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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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 어린 시절과 무인이 되기까지의 여정
이순신은 덕수 이씨 출신이다. 시조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지만 조선에 이르면서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되었다. 요즘 말로 하여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태어난 때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사정으로 볼 때 한창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불운이 아버지를 거치면서 집안은 쇠잔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중종 때에 발생한 기묘사화(1519)가 원인이었다. 당시 정치를 장악하고 공신전을 소유한 훈구 세력의 전횡에 대항하여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 정치와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림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과의 충돌로 이어졌고 사림의 일대 숙청으로 막을 내렸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도 사림과 친교를 맺었다가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를 기묘사화로 죽인 중종은 1544년 그 운명을 다하면서 인종이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545년 3월 8일 이순신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이정은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중국의 3황 5제와 우 임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첫째 아들은 희(羲)로 둘째 아들은 요(堯)로, 셋째 아들은 순(舜)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집안은 할아버지의 참변에 이어 아버지도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으니 국가에서 주는 보수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22세까지 별 소득 없이 공부를 계속했다. 그 당시의 관직진출 나이를 감안하면 이미 늦은 편에 속했다. 여기서 이순신은 힘든 결심을 한다. 문인으로서의 입신양명은 그만두고 무인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과 공부를 시작했다고 바로 합격하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576년 2월, 32세의 나이로 식년 무과에서 병과로 합격하여 그 해 12월에 발령을 받았다. 그의 첫 근무지는 함경도 백두산 및 동구비보였고 직책은 권관으로, 하사급의 최하위직이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3년 동안 근무했다.
- 영웅이라는 칭호는 누구에게 붙여지는가?
그의 성품을 짐작하게 해주는 두 가지의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를 하고자 한다.
1579년 2월 그의 나이 35세 때 훈련원 봉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때부터 고단한 군대 생활이 시작된다. 이순신이 훈련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병조정랑 서익이 훈련원에 근무하는 가까운 사람의 특진을 명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는 '아래 있는 사람을 순서를 바꾸어 승진시키려면 반드시 그 자리에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어 옳지 못하며, 법규도 고칠 수 없습니다."라며 특혜 인사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아무리 상관이라도 인사 청탁이라는 불의 앞에 이순신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관에게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상관의 공개적이고 노골적인 위협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에서 이순신의 철저한 원칙 주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이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차츰 이순신을 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1580년 7월에 파격적인 승진을 한다. 36세가 되던 해 전라도 발포 만호로 임명된 것이다. 그때까지 이순신은 전형적인 육군으로 근무하였다. 그런 그가 수군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전라도 고흥의 발포였다. 군관의 지위에서 만호로 승진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당시 조정에서 승지로 있던 그의 절친한 친구 유성룡의 천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이순신은 이 중요한 시기에 다시 한번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의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했다고 한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직속상관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상관의 부당한 청을 거절했다. 여기서 이순신의 비범함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은 결과적으로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오동나무 한 그루를 두고 상관과 신경전을 벌인 이순신의 대쪽 같은 성향은 병조정랑 서익의 사건과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고 이순신의 강직함은 세인에게 주목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알만한 사람은 조직 생활 내에서 상사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홀로 'NO'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군대조직에서는 오죽할까? 언젠가 노무현 전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정치가로서 살아가다 보면 '손해가 뻔히 보이는 원리원칙의 길로 가야 할 지, 이로움을 쫓아 가야 할지' 고심에 빠질 때가 많다고 말이다. 어느 누가 손해가 뻔히 보이는 길을 자원해서 가고 싶겠는가. 모든 사람은 살면서 이러한 기로에 한번쯤은 서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의로움'보다는 '이로움'쪽으로 스스로의 방향을 튼다. 그리고 몇몇의 바보들은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고지식하게 '의로움'을 택한다.
'이로움'을 택한 이들을 '영리하고 세상의 조류를 아는 이'로 평가받을 수는 있지만 결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는 이들은 바보처럼 외로이 '의로움'을 택한 이들이다. 머리 속의 지식은 교육으로 채워질 수 있지만 가슴 속의 뜻을 따르는 행동은 순전히 삶에 대한 철저한 태도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순신은 결코 태어날 때부터 영웅, 하늘이 내린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우직할 정도로 묵묵히 걸었다. 수많은 고난과 좌절이 그를 엄습했지만 그는 우회하지 않고 정면 돌파로 일관했다. 그는 진정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갔다. 그가 밟은 길은 평범했지만 그 길 위에서 그는 비범했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이순신은 올바른 원칙으로 직진했다. 그는 무수한 시련 속에서 결코 타협하거나 비겁하게 물러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그를 그리워하며,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는가 보다.
