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원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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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성의 비밀을 풀다(감역자의 글. 문용린. p5~10)
1. 시대적 화두이자 가장 경쟁력 있는 인간 특질은 창조성
2.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 초반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
3. 인간의 두뇌능력을 측정 수단으로 주로 IQ 검사가 애용되어 왔지만, 가드너는 IQ가 인간의 잠재능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부정확하다고 말한다. IQ가 창조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음을 그는 지적한다.
4. 이 책은 다중지능이론을 주창했던 저자가 실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창조성의 비밀을 역동적으로 풀어낸 교양서
5. 책에는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엘리엇, 그레이엄, 간디 등 일곱 명의 창조적 거장들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등장. 이 책은 인간의 심리적 기질과 그가 처한 주변환경, 그리고 시대적 특성을 곁들여 창조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조명해낸 최초의 분석서
6. 전통적으로 창조성에 대한 연구는 한 천재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르고 특이한가를 밝히는 특이성 연구이거나, 여러 천재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유사점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공통성 연구중 어느 한 쪽으로 진행되었다. 가드너는 이 두 입장을 종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 업적을 낸 창조자를 선택한 후, 이들 인물의 ‘특이성’을 자세하게 검토하고 그 속에서 ‘공통성’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7. 이 책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① 먼저 그 첫 번째인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 가드너는 이 질문을 ‘창조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로 전환시켜 대답. 그는 <개인-일-타인>이라는 창조성 소재 모형을 제시.
이 모형에 따르면 개인은 내부에 있는 어떤 대가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서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만으로는 창조성이 발휘되는 성인으로 성장해 가지 못하고, 우선 그러한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 등)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며, 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예컨대 피카소의 경우, 4살부터 피어난 그의 그림 재능(개인)은 아버지에게 감지되어 14살에서 20살까지 좋은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심화되고 단련되었으며(일의 체험기회), 무수한 지지자와 경쟁자, 후원자를 통해서(타인) 온전한 창조성이 발휘된 것
가드너의 창조성 소재 모형은 창조성 연구의 지평을 거대하게 넓힌다. 그는 창조성을 단일능력으로 보는 입장에 반대.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창조성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고, 창조성에도 종류가 있다고 보는것. 아인슈타인은 논리-수학 영역에서만 창조성이 뛰어났음. 간디는 인간친화 영역에서 창조성이 뛰어났으며, 마사 그레이엄은 신체운동 영역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서, 엘리엇은 언어에서, 프로이트는 자기성찰 영역에서, 그리고 피카소는 공간 영역에서 창조성이 돋보였다는 것
가드너가 보기에 한 개인 속에 잠재한 창조성의 본질은 지능적 요소와 기질적 요소의 특이한 조합이었다.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과 환경을 들여다봄으로써 공통적 패러다임을 추출
-->‘10년 주기론’:창조적 대가를 연구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대체로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창조성이 성숙하고, 10년간 창조성을 발휘하며, 다음 10년간 그 창조성을 다시 다른 분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② 두 번째 목표는 이런 사람들의 창조성 발휘를 가능하게 한 시대적 특징을 규명하려는것. 가드너가 선택한 일곱 명의 창조적 거장들은 모두 현대의 인물들. 그가 관심을 가진 시대는 현대 사회로서, 현대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이 창조성 발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혀보려고 시도
8. 창조적인 거장들은 시대적인 문제에 가장 근접해 있었던 사람들
제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 1974년에 초연된 톰 스토파드의 희극 ‘익살’
: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취리히를 배경. 익살의 진면목은 당시 스위스에 우연히 살게 된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p30)
-. 7명의 창조적인 도약을 이해할 수 있으면, 분명 인간의 창조 행위에 담긴 여러 가지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나는 또한 그들의 창조적 업적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이해하면, ‘현대’를 해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35)
-. 이 책의 목표(36~38)
첫째, 188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이들 간의 유사점과 교육상 의미 있는 차이점을 규명할 생각
둘째, 창조적인 행위의 본질에 관해 대략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는것. 특정한 성품과 조건이 20세기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일반적인 특징
샛째, ‘현대(the modern era)'라고 부르는 시대에 관해서도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것
-. 구성적 주제(38~39)
① 분석틀은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다. 창조적인 인물, 창조적인 행위의 대상이나 작업(일), 그리고 창조적인 인물의 세계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것. 이 세가지 핵심요소와 이들의 관계는 창조적인 행위를 설명하는 기본 토대가됨
②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우선 한 개인과 객관적인 작업 세계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그다음 두 번째로 그 개인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서 성숙한다는 점(40)
-. 기록 보존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당대의 많은 문서들이 조사용으로 보관되는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고르는 편이 더 현명하게 느껴졌다.(47)
-. 이들 각자는 지능의 전 영역을 골고루 지녔고, 자신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지능을 두루 활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저마다 우수한 지능이 서로 달랐고, 각자의 창조적인 도약 역시 특정 지능의 우수함을 요구하는 해당 분야의 상징과 이미지 및 조작 방식을 정교하게 활용한 성과물이다.(48)
2. 창조성의 연구방법
-. 창조성에 대한 나의 접근법
① 구성적 주제(75~76)
첫 번째 관심사는 아동과 창조적인 어른의 관계.
두 번째 구성적 주제는 창조적인 인물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 천착
세 번째 구성적 주제는 창조적인 인물과 그가 활동하는 분야의 관계
② 구성적 틀
가. 창조적인 인물은 유년기의 통찰과 감정, 그리고 경험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면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임.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우에는 유년기야말로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됨. 실상 창조적인 인물이란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에 품었던 수많은 의문점과 문제의식, 그리고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가장 선진적인 이해 방식과 ‘결혼’시키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78)
나. 상호관계의 관점 : 개인과 분야 및 장(場)의 상호작용(83~84)
ㄱ. 나는 어떤 한 사람이 모든 분야가 아니라 어떤 특정 분야에서만 창조적일 수 있다고 생각
ㄴ. 나는 창조적인 인물이 정규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고 생각
ㄷ. 창조적인 행위는 특정한 문화에서 받아들여질 때에만 제대로 인식됨
③ 경험적 조사 문제(94)
④ 새로 발견한 주제
가. 도약의 시기에 받는 지원(97~98)
첫 번째 사안은 창조자가 가장 중요한 도약을 이루는 시기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표면에 등장. 창조자들이 아주 친밀한 동료의 중요한 지원과 격려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 지원 체계에는 규정 가능한 요소가 존재
창조자들은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의 정서적인 지원도 필요로 하고, 자신이 이룬 획기적인 도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인지적인 지원도 필요로함
창조적인 도약 주위에 강렬한 사회적.정서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저자는 느낌
나. 파우스트적 거래(98~99)
각각의 창조자들이 모종의 거래나 계약, 다시 말해서 파우스트적인 협정을 맺은 것을 발견. 이들은 이 협정을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오랫동안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김. 대체로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이 범상치 않은 협정에는 이런 계약을 강박적이리만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이 손상되거나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서려 있음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 지그문트 프로이트-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1. 첫 제자들(105)
-. 수요 심리학회라는 모임은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
-. 훗날 톰 스토파드가 ‘익살’에서 묘사한 것은, 사회의 주변부에서 서성거리는 이 신경과민한 사람들의 모임을 재현한 것이라는 점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음. 하지만 수요 심리학회의 정수에서 빈 정신분석학회가 태동했고, 여기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가 탄생한것
2. 성장 배경과 유년 시절(106~108)
-. 우리는 한 삶의 유년 시절이 그의 인생 행로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음
-. 가장 중요한 점은 프로이트가 재능이 매우 뛰어난 아이였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 재능을 알아보았다는 사실. 이 책의 일곱 명의 창조적 인물 중에서 학교 성적이 가장 뛰어남
-. 군인의 삶을 동경
-. 법학 전공 생각에서 괴테의 자연론에 강의를 듣고 마음을 바꿈.
