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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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 길은 내 안에 있다” – 오쇼 라즈니쉬 지음/김현국 옮김/태일출판사
저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는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늘날 사회가 당면한 사회적, 정치적 현안들에 이르는 모든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오쇼는 <선데이 타임즈>의 20세기를 변화시킨 10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또 인도의 <선데이 미드데이>의 인도를 변화시킨 10인-간디,네루,붓다 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는 ‘조르바 붓다’, 즉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속적인 즐거움과 붓다의 경건함을 모두 겸비한 인물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의 강연에는 한 가지의 일관된 메시지-시간의 무한성에 대한 동양의 성찰과 기술에 대한 서양의 탁월한 잠재력의 예술적 결합-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오쇼는 빠르게 진행되는 현대인들의 삶을 명상으로 정화시키는 내적 변형의 과학에 기여한 인물로 꼽히고 있는데, 그가 주창한 ‘다이나믹’ 명상은 일차적으로 몸과 마음의 축적된 스트레스를 해소하여, 사념이 없는 편안한 명상 상태를 더욱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 연구를 위해 도서관과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찾다 보니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그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점이다.
오쇼 관련 책을 빌리기 위해 대학 도서관에 가니 한쪽 벽면 그득히 약 100여권 정도의 그의 책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약 600여권 정도의 책을 썼다고 한다. 물론 그의 사상을 그의 지지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작성한 것일 것이다(<지금 여기에서-라즈니쉬의 삶>의 저자 베산트 죠쉬에 의하면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그의 강의는 모두 합쳐 4천 시간이 넘는 길이였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해 빠짐없이 녹음된 다음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에 열광하고 따르는 사람들 못지않게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의 자서전에도 ‘사기꾼’, ‘섹스 구루’, ‘롤스로이스 구루’, ‘농담꾼’ 등과 같이 세상의 비난을 염두에 둔듯한 제목으로 내용을 구성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새로 들어온 여성 신자들에게 알몸이 되기를 요구하기도 하고, 수 많은 여성 신도와 성 관계를 맺기도 했으며, 엄청난 숫자의 롤스로이스, 자가용 비행기, 궁전 같은 저택 등을 소유하였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환각제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오쇼 라즈니쉬라는 인간 자체의 삶의 행적 보다는 그가 말하고 또 전달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의 핵심만을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면 될 뿐이라는 점이다. 이는 오쇼 자신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와 상관 없이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가 독립적이 되기를, 그리고 그대 스스로 이 고귀한 순간들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그대가 나와 함께 그 순간들을 얻을 수 있다면 나 없이 그것을 얻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288]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376]
오쇼의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고, <틈:오쇼 라즈니쉬가 전하는 삶의 연금술>과 <즐겨라:위험하게 사는 즐거움’> 빌려서 읽어 보았다. 디테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서전에 나타난 그의 주요 사상적인 메시지와 상당 부분 중복되게 느껴졌다. 오쇼가 말한 여러 메시지 중에서 오늘의 나의 마음을 무찌르는 메시지는 바로 ‘조르바 붓다’이다. 즉, 거침없이 세상을 느끼고 즐기는 것과 정갈한 마음으로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별개가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적 삶의 보완적인 양면임을 알려준 부분이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 의지로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세상의 삶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함께 ‘즐기며’ 살아갈 것을 강조한 부분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오쇼 라즈니쉬의 간략한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그는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의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어린시절 외조부님의 손에서 길러지게 되었다. 그의 외조부는 그를 어떤 제압도 어떤 간섭도, 어떤 교육도 시키지 않으므로 그가 온전히 자연 속에서 자랄 수 있게 했고 자연의 울림을 읽어낼 줄 아는 마음을 갖을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독립적인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고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 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이후 사가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자발푸르 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지내는 등 연구와 강의에 충실하였으나 이후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신념을 역설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독창적인 <다이나믹 명상법>을 개발하여 명상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명상으로 인한 정화 과정을 통해 현대인들은 과거의 낡은 전통과 현대 생활의 온갖 욕망을 극복하고 이완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설파했다. 1974년 서구에서 몰려든 젊은이들과 함께 인도 뭄바이 남쪽의 도시 푸나에 공동체를 세웠으며, 이때부터 밀려드는 영혼의 탐구자들로 푸나는 축제의 도시가 되고 매주 열린 그의 강의는 새롭게 태어나는 정신들의 모태가 된다. 그가 전 세계의 제자들과 구도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은 30개가 넘는 언어로 650권이 넘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하지만 기성종교를 비난했으나 자신은 교주처럼 행세했고, 정신의 신비를 가르쳤으나 자본주의의 속성을 적극 활용했다는 비난 역시 받고 있기도 하다. 푸나의 건설 이후 그는 다양한 수난을 겪게 되는데, 다양한 암살기도와 미국에서의 체포가 그것이다. 미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된 그는 1990년 1월 19일 오쇼는 자신의 몸을 떠났다. 푸나에 있는 그의 공동체에는 영적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명상, 치료, 창조적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해마다 지금도 수천 명이 방문하고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신성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의 시작이다.[6]
편집자 서문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9]
오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이 ‘행위’나 ‘소유’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이다. 행위와 소유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그의 인생의 외적인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우리는 그를 오해할 수 밖에 없다.[12]
서문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사실들은 물질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진실들은 비물질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하다.[15]
<PART ONE 평범한 인간 전설 속의 숨은 역사>
황금빛 어린 시절의 일별들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왜냐하면 군중은 결코 어떤 진리도 발견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직 홀로 있음 속에서만 발견되어 왔다.[19]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20]
