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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일 09시 35분 등록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지음

소명출판


Ⅰ.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은 니체라는 쓰디 쓴 원액을 그 특유의 손맛으로 우려내 ‘니체의 참맛’을 선보인 장본인이다.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쓴 최고의 ‘유쾌한’ 니체주의자다. 저작 및 강연활동을 통해 철학책 속 니체를 우리의 일상으로 불러왔다. 


“어린아이는 신성한 긍정, 순진무구한 망각, 새로운 시작,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다.” 


그는 열 살 이전까지 흙길을 밟으며 자랐다.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까맣고 평평한 땅, 신작로가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였다. 그는 자연을 무대로 활보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많다.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키가 작아서 앞에서 세 번째였지만 5학년 때 광주로 전학가기 전까지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다.


광주로 전학은 새로운 전환기였다. 도시생활의 새로운 문화적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각별하다. “생애 첫 기억은 땀이 촉촉이 밴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있던 것이다. 정지영상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이장을 지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광주로 옮기면서 궂은 일 마다 않고 헌신했다. 5남매 중 내가 유독 아버지를 좋아하고 많이 이해하는 자식이었다.” 


“내 안에는 어떤 것, 즉 내일과 모래 그리고 장래의 것이 있다.” 


중학생이 된 후 병권은 점차 말수가 적어졌다. 새색시란 별명까지 얻었다. 학업성적도 중상정도. 그가 다시 피어난 건 고등학교 때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적은 전교랭킹에 꼽히게 됐다. 군대 갔던 형들이 돌아오면서 집안 분위기는 안정되어 갔으나, 세상과 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의 도심은 연일 시위의 함성으로 물들어갔다. “스쿨버스가 시위대를 뚫고 지나가기 일쑤였으며, 학교도 3년 내내 학내 민주화 문제로 들끓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물만 난 고기마냥 다시 팔딱 거렸다. 뛰어난 언변과 논리체계를 갖춘 덕에 학내 민주화운동 주도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러자 소싯적처럼 다시금 그의 학내 입지는 확고해졌다. 친구들은 ‘공부도 잘하고 나서기도 잘 하는’ 그를 신망했다. 공부와 투쟁이 일상적으로 공존하던 시절, 그의 꿈은 뜨겁게 이리저리 꿈틀댔다. 원래 문예반으로 활동할 만큼 문과성향이었으나 이과로 진로를 정했다. 뇌수종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한 것이다. 다시 유전공학으로 관심사가 바뀌었고 친구들과 괴물을 만들자는 둥 엉뚱한 미래를 설계하기도 했다. 결국 전공은 화학과를 택했다.

“네 자신을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사촌형에게 입학선물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를 받았다. 민주화의 고장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일가친척은 거의 ‘운동권’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고3때 급우에게 배운 ‘반전반핵가’를 불렀다. 학과 선배들은 그를 하염없이 사랑하고 신뢰했다. 그 역시 이공계인데도 세상문제에 관심을 갖고 현실에 참여하는 선배들을 존경했다. 동문회 역시 운동권 선배들이 주도했다. 교정 어디서나 부단히 읽고 쉼 없이 토론했다. 그는 분자구조보다 사회구조에 관심이 더 많았고 책꽂이에는 전공서적 대신 사회과학서적으로 채워져 갔다. 책은 밥이었고 세미나는 삶이었다. 


1992년은 강경대 열사와 김귀정 열사가 연달아 죽음을 맞고 대선이 치러지던 해다. 그 역사의 격랑기를 그는 연세대에서 보냈다. 총학생회에서 밥 먹고, 거리에서 싸우고, 노천극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동운동하는 친구를 따라 구로역에서 선동활동도 했다. 그 즈음, 두 가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하나는 지나가는 노동자에게 아주 세게 뺨을 맞은 일이다. “너희가 노동자를 알아!”하는 대사와 함께.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잠 안 오는 약의 복용 실태를 적나라하게 목도한 후 자신에 대한 반성이 크게 일었다.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세상 밖을 한참이나 떠돌다가 학과로 돌아왔다. 교정도 친구도 한 없이 낯설었다. 그런 상태에서 학회장을 맡았다. 일상 곳곳에 투쟁의 잔열이 남아있었다. 다사다난한 그의 청춘시대는 점차 검은 낯빛으로 물들어갔다. 세상 짐 다 진 사람처럼 무겁고 심각했다. 공부하러 간 친구들과 살길 찾아 떠난 선배들을 탓하고 원망했다. 니체 말대로 원한의 정신으로 살았다.


