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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03시 04분 등록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길은 내 안에 있다>

ü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 신성 만을, /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 (religiousness)의 시작이다.

 

<서문>

ü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 (fact)과 진실 (truth)의 차이이다. 보통의 역사학은 사실들에 대해, 물질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룬다.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의식의 사건들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14).

ü  인간은 확실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목한다. … 인간은 시간 너머에서, 공간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른 말로 하면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그만큼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다 (14).

ü  언젠가 우리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역사 전체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 미래의 역사학은 고타마 붓다가 깨달았을 때 그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며, 깨달음 후 그가 42년간 육체 안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다. 그리고 그 42년 동안 일어나고 있었던 그 일은 단지 그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며 그것은 의식 속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의식은 계속되며 의식의 순례는 끝이 없다 (14~5).

 

<1부 평범한 인간: 전설 뒤의 숨은 역사>

ü  그대는 아직도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큰 차이가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잠들어 있었고 그대도 언젠가는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18).

황금빛 어린 시절의 일별들

ü  나는 그대가 이해하는 영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로 볼 때는 결코 영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 나에게 있어 영성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19).

ü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

ü  그 어린 시절 동안 나는 너무도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25).

ü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전염성이 있다 (27).

ü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료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6).

ü  만트라: 진언.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부터 널리 행해졌다 (36).

ü  자이나교: 인도에 현존하는 유서 깊은 종교로 기원전 6~5세기경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신론적 종교이다. 고타마 붓다와 동시대 인물인 마하비라에 의해 그 종교적인 체계가 확립되었다. 살생금지와 무소유 등의 계율에 맞는 엄격한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며 여러 가지 점에서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37).

ü  자이나교도들은 자신을 성취한 뒤 그의 깨달음이 아름다움에 너무나 깊이 빠지고 너무나 취해서 온 세상을 잊은 사람을 일컬어 어리한따라고 부른다. 아리한따는 단어의 말 그대로의 의미는 적을 죽인 자이다. 그리고 그 적은 에고이다 (38).

ü  아르하뜨: 아라한 (38).

ü  에고: 자아 인간이 라고 믿는 허상, 소아. 에고의 허상을 부수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실체인 진아, 즉 아트만을 회복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38).

ü  그대는 스승과 선생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다. 스승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준다. 선생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세상에 전해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 (40).

ü  나는 자신을 안 모든 사람들의 발 밑에 절합니다’. 어떤 차별도 없이 그들이 힌두교도이든, 자이나교도이든, 불교도이든, 기독교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상관이 없다 (40).

ü  자이나교는 세상에서 가장 금욕적인 종교이다. 달리 말하면 가장 피학적이고 가학적인 종교이다 (43).

ü  자이나교는 윤회를 막기 위한 하나의 완전한 과학이다 (45).

ü  잊지 마세요. 당신은 아직도 이렇게 분노로 가득 차 있으니 다시 태어나야 할 거에요 (47).”

ü  샨띠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침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가 기본적인 의미이다 (49).

ü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 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이다. 아마도 이 세상의 가장 마지막 해방은 어린이의 해방이 될 것이다 (51).

ü  타고난 말썽꾸러기가 아니고서는 붓다가 될 수 없다. … 나는 조르바 붓다이다 (53).

ü  조르바: 그리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인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1947)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열정과 춤과 축하의 삶을 사는 사람의 상징으로서 오쇼가 자주 인용함 (54).

ü  나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다. 사실 나는 동양과 서양, 높은 것과 낮은 것,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신과 악마를 나누지 않는다. …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모든 것을 다시 합친다 (53~4).

ü  나는 자학적인 것은 무엇이나 반대해 왔다. … 나는 고행적인 것은 무엇이나 반대해 왔다. 그 시절에는 고행이라는 단어조차도 몰랐지만 나는 뭔가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54).

ü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55).

ü  이제 이 나이에 스승을 바꾼다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구나.” …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56).”

ü  반역적이지 않은 사람은 종교적일 수 없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 (57).

ü  헤어짐은 그 나름의 시를 지니고 있다. 사람은 단지 그 헤어짐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이다. 그리고 한껏 그 깊이를 체험해야 하다. 그 때 슬픔 그 자체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기쁨이 나온다. … 나는 나나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헤어짐이었다. … 그럼에도 그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59).

ü  산야신: 전통적인 의미의 산야신은 세상을 포기한 영적 구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쇼가 새롭게 제시하는 산야신은 세상 속에 남아 있지만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 명상과 각성을 가져오려 노력하는 구도자 혹은 제자를 의미한다 (60).

ü  마하비라 (Mahavira): BC 448?~BC 376? 자이나교의 창시자. 붓다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 부모가 죽은 후 출가하여 12년의 고행 끝에 잠브히야가마 근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 철저한 무소유를 주장하여 나체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60).

ü  그 때 나는 죽음이 축하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배웠다 (61).

ü  사랑에 빠는 데는 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신뢰를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62).”

 

반역적인 영혼

ü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67).

ü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있어 죽음과의 첫 조우였다. … 나는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죽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그 원소들은 육체를 빠져나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그것은 나에게 전에는 알지 못하던 하나의 방향을 아니 하나의 차원을 주었다 (68).

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그대를 감쌀 대 마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68~9).

ü  그는 천천히 죽어갔다. 서서히 나는 그에게 죽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거대한 침묵을 볼 수 있었다 (70).

ü  그녀는 말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충분히 살았단다. 더 이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또 내게 말했다. “잊지 마라. 지금의 순간들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이다. 결코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마라. 주어지는 만큼으로 충분하다 (71).”

ü  저는 먼저 완전히 성공하고 나서 그 모든 성공을 차버리고 방랑자가 되고 싶어요 (76).

ü  아주 가끔씩 사람은 야생 인간이 된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붓다가 그랬고 자라투스트라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88).

ü  싯다르타와 똑같이 나도 강과 사랑에 빠졌다. … 새벽 세 시부터 나는 강과 함께 하곤 했다. 하늘은 별들로 가득하고 별들은 강물에 반사된다. … 나는 밤의 어둠 속에서 별들과 함께 강을 보며, 대양을 향해 흐르는 강물과 함께 춤을 추었다 (98~9).

ü  나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강에 대한 그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 … 너무나 많은 것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서서히 전 존재계가 나에게 있어 하나의 강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재계는 단단함을 잃어버렸다. 존재계는 액체가 되었다 (99).

ü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100).

n  이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다. 즉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이미 다르다. 작년에 핀 꽃과 올 해의 핀 꽃이 다름이다.

ü  인간은 명사들도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100).

ü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돌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다 (104~5).

ü  그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대 자신이 되지 말라고 배웠다. … 이 열망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 (105).

ü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 (106).

ü  종교는 종교적인 특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몇 가지 특질이 빠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유머 감각이다 (108).

ü  늙은 전통주의자들, 진부한 사람들로서는 웃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대는 교회 안에서 웃을 수 없다 (112).

ü  나의 할아버지는 완전한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자유를 보았다. … 문제가 있을 때면 모두들 심각해하고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만큼은 걱정하지 않았다 (113).

ü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115).

ü  단지 너 자신의 길을 찾아라라고 말해주셔야 해요. 저에게 조언을 해주지 마세요. 왜냐하면 값싼 조언이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의 길을 찾으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16).

ü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119).

ü  나의 할아버지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더 가까웠다. 먹고 마시고, 유쾌하게 떠들어댈 뿐, 내세 따윈 없었다 (120).

ü  저는 일생동안 철학자들과 싸울 것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해요 (125~6).”

 

불멸을 찾아서

ü  당신은 당신이 이 삶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 살아가게 될 것을 아십니까? / 어떤 형태로가 아니다. 나는 형태 없이 살 것이다. / 영원히? / 영원히. 나는 영원히 여기 있었고 영원히 여기 있을 것이다/ 당신은 죽음 이후에도 의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까? / 그렇다. 왜냐하면 죽음은 의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죽음 이후에도 개체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까? / 개체성은 없다 (128).

ü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대의 전 생애를, 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영한다.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 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129).

ü  사랑이 많은 사람은 손을 펴고,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나누었듯이 자신의 죽음마저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그대는 그 얼굴에 모든 것이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완전히 의식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만약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때 그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다. 그의 몸 둘레에는 오라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대는 침묵을 느낄 것이다. 슬픔이 아니라 침묵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지복 속에 죽었을 때 그대는 갑자기 그대 곁에 깃드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129).

ü  뭔가가 일어났어요. 그 노인에게서 뭔가가 풀려 나왔고 그것은 엄청나게 아름다웠어요. 그는 지복스런 죽음을 맞았어요 (130).”

ü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 것이고 두 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무한한 비어있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 (131).”

ü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 놓는다. … 그대가 어떠했든지 그 에너지는 그대 일생의 진동을 담고 있다. 성자가 죽을 때 단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커다란 선물이다. 단지 쏟아지는 그의 에너지에 젖어드는 것은 커다란 영감을 준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의 에너지에 취할 것이다. 그대는 술에 취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죽음은 하나의 완전한 성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삶을 살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132).

ü  그들은 자신들이 장작더미 위에 있을 때 사람들이 거기 있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다 (135).

ü  만약 내가 죽을 것이라면 의식적으로 죽는 게 나아요 (138).

ü  7일 동안 나는 기다렸다.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죽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들이 일어났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 (139).

ü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140).

ü  파리들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몸 위를 움직이고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즉시 하나의 거리가 생겼다.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삶은 모든 걱정과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간다. … 일단 그대가 완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대는 죽음을 알게 된다 (140).

 

깨달음: 과거와의 단절

ü  법화경의 의미까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과 저는 결혼하겠어요. 왜냐하면 암송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니까요. 그냥 기계적으로 어떤 것을 반복할 뿐이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해요 (143).

ü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다 (143).

ü  그것을 이해한 것뿐 아니라 그 맛도 본 사람, 그 사람과 저는 결혼하겠어요. … 당신들은 설명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설명은 단지 지적인 것이에요. 그것도 좋아요. 어제보다는 나아요. 당신들은 약간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이해는 지적인 것이에요. 저는 약간의 명상적인 맛, 약간의 명상적인 향기를 보고 싶어요. 저는 연꽃이 당신들의 존재 속으로 들어온 것을, 당신들이 연꽃의 일부가 된 것을 보고 싶어요. 저는 그 향기를 맡고 싶어요 (144).

ü  거기 있는 모든 것은 공 뿐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웃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웃었다. 그는 결혼한 것이다 (145).

ü  크리슈나 (Krishna):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중요한 신으로 비쉬누 신의 화신. 바가바드 기타에서 아르주나에게 가르침을 펴는 이도 바로 이 크리슈나이다. 크리슈나를 BC 7세기경의 실존 인물로 보는 이도 있다 (145).

ü  이것은 아름다운 선화이다. 그는 공과 결혼한 것이며 무와 결혼한 것이다. 이는 모든 위대한 성인들이 찾아왔던 결혼이다. … 모든 것이 사라진다. 길도, 정원도, 집도, 여자도, 심지어 발자국도모든 것이 사라진다. 단지 하나의 웃음, 바로 우주의 배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웃음만이 있다 (145~6).

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침묵을 사랑했다. 가능할 때면 언제나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146).

ü  보리 (Bodhi) : 깨달음 (147).

ü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 (147).

ü  그들은 와서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는 없는 것 같군.” 그러면 나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나는 여기 없어 (148).”

ü  내가 육체를 벗어나는 첫 경험을 한 것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 나는 그 중의 한 나무에 앉아서 명상하곤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서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순간 나는 어떻게 다시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148).

