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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하여
우석훈은 경제학자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생태경제학을 전공했다. 그가 일한 곳은 대기업에서 공직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유엔환경분과에서 일했다. 현대그룹에서 환경관리 총괄을 맡기도 했고, 김대중정부에서는 총리실에 근무하며 에너지 정책을 담당했다. 에너지관리공단을 거쳐 수년간 기후변화협약 정부 대표단으로 국제협상에 참가했다. 한겨레에 ‘여기는 명랑 국토부’를 연재하던 시절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여긴다. 고액연봉 대신 ‘가난한 자유’를 선택하고 인생의 행복을 찾았다고 말한다.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우석훈의 저작 활동 중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일 것이다. ‘88만원세대’부터 시작한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는 ‘조직의 재발견’ ‘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져 마무리 되었다. <한국경제 대안시리즈>는 한국경제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겉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대안들을 찾아보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여과 없이 드러나는 한국경제와 사회의 모습이다. 저자는 외면하고 싶어지는 혹은 모른척 하고 싶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우석훈의 말은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다. 그는 정부의 녹색뉴딜 사업을 쓰레기통이라고 독설을 뿜어낸다. 그가 저술한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둘러말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으로 말하고 직설적으로 대안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불편하지만 시원하다. 묘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A급 경제학자는 이론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B급 경제학자는 이론을 수정하는 사람들이고, C급은 이론을 적용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은 이론을 만들거나 수정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C급이라고 말한다. C급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왠지 허술하고 만만해 보이지만, 그가 펼쳐내는 이론은 허술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제1부 대한민국 10대와 20대, 그들의 운명
* 1장 첫 섹스의 경제학: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들의 두발의 자유가 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만으로도 한국의 청소년은 스스로 머리에 대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소수자’ 혹은 ‘경제적 약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머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아직도’ 얻어내지 못한 상태다. 물론 모든 권리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줄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에서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리라는 집단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찰할 때, “이 집단은 스스로 독립하지 못할 정도의 경제 수준에, 자신의 머리모양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정도의 권리도 갖지 못한 집단”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두발의 자유조차 없는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거의 권리’와 같은 보다 고급스러운 권리는 더더욱 요원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33]
우리나라를 제외한 선진국의 젊은이들은 16세부터 사랑을 시작하고,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독립을 희망한다. 물론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를 수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사교육에 묶여서 대학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그 순간에 그들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풀어갈 준비를 시작한다. 한국의 청소년들과 적게는 6년에서 많게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이10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9]
국민소득이라는 잣대로 보면, 유럽 국가들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18세에 삶을 독립하는 새로운 시민들, 즉 젊은 동거인들에게 어떻게 사회안전망을 적용할 것인가라는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소득 1만 5천 달러, 늦어도 2만 달러 즈음에서 기본적인 제도의 정비가 끝났다. 물론 국가별로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 동거인들을 사회의 첫 번째 단위로 인정하자는 합의가 나오는 단계는 국민소득 1만 5천 달러 무렵이다. [41]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출발선을 같게 하자”라는 ‘형평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찾고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고,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 셈인데.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이 ‘형평성’이라는 것이다. 국민들 입장으로서는 ‘평등(equality)'을 포기하는 대신 형평성이라는 보다 완화된 가치에 동의를 해준 셈이다. 그리고 그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바로 교육이다. 최소한 안정적 시장경제를 운용하고 있는 선진국 정부와 국민들의 합의한 내용은 고등교육, 즉 대학교육에까지 형평성을 적용하는 것이다. [46]
누가 보더라도 우리의 대학 시스템은 형평성의 기준에도 맞지 않고, 가격 체계로만 보더라도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쉽게 진단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 대학 시스템은 사실 ‘한국형’이라고 별도로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형적이다. 문제는 현 상황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사회적 힘들이 움직이면서 더욱더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되고 있다는 점이다. [49]