1931-1939:
인도, 마드야 프라데시주, 쿠츠와다
(Kuchwada, Madhya Pradesh, India)
그 어린 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25]
나는 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의 홀로 있음을 즐기고 있다는 것과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라는 것이다.[27]
“그건 걱정 말아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문명화 되어 있고 예의와 예절을 갖추고 있지만 그래서 얻는 게 뭐예요? 당신도 무척 문명화 되어 있어요. 그래서 뭘 얻었죠?”[29]
“7년 뒤에는 아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세요. 하지만 7년 동안 만큼은, 아이는 단지 자신의 타고난 자아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끼여들지 않을 거예요.”[30]
"얼마든지 아이들을 망쳐 놓으세요. 하지만 저는 거칠어요. 그리고 계속 거친 아이로 남아 있을 거예요.“[31]
나의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베풂의 미학을 배웠다. 나는 그가 어떤 거지나 그 밖에 다른 누구에게도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31]
“너를 벌한다고?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를 벌 할 수는 있지만 너를 벌할 수는 없다.” 단 한 순간도 나는 그의 눈에서 나를 향한 분노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33]
나나는 매일 아침마다 사원에 가곤 했다. 하지만 결코 ‘나랑 같이 가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나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은 것, 그것이 대단한 점이다.[35]
그렇다. 나는 그것을 가장 큰 유혹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35]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도, 지옥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 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36]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41]
그녀는 위대했다. 그녀가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43]
만약 우리가 아주 단순한 단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즉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무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때 우리는 종교적이 될 것이고 아이들을 올바른 종교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대의 이른바 지식을 물려주지 말라. 그대 자신이 먼저 순진무구 해져야 하고, 거짓 없이 진실해져야 한다.[43]
그날의 일은 나의 마음 깊이 새겨졌다. 나는 어디에서든 천치를 금방 알아본다. 아무도 나의 엑스레이와 같은 눈을 피할 수 없다.[49]
나는 삶을 끝낸다는 생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러나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55]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56]
“이런 허튼 수작 그만 두세요. 지금 당장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해요. ‘바꾼다. 바꾼다.’ 말만 하지 마세요. 바꾸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분명하게 하세요.”[56]
반역적이지 않은 사람은 종교적일 수 없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57]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안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뿐이다.”[60]
믿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그 때 나는 죽음이 축하 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녀는 할아버지와 사랑에 빠졌을 때 불렀던 그 노래를 불렀다.[61]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62]
그녀는 결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계속해서 돈을 보냈다. 그녀는 말했다. “걱정 마라. 나는 이 돈이 필요 없다. 그리고 너는 틀림없이 그 돈을 잘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65]
반역적인 영혼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67]
1931-1951: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 가다와라
(Gadawara, Madhya Pradesh, India)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그대를 감쌀 때 마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69]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69]
그녀는 말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충분히 살았단다. 더 이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또 내게 말했다. “잊지 마라. 지금의 순간들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이다. 결코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마라. 주어지는 만큼으로 충분하다.”[71]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76]
“저는 바로 행동으로 들어가요. 불필요한 말 따위는 믿지 않아요.”[85]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100]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100]
그대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대 자신이 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교활하다. 그들은 “너는 크리슈나처럼, 붓다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붓다나 크리슈나를 아름답게 그려놓아 그대 안에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가 되고 싶은 커다란 열망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 열망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105]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106]
“나는 사람들이 웃기를 바래요. 오래된 이야기를 매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졸고 있지요. 모두 그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모든 대사를 다 알아요.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예요.” 그러나 늙은 전통주의자들, 진부한 사람들로서는 웃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대는 교회 안에서 웃을 수 없다.[112]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116]
“너도 요리를 배워라. 다른 사람들에 의존하지 마라. 네 입맛은 네가 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니?”[121]
“죽음이 나를 두렵게 할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즐겁고 너무나 완전하게 살았다.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내일 할 일이 달리 뭐가 있겠니? 나는 그것을 다 했다. 남아 잇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내 맥박이 느려지고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모든 것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평화롭고, 차분하고, 고요한 느낌이기 때문이야.”[124]
불멸을 찾아서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그대가 어떠했든지…… 슬펐든지, 행복했든지, 사랑이 넘쳤든지, 분노했든지, 열정적이었든지, 인정이 많았든지…… 그대가 어떠했든지 그 에너지는 그대 일생의 진동을 담고 있다. 성자가 죽을 때 단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커다란 선물이다. 단지 쏟아지는 그의 에너지에 젖어 드는 것은 커다란 영감을 준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의 에너지에 취할 것이다. 그대는 술에 취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죽음은 하나의 완전한 성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삶을 살았을 때에만 가능하다.[132]
그들은 왜 자신들이 거기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작더미 위에 있을 때 사람들이 거기 있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다.[135]
