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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1일 20시 39분 등록

성웅 이순신에 대해서

이순신은 덕수이씨 12대 손이다.
그의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중엽 고종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 선조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1218년 거란의 침입 때 출정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고 한다. 4대조 때 조선왕조의 개칭을 맞이하면서 문반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 조선시대에 105명의 문과급제자와 정승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후세에 이순신과 그의 아들 면 . 훈 . 신, 조카 완 등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아산 배암골에 정려를 세웠는데, 이를 덕수이씨 가문에서는 ‘5세 7충 2효’라 부르고 있다. 덕수이씨 문중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같은 유명한 문인도 있다. 율곡은 13대 손으로 촌수로 따지면 이순신과 19촌 정도가 되며, 두 집안 사이에 교류는 없었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이때가 인종이 왕위에 올라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이어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무오년,갑자년,기묘년의 잔혹한 사회가 이 시대의 중앙정치무대를 휩쓸고 지나간 후로
개혁파와 수구파, 훈구와 사림의 반목은 점차 심화되어 적대관계로 부딪치고 있었다.뛰어난 학자 군주인 인종대왕이 등극한 지 8개월째에 붕어하자 그의 죽음이 결코 병사일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하서 김인후. 약원의 처방전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자고 요구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고 거절당하자, 인종의 죽음에는 반드시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믿고, 뛰어난 군왕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패악한 정치에 몸담을 수 없다며 많은 뜻있는 학자들이 정계를 떠나갔고. 인종의 이복 아우 명종이 등극하고 그의 생모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무서운 독재가 진행되고, 을사사화가 발발해 어진 학자나 선비 벼슬아치들이 온통 살육의 화란에 빠져있었다. 이 대 김종직, 조광조 문하는 모두 도륙되었고 살아남은자는 산천에 유랑하였다고 한다.
이런 혼란한 을사사화가 일어난 시기에 이순신이 태어났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순신의 아버지 정마저 벼슬생활을 하기 어렵게 되어, 가난한 유년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소년 시절에 주거를 충남 아산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생활고로 인해서 주거를 옮긴것으로 보여진다. 이순신의 나이 32살인 병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권관(종필품)으로 부임했다. 최초의 공직생활은 유국 초급 장교로서 야전에서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순신은 28세때에 무과 별과시험에 낙방했는데 당시에 말에서 떨어져서 발목뼈를 다쳤는데도 끝까지 무과시험을 치뤘다고 하니 그의 끈기있는 무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진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 되었을 때 발포진의 수군 만호로 부임했다. 최초로 수군의 초급 지휘관이 되었다. 발포진은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에 위치해 있으며 판옥전선 2척과,사후선2척이 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술년(1586년) 그의 나이 마흔 둘의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쿠슈의 시마즈 일가를 타도함으로써 일본의 모든 무력과 영지가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집중되었다. 경인년(1590년)에 그는 정읍 현감(종육품)에 임명되었으며그로부터 8개월 뒤인 1590년 7월에 명마 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이유로 승진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인사 파행은 조정 대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당쟁의 여파가 얼마나 조정 깊숙히 불신으로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묘년(1590년) 그의 나이 마흔일곱 2월에 전라좌수사(정삼품)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여수 좌수영에 부임하였으며,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역 사령관이 되었다. 이순신은 부임한 후 많은 배를 새로 만들었고 또 거북선을 건조하였으므로 임진년 개전 때의 좌수영 수군 무력은 이보다 훨신 더 강력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해에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의 기미를 감지하고 있었다. 대마도주가 일본 정권 핵심부의 조선 정벌 계획을 조선 조정에 전했으나, 당파적인 입장에서만 해석되어 일본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탁상공론에 빠져 있었으니 참 답답한 정치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임진년(1592년) 그의 나이 마흔 여덟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 전함 7백여 척이 부산포에 내습했고 6만여 명의 병력이 잇달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부산이 먼저 함락되었고 동래성이 무너졌다. 조선군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급기야 임근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향했다. 5월 2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정유년(1579년) 그의 나이 쉰셋에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간신들의 모략과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된 이순신은 죽음을 목전에 두는 상황에 이르르게 되었다. 그 해 7월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되었다.

7월 23일 조정은 상중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해 9월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나, 10월에 아들 이면을 충남아산에서 잃게 되었다.

무술년(1598년) 그의 나이 쉰넷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11월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뒤에 알려졌다.


내가 저자라면

이순신의 영정을보면 단정하고 온화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임진왜란때 혁혁한 성과를 이뤄낸 위대한 영웅으로써의 강인한 모습은 그의 얼굴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듯 하다. 아마도 그는 그의 내면에 엄격함과 강임함 그리고 삼엄함을 품고 있는 듯 하다. 경남대학교 박물관 소장은 이순신의 문장은 수사를 배제한다고 하며, 곰곰히 매일매일의 적과 아군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고 하니 그의 철저함과 행동지향적인 무인다운 글쓰기를 맛보는 듯 하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앞에 두고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하기까지(1592. 1. 1~1598. 11. 17), 진중에서 있었던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난중일기》는 두 가지의 전적이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진중에서 친필로 기록한 초고본으로서 7책 205장이 전해지며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는 것인데 4권(권5~권7)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를 두고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198년이 지난 1798년(정조19년)에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의 편의상 이름이 붙여진 데에서 연유한다.

나는 그 어떤 전기보다 뛰어난 문체로서 난중일기를 바라보게 된다.
그의 글쓰기에는 수사가 없어서 명료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얼마나 정밀하고 세심하게 현실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런 그였기에 원균의 패전이후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전열을 가다듬고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리라.

그의 글에는 피와 칼맛이 섞여 있다.
하나는 조국과 혈육에 대한 애정과 그리고 왜적에 대한 적의로서의 피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진실 그리고 외부의 적에 대한 적의의 칼맛이 그것이다.

그에겐 말이 필요없다. 현실이 바로 도화지 이기때문이다.
그렇기에 글 하나하나에 현실과 감정을 진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의 글은 행동이자 성찰이다. 그 어떤 말도 수식어처럼 가벼워진다.

글을 읽어나가는 매 순간 난 바위를 만나게 되고, 매서운 칼맛을 느껴보게 되기도 하고, 조국과 가족을 사랑하는 인간애를 느껴보게 된다.그리고 어떤 외부적 환경요인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성찰과 믿음이 이 글에 새겨져 있다.그런 글이기에 그냥 바라보게 될 뿐이다. 뜯어서 새기는 것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의 시대적 상황과 그런 큰 업적을 이뤄낸 당당한 이순신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임진년 1월 (1592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13일]<임술>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설을 세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마사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여러가지 물건을 바치러 가지고 왔다.

1월 초2일 [양력 2월 14일]<계해> 맑다.
나라의 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김인보(金仁甫)와 함께 이야기했다.

1월 16일 [양력 2월 28일]<정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와 색리(고을의 아전) 등이 인사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을 맡은 군관들과 색리들이 그들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지방 병마사영이나 수영에 첨사아래에 있는 무관)․가수(假守: 임시 직원)도 역시 점검하지 않아 이 지경에까지 된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공무를 어줍짢게 여기고, 제 몸만 살찌러 들며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 날의 일을 알만하다. 성밑에 사는 박몽세(朴夢世)는 석수인데 선생원 돌 뜨는 곳에 가서 해를 끼치고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1월 17일 [양력 2월 29일]<무인> 맑다.
춥기가 한 겨울 같다. 아침에 순찰사와 남원의 반자(아전의 별칭)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녁에 쇠사슬 박을 구멍낸 돌을 실어오는 일로 배 네척을 선생원으로 보냈다. 김효성(金孝誠)이 거느리고 갔다.


