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 조회 수 302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들어가는 글
? 지능이 다원적이라면 창조성은 한층 더 다원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6).
<제 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장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엘리엇, 그레이엄 그리고 간디의 창조적인 도약을 이해할 수 있으면 분명 인간의 창조 행위에 담긴 여러 가지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35).
? 나는 또한 그들의 창조적 업적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이해하면 “현대”를 해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20세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근본적인 사상들이 탄생한 시기이며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관점에서 보면 빠르게 퇴색하는 시기이다 (35~6).
이 책의 목표
? 첫째, 나는 대체로 188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 사회과학자로서 이 과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 책은 창조성의 유형을 찾는 형식을 취한다. 즉, 이들 간의 유사점과 교육상 의미 있는 차이점을 규명할 생각이다 (36).
? 두 번째 목표는 창조적인 행위 (기획)의 본질에 관해 대략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 분야에 상관없이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어하는 법칙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37).
? 마지막 목표는… 내가 “현대 (the modern era)”라고 부르는 시대에 관해서도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37).
?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고유한 천재들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을 체화하고 있었다 (38).
구성적 주제
? 분석틀은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다. 창조적인 인물, 창조적인 행위의 대상이나 작업 (일), 그리고 창조적인 인물의 세계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38).
동시대인들에 관한 연구
? 중요한 것은 이들의 (천재들의) 창조 여정과 작품을 정확히 조사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47).
? 뿐만 아니라, 각각의 획기적인 업적을 엄밀하게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흐른 시대를 골라야 했다 (47~8).
현대
?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격동기를 거친 후에 문화는 정체하고 사회 전반에 보수주의가 팽배한 시대 (19세기)가 뒤따랐다고 한다 (51).
? 세기가 바뀔 무렵에 19세기의 기본 교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급속히 그리고 연이어 일어났다 (51).
? 많은 문화사가들이 1890년에서 1920년에 이르는 시기의 빈을 주목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만약 현대적인 감수성의 탄생지가 한 군데 있다면, 그것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이 퇴조해 가는 빈이라고 말해야 가장 타당할 것이다 (52~3).
?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서유럽과 동유럽에 만연한 것은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제도의 퇴조와 공통 지식의 소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는 불온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고 때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무모한 창조적 열정이었다 (53).
? 일단 전통과 관습이 특정한 예술 및 과학 분야에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면,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전통과 관습이 도전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54).
n 하나는 새로운 회화가 존재할 수 있다면 새로운 무용이나 시 혹은 정치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고
n 다른 하나는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 관습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 모든 혁명적 시대의 특징으로서 그 도전의 성격은 별개의 문제이다 (55).
n 그렇다. 도덕적으로 느슨해지거나 더 엄격해지거나에 상관없이 모든 혁명적 시기는 어쨌든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고 있다. 순환이던 반복이던…
?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1900년 무렵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 시기로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55).
2장: 창조성의 연구 방법
창조성 연구와 지능 연구
? ‘지능 지수 (Intelligence Quotient)’라는 개념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널리 적용되고 있었다. 우연히도 내가 정의하는 ‘현대’의 탄생 시기와도 겹친다 (58).
? 길포드가 생각한 창조성의 핵심 개념은 발산적 사고 (divergent thinking)였다. 표준적인 지능 검사에 의해 똑똑하다고 인정된 사람들은 주어진 자료나 문제에 대해 항상 올바른 (어쨌든 상투적인) 대응법을 생각해낸다. 반면,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자극을 받거나 문제를 보면 아주 다양한 연상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매우 유별나고 엉뚱하기까지 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59).
성격과 동기부여의 관점
? ‘창조적인 건축가들’은 그들보다 창조성이 부족한 동료들에 비해 독립성과 자신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기민함, 기꺼이 무의식에 내맡기는 성향, 야망,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의 성격적 특색이 훨씬 풍부했다 (65).
? 일반적으로 인간 행동의 성적 동기를 강조한 프로이트는 창조적인 삶을 뒷받침하는 성적 요인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적인 인물은 리비도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승화시켜 글쓰기나 그림, 작곡, 혹은 과학 탐구와 같은 ‘2차적인’ 목적을 추구한다 (66).
n 탄트라 밀교와 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 프로이트는 놀고 있는 아이와 백일몽을 꿈꾸는 성인,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가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66).