7일 동안 나는 기다렸다. 그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죽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이 일어났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즉,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 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139]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140]
깨달음: 과거와의 단절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말은 오직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58]
그대는 내게 묻는다. 당신이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는 웃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던 그 모든 어리석음을 보고 나는 정말 정신없이 웃었다. 모두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애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대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지니고 있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159]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발전도, 어떠한 발전도 필요치 않다. 신은 어떤 것도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는다. 설사 그대가 불구인 사람을 발견한다 해도, 그대는 그 사람이 완벽한 불구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결코 불완전한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160]
내가 ‘깨달음을 얻는 날’이라고 말할 때, 나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단어가 없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성취, 달성, 목표, 발전, 성장, 진화와 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160]
노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언어는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161]
구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 버려야 하는 때가 온다.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164]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 그 에너지는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곳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곳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있었고, 바위와 하늘과 태양과 공기 속에도 있었다.[164]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는 계속 달리지만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춘다.[165]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밟기 때문이며, 계속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며, 계속 자기 자리보다 앞을 향해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의 자리보다 앞으로 도약하는 것, 미래로 도약하는 것, 내일로 도약하는 것, 이러한 것이 바로 에고의 현상이다. 비존재 속으로의 도약은 에고를 만들어 낸다. 비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신기루와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165-166]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167]
그날 욕망이 멎었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허망한 일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 생을 거치면서 노력해왔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의 희망 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 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168]
희망 없이 존재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상태였다. 현존이 느껴졌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나를 덮치고 있었다.[169]
붓다들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미꽃이나 이슬방울처럼…… 그들의 힘은 매우 부서지기 쉽고 연약하다. 그들의 힘은 죽음의 힘이 아닌 생명의 힘이다. 그들의 힘은 죽이는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창조하는 힘이다. 그들의 힘은 폭력과 공격성의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연민의 힘이다.[180]
그대는 그대 주위에 자신의 꿈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대가 깨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것이다. 세상은 비실재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아는 세상은 그대 꿈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꿈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날 때, 그때 진짜 세상이 드러난다.[183]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나는 비존재적이 되었고 동시에 존재적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그것은 죽은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죽은 자는 완전히 죽었다. 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184,185]
깨닫게 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뒤에 어떤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에게 “이리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186]
깨달음은 다름 아닌 깨어남이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 우리의 모든 삶은 단지 꿈들이다.[187]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노래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이고,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독특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반복으로써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코 깨달은 두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둘 중 한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당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고정된 관념도 갖지 말라. 단지 매우 액체와 같은 특질들이 기억되어져야 한다. 나는 굳게 정해진 자격요건이 아닌, 액체와 같은 특질을 말하고 있다.[192,193]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95]
칼날을 세우며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만 그들이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96]
1953-1956: 대학시절
그러나 빗속으로, 나무 아래로 한 번도 나가 보지 않은 사람은 시를 이해할 수 없다.[199]
“당신의 ‘절대’는 완전합니까” 그것이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오직 그 때에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때 성장할 가능성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205]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 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213]
1957-1966: 대학 교수 시절
“걱정하지 마라.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너희들의 지성을 예리하게 하는 것 뿐이다.”[219]
그대 자신의 발견이기에 그것은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대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219]
그대가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무척 어려워진다.[220]
일단 그대가 “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226]
함께 있는 것을 즐겨라.[227]
선생은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생은 존경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선생이 존경을 요구한다면 그 선생은 단순히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직업을 잘 못 택한 것입니다.