1월 24일 [양력 3월 7일]<을유> 맑다.

맏형 희신(羲臣)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답장을 보니, 고부군수 이숭고(李崇古)를 유임시켜 달라는 장계를 올린 것 때문에 물의를 일으켜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임진년 2월 (1592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14일]<임진>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가랑비가 잠간 뿌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선창(여수시 연등동 입구)으로 나가 쓸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방천안에 몽어 떼가 밀려 들어 왔기로, 그물을 쳐서 이천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쾌했다. 그 길로 전선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우후 이몽구(李夢龜)와 함께 새 봄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6일]<갑오>
맑다. 새벽에 우후가 각 포구의 부정사실을 조사하는 일로 배타고 나갔다. 공무를 마친 뒤 활을 쏘았다. 탐라 사람이 자녀 여섯 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쳐나와 금오도(여천군 남면)에 머물다가 방답 경비선에 잡혔다고 심부름꾼을 보냈기로 문초를 하고서 승평(순천)으로 압송하고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에 화대석 네 개를 실어 올렸다.

2월 초4일 [양력 3월 17일]<을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북쪽 봉우리의 연대(신호대)쌓는 곳에 오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 무너질 염려가 없으매 이봉수(李鳳壽)의 애썼음을 알겠다. 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에야 내려와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2월 초8일 [양력 3월 21일]<기해>
맑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 날 거북함에 쓸 돛베 스무아홉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는데, 조이립(趙而立)과 변존서(卞存緖)가 자웅을 다투다가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 방답첨사가 방비에 온 정성을 다하더라고 매우 칭찬했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23일]<신축>
안개비, 개었다가 흐렸다가 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김인문(金仁問)이 순찰사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중원(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기까지 했을 뿐아니라 중원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는가 의심하게까지 했으니, 그 흉칙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통역관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2월 12일 [양력 3월 25일]<계묘>
맑고 바람도 자다.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서 해운대 (여수시 동북쪽에 있는 작은 섬)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침렵치(沈獵雉)라는 운자(韻字)를 띄워 봤더니 너무 조용했다. 나중에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趙而立)이 시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2월 19일 [양력 4월 1일]<경술>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왔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저물어서야 이목구미(여천군 화양면 이목리)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이르니 영주(고흥)현감(裵興立)과 여도 권관(黃玉千)이 마중했다. 방비를 검열하는데 흥양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다고 먼저 갔다.

2월 20일 [양력 4월 2일]<신해>
맑다. 아침에 모든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웬간히 완비되었다. 늦게야 떠나서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의 꽃과 들가의 봄풀이 한폭의 그림 같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

2월 21일 [양력 4월 3일]<임자>
맑다. 공무를 본 뒤에 주인(감영과 고을의 연락을 취하는 營邸吏)이 자리를 베풀어 활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丁傑)도 와서 보고 능성현 감 황숙도(黃叔度)도 와서 함께 술취했다. 배수립(裵秀立)도 나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신홍헌(申弘憲)으로 하여금 술을 걸러 지난날에 심부름하던 삼반하인(軍奴․使令․及唱 등)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했다.

2월 22일 [양력 4월 4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본 뒤에 녹도로 갔다. 황숙도(黃叔度)도 같이 갔다. 먼저 흥양 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집기류을 몸소 점검했다. 그 길로 녹도로 가서 곧장 봉우리 위에 새로 쌓은 문다락으로 올라가 보니, 경치의 아름다움이 이 근방에서는 으뜸이다. 만호의 애쓴 흔적이 손닿지 않은 곳이 없다. 흥양현감(裵興立)과 능성현감 황숙도(黃叔度) 및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봤다. 촛불을 밝혀 이슥해서야 헤어졌다.


임진년 3월 (1592년 3월)
3월 초5일 [양력 4월 16일]<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녁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의 편지와 "증손전 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책을 보니 수 전․육전․화공전 등 모든 싸움의 전술을 낱낱이 설명했는데, 참 으로 만고의 훌륭한 책이다.

3월 초6일 [양력 4월 17일]<병인>
맑다. 아침밥을 먹고난 뒤 출근하여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갑옷․ 투구․전통․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진 것이 많아 색리․궁장․감 고 등을 문책했다.

3월 14일 [양력 4월 25일]<갑술>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순찰사(李洸)를 만나러 순천으로 가는데, 비가 몹시 퍼부어서 길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서 다시 해농창평(순천시 해룡면)에 이르니, 길 바닥에 물이 석 자나 괴었다. 겨우 겨우 순천부에 이르렀다. 저녁에 순찰사와 격조를 터 놓고 이야기했다.

3월 20일 [양력 5월 1일]<경진>
비가 몹시 쏟아지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각 관방의 회계를 밝혔다. 순천 관내를 수색하는 일이 제 날짜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대 장․색리․도훈도 등을 문책했다. 사도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 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또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외나로도(고흥군 봉래면)와 대평두․소평두 섬을 다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엉터리 거 짓이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일로 흥양과 사도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3월 23일 [양력 5월 4일]<계미>
아침에 흐리고 저녁나절에는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보성에서 올 널빤 지가 아직 안 들여 왔기 때문에 색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어 독 촉했다. 순천에서 심부름꾼을 보내 온 소국진(蘇國進)에게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순찰사가 편지를 보내었는데 보니, "발포권관은 군사를 거느릴 만한 재목이 못 되기로 갈아 치워야 하겠다"고 하 므로 아직 갈지 말고 그대로 유임하여 방비에 종사하게 해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3월 24일 [양력 5월 5일]<갑신>
나라제삿날(世宗 昭憲王后 沈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우후 가 수색하고 탈없이 돌아왔다. 순찰사와 도사(都事)의 답장을 송 희립(宋希立)이 아울러 가져왔다.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에 `대마도주(종의지)가 공문을 보냈는데, 벌 써 대마도 배 한 척을 귀국(조선)에 보냈는데, 만일 도착하지 않 았다면 풍랑에 깨졌을 것이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가 만 무하며, 말을 이렇게 거짓으로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임진년 4월 (1592년 4월)

4월 초3일 [양력 5월 13일]<임진> 맑다.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4월 12일 [양력 5월 22일]<신축>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함의 지자․현자 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 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 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4월 26일 [양력 6월 5일]<을묘>
<장계에서> 이 달 20일 성첩한 좌부승지(민준)의 서장이 왔다.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내었는데, 다만 군사상 진퇴하는 것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시행하여야만 그르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나가는 섬 사이에 적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 본 뒤에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지만,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되는 바,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 길 따름이다. 본도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는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개의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 관찰사 이광(李洸)․방어사 곽영(郭嶸)․병마절도사 최원(崔 遠) 등에게도 분부한 사연을 낱낱이 알렸으며,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겸관찰사 김수․우수사 원균(元均) 등에게는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처에 모이기로 약속하는 내용과 더불어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해 있는 곳과 그 밖의 대책 에 응할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급히 회답해 달라."고 통고 하고 각 관포에도 "전쟁 기구와 여러 가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돌렸다.

4월 27일 [양력 6월 6일]<병진>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이 새벽 네 시쯤 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져 왔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 (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을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품도 거의 없어졌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척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 어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 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므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 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서 빨리 출전하려고 하는 바, 경상도 순변사(이일)․겸관찰사(김수)․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올렸다.