3. 프로이트의 다재다능함(110~111)
-. 결점 투성이인 인간 세계에 강한 매혹을 느끼고 이를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이해
-. 수수께끼나 퍼즐과 같은 곤란한 문제를 푸는 데 몰두. 역설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것을 좋아했고, 해답이 풀릴 때까지 곰곰이 생각하는 버릇
-. 프로이트는 언어 지능과 인성 지능이 우수. 즉, 언어와 인간을 다루는 분야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
4. 샤르코와 정신의학에의 길
-. 1885년 10월부터 1886년 2월까지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음. 이 짧은 유학 시절이 프로이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장 마르탱 샤르코가 담당하는 임상교실 들어감. 히스테리에 강한 호기심. 무의식의 강력한 작용에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음(115~116)
-. 안나 O.양의 사례 연구는 프로이트의 전체 저작에서 가장 유명한 글 중의 하나가됨
: 예전에 억압된 기억을 말로 풀어내면서 거기에 얹힌 묵은 정서를 발산하면 증상을 없애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임(피펜하임은 이를 ‘대화 치료’라고 부름.118)
5. 고독, 그리고 친밀한 친구들
-. 빌헬름 플리스 그는 거의 매일 프로이트를 격려하며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던 이론에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했다. 또한 그는 학문적 주제와 직접 상관이 있든 없든, 프로이트가 가장 마음 편히 느끼면서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124)
6. 프로이트 혁명의 주요 개념
-. 핵심 개념은 억압(repression).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방어 기제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상들을 의식 아래로 억누르는 심리 과정을 일컫는다.(129)
-.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됨(130)
-. 신경증은 다양한 방어 기제에 의존. 방어 기제란 두려운 생각이나 정서적 불안을 야기할 만한 관념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심리 기제. 억압이 가장 중요한 방어 기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승화라든가 반응 형성, 투사, 전위, 금지와 같은 다른 방어 기제도 존재(131)
-. 창조적인 인물들은 근본적인 비약을 이루기 직전에,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언어를 믿을 만한 친구에게 시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슴. 확인받고 싶은 심정. 창조적인 인물들은 학문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무조건적인 격려와 지지를 원하기 때문(136)
-. 꿈과 자기분석(136~139)
① 정상인의 꿈에도 다양한 심리과정과 기제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됨
② 1897년 무렵 프로이트는 진지한 마음으로 자기분석을 시작. 이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탐구 작업이었을것. 수면 중에 꾼 꿈을 재로로 삼아 자유 연상을 시도하고, 되도록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고 연상에서 비롯한 표상들을 분석
③ 꿈의 분석 과정은 프로이트의 외로운 시절에 그에게 힘이 돼줌
-->‘꿈속에서도 논리적이고 뜻이 분명한 심리 과정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밝혀냈다는 것은,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자신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④ 프로이트는 모든 꿈에는 모종의 소원이나 환상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되었다. 꿈은 억압되된 소원이 위장 실현되는 과정이며, 예전의 결심이나 근심 혹은 욕망을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처리하는 수단
⑤ 대체로 꿈은 예전에 품었던 생각에서 자극을 받는데, 꿈 꾼 당사자도 전혀 알지 못했던 생각인 경우가 많다.
⑥ 모든 꿈은 각기 하나의 퍼즐인 셈이었는데, 그가 퍼즐 풀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⑦ 프로이트는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네.’ 아마도 이 무렵에 프로이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공감적인 청자’의 역할을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한 정신분석가에게 맡겼던 것이다.
-. 내용(140~142)
① 확실히 가장 많이 쓰여진 주제이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 함직한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간의 심리 발달에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이었다. 프로이트는 자기 내부의 깊은 곳에서 부모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발견.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와 중세의 햄릿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는 견해를 제시.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바로 성인 신경증의 뿌리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여성의 경우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다는것
② 성적인 주제가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깔려 있으며, 방어 기제는 주로 불편하고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주제인 성적인 체험을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③ 유아 성욕 이론을 전개
: 꿈 분석과 자기분석을 통해 그는 어린아이들은 유아기부터 강한 성욕을 갖는다고 확신. 모든 아이들은 성 에너지가 특정한 신체 부위에 집중되는 일련의 리비도 단계(처음에는 입, 그 다음에는 항문, 그리고 배뇨 기관, 마지막으로 생식기)를 거펴 성장. 유아 성욕에 관한 이런 믿음 등으로 인해 프로이트는 사회에서 배척당함
7. 꿈의 해석 : 1900년의 프로이트
-. 기억은 그 자체로는 무의식적이지만, 꿈은 무의식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144)
-. 프로이트의 저서에는 정량적인 특성이 전혀 없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녔는지를 반영. ‘ 나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에는 아무 재능이 없다. 양적인 것에는 아무 소질이 없다.’(145)
-. 꿈의 해석 초판본은 처음 2년 동안 겨우 351권이 팔렸을 뿐
8. 지도자로서의 프로이트 : 조직의 확대
-. 만약 새로운 이론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프로이트는 그 이론을 평가하고 전파하는 지지 세력의 장을 창출해야 했다.