만약 존경이 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때 존경은 거기 없습니다. 존경이 거기 있을 때는 아무도 존경에 대해 자각하지 못합니다. 존경심은 단순히 생겨납니다. 진짜 선생이 거기 있다면, 존경심은 언제나 생겨납니다.[233]
길 위에서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참으로 다른 자원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언어를 쓴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조화되지 못한다. 그것들이 모두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깊은 통찰을 그대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의 노력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었다.[238]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예요."[239]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작용은 총이 아니라 총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253]
나는 미끼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255]
나는 그들의 언어를 말했다. 그들의 종교적 화법을 사용하고 그들의 경전들을 인용하면서 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즉시 이해했고 그들은 나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내가 나의 사람들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이제 나는 나의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오고 싶다면 그들이 나에게 올 수 있었다.[260]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그는 말했다. “아니다. 모든 존재는 순간적이다. 좌절할 일은 없다. 나는 그것을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만약 대양의 파도가 그것을 부수는 것을 즐긴다면 우리는 둘 다 즐긴 것이다. 그러니 존재계 안에는 두 배의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272]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언어학이나 문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언어 속에서 어떤 비범한 음악을 발견하는, 평범한 산문에서 위대한 시의 질을 창조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그들은 그대가 말을 넘어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단어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안다.[273]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274]
나의 목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나는 단지 침묵의 간격들을 창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다.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나는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관계 없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간격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부차적이다. 그 말들 사이의 침묵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대에게 명상의 일별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 일별이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의 존재를 향해 많이 온 것이다.[276]
나의 성공은 그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278]
존재는 도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오직 한가지 만이 옳다. 그대의 각성과 자각이다. 그때 그대는 지복이 넘친다.[279]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281]
나 자신의 경험으로는, 만약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수 있고 그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 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행동들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는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이 중요할 뿐이다. 행동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283]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완전히 바꾸었다.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소란스러울 수 없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285]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와 상관 없이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가 독립적이 되기를, 그리고 그대 스스로도 이 고귀한 순간들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그대가 나와 함께 그 순간들을 얻을 수 있다면 나 없이 그것을 얻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288]
<PART TWO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 것이고 두 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무한한 비어있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293]
섹스 구루
나는 섹스가 사랑의 영역에서 법의 영역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법적인 매춘이다.[300]
나는 사랑을 믿는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한 살 수 있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감사하며 헤어져야 한다.[300]
컬트 교주
나의 일은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종교성을 창조하기 위한 운동이다.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바라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303]
'깨끗함은 신에 다음 가는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제 신은 없으니 깨끗함만 남았다. 깨끗함이 신이다. 그리고 나는 세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 바퀴벌레들을 넣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알게 되면 그대는 결코 누구에게도 그대의 마음 속에 쓰레기와 똥을 던져 넣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범죄자들이다.[304,305]
그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독립은 독립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립이다.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306]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306]
사기꾼
세상의 모든 스승들은 이야기들을, 우화들을 들려주어 왔다. 왜인가? 그냥 간단히 진리를 말하면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밤은 길고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대는 잠에 빠지게 된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그대의 관심을 끌어두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 갈 수는 있다.[308]
'자칭 바그완(Bhagwan)'
'바그완'이란 경험의 한 상태이다. 임명이나 선거, 직함, 학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전 존재가 신성으로 가득하고 신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바그와타(bhagwata), 즉 신성의 경험이다.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314]
'바그완'은 비 비교급 단어이다. 그대는 신보다 더 신적일 수 없다. 신보다 더 신일 수 없다. 그것은 비 비교급 단어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어떠한 성취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본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이다.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320]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 그것은 로맨스이고 상상이 가득한 세계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 신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자극이다. 그것은 미묘한 자극이다.[323]