5월 1일 [양력 6월 10일]<경신>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이 날은 흐리되 비는 오지 않고 마파람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흥양 현감(배흥립)․녹도만호 정운(鄭運) 등을 불러 들이니, 모두 분격 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만 하다.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다.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 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 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첩입된 지역을 왕래․연락하는 배) 세 척 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왔다. 창평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을 와서 바쳤다. 저녁에 군호를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을 수산(水山)이라 하였다.


임진년 5월 (1592년 5월)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다.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 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 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첩입된 지역을 왕래․연락하는 배) 세 척 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왔다. 창평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을 와서 바쳤다. 저녁에 군호를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을 수산(水山)이라 하였다.


임진년 8월 (1592년 8월)

8월 28일 [양력 10월 3일]<을묘> 맑다.
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 날짜는 알수 없으나, 8월 28일 이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삼가 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전일 승평에서 받들었던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것이었습니다. 줄이고. 일본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비록 추운 겨울이 되어도 날씨 는 늘 따뜻한데, 지금까지 흉한 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땅에 머물 러 있어도 풍속에 익숙되지는 않습니다. 한 겨울이 되면, 추위로 지내기 괴로우며, 가난할 뿐 아니라, 군량은 이미 다 떨어지고, 용기와 힘도 다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난 왕실이 바로 이 때인데 한해가 새해로 바뀌었어도 아직 적을 없앴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 다. 한 구석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 다행이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옮기는 것 모두 이 전라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해를 다 없애어 국권을 회복하 는 것도 이 도(전라도)의 계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라도 감사가 다시 임금에게 충성하러 부임했고, 절도사는 오 랫동안 남의 땅(경상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예하게 여거 하는데, 군기․군량은 이가운데서 다하여 돌아가고, 진과 보(鎭堡) 에 이르러 방어군사를 정하는 것 또한 각각 반으로 나누어 뽑아 거느렸습니다. 그런데 장수는 늙어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아울러 들이닥쳐 반 이상은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비록 혹 흩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손 해도, 굶주림과 추위가 이미 극에 달하여 죽음이 잇달았습니다. 큰 고을이면 300여 명, 힘차고 왕성한 사람을 조급히 가리어 채우기를 강요하며 독려하니, 한 도가 소동하였습 니다. 더구나 소모사(召募使)가 내려와서 남아있는 군사를 징발하니, 각 진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읍의 초병도 뽑아 그 수를 채우는 데, 한 도가 소동한 것은 알지 못하는 바, 이 도의 보전도 어려워 꼭 길에서 통곡하였습니다. 지난 9월에 유지에, 각 고을의 떠돌이 군사일지도 일족 가까이 있는 자에게는 일체의 세금을 면제하라고 하신 정녕한 서신이 있었거늘, 백성을 풀어 비상한 고난을 견줄데 없이 급하였던 것입니다. 큰 적(왜적)이 각 도에 가득차, 아무 죄없는 백성은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독한 해를 입었습니다. 종사(宗社)와 도성(都城)도 보전할 수 없었고, 말과 생 각이 이에 미치어 고통이란 불타서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달 10명의 군사가 방비하는 고을에 부임하니, 한번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다음 달 방비에 들어가는 사 람이 겨우 서너 명인데, 어제는 10 명의 유방군이 오늘은 너댓 명 미만이니, 몇 달 가지 않아서 바닷가의 진(鎭)은 하나같이 텅 비어 진(鎭)의 지휘관은 홀로 빈 성을 지키게 되니, 어떻게 알지 못하 겠습니다. 만약 옛 전례를 다른다면, 임금의 분부를 어기게 되고, 옛 명령을 따르면, 적을 방어하는데, 계책이 없으니, 이 두 가지 중 편리한대로 밤낮으로 생각하여 보고했더니, 관찰사의 공문에 일족 의 대충징발하는 폐단이 백성을 심하게 병들게 합니다. 정녕 명령을 내리신다면, 이른바 명령을 이행할 틈이 없거니와, 그 보고 내용 또한 일거리가 있으니, 백성을 어루만지고, 적을 방어하는데에 둘 다 그 편리한 일을 얻는 것이라 답하여 왔습니다. 각 고을에는 죽은 자가 자손이 모두 끊어지면, 도목장(都目狀)에서 빼버리라고 공문을 내 보냈습니다. 대개 본도(전라도)는 나누어 방비할 군사가 경상도의 예와는 같지 않으며, 좌․우 수영에는 320여 명이고, 각 진포에는 혹 200 혹 150여 명씩 나누어 방비하였거늘, 그중에서 멀리 도망갔거나 죽은자가 오래 되었다. 아직 본래대로 정하지 않은 자 는 10에 7~8이며, 현재 나타나 있는 사람을 거두어 주는 것도 모두 늙고 쇠잔하여 방비업무에 알맞지 않습니다. 힘이 부득이 하면 물론 일족에게 숫자만 채우려 입방할지라도 탈이 났다고 소송하는 자가 많고, 아직 방비에 도착하지 않은 자는 혹 이름을 대어 힘을 합하는 가운데 이것 저것 엇갈리게 한다면, 끝내 점고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사이의 질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 방비하는 일이 무척 급하고 예나 다름없이 병에 걸려 방어하는 것은 줄이기 때 문에, 전례를 따라 재촉하고 분발하면, 하나는 배의 사부를 채우게 되고, 하나는 성을 지키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5번 출동에 적을 맞아 14번이나 싸워 이겼던 것은 이미 8달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국방이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은 중앙에까지 곧 미치게 됩니다. 이 것은 실로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계책은 먼저 옛 전례를 따라 변방을 방어해야 하겠습니다. 차츰 차츰 조사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급한 일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호남에 달려 있는 것은, 마치 제(齊)나라의(山東省 地方의) 거현( 縣)이나 즉묵현(卽墨縣)과 같이 항복하지 않다가 공격해온 연(燕)나라를 파하고 국토를 회복하였던 것)처럼 (곧 전 쟁이 끝나지 않고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은 몸을 온전히 하는 것과 같으니, 몹쓸 병있는 자가 겨우 한쪽 다리의 구 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허다하게 군사와 말을 지경밖으로 쓸어내 버렸습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汝松)이 수십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개성․서울 세 곳의 도적을 토멸했으며,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와 남김없이 소탕해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 9월 (1592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5일]<정사>
<장계에서> 닭이 울자 출항했다. 낮 여덟 시에 몰운대를 지날 무렵 샛바람이 갑자기 일고파도가 크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대선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아홉 척, 절영도에 이르러서는 왜대선 두 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스 락을 의지하여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삼도의 수사가 거느 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丁傑)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깨어 부수고, 배 안에 만재한 왜놈의 물건과 전쟁 기구도 끌어내 지 못하게 하여 모두 불태웠으나, 왜놈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 보며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머리를 베지는 못했다. 그리고 절영도 안팎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 로 즉시 소선을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적선을 자세히 탐망 케 하였더니, "대개 오백 여 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의 언덕아래 줄지어 대었으며, 선봉 왜대선 네 척이 초량 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고 하므로 원균(元均) 및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우리 군 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 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고 말하고 독전기 를 휘두르며 진격했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鄭運)․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중위장 순천부사 권준(權俊)․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 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적도들이 헤엄쳐 뭍으로 오르므로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 때를 이용하여 승리한 깃발을 올리고 북 을 치면서 "장사진"으로 돌진했다. 이 때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오 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사백일흔 여 척이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 고 있으므로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산위․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갖고 거의 다 산으 로 올라 여섯 곳에 나누어 머물며 내려다 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 처럼, 우레 처럼 쏘는 것이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 가 모과만 하며, 혹 수마석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주발덩이 만 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 어 돌진하면서, 천자․지자 총통에다 장군전․피령전․장전과 편 전․철환 등을 일시에 일제히 쏘며, 하루종일 교전하니 적의 기 세는 크게 꺾이었다. 그래서 적선 백 여 척을 삼도의 여러 장수 들이 힘을 모아 쳐부순 뒤에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으로써 토굴 속에 끌려 들어간 놈은 그 스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배를 쳐부 수는 것이 급하여 머리를 벨 수는 없었다. 여러 전선의 용사들 을 뽑아 뭍으로 내려서 모조리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무릇 성 안 팎의 예닐곱 곳에 진치고 있는 왜적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 고 용맹을 보이는 놈도 많은지라, 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가벼 이 뭍으로 내리게 한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 아니며, 날도 저 물었는데,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환 란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를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그런데, 양산과 김해에 정박한 왜선이 혹은 말하기를 "점차 본도 로 돌아간다"고 한다마는, 몇달 이내로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스스로 알고 모두 부산으로 모이는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 산성 안의 관사는 모두 철거하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이미 소굴을 만든 것이 백 여 호 이상이나 되며, 성 밖의 동서쪽 산기 스락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도 거의 삼백 여 호이며, 이것 이 모두 왜놈들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중의 큰 집은 층계와 희게 단장한 벽이 마치 불당(절간)과도 비슷한 바, 그 소행을 따 져보면 매우 분통하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6일]<무오>

