시기였다. 광해군은 대북에 진력났다. 대북은 광해군을 믿고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두를 서인과 남인이 이를 갈면서 노려보고 있었다.
(195) 그러나 그는 재건과 개혁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믿게 하는 능력이었다. “나를 믿어라” 간단하면서도 너무도 간단한 이 말을 그는 15년 재위기간 중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하지 못했다. 아니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부터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 “이런 마당에 대통령이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오늘 중에도 종종 들을 수 있는 푸념이다. 그리고 그 푸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한 조직의 가장 윗자리에 올라간 사람이라면, 그런 푸념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의 길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시밭길이기 때문이다. 옳다고 믿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나를 믿어라”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을,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로 기록한다.
<정조, 1752~1800>
(196) 지어진 지 사백년 되는 조선이라는 집을 수리하려 했던 정조는 천재적 두뇌를 이용하여 다양한 정치실험에 나섰다. 하지만 천재 정조는 생물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미처 체득하지 못했다.
(211) 이것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무자비한 공격을 펼칠 경우 오히려 반격을 받을 수 있음을 감안하여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방침은 또 하나의 효과를 노렸을 수 있다. 즉 문제가 되는 ‘죄인들 일부를 계속 살려둠으로써 그들에 대한 처벌 요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그렇게 365일 비상을 걸어 둠으로써 조정이 경각심을 잊고 해이해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214) 이렇게 정조가 새로 마련한 정치의 틀은 명분으로나 실질로나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것일수록 사소한 어긋남 때문에 무너지기 쉬우며, 한 군데가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정정당당한 복수와 응징에 대한 강조는 정조 치세 내내 이어진 정치 테마였다. 하지만 아마도 정조가 의도했을 ‘비상상황의 장기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엉뚱한 효과를 낳았다. 바로 당쟁에 이용되어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222) 그러나 정조의 탕평이 영조의 탕평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영조의 탕평이 ‘완론(緩論)탕평’이라면,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탕평’이라고 불리게 된다. 즉 영조는 되도록 당파간의 대립 국면을 피하기 위해 각 당파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은 사람들을 골라 ‘탕평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른바 ‘이열치열’의 접근법을 썼다. 탕평의 마당에는 각 진영의 핵심이 올라오지 않으니, 실질적인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차라리 당파의 실세들을 과감히 ㅂ맞대결시켜, 서로의 도리와 입장을 내놓고 겨루게 한다.
(233) 우리는 여리서 의리탕평론의 ‘민주주의’에 이어 정조의 ‘자유주의’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거친 흐름이 사람을 살 수 없게 한다고 여겨, 냇물을 막고 언덕을 깎아서 그곳에 문명의 집을 세웠던 조선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마리였다. 이미 바깥세상은 사람들의 정치적 의견이나 종교적 믿음, 그리고 부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의회, 대학, 시장이라는 강에서 합류하게끔 둑을 터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개화라고 불렀다.
(234) 그것은 정조의 개혁 마인드의 근본적 문제, 즉 있었던 곳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달라간다기보다 본래 완벽했던 세계의 무너지고 뒤틀린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개혁이라는 사고방식이 갖는 문제와 맞물린다. 황극 군주론, 병농일치제, 향거이선제, 이것은 모두 유교 경전 속에 그려진 이상이었다. 실현이 너무 어려워 포기했지만, 정조는 중국 고대의 정전제도 18세가 말의 조선에 복원할 생각을 했다.
(239)하지만 당시의 세상은 더 이상 낡은 질서에 얽매여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정조는 신해통공으로 그러한 ‘자연스런 흐름’의 길을 터주었으면서도, 정약용 등의 서학파나 박제가 등의 북학파는 모두 그가 마련한 학문의 장에서 자라난 새싹들이었음에도 ‘세도를 바로 잡아야 할’ 자신의 사명에 집착한 나머지 그런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삼강오륜을 파괴하는 서학, 존주대의와 상반되는 북학을 자연스레 꽃피도록 두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문을 열면서 오른손으로는 그 문을 닫으려는 사람과 같았다. 결과는? 하나, 문이 빠끔 열린 채 계속 그대로 있다. 둘, 반대편에서 밀고 들어오는 힘에 의해 갑자기 벌컥 열린다.
(245) 그런데 이처럼 인사이동을 자주하다 보니 정조는 거의 쉴새없이 새 후보자를 검토하고 낙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새로운 인물이 그렇게 많이 넘쳐 날리는 없으니,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바꿔 임용하거나, 파직했다가 얼마 후 다시 임용하거나, 귀양 보낸 지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불러와 다른 자리를 맡기는 식의 회전문 인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회전문 인사라 해도 잦은 인사행정은 피곤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246) 이 책에서 소개한 네 왕들의 기본적인 정무처리 외에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살펴보면, 세종은 틈만 나면 공부하고, 연산군은 틈만 나면 놀고, 광해군은 틈만 나면 죄인을 심문했다. 그리고 정조의 경우는 틈만 나면 인사행정을 할 수 있다.
(256) 정조는 세종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 군주였다. 그러나 새로 개척하는 입장과 지키고 정리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인지, 정조에게는 세종만한 여유가 없었다. 세종이 야심찬 프로젝트를 몰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통상적인 업무를 적절하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모든 것을 자신이 장악하지 못하면 불안을 견딜 수 없었다.
(257) 정조와 그의 시대를 볼 때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보려는 경우가 많다. ‘정조(및 남인)=진보개혁, 노론=수구기득권’의 식이다. 이는 사극에는 적절한 관점이다. 하지만 진실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관심은 아니다. 정조에게는 개혁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입장과 고충이 있었다. 노론이 반드시 보수이고, 남인이 반드시 진보인 것도 아니었다.