ü  그녀는 내적인 육체와 외적인 육체가 분리 되었을 때 두 눈 사이, 3의 눈을 문지르면 떠났던 영혼이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곳이 바로 문이다. 그녀는 나의 제 3의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눈을 떴고 그녀에게 감사했다 (148).

ü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깨달음의 문을 찾고 있었다. 틀림없이 나는 그 생각을 전생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생의 어린 시절 중에서 깨달음을 찾고 있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9).

ü  마지막 해, 즉 내가 스물한 살이었던 그 때는 내가 신경의 붕괴를 경험하고 그 돌파구를 찾은 시기였다 (149).

ü  그것은 엄청난 한 해였다. 나는 무에, 공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잃었다 (150).

ü  나는 먹는다거나 단식을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나 자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은 너무나 자력이 넘쳤고, 그 당기는 힘은 너무나 광대했다. 지금의 물리학자들이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150~1).

ü  별이 죽는다.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별은 사라진다. 그러나 매 순간 새 별들이 태어나고 있다.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에 그들의 자궁이 있는가? 블랙홀이 다름 아닌 하나의 자궁이라는 것은 간단한 산수이다. 낡은 것이 그 안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것이다 (151).

ü  이것을 나는 스스로 경험했다. … 그 엄청난 인력의 한 해는 나를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멀리 끌고 갔다 (151).

ü  자연히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그 한 해 동안 나는 미친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 광기는 명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광기의 절정에서 문이 열렸다 (152).

ü  통찰력을 지닌 바이드야 (인도 전통 의학의 의사)가 단 한 명 있었다. … “나 스스로도 이런 상태를 찾고 있었습니다. … 이 생에서는 나는 이런 상태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를 다른 누구에게도 데려가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지금 집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152~3).”

ü  그대가 처음으로 무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광기처럼 보인다.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미친 밤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종교들은 그대가 무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스승이 그대를 돕고 그대에게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153).

ü  그대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뒤는 더 이상 거기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앞으로도 갈 수 없다. 앞은 온통 어둠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꼼짝 못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이다. “스승을 발견한 사람은 운이 좋다 (154).”

ü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사원을 구루드와라’, 스승의 문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 스승이 의미하는 바이다.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155).”

ü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나를 넘어서 있었다. 그것은 일어나고 있었다. … 나는 여러 해 동안 명상해왔다. …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대는 하나의 현존으로, 주시자로 단지 거기에 있을 뿐이다 (158).”

ü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말은 오직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 (158).

ü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던 그 모든 어리석음을 보고 나는 정말 정신 없이 웃었다. 모두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애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 (159).

ü  나는 여러 생을 통해서 깨달음을 위해 몸부림쳐왔다. 깨달음만이 그 여러 생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얻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야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159).

ü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외부에 그 대상이 있었고, 이제는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자세, 접근 태도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대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는 똑 같은 사람이다 (159~160).

ü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발전도, 어떠한 발전도 필요치 않다. 신은 어떤 것도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는다 (160).

ü  노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161).

ü   나에게 있어 그것은 완전한 이완의 상태에서 일어났다. 깨달음은 언제가 그러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나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리고 나서 그 모든 노력이 허사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 모든 투영들을 놓았다. 모두 잊었다. 7일 동안 나는 가장 평범한 상태로 살았다 (161).

ü  나의 모든 삶은 완전한 수행의 삶이었다. …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7일 동안 휴식 속에 있었을 때, 내가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아홉 시나 되어서야 일어나고, 차를 마셨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162).

ü  이제는 잠이 저를 떠날 때에만 일어날 것이고, 잠이 올 때에만 잘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시계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이 먹기를 원하는 것을 먹을 것이고 마시고 싶어 하는 것은 마실 것입니다.” 나는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그리고 나는 7일 동안 모든 계획을 완전히 잊었다. 영원히 잊어 버렸다. 그리고 7일째에 그것이 일어났다 (163).

ü  수많은 생을 거치며 나는 노력해왔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몸부림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한다.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장애물이었다. 구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 버려야 하는 때가 온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 그러나 배에서 나와 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배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63~4).

ü  1953 3 21일 되기 바로 7일 전, 나는 스스로에 대한 노력을 그만 두었다.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그대는 모든 탐구를 버린다. 그리고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그 에너지는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곳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곳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있었고, 바위와 하늘과 태양과 공기 속에도 있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그토록 힘들게 찾고 있었고 그것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옆에,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구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항상 먼 곳을 향한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멀리에 있지 않았다 (164~5).

ü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65).

ü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밝기 때문이며, 계속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며, 계속 자기 자리보다 앞을 향해 도약하기 때문이다 (165).

ü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166).

ü  따라서 이것은 딜레마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욕망은 거기 있는데 붓다들은 계속해서 욕망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그들은 끊임없이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166~7).

ü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167).

ü  그대는 계속 되풀이 한다. 욕망은 줄곧 그대의 정면에서 어른거리며 계속해서 새로운 신기루를 창조한다. 욕망은 끊임없이 그대를 부른다. “, 빨리 달려. 이제 다 왔어.” 하지만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대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땅 저편에 보이는 지평선과 같다. 그것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있지 않다 (167).

ü  그 날 욕망이 멎었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허망한 일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의 희망 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 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 (168).

ü  존재는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존재는 간섭하지 않는다. 존재는 기다린다. 존재는 무한히 기다릴 수 있다. 존재는 급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는 영원이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순간, 그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대가 사라지는 순간, 전 존재가 그대를 향해 들이닥친다. 그대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68).

ü  내가 희망없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대가 절망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희망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절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양쪽 모두가 사라졌다 (169).

ü  그리고 내가 무력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전상의 단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내게 자아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169).

ü  7일간은 엄청난 변형의 완전한 변형의 날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전적으로 새로운 에너지의 현존, 새로운 빛, 새로운 기쁨이 너무도 강렬해져서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170).

ü  모든 경전은 죽어 있었고 이러한 체험을 표현하기에는 모든 말들이 너무나 시들하고 빈약했다. 그 경험은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거세게 밀려오는 지복의 물결과 같았다 (170).

ü  하루 종일 이상하고 어리둥절했다. … 과거가 사라지고 있었다. … 나는 과거로부터 풀려나고 있었다. … 나는 붓다가 아나타라고 부른느 비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경계가 사리지고 구분이 사라지고 있었다 (170~1).

ü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171).

ü  7일간의 체험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죽음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172).

ü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 엄청나게 중요한 어떤 것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기가 불가능했다. 나는 취해 있었다 (172).

ü  잠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깨어 있고, 몸 전체가 휴식한다. … 그러나 각성의 빛은 여전히 그대 안에서 불타고 있다. … 육체는 가장 깊은 잠 속에 있으면서 의식은 정상에 있다 (172).

ü  몸은 자고 있었지만 나는 깨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가 두 방향으로, 두 차원으로 따로따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마치 두 개의 극이 완전히 포개지는 듯, 마치 내가 양극 모두인 듯, 긍정과 부정이 만나고 잠과 각성이 만나고 죽음과 삶이 만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만남이라고 할만한 순간이었다 (173).

ü  열 두시가 가까이 되어 갑자기 눈이 뜨였다. … 나는 나를 둘러싼 방안의 거대한 현존을 느꼈다. … 나는 그 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실재여서 다른 모든 것은 비실재가 되었다. … 이제 처음으로 실재가 드러나자 모든 것은 비실재가 되었다 (173).

ü  그것이 바로 붓다와 샹카라가 세상을 마야, 즉 신기루라고 부른 이유이다.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만을 알기 때문이다 (173~4).

ü  하나의 깨어남이 있을 때, 그 깨어남이라는 실재와 비교되어 이 모든 실재는 비실재가 된다 (175).

ü  그날 밤 처음으로 나는 마야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 … 그날 밤 다른 실재의 문이 열렸고 다른 차원이 드러났다. 갑자기 그것은 거기 있었다. … , 진리, 담마, , 그대는 원하는 대로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176).

ü  나는 방을 뛰쳐나와 거리로 나갔다. 하늘 아래서 별들과, 나무들과, 땅과, 자연과 함께 있고 싶은 충동이 너무나 컸다 (176).

ü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공원을 향해 걸었다. … 나는 걷고 있었다. 아니면 뛰고 있었거나 날고 있었다. … 거기엔 중력이 없었다. 나는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마치 어떤 에너지가 나를 데려가는 것처럼…. 나는 어떤 다른 에너지 속에 있었다 (177).

ü  처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나는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었다. … 이제 온 대양이 나의 것이었고 내가 대양이었다. 경계가 없었다. 마치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한 힘이 솟아올랐다. 나는 거기 없었다. 오직 힘만이 거기 있었다 (177).

ü  무언가가 나를 공원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끊임없이 강과 함께 흘러가라. 강물을 거스르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나는 이완되어 있었다. 나는 내맡김 속에 있었다. 나는 거기 없었다. 그것이 거기 있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면 신이 거기 있었다 (177~8).

ü  신이라는 말은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오염되었다. 그들은 모두 그 단어의 아름다움을 타락시켜 버렸다 (178).

ü  공원 전체가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공원 전체가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풀잎조차도 그토록 아름다웠다 (178).

ü  마울슈리 나무였다. 그 나무가 나의 주의를 끌어당겼다. 그것이 나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신 자신이 그것을 선택했다. … 내가 거기에 앉자 평온이 찾아왔다. 온 우주가 하나의 축복이 되었다 (178).

ü  시간은 없었다. 시간의 경과는 없었다. 그것은 처음으로 드러나는 실재였다. 때 묻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실재였다 (179).

ü  그리고 그날 일어난 그것은 계속 되어 왔다. 내면을 흐르는 지하수처럼 계속되어 왔다 (179).

ü  붓다들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들의 힘은 죽음의 힘이 아닌 생명의 힘이다. 그들의 힘은 죽이는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창조하는 힘이다. 그들의 힘은 폭력과 공격성의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연민의 힘이다 (180).

ü  기억하라. 그날 이래로 나는 결코 정말로 육체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단지 섬세한 한 가닥의 줄이 나와 육체를 연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전체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여기 있게 하려 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182).

ü  나를 여기 있게 하는 것은, 내가 좀 더 이 세상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은 전체의 의지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전체는 나를 통해서 그대와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182).

ü  그날 이래로 세상은 비실재가 되었다. 또 다른 세상이 드러났다. 내가 세상은 비실재라고 말할 때 나는 이 나무들이 비실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무들은 절대적으로 실재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 나무들을 보는 방식은 비실재적이다 (183).

ü  신과 세상, 그것은 둘이 아니다 (183).

ü  그러나 지금 당장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투영된 거짓이다 (184).

ü  이 세상은 아름답다. … 그대의 세상은 매우 추하다. 그대의 세상은 자아에 의해 창조된 그대만의 세상이다. … 그대는 실재의 세상을 스크린하여 그 위에 그대 자신의 관념들을 투영하고 있다 (184).

ü  내가 세상은 실재라고 말할 때 그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 세상은 무한한 빛을 발한다. … 물론 나의 세상 말이다. 혹은 그대가 그대의 꿈을 버릴 때, 그것은 그대의 세상이기도 하다 (184).

ü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나는 비존재적이 되었고 동시에 존재적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죽었고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 (184).

ü  나는 여러 다른 죽음들을 보아왔지만 그 죽음들은 이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부분적인 죽음들이었다. 때로는 육체가 죽었고 때로는 마음의 한 부분이 죽었고 때로는 에고의 한 부분이 죽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남아 있었다. … 그날 밤의 죽음은 전체적이었다 (185).