프로이트의 집에서 모임을 가진 수요 심리학회는 여러 면에서 실효성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분명 프로이트가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점(152)
-.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159)
-. 저자의 논의에서 그는 상징적 인물.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킴.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어 냈고, 덕분에 그 분야는 마침내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심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165)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영원한 아이
1. 어린 시절의 수수께끼들
-. 가족들은 아인슈타인이 비교적 늦게 말문을 텄고 말주변이 부족했다고 말함. 말을 잘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흥미가 많았던 프로이트와 달리, 어린 알베르트는 사물의 세계에 호기심이 많았다.(172)
-. 아인슈타인 가족은 유대교 의식에 얽메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사상가’를 자처.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종교를 받아들였고, 꽤 진지한 마음으로 신을 믿고 종교적 가르침을 지켰다.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종교적 성향이 강했다는 점은, 그가 영혼의 진한 갈증을 느꼈으며, 궁극적인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고, 관습적인 지혜에 반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173)
2. 아인슈타인의 ‘객체 중심적인’ 정신
-. 프로이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에 비해, 아인슈타인은 객관 세계와 물리적 힘에 주로 관심을 기울임. 아인슈타인은 사물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프로이트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매료되었던 데 비해, 아인슈타인은 객관적 사물 간의 관계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것(191)
-.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작은 모임에서 어울렸던 친구들도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192)
-. 믿을 만한 친구나 애인들의 이론적 자극이나 비판이 없었다면,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혁신적인 작업을 완수하지는 못했으리라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것(193)
-. 중요한 주제를 골라내는 이러한 능력이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찾으려는 아인슈타인의 노력과 긴밀히 맺어짐. ‘나 같은 사람에게 발달의 전환점이란, 그저 덧없을 뿐인 개인적 관심사를 서서히 뒤로 하고 사물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에 있다.’(194)
-. 논리-수학 지능과 공간 지능이 뛰어났음. 인지적인 측면이 강했던 프로이트와는 크게 대조(195)
-. 마음속에 이같은 공간적 형상을 간직하고 이에 관해 다채롭고도 계발적인 방식으로 사고를 전개시킬 수 있었던 능력은 아인슈타인의 독창적인 과학 사상이 형성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런 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상징체계인것. 훗날 이같은 ‘수수께끼 푸는’ 행위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사고의 중심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함(196)
글이든 말이든 언어의 세계는 나의 사고 기제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은것 같다. 내가 생각을 전개 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한 심적 요소는, 마음속에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서로 결합되곤 하는 특정 기호와 다소 명징한 이미지이다.
-. 그는 단언을 일삼고 자기 주장을 쉽사리 굽히려 들지 않는편이고 권위에 반발하는 기질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원하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198)
3.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온 특별한 해
-. 아인슈타인이 어떤 업적을 이룰지 알 도리가 없던 당대인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여김. 김나지움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고, 처음에는 취리히 공대 입학에 실패했으며, 영향력 있는 스승이나 후원자도 없었다. 교수직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박사 논문을 완성하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특허국의 이름 없는 관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가장 컸던것(202)
-. 바로 이 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의 표준 절차는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후에, 이로부터 원리와 이론을 도출해내는 것. 아인슈타인은 이와 정반대로 결론을 이끌어냄. 그는 높은 추상 수준에서 기본적인 물리 법칙, 가령 광속 일정의 원리를 우선 제기한 후에 이에 근거하여 경험적 현상을 추측하고 그 기본 원리를 다른 법칙과 연결시켰다.(208)
-. 아인슈타인은 기꺼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고자 했는데, 어린 아이의 중요한 정신적 성향이랄 수 있는 이런 특징을 그는 꽤 오랫동안 보유(210)
4.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다 : 두 가지 투쟁
-. 일평생 평화주의를 견지했던 아인슈타인은 연합국이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부치는 편지에 서명. 이는 과학자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중의 하나로 평가됨. 레오 질라드가 초고를 쓴 이 간결한 편지는 미국 정부로 하여금 다량의 우라늄에 핵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면 매우 엄청난 위력의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게함(224)
5. 물리학의 주류를 거부하다
-. 많은 창조적인 인물들이 처음의 근본적인 도약이 함의하는 내용을 탐구하는 다음 10년 동안의 연구를 거쳐,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 결정적인 도약을 감행.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었던 것과 같은 최초의 연구성과(특수 상대론)을 토대로 일반 상대성 이론을 구상한것(229)
6. 직관적 지혜와 성찰적 지혜
-. 어린 시절의 천재란 주로 명민하고 신속하게 직관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reflective wisdom)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함(236)
-. 벌린은 또한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인으로서의 아인슈타인과, 놀랍게도 이방인을 잘 받아들이고 인류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아인슈타인 사이에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고 지적. 하지만 여기에도 그 밑바탕에는 연관성이 존재. 어쩌면 간디를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아인슈타인은 가족과의 관계를 끊다시피 했고, 아들들을 멀리 했으며, 첫 결혼에서 낳은 딸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조차 부인.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세상 전체와 폭넓은 관계를 맺고 그 물리적 본성을 밝혀낼 수 있었던것. 아인슈타인도 스스로 맺은 이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의식(240)
▶ 간주곡1(245~247)
-.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내 논의에 배어 있는 몇 가지 주제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두 사람 모두 위대한 도약의 시기에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론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한 친구에게서 도움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은 소규모의 친구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음. 두 사람 모두 처음의 좌절을 극복하고 끈기 있게 노력. 그리고 자신들의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 프로이트는 금욕적으로 성관계를 단념했고, 아인슈타인은 충만한 가정생활을 일부러 혹은 어쩔 수 없이 포기
-.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점도 있다. 프로이트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분야에 전혀 새로운 사고 방식을 도입한 과학자로서 살아 있는 동안 줄곧 혁신적인 업적을 내놓았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혁명적인 과학자로 출발해서, 이미 바탕이 다져진 분야에 기록
-.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이 유년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은 현대에 대한 이 책의 연구에 적절한 면이 있다. 프로이트는 유아기의 사건을 성년의 감정과 인격을 좌우하는 주된 추진력으로 여김. 아인슈타인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중시해 아이들이 물리학에 대한 직관적인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