<2부, 왕 V S왕>
<조선의 왕이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일>
(264)전통 동양의 정치사상은 이처럼 왕이 절대군주이므로 뭐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점과, 반대로 절대군주이기에 아무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점 사이의 긴장과 모순에서 그 일체를 설명할 수 있다.
(266) 첫째, 성학에 힘쓰며 수신에 전념할 것. 사대부들은 왕도 한 사람의 사대부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학문을 연구하고 심신의 수양에 힘쓰는 선비의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개인적인 취미와 오락을 멀리하며, 사치에 빠져들지 말 것. 선비이자 통치지인 군주는 정무에 몰두하는 한편 틈틈이 학문과 마음공부에도 힘써야 한다. 셋째,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소인은 군자처럼 천하를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며, 자잘한 이해관계나 인간관계에 얽매인다. 따라서 소인을 가까이 하여 그들의 의견을 용납한다면 올바른 정치를 하기 어렵다. 넷째, 언로를 열고 신하들의 간언을 용납할 것. 문관과 신료는 가까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들과 얼굴을 마주대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신하와의 경연>
(273) 경연이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장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허심탄회하게 만나서 학술과 정치를 연결해 논의하는 중요한 국정 수행의 장이 되게끔 했다. 실로 조선의 경연제도를 이룩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279)경연의 성격이 과도히 정치화됨으로써 그 긍정적인 성격은 많이 감소되었을지 모른다. 대부분의 역대 왕들이 경연을 부담스러워 하고, 빠져나갈 핑계를 궁리했다는 점도 이해할만 한다. 그러나 경연에 많이 참석하는 것이 최고 지도자의 으뜸가는 덕목이 된 이상, 그 합리성 여부는 젖혀놓고 일단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두루 인정을 받고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신뢰와 존경을 얻어야만, 그 통념을 뜯어 고칠 힘도 생긴다.
<왕의 여자>
(303) 연산군과 광해군은 다른 왕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었고, 그것도 신하들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것은 신하들과의 공식적인 접촉은 꺼리면서 비빈들과 한껏 친밀하게 지내고, 심지어 그들에게 국사를 일부 맡기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신하들이 성군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라’는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일탈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장녹수나 김개시 등의 여성들이 실제 이상으로 악명을 얻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309)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과도한 방탕에 빠지는 일은 분명 부정적이지만, 적당한 오락과 남녀관계를 통해 숨을 돌리고 긴장을 푸는 여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맞출 때 개인이나 조직이나 오래가고, 더 능률도 오르지 않을까.
<왕과 언론>
(311) 조선의 언론제도 또한 중국과는 차별화되는 독특한 것으로, 간쟁을 전담하는 사간원 외에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고 규찰하며, 사법기능도 수행한 사헌부도 언론기능을 갖췄다. 그래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 대간이라 불렀다.
(320) 지도자는 자신이 계속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자기연민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훌륭한 지도자일 수 없다. 아니, 평범한 지도자조차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감히 못하는 일을 지도자에게는 기대한다.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없고, 지도자도 역시 인간일 뿐임을 무시하는 태도라 해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있는 힘껏 노력하는 자만이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의 인사권 행사>
(332) 폭군은 보통 간사한 측근을 동반하지만, 오히려 연산군은 ‘측근’과는 가장 관련이 적은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정상적’인 정치를 하던 시기에는 원로 대신들에게 업무를 크게 위임하고 소장파 관료들과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식으로 정치에 임했다.
(334)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측근을 키우되, 조직의 불만과 반감은 키우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모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최선의 답은 있다. 그것은 측근을 키우되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아니, 정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직의 정해진 규칙과 업무체계를 무시하고 막후에서 측근과의 의사소통으로만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며, 측근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되 그 까닭은 측근 자신의 능력에 있지, 그 사람이 측근이라서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측근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임을 악용하여 스스로의 사익을 챙기기 않는지 살펴야 하고, 측근이 중대한 과실을 범했을 경우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서책간행>
(362) 따라서 현대의 세종 이해,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 창달을 중심으로 그를 존경하는 이해 방식은 서구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와 과학관에 다분히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세계적으로 홍보되고 있는 세종은 성리학적 성군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근대과학의 선구자인 셈이다.
<에필로그>
(379)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의 왕들을 막연히 꺼려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기로 하자. 그들은 비록 근본적인 모순을 안았을지언정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해내고자 한껏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람들이므로, 그리고 조선의 왕들을 겉보기로만, 사극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틀로만 보지 말기로 하자. 그들은 진보적 영웅이거나 수구적 악당이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우리가 실록에 남겨진 왕들의 고민과 울분, 감격과 희열을 있는 그대로 느낄 때, 그들과 그들의 신하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였는지 제대로 이해할 때, 그들이 남긴 역사는 비로소 제 빛을 찾을 것이다.
4. 내가 저자라면
네명의 왕과 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그동안 왕이면 왕, 하나의 사건이면 사건 등 단편적 역사에서 볼수 없었던 부분까지 볼수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과 정조도 치적과 업적 위주의 관점이 아닌 당시의 정치적 시대적 상황을 알고 나니 새로운 관점이 보였다. 세종과 정조의 개혁정치의 차이와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분석도 새로 알게 되었다. 반대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에 의해 쫒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내막을 들여보 보니 그동안 역사적 가치 판단이 치우쳐 있었음을 발견하였다.조선시대 전체를 네 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변화의 순간이었고 혁명의 시대였다. 그동안 부정적으로 보였던 조선의 역사가 다시 들어왔다. 양반들, 그들만의 리그로 500년을 이끌어 왔고 결국 세도정치로 인하여 변화를 거부하였다. 이미 변화를 하려고 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세상은 변하는데, 고리타분한 과거에 안주를 했다.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왕이 능멸당하는 아픈 과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낌없이 죽음과 맞바꾸었다.역사는 쉽게 흐르지 않는다.