대학등록금에 대한 현실적 해법들은 약간 큰 틀을 변형시키는 유럽형에서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일본형과 같은 몇 가지 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지금의 상황이 당연하고, ‘좋은 대학’에 ‘좋은 사람이 가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형평성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10대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나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50]
이를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면 일본은 ‘자본’과 ‘사회’가 일종의 협의점을 찾은 셈이고, 스위스나 스웨덴은 지역사회가 일종의 사회적 장치로 직접 나서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한 셈이다. 유럽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다국적 기업이 많은데 이런 기업들은 청소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최저 임금으로 최고의 생산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역사적으로 축적된 특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네슬레는 본국인 스위스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국민기업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지만, 제3세계에서는 무서운 기업으로 돌변한다. 실제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분유를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선에 당선되었던 칠레의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국제적인 세력 중에 분유 판매가 줄어들 것을 염려한 네슬레 기업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소문이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분유를 먹이고 싶어 했던 아옌데의 경제 프로그램은 결국 작동되지 못했고, 아옌데는 1973년 대통령궁에서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사살되었다(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참조). [58]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청소년 노동에 대해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없고, 따라서 사회적 합의도 없다는 점이다. 법적 기준과 같은 알바의 시간당 인건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기에는 현실이 너무 참담하다. 알바 시장의 현실은 최저임금 기준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다양한 편법들이 난무하는 무정부주의 상태에 가깝다.
‘떼어먹기’ 같은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심지어 금융시장에서 은행들이 종종 저지르는 것과 같은 ‘꺾기’도 심심치 않게 관찰된다. 특히 성인들의 정상적인 노동시장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꺾기’는 나름대로 ‘고급손님’들을 겨냥한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횡행한다. ‘꺾기’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근무시간 중에 손님이 거의 없는 시간이 되면 알바들에게 “나가있으라”고 요구한다. 소위 ‘알바’들은 ‘요구에 따라’ 오락실이나 PC방, 만화가게 같은 데 가서 시간을 때우고 오는데, 당연히 이 시간 동안의 임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이런 꺾기는 국제 노동시장의 관례나 청소년 노동에서는 전례조차 없는 아주 악질적인 것이다. [60]
그러나 지금 10대를 기다리고 있는 진짜 불행은 그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었을 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경제 시스템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때로 신자유주의라 불리기도 하고, 혹은 ‘한국형 승자 독식’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한미 FTA 체제’라 불리기도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 불리든, 지금부터 펼쳐질 시스템은 특별한 외부의 간섭이나 내부에서의 변화가 없다면 완벽한 승자 독식의 세계이다. 이 시스템이 가혹한 것은 경쟁이 반드시 또래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 간에도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세대 내의 경쟁은 한 세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로섬 게임과 비슷한 양상을 가지게 된다. 어쨌든 그 세대 내에서 결정할 일이고,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세대 간 경쟁은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지게 된다. 앞 세대, 즉 기성세대가 너무 많이 가지고 가면 뒷 세대는 가질 것이 별로 없는 일방적인 게임이 되고 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바로 이런 세대 게임과 비슷하다. [62]
지난 5년간 한국에서 진행된 화장품 회사들의 기본 전략은 “13세에 기초화장을, 18세에 색조화장을”이다. 13세 소녀 때부터 자신들이 만든 화장품을 사용하게 해서 평생 고객으로 전환시킨다는 처절한 전략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소녀들이 가장 일찍 화장을 시작하는 나라가 되었고, 가장 많은 화장품을 10대가 집단적으로 소비하는 나라가 되었다. 청소년들과 10대 대다수를 이 같은 무차별적 마케팅과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경우는 선진국에서는 찾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문화적 다양성과 사회적 전통의 자리를 마케팅이 채운 셈이다. [68]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한국 사회를 강타한 1318 마케팅은 10대들의 정신세계만 황폐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10대들의 다양한 감수성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은 ‘과시적 소비’로 채워버린 셈이다. 성장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 자체를 갉아먹는 행위였다. 신문과 방송까지 총동원된 1318 마케팅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한국 패션산업이 도약을 거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섬유업의 근간은 이미 무너졌고, 자체 디자인 개발 능력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바로 전 세대에도 있었던 문학소녀도 사라져버렸다. 문화적 다양성은 사라진 대신 소비되는 화장품의 종류만 다양해졌다. 상품 다양성은 문화 다양성과 많이 다를 뿐만 아니라 현대 경제학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창의성과 독창성 역시 이런 소비 행위 속에서 기계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1318 마케팅은 거의 ‘세대 착취’ 현상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했다. 케인즈는 일찍이 ‘소비는 미덕’이라고 갈파했지만, 그것은 시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성인 소비자의 이야기다. 10대들을 아무런 방어 장치 없이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도 아니고 건전한 자본주의도 아니다. 그저 노동자 대신 10대를 노린 ‘세대 착취 자본주의’에 불과하다.
