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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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 안에 있다
김현국 역, 태일출판사
저자 소개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인도 철학자인 그의 본명은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 자인이다.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Madhya Pradesh에서 자이나교도인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이 될 때까지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산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가 마음껏 행동할 수 있도록 절대적 자유를 허락해주고, 삶의 진리에 대한 그의 조숙하고 강렬한 탐구를 전면적으로 지원해 준다.
14살 때 오쇼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명상 실험은 깊어져 갔으며, 21 살의 오쇼 인간 의식의 최고 정점인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인도 토론 대화에서 우승하여 금메달을 획득하며, Saugar 대학를 철학부문 최고상을 받으며 졸업한다.
오쇼는 Raipur시의 Sanskrit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1년 후, Jabalpur 대학교의 철학 교수가 된다. 1966년 그는 현대인에게 명상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린다.
60년대에 그는 '아차리야(교사) 라즈니쉬 '로서 인도 전역을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기성 체제 측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수만 명의 청중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가슴속 깊이 감명을 준다. 1968년 37세때, 봄베이에 정착해 살며 가르침을 계속한다. 그는 주로 고원의 피서지에서 정기적으로 명상캠프 '를 열고 혁명적인 '다이나믹 명상법 '을 도입한다. 그는 축복 받은 자라는 의미인 '바그완(Bhagwan) '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1970년 서양으로부터 최초의 구도자들이 도착하고 오쇼의 명성은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까지 퍼지기 시작했고, 매달 명상캠프가 열렸다. 1974년에는 푸나(Poona)에 새로운 장소가 물색되어 그 곳에서 그의 가르침은 더 강렬해진다.
동양의 명상에 대한 통찰과 서양 정신요법의 결합에 기초한 치료집단이 창설된다. 2년 만에 아쉬람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성장과 테라피(therapy)의 센터 '라는 명성을 얻는다. 오쇼의 강의는 세계와 모든 위대한 종교적 전통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과학이나 사상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 언사의 명증성, 논의의 깊이는 오랜 동서양간의 단절을 해소시킨다.
70년대 후반까지, 푸나에 있는 오쇼의 아쉬람이 현대의 진리 탐구자들의 메카였다. 열렬한 전통적 힌두교도인 인도 수상 Moraji Desai는 아쉬람을 인도의 변방으로 옮기려 하는 오쇼 제자들의 모든 시도를 방해한다. 그곳에서는 오쇼의 가르침을 응용하여 명상, 사랑, 창조성, 웃음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를 창설하기 위한 실험이 가능했을 것이다.
해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오쇼의 친구들을 위해 여름 축제가 열리고, 2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라즈니쉬 푸람이라는 이 새 도시에서 숙박하며 음식을 제공받는다. 오레곤 공동체의 급성장과 함께 주요 서방 국가들 과 일본에서도 대규모 공동체가 형성되어 독자적 사업으로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그의 미국 제자들은 센트랄 오레곤의 불모지에 있는 6만 4천 에이커의 목장을 구입하여 오쇼를 초대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신속하게 건강을 회복한다. 그리고 동물들이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어서 고갈되어 버린 황무지를 개간하여 5000명이 살 수 있는 녹색의 오아시스로 바꾸는 모범적인 농업공동체를 급성장 시킨다.
오쇼는 종교적 지도자로서 미국 정부에 영주권을 신청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1984년 오쇼는 자신의 저택에서 소수 그룹을 상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85년부터 2년동안 오쇼는 이주와 추방을 거듭하면서 세계를 유랑한다.
1987년 1월 4일, 56세로 오쇼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인도의 뿌나 아쉬람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뿌나의 경찰서장은 '시의 평화를 어지럽힐 염려가 있는 문제 인물 '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같은 날 봄베이의 고등재판소에 의해 무효화된다. 오쇼는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인도의 뿌나에서 1990년 1월 9일 오후 5시 즈음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9년 스스로 오쇼 라즈니쉬로 명명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0년 봄베이에서 제자 두세 명을 거느리고 라즈니쉬 명상센터를 설립한 이래로 세계 각국에 그의 명상센터가 설립되고 약 30만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는 한편, 인도에서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가 4년 만에 투옥•추방으로 미국생활을 마감했다.