구성면으로 볼때 1부에 나오는 네명의 왕들의 간결하면서 시기별로 정리가 잘 되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 그리고 같은 상황에서 각기 다른 왕들과 비교한 점도 이해가 쉬웠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문제였다. 측근의 문제, 측근을 어떻게 관리하는 문제이지 이념이나 성향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측근을 키우되, 조직의 불만과 반감은 키우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모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최선의 답은 있다. 그것은 측근을 키우되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아니, 정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직의 정해진 규칙과 업무체계를 무시하고 막후에서 측근과의 의사소통으로만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며, 측근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되 그 까닭은 측근 자신의 능력에 있지, 그 사람이 측근이라서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측근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임을 악용하여 스스로의 사익을 챙기기 않는지 살펴야 하고, 측근이 중대한 과실을 범했을 경우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세종대왕과 다른 왕의 리더십중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이부분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때 상황에 맞게 새롭게 관계를 정의하고 믿음과 비전을 갖게 하였다. 때로는 경쟁관계를 만들고, 때로는 준엄한 호통이 있었다. 믿음을 주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 그들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문제를 알았으리라. 이론만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세상이고, 그 마음이 곧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다.
마지막으로 꼼꼼한 자료 정리가 눈에 들어왔다. 349페이지에서 353페이지에 걸쳐 네 왕들이 간행한 서적을 표로 만들었다. 교화, 법정,학술, 실용,문예, 기타 5분야로 나누어서 정리하였다. 세종 115권, 정조 104궈, 연산군 20권,광해군 11권의 순이다.
저자의 말대로 왕의 투쟁사는 상반된 목표로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국민의 종복이면서도 동시에 국민의 지배자인 정치인들, 기업의 '왕'이면서도 주주의 이익에, 그리고 전 종업원들과 국가 사회의 이익에 봉사할 책임을 갖는 CEO 등등 책임과 갈등 사이에 고민하던 왕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P *.111.40.94
사극이 뜨는 시대이다. 월화 이산(정조)과 왕과나, 수목(홍길동), 토일 세종대왕, 지금처럼 사극의 전성시대도 드물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왕의 투쟁을 읽으면서 보는 사극의 재미는 더하다. 묘하게도 왕의 투쟁에 나오는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의 시대적 배경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산과 세종대왕은 왕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라 이해하기가 쉽고, 한참 폐비문제와 어린 연산군이 나오는 ‘왕과 나’는 갈등이 높아가고 있다. 홍길동이 약간 애매하다. 실제 소설은 광해군이 맞으나, 드라마적인 요소를 감안해서 그런지 연산군의 시대를 약간 섞어놓은 느낌이다. 바빠서 모든 드라마를 볼 수는 없지만, 간간히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 알고 싶어 재방송을 기웃 거린다.
사극이 주는 묘미는 아무래도 극적인 요소에 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작가와 연출가의 의도대로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가 단연 압권이다. 한 사건을 두고 주인공과 반대편이 겪는 갈등, 그리고 반전이 한회나 두 회에 걸쳐서 나온다. 단 한 문장의 실록이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충녕대군의 애민정신과 국가관을 볼 수 있고, 사도세자를 뛰어넘는 정조의 역경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이라는 신뢰,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연출자의 의도적 연출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할 우려가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개개인의 노력으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새로운 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나, 보여지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사극은 나름대로 적당한 거리와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왕의 투쟁에서 사극을 정확하고 제대로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의 왕들을 막연히 꺼려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기로 하자. 그들은 비록 근본적인 모순을 안았을지언정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해내고자 한껏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람들이므로, 그리고 조선의 왕들을 겉보기로만, 사극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틀로만 보지 말기로 하자. 그들은 진보적 영웅이거나 수구적 악당이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우리가 실록에 남겨진 왕들의 고민과 울분, 감격과 희열을 있는 그대로 느낄 때, 그들과 그들의 신하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였는지 제대로 이해할 때, 그들이 남긴 역사는 비로소 제 빛을 찾을 것이다.(379p)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사극이라는 것을 통해서 오늘날의 관점과 갈등, 같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결국 일정한 틀로 묶는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광해군 만큼 역사적으로 철저한 응징을 받은 경우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의 역사적 재평가가 실제로는 우리 역사학도가 아닌 일본 역사학자에 의해 되살아났다. 우월론자나 극일주의자는 아니지만, 자기의 역사를 스스로 찾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나태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드라마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속으로, 역사적 사실만 가지고 프라이드를 지킬 수 없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다듬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2. 작가에 대하여
196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대학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저자의 맨 처음 전공은 법학이었다. 법학을 그만둔 것은 대학에 입학에서 한 첫 질문에서였다. “학문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기초적인 교양과 지식을 쌓으려면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하는 질문을 드리자, 교수님은 “법대에 들어왔으면 사법고시에 필요한 책만 봐라. 그것 말고는 볼 책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 학과를 바꾸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새로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대학을 다시 바꾸지 않았으나 전공은 자꾸 바꾸었다. 처음엔 행정학과로 입학했으나, 대학원은 정외과로 갔다. 정외과에서도 정치사상을 택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동양 및 한국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밥학과’라 불리는 법학과를 버리고 점점 돈이 안 되는 학과로 발을 들이게 된 ‘바보’라고 농을 치는 저자이지만 그 기간 동안 ‘역사와 그 속의 인간’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그의 저력은 그러한 겸손한 표현이 무색하도록 말과 글에 면면히 드러난다. 언제나 바뀌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을 바꾸고 마침내는 그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 버리는 힘인 사상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매혹된 그는, 앞으로도 계속 사상, 역사, 그리고 사람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분석하는 ‘바보짓’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나갈 것이다.
