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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일 10시 1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 덕수(德水),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자시(23:00~01:00)에 한성 마르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은 그의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못했으므로 집안이 가난하였다. 때문에 살림이 어려워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뱀밭마을(白岩里)로 이사를 가게 되고, 이곳이 그의 고향처럼 되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에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놀았으며 그 중에서도 전쟁놀이를 즐겼고, 그 때마다 아이들은 이순신을 대장으로 올려 세웠다. 그리고 언제나 활과 화살을 즐겨 차고 다녔다. 마을에서 어른들이라 하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면, 곧장 바른 말을 했기 때문에 어른들도 이순신을 어렵게 여겼다고 한다. 그만큼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호연지기를 지녔던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나이가 들면서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결코 소홀하거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대부 가문의 학풍에 따라 희신・요신 등 형제들과 함께 유학을 공부했으며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의 문학적 자질과 깊이는 <난중일기亂中日記>와 그 밖의 여러 한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565년,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방진은 무관출신으로 보성군수를 역임한 후 은퇴하여 향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의 슬하에는 무남독녀만 있었다. 그는 무인으로서 호방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자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는데, 이순신의 품성과 자질을 높게 평가하여 자기 딸과의 혼사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결혼 한 후에는 무관직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장인의 영향을 받아서 붓을 던지고 2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리고 10년간 준비를 한 끝에 가까스로 무과에 급제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자질을 타고 났지만 집안 사정은 타고난 무인의 기질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에서 무인의 대접은 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문인의 소양이 더 필요했다. 결국 이순신은 20여 년간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쌓은 뒤에 10여 년간 자발적이고 치열한 노력을 통해서 무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 결과 이순신은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가진 무인이 되었다.


1572년(선조 5년), 무예를 연마한지 7년이 지나고, 이순신은 28세가 되던 해인 선조 5년 가을에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별과(別科)에 응시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첫 무과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그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 과목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가지를 꺾은 뒤 껍질을 벗겨 상처를 묶고 끝까지 시험을 완수했다. 비록 과거에는 낙방하였지만 이를 지켜본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이순신은 32살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무과는 처음 치렀던 별과와는 다른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식년무과(式年武科)였다. 당시 무과합격자는 모두 29명이었는데, 이순신은 병과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결코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지만 당시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체계적으로 기마술을 반복 훈련한 현직 군인들이었다. 따라서 보인 신분으로 사가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던 이순신으로서는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는 장인 방진의 조력과 함께 그의 부단한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이순신이 급제한 때는 32살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대부분이 십대에 성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조혼제도가 성행했기 때문에 일찍 가정을 이루고 그만큼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빨리 갖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늦은 나이에 궁술・병법과 더불어 학문에까지 두루 능통하여 문무를 겸비한 대기만성형의 무인이 된 사실에서 그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576년(선조 9년),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 이듬해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지냈다.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을 거절한 데 있다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선전관·정읍현감 등 미관말직만을 지내다가 1591년(선조 24년)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일기는 그 뒤부터 쓰기 시작하여 그가 죽기까지 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고 7월 한산도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도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의 수군을 안골포(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난민구제·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에 앞서 명·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0여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 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함으로써 한국 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이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이 추증, 1613년(광해군 5년)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는 아산의 어라산이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이 중 현충사는 성역화되어 전시관 등을 건립,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짐작하겠다. (25)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무기를 검열하였다.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깨어지고 낡아서 볼품 없이 된 것이 많았다. 담당 색리와 활을 만드는 장인, 감고 등을 처벌하였다. (35)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일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다행한 일이다. (38)


밥을 먹은 뒤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팠다. 하루 내내 아픔이 계속되었고 또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기운이 떨어지고 어지러워 밤새도록 고통에 시달렸다. (39)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 첨사, 흥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의로운 자들이라 할 만하다.