-. 깊은 수중에서는 유년기와 연결된 끈이 매우 창조적인 인물들의 생애를 관통한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종종 말했듯 그가 숙고했던 문제들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제기하는 문제들이고 어른들 대부분은 자라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은 문제들. 프로이트가 몰두했던 주제는 어쨌든 아동의 삶을 지배한것. 꿈이나 농담, 성적 놀이와 같은 다양한 현상뿐 아니라 전위와 응축, 대체와 같은 심리 과정이 그렇다는 얘기. 여전히 유년기의 체험과 접촉하는 사람만이 그들이 탐구했던 현상을 파헤칠 수 있을것. 그리고 현대가 개시하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만이 그토록 체계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탐구할 수 있었을것
5. 파블로 피카소-신동과 천재
모차르트와 피카소 두 사람은 모두 유년기에 비범한 예술적 재능을 보였고, 예술가이자 예술 교육가였던 아버지의 지원과 격려를 크게 받았으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지방의 여러 대가들을 능가(250)
1. 신동(251~252)
① 나는 유전적이고 신경 생물학적인 요소가 신동의 출현이라는 현상에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고 생각
② 데이비드 펠드먼이 설명하듯이, 신동이 재능을 보여주어야 하는 영역이란 이미 해당 문화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분야이고 최소한 그 아이의 행동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분야인 것. 만약 문상(文像. graphic) 표현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아이들의 서화가 간단히 무시되고 버려지는 문화권에서라면, 수묵화의 신동은 태어날 수 없을것
③ 신동의 출현은 특정 분야에 대한 어떤 문화권의 관심과 지원 이외에도, 언제나 여러 요인들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현상. 그러니까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
2. 신동 피카소
-. 다중지능이론의 견지에서 보면, 피카소의 조숙함은 시각-공간 영역, 신체-운동 영역, 대인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짐(255)
-. 피카소가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느낀 감정은 매우 양면적.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양가적(261)
3. 파리의 젊은 예술가
-. 피카소는 시인과 작가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들은 피카소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을 보완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270)
-. 젊은 시절의 최대 걸작 ‘인생(La vie)'.271~275
-->청색 시대의 작품
-->카사헤마스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피카소의 노력과 그에 대한 혼란스러운 반응을 나타냄. 좀더 넓게 말하면 이 작품은 죽음, 예를 들면 사랑하는 누이를 잃어버린 일에 대한 피카소의 감정을 드러낸것
-->사랑과 인생, 순결함, 죄악, 소외 그리고 죽음에 관한 느낌을 강렬하게 전달
-. 피카소를 비롯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창조한 대표작들은 개인적 의미가 깊이 담긴 사건과 정서를 보편적인 주제와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성공한것(277)
4. ‘아비뇽의 처녀들’ : 실험적인 양식을 향해서
-. 아폴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형의 예술가. 모차르트가 전자의 전형이라면, 베토벤은 후자의 전형. 신동 피카소는 첫 번재 유형을 대표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아폴리네르는 주장(279)
-.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미술사에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간주(280)
-. 피카소
: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 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287)
5. 입체주의를 낳은 동반자 관계
-.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동작업을 하면서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창안하고 탐구
(289)
-. 아무리 친밀하고 좋은 관계를 맺은 사이라도, 서로 떨어져서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낡은 주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는법. 이 점은 특히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창조적인 인물들한테 꼭 해당되는 이야기
-. 공감적인 평자들은 입체주의 미술이 과학을 예술에 도입한 사조이며 최초의 객관적인 예술이고 대상 사물의 구조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양식이라고 서술
6. 피카소 스스로 걸작으로 인정한 작품 ‘게르니카’
-. 1937년 4월 26일 프랑코 군에 가담한 독일 폭격기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든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짐. 군중 수천 명이 죽음.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마음먹음.(313)
-. 인류의 회화사에서 ‘게르니카’만큼 한 화가의 전모를 드러내는 ‘특징적인’작품은 없을것(313)
-. 게르니카는 미술학도뿐만 아니라 창조성 연구자에게도 한결같은 관심의 대상. 창조자의 내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향에 의존한 작품인 까닭. 게르니카는 민족적 의의와 세계적인 의의를 모두 지닌 작품. 피카소는 모든 갈등, 스페인 내전으로 폭발한 사회적 갈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과 성, 예술 창조에 관한 갈등까지도 화폭에 담아냈다.(321)
-. 피카소
: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白痴이다...... 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거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림은 집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322)
-. 게르니카는 심미적인 최고선의 경지에 오른 작품(322)
7. 노년기에 이른 신동
-. 다른 창조적인 인물 역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피카소와 관련된 사람들이 비참한 운명에 처한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특히 여인들이 그러했다.(328)
-. 비록 우리 모두는 결국 인간으로서 평가받아야 하겠지만, 예술가(혹은 과학자)의 업적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루는 현대의 창조자들 누구도 성인이라 할 수는 없는것(330)
-. 브라크와의 관계는 미술사 전반이나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 매우 효과적이고 끈질긴 공동작업을 통해 서양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다. 브라크와 어떤 관계였든 분명한 것은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한 단계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점(332)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음악가이자 정치가
1. 예술 창조의 정치적 측면
-. 정치라는 외부적인 자극 요소가 없이는 음악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웅변한 실례. 모든 창조자들, 특히 음악가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폭넓은 대중과 더불어 자신이 창조한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주위 동료들 사이에서 적절히 처신해야함(335)
2. 러시아인의 유년기
-. 스트라빈스키는 언제나 음악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338)
-. 어린 스트라빈스키의 청각적 경험은 나침반에 흥미를 느낀 아인슈타인의 기질이나 시각과 촉각에 민감했던 앨리엇의 감수성과 유비 관계를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339)
-. 스트라빈스키는 음악 자체보다는 회화나 연극에 더 흥미를 느낀 아이(339)
3. 중심지의 음악
-.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교육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좌장격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만난일(341)
-. 스트라빈스키와 림스키 크로사코프는 비슷한 교육 철학을 견지했고 엄격한 훈련 방식을 선호했다. 스트라빈스키 왈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 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 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342)
4. 초창기의 성공과 운명적인 만남
-. 디아길레프를 만나 발뤠뤼스 무용단에 동참하기를 부탁받은 일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을 하룻밤 사이에 바꿔놓았다. 이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공연 단체의 귀중한 일원이 된것. 젊은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르프의 활동 모습에서 공동작업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배움. 하나는 마감 시한을 지켜야 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상은 각기 다르면서 고집은 무척이나 센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방법이었다.(348)
-. 불새의 성공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았다(350)
-. 실패의 교훈
: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가라 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있는 법이며, 이들은 본래부터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355)
5. ‘봄의 제전’ : 공연과 그 여파