ü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과정이다. 그 개인성 때문에 깨달음은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먼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정해진 단계들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을 통과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여러 생을 거치면서 서로 다른 종류의 조건화들을 모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건화의 문제이다. 그것이 그대의 길을 형성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다른 조건화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두 사람의 길도 같지 않다 (185).

ü  걸어가면서 그대가 길을 만든다. 그대의 걸음 자체가 길을 만든다 (186).

ü  그것이 바로 선도자와 추종자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단지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예수, 모세, 마호메트,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186).

ü  사람들에게 이리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186).

ü  깨달음은 다름 아닌 깨어남이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 우리의 모든 삶은 단지 꿈들이다 (187).

ü  그대는 어느 순간에라도 깨어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잠재성이다 (187).

ü  얼마나 그대가 그 꿈에 집착해 있는지는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188).

ü  따라서 내가 겪은 붕괴와 돌파는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일어났다.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친구도, 길동무도, 공동체도 없이 혼자서 나 자신에 대해 작업하고 있었다 (188).

ü  각각의 개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서로 다르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 이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189).

ü  먼저 도달한 자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만들어왔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종교를 만든다면, 이제 이것은 그 종교 안에서 기본적인 요소가 될 것이고, 깨닫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신경의 붕괴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 때에만 그는 돌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이런 식으로 창조되었다. 모든 개인들의 유일함을 고려하지 않은 체, 개인이 전 인류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189~190).

n  참으로 맞는 말씀!

ü  마하비라는 벌거벗고 지냈다. 때문에 마하비라를 열심히 따르는 그의 추종자들은 25세기 동안 벌거벗고 지내왔다. … 자이나교도들은 붓다가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벌거벗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적인 일이 이제 전 인류의 기준이 된다. 그것 역시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마하비라에게 일어난 일은 그의 개인적인 개화였다 (190).

ü   그러나 이것은 모든 깨달은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는 아니다. 붓다는 결코 벌거벗지 않았다. 노자도 결코 벌거벗지 않았다. 까비르도 결코 벌거벗지 않았다 (192).

ü  까비르( Kabir): 1440?~ 1518 인도의 시인이자 성자. 시크교의 개조인 나나크를 비롯하여 근세 힌두교 개혁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

ü  그것은 종교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작은 이유들 때문에 다른 깨달은 사람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의 관념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 따라서 다른 모든 이들은 깨닫지 않은 것으로 비난 받는다 (192).

ü  어떤 고정된 관념도 갖지 말라. 단지 매우 액체와 같은 특질들이 기억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깨달은 사람은 깊은 침묵을, 거의 만져질 듯한 침묵을 지니게 될 것이다.그는 엄청난 만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의 만족에는 변함이 없다 (193).

ü  그에게는 어떤 질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모든 질문들이 사라졌다. … 그리고 그 절대적인 침묵, 무심의 상태에서 그는 어떤 질문에도 엄청난 깊이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준비가 필요 없다. … 그는 단지 어떤 질문에도 초점 맞춰질 수 있는 하나의 명료함, 하나의 빛을 가지고 있다 (193).

ü  깨달은 사람들은 단순히 열려 있다. 하나의 거울처럼 그는 감응한다. 그리고 그는 강렬함과 전체성을 가지고 감응한다 (194).

ü  작은 것들을 보지 말라. 그가 무엇을 먹는지, 그가 무엇을 입는지, 그가 어디에 사는지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와 관계없는 것들이다. 단지 그의 사랑을, 그의 연민을, 그의 신뢰를 보라 (194).

ü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

 

칼날을 세우며

ü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만 그들이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는 것을 전할 수 없다 (196).

ü  깨달음이 왔을 때 나는 7일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침묵은 너무나 깊어서 그 깨달음에 대해 뭔가를 말한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7일 후 내가 그 침묵에, 그 행복에, 그 지복에 익숙해짐에 따라 서서히 그것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은 커다란 갈망이 일어난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 비록 나의 침묵 속의 그 무엇, 나의 기쁨 속의 그 무엇을 말로 가다듬어 가져올 수 있게 되는데 여러 해가 걸리기는 했지만 (196~7).

ü  고타마 붓다의 생일은 다른 누구의 생일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타마 붓다의 생일은 그가 깨달은 날이기도 하고 또한 그가 육체를 떠난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같은 날 그는 태어났고, 같은 날 그는 깨달았고, 같은 날 그는 죽었다 (214).

ü  나의 수업들은 완전히 달랐다. 가능한 가장 깊이 있는 방법으로, 모든 각도, 모든 관점에서, 모든 것이 토론되어져야 했고, 모든 것이 검토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직 지적으로 만족했을 때에만 답으로 받아들였다 (219).

ü  그대가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무척 어려워진다 (220).

ü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 일단 그대가 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 (226).

ü  우리는 2년 과정을 6개월 안에 끝낼 것이다. 나머지 일년 반은 즐기고 춤추고 노래하라. 걱정하지 마라 (228).

ü   저는 뭔가 근본이 빠져 있다고 봅니다. 선생은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생은 존경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선생이 존경을 요구한다면 그 선생은 단순히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33).”

ü  선생들은 시인들 만큼이나 타고 난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이다. 누구나 선생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광범위한 교육 때문에 수많은 선생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233).

ü  존경은 선생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 그것은 제자나 학생들에게 요구되지 않았다. 존경심은 그저 일어났다 (234).

 

길 위에서

ü  고타마 붓다, 중국의 노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서 그들은 모두 동시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다 (236).

ü  통신과 운송의 과학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여러 개의 세상이 있었고 그것은 각각 하나의 세상이었다. … 사람들이 점점 더 서로 가까워짐에 따라 세상은 작아졌다 (236).

ü  그대가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각기 다른 천재들의 그 모든 기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현대인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237).

ü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 이해의 빛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아무 어려움 없이 하나의 통합을 창조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통합은 단지 모든 종교적 신비가들만을 모으는 것이 아닐 것이다. … 그 통합은 모든 예술가들과 그들의 통찰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237).

ü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학의 성장이다 (238).

ü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참으로 다른 차원들이다. …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조화되지 못한다 (238).

ü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에요 (239).”

ü  마음은 참으로 섬세하고 복잡한 컴퓨터이다 (239).

ü  단 한 명 인간의 마음이 이 모든 책들에 쓰여진 모든 것들을 담을 능력을, 기억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나는 전 세계의 생소한 책들, 생소한 경전들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단지 주시자였다. … 그 목적은 나의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 지역적인 한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240).

ü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241).

ü  그러나 그것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나의 이후에는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한 것과 같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41).

ü  깨어난 사람은 인간을 너무나 깊이 이해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는 모든 인간의 불행한 상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가엽게 여긴다. 그는 연민이 많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애초에 화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그대를 가엽게 여긴다 (241~2).

ü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것은 추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비인간성, 그리고 온갖 사악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똑 같은 짓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 (244).

ü  나의 자리는 정확히 똑같다. 그러나 무신론자, 반종교가, 반도덕주의자로 알려지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힘들었다. 어떤 종류의 관계로든 사람들과 다리를 놓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246).

ü  마침내 나는 전략을 바꿔야 했다. 나는 진리를 찾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47).

ü  종교에 연관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 그들의 관심들은 매우 세속적이었다. … 그들 또한 내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247).

ü  이제 내가 종교적이 되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직 그 때에만 나는 진정한 구도자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248).

ü  내가 종교라는 포장 아래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종교와는 다른 것이었다. … 나는 신, 종교, 해탈, 모크샤와 같은 그들의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단어들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249).

ü  사람들은 오직 단어들만을 듣는다. 그들은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말없이 전달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249).

ü  나는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내가 말하는 것을 예수는 이해조차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250).

ü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나의 사람들을 찾아냈다. … 나는 그들의 언어를 말했다. 그들의 종교적 화법을 사용하고 그들의 경전들을 인용하면서 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즉시 이해했고 그들은 나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260).

ü  나이 메시지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데 비례하여 나는 서서히 그들의 언어를 버렸다 (261).

ü  나는 그 모든 상황에 싫증이 났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ABC에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내가 결코 XYZ를 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분명해졌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어야 했다 (267).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ü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즐겼다. 이것은 나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나의 노래였다. 이것은 나의 시였다 (268).

ü  그대는 세상에 살다 간 수천 명의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통 사람의 눈에 뛸 만한 특별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269).

ü  이제 나는 존재계에 모든 것을 맡겼다. 이제 존재계가 나를 이용할 수 있다 (272).

ü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273).

ü  깨달음 전에 그들은 위대한 선생이었고 이제 깨달음 때문에 그들은 스승이 된다. 이제 그들은 선생에서 스승으로 바뀐다. 그리고 분명 그것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273).

ü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 (274).

ü  나는 내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로 그대를 설득하고 그대를 조종하려 하는 사람은 일관되어야 한다. … 첫째로 나는 그대를 개종시키려는 아무런 의도가 없다. .. 따라서 나는 일관성 유지 따위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다 (275).

ü  나의 목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나는 단지 침묵의 간격들을 창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다 (276).

ü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명상의 맛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가 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276).

ü  나는 말을 한다. 그리고 문장 한가운데서, 그대가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을 때그때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고 단지 침묵의 간격만이 있다. 그대의 마음은 들으려 하고 있다자연히 마음은 침묵하게 된다 (277).

ü  나의 성공은 그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278).

ü  존재계는 종교가 그대에게 가르쳐온 것만큼 그렇게 인색하지 않다 (278).

ü  존재는 도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오직 한가지만이 옳다. 그대의 각성과 자각이다. 그때 그대는 지복이 넘친다 (279).

ü  어떤 종교도 지복을 느끼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혹은 지복을 느끼는 것이 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279).

ü  왜 내가 고타마 붓다나 보다다르마,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해야 하는가?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와 통찰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나의 이해와 나의 통찰에 따라 나의 삶을 산다 (280).

ü  보디다르마 (Bodhidharma): ?~ 528? 보리달마, 일명 달마대사로 중국 선종의 시조이다 (280).

ü  여기에서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고타마 붓다와 마찬가지로 그대 역시 무심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그대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280).

ü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는 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에서 옳은 점이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리고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것이 공산주의에서 부정하는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다 (281).

ü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그리고 깨달음은 그대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 … 그것은 바로 약간의 경험이다 (281).

ü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어떤 조건도 없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를 하는 목적의 전부이다 (282).

ü  일단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이제 그대의 모든 초점이 바뀔 것이다. … 그것은 그대 자신의 가능성을 느끼는 문제이다 (283).

ü  만약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수 있고 그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 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행동들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는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의 중요할 뿐이다. … 지금까지 모든 종교들은 의식이 아닌 그대의 행동만을 중요시해왔다 (283).

ü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283).

ü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의식, 그대의 침묵, 그대의 평안함이다. 그것을 통해 그대는 그대가 행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284).

ü  그대의 의식이 더 확고해짐에 따라 그대의 모든 삶의 패턴들이 변한다 (284).

ü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285).

ü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285).

ü  종교가 앗아간 그대 내면의 확신을 다시 가져오기 위한 장치이다. 확신 대신에 그들은 그대에게 죄의식을 주었다. 그 죄의식은 그대를 끌어내리고 그대를 슬픔 속에 있게 한다 (285~6).

ü  왜 그대가 고요해지는지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라 (286).

ü  나는 거의 모든 종류, 모든 범주의 선생들을 만나 봤지만, 전 세계 종교의 소위 스승,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중독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 그들의 권력 놀음이다 (288).