<장계에서> 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을 불태우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부수려고 하였는데,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널리 가득차 있으므로 그들의 귀로를 차단한다면, 궁지에 빠진 도적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해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풍랑이 거슬러 전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많이 있으므로 전선을 수리하면서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고 또 육전에서크게 물러나오는 날을 기다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하여야 하기 때문에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14일]<병인>
<장계에서> 원균(元均)은 그 뒤 적선이 많이 온다고 잘못 듣고서 포위한 적을 풀고 가버렸기 때문에 뭍으로 올라간 왜인들이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하 는 바,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 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다. 이 내용을 갖추어서 장계하였다.


임진년 10월 (1592년 10월)

10월 30일 [양력 12월 3일]<병진>
<편지에서> 아래 의주에서 보내온 글은 꿈도 아닌 정이 아닌가. 펴 보기를 두번 세번 한 것은, 종이에 간절한 정이 가득하기에, 실상 나의 친구 위서(渭瑞)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알지는 못하나, 요사이 노장의 건강은 어떠하오. 멀리서 호소하여 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용졸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여 오랑캐가 두 번 움직이니, 이에 이 전쟁사이에 근심 한 자 뿐인데, 다행히 별장 최균․강 두분의 힘을 입어 크게 웅천의 도적을 이기고, 또 바다에 뜬 두목을 잡았다. 어찌 마음이 크게 패한 것이 아니겠는 가. 그러나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수레를 서울 에 돌아 오시게 하는 것 뿐이다. 남은 것은 군무가 어지럽고 매 우 바쁘므로 다 갖추지 못한다.

임진년 12월 (1592년 12월)

12월 초10일 [양력 1593년 1월 12일]<병신>
<장계에서> 흉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 있고, 오직 이 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다소 보완하여 한 나 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하는데, 지난 육․칠월 사이에 육 만의 군마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서 잃어버리고, 병 마사가 거느렸던 사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 어서 얼고 주려서 다 없어졌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며 다섯 의병장도 서로 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하게 되므로 이 뒤부터는 온 지방의 소동이 공사간의 재물을 다 없애고,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은 있다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 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다. 더구나 소모사가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을 분별하지 않은 채, 소집할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므로, 각 고을 에서는 그 수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을 많이 빼내어 갈 뿐 아니라, 체찰사의 종사관이 각 고을을 분담․검색 하여 남아있는 장정을 재촉하여 징발하고, 변방의 진포에 있는 군기를 또한 많이 다른 곳으로 실어가며,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또 따라 일어나서 내시의 종을 남김없이 뽑아 내는데, 소모 관이 방금 내려와서 번갈아 수색하는 일이 거의 쉬는 날이 없으 므로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바라는 바, 실망이 커서 한 모퉁이 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태만 남아 있다. 지난해 분부한 서장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 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하라"고 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 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 한 명은 무던 히 평시의 백 명에 적합한 것인데, 한번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꾀를 품기 때문에 지난 달에는 열 명이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서너 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열 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 너댓 명 안이 므로 몇 달 내에 수자리를 지키는 일이 날로 비어 진포의 장수들 이 속수무책일 것인 바,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함에 무엇을 힘입어 제어할 것이며, 성을 지켜 항전함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만일 전례를 지켜 책임 수량을 채운다면 분부를 어기게 될 것이며, 분 부를 준수한다면 수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두가 지 중에 편한 방법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의견을 체찰사에 게 보고하였던 바, 회답 공문에,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이므로 임금의 분부대로 단연히 준수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고한 의견도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양편이 다 좋은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고을 관원들에게 "사람이 죽고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도목장에서 뽑아 없애 버리도록 하 라."고 통고했다.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 치는 실례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 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않고,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 이 많아야 삼백스무 여 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백쉰 여 명도 차지 못하는 데,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않은 자가 십중팔구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 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므로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고 배를 운행하는데, 아무런 조처 가 없을 것이므로 지극히 민망할 뿐 아니라, 이번에 도착된 것으 로 비변사에서 분부를 받고서 보내온 공문 내용에, " 근래에 와 서 적을 토멸하는 데는 해전을 당할만한 것이 없으니, 전선의 수 를 넉넉하게 더 만들도록 하라."고 한 바,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 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서 백서른 여 명의 군사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서 더욱 민망하니, 위의 '친족에게 징 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 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 려 생각하고, 우선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한 명령을 중지 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야겠다. 수군으로 방비에 임하는 수가 저같이 너무 적은데, 방비 임무에 결석하여 죄를 지은 무리들이 혹은 소모군에 붙으며, 혹은 다투 어 의병으로 붙어서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는 바, 지금 같이 봄철 의 방비가 매우 급한 때에 방어하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항 뜻은 없으므로 일체 다른 곳으로 옮 기지 말도록 각별히 널리 백성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해야겠다. 겨울 석 달 동안에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은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전적으로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이거니와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않데다가 또 사색 군졸마 자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다. 해상으로 출전한 여가 에 전선을 보수하고 병비를 조련하는 일들이 전혀 수졸들의 책임 이므로 사색 제방군 등을 육군과 함께 방위 임무에서 면제하지 말고 남김없이 방위에 임하도록 각 진포에 아울러 검칙하였으며, 순찰사에게도 공문을 보내었음을 갖추어 아뢰었다.

3월 초2일 [양력 4월 3일]<정사> 온 종일 비왔다.
배의 봉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이응화(李應華)를 불러다가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순천의 배로 보내어 병세를 살펴 보게 했다고 한다. 이영남(李英男)․이여염이 와서 원균 영감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더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이영남이 왜놈의 작은 칼을 두고 갔다. 그 때 이영남에게서 들었는데, 강진의 두 사람이 살아 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가 문초를 받고 왔다고 했다.

