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산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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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의 텃골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범일지>에 나타난 김구 선생의 일생은 크게 다음의 4 단계로 살펴볼 수 있다 :
(1) 성인으로의 성장 단계 : 19세에 황해도 동학 농민 전쟁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였고, 21세에 치하포에서 국모 민비의 시해 사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장교를 살해하여 인천 감옥에서 1년 7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겪었다. 그 이후 극적으로 탈옥하여 삼남 지방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와 평양 영천암에서 피신을 위해 승려 생활을 하다 24세에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2) 교육자로서의 애국 계몽 운동 : 25세에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교육과 애국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28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34세에는 재령 보강학교 교장을 겸했으며, 해서교육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35세에 안약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여덟 번의 심문에 일곱 번 기절하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절개를 지켰다.
(3) 임시정부 시절 독립 운동 : 백범은 44세 때인 1919년 3.1 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내무총장, 노동국총판, 국무령을 거쳤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 그후 1940년에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인 주석이 되었으며, 충칭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4) 환국 이후의 자주 독립 투쟁 : 해방 후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에 반대하여 반탁운동에 앞장섰고, 1948년에는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직접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이후 남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과 소련 군대의 철수와 평화통일운동에 앞장 서다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조국 통일의 염원을 간직한 채 74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역자의 눈에 비친 김구 선생
<백범 김구 평전>의 저자 김삼웅 교수는 김구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나는 백범의 높은 산맥과 깊은 골짜기를 탐사하면서, 백범의 생애에 일관되게 흐르는 ‘수맥’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정도론(正道論)’이다. 백범은 철저하게 사도(邪道)를 배격하고 정도를 택하였다. 그가 맞은 시대는 고단한 격동의 연속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평탄한 길도 있었고, 안일한 길도 있었다. 현실 노선도 있었고 비현실 노선도 있었다. 타협 노선도 있었고 원칙 노선도 있었다. 그때마다 백범은 망설이지 않고 정도를 택하고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이 비록 비현실적이고 고난의 길이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70 평생에 걸쳐 왕조시대, 망국, 독립운동, 임시정부, 해방, 분단, 신탁통치, 건국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도정에서, 그는 한 번도 민족적인 운명과 개인적인 운명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정도에서 비껴가지 않았다.”
백범은 환국 후 통일 정부 수립 불가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하는 것이다. …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이 없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 명령이니, 이 지상 명령에 순종할 따름이다. 우리가 망명 생활을 30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 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론’을 내세우는 영악한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백범의 길은 원칙주의 노선이었다.
<백범일지>의 또 다른 역자 배경식씨(<올바르게 풀어 쓴 백범일지>의 역자, 너머북스)는 역자 서문에서 김구 선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백범은 머리가 되려고 다투지 말고, 자기를 낮추어 발이 되기를 노력하라고 호소했다. “백정이나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것이 백범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남들은 총장이니 차장이니 ‘대가리’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도 백범은 자신을 낮추어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했다. “자격도 없는 자가 감당 없이 높은 자리만 앉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백범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청년들에게 ‘역수어 정신’, 곧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될 것을 강조했다. “죽은 고기는 목적이 없지만 산 고기는 가는 목적이 있다. 바라건대 청년들은 물 흐르는 대로 순류하는 죽은 고기가 되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목적 있는 산 고기가 되기를 바란다.” ‘역수어 정신’은 모진 시련과 실패를 딛고 마침내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 백범 자신의 삶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대가리 싸움을 하지 말고 발이 되라고 한 ‘겸허의 정신’과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라는 ‘역수어 정신’, 이것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백범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백범 출간사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13]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알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민족에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15]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 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15]
상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아버님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27]
그 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29]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34]
2. 시련의 사회 진출
관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로 자신의 상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 적용해 나가는 것이 첩경이다.[38]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39]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40]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그대가 동학을 해 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43]
“손님과 면담하는데 이렇게 무례한 것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멸시하는 것이다.”[49]
정씨는 “안진사가 밀사를 파견한 진의는 군사적인 원조나 계략이라기 보다는 나이 어린 형의 담대한 기개를 아낀 것이니 염려말고 같이 가자”고 힘써 권고하였다.[55]
특히 안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나의 관찰로도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도 교만한 및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더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58]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58]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름이 답답하던 참이었다.[61]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어 나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62]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께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63]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듯 하였다.[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64]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65]
3. 질풍노도의 청년기
“아비만큼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아드님에 대해 좀 더 알는지 알겠소?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니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86]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 “그렇다.”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94]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96]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를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다."[97]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100]
100)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 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100]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가 없었다.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103]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106]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107]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108]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오?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108]