ü  삶 그 자체 앞에, 존재 그 자체 앞에 그대의 모든 것을 엶으로써 그대는 이러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은 그대의 삶 그 자체가 될 것이다 (288~9).

 

<2부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ü  당신은 누구입니까? / 당신이 생각하는 누구든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대 자신의 얼굴이 비춰질 것이다. …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내가 누구라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나는 강요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무 만이, 거울만이 있다. 이제 그대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있다.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 (292~293).

 

섹스 구루

ü  프리 섹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대가 섹스 또한 하나의 상품이 되기를 바란다는, 섹스가 구입되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준다. 매춘부에게서 하룻밤을 구입하든, 혹은 아내에게서 평생을 구입하든하지만 어쨌든 구입해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295).

ü  내가 프리섹스를 가르친다고 이야기해온 사람들은 정말로 불쌍하다. 그들은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들이다 (295).

ü  사람들은 상처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섹스는 하나의 상처가 되었다. 그것은 치유되어야 한다 (296).

ü  성적인 오르가슴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대에게 명상의 첫 번째 일별을 준다. 왜냐하면 마음이 멈추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 동안은 시간도 없고 마음도 없다. 그대는 그저 전적인 침묵과 지복 속에 있을 뿐이다 (296).

ü  마음을 넘어가는, 시간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마음이 이해할 가능성은 섹스를 제외하고서는 달리 없었다. 명상의 첫 일별을 주는 것은 틀림없이 섹스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비난 받고 있다 (296).

ü  나는 세계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고 비난 받아 왔다. 단지 내가 성으로부터 초의식으로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비난하면서도 왜 나를 비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297).

ü  그 책 <성으로부터 초의식>는 성에 대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초의식에 대한 책이다 (297).

ü  그대는 오직 성으로부터라는 말만 듣는다. ‘초의식으로는 듣지 않는다 (298).

ü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이다. 똑같다. 사람은 거의 똑같다. 친구와 적은 별로 다르지 않다 (298).

ü  섹스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끝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시작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이제 일은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다 (299).

ü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해왔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명상을 통해서 뿐이다 (300).

ü  나는 결코 프리섹스를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가르쳐온 것은 섹스의 신성함이다. 나는 섹스가 사랑의 영역에서 법의 영역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300).

ü  나는 사랑을 믿는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한함께 살 수 있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감사하며 헤어져야 한다 (300).

ü  나는 400권의 책을 출판했다. 오직 한 권의 책만이 섹스와 관계되어 있다. 399권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섹스와 관계가 있는 오직 한 권, 게다가 그 책조차 섹스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책조차 어떻게 성 에너지를 영적인 에너지로 변형시키느냐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성에 반대하는 것이다 (300~301).

ü  그러나 언론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선정성에만 관심이 있다 (301).

 

컬트 교주

ü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운동이다. 사교도 아니고, 종파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다만 명상을 위한 운동, 내면의 과학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것은 의식의 과학이다 (302).

ü  나의 노력은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전통과 정설, 미신, 믿음들을 제거하여 그대가 무심의 상태, 궁극적인 침묵의 상태, 단 하나의 생각조차 움직이지 않는, 그대 의식의 호수에 단 하나의 잔물결조차 없는 침묵의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305~6).

ü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그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나는 구세주이지 나만 따르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306).

ü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306).

ü  나는 그들에게 실천해야 할 이념이나 규율조차 주고 있지 않다. 나는 단순히 나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그 경험으로부터 그들은 그들 자신의 규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 (306).

 

사기꾼

ü  나는 두 가지 수준에서 작업해야 한다. 하나는 그대가 살고 있는, 그대가 위치해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위치하고 있는 수준이며 그대 또한 도달하게 싶은 수준이다 (307).

ü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갈 수는 있다 (308).

 

자칭 바그완 (Bhagwan)’

ü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315).

ü  나는 찾고 탐구했다.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이다 (315).

ü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 누가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317).

ü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 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의 20년 동안 사람들은 나를 아차리야 (스승)라고 불렀다. 이것은 내가 사람들을 제자로 입문시키기 전이었다 (318).

ü  그들은 나의 존재에 매우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바그완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 그 의미는 축복받은 자이다. … 그것은 단지 축복받은 자, 집에 온 자, 도달한 자를 의미한다. 발견한 자, 자신을 만난 자를 의미한다 (319).

ü  바그완은 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 신성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성이 바로 도달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향이다. 그것이 바로 그대를 축복받은 자로 만드는 그것이다 (319~320).

ü  사람이 신이다.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 (320).

ü  그 단어는 성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보편성을, 그대의 본성 자체를 나타낸다. 이미 그대는 신이다 (320).

ü  이제 나는 나의 역할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다른 층, 다른 차원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준다 (321).

ü  나는 존재를 나누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대를 깨우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대에게 지식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을 준다.나 자신을 바그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나의 일이 다른 차원에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322).

ü  이제 자신의 지식을 옆으로 제쳐둘 준비가 되어 잇는 사람들만이 남았다 (322).

ü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시적인 접근이고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 … 나는 그대들 모두가 신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323).

ü  서서히 그대는 주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그 주인은 그대 내면 깊은 곳의 핵으로부터 온다. 그 주인은 그대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다. …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 깨어서 관찰하라.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충족될 것이다 (324).

 

부자들의 스승

ü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유한 자이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한 자이다 (329).

ü  가난한 사람은 계속해서 희망한다. … 부유함에 대해 좌절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329).

ü  부유한 사람이 나에게 올 때그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때 신에 대한 추구가 시작된다 (329).

ü  사람이 육체적으로 행복할 때, 먹을 것이 충분하고 살 수 있는 좋은 집이 있을 때, 그는 음악, , 문학, 그림,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새로운 배고픔이 시작된다.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이제 심리적 욕구가 일어난다. 욕구에는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육체이다. 그것은 기본이다 (332).

ü  심리적 욕구 또한 충족될 때 그대의 영적 욕구가 일어난다 (332).

ü  이제 음악과 시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명상에의 욕망이, 기도에의 욕망이, 신에 대한 갈증이, 진리에 대한 갈증이 일어난다 (332).

ü  종교는 최후의 사치품이다. 이 사치품에 이르려면 그대는 매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지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지 그대는 부유하다. 돈에서 부유하든지 아니면 지성에 있어 부유하다. 나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지성이 가난하고 돈이 가난한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것을 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333).

ü  까비르와 같은 사람은 종교적이 된다. 그는 백만장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나게 지성적이었다 (333).

 

농담꾼

ü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삶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 (337).

ü  심각함은 암이다 (343).

ü  만약 그대가 병이 들었을 때 웃을 수 있다면 그대는 더 빨리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만약 웃을 수 없다면, 심지어 지금 건강하다 해도, 머지않아 그대는 건강을 잃고 병이 들게 될 것이다 (343).

ü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그대의 표면으로 어떤 에너지를 가져온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에너지는 그림자처럼 웃음을 따라온다. …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그 한 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생각이 멈춘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둘은 정반대이다. 웃을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거나 이다 (343).

ü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 (343).

ü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 만약 그대가 정말로 춤을 춘다면 생각은 멈춘다 (343).

ü  그대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그대를 추게 허락한다면, 춤이 그대를 가지도록 허락한다면, 만약 그대가 춤에 사로잡힌다면 그때 생각은 멈춘다 (344).

ü  똑 같은 일이 웃음에서도 일어난다. 그대가 웃음에 사로잡히면 생각은 멈춘다. … 웃음은 사념 없는 상태로 가는 아름다운 전주곡이 될 수 있다 (344).

ü  내가 농담들을 들려 주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너무나 미묘하고 깊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344).

ü  내가 그대에게 말해야 할 진리가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나는 더 심한 농담을 고른다 (345).

ü  더러운 농담이라 해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뿌리, 그대의 깊은 곳까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그대를 자꾸만 깨어 있게 만든다. 그대가 깨어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다시 그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 나간다 (345).

ü  만약 그대가 정말로 깨어서 듣고 있다면 농담은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직접 진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그대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품을 하는 것 보다는 웃는 편이 낫다 (345).

 

롤스로이스 구루

ü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호화롭게 산 나머지 호화로움에 질리게 되기를 바란다 (346).

ü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이 아직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다른 모든 문들은 그대가 이미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 (346).

ü  명상은 과학적 방법이다. 왜냐하면 명상이 그대를 궁극의 지복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전 역사를 통틀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47).

ü  나의 삶은 절대적으로 단순하다. … 단 한 문장으로 그것은 요약될 수 있다. 최고의 것들! 거기에는 어떤 복잡함도 없다 (351).

ü  나는 질을 좋아한다. … 사람들에 있어서도 나는 양이 아니라 질을 좋아한다. 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양이 아니라 질을 좋아한다 (351).

ü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집착에 사로잡혀 있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352).

ü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 존재는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마음이다 (353).

ü  사실 소달구지에 앉아 있을 때는 명상적이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 롤스로이스는 영적 성장에 최고로 좋은 차이다 (355).

 

스승

ü  붓다는 죽기 전에 그가 25세기 후에 다시 올 것이며 그 이름은 마이트레야 (Maitreya)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트레야란 친구라는 의미이다. 붓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깨달은 이도 돌아온 적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표현상의 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돌아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 그가 의미했던 것은 25세기 후에는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 따위는 시대에 뒤진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357).

ü  그 때 깨달은 스승은 단지 친구가 될 것이다 (357).

ü  스승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비록 원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말할 수 없다 (358).

ü  그들은 그대에게 신, 진리, 니르바나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대는 이미 그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 (358).

ü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 그것은 일깨워질 수 있다 (358).

ü  진리는 전달될 수 없다. 때문에 간접적인 방법과 수단들이 고안되어야 한다 (359).

ü  예수는 너무나 운이 없다. 그는 잘못된 집단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단 한 명의 기독교 신학자도 나자로의 이야기의 의미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359).

ü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것을 역사적인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 이상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리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 이상의 그 무엇이다. 영원 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360~361).

ü  그대들은 모두 죽어 있다. 그대들은 모두 나자로와 같은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그대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그대가 태어난 그 날 이래로 그대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긴 과정이다. … 매순간, 그대 안의 무언가가 죽는다. 그러나 그대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361).

ü  스승의 역할을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361).

ü  위대한 선사 다이에 (Daie)는 말한다. “현자들, 성자들, 스승들의 그 모든 가르침들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 이것!’이라는 그대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일 뿐이다 (362).”

ü  스승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을 가르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전을 넘어선, 말을 넘어선 전이이다. … 그것은 그대 안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에너지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시성이다 (364).

ü  스승은 하나의 에고로서는 이미 사라졌다. 그는 순수한 기쁨이다. 그리고 스승의 곁에 앉아 있는 제자는 서서히 그의 기쁨을, 그의 존재를 함께 나누기 시작한다 (364).

n  우파니샤드

ü  배추벌레는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은 배추벌레들이다. 보디사뜨바들이다 (보살). … 보디사뜨바란 나비가 될 수 있는 자, 붓다가 될 수 있는 자, 씨앗으로서, 그 본질로서 붓다인 자를 의미한다 (364).

ü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365).

ü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그는 그대에게 베다를, 코란을, 성경을 주지 않는다. 그는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내던진다 (365).

ü  그는 한 마디로 말의 세계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말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이라는 말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사랑이 말이 아닌 경험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대는 이라는 말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신이 말이 아닌 경험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이라는 말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이라는 말은 불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도 역시 사랑이 아니다. 스승은 그대를 말로부터 해방시킨다. … 그는 말없는 침묵의 상태로 그대를 인도한다. 종교와 철학이 실패한 점은 그것이 모두가 진정한 경험에 대한 대용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라! (366).