3월 22일 [양력 4월 23일]<정축> 맑다.
(**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계사년 3월 22일 이후 별도의 장부터 적혀 있다.) 예하에 내릴 공문. 이제 섬오랑캐의 변고(變故)는 오랜 옛적부터 아직 들은 바 없고, 역사에도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영남의 바다와 여러 성은 그 위세를 보기만 하고서도 달아나 무너졌으며, 각 진(鎭)의 크고 작은 장수들은 한결같이 움츠리고 물러서 산골에 쥐죽은 듯이 숨어 버렸습니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가 버리어 연이어 삼경(三京)을 함락하였습니다. 종사(宗社) 약속하는 일. 오랜 옛적부터 아직 들은 바 없는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의 나라에 차례로 미치었습니다. 가까운 경계구역까지 오면 다하여 도와 주었다. 영남 바다의 여러 성에는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달아나 무너지니, 석권할 힘을 주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 가고, 백성은 고기밥이 되고,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니, 종사는 버려지고 오직 나는 삼도수군은 있는 힘과 의리를 다 내고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은 이 없을지라도, 기회가 마땅치 않고, 아직 뜻을 펴지 못하여 지금은 다행히 명나라 조정이 천하 대장군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여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왜적을 멀리 쫓아내어 삼도(三都)를 회복하였다고 하는 바, 신하된 자는 기뻐 날뛰고 너무 기뻐서 말할 바를 모르고, 또 죽을 곳도 알지 못했습니다. 위에서는 연이어 선전관을 파견하여 죽여라고 임금이 명령했으니, 숨은 도적들을 한 척도 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정녕 하교(下敎)하신지 5일이 되었다고 하거늘 정정 당당하게 충성을 다하고 몸을 잊어서라도 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무는 사람이 많이 있어 너무도 통분하였습니다. 곧 마땅히 규율에 따라 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또 삼군에 내린 명령이 있을 뿐 아니라, 다시 효력이 있도록 지시하고, 또 군사의 일이라 한들 그 죄를 용서해 주고 적발하지 않거든 속사정을 들어 낱낱이 시키는대로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9월 초1일 밤 2시에 출항하여 몰운대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먼저 그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와, 다대포 앞바다로 돌아가 대었습니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더불어 서로 약속하고서 절영도 남쪽 바다에 이르러 부산을 바라보니, 좌우 산기스락에 적선이 무수하게 줄지어 대어 있을 뿐 아니라 좌우의 산중턱과 성안에 초가를 지어 흙을 쌓고 담 쌓는 것이 가득 하거늘 저는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본도(전라도)로 달려 들어 왔더니, 우수사는 본도 우수사와 경상우수사와 더불어 말하기를, '신의 뒤를 이어서 서로 어긋남없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천자․지자 각 총통을 연방 쏘아대어 왜적선 50여 척을 깨뜨렸는데, 날이 또 막 어두워졌습니 다. 더위가 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이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낮이나 밤이나 사모하 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가뭄이 더욱 심하고, 강 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우고 힘을 더해주니, 신령과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습니다. 의분을 품어도 할 말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을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사정은 더욱 무너져 다시 징발하는 것인데도 민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위가 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은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걱정되어 우려하고 염려하지만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그리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을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사정은 더욱 무너져 다시 징발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달아날 꾀만 생각하니, 혹 의병을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적을 물리치는 일. 이전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지고 온 임금의 분부와 편지를 받고, 저는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경상우수사 원균 (元均)이 거느린 전선 3척과 더불어 옥포 등지로 거느리고 가서 적선 40여 척을 분멸한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지난 5월 27일에 도착 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공문에, 적도들이 수륙으로 침범하여 우도의 여러 읍에는 적들이 그득하고, 곤양․사천도 함몰하여 패하였다고 하거늘, 저는 소속 수군 장수들을 한편으로는 불러 모으고, 한편으로는 본도 우수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우도는 수로가 멀고 바람의 순역(順逆)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넉넉잡아 6월 초3일 까지 신이 있는 본영(여수)앞바다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기일 안에 적과 싸우도록 하였는데, 이미 다시□□하면 기다렸다가 본도 (전라)우수사가 기한대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사세가 느리고 더디어질까봐 5월 29일 새벽머리에 저는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곤양 ․남해 땅 노량에 이르렀는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신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元 均)은 패군한 뒤로 군사없는 장수이니, 별로 지휘할 것이 없거니와, 그날 정오 쯤에 적선 1척이 곤양땅 중간의 태포(太浦)에서 작난치며 천가호(千家戶)를 분탕하는 것을 찾아 내려다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달아나려 하는데 여러 배가 일시에 몰아냈습니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 때문에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평생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군의 사정은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원망스러워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모두 달아날 꾀만 생각하니, 이와 같으니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에도 불구하고, 한번 휴가를 얻는다면 민심은 반드시 이렇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정예한 수군을 얻고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길러도 휴가를 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8월 초에 거느리고서 이 지방에서 나아가도록 지휘를 이어받아 죽음으로써 결전하니, 군량과 군기가 거의 경상도에서 다 썼으니, 다시 나가 싸우고 또 옮길 걱정만 난감합니다. 이 도로 하 여금 미리 헤아려 보수를 주니 우러러 봅니다. 이 도로 하여금 전쟁에 임하여서 부끄러움을 녹이려 합니다. 이와같이 마음이 급급하여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힘을 다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인정이 이러하니 어찌하랴! 그러나 대장의 명령이라 오히려 신중하여 감히 가벼이 할 수 없고, 일이 비록 다하고서 급속하면, 인정과 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처지입니다. 문안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잘 계신다고 하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고기부레를 내리주십시오. 변고가 일어난 뒤로 여러 고을에 정하여 일체 바치지 않으니, 단지 장수가 마음속으로 10장을 올려 보내라고 했으니 부끄럽습니다.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학질이 이제는 어떠하 십니까. 두번이나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적탄을 맞은 자리가 아물지 않아서 곧 알려 드리지 못하여 답장을 보내지 못했으니,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민심이 무너져 흩어진 것이 이 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은 어떠하 십니까. 가뭄과 더위가 이렇게 심합니다. 강 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와주어 그 독한 성미를 부려 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니, 만약 촛불 옮겨 붙듯 빨리 침범하니 하느님의 신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으니, 의분을 품어도 할 말 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 두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아 곧 뵈오려 하였으나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아직도 낫지 않고, 마음이 억세어 그저 분주하다보니, 흔데가 너무 헐어서 이렇게 되버렸으니, 죄스러울 뿐입니다. 또 민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비록 혹 응징하려는 사람이 있다손해도 혼자서는 싸울 수 없습니 다. 분함도 부끄러움도 참을 수 없고, 얻거나 잃음도, 이루거나 실패함도 서로 이 같이 멀기만 한데 가히 경계할 수 없구나.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함이 이제는 너무도 바쁘기만 한데 오히여 더 신중해야 하며 감히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싸울 수 없도다. 형세를 살펴보니 근심하고 괴로우며 원망스러움이 독하기만 하다. 가뭄과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 까.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 지 없습니다. 제가 엎드려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만, 지난번 접전 할 적에 분투하였어도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갔다가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심하였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 지는 않았으나, 어깨뼈까지 깊이 다쳐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민망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일이 생각뿐이고 몸은 이렇게 병이 들어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탄식하면서 오직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군사를 움 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 날 꾀만 품고 있으며, 혹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가며 싸우러 깊이 들어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또 경상도에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 다면 이 도는 왜적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방어하는 사람도 없고, 부모처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민심이 이러하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순천부사가 죄인을 잡아올 사람 을 보내어 힘을 다하여 잡아 왔으나 와야 할 사람은 매우 드물 다고 하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각 포구의 보고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한을 넉넉히 잡아 의리 때 문에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이를 잡아 왔습니다. 