모두 400여 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모두 푸나 아쉬람에서의 강론을 정리한 것이다. 기성종교를 비난했으나 자신은 교주처럼 행세했고, 정신의 신비를 가르쳤으나 자본주의의 속성을 적극 활용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오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종교를 그에 반해서 생겨난 과학과 통합하려 했으니,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종교를 부정하기 위해서 믿음을 부정했다. 그의 말 곳곳에는 그러한 증거들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 대체물로 과학이라는 가장 합리적인 현대의 새로운 종교를 들고 나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제외시키고 이념에 이념으로 대항하듯 종교에 과학으로 대항하며 자신의 태도와 신념들을 대중에게 이양하고 있다.
그는 심리학과 철학, 사회문화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여행과 대화를 통해 체험으로 자신의 지식과 생각들을 보완하여 확신과 신뢰를 다지고 있다. 모든 현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자신의 길을 갔고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건강이 나빠지고 후기의 발언들에 있어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은 그의 정신적 영역의 한계에 도달하여 있는 듯하다.
깨달아 지복을 경험하고 있는데 몸이 쇠약할 리가 있겠는가? 본인 스스로 알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현함에 있어서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
그의 많은 말들은 공감이 가고 충분히 이해되는 체험적 사실들이라는 점은 나에게 귀중한 정보였다. 그는 역사 속의 위대한 성자들이 은유와 상징을 좀 더 잘 활용하여 시대와 기존 세력들에 대한 저항을 완화시켰듯이 스스로도 그러했지만 그 속도나 변화의 추이는 사람들에게 혹은 기존의 헤게모니를 가진 세력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고 그는 이를 완화시키지 못했다.
‘선이 종교다’는 그의 의도 구하는 것은 신성이며 그를 통해 자기 안에 신에 이른다는 논리가 참 마음에 든다. 현대에 와서 자연과학적으로 그리고 인지과학적으로 접근되어지는 세계와 인간에 적절히 어울리는 논리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오는 글귀
p1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
p9.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Eh 그는 자신의 일대기는 자기가 행한 모든 작업들, 즉 수백 권에 달하는 강의집과 자신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10 오쇼가 너무나 자주 이야기했던 유토피아의 세계, 국경과 종족, 종교, 성, 교의의 구분이 없는 세계는 비록 아직도 현실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 적어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 오늘날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 되었다.
p11 가능한 모든 자료로부터 오쇼가 이야기하는 ‘진실’대 ‘사실’의 관계, 무한한 것과 순간적인 것의 관계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기꺼이 떠맡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p12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사실지향적인 마음은 ‘그들이 누구인지’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를 가지고서 그들을 정의하려 한다. 그들이 죽을 때 어떤 이해를 지니고 있었느냐보다는 그들의 삶에서 어떤 소유물을 얻었느냐로 그들을 정의하려 한다.
p13 그들은 ‘시간’뿐만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행위’ 뿐만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한다.
=> 행위와 소유는 존재의 차원과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p14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 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보통의 역사학은 시실들에 대해, 물질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룬다.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의식의 사건들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 인간은 확실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목한다… 인간은 시간 너머에서, 공간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른 말로 하면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그 만큼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다.
=>인간의 삶은 사실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 때로는 진실을 위해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 인간들 아닌가? 오쇼를 미국에서 추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사실은 진실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왜 죽었는가는 여러 사실이 있을 수 있다. 진실은 내적이겠지만..
그래서 다인일과(多因一果)가 아니겠는가?
p18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대는 아직도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큰 차이가 아니다. 나도 언제가는 잠들어 있었고 그대도 언젠가는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날 수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막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 차이는 무의미하다.
=> 깨달음이란 못 보던 것을 보게 된 것 뿐이다.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 속에 신성이 있다면, 곧 인간이 소우주여서 대우주와 교감하는 전체우주의 일부라면 문제는 단지 깨달음의 시간적 차이일 뿐이다.
p19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순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떻나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 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왜냐하면 군중은 결코 어떤 지리도 발견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직 홀로있음 속에서만 발견되어 왔다.
p20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
=> 깨달음은 전수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말미암는다. 당연히 대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전하겠는가?
p25 어린 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다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p23 “결혼식에서 아버지는 어떤 것이 가장 즐거웠어요? “
그는 말했다. “말을 타는 것이었다.”