그리고 서서히 그대는 주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주인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 주인은 그대 내면 깊은 곳의 핵으로부터 온다. 그 주인은 그대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다. 나는 안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발견했다.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언덕 위의 주시자' 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 깨어서 관찰하라.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충족될 것이다.[324]
부자들의 스승
그대는 묻는다. "당신은 부유한 자의 스승입니까?" 그렇다. 왜냐하면 오직 부유한 자만이 나에게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내적으로 매우 가난한 자이다.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유한 자이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한 자이다.[329]
종교는 사치품이다. 최후의 사치품이다. 나는 종교를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이다.[330]
농담꾼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그대의 표면으로 어떤 에너지를 가져온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에너지는 그림자처럼 웃음을 따라온다. 그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한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343]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343]
웃음은 사념 없는 상태로 가는 아름다운 전주곡이 될 수 있다.[344]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346)
롤스로이스 구루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352]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 존재는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마음이다. 물질주의자는, 여자를 사랑할 때조차도 그녀를 물건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영혼주의자는 어떤 사람인가, 영혼주의자는 물건을 만질 때조차도 그것을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353]
스승
그들은 그대에게 신, 진리, 니르바나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대는 이미 그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다.[358)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그는 불꽃에 불을 붙이는 그대 안의 어떤 과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대가 진리이다. 단지 너무나 많은 먼지가 그대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스승의 역할은 소극적인 것이다. 스승은 그대에게 목욕을, 샤워를 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먼지가 사라지게 해야 한다.[361]
위대한 선사 다이에는 말한다. "현자들, 성자들, 스승들의 그 모든 가르침들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 이것!'이라는 그대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일 뿐이다." 갑자기 그대가 깨끗해질 때, 그대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환희가 일어나고 그대의 전 존재가, 그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춤을 춘다. 그리고 그대는 말한다. "아, 이것! 알렐루야!" 그대의 존재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외침이 일어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불현듯 서까래에서 별이 떨어진다. 그대는 존재의 영원한 춤의 일부가 된다.[362]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그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정수를, 그대 자신의 신성을 깨닫게 한다.[365]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368]
단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370]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371]
내가 꼭두각시 부리는 사람이 없다고, 신이 없다고, 성자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이 모두 쓰레기라고 말할 때, 나는 그대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그대가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려하고 있다. 이 자유를 즐겨라.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그때 그대는 내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되는 것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이 되는 것은 해방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372]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인간이라도 남아 있는 한, 산야스의 꽃들은 계속해서 피어날 것이다..[376]
<PART THREE 유산>
종교 아닌 종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이런 것들은 단지 이데올로기이며 교리이며 교의이다. 그것은 단지 예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붓다는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그것을 살았다. 그러나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결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종교적이었다.[384]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386]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386]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그대는 그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것은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그대를 완전히 압도하는 너무나 분명한 확실성이기에 그것을 의심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은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387]
아디나타는 신을 제거했지만 공백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붓다는 그 공백을 명상으로 채웠다. 아디나타는 신이 없는 종교를 만들었다. 붓다는 명상적인 종교를 만들었다. 명상은 붓다의 기여이다. 중요한 것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다.[391]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의 신을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393]
나의 노력은 성직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성직은 신과 함께 남아 있었고 신이 없는 종교에도 남아 있었다. 이제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과 종교 모두를 제거하여 어떤 성직의 가능성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394]
"나의 불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문을 열어준다. 이제 그대는 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고뇌, 근심의 정반대 상태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영원하게 느껴져서 그대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명상적인 마음의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395]
명상이라는 말은 무거워 보인다. 단지 단순한, 순수한 침묵이라 부르는 편이 낫다.[399]