? “창조적인 작가는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67).
n 왜냐하면 그 환상의 세계가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앞에 가로막혀 볼 수 없는 진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아마빌라 (Teresa Amabile)는 고전적인 심리학의 설명과는 반대로 사람들이 외적인 보상을 노릴 때보다 순수한 즐거움만으로 행동을 할 때 창조적인 해법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68).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서 몰입 상태 (flow state) 혹은 몰입 경험 (flow experience)이라는 감정 상태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내재적으로 동기화된 경험 (Intrinsically motivating experience)에서 자신이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고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 상태는 어떤 활동 분야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몰입’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반성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69).
구성적 틀
? 창조적인 인물은 유년기의 통찰과 감정, 그리고 경험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면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다 (78).
?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몰두했더라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79).
? 창조적인 도약을 이룬 인물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탐구자이며 혁신가이고 사색가인 경우가 많다 (80).
? 공공연히 권위에 도전하든 그렇지 않든 미래의 혁신가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자세가 되어 있다 (80).
? 하지만 창조적인 사람이라면 한층 더 본질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 … 이 때가 바로 창조자의 용기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다 (81).
? 창조적인 인물이란 어떤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작품을 창조하고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을 말한다 (83~4).
n 나는 어떤 한 사람이 모든 분야가 아니라 어떤 특정 분야에서만 창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n 나는 창조적인 인물이 정규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n 창조성은 문제 풀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작이나 새로운 질문의 고안도 포함될 수 있다.
n 창조적인 행위는 특정한 문화에서 받아들여질 때에만 제대로 인식된다. 여기서 시간상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 발견한 주제
? 대체로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98).
<제 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장: 지그문트 프로이트 ?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1856~1939)
첫 제자들
? 수요 심리학회 (Wednesday Psychological Society)라는 모임은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05).
? 수요 심리학의 정수에서 빈 정신분석학회가 태동했고, 여기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 (IPA: International Psychoanalytic Association)가 탄생한 것이다 (105).
프로이트의 다재다능함
? “당시만 해도 의사라는 직업이나 의사가 하는 일에 특별히 마음이 끌렸던 것은 아니다… 나는 탐욕이라 해도 좋은 지적 욕구에 이끌렸을 뿐이다 (108).”
? 그는 성경, 고대의 고전, 독일어나 영어로 출판된 셰익스피어 작품,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레싱, 괴테, 실러 등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를 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고, 세르반테스를 원어로 읽이 위해 스페인어를 배웠다. 미술과 연극을 좋아해서 자주 전시회나 극장에 들렀고, 자신이 본 작품을 날카롭게 비평했다. 잠시 철학의 유혹에 빠져 어느 모임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그는 주요 철학자들을 읽고 존 스튜어트 밀을 독일어로 번역했으며 심리학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빈 대학교의 명망있는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의 강의를 3년간 듣기도 했다. 물론 과학 분야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아서 당시 가장 중요한 과학자였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저서뿐만 아니라 다윈의 저서도 탐독했다 (109).
? 상상력이 풍부해서 무대와 인물, 제도를 꾸며내거나 시적인 공상으로 비약할 줄도 알았다. 여러 언어로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극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109).
? 자신이 얻은 지식을 종합하려고 애썼다 (109).
? 편지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상을 주는 부분은 결점투성이인 인간 세계에 강한 매혹을 느끼고 이를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이해했다는 점이다 (110).
? 이 당시의 편지를 읽어 보면 프로이트가 스스로 세워놓은 야심적인 목표에 강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중요한 성취를 이루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 그런 성취를 이룰 것인가였다 (110).
? <탈무드>의 저자들만큼이나 인생의 모든 빈틈 (Cranny)에 대해 그 원인과 이유를 지치지 않고 따져 물었다 (111).
샤르코와 정신의학에의 길
? 이곳에서 그는 신경즈의 다양한 증상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히스테리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115).
? 프로이트는 이러한 환자들이 최면 상태에서 행한 경험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무의식의 강력한 작용에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16).
?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용어를 빌면, 프로이트의 20대는 일종의 ‘심리사회적 유예기간 (psychosocial moratorium)’ 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과 생활방식을 시도했었다. 그런데 이제 프로이트는 앞으로의 학문 인생을 전부 걸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117).