지은 책에 『다시 쓰는 간신열전』, 『역사법정』, 『세상을 움직인 명문vs명문』이 있고, 논문에는 「예의 정치적 의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등이 있다.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록펠러 가의 사람들』, 『마키아벨리』, 『팔레스타인』등의 번역서도 다수 있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프롤로그>
(7)왕의 투쟁, 그것은 가장 극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실제의 그것은 보통의 드라마, 흔한 사극에서 보여주는 투쟁구도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이중적이며, 때로는 모순적인 구도를 가진다. 그 재발견을 통하여 그 구도를 올바로 이해하고, 투쟁의 의미를 되새길 때, 우리는 옛 사람들만의 독특한 모습을,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세종>
(15)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거의 모든 것의 골조를 세운 이가 세종이다. 세종에 대한 깊이는 이해 없이 조선 초기의 실상이 제대로 포착될 리 없고, 나아가 조선 500년에 대한 기본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한후,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2003)
(22) 결국 태종은 충녕을 선택했다. 아직은 대외팽창에 나서기에 국가가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의 호걸 황제, 영락제가 요동과 만주에 대한 관심을 추지 않아, 마침내 그동안 한편으로 삼으려 애썼던 오도리 여진이 명나라에 조함으로써 만주 탈환이 크게 어렵게 된 점도 그의 결단을 도왔을 것이다. 곰과 호랑이 중에서 하늘의 선택을 받은 쪽은, 끝내 어둠속에서 묵묵히 자기계발에 힘쓰던 곰이었다.
(37) 이렇게 볼 때, 훈민정음의 첫째가는 창제목적은 한자음을 바로 읽는데 있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은 중국말을 배운 적이 없으므로, 중국에서 책을 수입해 읽을 때, 뜻으로는 이해해도 소리를 읽어내는 데는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 시대 경연장에서 학식 높은 경영관들조차도 특정 한자의 발음을 잘못 읽어서 당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음률을 바르게 하는 것은 유교적 성왕의 중요한 과업중 하나이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제작은 성리학적 명분에 더 없이 충실한 것이었다.
(46) 일반적인 행정업무를 재상들에게 대폭 위임한 결과 생긴 여유를 세종은 혁신 업무에 투자했다. 다름 아닌 앙부일구나 자격루 발명, 아악의 정리, 고려사 편찬,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등 앞서 얘기한 ‘문화대국 프로젝트’들의 지휘업무를 맡은 것이다.
(50) 그것은 세종의 치세 내내 대간과 왕이 정면으로 충돌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세종이 신하들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왕에 대항하지 못하게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 테크노라트(technorat)로 교묘히 나누어 놓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책에서나 보던 성군의 위업을 실제로 눈앞에서 이뤄가고 있는 왕의 모습, 그 과정에서도 자신도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설익은 비판을 수그러들도록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종은 감동의 리더십을 더할 나위없이 발휘했다. 그의 치세는 감격시대, 전설의 시대였다.
(77) 세종이 세운 친명사대, 여진배척의 대외전략, 그것의 변화 필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 왕이 광해군이었다. 위임을 선호하고 공론을 중시하는 세종의 국정운영방식, 그 한계를 절감하고 극복하려 애쓴 왕이 정조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종의 잘못일 수 없다. 세종이라는 높은 산을 넘기 꺼려하고, 세종이라는 편안한 바위에서 떠나기 싫어한 후손들의 잘못이리라. 민족사를 통틀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최후의 최후까지 모든 힘과 정성을 기울인 사람을 단 한 명 꼽는다면, 그 누가 세종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말할 것인가
<연산군 1476-1506>
(78) 연산군의 폭정은 나라와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그런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연산군의 실정은 그가 한 일 보다는 하지 않은 일에 주로 연관되어 있다. 연산군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였다.
(83) 왕조는 바야흐로 안정기에 접어들어, 경제는 활발하고 문화는 융성했다. 명나라·여진·일본과의 외교관계도 사소한 마찰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양호했다. 다만, 한 가지, 성종 대에 비명에 죽어간 그의 생모, 폐비 윤 씨의 그림자만이 새로운 왕의 치세에 불안한 그림자를 살짝 드리우고 있었다. 아주 살짝.
(85) 나중에 폭군 이미지로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당시의 연산군은 노련한 대신들을 존중할 줄 알았고, 아랫사람의 고충을 살필 줄도 아는 착실한 젊은 임금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86) 아니, 한켠에서는 이미 환멸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종 때 기틀이 잡히고, 세조 때 잠시 주춤했으나, 이후 다시 힘을 키워서 성종 대에는 한껏 확장되어 있던 ‘언론권력’, 다시 말해서 대간과 홍문관의 비판이 이제 막 즉위한 왕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97) 왕과 언론의 대결에서 왕이 끝내 물러서지 않으면 언론이 취할 길은 하나뿐이다. 패배를 인정하거나, 벼슬을 놓고 물러가는 것이다. 대간은 연산군 즉위 이후 4년 중반까지 총 81차례나 사직했다. 세종조 32년 동안 사직 총회수가 총 14회였던 데 비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아마도 조선왕조에서 최고 기록일 것이다. 그것도 사표를 던진 대간을 다시 부르면 오자마자 바로 다시 물러가고 또 부르면 문지방에 발만 걸쳤다가 또 돌아가고 하는 식이라서 왕명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판이었다.
