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9년 6월 7일 21시 41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1949년 6월26일 정오 조금 시각.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일요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네발의 총성이 들렸다. 육군소위 안두희(당시32살)가 쏜 총탄에 백범 김구는 머리를 책상위에 얹고 손은 테이블 한 모서리를 쥔 채 쓰러졌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당시 46세. 경기도 부천 버스 운전사)에게 안두희는 피살되었다.


  대한민국의 큰 스승 이셨던 김구 선생님의 죽음과 또 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의 피살의 모습이다. 1996년 그때 당시 나의 마음은 이러하였다.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범인의 배후를 캐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니.’란 놀라운 마음과 함께 ‘그렇다고 또 그사람을 죽이기까지야...’란 복합적 감정과 함께.

  백범 김구선생. 그의 삶을 그대로 당신의 언어로 표현해 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첫째,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 이었다.
둘째, 조국에 돌아와 마곡사 법당문 앞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앞에 다시 서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라고 되어 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처럼 그의 삶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대상인 조국 한반도의 역사처럼 굽이굽이 굴곡이 많은 삶이었다.

   

1. 태생과 백범의 의미

  본관은 안동이며 백범 본인이 밝혔듯이 그는 경순왕의 자손이다.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구(九)로 개명했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그가 이름과 호를 고친 이유는 이러하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의 여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였던 곽낙원(郭樂園)이다.

2. 사상의 배경

  그의 사상의 본격적인 삶은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히는 학업으로써 시작 되었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그의 이때의 상황을 자신의 말로 들어보면,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그뒤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 진사 안태훈(安重根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과 동문인 고능선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고능선 스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게 된다.

3. 치하포 사건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국모보수사건). 당시 그의 마음은 이러하였다.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法司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1898년 그는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4. 교육과 계몽사업에의 헌신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류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 교장을 겸했다. 1909년에는 해서교육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5. 망명활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그후 충칭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고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때 기억될만한 사건 하나가 일어났으니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날 홀연 우리 임시정부 정청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그중 중요한 일화는 한 청년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겁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왜적의 조기항복에 대한 당시의 백범 선생의 마음은 절절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6. 가족

  영웅의 삶에서 가족과 관련된 흔적의 기억이 과히 행복하지 않았었는데 역시 김구 선생님 또한 그러하였다. 결혼도 우여곡절(최여옥 여사 약혼 중 사망 등)이 많았고, 세딸들의 연이은 죽음과 함께 아끼던 첫째 아들 김인도 해방을 맞기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덕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 보기도 하였다. 그후 평범한 여성으로써의 가정생활 보다는 백범의 독립운동을 고생스럽게 지켜만 보아야 했던 아내 최준례도 일찍이 흥구 폐병원에서 영원의 길을 떠난다.

  그래서인지 백범 그는 노년이 들어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①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貴)하면 궁(窮)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②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7. 27년 만의 감격의 귀환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귀국했다. 그뒤 전국을 순회하며 자유·평등·행복의 신한국을 역설하며 국가건설에의 발을 내디뎠다.

8. 백범일지 그후의 활동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로 결의되자 반탁투쟁을 주도했다. 이 시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삼천만동포에 경고함'이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진영의 재편성, 새로운 합작위원회의 구성, 신탁통치반대, 미소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 자주독립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다. 그는 즉시 독립을 열망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족자주와 반탁을 일치시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1947년 11월 유엔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며,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제의가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에 그는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암살되기 한달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9. 백범 김구의 사상 및 의의