아랫쪽 삼도(경상 ․전라․충청)에는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가 대충 그렇고,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어집니다. 낮이나 밤이나 울다 지쳐 목이 메입니다. 더욱 더 이도가 잃게 되어 잘못 하지 않게 하도록 회복할 꾀를 오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종사(宗社)를 도로 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백(李白) 두 장수의 (충성된) 죽음은 모두 스스로 저지른 것입니다. 요행히 만일에 사실이 아니라해도 병가(兵家)에서는 오랜 계산에서 나온 것입 니다. 지난번 임금의 분부에 따라 이 도의 공문에 지금 의병을 많이 모아 올려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저는 앞으로 해야할 일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비록 아직 스스로 적을 죽일 능력이 없어 지시한대로 거느리기만 하면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싸움말(戰馬)이 한 필도 없고 군관들도 한 필의 말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전쟁 도구를 다스리지 않으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병기는 일찌기 경상도 싸움에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나머지는 매우 엉성하여 이제 곧 조치하여 준비하기만 하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약이 매우 어려우니 민망합니다. 지난번 임금의 분부에 따라 이 도의 공문에, 좌우의 병세로 하여금 적이 돌아갈 길을 끊어 막는다면 적을 멸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 경상수사 본도(전라)우수사와 소속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이미 기일을 정한대로 이 명령을 내리면 어떻겠습니까. 처 음에는 15일로 잡았으며, 이제는 이 도로 하여금 약속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니 물려서 27일로 정하였습니다. 대개 물길을 따라 가니 이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요, 다만 짐배를 정하여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일 것 같으니 짐작하여 처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피지 못했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두번이나 글을 받고 진작 뵈옵고 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을 건의코자 했습니다만, 접전할 적에 조심하지 않아 적탄을 맞았으나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다친 구멍이 넓게 헐어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 뽕나무 잿물로 혹 바닷물로 씻어 보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니 민망합니다. 군사를 출발하는 날이 정해진 것이 언제입니까. 소속 변방의 장수 중에서 녹도만호․방답첨사가 있고, 수령 중에서는 흥양현감․순천부사․낙안군수가 있으나 비단 이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무너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품고 있고, 우도의 각 고을과 포구도 혹 스스로 무너질 곳이 있으니, 아직 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나아진 것이 이와 같습 니다. 가뭄과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 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밤낮으로 못내 걱정합니다만 제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나아가 알현하고자 했으나, 몸을 돌보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분투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매우 무겁게 되었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의 큰 뼈까지 깊이 다쳐 구멍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로 연일 씻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습니다. 장마가 걷히자 가뭄이 들고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우러러 사모합니다. 전에 아팠던 이 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제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두번이나 주신 글을 받았음에도 곧 나아가려했으나, 접전할 적에 몸을 돌보지 않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분투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매우 무겁게 되었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연일 갑옷을 입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구멍이 헐어서 궂은물이 줄줄 흘러 나와,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연일 씻어도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치료하러 다니고 있으나 아직 아픈 고비를 넘 기지 못하고 있어 민망합니다. 군사를 출발시킬 날이 언제로 정해 졌습니까. 단지 이 지방의 민심이 무너져 흩어졌으며 징병한다는 소식만 듣고도 바삐 달아나 피하려고만 한다니 통분함을 이길 길 없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어깨뼈을 깊이 다쳐 아직도 활시위 를 당길 수 없어 버린 몸이 되었습니다. 팔을 쓸 수가 없고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고 민망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 에는 생각만 바쁘며, 몸의 병이 예까지 이르렀으니, 북쪽을 바라 보며 길이 탄식할 따름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한번 징병한다는 소식 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날 꾀만 품고 있으며, 연해의 사람 들도 거의 이미 무너져 흩어졌고 또 하는 말이 물길을 따라 가서 평안도 지방으로 옮겨 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바닷 가 땅에서는 방어할 사람도 없고, 앞으로는 적의 소굴이 될 것이며, 부모처자 다시 서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민심이 헤어 짐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왜적을 분멸하고 곧 바로 사천선창에 이르렀더니 왜적들이 무려 350여 명이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고, 산아래에 줄지은 배들은 대선 7척․중선 5척 (계 12척)이 깃발들을 많이 꽂아 두고서 날뛰 고 있거늘, 거북함으로 하여금 돌진케 하고, 천자․지자 총통을 연 이어 쏘아대며 여러 배들이 한꺼번에 진격하여 화살을 쏘고 탄환을 쏘는 것이 바람과 비처럼 어지러우니, 왜적들은 물러가 숨어버 리고, 화살을 맞아 물에 빠지는 자와, 혹 끌어 안고 산으로 올라가 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왜놈의 머리도 많이 베고 또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며, 배는 남김없이 다 분멸하였습니다. 이튿날 6월 초1일 고성땅 모사랑포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6월 초2일 이른새벽에 출항하여 경쾌선으로 하여금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 을 찾아내게 하였더니, 그 회신 보고에, 당포에 왜대선 12척, 소선 20척(계 32척)이 머물러 대어 있는데, 천천히 육지에 내려 당포 고 을의 집들을 분탕하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배 위에 있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한꺼번에 따라가서 소선 2척을 유인하였는데, 층루가 있는 대선과 여러 배들은 노를 저어 따라 나오는지라, 소리지르며 나발을 불게 하여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둘러 쌌습니다. 먼저 거북배로 하여금 곧장 쳐들어가 연이어 천자․지자 총통을 쏘아 그 층루가 있는 대선을 깨뜨렸습니다. 왜적들은 스스로 그 힘으로는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도로 당포선창으로 들어가 육지로 내려가는데, 철환과 화살을 쏘는 것이 바람과 비 처럼 나가니, 거의 다 맞아 다치거나 죽은 자도 많 았으며, 먼저 왜장과 그를 따르는 왜놈의 목 7급을 베었으며, 나 머지 배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또 망보는 군사가 보고하기를, 왜 대선 20척 소선 10척(계30척)이 접때와 같다고 하거늘,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가 찾아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습니다. 왜적 들은 우리 수군을 바라 보고서는 물러나 숨으려고 견내량으로 향 하였습니다. 날도 벌써 저물어서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초3일에는 우리 수군을 정비하여 협공하고 찾아서 토별하려다가 전혀 흔적이 없었으므로, 먼저 작은 경쾌선으로 하여금 적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찾으려고 그대로 머물게 하여 우수사를 기다렸습니다. 초4일 정오쯤에 우수사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대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견내량에서 약속하고 착포(鑿梁)에서 밤을 지내고서 출항하였습니다. 고성 20리쯤 못미쳐서 섬 하나가 있는데, 한 사람이 나를 불러 말하기를, 왜적선 대중소 아울러 30여 척 이 지금 고성땅 당항포에 들어와서 분주히 드나들고 있다고 하거늘, 그 당항포로(이 뒤에는 글이 없다.)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이토록 우러러 생각하여도 제 정성이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일찍 건강이 편치 않으시단 말을 듣고도 먼 바다를 지키고 있어 아직도 안부를 살피기 어려워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곳의 적의 형세는 요즘 다른 흔적은 없고, 날마다 정탐해보니, 굶주린 빛이 많이 있어, 그 뜻이 반드시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고 도무지 방어하며 지키는 꼴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놈들 중에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써 싸움에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고,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얼추 감독할 뜻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조차 의뢰할 길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봐도 조처할 도리가 없으니, 수군의 일은 어쩔 수 없이 파하게 되겠습니다. 저같은 한 몸이야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겠지만, 나라 일을 어찌 하오리까. 전라도에 새로온 관찰사와 원수(元帥)조차 바닷가 수군의 양식을 군관을 보내어 곳간째 털어서 싣고 가니, 저는 다른 도의 먼 바다에 나와 있으니, 어떻게 조치할 길이 없어서 사세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어찌 하오리까. 만약 특별히 수군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수군에 관한 일을 통털어 검사하게 한 다면 바로잡을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계를 올렸으나, 아직 조정의 처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을 감독 하는 일에 무척 애썼는데,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관찰사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고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경달도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민망합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대로 눌러 둘 수는 없겠습니까.