? “정신분석학이 발전하면서 그와 맺은 우정을 잃어야 했다. 그런 대가를 치르는 일이 내게는 쉽지 않았지만,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120).”
? 프로이트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었다. … 하지만 빈에서도 다른 어디에서도 프로이트의 말을 귀기울여 들은 사람은 없었다. 대개는 무시당했고, “어리석고 말도 안되는 억측이며, 비합리적인, 증명되지도 않고 증명할 수 도 없는” 주장이라는 모진 비난을 들었다 (122).”
? 한 때는 세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던 프로이트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걷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122).
고독 그리고 친밀한 친구들
? 인생의 보다 이른 시기에 프로이트에겐 항상 가슴 속의 생각과 두려움, 야심에 대해 털어놓을 가까운 사람들이 한 두 명 있었다 (122).
? … 학문적이고 정서적인 유대감을 한 사람과 맺기를 더 좋아했다. 브로이어는 젊은 프로이트에게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둘의 관계는 프로이트에게 특히 중요했으며, 사이가 멀어졌을 때 프로이트는 심한 고통을 겪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은 형국이었는데, 그런 후에 남은 것은 텅 빈 공허감이었다 (123).
? 다행히도 빌헬름 플리스가 1890년대의 중요한 시기에 이 빈 자리를 채웠다 (123).
? 돌이켜보면 플리스 역시 1890년대를 통틀어 프로이트에게 두 가지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124).
n 한편으로 그는 거의 매일 프로이트를 격려하며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던 이론에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했다.
n 두 번째로 그는 학문적 주제와 직접 상관이 있든 없든, 프로이트가 가장 마음 편히 느끼면서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 프로이트가 친밀한 우정과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몹시도 갈망하던 이 중년 초기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 인간적인 한계가 왔다는 신호를 뚜렷하게 느꼈고, 경제적인 형편 역시 어려웠는데 환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자랑거리가 될 만한 교수직도 점점 멀어져 갔다. 아버지는 앓아 누웠다가 1896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로이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 그는 몸과 마음이 심하게 불안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 니코틴 중독, 만성적인 위장 장애에 시달렸다 (125).
? 프로이트는 고독감과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이해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 (125).
? 이런 시기를 살아가는 것은 분명 진이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로 프로이트는 신경쇠약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1913년에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나는 고독의 극에 도달해 있었다. 옛 친구는 모두 잃었고 새 친구는 아직 생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오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꿈의 해석> 집필을 막 시작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시기를 살아내고 견뎌내서 나는 긍지와 행복감을 느꼈다” (127).
? <정신분석학 운동의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외로웠던 시절, 요즘과 같은 압박감이나 분망한 일이 없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영웅시대’처럼 느껴진다. 나의 ‘찬란한 고립’d는 분명 장점도 있었고 매력도 있었다 (127).”
프로이트가 창조적 도약을 이루기 직전의 심리학 분야와 장
? 의학과 심리학은 전문 잡지나 전문가 조직, 과학적 실험을 통해 공적으로 인증된 분야였다. 프로이트가 흥미를 느낀 분야는 그렇지 않았다. 꿈과 무의식, 그리고 마음을 탐구하는데 있어서는 확고하게 정리된 연구 방식이나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색적인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이나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다 (128).
프로이트 혁명의 주요 개념
? 1897년 무렵 프로이트는 진지한 마음으로 자기분석을 시작했는데, 이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탐구 작업이었을 것이다 (137).
? 프로이트는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네.” 아마도 이 무렵에 프로이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공감적인 청자 (sympathetic listener)’의 역할을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한 정신 분석가에게 맡겼던 것이다 (139).
?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프수 신화와 중세의 햄릿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바로 성인 신경증의 뿌리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성의 경우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140).
? 이제 프로이트는 꿈 분석을 통해 성적인 주제가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깔려 있으며, 방어 기제는 주로 불편하고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주제인 성적인 체험을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140).
? 유아 성욕에 관한 이런 믿음 등으로 인해 프로이트는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142).
꿈의 해석: 1900년의 프로이트
?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이 그의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저서임을 알고 있었다 (143).
? 프로이트 스스로 걸작이라고 여긴 <꿈의 해석>이 출간되었을 때, 세상은 과연 그의 발견이 지닌 잠재력을 인식할 수 있었던가? ….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꿈의 해석> 초판본은 처음 2년 동안 겨우 351권이 팔렸을 뿐이며, 곧 절판되었다 (148).