(98) 생각해보면, 왕으로서 신하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연산군의 오기와 정치적 미숙함이 이 언론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에 일어난 파행의 잘못은 7대 3정도로 언론 쪽에 더 많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9) 연산군대의 언론전쟁이 미친 또 다른 영향은 이렇다 할 개혁이나 정책의 개발없이 내내 현상유지에만 그치고 마는 정책의 ‘불임시대’를 가져온 점이다.
(103)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신하들 등살에 “임금 못 해먹겠다.”는 심정이 들더라도, 왕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나도 모르겠다고 돌아설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고 구슬러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끔 노력했어야 한다. 그것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임인 것이다.
(107) 끈질기게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려온 언관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여서 사형장으로, 혹은 유배지로 끌려갔다. 김종직의 제자이긴 했으되, 뜻이 맞지 않아 의절했었던 재야의 명사, 김굉필 역시 화를 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관료도 아니고, 김종직과의 연관성도 없지만, “무리지어 다니면서 술 마시며 시국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재야의 선비들이 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것이 무오사화였다.
(108) 무오사화는 계획적으로 진행 되었다기보다는 몇 가지 우연히 겹치며 진행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수위를 한참 넘고 있던 신권에 대해 왕권이 변칙적으로나마 효과적인 견제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긍정할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변칙이 원칙처럼 인식되면서, 정치 과정에서 필요악으로만 쓰여야할 폭력이 절대선인 양 쓰이게 된 계기, 무오사화는 그런 계기마녀 마련하고 말았다.
(126) 연산군 10년 이후의 연산군은 그 이전의 연산군과는 마치 다른 사람인 듯 여겨질 만큼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그의 여러 행동들도 단지 정치적 계산의 결과로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부분이 많다. 그런 점에서 갑자사화 이후의 연산군은 어떤 이유에서든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 광기는 나름대로 ‘조리 있는 광기’였다.
(132) 유교에서 예란 행동을 가지런히 하여 참된 질서에 합치되도록 하는 법식이며, 악은 모든 것이 올바른 질 서속에 돌아가 두루 화평하게끔,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정돈해주는 감화의 수단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꽃과 달을 희롱하며 시문을 짓는 일을 예라고 하고, 흥청, 운평의 흥겨운 가무를 악이라 했다. 즉 악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게 본질이며, 예는 그러한 흥취를 절도 있게 표현해내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137) 성리학적 이성계를 조선 땅에 실현하려고 했던 세종에 비해, 연산군의 사상과 정책은 모든 면에서 거꾸로 뒤집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연산군은 세종이 만든 집현전(홍문관)을 혁파하고, 한글교육을 금지한 외에, 경복궁 남쪽에 설치되어 있던 보류각을 뜯어서 창덕궁에 갖다 두고 간의대는 아예 부숴버렸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실익이나 명분이 있는 행동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세종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142) 온갖 사치를 다 부린 궁궐에서 연회로 나날을 보내다가, 졸지에 시골 산속의 움막에 들어앉게 된 연산군은 얼마 안 있어 화병이 들었다. 자신의 아들, 폐세자가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폐위된 지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1506년(중종1년) 11월 16일, 향년 31세. 죽기 전 남긴 말은 “중전이 보고 싶다.”뿐이었다고 한다.
(144) 혀는 자신의 몸을 베는 칼(舌是斬身刀) 그는 말조심을 하라든 뜻에서 이 문구를 새긴 목패를 관료들 목에 걸고 다니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꽤나 흐뭇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 관료들의 목에 걸린 글귀를 실제로 읽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그 글귀가 경고를 보내고 있는 사라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광해군-1575~1941>
(146)광해군은 쑥밭이 된 국가를 다시 일으킬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띠고 왕좌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재건과 개혁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믿게 하는 능력이었다.
(149) 조선왕조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했던 당시, 이처럼 ‘안전’에 사로잡힌 사람이 왕이 된 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전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쳤다. 그 결과 빚어진 정치불신, 리더십의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과 나라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5) 광해군의 중신들도 사직 상소를 올리고 임금이 극구 만류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강화했다. 또한 정치판이 복잡해질 때마다 사직소를 던지고 물러나 있음으로써, 스스로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일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166) 결국 당시의 정국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고, 개혁이기대치를 밑돌게 된 것은 신하들끼리의 당쟁과 반목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끌려 다님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리더십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177) 광해군은 조선조 왕들 중에서 몇 개의 최고기록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는 앞서 말한 최다 공신배출 외에 최다존호 보유가 있고, 대조되는 기록으로는 경연의 최저개최(단 경연의 기틀이 잡히기 전인 세종 이전, 그리고 예종이나, 인종처럼 재위기간이 극단적으로 짧았던 임금은 제외 할 때 그렇다.) 와 친국의 최다시행이었다.
(179) 이러한 광해군의 행태는 안전에 대한 끝없는 집착, 그로 인한 광기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생애에 걸쳐 불안과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18세의 나이로 얼떨결에 세자가 되고, 곧바로 전쟁터를 누비며 ‘임시정부’를 운영해야 했다. 그가 잘하면 잘할수록 아버지인 왕의 태도는 싸늘해져갔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더한 바늘방석이었다. 아버지의 눈치, 젊은 새 어머니의 눈치, 코흘리개 이복동생 눈치, 자신을 몰아내려는 반대 당파들의 눈치, 명나라의 눈치까지 보고 살아야 했다.