9월 초3일 [양력 9월 27일]<갑인> 맑다.
아침에 조카 봉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또 본영의 소식도 들었다. 장계를 올리려고 초안을 만들었다. 순찰사 (이정암)의 편지가 왔는데,"무릇 군사인 일가족 등이 하는 일이라 일체 침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못 알고 하는 일이다.

9월 초4일 [양력 9월 28일]<을묘> 맑다.폐단되는 것을 진술하는 것과 총통을 올려 보내는 것과 제만춘 (諸萬春)을 불러서 문초한 사연을 올려 보내는 것 등 세 통의 장계를 봉하여 올리는데, 이경복(李景福)이 지니고 갔다. 정승 류 성룡(柳成龍)․참판 윤자신(尹自新)․지사 윤우신(尹又新)․도승지 심희수(沈喜壽)․지사 이일(李鎰)․안습지(安習之)․윤기헌(尹 耆獻)에게는 편지를 쓰고, 전복을 정표로 보냈다. 조카 봉과 윤간(尹侃)이 함께 돌아갔다.

1월 11일 [양력 3월 2일]<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볼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古音川; 熊川)에 대었다. 남의길(南宜吉)․윤사행(尹士行)․조카 분(芬)이 함께 가서, 어머니 앞에 가서 뵈니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며 일어 나지 않으셨다. 화가 나서 소리내는 바람에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기력은 약하고 숨이 금방 넘어갈듯 깔딱거려, 죽을 때가 가까와진 것 같아 감추는 눈물이 절로 내렸다. 말씀하시는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 날 저녁에 손수약(孫守約)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2월 4일 [양력 3월 25일]<계축>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우조방장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본영 전선․거북함이 들어왔다. 조카 봉( )과 이설(李渫)․이언량(李彦良)․이상록(李尙祿) 등이 강돌천(姜乭千)을 데리고 왔다. 동궁의 달본을 가지고 내려 왔다. 우찬성 정탁(鄭琢)의 편지도 왔다.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순천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의 공문에는 진중에서 시험을 보게하는 장달을 올린 것이 몹시 나쁘니까 그 허물을 캐물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우습다. 조카 봉( )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2월 초5일 [양력 3월 26일]<갑인>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 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백 장을 낱낱이 헤아려 서명하고 화피(활 만드는데 쓰는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발포만호(황정록)․우 수사의 우후가 와서 보고, 같이 식사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주었다. 우조방장 및 우우후․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 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 스럽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것 같아 마치 초여름 같다. 밤 아홉 시에 비가 내렸다.

7월 15일 [양력 8월 30일]<신묘>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조카 해․종 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 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조카 분(芬)의 편지 에,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 니께서도 편안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흥종(李 興宗)이 환자하는 일로 매를 맞다가 숨졌다고 했다. 놀랍다. 그 삼촌(충청수사 李純信)이 처음 이를 듣고서 비통한 나머지, 그 어 머니도 듣고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고 한다. 활 열 여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朴注沙 里)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 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 삼도에 전령하여 진을 죽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밤을 지냈다.

9월 23일 [양력 11월 5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수사 원균 (元均)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 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姜雲)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金義同)을 사형하 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초저녁에 복춘(復春)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5월 15일 [양력 6월 22일]<정해>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겠다.
새벽 꿈이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지 이레나 되니 몹시 속이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조카 해가 잘 갔는지 궁금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 광양의 김두검(金斗劍) 이 복병으로 나갈 적에, 순천과 광양의 두 원에게서 이중으로 월 급(朔料)을 받은 것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활도 안 차고서 나왔는데다가 무척 오만하므로 곤장 일흔 대를 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일]<경자>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혼자 앉아서 자식의 떠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침에 장계를 수정했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적량만 호 고여우(高汝友)가 장담년(張聃年)에게 소송을 당하여 순찰사가 장계를 올려 파면시키려 한다는 글을 보았다. 어둘 무렵 어란만 호가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보고하기를, "부산의 왜놈 세 명이 성주에서 투항해 온 사람들을 데리고 복병한 곳에 이르러 장사하 겠다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장흥부사에게 전령하여 내일 새 벽에 가서 타일러 보라고 시켰다. 이런 왜적들이 어찌 장사를 하고자 하겠는가. 우리의 허실의 정형(定形)을 엿보려는 것이다.


병신년 3월 (1596년 3월)

새벽 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멀리 활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삭을 차서 부누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데 발길에 차 보이는 것으로서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 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저녁나절에 체찰사의 전령에, "첨지 황신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正使)가 되고, 권황 이부사(副使)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 갈 것이니, 타고 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다 대어 놓아라."고 했다. 경상우후가 여기 와서 흰 무늬 돗자리 백쉰 닢을 빌려 갔다. 충청우후․ 사량만호․ 지세포만호․ 옥포만호․ 홍주판관․전 적도만호 고여우(高汝友) 등이 와서 봤다. 경상수사가 달려와서 보고 하기를, "춘원도(통영시 광도면)의 왜선 한 척이 도착하여 정박하 였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샅샅이 찾아내라고 전령했다.

4월 초1일 [양력 5월 16일]<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 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 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 (鄭琢)․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 정형(李廷馨)․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 (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4월 16일 [양력 5월 31일]<병자>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4월 19일 [양력 6월 3일]<기묘>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 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앞에 이르니 강정(姜晶) ․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 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 길 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 들 회․면․울(蔚), 조카 해․분(芬)․완(莞)과 주부 변존서(卞存緖)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元仁男)도 와 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 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5월 2일 [양력 6월 16일]<임진> 저녁나절에 비내렸다.
원수(권율)는 보성으로 가고, 병마사(이복남)는 본영으로 갔다. 순찰사(박흥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 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봤다. 진흥국(陳興國)이 좌영에서 와서 눈 물을 뚝뚝 흘리면서 원균(元均)의 일을 말했다. 이형복(李亨復)․ 신홍수(申弘壽)도 왔다. 남원의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다고 한다. 또 변유헌(有憲)은 식구를 데리고 무사히 금곡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7월 3일 [양력 8월 15일]<임오>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속으로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층 더했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저녁나절에 정읍의 군사 이량(李良)․최언환(崔彦還)․건손(巾孫)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저녁나절에 장준완(蔣俊 琬)이 남해에서 와서 보고 남해 원의 병이 중하다고 전하였다. 몹시 민망하다. 조금 있으니 합천군수 오운(吳澐)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황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종사관은 전적(典籍) 박안의(朴安義) 와 활을 쐈다. 이때 좌병마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 왔다. 그 때 고령 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7월 16일 [양력 8월 28일]<을미> 비오다 걷혔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손응남(孫應男)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변의정(卞 義禎)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꼬락서니가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두멧골에 묻혀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이 역시 거짓없고 인정이 두터운 태도이다. 이 날 낮에 이희남(李喜男)에게 칼을 갈게 했더니, 너무 잘들어 괴수 맨머리로 깎을만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아들 열이 가는 길을 많이 생각하니 씁쓰레하다. 마음 속으로만 빌 뿐이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世男)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에 전 병마사의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에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려는데,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 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 내어 불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일천 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 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 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 (世男)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모두 살륙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世男)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마저 이와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으니,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손응남(孫應男)이 집으로 돌아갔다.