: 이 작품은 여러 이유로 처음 듣는 청중을 소외시킨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로 결국에는 수용되고 인정받았던것. 물론 변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장場. 실험적인 리듬은 그 자체로 청중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면서 봄의 새 기운을 넌지시 알리는 묘한 느낌을 주었다.(366)
6. 사고와 인격의 성숙
-. 1926년 파도바에서 열린 성 안토니우스 축일 700주년 행사에 참석 했을 때 그는 심원한 종교적 체험에 맞닥뜨렸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그는 청년 시절에 저버렸던 바로 그 종교에 다시 귀의. 흥미롭고 우연한 일치로서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했을 때 엘리엇 역시 영국 성공회에 몸을 담았다.(385)
-. 어쨌든 스트라빈스키는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느꼈고, 이는 평생 동안 그의 내면에 남아 매일매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다. 나는 매일 그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어린 시절에 이미 이 재능은 내가 잠시 보관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386)
7. 마지막 업적
스트라빈스키는 이 책에서 논하는 다른 창조자들보다도 유년기에서 흘러나오는 중요한 어떤 것을 간직할 줄 알았고, 또 만년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열매를 만끽할 수 있었다.(399)
7. T.S. 엘리엇-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1. 엘리엇의 성장배경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근엄한 도학주의자까지는 아니라도, 평생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이었다. 또한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404)
2. 하버드 대학교와의 불화
-. 엘리엇의 하버드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서 시몬스의 <상징주의 문학 운동>을 만난 일(407)
-. 신적인 영감을 느낀, 보스턴 거리에서 겪은 ‘결정화 경험’을 통해 그는 시로써 이렇듯 상반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소외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410)
3. 새로운 삶
-. 1911년 하버드로 되돌아가 철학 박사 과정을 밟기로 결심
: 일종의 유예기 혹은 퇴행기
: 이 때는 엘리엇이 마음속에서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이나 자기 나름의 철학과 표현 방법을 결정하느라 고심하고 갈등하는 시기(412)
-. 그의 박사논문(F.H 브래들리 철학에 있어서 경험과 지식의 대상)주제는 엘리엇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를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한셈(413)
4. 두 시인이 힘을 합치다
훗날 엘리엇은 이렇게 썼다. ‘1914년엘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 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질은 달랐어도 추린 배경이 같았던 두 사람은 급속히 친해졌다.(414)
5. ‘황무지’ : 작시作詩 과정과 배경(429~430)
-.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창조적인 걸작품의 탄생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시를 쓸무렵 엘리엇은 절망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문학계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행운, 가까운 두사람이 작업을 도와주었고 그들이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중대한 혁신을 감행한 창조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엘리엇도 새로운 상징체계 혹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투. 자신의 개인적인 절망과 유럽 문명의 몰락을 담아낼 수 있는 시적 목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힙겹게 노력했다.
6. ‘황무지’에 대한 반응
-. 황무지는 당대의 다른 어느 시작품보다 동시대 교양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분과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냄(434)
-.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435)
-. 엘리엇은 20대 초반에 ‘프루프록’을 썼고, 30대 초반에 ‘황무지’를 썼다. 이번에도 앞서 말한 10년 규칙이 적용됨을 볼 수 있다.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엘리엇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436)
7. 공인으로서의 엘리엇
-. 앞장에서 나는 창조적인 인물들이 자신의 창조력을 잃지 않는 수단으로서(신이나 자기 자신과)모종의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는 성향에 대해 논의했다. 엘리엇은 스트라빈스키처럼 동료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고통을 받았고, 영국 성공회의 충실한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이 숭배하는 신과는 화해롭게 지냈다.(441)
8. 중년의 문학인(443~446)
-.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생각. 오직 국외자만이 총괄적인 평가를 내리는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주장
-. 엘리엇은 시를 정서나 개성의 표출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와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로 여김. 그는 개성과 정서를 소유한 사람만이 거기서 도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만 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서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
-. 나아가 시를 읽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가 개입하면 방해가 될 수 있는 정서적인 체험이라고 주장
-. 엘리엇이 문학 이론에 기여한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일 터이다.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해당 정서를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대상이나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을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훌륭한 시인
-.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내가 계속 놀란 점이 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마치 희귀종 생물처럼 자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을 금방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9. 만년의 엘리엇
-. 엘리엇의 시화 희곡, 문학 비평은 20세기 초반에서 70년대에 이르는 현대 문학계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황무지’는 이 시대의 인장印章과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엘리엇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20세기의 시사詩史는 달라졌을 것이다.(454)
-. 우리가 다루는 현대의 거장들은 모두 여러모로 경계인으로 볼 수 있다.(455)
-. 경계인으로 살았던 엘리엇의 생애는 역설적. 그는 어쩔수 없이 경계인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일부러 경계인의 삶을 선택한것(455)
-. 분명히 엘리엇은 자신이 어떤 공동체의 아웃사이더, 타고난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서 스스로를 일컬어 이방인이라고 자주 불렀다. 그는 일종의 파우스트적인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456)
-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어떤 거장도 기쁜 순간은 거의 없고 잦은 병치레와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았던 엘리엇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456)
-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마침내 비비안과 헤어지고 시인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발레리와 결혼 했을 때 엘리엇은 마음의 평화와 만족감을 얻음. 이와 동시에 문학적 생산 능력은 현저하게 퇴조(457)
▶ 간주곡2
-. 이 책의 연구 관점에서의 몇 가지 연속성 지적(458~459)
첫째,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서 가족이 높이 평가한 예술 장르에서 활약
둘째.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예술적 업적은 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들과 가까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짐
마지막으로, 그들은 창조력인 원천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일종의 협약, 아주 인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고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대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친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법정 싸움의 불씨를 지피는 데 주저치 않았으며, 엘리엇은 프로이트처럼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고 동시에 가학적이라 할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했다.