21세기를 위한 명상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407]
그대는 계속해서 좋건 나쁘건 모든 생각들을 거부한다.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408]
신 때문에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단지 이 한 단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한다. 어떤 사람은 신을 증명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410]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압했다. 그대는 그곳에서 억압된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지옥들과 고뇌들을 만난다. 여러 생에 걸쳐 쌓여온 분노로 그곳은 온통 난장판이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러한 것들을 내던지고 나면 그대는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412~414]
명상은 도박이다. 다른 모든 도박에서는 어떤 물건을 내건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우리 자신을 내건다. 명상은 분명히 도박꾼의 행위이지 사업가의 행위는 아니다. 사업가의 관심은 이득이 적더라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박꾼의 관심은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더라도 이득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박꾼과 사업가의 차이이다.[417]
제3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도 아니고 종합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다. 그것은 마음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마음 밖으로 데려가는 작업이다.[428]
“이제 저는 시냇가에 앉아 있듯이 저의 마음 옆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앉아서 그 모든 더러움과 골칫덩이, 오래된 나뭇잎들, 상처와 고통, 기억, 욕망들을 함께 볼 것입니다. 무심하게 강둑에 앉아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저절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대 마음의 강둑에 앉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432]
그대의 마음을 더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그대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다. [433]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 동일시 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초월이 진정한 요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심리치료요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심리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를 치유한다. 마음은 단지 그대의 주변일 뿐이다. 마음은 그대의 중심이 아니다.[434,435]
사회에서 시작해서 그대 자신에 도달하라.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444]
내가 성을 받아들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에 대한 받아들임 없이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완전히 깨끗해지기를,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457]
마음은 그대를 속일 수 있다. 마음은 그 안에 비치는 것이 실재라는 관념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치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다. 명상은 마음을 가져간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에게 거울에 비친 그대 존재의 보물이 아닌, 보물 그 자체를 볼 기회를 준다.[460]
조르바 붓다: 완전한 인간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 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대는 케익을 먹기도 하고 동시에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소리와 침묵, 사랑과 명상, 사람들과 관계 속에 함께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을 알게 될 것이다.[461]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외적으로 가난해질 때마다 그 나라는 내적인 가난함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464]
외적인 부유함 없이는 아무도 자신의 내적인 불만을 자각하지 못한다. 왜 붓다가 불만을 느끼게 되었는가? 왜 그가 명상을 찾기 시작했는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복하게 살았다. 그는 모든 편의품들과 모든 물질적인 장치들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자각했다. 그가 내면에 어두움 구멍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겨우 스물 아홉 살이었다. 사실 붓다는 처음으로 거지를 보고서, 그리고 늙은이와 시체와 산야신을 보고서 세상을 버렸다고 전해진다. [465,466]
그대가 내면의 부유함을 창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다시 하나의 조화로움이 일어날 때, 즉 외면의 부와 내면의 부가 만날 때, 그때 거기 진정한 만족이 있다.[468]
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이다. 이것은 궁극의 양극성이다.[474]
명상은 홀로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며 가능한 한 쉽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475]
나는 양쪽 편으로부터 모두 진리를 맛보았다. 나는 전체적으로 사랑했고 전체적으로 명상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사람은 양쪽을 알았을 때에만 완전해진다는 것이다.[477]
그리고 이 만남 속에서 모든 양극들은 용해되고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궁극적인 양극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양극들을 포함한다. 이 만남은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이 신 인간을 부르는 나의 이름이다.[479]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 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신인간은 자신의 전체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내적인 분열도 없이 온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은 악마와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도덕성은 부도덕성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립을 모를 것이다. 그는 이중성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분열적이지 않을 것이다. 신인간과 함께 하나의 신세계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신인간은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는 동시에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일 것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선택 없이 자신일 것이다.[481]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이, 엄청난 주시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 에피쿠로스일 것이다.[483]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487]
<PART FOUR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어느 날은 성공하고, 어느 날은 실패한다. 어느 날은 정상에 있고, 또 어느 날은 밑바닥에 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491]
1964년 6월:라나크푸르(Ranakpur) 명상 캠프
그는 캠프에 참여하기 위한 세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알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배우가 연극을 마친 뒤에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놓듯이 그대는 그대의 거짓 가면들을 한쪽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대 안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오게 하라. 그리고 그 안에 살아라.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대 안에 수많은 것들이 부산을 떨게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495]
