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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일 11시 53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 송찬섭 역어옮김 | 서해문집


Ⅰ. 저자에 대하여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간 나라를 지킨 명장 이순신(1545~1598)이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끝나던 해인 1598년까지의 일을 일기 속에 꼼꼼하면서도 간결하게 담아내고 있다. 물론 이순신이 7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것은 아니다. 한창 배를 타고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든가, 1597년 체포되어 서울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던 동안에는 꽤 오랫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난중일기> 친필 초고는 아산 종가가 보존해 오던 것을 현재 국보 제78호로 지정하여 아산 현충사로 옮겨 와 보관하고 있다. 이것은 정조 19년(1795년)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 『이충무공전서』에 실렸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때 편찬자에 의해 편의상 붙여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친필초고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차이가 있는데 이는 베끼는 과정에서 글의 내용을 임의로 요약하거나 실수, 의도적으로 누락과 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1)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의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 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와의 사이에 회 · 열 · 면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 ·신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이순신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아산은 이순신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순신이 자란 곳이다.



2)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 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부임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 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은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 · 만포진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은 이미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임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고, 후일 철갑선의 세계적 선구로 평가될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했다.


3) 임진왜란의 행적


전라좌수사로 취임한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을 받은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공문을 보냈다(4.15). 경상좌우도 수군은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고 한다. 원균은 비장 이영남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 이순신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 녹도만호 정운 등 막하 장령들의 격렬한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다. 4월 27일에 올린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그로부터 전라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 24척과 협선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 6월 5일의 당항포해전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이 공으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이어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에서는 적선 42척을 분파했다(→ 한산도대첩).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으로, 9월 1일 부산포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 ·김덕령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11월 고니시 유키나가의 막하 간첩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본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13)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한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선 그는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대문궤〉 권24의 〈명량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 24일 어란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8월 29일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으로 이진, 9월 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대첩'과 정유년의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조·명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모, 다치바나 도오도라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 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노량해전의 전과에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아래로 천장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4) 인품과 문학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하여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에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이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끼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을 비롯한 팔사품을 내렸다.


〈난중일기 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 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와 장달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 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2월20일 맑다. 아침에 여러 가지 방비 실태와 전선을 점검했다. 전선은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얼마쯤 구비되어 있었다. 늦게 떠나서 흥양현에 이르렀다. 좌우의 산마다 피어 있는 꽃들과 들가의 향기 어린 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같이 좋은 경치였던가?  p.31


3월29일 맑다. 나라의 제삿날 이어서 일을 하지 않았다.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다행한 일이다.  p.38


4월18일 오후 2시께 경상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 울산의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을 지키다가 모두 패배하였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p.43


7월8일 아침 일찍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하여 넓은 바다에 이르렀다. 적의 큰 배 한 척, 중간 배 한 척이 선봉에서 나와 우리 수군을 탐색하더니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들어갔다. 뒤쫓아 들어가니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이 진을 치고 정박해 있었다.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은 배끼리 부딪치기 쉬우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적이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 생각되기에 한산도 한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혹 육지로 오르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일 것이다.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한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였다. 각각 지자․현자․승자총통 등을 쏘아서 먼저 두 세 척을 박살내니, 여러 배의 왜적들이 기가 꺾여 도망갔다. 여러 장수, 군사, 관원들이 승리할 기세로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알을 퍼부으니 그 형세가 바람과 같고 우레와 같았다.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군을 한꺼번에 거의 다 쳐부수었다.  p.63



그동안 네 차례 출전하고 열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따진다면 이번 부산 싸움에 비길 것이 아니다.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  p.75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2월12일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맑았다. 새벽에 3도 군사가 한꺼번에 출발하여 바로 웅천현 웅포에 이르렀다. 적의 무리는 어제와 같았다. 배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꾀었으나 적은 끝내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웅포까지 쫓아갔으나 그래도 잡아 무찌르지 못하였으니 어찌할꼬? 분하고 분하였다!  p.83


2월22일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p.87


5월4일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p.94


5월13일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하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  p.97


5월16일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p.98


5월 21일 미시(未時, 오후 1시에서 3시)에 비가 와서 농사에 대한 희망이 조금 살아났다. 이영남이 보러 왔다.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p.101


6월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p.108


7월9일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 듯 불어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광양의 적들은 진짜 왜적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뛰어들어 민간의 집들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짜 왜적이 아니라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성에 관한 소문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진주의 일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벌써 닭이 울었다.  p.117


7월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p.120


7월20일 명나라 장수의 보고서가 왔다. 그 보고서의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 쫓겨 도망갔다고 하니 그 거짓됨을 말할 수가 없다. 큰 나라 장수가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따질 것인가? 한탄스럽다.  p.121


8월1일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했다.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  p.124


159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월12일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p.140


1월 19일 소비포 만호로부터 경상도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담하여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원 수사와 공연수, 이극함이 서로 좋아하는 여자들을 모두 다 사사로이 관계하였다고 한다.[141]


2월5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원수(권율)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 유격(심유경)이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들었것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  p.147


2월7일 이 경복으로 하여금 격군을 잡아오도록 내보냈다. 군대를 다시 편성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실었다. 방답 첨사에게 도망한 자를 붙잡아 오라는 명령을 전하였다. 새 군수 김준계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도 명령을 전하여 도망자를 잡아 오도록 하였다.