ü  어떻게 그대가 온전해지는 것을 막고 있는 그 모든 쓰레기들을 파괴할 것인가. 그것이 부정적인 부분이다. … 어떻게 그대를 명상으로, 침묵으로, 사랑으로, 기쁨으로, 평화로 타오르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가르침의 긍정적인 부분이다 (367).

ü  현자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그대는 통찰력을 원치 않는다. 그대는 명확한 지침을 원한다 (368).

ü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368).

ü  그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대는 책임을 지지 않도록 배워왔다. 그대는 의지하도록 배워왔다. … 그러나 아무도 그대가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대의 책임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368 & 370).

ü  나의 온몸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나의 온 몸이 내가 단어로 말하고 있는 것을 지원하고 있다 (369).

ü  나는 그대에게 누구에 대한 책임도 떠맡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버지, 어머니, 나라, 종교, 정파, 그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말라. 그대는 책임이 없다 (370).

ü  단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만약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즉시 징벌이 따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보상이 따라 올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새로운 감수성을 기르기 시작할 것이다. 인도에서는 그것을 제 3의 눈이라고 부른다. 그대는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370).

ü  원인과 결과는 함께 한다. 해가 가도 생이 가도 그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그대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말할 때의 의미이다. 그대가 그대의 책임을 대신 떠안길 수 있는 신은 없다 (370).

ü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 만약 내가 어떤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 그 때 그대의 행동들에 대한 열쇠는 나의 손 안에 있다. 그 대 그대는 나의 노예이다 (371).

ü  이 자유를 즐겨라.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그 때 그대는 내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될 것이다. … 개인이 되는 것은 해방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372).

ü  우리는 온갖 종류의 기적들을 만들어왔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바로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과 결국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373).

ü  예전의 산야스는 심각했다. 나는 거기에 유머감각을 덧붙였다. 예전의 산야스는 슬펐다. 나는 거기에 노래를, 춤을, 웃음을 덧붙였다. 나는 그것을 더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373).

ü  예전의 산야스는 아무래도 삶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나는 그것에 삶에 대해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똑 같은 산야스이다. 그것은 똑 같은 탐구이다. 나는 그것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더 세상 속에 뿌리내리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가르침은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374).

ü  세상을 포기하고 은둔할 필요는 없다. 오직 겁쟁이들만이 세상을 포기한다. 세상 속에 살라. 세상을 경험하라. 세상은 하나의 학교이다. 그대는 히말라야 속에서 성장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세상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374).

ü  왜 진리에 대한 탐구가 특정한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374).

ü  나는 산야스를 내면 세계의 과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성장해왔다. … 내적인 탐구는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375).

ü  산야스 운동은 조직이 아니다. …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 나는 그 누구의 지도자도 아니다. 아무도 나를 따를 필요가 없다. 나는 내가 나의 지복, 나의 사랑, 나의 환희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준데 대해 그대에게 감사한다. … 아무도 나의 추종자가 아니다. ..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종교성이며 바로 그 정수이다. .. 그대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375).

ü  종교들은 그대가 성경 속에서, 기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죽은 꽃들과 같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던 그 때, 그 꽃들은 살아 있었다 (375~6).

ü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는 각각의 개인 그 자신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376).

ü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376).

ü  깨달음 이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어남이 멈춘다. … 그대 안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남아 있다 (377).

 

<3부 유산>

ü  나는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치 않고 남아 있을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대도 갈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영원히 남을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것은 자체의 반향을 지닐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진동할 것이다 (380).

ü  이 순간 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영원의 일부가 될 것이다 (381).

 

종교 아닌 종교

ü  나는 그대가 나에게서 결코 교리를 만들어낼 수 없도록 끊임없이 변덕을 부려왔다 (382).

ü  아무도 나로부터 정설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 어떤 이론도, 어떤 교리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382).

ü  그대는 하나의 사는 방법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전파할 수 있는 교리를 찾을 수는 없다. … 조직화될 수 있는 혁명의 주제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382).

ü  그렇다. 느슨한 공동사회,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는 있다. ‘느슨한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라. 그 안에서는 모두가 독립적으로, 모두가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살 자유를 가지고서,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해석할 것이다 (383).

ü  그대는 스스로 나를 정의 내릴 수 있다. … 그리고 그 정의마저도 그대는 끊임없이 바꿔야 할 것이다. 그대가 나를 더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대는 그것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383).

ü  기독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이런 것들은 단지 이데올로기이며 교리이며 교의의다. 그것은 단지 예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383~4).

ü  나는 신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대에게 말한다. “이것이 그 창문이다. 이것을 열어라. 그러면 그대는 별이 가득한 밤을 볼 것이다 (384~5).”

ü  따라서 나의 모든 노력은 존재적이다.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종교는 존재적이다. 그 진정한 종교는 언제나 오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 났다. … 왜냐하면 지식인들이 즉시 그것을 가로채어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이데올로기를, 산뜻하고 깔끔하고 논리적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철학을 창조해낸다 (385).

ü  따라서 기억하라. 그대는 어떤 종교에 입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종교성 속으로 입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광대하며 무한하다. 그것은 온 하늘과 같다 (385).

ü  그러므로 어떤 두려움도 없이 그대의 날개를 펼쳐라. 이 존재 전체가 우리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원이다. 이것이 우리의 경전이다 (385).

ü  날조된 종교들을 경계하라. 그래야만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나무에, 산에, 강에, 별에, 그대 안에, 그대를 둘러싼 사람들 안에도 있다 (386).

ü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386).

ü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386).

ü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을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 (387).

ü  종교에 하나의 양자도약을 가져온 공로는 고타마 붓다로부터 25세기 전의 아디나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처음으로 신이 없는 종교를 역설했다. 그것은 엄청난 혁명이었다 (387).

ü  신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 중심이었다. 그러나 신을 종교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을 단지 그 주변에 불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388).

ü  아다나타는 틀림없이 매우 깊이 들어간 명상가, 묵상가였을 것이다. … 우리보다 5천년 전의 이 사람, 아디나타는 매우 분명한 과학적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인간보다 더 높은 것은 없으며 일어날 진화가 무엇이든 그것은 인간 안에, 인간의 의식 안에 있다는 것이다 (390).

ü  아디나타는 자이나교의 24대 조사 중 첫 번째 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양자도약이었다. 신이 제거된 것이다. 아디나타는 신을 제거했지만 그 자리를 명상으로 대체하지는 못했다. … 그는 하나의 아름다운 철학적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결론은 단지 철학적인 것일 뿐, 명상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90).

ü  신을 폐위시키고 나면 그대는 어떤 제식도 가질 수 없다. 그대는 예배를 가질 수 없다. 그대는 기도를 가질 수 없다. 무언가가 대체되어야 한다. 그는 금욕으로 대체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종교의 중심이 되었고 이제 그 자신을 청결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391).

ü  이것은 모든 것을 왜곡 시켰다.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결론은 단지 철학적인 개념으로만 남았다 (391).

ü  아디나타는 신을 제거했지만 공백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붓다는 그 공백을 명상으로 채웠다. 아디나타는 신이 없는 종교를 만들었다. 붓다는 명상적인 종교를 만들었다. 명상은 붓다의 기여이다. 중요한 것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다 (391).

ü  다시 25세기가 흘렀다. … 명상이라는 붓다의 개념도 또 다른 사막 속에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사막은 바로 조직화된 종교였다 (392).

ü  시작은 좋았다. 붓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아실현에 도달한, 깨달음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 그리고 명상을 하도록 돕는 대신에 불상화 종교적 의식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붓다는 또 다른 신이 되었다 (392).

ü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붓다를 예배하고 붓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붓다의 계율을 따르며, 그의 교리에 따라 삶을 사는 것 뿐이다. …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명상이었다 (392~3).

ü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이 신을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명상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도 없고 종교도 없다 (393).

ü  처음으로 나는 종교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모든 조직화된 종교들은 인류를 잘못 인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원인은 조직화였다 (393).

ü  조직화는 정말로 하나의 정치적인 현상이다 (394).

ü  이제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과 종교 모두를 제거하여 어떤 성직의 가능성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 (394).

ü  나의 느낌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성장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면 될수록 그것을 오랫동안 미루어 두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대가 불행하다면 그 책임은 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394).

ü  나의 불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문을 열어준다. 이제 그대는 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395).

ü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 명상은 존재가 평화롭고 지복스럽게 꽃 피어나는 상태이다. … 명상적인 마음의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따라서 그대는 이것을 세 번의 양자도약 이라고 부를 수 있다 (395).

ü  신이 사라졌고 이제 그 빈 자리가 채워져야 함을 본 것은 붓다의 통찰력이다. … 그는 명상을 가져왔다. … 그러나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조직이 없어야 한다는 것, 성직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 신이 사라진 것처럼 종교 또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396).

ü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신은 성직자의 날조물이다. 성직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가 신을 버린다 해도 성직자가 언제나 새로운 예식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396).

ü   그대가 명상 속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존재로부터 분리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고통이다 (397).

ü  명상은 생각, 감정, 감상과 같은 그대와 존재 사이에 벽을 만들어내는 모든 장벽들을 치우는 것에 불과하다 (397).

ü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단지 침묵하고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뿐이다. 어떤 종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신도 필요치 않다. 어떤 성직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조직도 필요치 않다 (399).

ü  나는 절대적으로 개인을 신뢰한다. …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명상의 상태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전적인 침묵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399).

ü  그것이 성장해 감에 따라 그대도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가 그대의 가능성의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대는 그것을 불성, 깨달음, 바그와타, 즉 신성, 그 밖에 무엇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이름이 없다. 따라서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399).

 

21세기를 위한 명상

ü  마음은 매우 복잡한 현상이오. 전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것이오 (403).

ü  나는 10년 뒤에 그를 보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신선하고, 너무나 젊었다. 마치 하나의 꽃봉오리가 막 장미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신선함을 지니고 있었다 (406).

ü  마음은 단지 하나의 기계 장치일 뿐이다.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유일한 문제는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407).

ü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407).

ü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 (408).

ü  그대는 그대가 서 있는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지점은 좋다 (409).

ü  신 때문에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단지 이 한 단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한다 (410).

ü  그대가 있는 곳에서 꼼짝 않고 있지 말라. 중심을 향해 움직여라. 명상하라. 그것이 그대를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무엇으로도 그것을 부를 수 있다 (411).

ü  명상의 112가지 방편들이 있다. 그 방편들은 만 년 전에 발견되었다. 나는 현대인을 위해 몇 가지 새로운 방편들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112가지 방편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 매우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 창안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단순하지 않다. 그들은 매우 복잡하다. 그 방편들은 억압받지 않은 자연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만 년이라는 이 세월 동안 종교들은 모든 사람들을 억압되게 만들었다. 성적으로, 그리고 다른 면들에 있어서, 그들은 인류를 자신의 본성에 반대되는 쪽으로 몰아갔다. 따라서 나는 정화적인 새 방편들을 창안해 냈다그대의 마음에 끌리는 어떤 한가지 방편만으로도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411).

ü  오쇼는 이 112가지 방편에 대해 <탄트라 비전>에서 상세한 소개와 안내를 한다 (411).

ü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압했다. 때문에 그것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412).

ü  그대가 눈을 감고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무엇을 만나는가? … 그대는 그곳에서 억압된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지옥들과 고뇌들을 만난다. 여러 생에 걸쳐 쌓여온 분노그곳은 온통 난장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바깥에 머물고 싶어한다. … 지쳐서 잠이 들 때까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기를 바란다 (413).