당연하다! 난생 처음으로 아비지는 왕처럼 옷을 입고서 옆에 칼을 찬 채로 말 위에 앉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둘레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 결혼이라는 관습과 의미는 10살짜리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법과 제도는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면 그 맞은 편에 서게 된다.
p27 강요된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p28 우리는 모두 특정한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은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어가지 못했어요, 우리는 전과 똑같이 공허하고 이제 죽음만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녀는 주장했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영향 받지 않도록 해요, 우리가 이 아이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어요? 기껏해야 우리처럼 만들 수 잇을 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아이에게 자기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요.
=> 아들아 나는 네가 너의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너의 생각으로 너의 판단과 선택으로 결정과 실패와 혼란과 두려움을 경험하며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버지인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사랑한다”는 이 말뿐이다.
p35 가르치지 않는 것, 그것이 대단한 점이다. 무력한 아이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유혹 당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가장 큰 유혹이라 부른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
=> 잘 난 척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우월감은 열등감에 대한 자기 방어적인 표현이며 열등감은 우월감을 추구할 때 생기는 상대적 빈곤함이다. 아는 척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상황과 상대적인 관계가 ‘잘난 척’과 ‘친절하고 자상한 관심’으로 나누는 근거가 된다.
p36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도, 지옥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잇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
p40 그대는 스승과 선생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다. 스승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 준다. 선생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 선생은 이해한 자이고 스승은 깨달은 자이다.
p41 ‘안다고요, 뭘 알지요. 앎의 대상이 무엇이죠.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없다. 오직 아는자가 있을 뿐이다.
=> 현상은 단지 있다. 그 중의 일부를 추출해서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앎이다.
즉 깨달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닫게 되어진다.
p51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나는 교육받지 않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했을 뿐이다.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다.
p53-54 나는 조르바 붓다다. 나는 동양과 서양, 높은 것과 낮은 것, 남자와 여자, 선과악, 신과 악마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 몇 번을 물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나누지 않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것을 다시 합친다.
=> 세계의 확장과 의식의 확장, 복잡성과 문화적 다양성 그 두려움…
p54. 씨앗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나무와 그 꽃의 피어남 그리고 어쩌면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달까지도 놓치게 될 것이다.
=> 씨앗을 이해하지 못해도 거기서 꽃이 피고 그 위로 달이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p54 나는 고행적인 것은 무엇이나 반대해 왔다.
나는 모든 종류의 자기 학대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길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 요한의 책 ‘그로잉’의 성장본능의 핵심개념이다.
무엇이 고행의 정의인가? 고통스러운 행동인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마음인가?
고행을 반대할 필요는 없다 , 왜 고행을 하는가에 있다.
p55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 깨달음이 없이 하루가 반복되면 삶은 고통이 되고 개인은 고문받는다.
세계로부터, 자기 희망으로부터,
p56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책이 옳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
=> 본래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이란 늦고 이름이 없는 것이다.
p60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안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 뿐이다.
p62.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 모든 것은 생각과 상관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피크 퍼포먼스 ….
p68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p69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자유가 함께 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 너는 언제든지 ‘노 No’ 라고 말할 수 있다.
p71 잊지 마라 지금의 순간들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이다. 결코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마라, 주어지는 만큼으로 충분하다.
=> 아무도 죽음을 붙들 수 없다. 죽음 앞에 놓인 것들… 가족, 재산…같은 것들에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함을 통해 얻은 사랑은 죽음과 관계없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이에게 언제나…
p76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자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겠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방랑자라고 해도 존경 받을 만해요.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
=> 존경이나 사랑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는 것이다.
p93. "교육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저의 자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어요. 아무도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힐 수 없어요. 저에게 교육법전을 보여주세요. 저는 읽을 수가 없으니까 모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데요 창 밖을 내다보는 게 법에 어긋나는지 알려주세요."