(181) 그러나 이러한 대북사상이 진정 ‘근대적’인 사상으로서 조선 사상의 주춧돌을 대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2퍼센트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2퍼센트였다. 즉 대북의 사상은 유난히 의(義)와 명분을 강조한 사상이기도 해서,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는 강직한 정신은 서인-노론을 능가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대북 출신의 의병장이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강직함은 국난을 극복하거나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데는 반드시 필요할지 몰라도, 대화와 타협을 이루고, 그에 기초하여 새 시대를 함께 이루어 가는 데는 오히려 부적당한 요소였다.
(189) 그렇다면 대북파는 왜 광해군과 정면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친명배금에 매달렸던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대북파의 사상적 성향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중앙의 대북파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하는 하삼도 사람의 영향력 하에 움직이고 있었기에 이런 ‘무분별한’ 정책이 가능했다. 하삼도에서는 북방의 상황을 잘 모른다. 보는 것은 평온한 일상이며, 읽는 것은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에 앞서 대의를 생각하라”는 경전의 가르침, 북쪽 오랑캐를 쳐부순 성왕들을 묘사한 역사서의 내용이다.
(191)광해군의 마지막 2-3년은 철저한 불신과 환멸의 시기였다. 광해군은 대북에 진력났다. 대북은 광해군을 믿고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두를 서인과 남인이 이를 갈면서 노려보고 있었다.
(195) 그러나 그는 재건과 개혁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믿게 하는 능력이었다. “나를 믿어라” 간단하면서도 너무도 간단한 이 말을 그는 15년 재위기간 중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하지 못했다. 아니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신부터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 “이런 마당에 대통령이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오늘 중에도 종종 들을 수 있는 푸념이다. 그리고 그 푸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한 조직의 가장 윗자리에 올라간 사람이라면, 그런 푸념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의 길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시밭길이기 때문이다. 옳다고 믿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나를 믿어라”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을,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로 기록한다.
<정조, 1752~1800>
(196) 지어진 지 사백년 되는 조선이라는 집을 수리하려 했던 정조는 천재적 두뇌를 이용하여 다양한 정치실험에 나섰다. 하지만 천재 정조는 생물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미처 체득하지 못했다.
(211) 이것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무자비한 공격을 펼칠 경우 오히려 반격을 받을 수 있음을 감안하여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방침은 또 하나의 효과를 노렸을 수 있다. 즉 문제가 되는 ‘죄인들 일부를 계속 살려둠으로써 그들에 대한 처벌 요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그렇게 365일 비상을 걸어 둠으로써 조정이 경각심을 잊고 해이해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214) 이렇게 정조가 새로 마련한 정치의 틀은 명분으로나 실질로나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것일수록 사소한 어긋남 때문에 무너지기 쉬우며, 한 군데가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정정당당한 복수와 응징에 대한 강조는 정조 치세 내내 이어진 정치 테마였다. 하지만 아마도 정조가 의도했을 ‘비상상황의 장기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엉뚱한 효과를 낳았다. 바로 당쟁에 이용되어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222) 그러나 정조의 탕평이 영조의 탕평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영조의 탕평이 ‘완론(緩論)탕평’이라면,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탕평’이라고 불리게 된다. 즉 영조는 되도록 당파간의 대립 국면을 피하기 위해 각 당파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은 사람들을 골라 ‘탕평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른바 ‘이열치열’의 접근법을 썼다. 탕평의 마당에는 각 진영의 핵심이 올라오지 않으니, 실질적인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차라리 당파의 실세들을 과감히 ㅂ맞대결시켜, 서로의 도리와 입장을 내놓고 겨루게 한다.
(233) 우리는 여리서 의리탕평론의 ‘민주주의’에 이어 정조의 ‘자유주의’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거친 흐름이 사람을 살 수 없게 한다고 여겨, 냇물을 막고 언덕을 깎아서 그곳에 문명의 집을 세웠던 조선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마리였다. 이미 바깥세상은 사람들의 정치적 의견이나 종교적 믿음, 그리고 부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의회, 대학, 시장이라는 강에서 합류하게끔 둑을 터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개화라고 불렀다.
(234) 그것은 정조의 개혁 마인드의 근본적 문제, 즉 있었던 곳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달라간다기보다 본래 완벽했던 세계의 무너지고 뒤틀린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개혁이라는 사고방식이 갖는 문제와 맞물린다. 황극 군주론, 병농일치제, 향거이선제, 이것은 모두 유교 경전 속에 그려진 이상이었다. 실현이 너무 어려워 포기했지만, 정조는 중국 고대의 정전제도 18세가 말의 조선에 복원할 생각을 했다.
(239)하지만 당시의 세상은 더 이상 낡은 질서에 얽매여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정조는 신해통공으로 그러한 ‘자연스런 흐름’의 길을 터주었으면서도, 정약용 등의 서학파나 박제가 등의 북학파는 모두 그가 마련한 학문의 장에서 자라난 새싹들이었음에도 ‘세도를 바로 잡아야 할’ 자신의 사명에 집착한 나머지 그런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삼강오륜을 파괴하는 서학, 존주대의와 상반되는 북학을 자연스레 꽃피도록 두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문을 열면서 오른손으로는 그 문을 닫으려는 사람과 같았다. 결과는? 하나, 문이 빠끔 열린 채 계속 그대로 있다. 둘, 반대편에서 밀고 들어오는 힘에 의해 갑자기 벌컥 열린다.