지난 5년간의 1318 마케팅이 우리나라 고유의 10대 마케팅과 결합되면 세대 착취 정도가 아니라 ‘세대 파괴’가 된다. 사교육 시장을 우리나라처럼 거대하게 발전시키고 운용하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야말로 특수 상황인데, 우리나라의 10대들은 교육 장치에 의해서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고, 마케팅 장치에 의해 극단적으로 착취당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은 단순히 10대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소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어야 하는 부모 세대의 고통과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정말 무섭다. 만일 성인들의 세계에서 이 정도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면 게임 이론과 같은 방식을 통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가 벌써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세대 게임은 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게 되므로, 누구나 문제점을 알고 있어도 변화되지 않고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69]
* 2장 20대가 만나게 될 세상
아무리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목 놓아 외쳐도 집으로 돌아가면 이 사회는 “살 사람만 우선 살고 보자”는 사회이다.
내부의 변화만을 놓고 본다면 이 기간 동안 비경제적 관계 즉 가족이나 우정, 사랑과 같은 가치들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야말로 문학이 죽고 시가 죽고 예술이 우는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신 경제나 경영 혹은 재테크나 부동산 같은 얘기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내부적 변화를 사회적인 용어로 규정한다면 ‘승자 독식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때, 패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패자부활전’은 올림픽과 같은 아마추어 게임에나 있는 용어일 뿐이다. 그야말로 초기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담론들이 전면적으로 한국 사회에 다시 복귀한 셈이다.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라고 할 수도 있고 ;삶의 자본화‘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표준경제학의 용어로 정의하자면 ’독과점화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80]
중소기업이 제시하는 일자리와 ‘잠재성’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아직까지도 완전고용에 가깝다. 당연한 결과이다. 4~5% 의 경제 성장률은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를 고려한다면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경제에 일반화되기 시작한 독과점화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인데, 최근 우리나라에 자리 잡기 시작한 승자 곡식의 룰이 작동하는 한, 지금의 20대는 선뜻 중소기업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승자 독식이라는 게임은 초기 조건의 작은 차이가 나중에 더욱 큰 차이로 벌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은 ‘안전성’과 ‘소득’이라는 두 가지 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하나의 변수로 묶으면 평생소득이라는 변수가 된다. 문화적 요소의 개입을 배제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공부원이라는 세 가지 직업군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대 승자 독식이라는 룰이 작동되는 상태에서 남는 것은 ‘평생소득’의 크기뿐이다. 다른 게임과 차이점은 이 평생소득 크기의 차이가 절대적으로 극복되지 않을뿐더러 승패를 가르는 절대적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소득이 주어질 것이라고 판단되는 중소기업에 취직하지 않는 것은 이 상태에서는 어쩌면 당연하다. [96]
큰 변화가 발생하기 전까지 지금의 10대와 20대가 처한 상황은 아마 시간이 흘러서 20년이 지나더라도 근본적인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걸 경제학에서는 BAU시나리오라고 부른다. 특별한 변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 하던 대로 비즈니스가 움직인다면”이라고 가정을 하는 것이다. [137]
앞으로 BAU대로 진행된다면, IMF 경제위기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20대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게 된다. 포스트 포디즘에 적합한 전환이 늦춰지는 만큼 기업은 물론 전사회적 부담이 커진다. 대기업과 정부조직에 대부분의 20대가 몰리게 되고, 이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막말로 “버리고 가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 즉 한국경제의 ‘영광의 30년’을 많은 사람들이 좋았던 시절이라고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은 그 시절에 국민소득이 높아서 만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SKY 대학이라고 부르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그리고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육사 출신이 아니더라도 성실하게 경제생활에 임한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기회와 다양한 패자부활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입체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했다. [139]