=> 암묵적인 약속을 어겼다. 상식적인 기준을 벗어났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자발성이다.
p87 학교에 입학한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마치 야생통럼 처럼 살았었다. 야생인간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야생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사람은 야생 인간이 된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붓다가 그랬고 짜라투스트라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나의 삶은 야생 동물과 같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p100. 그대라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현대인은 아스팔트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물들과 함께 산다. 이러한 것들은 명사들이다. 기억하라. 이러한 것들은 동사들이 아니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랑과 행복 그리고 운명까지도… 영원히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
그러므로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놓치고 싶지 않다면…
p115-116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p122-123 내 아버지가 나를 학교에 가도록 강요하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망가지고 말았을 거다. 이런 책들은 사람들을 너무나 망쳐놓고 있어. 그는 내게 말하곤 했다. “ 잊지마라, 네 아비지도 망쳐졌고 삼촌들도 망쳐졌다. 그 애들은 끊임없이 종교적인 책들 경전들을 읽고 있어, 그건 모두 쓰레기들이다. 그 애들이 읽고 잇는 동안 나는 살고 있다. 그리고 삶을 통해서 아는 것이 좋다.”
=>체험을 정리하는 것. 그 미묘함과 복잡함을 정리하는 것… 그것이 삶의 차원을 높여가게 해준다. 정리하지 못하는 체험들은 산만하고 혼란스럽다. 체험 없는 지식들은 착각이며 환상이다. 행동하지 못하며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p123.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젠가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
=>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뭘 어쨌다고.. ^^
p129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 파노라마
p140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 사랑은 집착인가? 욕망이 집착이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많으니까… 아니 요즈음에는 … 희귀하지… 그저 영화나 소설속에서만… 있지….
p147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
p159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p168 그대는 그대와 그대의 희망 사이의 거리를 줄일 수 없다. 희망은 지평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 균형
p238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 인지와 심동과 정의적인 영역이 균형을 갖추는… 대단한 사람이다.
p241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p275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도 다음 단어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준비를 할 때 실수를 범한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것을 기억할 때에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떤 강연자도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p280 왜 내가 고타마 붓다나 보디다르마,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해야 하는가?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와 통찰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나의 이해와 나의 통찰에 따라 나의 삶을 산다.
=> 그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문제이다…
p281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p296 사람들은 상처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섹스는 하나의 상처가 되었다. 그것은 치유되어야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비난 받고 있다.
=> 표현방식이 잘못 되어 있는 거지 그 자체가 잘못된 것도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젠체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모두가 쉬쉬하는 사실은 너무 공공연하게 떠든 것 때문이다.
p298 나는 그대에게 ‘성으로부터 초의식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해왔고 그대는 매우 기뻐했다. 그대는 오직 ‘성으로부터’라는 말만 듣는다. ‘초의식으로’는 듣지 않는다.
=> 죽음 앞에서 생각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다. 열정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p299 섹스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끝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시작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이제 일은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다.
=> 사실 동양의 밀교의 경전들 속에 많이 나타난다. 새삼 그가 처음 한 말이 아니다.
극약처방은 어차피 극복하지 못하면 죽음이 되는 경우에만 처방된다. 그래서 해악을 상쇄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약간의 긴장에도 우황청심환을 즐긴다면 머지 않아 수은 중독이 생명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다. 더군다나 성에 있어서 욕망의 절제란 회의를 느끼거나 지겨워지지 않는 한 극복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p300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 약속과 규범 보통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상호간에 합의에 의해서 맺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대한다. 자신이 한 것보다 더 많이…
p303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
=> 자격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p315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
=> 신은 있다. 믿는 자에게만… 그들은 다만 만나지 못하고 전해 들을 뿐이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와 적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있어야만 최소한 몇 십 년 간은 남아있게 되겠지만… 신은 항상 있었다. 믿고 안 믿고 ,,, 형상화와 인격화는 신을 빙자한 몇몇 인간들의 특권이었지만…
p329 부유한 자가 종교적이지 않다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다. 가난한 자가 종교적이라면 그는 엄청나게 총명한 것이다.
=> 종교는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적어도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 사실 그들은 악어와 공생하는 악어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여러 사람에게 똑같이 물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 협객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 ^
p333. 지성이 가난하고 돈이 가난한 사람이 종교적이 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 신체와 정신은 연동하지만 신체를 통해서 정신에 접근한다. 사상은 배고픔을 견디게 해 주지만 그것은 충족을 위한 다른 방식일 뿐이다. 둘 다 가난하다면 신성이든 신이든, 모두 강건너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것이다.
p337.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삶은 재미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이완되어 있다.