- 내용 발췌 및 참고 : <이순신의 두얼굴> 김태훈
2. 내가 저자라면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영웅은 어떻게 발굴되어지는가?
어떤 영웅은 그가 살았을 때부터 영웅으로 칭송받고 영예롭게 죽지만, 어떤 영웅은 죽은 이후에 후세 사람들에게 발굴되어 영웅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안타깝게도 그 스스로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영예로운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개인에게는 비극적인 삶이지만 그의 가문에는 영예로운 삶일 것이다.
사실 많은 경우 영웅은 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도 일어난 사건(Fact)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Attitude)에 따라 사실은 얼마든지 포장되고 다른 결론으로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가 발견되고 각 일간지는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유서발견의 기사를 실었다.
노대통령의 유서 "마을 구석에 비석 세워주길" (2009.5.23)
이 제목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죽은 뒤에도 영욕을 탐하는 이로 비춰진다.
하지만 유서 전문을 보면 알겠지만 화려하게 어떤 치장도 하지 말고 마을 어귀의 작은 비석 하나면 충분하다는 소박한 바램이었음을 국민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일보가 거짓말을 했을까? 아니다. 조선일보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다만 어떤 방향으로 논지를 잡고 글을 쓰느냐에 따라 하나의 사실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가 무서운 이유가 이것이며, 역사를 온전히 진실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이것이다
다시 논점으로 돌아가서 영웅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경우 영웅은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발굴되어 지고 포장되어 진다. 대부분 당대의 정권을 잡은 이들이 영웅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투사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이순신은 잘 알려졌다시피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 했을 때 새로이 조명받은 인물이다
우리가 아는 이순신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광화문에 늠름하게 칼을 차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그는 그야말로 장군의 이미지 그것이다 적의 총탄을 맞고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용맹스럽게 최후를 맞았던 그에게는 구국의 영웅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하지만 <난중일기>에서 보는 그는 어떠한가?
왠지 잠도 안자고 나라를 지킬 것만 같고 무쇠와 같은 힘에 언제나 박력넘치고 호탕할 것 같은 그는 인간적이고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는 나와 같이 잔병치레도 잦으며, 종종 꿈을 통해 현실을 점치기도 하고, 어머니의 안녕을 항상 염원하는 눈물많은 사내이다. 때때로 걱정이 지나치고 만갈래로 생각이 갈라져 근심에 잠못들기도 한다.
비범한 영웅이 아닌 소박한 사람으로서 이순신이 느껴지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점은 비범한 영웅 이순신보다 소박한 사람 이순신이 내게는 더 영웅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의 목적성에 의해 발굴되고 포장되어진 위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붙여져 어떠한 이미지가 형성되고 그것은 때로 과대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소개된다.
의사결정을 할 때 티끌만한 갈등도 없이 칼같이 행하는 영웅을 보면 위대하다고 느껴지지만 어떠한 감정이입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나와 같이 때때로 이런 저런 갈등에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늦추기도 하고 고민도 많은 어떠한 인간이 자신의 뜻을 버리지 않기 위해 올곧은 길로 가는 것을 보면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며 그에게 나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 이후에 사람들에게 새로이 부각되었던 점은 그의 정치행적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은퇴 이후 봉하에서의 삶이 여느내 우리 이웃과 다를 바 없는 그 소박함에 동질성을 느끼고, 그 와중에 평생을 비주류로 남더라도 스스로의 옳은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 삶의 행로에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지난 달 신화를 읽으면서 사제에게 특정한 의복을 입히고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에게 권위를 입히고 힘을 위임한다는 것을 배운바있다. 하지만 그는 권위를 업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같은 사람으로써, 그래서 고민도 많고 이로움을 쫓고자 하는 바램이 같은 사람으로써, 끝까지 의로움을 택한 그들의 모습에 진정 영웅이라는 칭호가 붙여진다고 생각한다.
'영웅은 이와 같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난중일기>라는 책은 솔직하게 말하면 읽기 힘들었다. 타인의 소소한 일상을 적어놓은 일기가 소설만큼 재미있을 리 없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솔직하게 동일한 패턴의 글을 보며 무슨 글을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로 써야할까 고민도 많이 되었다.