  당시 또는 현재에도 그가 가진 이론과 사상에 대해 갑론을박(甲論乙駁)의 요소가 없진 않으나, 백범이 가지고 있었던 나라에 대한 충절과 순수한 마음에 대해서는 이견(異見) 사항이 없을 것이다. 그가 일평생 품었던 사상과 민족철학에 대해서는 ‘나의 소원’ 편에 잘나타나 있는데 몇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②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의 일생과 민족주의적인 그의 사상이 현시대에 누구에게나 공감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그가 처한 환경에서 그가 가졌던 혹은 내걸었던 사상들은 백범의 최선의 방편 이었을 것이며, 나아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품었던 그의 혜안(慧眼)의 실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님에 대한 기억으로 학창시절 가장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나의 소원’의 이같은 첫문장 일것이다. 조국에 대한 충정과 절절한 마음을 이보다 더잘 표현한 문장이 아마 있을까보냐 하고 생각할 정도로 이 내용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지는데 김구 선생님이 머리말에서 밝힌대로 상권은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인.신)에게 본인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씌어진 것으로 자신의 사변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하편은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본인의 경륜과 정황, 소감 등을 알릴려고 쓴 것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백범 자신이 언제 어디서 죽음을 당할지 몰라 유서 형식의 내용으로 일일이 공을 들여 작성한 점이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나뉘어 보고 그에 관련된 인용구로써 함께 살펴보자.  


1. 독립관 & 애국관

   백범 김구 선생님은 알다시피 한평생을 대한민국의 독립에 바친 인물로써 그의 자주적인 독립관 및 애국관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보듯 투철함 그자체이다.

가.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라. 왜적이 조기항복을 했을 때 그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 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이같은 그의 사상에는 외세의 도움에 의한 독립이 아닌 철저한 그의 자주독립관의 배경이 드리워져 있음을 알수있다.

2. 터닝 포인트

  여느 사람이 그러하듯 백범 선생님 당신이 걸으셨던 그 애국으로의 길 밑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가. 첫 번째 터닝 포인트 - 글공부의 시작 & 백범의 자평 

  당시의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유학생 또는 글을 배운 사람들의 언행일치(言行一致)적인 행동들이 많았다. 즉, 배운 바대로 그들의 조국이 위기에 닥쳤을 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백범 본인이 밝힌대로 그가 어릴 때 학문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면, 새로운 세상에로 나아감에 대한 기회가 없었다면 과연 그의 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역사에서 이같은 ‘만약’ 이라는 가정에 대해서는 전적인 주관성으로만 인식될 것이지만. 

  ㄱ.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느냐, 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ㄴ.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계속 부모님께 말씀하셨다.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을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농꾼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나. 두 번째 터닝 포인트 - 동학을 통한 실천 행동에로의 참여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다. 세 번째 터닝 포인트 - 치하포 사건

  백범의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의 직접적인 발단으로 치하포 사건을 들수있다. 즉,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때려 죽인 것이다. 그는 후조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 주신 교훈 - 가지 잡고 나무을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 을 직접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백범이란 존재의 세상에 대한 각인이 아로새겨졌고, 그의 이 행적은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그의 행동의 표식으로써 따라다녔다.

3. 인연

  백범에게도 많은 영웅들처럼 인생의 바다를 건널시 그의 삶의 성장과 이정표가 되어준 인물들이 있었다.

가. 스승 고능선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였다.

  고선생은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었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나. 백범의 소송에 전력하느라 전재산을 탕진한 김경득

  백범은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를 도와준 김경득을 통해 본인의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할수 있었으리라.

  김경득은 마지막으로 김구에게 다음과 같은 단율(單律) 한 수를 남긴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다. 동지 유완무

  백범은 유완무를 통해 현실적인 세상에로의 참여를 한걸음더 나아갈수 있었다. 유완무 그는 백범이 장차 큰인물이 됨을 간파하고 그에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ㄱ. ‘나는 유완무요. 오시느라 무척 고생하셨소. ’남아가 어디에 있든지 만날수 없으랴‘는 말이 오늘 창수 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

  ㄴ.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4. 교육사업

  백범은 을사년에 동지들과 함께 상소 등의 방법으로써 일제에 항거 하였으나 대중들의 반응은 그렇질 않음을 보고,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것을 통해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오직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자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백범은 후세들을 교육으로써 애국심의 앙양 및 그들을 일깨우는 방법을 택하였고 학교의 설립 및 교장으로써의 실행으로 나아갔다.