지금 20대가 어렵다면, 같은 경향 속에서 지금의 10대는 더 어렵고 더 강화된 승자독식의 시스템에서 배출될 것이다. 이런 경향성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 같다. 부동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세대 독립의 지체 현상은 더 강화될 것이다. 아울러 삶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더욱 높아지지만 직업의 안정성은 더욱 약해질 것이다. 여기에 객관적 상황을 하나 추가한다면 지금 20대에게 진행되는 불공정한 세대 간 경쟁 혹은 세대 간 착취의 결과로 지금의 20대가 되면 새로운 20대를 더욱 격렬하게 공격할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학자들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지금의 40대와 50대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경제적 혜택을 다음 세대에게 하나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보다 더욱 격렬하게 지금의 20대는 30대가 되었을 때 자신의 것들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140]
제2부 20대에 숨통을 10대에 생존을
* 1장 위기의 20대: 자멸인가, 세대 착취인가?
그러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색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즉 대학 국유화를 쟁취한 뒤 다음 단계로 진화했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우리의 386은 대학개혁에 대해 거의 아무런 청사진이나 의미 있는 노력을 개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벌사회를 더욱 강화시키며 교육 엘리트주의를 강화시키는 일종의 역사에 대한 배신을 행한 세대이다.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경제 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점은 세대원들끼리 서로 지원하며 일종의 경쟁력을 가지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세대가 아이들을 낳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원정출산이라는 것이 나타났고,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조기교육 붐이 일어났다.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면 아이들의 혀를 수술함으로써 미국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엽기적 사건들도 소위 386세대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발생한 것들이다. 유럽의 68세대들이 나이를 먹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직접 민주주의가 심화된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 386의 경우는 부모세대가 되면서 자신들의 경험과는 전혀 상반되게 사교육에 매달리거나 교육을 매개로 한 무한경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다음 세대에 관한 문제의 절반 정도는 지금의 386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생겨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7]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비슷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학번 중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시절에 대학생 정원을 대폭 늘리면서 운 좋게 대학원만 졸업을 하고도 대학교수가 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교수가 된 상태에서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에 대학에 다녔던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박사과정에 진학하거나 유학 붐을 만들며 교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문은 잠깐 동안만 열렸고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교수가 될 수 있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박사를 수용할 수 있는 대학 교수직이나 연구직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박사들 특히 인문학이나 특수전공을 가진 사람들은 후에 개인적으로 아주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발생한 운명을 우리나라에서는 ‘고학력 실업’이라고 부른다. [182]