=> 장난기 넘치는 선사들의 선문답이나 신체적 감각을 매개로 하는 재미와 장난보다 더 재미있다. 피식 웃는 것은 정신이 관여한 것이고, 파하하 하고 웃는 것은 상식이 관여한 것이고 눈물을 흘려가며 웃는 것은 … 갇혀있는 욕망을 들춰내서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p346-347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이 아직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다른 모든 문들은 그대가 이미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좌절하지 실망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자기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실망하거나 무의미함과 비참함을 느끼거나 자살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명상은 그대를 궁극의 지복으로 데려간다.
=> 물질적 욕구는 충족되어지지 않는다. 사실은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욕구의 본질은 존재의 구체적 현현이므로 … 사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사실과 상관없이 더 많은 숫자가 그렇게 믿고 있으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에는 다가 갈 수는 없다.
합의를 통해 죽은 사람의 뜻을 기릴 수는 있지만 합의 본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p363 현자들이 설명해온 모든 가르침은 다름 아닌 ‘아, 이것!’이라는 그대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에 지나지 않는다.
=>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저것이 무엇이냐? 는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로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생각 없이 저절로…
p365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은유와 상징… 그것이 사고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동기화와 희망을 가져다 준다.
p368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 법구경 :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고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를 통해서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p384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 볼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느낄 수 있다.
p386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 물리적인 신체와 정신적인 사고에 관한 접근방법이랄까?
p386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 신이 필요한지 교회가 필요한지 … 에 달려있다. 사실 그 둘은 원래는 하나였다.
p387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 있는 그대로. 현존하면…되는데…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것이다.
p393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이 신을 해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명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도 없고 종교도 없다. 내가 종교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조직화된 교리, 교의, 제식, 성직자들이다.
=>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성이 아니라 조직이다.
p397 물고기는 대양의 일부이며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모든 고통은 그대가 존재와의 교감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물고기가 대양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명상은 생각, 감정, 감상과 같은 그대와 존재 사이의 벽을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치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슬 방울이 연 잎에서 미끄러져 대양 속으로 떨어질 때 이슬방울은 자신이 대양의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대양자체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 깨달음은 인지가 아니다, 정서도 아니다. 심동적이지도 않다. 그냥, 예측할 수 없는 아주 짧은 시간과 순간에 온다.
p398 나는 그 누구도 개인과 존재 사이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도도, 성직자도 필요치 않다. 그대 혼자서도 충분히 일출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줄 사람이 필요치 않다. 그대가 거기 있고 전 존재가 그대의 것이다.
=> 일반적인 의식 속에서는 깨달음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임의적이지만. 반대로 깨달음의 세계,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영역에서는 거꾸로 시간과 공간은 왜곡되고 의식은 방관자가 된다.
p399. 그대에게 필요한 건 단지 침묵하고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 뿐이다. 어떤 종교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신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성직자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조직도 필요하지 않다
=> 깨달은 후에는… 강을 건너고 나면 어떻게 건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p407 마음은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인이 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 마음은 아주 훌륭하다. 주인으로서 마음은 위험하다.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어야 한다.
=> 여기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의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정서와 인지는 존재의 구체적인 현재적인 경험과 체험의 도구이다. 자아는 본질로부터 형성된 일부이지만 그것이 삶 전체의 주관을 대행하는데 … 때때로 주인에게 하극상을 하는 셈이다.
p410 신 때문에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단지 이 한 단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한다. 어떤 사람을 신을 증명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위대한 논문들이 쓰여지고, 신에 관한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 많다.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방법은 있다.
=> 어떤 논리와 설명도 그게 그거다. ‘ 아~ ! ‘ 가 있기 전에는…
p412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압했다. 때문에 그것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소위 종교들은 그런 것들을 억압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래서 그것들은 상처처럼 거기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숨겨왔다.
p416 모든 사람들의 100도가 각각 다르다. 사람 또한 100도에서만 수증기로 변하지만 모든 사람의 100도는 서로 다른 것이다.
=> 정신에 있어서 역치란 물리세계에서의 역치와는 다르다.
상대적이고, 임의적이고, 그리고 일회적이다. 왜냐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p425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 학습된 것들로부터, 또 학습된 그것들로 만들어진 생각과 논리들로부터 해방되는 것 필요하다.
p429 그대의 마음과 존재 사이에 거리를 창조할 때 그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정신분석은 집을 수리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의식을 변형시키지 못한다.