“당신, 안심하시오. 어쩌면 이렇게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오?”[109]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109,110]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114]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115]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118]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126]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 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128]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ㅜ끄러움을 어찌 견디랴?’[131]
4. 방랑과 모색
2, 3년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감옥세계에서만 생활하다가 넓은 세상에 나와서 가고 싶은 곳을 활개치며 나노라니 심신이 상쾌하였다.[137]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는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137]
가을 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151]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 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 쳐내야 하는 것이었다.[155]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156]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 [162]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니 유완무란 사람이 참으로 나를 위하여 그처럼 성의를 썼다면 만나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나를 찾기 위해 정탐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묘한 계책이랄 수 있었다.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71]
"나는 유완무요, 오시느라 무척 고생하셨소. '남아가 어디든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는 말이 오늘 창수 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172]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될 것입니다.”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3]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중략)...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178]]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179]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 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180]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를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를 다리 살을 배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181]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183]
5. 식민의 시련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 사상이 박약한 것이다.[196]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203]
다시는 묻지도 않고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고통을 느꼈으나, 마지막에는 눈 내리는 밤 달빛 적막한 신문실 한 모퉁이에 가로 누워있게 되었다. 얼굴과 전신에 냉수를 끼얹은 느낌만 날 뿐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220]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1]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225]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228]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로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229]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238]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241]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244]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246]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247]
"당신, 일본 법전을 보지 못했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 각 죄인을 방송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란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 하고 기도합니다."[248]
옥중의 고통은 여람,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울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252]
그리하여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254]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264]
"일본법에도 신앙 자유가 있고, 감옥 법에도 수인들이 불교만 신앙하라는 조문이 없는데, 어디 근거하여 이같이 무리한가? 일본의 눈에는 도인권이가 죄인이라 하나, 신의 눈에는 일본인이 죄인 될지도 알 수 없다."[265]
"수인의 상표는 개전하는 상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인데, 나는 당초에 죄가 없었고, 수인이 된 것은 일본 세력이 나보다 우세한 것뿐이거늘, 상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265]
"홀로 우뚝 솟아 넓은 도량을 펼치고, 천하를 걸어감에 누가 나를 따르랴."[265]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267]
6. 망명의 길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273]
해주 검사국과 경성총감부에서 각 지방 보고를 수집하여, '김구'라는 책에 나의 일언일동을 상세히 기재하였을 것이지만, 어떤 정탐이라도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보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몸이 본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줄 알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이 왜에게 알려졌다 한다. 나는 이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286]
대개 사람이 귀(貴)하면 궁(窮)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288]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289]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290]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296]
어떤 사람이 나이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사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298]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307]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323]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325]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 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 하리오.[352]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353]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367]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한수 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그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 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367]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는 것보다 못하네."[371]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378]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379]
6. 해방 전후의 대륙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395]
군대 식사 한 가지만 왜병과 비교해 보더라도 왜적이 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하겠다.[397]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 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 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402]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406]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423]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424]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로 한 수풀을 이루고 살고 있다.[425]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중략)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425]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426]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427]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427]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430]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을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호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431]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께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삶의 길을 알려줄 요량으로 적으신 자서전 형식의 기록이다. 여기서 ‘일지’는 ‘日誌’가 아니라 ‘逸志’이다. 즉, 날마다 적는 기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기록, 곧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배울 점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김구 선생께서 가장 즐겨 쓰던 시로서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야(踏雪野)’이다. 선생은 이와 같이 사셨다. 모두가 현실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며 타협을 이야기할 때 앞에 있는 커다란 벽을 느끼면서도 두려움 없이 그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현실에 막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 ‘민족 주도에 의한 자주 독립의 필요성’이라는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셨다.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원칙을 따라 정도를 걸었으며, 그리하여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노력하였다.