이런 상황에서 20대는 시장의 경쟁을 일종의 행위 패턴으로 받아들인 사실상 첫 번째 세대인데 이들은 불행히도 이전 세대가 다른 OECD 국가들이 만들어놓은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협력을 위한 경제적 장치를 제대로 세워놓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경제의 균형을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경쟁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승자 독식게임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한 게임의 패자가 바로 인생의 패자가 되지는 않지만, 이들은 이러한 완충 장치 대신 학벌이나 고향과 같은 치사하고 불쾌한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동종교배의 제도들만을 물려받은 것이다. 아마 20대가 만나게 될 사회적 경쟁에서 유신 세대와 386세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편리한 여러 가지 인연들을 복합적으로 동원한 총력전을 펼치겠지만 불행히도 20대들은 이런 장치가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는 전도된 ‘협력’과는 조금 거리가 먼 세대들이다. 본격적으로 개인적 경쟁을 받아들인 20대들에게 ‘인연’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다. [190]
이런 상황은 국부적인 하부 단위의 경제조직 내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겠지만 전체 세대를 놓고 보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주 특출하지 않은 어느 20대가 조그만 카페를 대학가에 새로 차렸다고 생각해보자. 유신 세대와 386세대는 이런 자영업 유형의 가게와 구멍가게 같은 것을 현재의 20대보다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의 20대는 문화적으로 행위패턴이 조금 다르다. 40대와 50대는 같은 돈을 지출하더라도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지”라는 지역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에 배운 대로 조그만 가게에서 단골이 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20대는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보다 스타벅스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문화적 장치들을 통해 20대가 20대를 소외시키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대기업과 소위 유명 메이커를 선호하는 20대의 소비 패턴에서는 정작 같은 20대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조그맣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20대들은 몇 개의 큰 조직으로 몰리고, 좁은 곳에서 경쟁해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소비와 생산이 겹쳐지는 특수지대에서 20대의 소비자들이 20대의 생산자들을 야박하게 대하고, 경쟁에서 밀어내는 셈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20대 사이의 세대 내 경쟁은 더욱 극심해진다. 이 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20대 생산자나 20대 기업가에게 20대 소비자는 고상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야박한 소비자가 되는 셈이다. [192]
세대 내 경쟁에서 가장 불리한 집단을 둘 꼽으라면 과연 어떤 집단일까?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졸 이하 집단과 여성이 될 것이다. 고졸이면서 여성이라면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청년실업 또는 고학력실업이라는 호들갑에 가려 거의 사회적인 이슈조차 되지 못한 불행한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에는 이들의 규모와 고통이 너무나 크다. 2007년 3월 현재, 전체 청년실업자는 36만 명 정도이고 그중 55% 이상이 고졸 이하 학력집단이다. 한국에서 고졸자는 최초 취업 시기부터 ‘벽’에 부딪혀서 평생 대졸자와의 간격을 좁힐 수 없다. [193]
정치 마케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토목공사의 경우 20대에게 돌아가는 몫은 일용 잡부의 임시 취업자리 증가 정도인데, 이걸 국민경제라는 틀에서 보면 모든 세대와 모든 경제주체가 지불한 세금을 특정 집단에게 집중시켜주는 ‘역분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테네시 강변에 댐을 집중적으로 건설했던 뉴딜 시절에는 중장비가 없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 토목공사가 20대와 30대 실업 상태인 노동자에게 일종의 세대 분배의 역할을 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 건설 현장에서 20대는 일용 잡부들도 찾아보기 거의 어렵다.
정치 마케팅에서 표를 구매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으로 사용되는 토목공사의 경우 20대의 눈으로 본다면 정치와 정책이라는 틀을 통해서 국민경제가 세대 착취를 만들어내는 첫 번째 수단인 셈이다. [207]
2장 다안성 1세대를 위한 크리스마스 캐럴
지금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10대와 20대 문제의 첫 출발은 하나의 인질극에서 시작한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7.30 교육개혁조치’를 통해서 대학졸업정원제 폐지, 대학본고사 폐지와 함께 과외를 금지시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소위 전두환 세대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렇게 잠깐 열렸던 10대가 자유로웠던 시대는 1989년 대학생 과외와 방학 중 학원수강 허용을 시작으로 9년 만에 다시 닫히기 시작한다. 1991년에 학기 중 학원 수강을 허용하면서 우리나라 10대들에게 다시 지옥 같은 시간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 상황이 전면적인 ‘인질 경제’의 양상으로 전환된 것은 IMF의 뒷수습에 이 사회가 정신없는 동안이었다. “모든 종류의 규제는 사라져야 한다”는 전도된 시대정신에 따라서 2000년 4월 헌법재판소가 전두환의 교육개혁조치에 대해서 위헌판정을 내리게 된다.