빈의 배경
? “…빈에서만큼 교양과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에 대해 그처럼 적대적인 무관심을 단호하게 보인 도시는 없다” 사실 프로이트가 빈에 대한 혐오감을 공언하고 다닌 것이 바로 빈 사람들의 기질을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150).
? 반면 프로이트가 표면상으로는 훨씬 관용적인 영국에서 살았더라면, 성을 다룬 저서를 출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151).
지도자로서의 프로이트: 조직의 확대
? 1900년대 초반 정신분석학 운동을 태동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성격의 일면을 드러냈다 (152).
? … 프로이트라는 재능 있는 개인은 혁명적인 사유 체계를 구상했지만, 이러한 사유는 심리학 및 정신 의학 분야에서 기존의 지배적인 교의와는 충돌을 일으켰다. 만약 새로운 이론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프로이트는 그 이론을 평가하고 전파하는 지지 세력의 장을 창출해야 했다 (152).
? 프로이트의 집에서 모임을 가진 수요 심리학회는 여러 면에서 실효성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분명 프로이트가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 점이었다 (152).
? 이제 그는 하나의 이론 체계를 구축했고 거기에 정신 분석학이라는 명칭을 붙여놓은 상태였다. 그는 이 집단의 의심할 바 없는 지도자였다. 자신의 집안뿐만 아니라 한 학파의 권위자가 된 것이다 (153).
?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학의 이론과 실천 양면을 대표했다 (153).
? 중년에 접어들면서 프로이트의 삶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 정치적 거래판에 들어가 교수식을 얻을 수 있었다. 무려 17년 동안 기다린 일이었다 (153).
? 변하지 않은 것은 프로이트의 왕성한 생산력이었다 (153).
?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학의 위대한 주창자였다. …. 별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각양각색의 청중 앞에서 역사와 예술, 당대의 독서물, 최근의 사건, 현재 강연을 듣고 있는 청주의 관심사 등에서 적절한 예를 자유롭게 끌어들이면서 친밀하고도 사려 깊은 태도로 폭이 넓은 강연을 할 수 있었다 (154).
? 사색적인 많은 젊은이들이 설득력이 점차 높아지는 프로이트의 간단한 요약문이나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에 매료되어 정신분석학에 이끌렸다 (154).
? 초기의 개종자 (추종자) 가운데 프로이트보다 19살 어린 스위스의 정신 의학자 칼 융은 논란의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155).
? 처음에 프로이트는 개방적이고 누구든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 하지만 결국 프로이트는 인간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충성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156).
? 아들러나 융 등의 제자들과는 분열이 비교적 일찍 찾아왔고 서로 간에 불편한 감정이 가득했다. 랑크와 페렌치 등은 오랫동안 학파의 일원으로 남았지만 결국 고통스럽게 헤어졌다. 정신분석학 운동과 카리스마적이지만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그 창시자 곁에 끝까지 남은 추종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156).
? 처음 이탈자가 생긴 무렵에 쓴 <토템과 터부 (1912~2)>에서 프러이트는 금기시되는 인물이나 물건을 에워싸고 있는 특별한 힘, 원초적인 군거집단 내부에 팽배해지는 부친 살해 충동, 살아남은 형제들 간에 지배권과 뤈력으 ㄹ놓고 벌어지는 투쟁에 관해 논의한다. 외부인들에게는 우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프로이트 학파 내에서 보면 그것은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157).
? <문명 속의 불만 (1930)>, <환상의 미래 (1927)>와 같은 중요한 저서에서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주제가 더욱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157).
? 이러한 갈등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갈등과 긴장 때문에 20세기의 처음 10년은 정신 분석학이 눈에 띄게 성장하면서 서구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시기였다. 1908년에 수요 심리학회를 모태로 하여 빈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했는데, 이를 모델로 한 모임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157).
? 1910년 드디어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둔 국제 정신분석학협회가 탄생했다. … 운동의 성공에는 분명히 프로이트의 개인적인 지도력이 큰 역할을 했다 (158).
? 추종자는 늘지 않고 제자들이 이탈하거나 자살하는 상황에서도 프로이튼느 젊은 시절 브로이어나 플리스와 맺었던 교우 관계가 결렬될 때만큼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 오랫동안 홀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켰다는 점인데, 이런 혹독한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다른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않는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159).