=>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인지적 자아를 의미한다. 인지적 자아가 활동이 멈추는 경우가 있다. 직접 지각이 요구되는 경우, 질문의 막다른 골목에 놓인겨우… 존재가 나타난다.
p430 붓다의 심리학은 마음 안에서 작업하지 않는다 붓다의 심리학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바로 그 바라봄이 곧 변형이다.
p432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을 때,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명상은 초월의 기술이다.
p433 그대의 마음을 더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그대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다. 마음은 바윗덩이와 같은 작용을 하여 그대를 아래로 끌어 내린다. 마음은 그대를 중력의 장(場) 안에 붙잡아 둔다.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묶여 있지 않게 되는 순간 그대는 붓다장(buddhafield)으로 들어간다.
p434 우리는 심리치료요법으로는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요법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치유할 수는 없다.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 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 동양은 마음 자체를 부정한다. 서양의 심리치료는 마음을 강화하지만…
p443 이제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동양은 서양을 향해 돌아서고 서양은 동양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머지않아 동양도 서양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의 세계만이 있을 것이다.
p446 오직 죽음이 앗아갈 수 없는 것만이 진짜다. 다른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꿈이 만들어진 것과 똑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 감각정보에 의한 생각들의 연합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실재하는 영역이지만 근본적으로
환상이다. 하나는 사실적인 환상이고 하나는 희망에 의한 환상이다.
p448 그대의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는데 들어가고 또 3분의 1은 교육에, 배우는데 들어간다. 뭐가 남는가?그 중 많은 부분은 밥벌이에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계산해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70년 가운데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7년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쳐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대가 염두해 두는 것은 그대가 빨리 가고 있느냐는 것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p463.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때에만 그대는 그 대비를 통해 그대의 내적 가난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외적으로 가난할 때, 대비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는 결코 그대의 내적 가난함을 깨닫지 못한다.
=> 동양의 음양오행사상과 서양의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p474.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이다..
=> 내면의 과학에 대해 인간은 아직 무지하다. 물리세계에 비한다면 원시인이다.
그리고 내면의 과학을 외면의 과학과 동일하게 다루려고 하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정신이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는 것이 아니다. 지식과 경험과 체험에 구애 받는다.
p483. 나의 신인간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것이다…구인간의 이상이 세속의 포기였다면 신인간의 이상은 기쁨일 것이다.
=> 세속을 포기하고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p487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 스포츠다 그리고 예술과 스포츠 모두 놀이다. 예술은 인지적인 면을 강조하고 스포츠는심동적인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제는 균형이 필요하게 됐다.
p490 나의 내면 깊은 곳의 존재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다만 똑같을 뿐이다.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이다. 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p493 세상엔 오직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 세상엔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해된 것과 깨달은 것은 다르다.
p495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 현대인들은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살면서 행동으로는 반대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면서 아쉬워하지만 거대한 사회와 문화의 속도에 치여서 헤어나지 못한다.
p496 사랑과 명상은 성적인 에너지의 변형에서 일어나며 성이 억압되면 그 에너지는 변형될 수 없다.
=> 성은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 섹스는 적당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몰입해야만 된다. 그것은 의식으로 제어되는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어하려는 것은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적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섹스 자체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다. 곧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정신은 반복이나 빈도와는 상관없이 통찰에 의해서 강화되지만 그래서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남지만 섹스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한다.
억압된 성적인 에너지의 변형은 그것이 지적인가, 명분이 있는가, 혹은 권위적인가와 관계없이 자기파괴적이고 세계 부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자해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과 명상은 자아로부터 해방될 때 진실해진다.
p502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의 주인이 되는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것이 '스와미'의 의미이다.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대가 전 존재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궁극적인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것이 '마'의 의미이다.
=> 남자는 선택과 도전의 길이다. 여성은 수용과 베품의 길이다. 남성은 전쟁을 하지만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여성은 사랑 때문에 전쟁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
p505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신성에 다가가는 것 외에는 모두 종교적이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의식과 교의가 그것을 대신한다. 새롭게 배우는 자를 위해서이지만 대부분은 껍질만 얻는다.
p508 부디 내가 그대에게 말해왔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행하도록 설득했던 것들에 집착하라. 그것을 하라. 그러면 언젠가 그대는 내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내가 말했던 것들에만 계속 집착한다면…그대는 앎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모든 것은 심지어 방해가 될 수도 있다.