(245) 그런데 이처럼 인사이동을 자주하다 보니 정조는 거의 쉴새없이 새 후보자를 검토하고 낙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새로운 인물이 그렇게 많이 넘쳐 날리는 없으니,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바꿔 임용하거나, 파직했다가 얼마 후 다시 임용하거나, 귀양 보낸 지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불러와 다른 자리를 맡기는 식의 회전문 인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회전문 인사라 해도 잦은 인사행정은 피곤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246) 이 책에서 소개한 네 왕들의 기본적인 정무처리 외에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살펴보면, 세종은 틈만 나면 공부하고, 연산군은 틈만 나면 놀고, 광해군은 틈만 나면 죄인을 심문했다. 그리고 정조의 경우는 틈만 나면 인사행정을 할 수 있다.
(256) 정조는 세종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 군주였다. 그러나 새로 개척하는 입장과 지키고 정리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인지, 정조에게는 세종만한 여유가 없었다. 세종이 야심찬 프로젝트를 몰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통상적인 업무를 적절하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모든 것을 자신이 장악하지 못하면 불안을 견딜 수 없었다.
(257) 정조와 그의 시대를 볼 때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보려는 경우가 많다. ‘정조(및 남인)=진보개혁, 노론=수구기득권’의 식이다. 이는 사극에는 적절한 관점이다. 하지만 진실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관심은 아니다. 정조에게는 개혁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입장과 고충이 있었다. 노론이 반드시 보수이고, 남인이 반드시 진보인 것도 아니었다.
<2부, 왕 V S왕>
<조선의 왕이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일>
(264)전통 동양의 정치사상은 이처럼 왕이 절대군주이므로 뭐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점과, 반대로 절대군주이기에 아무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점 사이의 긴장과 모순에서 그 일체를 설명할 수 있다.
(266) 첫째, 성학에 힘쓰며 수신에 전념할 것. 사대부들은 왕도 한 사람의 사대부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학문을 연구하고 심신의 수양에 힘쓰는 선비의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개인적인 취미와 오락을 멀리하며, 사치에 빠져들지 말 것. 선비이자 통치지인 군주는 정무에 몰두하는 한편 틈틈이 학문과 마음공부에도 힘써야 한다. 셋째,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소인은 군자처럼 천하를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며, 자잘한 이해관계나 인간관계에 얽매인다. 따라서 소인을 가까이 하여 그들의 의견을 용납한다면 올바른 정치를 하기 어렵다. 넷째, 언로를 열고 신하들의 간언을 용납할 것. 문관과 신료는 가까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들과 얼굴을 마주대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신하와의 경연>
(273) 경연이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장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허심탄회하게 만나서 학술과 정치를 연결해 논의하는 중요한 국정 수행의 장이 되게끔 했다. 실로 조선의 경연제도를 이룩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279)경연의 성격이 과도히 정치화됨으로써 그 긍정적인 성격은 많이 감소되었을지 모른다. 대부분의 역대 왕들이 경연을 부담스러워 하고, 빠져나갈 핑계를 궁리했다는 점도 이해할만 한다. 그러나 경연에 많이 참석하는 것이 최고 지도자의 으뜸가는 덕목이 된 이상, 그 합리성 여부는 젖혀놓고 일단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두루 인정을 받고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신뢰와 존경을 얻어야만, 그 통념을 뜯어 고칠 힘도 생긴다.
<왕의 여자>
(303) 연산군과 광해군은 다른 왕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었고, 그것도 신하들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것은 신하들과의 공식적인 접촉은 꺼리면서 비빈들과 한껏 친밀하게 지내고, 심지어 그들에게 국사를 일부 맡기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신하들이 성군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라’는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일탈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장녹수나 김개시 등의 여성들이 실제 이상으로 악명을 얻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309)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과도한 방탕에 빠지는 일은 분명 부정적이지만, 적당한 오락과 남녀관계를 통해 숨을 돌리고 긴장을 푸는 여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맞출 때 개인이나 조직이나 오래가고, 더 능률도 오르지 않을까.
<왕과 언론>
(311) 조선의 언론제도 또한 중국과는 차별화되는 독특한 것으로, 간쟁을 전담하는 사간원 외에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고 규찰하며, 사법기능도 수행한 사헌부도 언론기능을 갖췄다. 그래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 대간이라 불렀다.
(320) 지도자는 자신이 계속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자기연민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훌륭한 지도자일 수 없다. 아니, 평범한 지도자조차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감히 못하는 일을 지도자에게는 기대한다.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없고, 지도자도 역시 인간일 뿐임을 무시하는 태도라 해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있는 힘껏 노력하는 자만이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의 인사권 행사>
(332) 폭군은 보통 간사한 측근을 동반하지만, 오히려 연산군은 ‘측근’과는 가장 관련이 적은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정상적’인 정치를 하던 시기에는 원로 대신들에게 업무를 크게 위임하고 소장파 관료들과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식으로 정치에 임했다.
(334)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측근을 키우되, 조직의 불만과 반감은 키우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모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최선의 답은 있다. 그것은 측근을 키우되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아니, 정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직의 정해진 규칙과 업무체계를 무시하고 막후에서 측근과의 의사소통으로만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며, 측근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되 그 까닭은 측근 자신의 능력에 있지, 그 사람이 측근이라서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측근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임을 악용하여 스스로의 사익을 챙기기 않는지 살펴야 하고, 측근이 중대한 과실을 범했을 경우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서책간행>
(362) 따라서 현대의 세종 이해,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 창달을 중심으로 그를 존경하는 이해 방식은 서구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와 과학관에 다분히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세계적으로 홍보되고 있는 세종은 성리학적 성군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근대과학의 선구자인 셈이다.