? 프로이트는 확실히 지치지 않고 일을 하는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매 순간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면서 자신에게서 나태한 구석이 보이면 스스로를 매섭게 다그쳤다 (160).
? <토템과 터부>에서 처음 소개한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정신분석학을 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관심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프로이트는 집단 심리와 종교, 정치, 전쟁, 공격성 그리고 책의 제목으로 쓰인 ‘문명 속의 불만’에 관한 내용을 몇몇 중요하고 논쟁적인 저서에서 다루었다 (160).
?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는 창조적인 인물에 관해 연구하면서 ‘10년 규칙’을 발견했다. 즉 창조적인 인물은 한 분야에서 10년 정도 종사한 후에 혁신적인 도약을 이루어내며, 이후에는 다양한 요인에 따라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161).
? <꿈의 해석>은 그가 샤르코의 임상교실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한 거의 정확히 10년 만에 탄생한 업적이다. 물을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창조성은 이후 수십 년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발휘되었다 (161).
? 프로이트는 1910년 무렵에 사회적 문제로 관심사를 확대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정치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161).
? 프로이트는 세계 수준에 걸맞는 인정과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1930년 뛰어난 독일어권 작가에 수여되는 권위 있는 ‘괴테 상’을 받을 일이 프로이트에겐 가장 의미가 컸다 (162).
? 프로이트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 날까지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 암으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고향을 잃은 상황에서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는 의연했다 (162).
?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트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에서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165).
4장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영원한 아이
? 어린 아인슈타인의 창조성을 나타내는 징후는 또 있었다. 그는 아주 까다로운 물음을 제기해 놓고 그것에 대해 골몰하곤 했다 (168).
?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놓고 그 해답에 대해 골몰하는 이런 성향은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누군가 우주론적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조언을 청해오면, 신이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겠느냐는 괴상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168).
n 괴상한 질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깨닫았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수수께끼들
? 아마 그런 질문들은 어린 아이들이 언제가 궁금해하는 문제일 것이다. 물론 어른들이 ‘입을 틀어막는’경우가 별로 없는 아이들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이다 (169).
?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고 유형과 아이들의 일반적인 사고 유형이 유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69).
? 또 한 명의 존경스러운 물리학자 라바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 (171).”
? 어린 알베르트는 사물의 세계에 호기심이 많았다 (172).
? 알베르트는 드러내놓고 비사교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일찍부터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곤 했다 (172).
? 아인슈타인은 이 책들을 기쁜 마음으로, 열광적으로, 철저하게, 그러면서도 비판적으로 탐독했다 (174).
? 철학과 과학 저서를 읽게 되면서, 어린 시절 종교에 심취했던 마음은 거의 사라졌다 (174).
? “ 그 학교는 나한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자유로운 정신이 가득했고,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교사들도 권위적인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175).”
분야의 전문 지식 익히기
?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지리학과 금융 시장, 스위스 정치, 인류학, 지질학, 괴테의 작품 등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주류 과학 강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177).
? 아인슈타인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쓰인 이 개론서를 통해 앞으로 그가 지속적으로 파헤치게 될 관심사를 찾아냈던 것이다 (178).
? 자기 자신의 사고 실험과 정규 교육을 통해, 그리고 푀플 같은 저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앞으로 숙고하게 될 일련의 문제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179).
과학적 배경: 갈릴레오에서 로렌츠까지
? 앞에서 지적했듯이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발견에 매료되었고, 그 발견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하나의 “계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맥스웰의 성과는 아인슈타인이 읽었던 다른 어떤 것보다 그의 관심에 부합했는데, 아마도 혼자 놀던 어린 시절부터 마음 속으로 공상했던 한 줄기 빛을 던져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곧바로 그는 푀플의 간접적인 설명을 건너 띄고 맥스웰과 헤르츠, 키르히호프 등 대가들의 저서를 직접 읽기 시작했다 (185).
아인슈타인의 ‘객체 중심적인’ 정신
? 어린 시절부터 .. 아인슈타인은 객관 세계와 물리적 힘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아인슈타인은 객관적 사물 간의 관계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1).