그대가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대는 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대는 더 성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497]
나에게 있어 산야스란 '나는 나에게 주어져온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새롭고, 젊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야스는 다름 아닌 그대의 순수함으로의 입문이다.[501]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505]
내가 그대에게 말해왔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행하도록 설득했던 것들에 집착하라. 그것을 하라. 그러면 언젠가 그대는 내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508]
마음의 상태는 신경증적이다. 전 사회가 병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처럼 혼돈명상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다르시스를 경험하라. 그 과정에서 음악은 도움이 될 것이다.[511]
흰 구름은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어디로든 움직인다. 모든 차원이 흰 구름에 속해 있고 모든 방향이 흰 구름에 속해 있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적인 받아들임 속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흰 구름의 길’이라고 부른다. 흰 구름의 길은 길 없는 길이다. 흰 구름은 움직인다. 그러나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마음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나는 흰 구름이다.[514]
그리고 이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 육체 속에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언젠가는 육체라는 탈 것을 버려야 한다. 나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나의 일은 이미 완성되었다. 내가 이 육체라는 탈 것을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은 단지 그대를 위한 일이다. 어느 날 그것은 버려질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대는 나의 부재 속에서의, 혹은 마찬가지 이야기지만 나의 비육체적인 현존 속에서의 작업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나의 부재 속에서 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나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여기 이 몸 속에 있지 않더라도 그 접촉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517]
그대가 질문을 할 때, 나는 그대를 들여다본다. 나는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들여다보고, 그대를 느끼고, 그대가 볼 수 없는 그대 자신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가슴이 결정하게 한다. 따라서 나는 기껏해야 그대의 가슴을 그대 자신에게 해석해 주는 것 뿐이다. 나는 산파이다.[520]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그대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타인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개종 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결코 사람을 어떤 것에 대한 수단으로도 이용하지 말라.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523]
단지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려라. 씨를 뿌리고 계속 가라. 그 씨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뒤돌아보지 말라. 그들의 때가 오면, 봄이 오면, 그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527]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그대의 섹스, 그대의 화, 그대의 탐욕, 그대의 질투, 그대의 분노……그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 커다란 평온함이 일어난다. 그것은 폭풍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다.[528]
세상 속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이 그대 속에 살도록 허락하지 말라. 그것이 나의 메시지이다. 선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러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 하지 않고, 물도 기러기들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543]
이것이 나의 산야신들의 길이 되어야 한다. 세상 속에 있어라. 세상 속에 살아라. 왜냐하면 모든 욕망은 그대를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모든 야망은 그대의 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544]
자각하라. 깨어 있어라. 그래서 이 모든 도둑들이 들어와 그대를 더럽힐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라. 명상적이 되라. 그러나 세상 속에 있어라.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세상은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대를 명상적으로 만드는데 엄청나게 도움을 준다. [544]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565]
나는 그대에게 단지 맛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 맛을 알고 나면 그때 그대는 그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때 그대를 막을 방법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을 보는 것이다.[586,587]
이제는 내가 그대들에게 맛을 보여주기 시작해야 할 때이다. 말은 많이 주었다. 그것은 준비였다. 씨앗들은 많이 뿌렸다. 그리고 이제 봄이 매우 가까웠고 그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전체적이 되어야 한다. 강렬하게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나의 침묵 속에, 나의 기쁨 속에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대와 나 사이의 이중성이 사라질 때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즉시 그것을 버릴 것이다. 조금 덜 현명한 사람들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해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다. 그러나 오래 머물 수는 없다.[587]
그대는 그 이상의 어떤 것, 보통 이상의, 당연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초월적인 어떤 것을 찾고 있다. 그대는 그 길을 익혀야 하며 그 길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다. 나는 그대와 함께 갈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대에게 달을 보여줄 수 없다. 머지 않아 그대는 나의 손가락을 잊고 그대 스스로 달을 보아야 한다. 그대는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589]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589,590]
그대의 성장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그대를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 상태이다.[590]
도움이 되는 것은 나의 여기 있음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대의 여기 있음이며, 그대의 현재에 있음이며, 그대의 각성과 깨어있음이다.[590]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593]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594]
나는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나의 삶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존재계에 제안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600]