ü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당연히 그는 매우 의아해진다. … 왜 자꾸 상처를 건드리는가? 그것은 아프기도 한데다 상처에서는 더러운 고름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화는 도움이 된다. 만약 그대가 정화를 한다면, 그대가 혼돈 명상들을 경험한다면, 그대는 이 모든 구름들을, 이 모든 어둠을 바깥으로 던져버리게 된다. 그 때 주시는 더 쉬워진다. 그것이 바로 내가 처음에는 혼돈 명상들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고요한 명상들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먼저 동적인 명상법들, 그 다음에 정적인 명상법들이다. 쓰레기처럼 버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내던져졌을 때에만 그대는 비활동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분노가 내던져지고 탐욕이 내던져지고층층이 이런 것들이 거기에 쌓여 있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러한 것들을 내던지고 나면 그대는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갑자기 붓다의 땅의 밝은 빛이 눈 앞에 펼쳐진다. 갑자기 그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다 (413~4).

ü  아침 명상은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10분 동안 그대는 빠른 호흡을 행하게 된다. 그대는 호흡을 통해 존재 속으로 들어간다. 그대는 호흡에 활력과 에너지를 불어 넣어야 한다. 그대의 생명 그 자체를 호흡에 실어야 한다 (414).

ü  10분 동안의 이 강렬한 호흡은 그대 안에 잠들어 있는 모든 에너지를 깨울 것이다 (415).

ü  사람은 개성이 있고 개인성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각각의 개인은 각자의 온도에서 수증기로 변한다. 또는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의 100도가 각각 다르다. …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100도 지점을 판단할 수 있다 (416).

ü  그리고 그 일에 있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그대 자신만의 일이다 (416).

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그대는 분명하게 그대 스스로를 완전히 내던지기만 하면 된다 (417).

ü  내적인 도박은 그 정반대이다. 패배조차도 다가오는 승리의 시작이다. 명상자는 결코 마지막에 지지 않는다. 그는 여러 번 진다. 하지만 마침내는 이긴다. 마하비라나 붓다가 맨 첫째 날부터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라. … 그들은 형편없이 지고 만다. 그란 결국에는 이기고 만다 (418).

ü  따라서 10분 동안은 강렬한 호흡이다. … 그리고 나서 10분 동안의 강렬한 호흡 후에 에너지가 깨어났을 때, 그 에너지는 밖으로 내던져져야 한다. 어떤 길을 통해서든 원하는 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대의 몸은 뛰고, 날뛰고, 춤을 추고, 울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대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고삐를 완전히 풀어주고 멋대로 하게 두어야 한다. 만약 그대의 몸이 완전히 미치고 싶어한다면 미치게 내버려 두라 (418).

ü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광기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 그대는 그것이 완전히 미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완전히 미친다는 말은 그대가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19).

ü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미쳐버리라는 말은 그 모든 두려움들을 던져버리라는 말이다. 누구와 관계되는 두려움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 그대가 무슨 두려움을 가지고 있든지, 미쳐버리라는 말은, “이제 나는 모든 두려움을 놓아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움 없이, 그대는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 일어나게 두어야 할 것이다 (419).

ü  우리는 하루하루 광기를 쌓아간다. 그것은 마치 집안에 쓰레기가 있는데 계속해서 그 쓰레기를 구석에 숨기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마음 속에 어떤 쓰레기가 있든지 간에, 우리는 계속 그것을 쌓아가기만 한다. 그것이 분노이든, 거짓이든, 혹은 미움이든우리는 무엇이든지 계속 쌓아간다. … 우리는 이제 너무나 그것을 두려워하게 되어 우리 안을 들여다보는 일을 완전히 멈춘다 (420).

ü  오직 이 쓰레기를 밖으로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내던져지면 그대 안의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두 번째 단계는 내면에 깨끗함이 자리 잡도록 모든 것을 밖으로 내던지는 카타르시스의 단계이다. 용기를 모으기 전까지 그대는 그 쓰레기를 밖으로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면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완전히 미쳐버리는 단계이다 (420).

ü  세 번째 단계는 라는 소리를 내는 단계이다. 그대는 10분 동안 끊임없이 점프하면서 라는 소리를 내야 한다. … 그대의 몸 안에는 성 중추 바로 옆에 어떤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다. … 깊고 강한 소리가 만들어진다면 그 잠들어 있는 에너지, 잠자던 에너지는 활성화된다. 고대의 성자들은 이를 또아리를 튼 채 고개를 쳐들고 있는 뱀에 비유했다. 뱀은 머리를 얻어맞게 되면 목가죽을 펼치고 일어선다. … 이와 똑같이 이 에너지는 우리 안에 잠들어 있다. 그것이 얻어맞을 때,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한다 (421).

ü  그러나 이런 망치질은 그대가 그대 내면의 광기를 내던질 기회를 가졌을 때에만 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모든 광기 한가운데서 그 에너지가 일어나게 되면 그대는 실제로 미쳐버릴 수 있다. 때문에 구도자들이 미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정화를 전혀 거치지 않고 쿤달리니를 일으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이처럼 정화를 먼저 행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421~2).

ü  따라서 첫 두 단계는 그대를 깊이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그대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일깨워진 에너지와 충돌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을 밖으로 던져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재 단계는 아래에 잠들어 있는 쿤달리니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422).

ü  그리고 네 번째 단계에서 그대는 시체처럼 눕는다. 마치 그대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고요하게, … 눈을 감고서 그대는 내적인 고요함을 가지고 기다림 속에 머무른다.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 내적인 기다림 속에서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422).

ü  이 모든 명상법들과 그 밖에 더 많은 방편들이 오쇼의 책 <명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422).

ü  한 사람이 명상을 할 때, 그는 모든 불안에서 벗어난다. 생각이 멈추고 몸의 움직임이 멈춘다. .. 완전히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 순간 그는 에너지의 저수지이다. 그는 엄청난 힘을 지닌다. … 명상적인 분위기 속에 있는 사람 옆에 앉아 있으면 그대 또한 명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명상은 다름 아닌 절대적인 휴식이다 (423).

ü  휴식을 창조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다. 나의 방법은 먼저 그대를 최대한 쉬지 못하게 만들어 그대 안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424).

ü  붓다의 시대에는 그처럼 동적인 방편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단순했고 더 진실했다. 그들은 더 진짜 삶을 살았다. 지금 사람들은 매우 억압된 삶, 매우 가짜의 삶을 산다.사람들은 거짓스럽다. 삶의 모든 양식 자체가 거짓스럽다. 모든 문화가 거대한 거짓덩어리와 같다. 사람들은 삶을 살지 않는다. 단지 연기를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 많은 것이 미진하게 남는다. 많은 불완전한 경험들이 계속 모이고 쌓여간다 (424).

ü  따라서 처음부터 앉아서 침묵하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먼저 그러한 것들을 내던져 자연스러운 휴식 상태가 찾아오게 하라. 진짜 명상은 오직 그대가 휴식 속에 있을 때에만 시작된다. 모든 동적인 명상은 진짜 명상을 위한 준비이다. … 그것을 명상으로 간주하지 말라. .. 진짜 명상은 모든 활동이 그쳤을 때에만, 몸과 마음의 모든 활동이 그쳤을 때에만 시작된다 (424~5).

ü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 한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

 

3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

ü  나는 코뮨 안에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요법 과정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 모든 요법들을 파괴하기 위해 작업하고 있었다. … 왜냐하면 요법은 단지 일시적인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며 요법가 또한 매우 피상적인 도움 밖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26).

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그 목표는 사람들을 보통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단지 보통이 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 그것은 그대에게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를 시간 너머로, 죽음 너머로 데려가지 않는다 (427).

ü  심리학은 사람들이 불행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심리학은 이것이 삶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어찌 보면 그것은 사람들의 내적인 성장에 있어 위험하다. 왜냐하면 내적인 성장은 오직 신성에 대한 불만족이 있을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427).

ü  융은 무의식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갔다. 그는 집단 무의식을 탐구했다. 이것은 점점 더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428).

ü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도 아니고 종합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다. 그것은 마음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마음 밖으로 데려가는 작업이다 (428).

ü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존재 사이에 거리를 창조해낼 수 있을 때, 그때 그대는 붓다의 심리학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429).

ü  붓다의 심리학은 마음 안에서 작업하지 않는다. …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바로 그 바라봄이 곧 변형이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대는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난다.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뿌리는 잘려진다 (430).

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뿌리가 잘려질 수 있는가? 왜냐하면 마음에 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 만약 그대가 동일시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마음에 양분을 공급하던 것을 멈추게 된다. 마음은 저절로 죽어버린다 (430).

ü  그대가 그대 마음의 강둑에 앉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명상은 초월의 기술이다 (432).

ü  붓다는 언제나 명상, 각성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명상, 각성, 주시그것이 바로 제 3의 심리학만이 가진 뛰어난 점이다. 심리분석가는 필요치 않다.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다 (433).

ü  그대의 마음을 더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그대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다. 마음은 바윗덩이와 같은 작용을 하여 그대를 아래로 끌어 내린다. 마음은 그대를 중력의 장안에 붙잡아 둔다.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묶여 있지 않게 되는 순간 그대는 붓다장으로 들어간다. 붓다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공중부양의 세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대는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음은 계속 그대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433~4).

ü  따라서 문제는 분석이나 종합이 아니다. .. 바로 그것이 우리 동양 사람들이 프로이트학파나 융 학파, 아들러 학파와 같은 심리치료 요법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이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하나의 심리 치료 요법도 발전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리치료 요법으로는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 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 때 치유가 일어난다 (434).

ü  초월이 진정한 요법이다. …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를 치유한다. 마음은 단지 그대의 주변일 뿐이다. 마음은 그대의 중심이 아니다 (434~5).

ü  성장의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 동양은 개인적인 노력이 강조되었고, 서양은 좀 더 그룹 방편들 쪽으로 움직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또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되었는가? 그룹 방편들은 그대의 에고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짐이 되는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435).

ü  바로 그 때문에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서양에만 존재할 수 있는 현상들이 있는 것이다. … 독일은 서양에서도 가장 에고적인 나라이다. … 그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무리 속으로 녹아듦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437).

ü  독일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리가들이기 때문이다 (438).

ü  그는 결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최면적인 그룹 현상을 만들어냈다. 그 최면이 그들을 설득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리 속에, 군중 속에 있을 때 어떤 느낌을 받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짐에서 벗어나는 경험이었고, 때문에 이 사람은 따를 가치가 있었다 (439~440).

ü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지루해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흡수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서양에서 파시즘, 나치즘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집단 광기들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440).

ü  동양에서는 오직 일본만이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동양의 독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서양적인 나라이다 (440).

ü  서양에서는 손에 손을 잡은 백 명의 사람들이 뿌듯해하고 행복해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에고 때문에 그들은 손을 잡는 것조차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내와 남편조차 함께가 아니다. 대가족은 사라졌다. 대가족은 하나의 그룹 현상이었다. 사회는 사라졌다. 이제 서양에서는, 실제로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홀로 움직인다 (441).

ü  미국에서는 평균 3년마다 사람들이 이사를 한다. 이것은 역사상 존재했던 최고의 유목 문명이며 방랑자들이다. 사실 그들은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마을도 없고, 가정도 없는 셈이다. 3년 안에 어떻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 어디를 가든 그대는 이방인이다. 대중은 그대 주위에 있지만 그대는 그들과 관계되어 있지 않다. 그대는 관계가 없다. 이제 모든 짐은 개인의 것이 된다 (441~2).