? 올림피아 성원들은 체계적인 독서 계획을 세워 철학 (밀, 흄, 스피노자), 수학 (리만, 푸앵카레) 및 과학 저서 (칼 피어슨, 에른스트 마흐)를 읽어나갔다 (192).
?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 둘 다 자신들이 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확고하게 알고 있었고, 누구라도 그들이 가는 방향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3).
? 아인슈타인은 고독한 처지를 일부러 구하진 않았으나, 프로이트와 달리 고독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의 결혼 생활이 두 번 모두 실패로 끝났고 두 아들과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던 이유는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한 갈망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론적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시골에서 고독하게 살았으며, 단조롭고 조용한 삶이야말로 창조적인 정신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아인슈타인은 회고한다 (193).
? 아인슈타인은 남다른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몇 시간, 심지어 몇 일 동안이나 중단 없이 같은 문제를 숙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 중에는 수십 년 동안 마음 속에 담아 둔 것도 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음악을 듣거나 요트를 타곤 했지만 이런 순간에도 사색은 중단하지 않았다 (194).
? “나 같은 사람에게 발달의 전환점이란, 그저 덧없을 뿐인 개인적 관심사를 서서히 뒤로 하고 사물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에 있다 (194).”
? 아인슈타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숙한 사고를 할 때까지는 발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신동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일찍부터 과학자로서의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보인 건 사실이다 (195).
? “나 자신과 나의 사고 방법에 관해 살펴보노라면, 공상하는 재능이 실증적인 지식을 흡수하는 재능보다 나한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96).”
? 실제로 그의 혁신적인 업적은 공간적 이미지와 수학 공식, 경험 현상 그리고 기본적인 철학 주제를 통합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
? 권위에 반발하는 기질을 타고 난 아인슈타인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윗사람들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8).
?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원하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편집광다운 열정이 있는 과학자만이 과학적 발견을 할 수 있다고 친구인 베소에게 토로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런 과학자는 그 자신의 말을 빌면 ‘지위 상승이나 노리는 기회주의자’에 대적해야 하고…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198).
? 분명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프로이트와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포부가 크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대담한 용기를 지녔고 기꺼이 홀로 일어서고자 했으며 논쟁을 반기기까지 했다 (199).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온 특별한 해
? 아직 20대 초반이던 1665년과 1666년에 걸쳐 아이작 뉴턴은 캠브리지 대학을 떠나 울스소프의 조용한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이 곳에서 그는 완전히 홀로 사색하면서 미적분학을 발전시켰고, 빛과 색채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통찰했으며, 중력 법칙을 발견하는 도정에 들어섰다 (200).
? 나중에 뉴턴은 “당시에 나는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나이였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 수학과 철학에 전념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존경하고 뉴턴의 사진을 자기 침대 위 벽에 걸어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200).
? 20세기 초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논문 모두가 주옥 같은 성과를 이룬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중 몇 편은 쓸모 없는 논문이라고 아인슈타인 스스로가 공언했을 정도이다 (202).
? 아인슈타인의 도약은 물리학적 분석의 여러 요소를 통합하려고 했고 낡은 사례와 원리를 좀 더 광범위한 이론틀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인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우리가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혁명적이다. 더 이상 절대성을 갖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은 이제 세상의 색깔이나 그림자의 길이와 마찬가지로 관점이나 의식과 분리될 수 없는 직관 형식이 되었다 (211).
상대성 이론: 즉각적인 운명
? 1909년이 되자 그는 10년 전에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취리히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제네바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고, 비록 10년 후에나 노벨상을 받게 되지만 벌서 1912년에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아인슈타인은 빠른 시간 내에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말해야 한다 (213).
? 하지만 상대성 이론의 발견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고 아인슈타인의 사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내 용어로 말하면, 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새로운 발견에 저항한 셈이었다 (214).
? 이러한 사례는 새로운 혁명과 과학 사상이 기성 세대, 즉 장의 권위자들에게 수용되는 일은 드물다는 토마스 쿤의 주장에도 부합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수용되려면 입장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216).
? 중요한 이론가들이 침묵했던 반면, 실험가들은 아인슈타인의 작업에 금방 흥미를 보였다 (216).