역을 한 송찬섭씨에게 더 많은 보충자료와 현대의 독자를 위한 현대적인 언어로 재포장해 글을 써주시지.. 하는 작은 원망아닌 원망도 살짝 해보았다. 하지만 <난중일기>는 1차 사료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가 1차 사료인 것 처럼 말이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후세사람들은 상상력을 보태 스토리를 만들어 2차 창작물, 즉 영화, 드라마, 소설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대부분 2차 창작물을 통해 그 위인을 돌이켜 보지만, 앞서 조선일보의 사례에서도 소개했다시피 2차 창작물에는 지은이의 편견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1차 사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난중일기>가 없었더라면 이순신이 이리도 눈물 많고 고민 많았던 사내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런 점 하나만이더라도 이 책은 그 자체로 목적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3. 내 마음의 글귀
- 1592년 왜적의 침입이 시작되다.
[44] 새벽 2시쯤 이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남해현 성 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어 있고, 집안에서 밥 짓는 연기도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식은 흩어졌고, 무기고의 병기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사람이 하나 있기에 그 사유를 물어보니 '적이 급박하게 닥쳐오자, 온 성 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도망쳤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부하들이 보고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군관 송한련에게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에게 무기와 양식을 주는 격이 되어 본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러 퇴각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고 전령하여 급히 달려 보냈다.
[48] 초7일 새벽에 한꺼번에 출발하여 적의 배들이 머물고 있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갔다.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이순신은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하였다.
[63]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한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였다. 각각 지자․현자․승자총통 등을 쏘아서 먼저 두 세 척을 박살내니, 여러 배의 왜적들이 기가 꺾여 도망갔다. 여러 장수, 군사, 관원들이 승리할 기세로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알을 퍼부으니 그 형세가 바람과 같고 우레와 같았다.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군을 한꺼번에 거의 다 쳐부수었다.
-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86] 새벽에 구름이 쫙 끼고 동풍이 세게 불어왔다. 그러나 적을 치는 일이 시급했으므로 출항하였다.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조금 약해진 것 같아서 길을 재촉하여 웅천에 다달았다. 두 스앙과 의병장 성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상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감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에 배를 모아 일시에 뚫고 들어가니, 적의 세력이 흩어지고 힘이 약해져 거의 섬멸하였다. 그러나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었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구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라!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87]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89] 아침에 비가 왔다. 오늘이 답청절이건만 흉악한 적들이 물러나지 않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떠다니느구나.
[92] 우수사와 활쏘기를 하였다. 그의 활솜씨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가소로웠다.
[94]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98]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98]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101] 미시(오후 1시에서 3시)에 비가 와서 농사에 대한 희망이 조금 살아났다. 이영남이 보러 왔다.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04] 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깐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두려워 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할 때에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107] 각 고을의 담당 서리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현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짐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
[108]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114]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서늘하여 자리에 누었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 갈래나 되었다.
[114] 해가 저물 무렵에 김득룡이 진주성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전했다.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이는 반드시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일 게다.
[117] 이 소식을 들으니 뼛속까지 사무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수사, 경상 수사와 함께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120]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21] 같이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
[123] 새벽에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124]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 했다. 신기한 일들이 만핬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124]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이 어떠한지도 모른 데다가 적에 대한 소통도 늦어져서 마음이 무거워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129]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132] 혼자 배의 뜸 아래 앉으니 가슴속 생각이 만 갈래로 떠올랐다.
- 195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39] 아침에 어머니를 뵈러 배를 탔다. 어머니를 뵈러 들어갔더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혔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왜적을 물리칠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139]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쓰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창에 되돌아 오니 몸이 불편하여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42]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이 에이는 듯 추웠다. 각 배에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신음하니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웅천 현감, 진해 현감이 왔다. 진해 현감은 명령을 어기고 빨리 오지 않아서 문책할 작정이었으므로 만나 보지 않았다. 바람이 조금 약해지는 듯했지만, 순천 부사가 들어올 일이 매우 걱정 되었다. 군량 또한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 되었다. 병으로 죽은 사람을 거두어 장사 지내는 일을 맡길 사람으로 녹도 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147]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147] 원수(권율)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 유격이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들었건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
[151] 흥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왓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 볼 뿐이다
[152] 암행어서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167]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172]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180] 순변사에게 유 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180]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
[186]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평안하시고 면의 병이 차차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허실의 병세가 점차 중해진다고 하니 매우 염려스럽다.