이런 인질극은 가난한 부모와 부자 부모 모두를 힘들게 하는데 전체적으로 모두 패자가 되었고, 이 게임에서 유일한 승자는 학원들과 이 게임을 흔들면서 자신들의 월급을 받았던 교육부이다. 80년대의 전두환이 했던 것과 같은 조치를 할 수 없는 것은 이제는 자신들의 산업을 일구면서 성장한 사교육 종사자들의 이권 때문인데, 이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전체 국민경제가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인질극에서 부모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풀려난 인질들에게서 발생하게 된다. 이건 유괴사건의 인질들이 사건의 충격으로부터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외상 후 충격을 앓는 것과 똑같다.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6년 동안 사교육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정상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당연한 일이다. 중고등학교만 치더라도 6년 동안을 집단 유괴범 같은 흉악범들에게 “공부 안하면 죽인다”는 협박과 “돈 가져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협박을 받았던 사람이 제 정신이라면 이상한 일이다. 이 충격은 평생을 갈 충격이다. 지금 대학에 막 들어간 사람들이 완전하게 인질극이 된 6년간을 거친 첫 세대인데, 이들 중 좋은 대학에 간 소위 이 세대의 엘리트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면서 처음 전면적으로 도입한 공민교육이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함께 집단 인질극이 되어버린 셈이다. [224]
이들을 위해서 사회가 준비해놓고 있는 단어는 ‘고졸실업자’라는 단어이다. 두 가지가 해법으로 제시될 수 있다.
첫 번째 종류의 해법은 이러한 인질극으로부터 10대들을 해방시키는 것인데, 이미 10대를 붙잡고 있는 인질범들은 뿌리가 깊고 게다가 교묘해서 이들로부터 인질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두환이 다시 돌아와도 이제는 인질범으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226]
현실적으로 경제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대학입시와 관련된 과목들에 대해서 제한적으로 사교육을 금지시키고, 이 분야의 사교육 종사자들이 업종전환을 할 수 있는 2~3년간의 유예기간을 주는 방안이 하나이고, 이들의 상당 부분을 공교육 체계로 흡수해서 교사들의 숫자를 대폭 늘리고 그 대신 학생당 교사 비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는 방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 해법은 몇 가지가 존재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인질극을 멈출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인질극 체제를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선택에 달려 있다. [226]
이 두 가지 정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작게는 세대 간 경쟁을 극대화시키고 넓게는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 자체를 붕괴시키는 지금의 인질경제는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사실 이 정도 방안은 이미 여러 경로로 제시되었는데,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지금 10대는 당장 인질극에서 구출될 수 있고, 그들의 부모들도 비로소 정상적인 경제적 삶이 가능해질 수 있다. 논의에 1년, 시행유예 기간을 2년 잡는다면 3년이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지만, 효과는 이런 제도가 시행될 것이라고 예견되는 순간부터 바로 발생하게 된다. 사교육이 만들어내는 인질경제와 대학 서열화라는 두 가지 요소는 경제학자들이 디자인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원균 같은 장군들이 정부 고위직에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228]
노무현 정부가 만들어놓은 ‘선택과 집중’에 의한 첫 번째 충격파는 윗세대의 경제적 약자들에게 그리고 두 번째 충격파가 20대에게 터진 셈이다. 노동시장에서 윗세대의 경제적 약자와 20대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고, 이미 증가하기 시작한 비정규직도 아마 10% 미만의 정부와 대기업 고용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경제의 구성원이 자신의 삶을 꾸리기 어려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바로 획일화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정규직 10% 정도의 자리를 향한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고, 정부가 기업에게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기업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피고용자인 20대에게 획일성을 요구할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가진 셈이다. 획일성이 극대화되면서 동시에 경쟁도 극대화된 이 상황을 한국식 승자독식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기면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지면 죽는 상황이 바로 노무현 시대의 ‘선택과 집중’이 만든 비극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31]
중소기업의 붕괴는 단기적으로는 20대 실업과 10%미만의 소위 ‘우아한 직업’에 대한 과잉 경쟁을 만들어내고, 구조적으로 90% 정도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원치 않았던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자신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니므로 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게다가 기존의 경제조직에서 완전히 내몰린 사람들이 자영업에 대한 창업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이미 유통에서도 대형 할인매장과 편의점을 중심으로 독과점화가거의 완료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90%의 젊은이들에게 불만족 상태에서 ‘메뚜기’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41]