5. 사고의 전환

  당대 및 현시대에서 존경받는 백범이지만 그도 처음부터의 영특함 보다는 여러 과정을 통한 사고의 성장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인용구로써 이는 드러난다.

가. 안태훈(安重根의 아버지)의 사례와 옥중생활을 통한 성장

  이 일(머리를 깎는 등)이 안진사의 인격으로 된 것이었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토벌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서학西學을 한다는 말이 괴이. 모름지기 의리 있는 선비라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저승에서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이승에서 머리 깎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 이런 백범이 옥중생활 동안 감리서 직원과의 만남 및 그들의 신서적들을 읽어보라는 권유에 의해 많은 사고의 변화가 생겼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백범이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 라고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洋學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승 고능선과의 논쟁

  ㄱ. 나는 그사이에 깨달은 세계 사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또 선생님(고선생)께서 평소에 교훈하시던 ‘존중화양이적(尊中華壤夷狄)’ 주의가 정당한 주의가 아니라는 것과,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이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6. 김구 선생의 면면

  민족의 지도자로써의 행보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성품의 당당함과 인간적인 고뇌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 

가. 무작정 소리내어 우는 것이 우리 목숨을 구하는 길이 아니니, 뱃일을 사공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선객 모두가 일제히 힘을 합해서 빙산을 밀어내자고 하였다. 빙산이 순식간에 물러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추위 속에 몸을 움직이면 운동이 될 터이니 유익할 것 같았다.

나.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다.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라.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마.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않았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바.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佛氏)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護法善神)께 의뢰하여 물리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사. 성장한 청년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아.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그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 환등(幻燈)기구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라고 절규하였다.

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재명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차. 세 번째 투옥과 고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카. 그놈들이 또한 정신을 잃도록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학생 중에는 누가 너를 가장 사랑하더냐?’

  하는 말에, 졸지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를 하던 최중호를 말하고선 혀를 끊고 싶었다.

타.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파. 무룻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하.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7. 어머니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소설 ‘어머니’에서는 이념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아들의 어머니가 서서히 의식화되는 과정을 그려 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여사 또한 아들을 통해 여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로써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 근 일고여덟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데서 네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나. 백범 선생이 출옥구 고향으로 돌아와 후배들의 술판을 함께하고 있을때

  ‘네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 하였더냐?’

다. 9년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인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라.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獻壽)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마. 아들의 가슴에 박힌 총탄을 보고

-->자네의 생명은 상제(上帝)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8. 투쟁관

  당시 및 현시대에서 백범의 사상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것 중에 하나가 그의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관이다. 그가 이같은 선택을 하게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살해 했을 때의 당당한 명분으로써의 동일한 맥락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즉,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본인의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행했다고 그는 말했다. 즉, 그는 이등박문 저격을 단순한 개인의 암살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였다고 동양평화론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백범의 투쟁관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기에 그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등을 주모 하였던 것이다.


  '백범일지‘ 책을 대했을 때 학창시절 읽지 못하고 지금에서야 읽는다는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조금은 빨리 읽을수 있겠구나 라는 가벼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무게는 여느책 못지않게 만만치 않았다. 당시의 환경 및 여러 인연에 의한 그리고 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독립운동가로써의 삶은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효창공원을 들리면서도 막연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나의 흔적의 부끄러움과 함께, 그의 사상 및 철학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관련된 여러 사이트들을 검색 하던중 한국경제 2005년 7월 24일자 박성래 교수(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의 ’김구와 안중근 집안‘이라는 다음과 같은 글도 읽게 되었다. 


  '백범일지(白凡逸志)'를 권하는 사람이 많고,김구(金九,1876~1949)를 숭배하는 한국인도 많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백범일지'는 그저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도 존경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른 모든 역사자료가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특히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김구는 그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조국 해방을 맞아 상하이에서 귀국 비행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5년 8월15일이 지난 얼마 후의 일이다. 그는 그곳 중국 경찰에 접촉해 거기 살고 있던 조선인 안준생(安俊生,1906~195 1)을 잡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중국 관헌이 이 부탁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백범일지'의 기록이다. 바로 이 대목에는 김구 자신의 설명이 붙어 있다.