졸업 후 그는 사회과학대학원에 들어갔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가기 위해서다. 그 때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누구나 혼자 공부하면 자기 환상에 빠진다. 좁아지고 고집스러워지고 원본주의자가 된다. 대학원 동기들이 거의 87학번이었는데 그들의 생생한 현장경험과 곁들여 넓게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사회과학연구소는 들뢰즈와 푸코, 스피노자 등을 읽으며 탈근대 담론을 꽃피우고 있었다. 열린 분위기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니체를 만났다. 어느 날 막스 원전을 읽는 모임에서 누가 휴식삼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자고 가져왔다. 한 우물 파는 스타일이인 그는 옆길로 새는 게 싫었다. 니체의 경박한 문체와 파시즘적 사고도 싫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니체를 확 버리지도 와락 안지도 못하고 낑낑대던 그는 결정적으로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에게 매료됐다. ‘이런 책을 쓰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내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책은 읽지 못할 것이다’와 같이 천진하게 자기 자랑하는 글을 본 순간 고병권도 웃음이 터져버렸다. 고병권은 ‘웃음’으로 니체와 접속했다. 마침 방학을 맞아 니체 전집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전남대 도서관에서 책상의 그림자가 바뀌는 것을 보며 니체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해되고 감동적인 문장만 타이핑을 했다. A4용지로 50장 분량이었다.


그는 니체로 인해 웃음이 많아 졌고 건강도 바뀌었다. 세상이 달라보였다. 나이가 멈춰갔다.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긍정의 화신’이란 별명도 생겼다. 당연히 니체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돌이켜보면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무작정 좋아하는 걸 따라오다 보니 항상 한 가지 길이었다.  


수유너머 고병권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병권. 인생의 마디마디, 그의 성장을 촉진시킨 것은 인연과 우연이다. 책과 사람이 보약이었다. 그는 특히 박사과정 때 지도교수에게 공부하는 법을 확실히 배웠다. 지도교수의 책상에는 부처님 그림이 크게 걸려 있었는데 인내와 몰입을 위한 장치였다. 또 지도교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음식을 시켜먹었다. 그런 스승을 곁에서 지켜본 것은 그가 ‘공부의 달인’으로 살아가는데 귀한 밑거름이 됐다.


“교수님이 두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첫째는 절대 무릎을 꿇지 마라. 젊어서 함부로 무릎을 꿇으면 습관이 된다. 4.19세대인 교수님은 팔팔하고 대쪽 같던 벗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는 걸 지켜봐왔던 거다. 둘째는 대가 한 사람을 잡고 그의 높이에서 공부하고 세상을 보아라. 아마도 대가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게 달리 보일 거다.”


대가의 시선을 좇던 서른 즈음, 운명적으로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 합류했다. “이게 나의 길이구나. 크게 벗어나지 않겠구나.”고 판단했고 수유+너머를 중심으로 삶을 설계했다. 임시 거처가 아니라 생활공동체로 확장했다. 밥을 해먹고 강의로 돈을 벌었다. 삶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 “인복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인복의 절정은 수유+너머에서 꽃피운다. 고미숙 선생 등 평생 벗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리고 삶의 틀을 갖추어 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앎이 삶이 되는 지식인 생활공동체는 6월의 나무처럼 나날이 빛깔을 달리하며 푸르러갔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지난 2006년 5월,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동료들과 함께 신자유주의 재편에 반대하는 행진을 벌였다. 세 개의 큰 사건이 계기가 됐다.


새만금 간척사업,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선언이다.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2주 간 매일 10시간을 걸으면서 많은 슬픈 장면들을 보았다. “삶의 한계지대에 내 몰린 사람들이다. 불안정과 위기는 삶의 기본조건이 되어버렸다.


그는 대중들과 만나면서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현재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권력과 삶이 부딪히는 영역에 대해 사유한다. 있는 권리를 누리는 투쟁이 아닌 권리의 확대와 창안에 대해 고민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다. 전공에 구애됨 없이 니체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화폐가 궁금해서 경제학을 했듯이 이번엔 정치학이다. “외부에 나를 개방하고 살면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산다.”  


 “혁명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완전하고 결핍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양철학이 ‘완전성의 신화’를 만들어 냈고 그 결핍이 권력을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최대 행복을 만드는 게 중요할 뿐, 인간답게 산다는 건 어쩌면 폭력이다. 사상, 신념, 철학 등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인문지기 고병권


“나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고병권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싸우기 힘든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고, 나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적이라고. 그에게도 적이 있다. 아주 문득 출연해서 순간 마음을 휘젓기도 한다. “애가 갑자기 아파서 돈이 필요한데 돈도 한 푼 없을 때. 그냥 주는 월급 받으면서 편히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니체가 딛고 서야 할 마지막 계단은 자기머리라고 했다. 본디 나를 있게 해주는 게 나를 제약하고 짓누르는 법이다. 그러니 생은 고민을 넘어서면 그 다음 단계는 없는 게 아니라 매번 넘어서는 거, 즉 영원회귀의 시험에 드는 거다. “이 시험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철학을 하지 말라고 했다. 똑 바로 보고, 그 안에서 힘을 발견하고 키워야 한다. 가장 슬픈 것에서 명랑성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는 그는 요즘 인문학 전파에 더욱 힘쓰고 있다. “세상을 바꿀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인문학은 무기가 된다. 인문학은 생산재다. 세계가 필요한 사람에게 사상이 던져져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거다. 그는 어디든지 ‘좋은 앎’을 나눌 계획이다. “앎과 삶은 일치한다. 두 개의 바퀴다. 잘 알면 잘 살게 되고, 잘 사는 게 잘 아는 거다. 누구나 아는 만큼 행동하게 돼 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p.7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p.7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p.19