한국경제는 지금 다양성이라는 가장 큰 자산을 스스로 파괴하는 중이다. 그 파괴의 현장마다 파괴된 집안의 비극과 가장들의 비극이 하나씩 생산된다. 이걸 한국 경제판 ‘공룡의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45]
자장면을 파는 중국집에서는 왜 프랜차이징이 벌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서민들의 식단이었던 설렁탕에서의 프랜차이징이 약한지는 이걸로 설명할 수 있다. 이미 자장면과 설렁탕은 ‘서민의 음식’이라는 사회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랜차이징을 통한 고급화로 사람들을 속이기가 쉽지 않지만, 나머지 분야에서는 쉽게 말하면 “싸구려 음식을 비싸게 속여 파는”일이 너무 쉽게 우리나라에서는 벌어지는 셈이다. 동경보다 비싼 서울의 스타벅스 커피 가격은 이런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프랜차이징은 비쌀수록 우리나라에서는 잘 된다. 이 경우에는 경제학의 수단을 가지고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는 현상이다. [250]
중앙정부라는 눈으로 본다면 이런 일을 안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가 처음이다. 세계적 독과점화와 프랜차이징 강화는 우리나라 말고도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처럼 단기간에 공룡들만 살아남는 시스템으로 변한 경우는 없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의 비극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공룡들의 비극’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253]
네 번째로 귀신이 스크루지 영감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알바들의 세상이다. 이곳에는 법도 없고, 인정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암흑과 고통의 세상이다. 편하게 ‘알바 시장’이라고 부르지만, 2만 달러 국민소득과 관련된 모든 논리가 정지하는 곳이다. 법정 최저임금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부모 동의를 받지 않은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고용계약서 같은 것도 쓰지 못한 상태에서 불법과 성희롱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공평한 것은 알바 시장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256]
가난한 경제적 약자인 동남아의 외국인들에게 극도로 잔인함을 보였던 한국 남성들이 국내에서는 10대와 20대 중 경제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알바에게 온갖 잔혹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262]
이 상황에서 가장 나쁘게 진행되는 경우는 내부 피해자들을 부각시키면서, 마치 1세기 전에 유럽에서 파시즘이 등장하게 될 경제적 토대가 형성되며 두 번에 걸친 거대한 전쟁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 사회가 거대한 파시즘의 흐름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까지 삶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외부의 적을 찾다가 그게 수월치 않으면 내부의 적을 찾게 된다. 역사는 대개 그런 방식을 통해서 파시즘으로 가는 문턱을 넘어섰다. [281]
지금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를 착취하는 사회적, 역사적인 구조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승자가 될까? 5%미만의 특수한 직종과 지위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이 구조에서는 모두 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지금 한국이 갇혀 있는 이 승자독식 게임은 우리를 영광과 번영의 미래보다는 파시즘과 혐오가 지배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약하고 조금이라도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정신적, 언어적 그리고 경제적 폭력을 가하게 될 아주 고통스러운 구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83]
* 3장 바리케이드와 짱돌의 기원에 관한 고고학적이며 기능론적인 고찰
사회 특히 기성세대가 자신들을 지키는 바리케이드를 20대와 공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현 시점, 20대도 어떤 식으로든지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지려고 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요구가 조금이라도 새로운 반전의 계기를 찾을 수 있도록 작은 ‘짱돌’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발생하지 않으면 20대들은 한 명씩 자신의 골방에 ‘은폐’되어 고립되고, 파편처럼 공격받으며 오히려 기성세대들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290]
경제 성장에는 여러 가지 패턴이 있고, 이모든 패턴들이 전해주는 정보는 매우 총체적이며 복잡하다. 그리고 수년 간 4~5%라는 도저히 이 덩치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성장을 거듭해온 한국 경제가 지금 만들어낸 것이 바로 ‘88만원 세대’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말을 달리지만, 결국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싸늘해진 아들의 시신이다. 현대 성장론 교과서가 얘기해주는 것은, 중요한 건 성장률 자체가 아니라 성장 패턴이고, 비경제적 요소들을 어떻게 성장과 잘 조화시키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303]
● 내가 저자라면
쉽다, 상징적이다, 독하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책을 빛나게 했다. 쉬우면서도 상징적이고 독하게 현실을 기록했다. 그래서 책은 빛을 발한다.