8. 마사 그레이엄-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1. 세기 전환기, 마사 그레이엄의 미국
-. 마사는 매우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매일 기도하고 의무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주일 학교에 나가야 했다.(470)
-. ‘몸짓은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란다.’ 딸의 잘못에 대한 이런 통찰력 있은 부모의 마음은 나중에까지 커다란 의미로 남았다.(471)
-. 1911년 4월. 로스 세인트 데니스라는 무용가의 공연(471~472)
-->‘그순간 내 운명은 결정.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고 훗날 그녀는 회상
2. 새로운 경력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것이다.’(475)
3. 현대 무용의 애매성
-. 마사 그레이엄과 그녀의 동료들은 현대 무용을 새롭게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적이면서 현대적인 성격을 가진 무용, 에너지와 역동성 그리고 조국, 특히 도시의 사회적 정신을 담아내는 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대 무용은 환상적인 의상과 무대 배경, 전통적인 이야기, 웅장한 합창이나 관현악 반주 대신 현대 생활과 사회적 불의 그리고 남녀관계를 표현했으며, 서사적인 요소는 완전히 없애버렸다.(480)
-. 그레이엄은 어떤 춤을 어떻게 출지에 관해서 미리 정하는 법이 없었다. 무대 배경이나 의상을 언제까지 준비 완료해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연 당일까지 프로그램이 계속 바뀌었다. 완벽주의와 혼란이 나란히 존재. 물론 공연 자체는 대개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덕분에 막이 오르고 내리는 그 순간까지 전체 단원이 엄청난 긴장을 견뎌내야 했다.(482)
4. 현대 무용을 장려한 장場
그레이엄에게 추종자가 생긴 것은 아마도 그녀 스스로 끊임 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알리는 노력을 했기 때문(486)
5. 공동작업 시도
-. 그녀의 삶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오랫동안 데니숀 무용단의 반주자이자 작곡가 및 비공식적인 스승이었던 루이스 호스트가 바로 그 사람. 그는 그레이엄의 후원자이자 공명판 역할을함. 그녀는 이런 호스트에게 자신의 꿈과 의혹을 숨김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고 긴장되는 창조의 순간에 곁에 있는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호스트는 그레이엄의 분신.(487)
6. 1930년대 초반의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
-. 1930년대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미국 원주민 지역을 방문. 피카소가 여름이면 고솔이나 오르타데 산후안과 같은 지역을 방문해서 새로운 기운을 얻었듯이, 그레이엄은 이 지역에서 깊은 감화를 받음-->원시적인 삶과 힘의 에너지를 포착하여 그 정수를 표현(489~490)
7. 미국적 무용을 창조한 시기
-. ‘프론티어’는 6분 30초 분량의 작품. 무용이 무엇이며 무용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걸작(498)
-. 프론티어가 그레이엄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이라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아마도 가장 의미폭이 넓은 작품일 것이며 불후의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일것. 프론티어가 그레이엄이 미국적 주제에 주목한 창조력이 왕성한 시기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그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 두 작품은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거의 모든 창조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예시하고 있다. 처음 10년은 해당 분야의 기예를 익히는 기간이고, 두 번째 10년은 가장 인상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창조하는 기간이며, 세 번째 10년은 또 다른 절정의 작품, 그러니까 앞선 시기의 혁신에 기반을 둔 작품이자 그런 혁신을 좀더 기획하고 포괄적으로 해당 분야 전체에 연결시킨 작품을 창조하는 기간(505)
-. 애팔래치아의 봄은 마사 그레이엄의 작품에서 미국이 얼마나 중요하고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확연히 보여줌. 이 무용극의 장소와 시간 및 배경이 모두 그녀의 삶과 연관(507)
8. 인생의 굴곡과 부침
-. 무용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 신체적.감정적 정수만을 취한 그녀는 미국 무용의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507)
-. 어떤 분야에서든 미국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매우 주목할 만한 일(508)
-. 그녀에게 있어 공연이란 삶 자체였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 하지만 이런 형식의 삶이 요구하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울증, 호스트와 그레이엄의 헤어짐 등(509)
-. 엘리엇이나 피카소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위기 체험은 그레이엄 예술을 손상시키기는 커녕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510)
-. 노트를 기록하고 출판할 때는 이미 나이가 꽤 들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실제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자신이 보이고 싶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것(516)
-. 신체-운동 지능은 자립적인 상징체계를 통한 사유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 실험하고 여러 차례 변형하는 과정에서 그 진가가 드러남(517)
9. 무용가의 삶
-. 그레이엄 무용단의 일원이 되는 것은 힘든 일. 그레이엄은 훌륭한 무용수가 되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린다고 생각(저자가 설명한 창조적 도약에 관한 10년 규칙에 적합)
-. 마사 그레이엄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521)
-->‘나는 무용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무용가로 선택된 것이다.’(524)
-.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그레이엄 역시 내가 다른 창조자들에 관해 설명한 것과 같은 종류의 파우스트적인 계약을 맺었던것 같다. 그녀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특권을 누려야 했다면, 세속적인 즐거움과 친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을 모두 무용의 제단에 바쳐야 했다. 그레이엄 무용단에 관여하는 것은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참여하는 것과 같았다. 그레이엄은 헌신과 대담함이 부족한 사람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았다.(526)
10. 그레이엄의 업적
-. 마사 그레이엄의 오랜 생애는 20세기 전체와 거의 겹침(534)
-. 마사 그레이엄은 이런 단점들(내 용어로 말하면 비동시성)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국적인 용모를 오히려 매력의 중심으로 삼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엄격한 청교도 유산을 때로는 모방하고 때로는 그 토대를 무너뜨리면서 무용의 민감한 주제로 활용. 미국적 풍광과 민주주의 이념, 현대적 생활 리듬이 자아나는 특별한 정취에 주목. 강인하고 재능이 뛰어난 여자들을 중심으로 무용단을 결성. 그 후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남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 모험을 꺼리지 않음.(537~538)
-. 그레이엄과 같은 공연 예술가들은 피카소나 스트라빈스키, 엘리엇과 같은 ‘사람들과 거리를 둔’ 예술가나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와 같은 고립된 과학자보다 오히려 간디와 같은 정치적인 인물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539)
-. 그녀가 맺었던 파우스트적 계약은 개인적인 행복감이나 친밀한 인간관계의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539)
9. 마하트마 간디-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1. 도덕적인 소년 간디
-. 간디의 부모는 다양한 종교적 관행과 믿음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던 예외적인 힌두 교도. 간디 가문의 어른들은 도덕적 기준이 높았다.(544)
-. 아버지가 아들을 가혹하게 혼내는 대신 스스로 상처를 짊어지는 이런 모습은 어린 간디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줌(544)
-.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상징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모한다스는 어린 시절부터 옳고 그름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도 그는 자연스럽게 중재자 역할에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544)
-. 가족의 오랜 친구이던 마브지 다베는 영국에 건너가 법률을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했다. 다브지의 충고를 받아들인 그는 아내와 생존한 첫 사내아이 하리랄을 떠나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게 될 여행길에 나섰다.(547)
2. 선택의 연속
-. 영국행을 결정한 것, 그러니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여러모로 심리적인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이 경험은 인도의 한 지방에 머물러 있을 때에 비해 훨씬 다양한 선택권을 간디에게 열어줌. 유럽에 정착한 엘리엇이나 파리로 간 피카소처럼 간디 역시 먼 타향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음(548)
-.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 간디는 엄청난 독서와 풍부한 산 체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549)
3. 남아프리카에서의 성숙
-. 처음 맡은 소송 건을 훌륭하게 처리. 이 경험을 통해 타협과 중재가 상대의 약점을 끝까지 파고드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짐(551)
-. 나탈에서의 기차 사건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인도인이 2등 시민으로 대접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결심
-->간디의 정치 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마리르버그의 기차역에서 오돌오돌 떨면서 지새운 그날 밤에 있다고 회고(551~552)
-. 처음에는 모든 일이 서툴렀다. 배워야 할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하고 발견해 가면서 능력을 향상시킴. 이 과정에서 간디는 필요할 때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훌륭한 능력을 찾아냄(554)
-. 바나프라스타
-->힌두교에서 바람직한 삶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인생의 네 단계중 3기에 해당. 3기는 산림은둔기로서 이 때는 가정적 의무를 모두 완수한 후에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은거하여 종일 명상에 전념(556)
-. 그는 자기 절제, 즉 브라마차리아 서약을 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소유물을 없애고 가난하게 살면서 성욕을 절제해야 했다. ‘아이를 낳고 돌보는 것은 공적으로 봉사하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 되었다.’고 훗날 그는 회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기지 않고는 영혼의 순수성을 얻을 수 없다고 느꼈을것(557~558)
-->인생행로에 관한 이와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간디는 인도 민중과 신 그리고 자기 자신과 일종의 계약을 맺었던것.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드높은 행위 규범의 모범이 되기 위해 공개적으로 삶의 쾌락을 포기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파우스트적 계약(558)
-. 1909년에 그는 ‘힌두 스와라지’, 즉 ‘인도의 자치’라는 정치 팸플릿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비폭력 저항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주장. 유럽의 세속적 문명이 도래하는 현상을 비판. 금욕적인 삶을 요청(558)
-. ‘사티아그라하’ 실천
-->1906년에 벌써 간디는 동지들에게 법령에 항의하고 불복종할 뿐 아니라 폭력을 자제하고 체포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부당한 법에 저항할 것을 요구. 추종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이 방법을 끝까지 고수(559)
-. 그가 이룬 커다란 성취는 개인적인 차원에 있었다.(560~561)
-->사상적 입장을 정립하고 그것을 삶에서 그대로 실천
-->조직적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스스로 공부하고 배웠으며, 여기서 얻은 교훈을 이후의 활동과정에 적절히 활용
-->간디와 같은 정치적 창조자들에게 있어 창조적인 작업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보다 넒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능력에 있다.