?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반응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 독일과 독일어권 나라에서는 활발하게 논의되었는데, 논문이 독일어로 쓰여진 탓도 있었겠지만 과학 제도와 기관이 훨씬 민주적이고 유연한 풍토였기 때문일 것이다 (217).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다: 두 가지 투쟁
? 그는 대략 40대 후반 이후인 남은 반생 동안, 시간을 내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을 힘겹게 물리치면서 자기만의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220).
?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낙천적인 아이 (아이들이란 자기 행동을 규율 하려는 사회의 관습이나 기성 세대의 잔소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220).
?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가장 기여한 요인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수행된 중요한 실험 결과에 대한 전 세계적인 반응이었다 (221).
? “이전에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사라져도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역시 물질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지요 (222).”
n 불교의 ‘공’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첫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는 1913년 말에 독일로 되돌아온 이후부터 국제적인 정치 환경에 휘말려 들어갔다 (223).
?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부치는 편지에 서명을 했는데, 이는 과학자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224).
? 이미 과학사에 등재된 아인슈타인이 이번에는 세계 정치사에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과학자로서 얻은 명성은 이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결과적으로 냉전 구조를 고착시켰던 무기를 개발하는데 촉매 역할을 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224).
? “우주는 독립적인 물질이 독립적인 시공간에서 자리 잡고 있는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주는 무정형의 연속체로서 고정된 구조를 갖지 않고,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형된다 (227~8).”
n 이 역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불교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물리학의 주류를 거부하다
?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10년 동안 전문 지식을 익힌 아인슈타인은 아직 젊은 나이에 결정적인 도약을 이루어 물리학의 연구 방향을 쇄신했다. 많은 창조적인 인물들이 처음의 근본적인 도약이 함의하는 내용을 탐구하는 다음 10년 동안의 연구를 거쳐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 결정적인 도약을 감행했다 (229).
?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과학이란 가장 작은 세계에서도 질서를 가져야 했다 (230).
? 아인슈타인은 그의 작업이 다른 많은 동료들의 작업과 점점 더 분리되는 상황에 틀림없이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상대성 이론의 시대에는 그의 업적에 낯간지러운 찬사가 쏟아진 반면, 양자 역학의 시대에는 고통스러운 침묵만을 대면해야 했던 대조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기도 조금은 힘들었을 것이다 (231).
직관적 지혜와 성찰적 지혜
? 마흔 살 이후에도 자연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 (231)
? 나이가 들면 연구 시간을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이제 세계적인 명사로 인정받기에 참으로 혁명적인 업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찬란한 고립’의 시기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232).
?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그들을 능가하고 다음 10년 동안 여기서 한층 더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참신한 생각은 젊음의 특권이요, 일단 지나가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재능이다 (233).
? 젊음과 원숙함이 훌륭하게 결합한 아인슈타인의 지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우선 그는 세상의 흥미로운 현상에 대한 관심을 평생 잃지 않았다 (233).
?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보다 전반적인 사색가로서 끊임없이 성숙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시대에서 언제나 독특한 위치에 설 수 있었는데, 단지 뛰어난 과학자로서만 아니라 (과학에 대해서 뿐 아니라 과학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도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원숙하고 성찰적인 인간으로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천재란 주로 명민하고 신속하게 직관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한다 (235~6).
? 사실 아인슈타인은 만년의 30년 동안 오히려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문제에 상당한 정력과 재능을 쏟았다 (236).
? 그는 기탄 없이 말했다.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이다 (236).”
? 그는 우주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과 우주의 근본적인 합리성과 질서, 조화를 강조했다 (237).
?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열정적일 만큼 관심이 많은데 비해, 이와는 이상하리 만치 대조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직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협동 작업에는 익숙치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보상이 있었는데, 나는 관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변덕스러운 토대에 내 정신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240).
간주곡 1
? 두 사람은 모두 탁월한 학자이며 사상가로서 평생 동안 지식 탐구에 몰두했다 (242).
?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탐구에서 보는 것은 이론 체계의 구축이다 (243).
? 어떤 점에서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둘 다 하나의 이론 체계 혹은 학파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무방하다 (245).
? 두 사람 모두 위대한 도약의 시기에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론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다 (245).
? 두 사람 모두 처음의 좌절을 극복하고 끈기 있게 노력했는데 어쩌면 자신들을 둘러싼 논란에 다소 즐거움을 느낀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245).
? 깊은 수준에서는 유년기와 연결된 끈이 매우 창조적인 인물들의 생애를 관통한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다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