[187] 초하루 한밤중 굼에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해 보니 낳을 달이 아니므로, 꿈속에서도 쫓아 버렸다.
[193]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세,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195]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202] 아침 일찍 선봉 부대를 장문포 적의 소굴에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눔을 써서 땅에다 꽂아 놓았는데, 거기에는 “왜국이 명나라와 바야흐로 화친하고자 하니 싸울 필요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
-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213]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213] 봉과 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전하였다. 매우 다행이었다. 밤새 온갖 생각이 떠올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21] 주부 조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적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내용은 풍신수길이 침략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끌어 모아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고 한다.
[233]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239]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51] 늦게 관청을 나갔더니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함게 도착하였다. 같이 이별주를 마시고 밤이 깊어져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 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281]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이가.
[294] 아침에 남여문을 통하여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다만 믿기 어려웠다. 이 소문이 일찍부터 퍼졌는데 아직 정확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
[296]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인데 술 한 잔 올리지 못하여 마음이 불편하였다.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296] 여러 장수들이 모여 회의하고 나서 둘러앉아 위로주를 네 차례 돌렸다.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307]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308]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319] 하루 내내 노를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 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 1597년, 백의 종군에 나서다
[33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337] 배에서 달려온 중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338]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뇌의 집에 이르러 선조의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났다.
[339] 밤중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슬픈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348] 박천 군수 유해가 말하기를 중한 죄수 이덕룡이란 자를 고소한 사람이 갇혀서 세 차례 형장을 맞고 다 죽어간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과천 좌수(座首) 안홍제 등이 이 상공에게 말과 스무 살 먹은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하였다. 본시 안홍제는 죽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뇌물을 바친 다음에야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 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357]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358] 내가 들어가 뵈니, 원수가 원균에 대하여 “통제사의 일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소. 조정에 청하여 안골, 가덕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그럴싸하게 기대어서 싸우지 않으려는 뜻에 지나지 않소.”
[364] 일찍 아침을 먹은 다음 솟구치는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368] 듣고 나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371]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379]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라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382]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385]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
[385]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386]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393]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394]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395]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하였다.
[396]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렀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다.
[405]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고기를 먹는 것)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
-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418] 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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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백범일지 ![]() | 예원 | 2009.06.08 | 4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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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9]백범일지 – 도진순 주해, 돌베개 ![]() | 정야 | 2009.06.08 | 2777 |
1889 | '백범일지' - 도진순 주해, 돌베개 [1] | 희산 장성우 | 2009.06.08 | 3115 |
1888 | 백범일지 [1] | 혁산 | 2009.06.08 | 2748 |
1887 | 백범일지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書元 이승호 | 2009.06.07 | 3464 |
1886 | 백범일지 -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저자라면 | 書元 이승호 | 2009.06.07 | 3073 |
1885 | [9] 난중일기 - 이순신 저. 노승석 완역 [3] | 범해 좌경숙 | 2009.06.02 | 3585 |
1884 | '난중일기' - 송찬섭 역, 서해문집 [2] | 희산 장성우 | 2009.06.02 | 3037 |
1883 | [8]난중일기-송찬섭 엮음, 서해문집 [3] | 정야 | 2009.06.02 | 3058 |
1882 | 난중일기; 이순신 [5] | 백산 | 2009.06.01 | 3081 |
1881 | 난중일기 [1] | 김홍영 | 2009.06.01 | 2692 |
1880 | 난중일기 [2] | 혜향 | 2009.06.01 | 2872 |
1879 |
난중일기 ![]() | 예원 | 2009.06.01 | 2983 |
» | 난중일기 - 송찬섭 역 [1] | 숙인 | 2009.06.01 | 2917 |
1877 | [9] <난중일기>- 인용문 | 수희향 | 2009.05.31 | 3995 |
1876 | [9] <난중일기>-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2] | 수희향 | 2009.05.31 | 2901 |
1875 | 난중일기 [1] | 혁산 | 2009.05.31 | 4867 |
1874 | 난중일기 [1] | 書元 이승호 | 2009.05.31 | 2769 |
1873 |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1] | 숙인 | 2009.05.25 | 27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