모두 기꺼이 싸움터로 나갈 뜻을 가졌는데 낙안 군수 신호만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했다. 한탄스러웠다. 군법이 있는데 설사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45)


“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려하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마치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47)


여러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했다. 배에 있는 관원과 군사들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동서로 에워싼 채 바람과 우레같이 대포를 쏘고 활을 쏘아 대었다. (49)

 

하루 내내 거의 다 쳐부었으며, 그 가운데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그 곳 백성 가운데 산골에 숨어 있는 자가 꽤 많았다. 만일 왜선을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고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샜다. (67)


말도 없고 지원부대도 없이 경솔하게 상륙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되었다. (74)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75)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부산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총알에 이마를 뚫려 전사하였다. 지극히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각볗이 정운의 초상 치르는 일을 맡아 보살피도록 하였다. (76)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두 번이나 웅포까지 쫓아갔으나 그래도 잡아 무찌르지 모하였으니 어찌할꼬? 분하고 분하였다! (83)


전라 우수영의 우후가  술주정하며 마음대로 지껄여대었다. 그 짓이 입에 담을 바가 되지 못하니 어찌 모두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큰 적을 무찌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 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 (84)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87)


오늘이 답청절이건만 흉악한 적들이 무러나지 않았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떠나는구나. 명나라 군사가 서울에 들어왔는지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말할 수 없이 걱정스럽다. (89)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94)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97)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98)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두려워 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할 때에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105)


각 고을의 담당 서리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현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짐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 (107)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108)


적의 꾀는 헤아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110)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서늘하여 자리에 누었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 갈래나 되었다.

해가 저물 무렵에 김득룡이 진주성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전했다.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이는 반드시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일 게다. (114)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117)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20)


같이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 (121)


159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140)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들어가서 치면,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보아 완전히 무찌르도록 서로 작정합시다.“ (150)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암행어사 유몽민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주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151/152)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167)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172)


순변사에게 유 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179)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 (180)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세,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193)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195)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213)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233)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39)


늦게 관청을 나갔더니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함게 도착하였다. 같이 이별주를 마시고 밤이 깊어져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 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251)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269)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271)


순찰사가 나와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열에 일곱을 지고는 섭섭한 기색을 삭이지 못하니 가소로웠다. 군관 세 사람도 모두 졌다. 밤이 되자 술에 취해서 돌아갔다. 가소로웠다. (272)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281)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인데 술 한 잔 올리지 못하여 마음이 불편하였다.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모여 회의하고 나서 둘러앉아 위로주를 네 차례 돌렸다.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29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307)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308)


바깥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때, 안에서도 도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09)


하루 내내 노를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 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319)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추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전선 13척으로 9월 명량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10월 고하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329)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336)


배에서 달려온 중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337)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뇌의 집에 이르러 선조의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났다. (338)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42)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344)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348)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여 이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351)


서늘한 기운이 들어와서 밤에는 더욱 쓸쓸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노라니 솟아나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357)


일찍 아침을 먹은 다음 솟구치는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364)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369)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하여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371)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라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379)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382)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조선 수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많이 소아 죽이고 배를 불태웠으니 매우 분하다.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힘을 합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곧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곧 싸움이 벌어질 테니 빨리 육지로 얼라가도록 하였다. (384)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 (385)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385)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386)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393)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394)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하였다. (395)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렀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다. (396)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고기를 먹는 것)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 (405)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418)



3.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기 직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1592. 1. 1- 1598. 11. 17), 진중에서 있었던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원래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를 두고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1795년(정조19년)에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 간행하면서 편찬자에 의해 편의상 이름이 붙여진 데에서 연유한다.


현재 전해오는 <난중일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진중에서 친필로 기록한 초고본으로서 7책 205장이 전해지며 국보 제 78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는 것인데 4권(권5-권7)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규장각 문신이었던 윤행임과 예문관 검서관이었던 유득공이 1793년부터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행적을 모으고 기록한 것으로 시(詩)・장계(狀啓)・난중일기(亂中日記)・잡저(雜著)・기타 자료 등이 총 1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중일기>의 내용은 초고본과 전서본 사이에는 내용상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전서의 편찬자들이 충무공의 친필 초고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글의 내용을 임의로 요약하거나 실수, 의도적으로 누락과 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그 배경과 원인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이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의 에끼(文祿慶長の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의지가 대단히 집요하였는데, 임진왜란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우선, 일본은 100년 동안의 내전을 치르면서 과대할 정도로 팽창한 군사력을 적절한 수준으로 조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천황으로부터 관백(觀白)의 지위를 하사받고, 일본의 모든 영주들에게 전쟁을 멈추도록 명령해 전국에 평화를 가져왔다. 100년이 넘게 전쟁만 하던 나라에 갑자기 평화가 찾아오니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알고 살아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으로 보면 해외 원정을 일으켜 일본 국내의 군사력 중 상당 부분을 외부로 돌린다면 그만큼 일자리가 창출되니 전쟁을 하는 동안은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될 수 있다는 원인이 하나 있었다.