오직 조직화된 교의나 신앙체계, 교리, 신학이 없을 때에만 종교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대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점의 하나이다. 단지 이 침묵과 산들바람 속에서 춤을 즐기는 나무들만이 존재할 때, 그대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가 자라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전으로부터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603]
나는 선을 가리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라 단지 종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창시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가 없다.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가르칠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선은 앎이 아닌 무지 속에서 충족된다. 그것은 세속과 신성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604]
나는 불교도가 아니다. 고타마 붓다의 의도 역시 불교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고 조직화된 종교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25세기 전에도 그는 결코 조직화된 종교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진리가 조직화되는 순간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조직화된 종교는 다름 아닌 숨은 정치이며, 성직자에 의한 깊은 착취에 불과하다.[608]
이 순간 그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붓다인 그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영원성이며, 그것은 그대의 불멸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대는 별과, 나무와, 하늘과, 대양과 하나이다.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였다. 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614]
에필로그 : 1990∼현재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대부분의 나의 산야신들이 느끼게 될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사랑과 같은 특질, 그 주위에는 어떤 교회도 생겨날 수 없다. 깨어있음과 같은 특질, 그것은 그 누구의 독점물도 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축하, 기쁨, 그리고 신선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을 키워가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621,622]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
본 책은 크게 네 개의 주요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시기 혹은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의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 다른 아이와 두드러지게 달랐던 두 가지, 즉, 외조부모에 의한 완벽한 보호와 사랑, 그리고 학창 시절의 자기 몰입과 깨달음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파트는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그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크게 8개의 측면에서 살펴 보고 있다. 특히, 그가 인터뷰 등을 통해 밝혔던 그의 생각과 의견들을 실제 강의하는 듯한 분위기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8가지 관점이 긍정적인 측면 보다는 세상의 부정적 시각을 의식한 듯 부정적 관점들을 제목으로 내세운 후 이를 그의 강의식 설명을 통해 해명 내지는 이를 뒤집고자 하는 논리적 전개를 펴고 있다. 세 번째 파트는 그가 평생을 걸쳐 주장했던 그의 핵심적인 사상을 4가지 주제로 축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네 번째 파트는 그의 일생의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 형태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인상적인 부분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오쇼의 외조부모의 삶과 사랑의 방식이었다. 본 서에 소개된 오쇼의 외할머니 나니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외조부모의 집에서 보낸 7년간의 시간은 오쇼의 인생 전체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특히 외할머니 나니가 오쇼를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대해 주고 묻지 않고 지켜 보며 응원하고 금전을 지원하는 모습은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후견인 혹은 후원자의 역할을 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역할 모델처럼 느껴졌다.
또한 자서전을 통해 그의 ‘불광불급(不狂不及)’, 즉, 구도에 미쳐서(狂) 진리에 미친(及) 한 인간의 열정과 집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한가지에만 집중했음을 밝히고 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오직 한 가지 놀이만을 사랑했다. ..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67]
그는 외조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 아래서 또래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일찍부터 그는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스스로를 탐구하는 데에 빠져드는 불광불급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측면에 그는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조르바 붓다’에 대한 설명이었다. 보통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과 경건하게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조화보다는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인식되고는 하는데, 세상을 느끼면서 즐기는 삶과 정갈하게 구도의 삶을 사는 것이 추구하는 것이 별개가 아니고 도리어 세상을 살아가는 효과적인 결합임을 알려준 부분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 의지’와 ‘깨어있는’ 마음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함께 ‘즐기며’ 살아갈 것을 강조한 부분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
일반적으로 자서전에는 자신의 과거의 경험 혹은 그와 관련된 생각의 변화 등이 소회 혹은 반성의 심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본 저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의 오쇼의 환경과 몰입 이야기를 통해 그의 조숙함과 이로 인한 그의 신성의 힘을 더욱 더 강조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약간 반감이 들었다. 자서전 전체를 통틀어 좋은 말과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쇼의 대단함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 같아 일종의 거부감 비슷한 감정 또한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의 자서전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자서전을 읽다 보니 이번 여름에 50페이지로 다시 써야 할 ‘나의 개인사’를 나의 자서전 형태로 구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사는 중이므로 과거에 대한 회상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 및 현재에 대한 회고와 감상을 2/3 정도, 그리고 나의 꿈의 형상화를 1/3 정도로 해서 구성하면 지금 시점에서도 꽤 괜찮은 범부의 근사한 자서전이 만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을 다음과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 1 : 과거의 나 – 평범 속의 좌절과 극복
1. 나의 어머니
2.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극복의 경험
3. 사랑에 대하여
파트 2 : 현재의 나 – 성장의 추구
4. 견리사의
5. 삶의 균형
6. 나의 성장 동력
파트 3 : 미래의 나 – 사랑하고 돌려 주기
7. 첫번째 목표 : 책 그리고 끝없는 공부
8. 두번째 목표 : 공익 기여
9. 세번째 목표 : 시골 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