=> 세계는 변한다. 현재는 변한다 현재는 반복되지 현존하지 않는다
‘그것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그것이 아니다.’
p511 록, 재즈, 그 밖에 혼돈스런 음악들은 그대 안의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바로 억압된 성욕이다…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라.
=> 억압과 극복의 차이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위선인가 진실인가에 있어서도 그것은 같다.
p512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들을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흔한 수행자들의 거짓말은 ‘나는 마음을 비웠다’ 이다.
p514. 흰구름은 갈 곳도 없으며,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이 순간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 now-here
원래 거기에 있었다. 현상이다. 사건이 되면 … 달라진다.
p517 오직 그대가 나의 부재를 느낄 때에만 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p518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 아무 생각 없이, 혹은 모든 이해타산을 넘어서
p520 나는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들여다보고, 그대를 느끼고, 그대가 볼 수 없는 그대 자신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가슴이 결정하게 한다. 따라서 나는 기껏해야 그대의 가슴을 그대 자신에게 해석해 주는 것뿐이다. 나는 산파이다.
=> 깨달음은 물건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기대를 충족시킨 것이다.
p521 그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며, 도전이며,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라.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라. 조용히 그대 자신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다.
=>그것은 책임의 문제가 아니고 권한의 문제도 아니며 자신에게 편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 문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며 문제와 연관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제이고 주체적인 책임의식에 관한 문제이다.
p523.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 절대라고 말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어쩔 수 없이라고 말하지 말라.
p543 욕망 없이 살아라. 모든 욕망은 그대를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 진실로 자유로운 것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p572 "나는 결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를 계획하지 않소. 나는 약속을 할 수 없소. 그리고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을 본다면, 그때는 그것이 힌두교인지, 기독교인지, 이슬람교인지는 문제가 아니요. 나는 그것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할 것이오."
p574 그들을 저지한 미국인들은(그의 방문을 저지하는 미국)은 죽은 것을 위해 싸우고 나는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존재의 결정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있다.
=> 생명은 의도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 단지 생존과 성장의도와 지향이 있을 뿐이다.
p590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상태이다.
=> 체험 없는 맹목적인 믿음, 자기 목적이 숨어있는 믿음
p593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가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 우리가 어떤 진리에 대해, 우주에 대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해해왔지만 실제로 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있어왔다. 나의 우주이며 모두의 우주였다.
그대 안에 존재 실제로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p601 필요한 것은 그대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층을 깨뜨려야 한다. 억압된 웃음과 울음이 정화되고 나면 커다란 해방감을 맞게 될 것이다.
p614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sammasati)였다.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
=> 신성을 깨달아 성불하라.
p622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
대도 무문, 그러나 분명히 알고 있다. 문없는 문을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쓴 자서전은 아니다. 저자가 살아생전 쓴 강의한 것과 남긴 자료들을 저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다. 오쇼는 자서전을 비롯, 일체의 자기 흔적을 남기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사람들이 ‘역사’라고 부르는 갇힌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에 있었다. 이 자서전은 오쇼와 그가 행한 일에 대해 분분하게 엇갈리는 주장과 몰이해, 심지어는 비난들에 대해 의미있는 정황을 제공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후세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오쇼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해온 대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독자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묻게 하는 일일 것이다. 오쇼는 ‘현자들이 설명해온 모든 가르침은 다름아닌, ‘아, 이것!’ 이라는 당신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오쇼의 주장은 모든 종교와 그 창시자들이 자신을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신성을 전했을 뿐이나 체험이 없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신격화되었으며, 본질로부터 멀어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오쇼의 주장들은 매우 파격적이긴 하지만 기존 종교들이 조직화되면서 권력으로 정치화되는 현상이 가져오게 된 병폐라든가 기존 종교와 심리치료, 정신분석학 같은 테라피들이 갖는 한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명상에 대한 물 흐르듯 통쾌한 설명과, 동양과 서양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비교, 파시즘과 나치즘의 집단적 광기 등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해석 등은 새롭다.
기존 제도권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적대감을 넘어 괴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해 줄만한 책이다.