4. 인도의 현지 사정을 알아가기
-. 정치적 유예기간 동안 일부러 3등칸 열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조국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561)
-. 나는 인도 중서부 지역의 아메다바드에서 1918년에 있었던 사건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의 탄생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에릭 에릭슨의 지적에 동의. 간디는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위대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해서 그를 존경하는 조국의 민중들로부터 점차 ‘마하트마’라 불리게 되었다.
-->간디의 중대 사건은 흔히 ‘인도의 맨체스터’라 불린 지역에서 벌어진 노동 쟁의(564)
5. 사티아그라하의 원칙
-. 사상의 기초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톨스토이의 저작.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보다는 의무, 그리고 모든 인간 문제에서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574)
-. 종교와 정치의 분리불가능성을 역설
: ‘인생의 어느 부분도 종교와 떨어질 수 없으며 정치는 거의 모든 점에서 인도의 생명 있는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락 생각하기에, 나는 정치에 참여한다.’(576)
-. 간디라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티아그라하, 그가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아왔던 사티아그라하 실천이었다.(577)
-. 사티아그라하는 두 세력이 그 내부에서 불화와 반목 상태에 놓여 있는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 사티아그라하의 신봉자는 폭력과 고통 혹은 위협을 통해 서로 대결하는 대신, 몸소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상대방의 양식과 양심을 일깨운다. 이를 통해 진리파지자는 상대방을 개심시키고 그들이 자진해서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는것.
간디가 바로 보았듯이, 사티아그라하는 정화의 형식이자 영혼의 일깨움이다. ‘아무리 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진리파지자는 결코 물리적 힘을 쓰지 않았다.’ 간디는 전통적인 대결 방식과 사티아그라하 방식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폭력을 사용해서 정부가 법안을 폐기하도록 강제한다면, 나는 몸의 힘을 사용하는 셈이다.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처벌을 달게 받는다면, 나는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엔 자아의 희생이 수반된다.’(577~578))
-.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의 한계도 지적. 어떤 상황에서도 사티아그라하를 채택할 수는 없는일.(예:폭군).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대단히 정밀하고 효과적인 저항방법을 완성했던 셈이며, 이는 20세기 전반기에 인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거니와, 이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고 확신을 갖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계 공동체에는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580!~581)
-. 사티아그라하를 인간의 위대한 성취로 만든 요소는 그것이 실천적인 철학을 대표한다는 점에 있다.(581)
6. 간디의 개인적인 측면
-. 시대를 막론하고 간디보다 더욱 솔직하게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밝힌 지도자는 거의 없다. 간디는 자신의 모든 글, 특히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진리 실험’에서 정확하고 거짓 없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동기를 성찰했다. 이러한 고백적 글쓰기는 두 가지 효과를 자아냈다. 첫째, 이를 통해 간디는 자신의 역사와 현재 처해 있는 상황, 자기 및 인도 민중 그리고 인류 전체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온전히 자기 내부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글들은 자신의 삶을 주변의 가까운 동료들뿐 아니라 그의 실천적 방법에 관심이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582)
-. 가장 극단적인 극기 형식은 단식(584)
-. 간디는 집회를 조직하고, 공통의 저항 근거를 찾고, 적절한 증거를 신중하게 정리하고,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일하면서 언론의 힘을 적정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585)
-. 간디의 성격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측면은 정치 투쟁을 함께 하는 측근들과의 관계와 가족과의 관계가 날카롭게 대조된다는점.(588~591)
-->간디는 오랫동안 아내와 갈등(아내는 끝까지 문맹으로 남음)
-->맏아들 하리랄과는 매우 불편한 사이. 하리랄은 방탕한 생활 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아버지의 믿음과 실천에 반항. 이는 에릭슨이 가족의 기대치에 관련해서 ‘부정적 정체성’이라고 부른 것의 실례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데 특징이 있는 사람이 이처럼 인간 관계가 불안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간디는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어려워했다. 그는 부모를 존경 했지만, 죄책감 말고는 부모나 다른 직계 가족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간디에게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가장 중요
-->간디가 나누었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과의 대화였다.
7. 민족과 세계의 지도자
-. 소금 행진(593~595)
-->1930년의 이른바 소금 행진은 인도 독립운동의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순한 살의 간디가 행진을 이끔
-->소금 행진에 담긴 상징성은 인도인과 전세계에 퍼져 있는 동조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돼 있었다.