쉽다-책은 한 가지 문제를 파고 들어간다. 20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20대들의 고용에 관한 문제다. 일자리가 없어 푸른 청춘을 누렇게 말려버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20대가 겪고 있는 고용의 위기, 그 고용의 위기가 말하는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인 왜곡의 구조와 모순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고용이란 문제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 속에는 다양한 사회적 변수들이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고용은 경제학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경제학은 쉽지 않은 학문이다. 책이 학문에 대해서 쓰지 않았다고 해도 경제는 쉽지 않다. 책의 저자는 경제학자이다. 그런 까닭에 20대의 고용을 사회경제학적으로 풀어간다. 그러나 뜻밖에 어렵지는 않다. 어려운 경제학이라는 선입견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책은 20대가 처한 현실 속으로 곧바로 걸어 들어간다. 편안한 복장으로 산책을 가듯 평이하고 편안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책은 첫 섹스라는 다소 파격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스크루지 영감도 불러온다. 그런가 하면 토익책 대신에 짱돌을 들라고 하는 선동적인 외침도 있다. 그런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까닭인지 책은 쉽게 잘 익힌다. 크나 큰 미덕이다.
상징적이다-책의 제목이기도 한 ‘88만원세대’는 저자 나름대로 합리적인 산출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은 이렇다. 지금의 20대는 상위 5% 정도만이 좋은 직장을 가질 것이고 나머지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정도가 된다. 세금을 공제하기 않은 액수다. 이들은 88만원에서 119만원 사이를 평생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수식을 거쳐 도출된 것이 88만원이고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인 ‘88만원세대’가 됐다. 책의 제목은 단순히 책 한권의 제목이 아니라 이제 사회적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이 책이 제기한 문제의 반향은 컸다. 단 한마디로 현실을 보여주는 말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이 책의 상징성이 됐다. 시대의 상징을 표현한 제목과 내용은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되었고 책은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독하다-책의 에필로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럽에서 천유로 세대라는 책이 공감과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책의 독한 진실성 때문이다.’ 이 책 또한 그렇다. 독한 진실성에 있어서 이 책 또한 그것에 견줄만하다. 일자리가 없어 시들어가는 대한민국의 20대는 사실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고, 누군가의 조카이다. 그 누군가는 현 고용구조에서 나쁘지 않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20대에 대한 불편한 현실을 진실한 시선으로 본다. 그 현실은 얼굴을 맞대고 보기 꺼려지는 문제이지만 책은 날것 그대로 현실을 드러내고 대중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자 봐라. 이것이 현실이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이. 세대착취, 인질경제, 세대간 경쟁, 세대내 경쟁 같은 불편한 단어들이 책을 이끌어 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다양하고 피부에 와 닿은 현실 속의 사례들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문제를 비판하는 시각에서도 진솔함이 묻어나온다. 세대간 경쟁, 인질경제에 대한 분석도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탁월하다. 단순히 지나가듯 소리치는 한번의 외침이 아닌 깊이 파 들어간 노력 또한 돋보인다. 그러한 노력이 시대를 말하는 한 권의 책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