<에필로그>
(379)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의 왕들을 막연히 꺼려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기로 하자. 그들은 비록 근본적인 모순을 안았을지언정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해내고자 한껏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람들이므로, 그리고 조선의 왕들을 겉보기로만, 사극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틀로만 보지 말기로 하자. 그들은 진보적 영웅이거나 수구적 악당이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우리가 실록에 남겨진 왕들의 고민과 울분, 감격과 희열을 있는 그대로 느낄 때, 그들과 그들의 신하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였는지 제대로 이해할 때, 그들이 남긴 역사는 비로소 제 빛을 찾을 것이다.
4. 내가 저자라면
네명의 왕과 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그동안 왕이면 왕, 하나의 사건이면 사건 등 단편적 역사에서 볼수 없었던 부분까지 볼수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과 정조도 치적과 업적 위주의 관점이 아닌 당시의 정치적 시대적 상황을 알고 나니 새로운 관점이 보였다. 세종과 정조의 개혁정치의 차이와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분석도 새로 알게 되었다. 반대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에 의해 쫒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내막을 들여보 보니 그동안 역사적 가치 판단이 치우쳐 있었음을 발견하였다.조선시대 전체를 네 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변화의 순간이었고 혁명의 시대였다. 그동안 부정적으로 보였던 조선의 역사가 다시 들어왔다. 양반들, 그들만의 리그로 500년을 이끌어 왔고 결국 세도정치로 인하여 변화를 거부하였다. 이미 변화를 하려고 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세상은 변하는데, 고리타분한 과거에 안주를 했다.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왕이 능멸당하는 아픈 과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낌없이 죽음과 맞바꾸었다.역사는 쉽게 흐르지 않는다.
구성면으로 볼때 1부에 나오는 네명의 왕들의 간결하면서 시기별로 정리가 잘 되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 그리고 같은 상황에서 각기 다른 왕들과 비교한 점도 이해가 쉬웠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문제였다. 측근의 문제, 측근을 어떻게 관리하는 문제이지 이념이나 성향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측근을 키우되, 조직의 불만과 반감은 키우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모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최선의 답은 있다. 그것은 측근을 키우되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아니, 정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직의 정해진 규칙과 업무체계를 무시하고 막후에서 측근과의 의사소통으로만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며, 측근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되 그 까닭은 측근 자신의 능력에 있지, 그 사람이 측근이라서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측근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임을 악용하여 스스로의 사익을 챙기기 않는지 살펴야 하고, 측근이 중대한 과실을 범했을 경우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세종대왕과 다른 왕의 리더십중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이부분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때 상황에 맞게 새롭게 관계를 정의하고 믿음과 비전을 갖게 하였다. 때로는 경쟁관계를 만들고, 때로는 준엄한 호통이 있었다. 믿음을 주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 그들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문제를 알았으리라. 이론만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세상이고, 그 마음이 곧고 오래 지속되어야 하다.
마지막으로 꼼꼼한 자료 정리가 눈에 들어왔다. 349페이지에서 353페이지에 걸쳐 네 왕들이 간행한 서적을 표로 만들었다. 교화, 법정,학술, 실용,문예, 기타 5분야로 나누어서 정리하였다. 세종 115권, 정조 104궈, 연산군 20권,광해군 11권의 순이다.
저자의 말대로 왕의 투쟁사는 상반된 목표로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국민의 종복이면서도 동시에 국민의 지배자인 정치인들, 기업의 '왕'이면서도 주주의 이익에, 그리고 전 종업원들과 국가 사회의 이익에 봉사할 책임을 갖는 CEO 등등 책임과 갈등 사이에 고민하던 왕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332 | 코리아니티 - 구본형 [1] | 이은미 | 2008.03.15 | 2326 |
1331 | 코리아니티 경영, 구본형 [3] | 홍현웅 | 2008.03.15 | 2348 |
» | [독서47]왕의투쟁/함규진 | 素田 최영훈 | 2008.03.14 | 2689 |
1329 | [48] 10cm 예술 / 김점선 [4] | 써니 | 2008.03.13 | 2705 |
1328 | [46]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베티 에드워즈 [2] | 校瀞 한정화 | 2008.03.13 | 5371 |
1327 | 삼국유사 [2] | 박안나 | 2008.03.10 | 2575 |
1326 | 삼국유사 순례기 [2] | 서지희 | 2008.03.10 | 2606 |
1325 | 고운기 ,일연, 삼국유사 [1] | 김나경 | 2008.03.10 | 3102 |
1324 | 삼국유사 - 일연/고운기 [1] | 최현 | 2008.03.10 | 2651 |
1323 | [02]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 오현정 | 2008.03.10 | 2366 |
1322 | [02] 삼국유사/고운기 [2] | 강종출 | 2008.03.10 | 2713 |
1321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2] | 김용빈 | 2008.03.10 | 2754 |
1320 | [북리뷰002]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2] | 양재우 | 2008.03.10 | 2716 |
1319 | 삼국유사, 고운기 [4] | 이한숙 | 2008.03.10 | 3078 |
1318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 유인창 | 2008.03.09 | 2562 |
1317 | 고은기, 양진 <삼국유사> [1] | 박중환 | 2008.03.09 | 2878 |
1316 |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 [2] | 이승호 | 2008.03.09 | 2891 |
1315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 이은미 | 2008.03.09 | 3024 |
1314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Review [1] | 손지혜 | 2008.03.09 | 2806 |
1313 | 삼국유사 [2] | 최지환 | 2008.03.09 | 28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