오늘 날에는 오쇼가 너무나 자주 이야기했던 유토피아의 세계, 국경과 종족, 종교, 성, 교의의 구분이 없는 세계는 비록 아직도 현실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 적어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오쇼의 독특함과 파격이 이 책의 내용을 흥미롭게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단순히 파격만 있는 책도 아니다. 여기저기 그의 체험과 깨달음을 통한 주옥 같은 통찰들로 가득해서 머리 속에 주워담을 것들이 많은 책이다. 특히 '21세기 명상'과 '붓다의 심리학' 장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그의 창조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오쇼는 문화를 배경으로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한 전통적인 종교를 부정하기 위해, 그전통 종교에 반해서 생겨난 과학을 통해서 논리와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오쇼는 부정되었던 동양의 전통적인 진리에의 접근 방법들을 - 명상과 선 –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서양의 문화적인 침략과 폭력이 파괴한 동양의 전통들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접근 즉 그의 표현들 빌리자면 ‘존재’에 대한 접근이다.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의 접근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 굳이 고행과 인내가 아니라 즐거움과 재미로 접근하여 효율적인 확산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는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적인 인간 행동의 주체와 기능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실존의 문제를 안고 있는 자아(여기서 그가 말하는 마음)는 분석되는 것도 종합되는 것도 아닌 새로운 것으로 대체 된다는 것이다.
나로서도 오늘날의 정신의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 문요한 선생의 말대로 분석과 치료의 차원이 아니라 훈련의 차원 그리고 개선의 차원 즉 성장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심리학적으로든 생리역학적으로든 몸과 마음은 상호보완한다. 즉 사고와 신체는 연동한다. 정신이 이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즉 본질적인 생명주체 – 본래면목, 진아, 소마, 혹은 마인드 여기서 오쇼는 존재라고 명명하고있다. – 와 자아라는 –인지적 자아, 의식의 주체, 오쇼가 말하는 마음-후천적으로 학습과 교육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행동을 지배하는 주체가 있다.
나의 기억으로도 다양한 명상과 선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은 언제나 다양하게 있어 왔다. 그러나 내적인 주관적 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오쇼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외적인 객관적 사실과 내적인 주관적인 진실을 모두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심리와 물리의 현상을 포괄적으로 통합하려 시도하고 있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신 자체를 부정하고 신성에 초점을 맞추므로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행위와 관련하여 200 밀리세컨 이내에 이루어지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직접 지각은 인간의 행동주체는 두뇌에의 의존이 아니라 신체의 직접지각에 의존하고 있다. 즉 행동 수행 명령체계는 사고에 의한 체계와 사고과정이 생략된 직관적인 체계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지과정을 거치지 않는 행동수행들은 정서적이고 본능적인 영역들로 성적인 욕구와 그외의 정서적 충동들이다. 이러한 위장된 욕구와 충동들은 억압을 피해 예술, 스포츠, 놀이 등으로 정화되어 진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고도로 숙련되어지는 예술가와 선수, 그리고 장인들의 기능들은 정화 이후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오쇼는 정확하게 이러한 생물학적 메커니즘과 심리적 기능들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가 새롭게 개발한 명상기법에 적용하고 있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일치한 것이다.
오쇼의 존재에 대한 접근은 인간의 학습과 사회적 생태적 구조를 완전히 부정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그것은 긍정적인 접근이 아니다. 깨달았다 해도 먹고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업과 삶의 터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이고 재구성되는 것이며 그 자아는 본질적인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요소들의 재구성으로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현실과 지복 사이를 오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현실세계에 대한 적응능력은 실제로 현실을 극복하고 근원적 ‘존재’의 인식에 대해 작용한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그릇 속에 경험과 학습이라는 내용을 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착오를 통해 채우고 비움을 반복하면서 본질적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비워지고 채워지는 경계선적인 순간에 인식되어지는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은 현실 적응과 참여 없이 비워가는 면벽이나 금욕과 고행에 비해 현실참여 속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통해서 정화되어지는 체험들 속에서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점에서 오쇼는 상업성에 가까운 적극적인 방법들을 수용하고 있지만 깨달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세속적이라는 비난을 받을만하다.
정신과 신체를 통합해서 동적이면서 정적인 명상 혹은 선(禪)을 개발하면 그것은 정신분석을 넘어 정신훈련이고 사고와 행동의 분리가 아닌 신체와 정신의 통합적인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건전성과 신체의 활력을 동시에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여년의 노력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오쇼보다는 덜 파격적이니 추방당할 일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