7월 18일 [양력 8월 30일]<정유> 맑다.
새벽에 이덕필(李德弼)․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 均)․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 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송대립(宋大立)․류황(柳滉)․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림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韓致謙) 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 다음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1597년(정유)(Ⅰ) 10월 8일(乙丑) 뒷 장부터 모두 3 장으로 적혀 있는데 그 앞의 한 장은 「讀宋史」 이다.)

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 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 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 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 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늘, 강의 계획은 이 런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 다음은 위의 「독송사(讀宋史)」가 적힌 그 다음 장에 두 장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새로 급제한 원경전(元景銓)․한치겸(韓致謙)․정복례(鄭福禮)는 우병사의 진에, 남엽(南曄)․ 정재순(鄭在淳)․ 조형(趙珩)․ 조완(趙 琓)은 진주 운곡에, 이홍훈(李弘勛) 주인집은 송곡에, 창노의 우두 머리 봉환(鳳還)․석운(石雲)․뢰손(雷孫)은 백천 별장에, 훈련정 조신옥(趙信玉)․ 홍대방(洪大邦)은 쌀 14․콩 18․파초 4․콩2 및 10, 대오미 2를, 흥양 정병 김득상(金得尙)은 화살쏘기로, 김덕방 (金德邦)․김윤복(金允福)은 처음 벼슬에 나왔고, 처음 벼슬에 나온 조언해(趙彦海)․주부 송상보(宋象甫)는 말이 없고, 순천 이진 (李珍)과 아산에서 처음 벼슬한 박윤희(朴允希)는 지금 충청도 방어사의 진중에 있는데 싸움말이 있어 적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정유년 12월 (1597년 12월)

12월 초1일 [양력 1월 7일]<정사> 맑다.
맑고 따뜻했다. 아침에 경상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진에 왔 다. 나는 배가 아파서 저녁나절에야 수사를 보고, 그와 종일 이야기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12월 2일 [양력 1월 8일]<무오> 맑다.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봄날 같다. 영암의 향병장 류장춘(柳長春) 이 적을 토벌한 사유를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쉰 대를 쳤다.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 (鄭遂) 등이 와서 봤다. 밤 열시쯤에 땀이 배어 젖었다.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12월 4일 [양력 1월 10일]<경신> 맑다.
몹시 추웠다. 저녁나절에 김윤명(金允明)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장흥 교생 기업(基業)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 세 대를 쳤다. 거제현령 및 금갑도만호․천성보만호는 배메기하는 데서 돌아왔다. 무안현감 및 전희광(田希光) 등이 돌아갔다.

 

12월 5일 [양력 1월 11일]<신유> 맑다.
아침에 공로를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봉제(奉 )가 김돌손(金乭孫)을 데리고 함평 땅으로 갔다. 보자기를 수색하는 정응남(鄭應男)이 점세(占世)를 데리고 진도로 갔다. 배를 새로 만들 때 나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볼 일 로 아울러 나갔다. 해남의 독동(禿同)을 처형했다. 전익산군수 고 종후(高從厚)가 왔다. 김억창(金億昌)이 왔다. 광주의 박자(朴 仔)가 왔다. 무안의 나덕명(羅德明)이 왔다. 도원수의 군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아직도 상제라 하여 방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다.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 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쟁할 때의 용감이란 소찬으로 기운 이 없는 자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예기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으니,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짐 작하여 소찬에 더하여 방편을 쫓도록 하라."고 하면서 고기반찬 을 하사하셨으니, 더욱 비통했다. 해남의 강간․약탈한 죄인을 함평에서 자세히 다스렸다.

12월 29일 [양력 2월 4일]<을유> 맑다.
김인수(金仁秀)를 놓아 보냈다. 곤장 서른 대를 치고서 놓아 보냈다. 영암좌수(座首)는 문초를 받고 놓아 주었다. 두우(杜宇)가 종이감으로 백지․상지를 아울러 쉰(장...이 아래 글자 가 지워져서 알아볼 수가 없음)을 가져왔다. 초저녁에 다섯 사람 이 뱃머리에 왔다고 했다. 그래서 종을 보냈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그것이 무슨 듯인지 알 수가 없다. 거제의 망령됨을 알만도 하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다친 팔과 손가락을 물로 씻었다고 했다.


무술년 1월 (1598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5일]<정해> 맑다.
저녁나절에 비기 잠깐 내렸다. 경상수사․조방장 및 여러 장수들이 다와서 모였다.

1월 초2일 [양력 2월 6일]<무자> 맑다.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 祭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새로 만든 배의 진수식을 했다. 해남현감(류형)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宋大立)․송득운(宋得運)․김붕만(金鵬萬)이 각 고을로 나갔다. 진도군수(선의경)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무술년 9월 (1598년 9월)
9월 15일 [양력 10월 14일]<정유> 맑다.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일제히 항해하여 나로도에 이르러서야 잤다.

9월 20일 [양력 10월 19일]<임인> 맑다.
오전 여덟 시쯤에 유도(여천군 율촌면 여흥리 송도)에 이르니, 명 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벌써 진군했다. 수륙으로 모두 조여드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많이 겁내는 빛이다.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아댔다.

9월 21일 [양력 10월 20일]<계묘> 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화살을 쏘기도 하고 화포를 쏘기도 하여 종일 싸웠으나, 물이 밀려나가 매우 얕아 진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적이 가벼운 배를 타고서 들어와 정탐하려 할 즈음 허사 인(許思仁) 등이 추격하니, 왜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산으로 도망 갔다. 그리하여 왜놈들의 배와 여러 잡된 물건을 빼앗아 도독(유 정)에게 바쳤다.

9월 22일 [양력 10월 21일]<갑진> 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싸웠는데, 유격(마귀) 이 어깨에 적탄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군사 열한 명이 적탄에 맞아 죽고, 지세포만호 옥포만호가 적탄에 맞았다.

9월 23일 [양력 10월 22일]<을사> 맑다.
도독이 화를 냈다. 서천만호 및 홍주대장․한산대장 등에게 각각 곤장 일곱 대를 쳤다. 금갑도만호․제포만호․회령포만호에게도 아울러 곤장 열다섯 대씩 때렸다.

9월 30일 [양력 10월 29일]<임자> 맑다.
오늘 저녁 명나라 유격 왕원주(王元周)․유격 복승(福昇)․파총 이천상(李天常)이 백 여 척을 거느리고 진으로 왔다. 이 날 밤 등불을 밝히니, 휘황찬란하여 적도들은 간담이 써늘했을 것이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4일]<무오>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는데, "제독 유정(劉綎)이 달아나려 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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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6.04 12:02:28 *.248.91.49
우리 철이가
철이 단단히 나서
이 긴글을 아들의 돐을 기리며 옮겨 적었나봐.

이번 돌잡이때
큰 칼과 큰화살, 그리고 긴 붓도 하나 내놔봐요. 

아버지의 예술적 감성에.... 엄마의 사랑
게다가 영웅전들... 그러면 자식교육 일류로 준비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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