p.148


2월16일 아침에 호양 현감과 순천 부사가 왔다.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또 그 가운데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일과 장정 넷 가운데서 장정 둘을 전장에 내 보내는 일’을 논하고 있는데 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5월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p.167


5월13일 검모포 만호가 보고하기를 “경상 우수사에 속한 포작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하다가 붙들렸는데, 포작들은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였다. 사복들을 보내어 붙잡으려 하였더니 원 수사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사복들을 결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윤발을 보내어 풀어주게 하였다.  p.168


6월4일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p.172


7월12일 순변사에게 유 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 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p.180


9월3일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p.195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1월1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p.213


3월11일 주부 조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적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내용은 풍신수길이 침략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끌어 모아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고 한다. p.221


4월29일 해남 현감과 공사례(公私禮)를 마친 뒤 두 번이나 약속한 날짜를 어긴 하동 현감은 곤장 90대를 때리고, 해남 현감은 곤장 20대를 때렸다.  p.228


5월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社稷)의 위엄과 영령(英靈)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p.233


7월1일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p.239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2월28일 늦게 나갔더니 장흥 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같이 왔다. 장흥 부사는 체찰사의 종사관이 군령을 가지고 자기를 체포해 가려고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  p.281


3월11일 저녁 때 방답 첨사가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내면서 지휘선에서 물 깉는 일을 하는 군사에게 곤장을 때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방답의 군관과 이방을 붙잡아들여 군관은 20대, 이방은 50대의 곤장을 때렸다.  p.285


7월30일 맑다. 새벽에 갈몰이 들어왔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영의정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었다. 아침에 이진이 본영으로 돌아가고 춘화 등도 또한 돌아갔다.  p.311


윤8월12일 하루 내내 노를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이어서 13일) 어머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진지를 올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p.319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 이순신,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 번역자 해설 ]

1597년 1월 28일 원균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가 되고, 이순신은 전라 충청 통제사가 되었다.

2월 6일 이순신을 체포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가 되었다. 26일에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원균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3월 4일 이순신이 서울 의금부 옥에 갇혔다. 그리고 12일에 이순신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p.332


4월1일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영의정(유성룡)이 종을 보냈고, 판사부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하여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  p.331


4월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p.337


5월21일 박천 군수 유해가 말하기를 중한 죄수 이덕룡이란 자를 고소한 사람이 갇혀서 세 차례 형장을 맞고 다 죽어간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과천 좌수(座首) 안홍제 등이 이 상공(尙公)에게 말과 스무살 먹은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하였다. 본시 안홍제는 죽을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뇌물을 바친 다음에야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p.348


7월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함께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배 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내가 “직접 해안 지역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반가워하였다.  p.369


7월21일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p.371


8월12일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p.377


9월1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진을 우수영 앞 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  p.385


10월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p.394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11월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p.418




Ⅲ.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1592년 임진년부터 1598년 무술년까지 이순신이 진중에서 6년 9개월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일기다. 난중일기는 임란 당시 조선 민중들의 생활상과 무능력한 조정의 모습, 조선의 군사체계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난중일기의 진면목은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이순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을 가장 잘 알려 주는 책이다. 짤막짤막한 문장을 통해, 때로는 서정적인 시구를 통해 이순신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다. 7년간의 진중 생활 중에는 반복적인 일기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의 사상, 생애, 활동의 진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었다. 이순신은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보내놓고 걱정스럽다 못해 병이 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난중일기>는 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무장 이순신이 쓴 진중일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치열한 격전이 있던 날도 일기는 거르는 법이 없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도 기록했다. <난중일기>를 통해 임진왜란의 구체적인 경과와 전술, 병사들의 심리 등 전쟁의 여러 정황들을 파악할 수 있다. 또 다정다감하면서도 과단한 성격의 소유자인 이순신의 가족애와 부하들에 대해 엄한 장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압박하여 왔던 인물 원균에 대한 기록도 ‘난중일기’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어머니와 아내, 아들 등 가족을 걱정하는 인간 이순신의 진솔한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점에서 ‘난중일기’는 단순한 전쟁 일기가 아니라 전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한 장군의 감정과 심리까지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해문집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난중일기>는 전쟁 중에 장수로서 기록해야할 일들을 간략하게 적어둔 책이다. 그만큼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이순신의 감성적인 부분을 보려면 이순신이 주인공인 <칼의 노래>를 읽어야 한다.


둘째,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라는 기록적 의미를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최전선에서의 기록이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또 다른 책은 임금의 행렬을 따라가면서 전쟁의 비참함을 문장에 담아낸 <징비록>이다. 이 두 권을 같이 읽으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임을 보여준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병마이다. 신경성 위염과 토사곽란에 시달렸으며 식은땀을 흘리며 긴 밤을 뒤척인 적이 수없이 많았다.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시고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이날 밤에 속이 답답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까지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어두운 무렵에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고 눈물짓고 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병마와 싸워야 했고 가족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변화의 적들과 끝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두말할 것도 없고 무능력한 조정과 선조의 의심, 가소로운 원균의 모함, 명나라 유정과 진린의 모멸과 배신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깊은 절망을 극복하고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7년간의 변화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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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6.04 11:11:42 *.248.91.49
홍영도 이순신 장군이 좋은가봐...
필꽂힌 리뷰 참 정갈하다.

이 열정 그대로 갖고 백범에게로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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