-. 런던 회의(601)
-->실패로 끝나고 인도로 돌아가는 와중 간디는 두 가지 사실을 새삼 깨달음. 하나는 영국이 도덕성이나 자비심으로 자발적으로 인도를 포기할 일은 결코 없고, 오직 인도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여러 파벌들, 특히 이슬람교 세력과 힌두 세력이 쉽사리 서로의 차이점을 묻어버릴 거라고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점
-. 촌락 생활로의 귀환(603)
-->간디의 새로운 이상은 공동체의 통합, 불가촉 천민 제도의 제거, 충분한 카디(손으로 짠 직물 생산), 기본적인 아동 교육 시설, 성인 교육 활성화 등으로 특징
8. 만년의 간디 : 인간과 전설
-. 하지만 간디는 끝내 폭력을 멈출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광신적인 힌두교 신자인 나투람 비나약 고드세가 일흔아홉 살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권총을 쏘았다. 간디는 군중이 모여 있던 기도 장소로 나가던 중에 고드세의 총을 맞고 사망(605)
-. 창조의 거장을 다루는 내 관점에서 보아도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탁월한 호소력을 발휘했던 사람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과는 그처럼 어렵게 지냈고, 이 마지막 사례(만년의 간디가 나체의 젊은 여자를 곁에 두고 잠을 자겠다고 고집)에서 보듯 자신의 강압적인 행태와 이기적인 동기에 그처럼 둔감했다는 사실은 매우 이채롭다.(606)
-. 많은 인도인들은 한결같이 간디를 존경했지만, 그의 원칙은 오히려 미국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나 영국의 그린함 공조 행동 그리고 중국의 학생 저항 운동에 더욱 잘 적용(607)
-. 간디는 창조의 거장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608~609)
-->여러모로 아이다운 천진성을 지닌 그는 단순하면서도 혁명적인 사상을 지녔다.
-->아메다바드에서의 파업과 단식 과정에서 겪은 여러 경험들이 창조적인 도약의 핵심
▶ 간주곡3(610~615)
-.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 마하트마 간디
-. 그레이엄은 기본적으로 공연가(performer)
-. 간디와 그레이엄은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육체로서 창조 활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 결론적으로 말해 둘 점은 다음과 같다. 간디를 제외한 여섯 명의 창조자들은 문화 분야의 정상에 올라 그 분야를 쇄신한 인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들 창조자 가운데 오직 간디만이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 속한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한 분야를 쇄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인간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간디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제3부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1. 구성적 틀-재론(620)
개인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 분석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우선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발휘한 창조성과 연관하여 각 인물의 유년기를 검토한다는 점, 생애 전반에 걸쳐 창조적인 능력이 발달하는 국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획기적인 업적을 내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 나는 모든 창조적인 활동에는 역동적인 면이 있다고 가정했다. 재능 있는 개인과 전문 분야, 그리고 창조물의 질을 판단하는 장場사이에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관계가 그것
2. 전형적인 창조자의 초상(622~625)
나는 이들 창조자의 생애를 검토하면서 공통의 주제를 발견 했으며, 이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E.C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될 전형적인 창조자(Exemplary Creator)
① 자신의 생물학적인 가족에는 다소 소원함을 느낌. 오히려 유모나 보모 혹은 다소 먼 친척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경향
② 가족은 교육 수준이 높지는 않아도 배움과 성취를 높이 평가해서 이런 방면에 대해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가큼(전형적인 부르지아 집안)
③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재능을 보이고 가족은 안정된 직업인이 될 수 없다는 우려를 하면서도 이런 관심을 고무함
④ 집안에는 도덕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어서 엄격한 양심의 소유자로 자람
⑤ 한 때는 종교를 거부했다가도 훗날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음
⑥ 이미 10년 이상 어느 분야를 완전히 통달하기 위해 노력한 상태이고 그 분야에서 거의 최전선에 와 있음
⑦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한 중심 도시로 과감하게 이주
⑧ 대도시에서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젊은 동료들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만나게됨
⑨ 관심이 가는 문제 영역을 발견하게 되고 동료들과 고립되어 홀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 이 중대한 순간에 E.C는 인지적.정서적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않음
⑩ 혁신적 작품 완성 과정에서 나오는 흐름(몰입의 경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으려함
⑪ 엄청난 에너지와 헌신적인 노력이 있다면, 그는 첫 번째 혁신을 이룬 지 10년쯤 후에 두 번째 혁신을 이룰 기회를 맞게됨
⑫ 자신의 창조성을 유지하려고 노력. 경계인의 위치를 찾거나 비동시성의 긴장도를 높이는 방안을 찾음
⑬ 나이가 들면 창조력도 한계에 부딪침. 존경받는 비평가나 주석자가됨.
3. 주요 쟁점-재론
-. 개인적 층위(626~640)
① 인지적 관점
이 연구에서 나는 분명 인지적 관점에 기울어져 있었다. 주된 가정은 창조적인 인물들의 지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p627 도표 참고)
② 성격과 동기부여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제로 자신감과 기민함, 관습에 얽메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사교 생활이나 취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창조성의 현저한 특징은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의 결합에 있다. 아이다운 특성이 순진함과 참신함으로 나타나면 긍정적인 색채. 반대로 이기심과 보복심리로 나타나면 부정적인 색채를 띠게됨
③ 사회-심리적 측면
모두가 조건 없이 따뜻하고 친밀한 애정을 충분히 받지는 못했음. 업적과 성취에 기반한 조건 있는 사랑을 받았을뿐. 아마도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이야말로 자신의 전부라고 느끼는 성향이 짙어졌을것
경계인이라는 위치를 창조 활동의 지렛대로 삼음
④ 인생 패턴 : 창조성의 10년 규칙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었다.(p640 표 10.1 참고)
4. 비동시성 평가(653~654)
-. ‘창조성의 삼각형’을 도입한 기본 목적은 재능 있는 개인과 그 개인이 활동하는 분야, 그리고 권위자로 이루어진 장場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탐구하는데 있었다.
-. 우리 현대 사회는 신동이 자동적으로 창조적인 성인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 창조적인 인물의 특징적인 모습은 창조성의 삼각형에서 어떤 부조화, 혹은 부드러운 연결의 결여를 장점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5. 새로 발견한 주제(두 가지)
첫째, 도약의 시기에 얻는 인지적.정서적인 도움(660~661)
무조건적인 지지로 격려하는 정서적인 차원. 혁신적인 도약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관해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인지적인 차원이 있어야함
둘째, 파우스트적 거래와 창조적인 삶(663)
파우스트 전설이란 창조적인 인물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점에서 특별나지만 그런 재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모종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통념의 가장 유명한 판본일 뿐이다.
6. 남은 문제들(665~668 참고)
☞ 합당한 인물을 선택했는가?
☞ 적절한 분야를 선택했는가?
☞ 지나치게 인지적인 측면에 주목했는가?
☞ 정말로 창조성에 주목했는가?
☞ 이 연구의 결론은 현대에 한정된 결론인가?
■ 옮긴이의 글
이 책에서 역자가 가장 공감한 대목 가운데 하나는 창조성은 단지 한 개인의 탁월한 재능만으로 실현되거나 발휘될 수는 없고, “오직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 그리고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