ü  그룹 과정 속에그대는 그 집단의 한 부분이 된다. … 그들은 융합된다. 에고는 한순간 사라진다. 그 융합은 하나의 기도와 같은 것이 된다 (442).

ü  정치가들은 그것을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영성에서는 그것을 매우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명상이 될 수 있다 (442).

ü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영적인 공간 속에 있고 싶을 때면 언제나 그들은 히말라야로 가고 싶어한다. 사회가 너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싫증이 나 있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442).

ü  서양 사람들은 사회로 달아난다. 동양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달아난다. 그것이 바로 동양에 개인적인 방편들이 존재해왔던 이유이다. 그룹 방편들은 서양에 존재한다 (443).

ü  나의 방편은 하나의 종합체이다. 다이나믹 명상의 첫 단계에서 그대는 무리의 일부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룹이 사라진다. 그대는 혼자이다 (443).

ü  동양은 서양을 향해 돌아서고 있고 서양은 동양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머지않아 동양도 서양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의 세계만이 있을 것이다 (443).

ü  그것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의 습관 때문에 그 구분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심리적인 현상으로서만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43).

ü  그것은 이미 거기 있다. 볼 수 있는 자들은 그 세계가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의 종합체가 필요하다. 그룹과 개인 모두가 필요하다. …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444).

ü  112가지 기법이 완성된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이었다. 그때는동양이 전 세계였다 (449).

ü  먼저 동양과 서양의 마음이 비슷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 그 기본은 정화이다 (449).

ü  그대는 그대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그 모든 쓰레기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대가 그 짐을 벗지 않는 한 그대는 고요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 (449~450).

ü  정화적인 방편들은 단순히 그대의 조급함과 그대의 성급함, 그대의 서두름, 그대의 억압을 모두 던져버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450).

ü  이런 방편들은 서양 사람들이 비파사나와 같은 명상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450). 

ü  비파사나(Vipassana): 조용히 앉아서 호흡을 주시하는 명상법 (450).

ü  이제 그것은 동양의 마음에도 필요해진 것이다. 쉬바가 그 112가지 명상 방편을 만들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 마음은 이제 동양에서조차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마음이다. 서양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컸다. … 쉬바의 시대에는 서양 문화라는 것이 없었다. 동양은 그 영광의 절정에 서 있었다 (451~2).

ü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 그들은 (서양인들) 서두름, 조급함, 성급함, 끊임없는 고뇌와 근심이라는 그들의 병을 동양에 심어주었다. 만약 그대가 카주라호의 사원이나 코나라크의 사원을 본다면 그대는 동양의 진정한 색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52).

ü  인도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에게 너무나 큰 빚이 있다. 그가 바로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사원들을 덮어버리려 하는 마하트마 간디와 다른 정치가들을 막은 사람이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 조각들은 포르노물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아름답다.: 포르노와 아름다움 사이에는 매우 미묘한 선이 있다. .. 벌거벗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는 아름다움과 건강과 균형미의 표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가장 위대한 산물이다 (454).

ü  벌거벗은 사람의 그림이나 조각은 그것이 그대의 성욕을 자극할 때 포르노가 된다.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 그러나 카주라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사실 그 사원들은 정반대의 이유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남자와 여자에 대해 명상하도록 만들어졌다 (454~5).

ü  이 사원들을 만든 사람들은 엄청나게 방대한 문학작품 또한 만들어냈다. 동양은 결코 성을 억압하지 않았었다. 처음으로 금욕이 영적인 현상이 된 것은 붓다와 마하비라를 통해서였다. … 그들은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사치와 모든 안락함을 누렸다 (456).

ü  내가 성을 받아들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에 대한 받아들임 없이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완전히 깨끗해지기를,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 112가지 방편을 행하기게 알맞은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 (457).

ü  오늘날 건강한 마음을 찾아 본다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 모두가 일종의 구역질을, 정신적인 구역질을, 어떤 공허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픈 상처와 같다 (457).

ü  죽음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삶 또한 두려워 한다 (457).

ü  사람들은 절반의 가슴으로 살고 있다. …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강렬하게 살지 않는다.  건강한 향기를 지니고 살지 않는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의욕은 전혀 없다. 그들은 에너지로 넘치지 않는다.모험적이지 않고서는 사람은 건강하지 않다. 모험이 기준이다. 미지에 대한 탐구가 기준이다 (457~8).

ü  나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원한다. 동양은 명상적인 방편들을 발전시켰다. … 대신 서양은 심리요법들을 발전시켰다 (458).

ü  이 지구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459).

ü  일단 마음이 치워지고 나면 그들은 마음 뒤에 그들의 진짜 보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 보물은 마음 뒤에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이다 (460).

ü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다. … 명상은 그대에게 거울에 비친 그대 존재의 보물이 아닌, 보물 그 자체를 볼 기회를 준다 (460).

 

조르바 붓다: 완전한 인간

ü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다. …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461).

ü  서양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 있다. 그 여정은 서양의 모든 영혼을 앗아가 버렸다. … 외적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 인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 부는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부유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가난함을, 커다란 빈곤함을 느끼고 있다. …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때에만 그대는 그 대비를 통해 그대의 내적 가난을 깨닫게 된다 (463).

ü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 때 불현듯, “나는 내적으로는 가난하다. 나는 거지이다라는 커다란 자각이 일어난다. … “우리가 꿈꾸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 그러나 그것을 통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만족도, 어떤 지복도 없다 (464).”

ü  서양은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이 당황스러움으로부터 커다란 욕망이 일어난다. 어떻게 다시 자기 자신에 연결될 수 있을까? 명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명상은 다시 한 번 그대의 내면 세계 속으로, 그대의 내면성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은 명상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다 (464).

ü  동양도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 이것이 바로 내가 부에 반대하지 않으며 가난함에 어떤 영적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 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464).

ü  힌두교의 모든 아바타들은 왕이나 왕의 아들들이었다. 자이나교의 모든 띠르탕까라들, 자이나교의 스승들도 왕들이었다. 그리고 붓다고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위대한 전통 세 가지가 충분한 증거가 된다 (465).

ü  왜 붓다가 불만을 느끼게 되었는가? …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다 (465).

ü  인도가 부유했을 때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졌다 (467).

ü  인도에서 가난은 숭배받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끊임없이 가난을 비난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종류의 가난에도 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은 영성이 아니다. 가난은 영성이 사라지는 원인이다. 나는 전 세상이 가능한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그들은 더 영적이 될 것이다 (468).

ü  외면의 부와 내면의 부가 만날 때, 그 때 거기 진정한 만족이 있다. 외면의 가난이 내면의 가난을 만날 때, 그 때에는 거짓 만족이 있다. … 외면과 내면이 조화 속에 있을 때, 사람은 만족을 느낀다 (468).

ü  서양은 명상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서양인들의 마음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가는 이유이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명상의 과학을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극히 평범한 종교로 남았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이다 (469).

ü  이 종교들이 탄생했을 때 서양은 가난했다. … 동양이 부유했을 때 서양은 가난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이 세 종교는 모두 가난 속에서 탄생했다. 그 종교들은 명상 기법들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 그 종교들은 가난한 자들의 종교로 남았다 (469).

ü  서양의 종교들은 가난 속에 탄생했다. 그 종교들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 종교들은 유치해 보인다. 그것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동양의 종교들은 부유함 속에서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서양인들의 마음이 점점 더 동양의 종교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 … 붓다의 종교는 엄청난 충격을 지니고 있다. 선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왜인가? 선은 부로부터 탄생했기 때문이다 (469).

ü  사실 가난한 인도인들은 기독교로 개종되고 있다. 부유한 미국인들은 불교로, 힌두교로, 베단타로 개종되고 있고 인도에서도 제일 가난한 불가촉 천민들은 기독교인이 되고 있다 (470).

ü  동양은 명상을 하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기도를 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하다. 동양의 유일한 관심은 의식주뿐이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와서 병원이나 학교를 열자 인도인들은 무척 감명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영성으로 보인 것이다  (472).

ü  동양은 아직 명상을 할 수 없다. 먼저 물질적으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서양이 종교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동양은 과학 기술을 필요로 한다 (473).

ü  하나의 세계에 전적으로 찬성이다. 그 하나의 세계에서 서양은 동양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고 동양은 서양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473).

ü  우리는 이 전 지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결정적인 시기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세계는 하나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시대는 갔다. 분열의 시대는 갔다. 정치가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단계는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하는 단계, 오직 하나의 인류만이 존재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그 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나올 것이다 (473~4).

ü  그것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이곳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새로운 인류가 잉태되고 탄생할 수 있는 자궁이다 (474).

ü  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이다. 이것은 궁극의 양극성이다 (474).

ü  삶 전체는 양극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러나 그 반대 극들은 반대 극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호보완적이다 (474~5).

ü  명상은 홀로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며 가능한 한 쉽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같다 (475).

ü  사랑과 명상이 함께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완전하고 온전하며 전체가 된다 (475).

ü  여러 세기 동안 종교들은 반대급부를 제외시킴으로써 한쪽 극을 성취하려 노력해왔다 (475).

ü  서양의 신학자들이 처음 불교와 자이나교 문학을 접했을 때 그들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 그것은 철학으로 불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가? (476).

ü  붓다는 반쪽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붓다는 명상이 무엇인지 안다 (477).

ü  이 만남은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 (Zorba the Buddha)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이 신 인간을 부르는 나의 이름이다 (479).

ü  인류의 모든 과거는 병들고 아프고 미쳐 있었다. 3천 년 동안 5천 번의 전쟁이 있었다. 이것은 완전히 미쳤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480).

ü  과거는 억압적이었기 때문에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가 억압을 받게 되면 사람은 공격적이 되며 모든 부드러운 자질들을 잃게 된다 (481).

ü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 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481).

ü  신인간과 함께 하나의 신세계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신인간은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는 동시에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일 것이다 (481).

ü  그것이 내가 가르치는 것, 원인이 아닌 호모 노부스 (Homo Novus), 신인간이다 (481).

ü  모든 아이들은 처음에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살아 있고, 어떤 분열도 없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즉시 사회가 나선다. … 아이의 전체성은 곧 사라진다. .. 아이는 여러 자연스러운 것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부정 속에 그는 창조성을 잃게 된다 (482).

ü  타인들이 그를 위해 결정을 해왔다. 그의 부모, 선생들, 지도자들, 성직자들그들이 모든 결정을 가져가버렸다 (482).

ü  나는 자유를 가르친다. 이제 인간은 모든 종류의 구속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감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더 이상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482).

ü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 그는 예수이며 동시에 에피쿠로스 일 것이다 (483).

ü  구인간의 이상이 세속의 포기였다면 신인간의 이상은 기쁨일 것이다 (483).

ü  신인간은 매우 새로운 현상일 것이다. 신인간은 너무나 새로워서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전 인류의 미래는 신인간에 달려 있다. 신인간은 도래해야 한다 (484).

ü  전 인류는 거대한 노예상태 속에, 속박 속에, 분열 속에, 광기 속에 살았다 (485~6).

ü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실패했고 과학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동양이 실패했고 서양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뭔가 더 높은 통합체가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고, 종교와 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합체가 필요하다 (486).

ü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487).

ü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 (487).

 

<4 :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ü  나는 태풍의 중심이다. 따라서 나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490).

ü  나의 내면 깊은 곳의 존재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다만 똑같을 뿐이다.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이다 (490).

ü  외부 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 나는 실체를 두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 (490~1).

ü  첫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 세번 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495).