임진왜란 발병의 두 번째 이유는 일본에서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신하들에게 나누어줄 영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토지가 곧 ‘부‘이던 근대 이전에, 최고 통치자가 된 히데요시로서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나누어줄 영지가 없으면 그들의 충성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여서 새로운 영지를 만드는 일이 무척 절실했다. 일본에 비해 조선과 명의 국방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정보가 알려짐에 따라,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과 명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히데요시가 계획한 대로 조선과 명을 정복한다면 일본의 영주들은 졸지에 새로운 영지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얻게 되고 그로인해 얻는 수익도 어마어마할 테니, 그들로서는 한번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일본의 지배층에게 전쟁을 통한 고소득 창출이라는 달콤한 꿈을 꾸게 했고, 그 결과 치밀한 계획하에 조선을 침략, 7년 동안이나 일본 전체를 전시체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동양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패하여 철수했다는 점에서 보면 조선이 이긴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조선은 인적, 물질적 분야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겪었다.


전쟁으로 인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명 피해였다. 7년여의 전쟁 동안 무수한 백성이 일본군의 창칼에 죽거나 식량 궁핍으로 굶어 죽었다. 일본군이 조선 땅에 제일 먼저 상륙한 부산의 동래 지역은 개전과 동시에 참혹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각 점령지에서 물러나 퇴각하면서 더 많은 인명을 살해했다. 특히 일본군이 1593년 4월 18일 서울을 철수하기에 앞서 많은 도성민을 처참하게 살상하였는데, 퇴로마다 그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들은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양민들도 그대로 두지 않고 살상을 자행하였으며, 부녀자나 어린아이들까지 살상당하지 않으면 일본에 끌려가서 노비가 되어 사역에 종사하거나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비로 팔리기도 하였다. 이같은 실정으로 조선의 인구는 왜란을 거치면서 급격히 감소했다.


또한 경제의 근간인 토지를 기록한 토지대장과 호적 등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이후,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국가 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토지의 경작 면수가 3분의 1밖에 남지 않아 전쟁 이후 조선 조정은 세수를 확보하는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고 국가 재정에도 큰 지장을 주었다. 전쟁기간 동안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데다 노동력마저 부족하고 농우도 살아남지 못하여 국토가 황폐하게 되었다.


조선의 찬란한 문화유산들 역시 전란을 맞아 무참히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왕궁이었던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해서 각 관서가 대부분 소진되었다. 특히 춘추관의 소진은 건물뿐만이 아니라 보관되어 오던 각종의 귀중한 전적(典籍)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실록을 보관하던 지방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탔으며, 민가에 전하는 귀중한 전적과 문서들도 불타거나 왜군이 약탈하여 대부분이 없어졌다.

 

왜란을 통하여 민중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각하게 되어 자아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는가 하면, 명이 원군을 보내서 조선을 도왔다는 데서 조・명관계가 밀착하게 되었으며, 숭명사상이 더욱 굳어졌다.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중국에서 군신(軍神)으로 떠받드는 관우의 숭배사상이 전래되어 난후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일본이 아니라는 재인식과 함께 적개심이 높아졌으며, 이후 항상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다.


일본 :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뒤떨어져 조선 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였다. 왜군은 조선에 침입하자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문화약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 문화로는 공예품・인쇄술・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품 중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었다. 원래 일본의 도자기 제작술은 유치하엿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능가할 만한 도자기 제조 국가로 성장하였다. 왜란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형편없이 질이 나빠 조선과 명으로부터 수입한 자기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다투어서 자기를 약탈하고, 포로들 중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일본 도자기 제조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유학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많은 서적과 납치해 간 조선 유학자들에게 의하여 발달하였다. 본래 일본의 학문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의 유학이 전래되면서 차차 학문이 발달하여, 성리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 이황의 학문 계통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명나라 : 중국에서는 신종(神宗) 때 있었던 영하(寧夏)의 보바이, 파주(播州) 양응룡의 내란 및 조선의 임진왜란을 가리켜 만력(萬曆)의 삼정(三征)이라고 하는데, 이 삼정은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 삼정 중에서도 임진왜란은 군사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으로나 명나라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으므로 국가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의 여진족이 흥기하여 세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청・명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동양에서 국제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순신의 나라사랑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의 충정은 <난중일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말과 글로써만 나라를 사랑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마음과 행동을 일치하여 실천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깊다.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그는 국토수호 및 나라사랑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 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 걸고 지켜내었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나라사랑 길은 평탄치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시련 속에서도 이순신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1598년 11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노량해전 선상에서 전사하기까지 나라사랑을 굳건히 실천하였다.