"급소를 맞춘 화살의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p.20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p.27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p.29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p.31


니체는 철학이 음울한 그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p.31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p.33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p.37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p.41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이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p.49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p.49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했다.  p.58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p.58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p.59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p.59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이상(Ideal)의 토양에 대한 니체의 연구는 좋은 양식과 나쁜 양식을 구별하고 있다. “세계가 충실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보이는 미적 상태”가 출발점이 될 때, 이곳에서는 “자기 긍정이 지배적이고, 사람들은 나누어준다.”  p.74


그 토양에서 자라는 ‘도덕적 식물’의 종류는 완전히 달라진다.  p.74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p.77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 말로 약한 자이다.  p.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p.78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p.78


강자에 대한 원한에 찬 비난, 그것이 바로 그들의 복수다. 그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살며 ‘서로 사랑하는 형제’를 외치지만,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신의 왕국’이 도래할 때까지 만이다.  p.81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p.84


먼저 저 세계를 설정하고, 그것의 고차적 가치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그 다음 고차적 가치들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평가하는 것 자체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한다.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를 향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p.87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p.90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일은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p.90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는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p.96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이다.  p.112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하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p.112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p.114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p.115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기존의 가치를 추구하고 내면화하는 행위는 수동적인 주체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이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p.127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p.142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단적인 표상이란 없으며, “부분이나 사건들은 깊은 연관성들을 지니고 있고, 이들 특성은 관계를 통해서 결정된다.”  p.159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p166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p.167


결국 우리는 힘들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  p.169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달리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p.171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p171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p.171


욕망의 첫 번째 정의는 욕망을 ‘획득’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획득하려고 노력하려는 노력이 욕망이라는 것.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p.173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p.173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자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를 가르친다.”  p.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자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는냐(약자의 생성)’를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p.177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p.180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p.181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반복)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p.183


무한히 반복되는 그 놀이라는 ‘순환운동’을 즐기고 있는 세계로서 영원회귀를 묘사했다.  p.188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p.189


영원회귀가 의지의 문제,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문제라는 점이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p.191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p.193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p.200


이로써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p.205


긍정의 권력의지가 벌이는 차이의 놀이를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다수성이다. 다수성은 하나와의 차이이다.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p.207


두 번째 차원은 자신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은 자기와 자기의 차이다. 세 번째 차원은 우연이다. 우연이란 차이가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세계는 자신을 다수성으로, 운명애로, 우발성으로 드러낸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만을 돌아오게 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선택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p.208



제7장  인간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p.216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p.221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p.233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p.238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p.238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p.239



Ⅲ. 내가 저자라면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니체에게로 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눈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니체로 가는 길을 친절하고 쉽게 안내하고 있다.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명확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책 제목에 나오는 숫자 '천'은 다양성과 차이를 가리킨다. 니체는 모든 사물이 지닌 '천 개의 주름'을 '천 개의 눈'으로 바라보고 '천 개의 길'을 거쳐 '천 개의 숨겨진 섬'에 이른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그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니체를 '창조'한다. 친절하고 겸손하게, 그러나 열렬하게 니체를 설명하고 옹호하면서, 그를 통해 진리와 도덕,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는 니체를 이해하는 길은 니체에 대한 주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니체를 직접 여행하고 답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들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하는 답사라는 형식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가지고 학습과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직접 그곳에 가서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깨닫는 여행과 답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완성되고 고정화된 하나의 틀에 정형화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직접 각자 하나의 길,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게 훨씬 더 문화유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비판과 주석 이전에 직접 니체의 영토를 경험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장은 독립된 내용을 담고 있는 니체의 영토들이다. 각각의 영토들을 여행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자의 니체를 이해하게 되고, 그 영토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어떤 일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각 장들은 모두 동일성과 결핍을 조장하는, '근대 이성의 고약한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부정의) 권력의지와 대결하고 있다.


그 (부정의) 권력의지는 차이를 은폐하고 그 생성을 가로막으며, 창조적 욕망에 결핍을 집어넣어 아무런 생성 능력도 갖지 못한 대중들, 심지어는 자신의 억압과 예속마저 요구하는 대중들을 양산해오고 있다.


저자는 (부정의) 권력의지에 대한 이러한 대결방식을 통해 차이와 다양성, 새로운 신체를 생산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千)'이라는 숫자는 동일성에 맞서 다양한 '차이'를, 결핍에 맞서 '과잉'과 '넘침'을 의미한다. 이렇게 니체의 영토를 답사하다 보면 지은이는 사물들을 바라보는 천 개의 눈,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천 개의 길, 사물들이 발생한 천 개의 기원, 세상이 도달할 천 개의 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은 니체의 영토를 여행하는 여행객 각자의 니체를 만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될 수 없었던 기존의 니체 주석에서 맛보았던 좌절을 넘어서 이 책은 분명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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