  "安俊生은 倭놈을 따라 本國에 도라와 倭敵 伊藤博文에게 父親 義士의 罪를 謝 하고 南總督을 애비라 稱하였다." 몇 년 전 '백범일지'를 다시 읽다가 이 부분 에서 나는 너무나 놀랐다. 가장 잘 정리된 '백범일지'의 주해본은 1997년 도진순 교수가 출간했는데,이 부분에 붙인 주석을 보면 안준생이 안중근의 아들이며 남 총독이란 1936~1942년 사이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 임을 알 수 있다.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아들이 일본 인들에게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빌고 다녔다니,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세상이고,또 역사인가?

  김구가 그를 잡아 죽이고 싶어했다는 대목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백범일지' 첫 부분을 읽노라면 그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던가가 잘 묘사돼 있다.그런 관계를 잊고,왜 김구는 안중근의 아들을 잡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걸까? 그것도 이미 조국은 해방된 다음인데 말이다. 안준생은 그렇게 그의 미움을 살 정도로 일제 시기에 일제에 빌붙어 대단한 성공이라도 했더란 말인가? 조금 더 조사해 보니 안준생은 그 후 홍콩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귀국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타고 귀국하던 덴마크 배에서 병을 얻어 선상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무덤은 부산시 초량의 금수사(金水寺) 근처에 있었다는데,몇 년 전 내가 답사해 본 결과로는 그런 무덤은 거기 없는 듯했다.

  안중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6살에 죽었고,안준생은 그 둘째 아들이었다. 안준생에게는 1남2녀가 있었는데,몇 년 전까지 이들은 모두 미국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면서 엉뚱한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이들은 애국자 안중근의 손자이기 때문에 무슨 대우라도 해줘야 할 것이 아닐까 ? 하지만 그들은 매국노 안준생의 아들 딸로서 그런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듯도 하다. 그렇다고 연좌제도 사라진 오늘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김구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안중근 집안과 그리도 가까웠던 김구는 왜 그를 끔찍이 사랑했다는 안태훈(안중 근 아버지)의 손자 안준생을 죽여 달라고 외국 경찰에 부탁까지 했던 것일까? 또 아무리 살기 어려웠어도 그렇지,어떻게 천하의 애국자 안중근의 아들 안준 생은 일본인들에게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빌어야 했던 것일까? 안중근 부자는 지금 지하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그리고 김구와 안중근은 또 무슨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의 질곡(桎梏)이 여기에 있다. 김구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백범일지'는 읽기는 편하지만,전혀 무게가 없다. 사료로서는 가치가 있지만,그 뿐이다


  옳고 그름이 혼돈이 되는 이시기에 민족 독립운동가로써의 빛남과 함께 그의 행위들은 현재의 시각으로 여러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수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평가의 이면이 아닌 그의 삶에 동참하다 보면, 그의 나라를 위하는 진정한 마음의 흔적과 궤적이 영원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에서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를 위로하듯.  


<그 이야기 속의 한 동료가 죽자 사람들이 슬퍼했다.


그러나 어떤 동료는 말했다:


'죽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요? 무엇이 죽었을까? 예르고(죽은 사람의 이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죽었나요? 그에 대한 나의 동지로서의 사랑이? 그의 정신적 노동의 기억이? 그러한 노동이 죽었나요? 영웅으로서의 그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말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죽었나요? 그가 가졌던 가장 좋은 것들은 나에게서 결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그가 죽었다"고 말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진리와 행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고통을 당한 그의 인간성과 그의 영향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우리의 가슴속에 항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 속에 함께 살아남아 항상 빛이 되어 주는 '생명'을 너무 쉽게 매장해 버리지 맙시다.>


IP *.147.132.7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