이순신의 굳은 나라사랑은 또한 백성사랑으로 이어졌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장군은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견내량파왜병장, 7월 17일)” (67P)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곧 싸움이 벌어질 테니 빨리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384P)


명량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을 먼저 안전하게 피난시킨 이순신은 3일 후, 13척의 전선으로 130여척의 적선과 맞서 싸우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재건, 나아가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전투였는데 그는 이렇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군의 보호 아래 어로와 농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이순신의 나라사랑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실천적인 나라사랑의 삶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의 창의정신

이순신, 그는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리더였다. 거북선을 비롯한 여러 무기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전술, 군 경영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모두가 그의 기발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591년 전라 좌수사가 되었을 때 이순신은 전쟁을 직감하고 새로운 배를 만드는 일에 힘썼다. 조선 초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 전래의 판옥선인 거북선을 기본으로, 일본과의 해전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계량해 철갑선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이순신의 거북선은 전투 시 적진에 돌격하여 적의 진영을 무너트리고, 사방에 탑재된 포를 자유자재로 쏘아댐으로 일본 전선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이 같은 거북선을 맹선(장님 배)이라 부르며 무척 두려워하였다.


이후로 계속되는 해전 중에도 이순신은 일본의 주력무기인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접목하여 새로운 정철총통을 제작하는 등 계속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고, 군병・군량・군기를 도모했다.


또한 이순신의 창의력은 전쟁기간 동안 군 경영의 큰 자원이 되어주었다. 7년의 전쟁기간 동안 이순신은 수군의 의식주를 위한 군량확보, 무기제작과 훈련 등 군 경영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거의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순신은 어로작업, 소금제조 및 판매, 둔전경영, 해로통행첩(선박운행증) 발행 등의 창의적인 여러 행정을 펼쳤다. 특히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린 둔전경영을 통해서는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둔전 지역으로 모아 병력 충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창의력은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무에서 유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순신은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는 큰 힘을 발휘했다.


이순신의 희생정신

이순신이 승리로 이끌었던 여러 해전 중에서도 13척의 전함으로 일본 전선 130여척을 맞아 눈부신 승리로 이끌었던 명량해전은 전략과 전술이라는 승리요인 외에도 전투 직전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에게 이른 말로 유명하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385P)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했던 이 말에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희생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전에서는 전장에서 아군이 많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순신이 지휘하는 해전에서는 연정연승과 더불어 미미한 피해만을 낳은 것도 어쩌면 조선 수군들이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으로 싸움에 임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는 도중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겪었고, 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후에는 아들을 잃게 되는 고통을 겪어 그 괴로움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슴 아픈 시련에도 불굴의 용기와 인내로 오직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 데에만 온 정성을 다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전장에서도 밤이면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자신은 화살을 다듬으며 고생스러운 일에는 먼저 나서서 행하였다.


이렇듯 이순신은 자신의 어려움이 부하들의 고통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하를 사랑하는 참다운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나라를 위한 책임감과 자신을 희생하여 국가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의무감이 여러 해전에서 전승의 기록을 낳고, 나아가 바다를 통하여 조국과 민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순신의 효정신

이순신은 조선 최대의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지만 한편으론 지극한 효심을 지닌 아들이었다. 그가 남긴 일기 곳곳에는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전쟁 상황으로 인해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아픔과 깊은 그리움, 불효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특히 일찍이 부친과 두 형을 여위었던 이순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성은 더욱 각별하였다. 그는 전란 중에도 정기적으로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하였으며 노환으로 인한 병세를 걱정하였다.