ü  오쇼는 사랑과 명상은 성적인 에너지의 변형에서 일어나며 성이 억압되면 그 에너지는 변형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496).

ü  만약 그대가 사랑에 관한 원초적인 진실을 알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열린 가슴으로 성의 신성함을, 성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대는 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대는 더 성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497).

ü  직접 (바로)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오직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500).

ü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야스의 의미는 세상의 포기이다. 나는 그것에 반대한다 (501).

ü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의 주인이 되는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대가 전 존재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궁극적인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502).

ü  인간의 마음은 전혀 성숙하지 못했다. 인간의 마음은 외적인 상징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런 일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에 일어났다 (504).

ü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505).

ü  만약 그대가 내가 말했던 것들에만 계속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지식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대를 더 박식하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대는 앎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508).

ü  그대의 마음은 혼돈 속에 있다. 그 혼돈은 밖으로 나와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 그대는 표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511).

ü  , 재즈, 그 밖에 혼돈스런 음악들은 그대 안의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바로 억압된 성욕이다 (511).

ü  마음의 상태는 신경증적이다. 전 사회가 병들어 있다. …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 놓아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라. 그 과정에서 음악은 도움이 될 것이다 (511).

ü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들을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512).

ü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의 존재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이다 (516).

ü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19).

ü  20세기는 모든 종류의 미신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완전히 벌거벗은 나체의 종교를 필요로 한다 (519).

ü  서서히 그대는 그대 자신의 내면의 핵의 소리를, 그것이 말하는 것을 듣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신뢰가 일어나야 한다 (520).

ü  조용히 그대 자신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다 (522).

ü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는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523).

ü  만약 그가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그대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일은 끝났다. 그대는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는다 (524).

ü  단지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려라. 씨를 뿌리고 계속 가라. 그 씨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뒤돌아보지 말라. 그들의 때가 오면, 봄이 오면, 그 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524).

ü  많은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만약 그대가 엔카운더 그룹을 지켜본다면 그대는 구역질을 느낄 것이다. 엄청난 동물성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대는 구역질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인간이 그처럼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물성은 그대 안에도 있다. 단지 억압되어 있을 뿐이다. 억압을 통해서는 결코 그것을 없앨 수 없다 (527~8).

ü  엔카운터 그룹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모든 것에 직면해야 한다. 그것이 엔카운터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그대는 억압되어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 내야 한다. 그대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한 판단 없이 모든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문득 그대는 엄청난 동물들이 그대 안에서 울부짖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동물들은 폭력적이다. 그리고 그대는 비폭력적이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대의 비폭력이 그대의 폭력성을 억압해왔다. 아무 이유도 없이 거대한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528).

ü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그대의 섹스, 그대의 화, 그대의 탐욕, 그대의 질투, 그대의 분노그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 커다란 평온함이 일어난다. 그것은 폭풍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다 (528~9).

ü  이것은 대중들의 이해를 받을 수 없다. 사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하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안에서도 똑 같은 것들을 발견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29).

ü  기억하라. 이 그룹들은 끝이 아니다: 이 그룹들은 단지 그대가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일단 그대가 지금껏 억압해온 모든 것들을 그대의 시스템 밖으로 내던지고 나면 나는 그대를 각성 속으로 이끌어간다. 이제 주시를 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531).

ü  그러나 그대는 그룹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그룹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세계에는 그룹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그룹 저 그룹을 떠돌아다닌다 (531).

ü  며칠만 그룹을 안하면 그들은 좀이 쑤신다. 왜냐하면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그들은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억압해야 한다. 따라서 그룹은 단지 하나의 배출구가 된다. 정상적인 사회는 그대에게 억압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룹은 그대가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531).

ü  나는 세계의 거의 모든 전통들 속에서 살아 왔다. 나는 여러 생 동안 방랑자였다. 나는 여러 꽃들로부터 많은 꿀을 모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떠나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육체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생이 될 것이다. 내가 모아온 모든 꿀을 나는 그대와 나누고 싶다. 그래서 그대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고, 그것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538).

ü  점점 더 나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코뮨은 말이 아닌 에너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침묵 속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감에 따라 나는 점점 더 침묵하게 될 것이다. … 인류 역사에서 모든 아름답고 위대한 일들은 언제나 내적인 탐험을 위해 에너지를 한데 모았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539).

ü  나는 그대가 가능한 한 빨리 준비되기를,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침묵 속에 앉아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540).

ü  세상 속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이 그대 속에 살도록 허락하지 말라. 그것이 나의 메시지이다 (543).

ü  세상 속에 있어라. 세상 속에 살아라. 전체적으로 살아라. 야망 없이, 욕망 없이 살아라. 왜냐하면 모든 욕망은 그대를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모든 야망은 그대의 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543).

ü  나는 실수들을 저질렀고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깨달음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546).

ü  나의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들만이 정치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뭔가 해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만 권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으로 충분하다. 연민으로 충분하다 (551).

ü  나의 사람들은 너무나 삶에 몰두해 있어 죽음마저 고민에 빠질 것이다. 죽음은 30, 40, 50년 동안 죽어 있었던 사람들은 쉽게 데려갈 수 있다 (553).

ü  이 행성 외에도 5만개의 다른 행성들에 생명이 살고 있다 (553).

ü  배우지 않는다면 역사는 반복된다. 배운다면 그대는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563).

ü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 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 (565).

ü  내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켜본 바로는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이다. 그들의 헌법은 단지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일 뿐이다. 그 나라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571).

ü  세 나라의 정부가 나를 초청했다. 미국이 나에게 반대하고 있으며 내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도록 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 그들은 가난한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다 (574).

ü  나의 일의 새로운 단계는 신비학교 (Mystery School)이다. … 하루 다섯 시간, 5일 동안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580).

ü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대는 덧없는 것들을 좇아, 꿈들을 좇아 멀리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시간 속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여기에 있다 (586).

ü  그대는 참을 수 없는 열망 속에서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깊은 동경을 가지고, 그러나 어떤 요구도 없어야 한다 (587).

ü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존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존재는 단지 꼭 필요한만큼만 허락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다 (588).

ü  나는 그대와 함께 갈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 머지않아 그대는 나의 손가락을 잊고 그대 스스로 달을 보아야 한다. 그대는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 (588).

ü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589).

ü  그대의 성장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그대를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 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 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 상태이다 (590).

ü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593).

ü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 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 (593).

ü  이들이 (예수나 소크라테스) 바로 우리의 가장 위대한 꽃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운명이며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다. 그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잠재력이 현실로 드러난 모습이다 (593).

ü  나는 그대가 그대 가슴속에 어떠한 분노도 간직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 대한 증오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단지 이해와 사랑 가득한 용서만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짜 기도이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기도만이 인류를 더 높은 의식의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잇다 (594).

ü  이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가장 먼 별들에 닿고자 하는 용기와 지성과 동경과 갈망을 지닌 사람들오직 그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나의 길동무가 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추종자가 없다 (595).

ü  예전의 과학은 종교에 대한 반발로서 생겨났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은 어떤 것에 대한 반발도 아닌 넘치는 에너지와 지성, 창조성일 뿐이다 (596).

ü  나는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이다. … 내가 나의 삶에 꿈꾸었던 모든 것을 해냈다.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존재계에 제안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 (600).

ü  필요한 것은 그대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층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의 웃음은 억압되어 왔다. … 따라서 첫번째 층은 웃음이다. 그러나 일단 웃음이 지나가고 나면 그대는 문득 눈물과 고뇌가 흘러넘치고 있는 그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커다란 해방감을 줄 것이다. 여러 생에 걸친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두 층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601~2).

ü  오직 조직화된 교의나 신앙 체계, 교리, 신학이 없을 때에만 종교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대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점의 하나이다 (603).

ü  그것이 모든 종교가 한편에 서 있고, 선이 다른 한편에 서 있게 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선을 제외한 모든 종교는 죽어 있다. 그 종교들은 화석이 되었고, 신학이 되었고, 철학 체계가 되었고, 교의가 되었다 (603).

ü  나는 선을 가리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라 단지 종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창시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가르칠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 선은 앎이 아닌 무지 속에서 충족된다. … 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 (604).

ü  이제 그대의 모든 의식을 모아 안을 보라. 마치 화살처럼 중심을 향해 돌진하라. 그 중심에서 그대는 붓다이다. … 깊이, 더 깊이그대가 더 깊이 들어갈수록 불멸의 실재에 대한 그대의 경험은 더 커질 것이다. 꽃들이 그대에게 쏟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전 존재가 그대의 침묵을 기뻐할 것이다. 단지 주시자가 되라. 중심에서 지켜보라. 그러면 그대는 집에 도달할 것이다 (605).

ü  이완하라. 그대가 단지 주시자일 뿐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 육체는 그대가 아니다. 마음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대가 거울과 같은 주시 속으로 침잠함에 따라 전 존재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신성해진다 (605).

ü  그대가 돌아올 때, 그 붓다를 데려오라. 그대는 그대의 일상생활에서 그 붓다로 살아야 한다. 나는 세상을 버리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세상을 재창조하는데 찬성한다 (606).

ü  조직화된 종교는 다름 아닌 숨은 정치이며, 성직자에 의한 깊은 착취에 불과하다 (608).

ü  고타마 붓다는 어떤 후계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와 같았다. “나의 조상을 만들지 말라. 나의 말들을 모으지 말라. 나는 숭배되어야 하는 상징이 되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깊은 열망은 그대들이 모방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불교도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잠재력은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608).”

ü  나는 고타마 붓다가 25세기 전에 했던 예언을 상기시켜 주어야 하겠다. “내가 다시 오게 될 때, 나는 여자의 자궁을 통해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비슷한 의식과, 같은 높이와, 같은 열린 하늘을 지닌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는 친구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이 말 안에는 엄청난 자유가 암시되어 있다. 그는 누구의 구루도 되고 싶지 않으며 단지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609).

ü  이제 나는 훨씬 더 역사적인 발표를 한다. 그것은 바로, 나는 단지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611).

ü  이제 나는 나의 이름을 스리 라즈니쉬 조르바 붓다 (Shree Rajneesh Zorba the Buddha)로 선언한다. 곧 모든 이름을 버린다. 그리고 단지 아무 이름도 없이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산야신들은 그를 부를 때 사용할 이름이 없다 난처해진다. 그리고 선화 속에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말로 사용되던 오쇼 (Osho)’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612).

ü   선 선언문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들이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은 전 지구상에 널리 퍼져야 한다. 옛 집이 무너지기 전에 그대는 새 집을 만들어내야 한다 (613).

ü  그대가 감옥을 나올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은 열려 있다. 사실 거기에는 어떤 문도 있었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살고 있는 집은 완전한 상상이기 때문이다 (614).

ü  붓다인 그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영원성이며, 그것은 그대의 불멸성이기 때문이다. … 그대는 별과, 나무와, 하늘과, 대양과 하나이다.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614).

ü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 (Sammasati)였다. 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 (614~5).

ü  그는 사람이 아홉 달을 자궁 속에서 보내면서 세상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과 똑같이, 죽기 아홉 달 전에 에너지가 다시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로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616).

ü  1990 1 19. 오후 5시에 오쇼는 육체를 떠난다. 그의 주치의가 제안하는 특수한 처치들을 시간은 존재가 결정한다는 말로 거절하고 오쇼는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 (618).

ü  오쇼 / 태어난 적도 /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620).

ü  존재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내가 하는 말에 어떤 진리라도 담겨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을 것이다 (621).

ü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621).

ü  나는 그들이 축하, 기쁨, 그리고 신선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을 키워나가기를 바란다 (621).

ü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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