귀국 후 그의 태도에 관한 의미 있는 일화가 <백범 김구 평전>에 실려 있다 :
“이승만과 그를 떠받드는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고 공산당의 극좌 세력으로부터도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험악한 그 시기의 어느 날에 어떤 이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내 정치 지도자들을 위로하는 주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때에 남한에는 전력이 태부족이어서 북한에서 전력이 공급되고 있었다. 전기보다는 남폿불이나 촛불이 차라리 조명의 주종이었다. 얼마쯤 연회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다. 장내가 암흑이 되는 순간에 그 어둠 속에서 좌석은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백범 노선을 따르는 정치인들에게는 쉼 없이 생명의 위협이 가해지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러나 정전은 잠깐이었다. 곧 전기가 들어왔다. 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김구 선생만이 홀로 그 자세대로 그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계시더라는 것이다. ‘테러의 괴수’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김구 선생은 진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다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38,539쪽]
삶과 죽음에 초탈한 자세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그는 이미 70 평생에 숱한 삶의 투쟁 속에서 가족과 동료를 포함한 수 많은 사람의 사망을 목격하였으며, 원칙과 의리를 쫓는 사상 속에서 이미 죽음을 초월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결국에는 자연사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예감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원’에 대한 감동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수록하기 위해 특별히 썼다는 ‘나의 소원’을 읽으면서 천하의 명문장을 보는 감동과 그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의 느낌이 한꺼번에 들었다.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서 듣는 문화의 이야기는 신선함을 넘어 전율이 솟는 깨달음이자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선생의 ‘문화국가 건설론’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국가 과제일 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궁극적인 바람이고 이상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먼 앞날까지 내다보는 그의 안목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면서 또한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킴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은 시간이 날 때마다 두고두고 읽어 보리라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의 이름 변천사
<백범 김구 평전>에는 선생의 이름과 아호의 변천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의 이력을 이름의 변화 과정에서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여기 소개한다 :
“백범은 저보성의 집에 은신하면서 다시 변성명을 하였다. 성은 할머니의 성씨를 따라 장씨로 하고, 이름은 진구 또는 진이라고 하였다. 고향은 광동인으로 행세하였다. 아명 창암에서 도학에 입도한 후 창수로, 일본인 스치다를 처단한 후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어서 법명을 원종으로, 환속하여 삼남 지방을 방랑하면서 한 때 ‘김두래’란 변명을 쓰기도 했다. 전북 무주의 유학자 유인무의 집에 머물 때에는 이름을 구(龜)로, 자를 연상, 호를 연하고 하였다. 1912년 신민회 사건과 안명근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으로 바꾸고, 가흥에 피신하여 이름을 진구 또는 진이라고 변성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상해 임시정부 시절 이봉창 의거 때에는 백정선이란 가명을 쓰기도 했다. 혁명가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이름과 아호의 변천 과정에서 살피케 된다.”
역자에게 배울 점
본 저서에서 특히 돋보이는 부분은 도진순씨의 세밀한 번역 작업의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 역자가 밝혔듯이 김구 선생이 주로 기억에 의존해 원본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시기에 오류가 있거나 인명, 지명 등에 착오가 상당히 있어서 이를 적절히 수정하고 각주에 다양한 상황 및 내력을 설명하는 등의 보완 작업에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지도, 역사적 사진 등 다양한 시각 자료를 적절히 추가하여 선생의 시대별 움직임을 잘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배경식 씨는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번역서 <올바르게 풀어 쓴 백범일지>에서 총 58개의 ‘깊이 읽기’라는 컬럼들을 책 중간 중간에 삽입함으로써 본문에서 잘못 설명되었거나 논쟁이 될 만한 내용을 설명하고 풀이함으로써 <백범일지>에 드러나 있지 않은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어 백범의 삶을 재구성하는 시도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돌베개본이 1997년 출간된 지 이미 10년이 넘어섰고, 2002년 개정된 이후에도 백범에 관한 새로운 자료와 연구성과가 쏟아져 나옴에 따라 새로운 주해서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라고 배경식 씨는 밝히고 있다. 이 ‘깊이 읽기’ 컬럼은 별도로 다시 한 번 통독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잘 구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역자들이 번역을 함에 있어 원칙을 세우는 점이 돋보였다. 도진순 씨는 (1) 현대성의 원칙, (2) 순수성의 원칙, (3) 비평성의 원칙, (4) 현장성의 원칙, (5) 보완성의 원칙을 세웠다. 배경식 씨는 (1) <백범일지>의 분석을 통해 다양한 모습의 ‘인간 백범’을 재발견 하는 것과 (2) 비판 정신의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 자세한 내용을 떠나 이렇게 번역에 있어 원칙을 세우고 그를 지키려 노력하는 자세는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중요한 자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역자들의 노력은 윌 듀란트의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느꼈던 역자에 대한 실망감과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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