“1596년 10월 7일에 수연(壽宴)을 베풀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심정을 다소나마 풀고자 하였다.” (327P)


“1597년 4월 11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336P) 


이틀 뒤인 13일, 그는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그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337P)


전란 속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죄인의 신분이 된 고된 상황에서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더욱이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전장으로 떠나야했던 그는, 자신의 심정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해 하며 그로 인한 죄책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어머니를 잃은 상황에서도 전란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그의 효성은 충과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지극한 효도와 더불어 국가에 충성하는 것 역시 하나로 보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조국을 향한 사랑과 전장에서 자신까지도 희생하는 정신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이순신의 리더십

이순신은 리더십의 귀재였다. 7년전쟁 기간 중 이순신 함대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무기체계, 특히 함포와 거북선 덕분이라고 하겠지만, 이순신 함대가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 의해 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국경 끝까지 피난을 가고 조선 육군이 연이은 참패로 지리멸렬한 위기에 있을 때, 모두가 믿기 힘들 정도로 기적 같은 연승을 거두어 일본 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결국 히데요시의 거대한 야망을 좌절시켜 조・일 7년전쟁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로지 불리한 여건과 제한된 전투력의 악조건을 극복한 그의 탁월한 리더십이 거둔 위대한 인간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군기를 어기거나 탈영한 병사들을 체포해 처형했다는 대목이 수없이 나온다. 다소 잔혹한 면이 없지 않으나 엄청난 군기의 확립은 그가 목표로 하는 군대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엄격함만으로 군사들을 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면 아무리 신분이 낮은 병사들이라고 해도 일일이 그 이름을 장계에 적어 조정에 포상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고, 공평한 신상필벌을 통해 군사들에게 신뢰를 주려 했으며, 그를 신뢰한 군사들이 전적으로 그를 믿고 따랐기에 그의 리더십은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전쟁을 미리 예측하고 이를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과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혁신적인 면모, 관습을 과감히 돌파는 개혁의 의지, 휘하 장수들과 함께 합의와 토론을 통해 의견을 창출하는 과정 등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관습과 타성에 젖지 않고 항상 초유의 위기를 개척해 나간 지도자 이순신. 무한경쟁의 시대에 있어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이순신의 정신과 전략은 오늘날의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난중일기의 역사적 가치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개인적 전장 체험뿐만 아니라 전쟁전의 상황과,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진지와 병영관리에 태만하거나 소홀한 부하관리를 문책·처벌하는 엄중함도 보이며, 거북선의 제작과정과 개전초기의 전황, 전투기록 등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해전상황과 전적, 가족과 친지들과 관련한 개인사, 관리들의 인사조치,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 개인으로서, 그것도 전쟁 상황에서 7년간이나 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깊은 인내와 투철한 자기관리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난중일기>는 단순히 자신의 개인사만이 아닌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로서 전란의 전반에 대해 기록했으며, 군사에 대한 전략·전술회의·지형정찰·군사훈련·비밀훈련 등의 기록이 생생히 담겨있다. 비록 그것이 조선의 국난 중에 생사를 걸고 싸운 전쟁기간의 기록이지만, 그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진실하여 충효와 신의의 표본을 제시함으로써 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또 이순신의 인품과 인간적인 고뇌, 나라에 대한 깊은 충정 등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한 영웅적인 인물의 전기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난중일기>는 손색이 없다. 전쟁기간에서 출세의 과정·투옥·고문·백의종군 등의 모진 풍파와 역경의 인생에서도 끝내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 등 여러 부문에 걸친 기사와 이순신이 출전한 해전에서의 상세한 전투기록 등은 임진왜란과 수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이유로 <난중일기>는 전쟁을 이겨낸 장수이자 전쟁 수행자의 수기이므로 그 자체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적을 연구하거나 임진왜란을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순신이 7년전쟁의 과정을 일기로 기록한 <난중일기>를 통하여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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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1:33:34 *.204.150.153
와우~ 대단한 리뷰인걸.
혜향아, 칼럼뿐 아니라 리뷰까지도 대단해~ 나야말로 너의 리뷰에서 다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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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6.04 11:23:47 *.248.91.49
혜향 ..... 길게 길게 아주 길게 썼네.
뱀처럼 길게 쓰다가...강물처럼 길어졌네
거북선 타고가며 읽다가...황포돛배로 옮겼어...ㅋㅋ

혜향, 아주 아주 재밌다. 글 읽어내리기가....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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