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혜향
  • 조회 수 273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11월 9일 11시 2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니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화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 <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니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3), <화폐, 마법의 사중주>(2005),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2001) 등이 있다. 곧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사회를 분석한 <추방과 탈주>라는 새로운 정치 에세이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

프로이센의 작센 주 뢰콘에서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와 본가 역시 목사 집안이었는데, 평생 기독교를 열렬히 비판한 그가 더할 나위 없는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은 좀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14세부터 유명한 포르타의 기숙학교에서 그리스의 고전 문헌학, 종교, 독일 문학 등을 공부했는데, 그는 이때 그리스 사람들의 천재성에 눈뜨게 된다. 1864년 입학한 본 대학을 1년 만에 떠났고, 라이프치히에서 고전과 문헌학으로 유명한 리츨 교수에게 배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바그너의 음악 접한 것도 여기에서였다. 1869년 24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1871년 <비극의 탄생>을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 비극과 바그너 음악을 예찬했는데, 후기에 가면 바그너나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1878-1879년 사이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고, 건강이 악화된 데다 교수 자리에 염증을 느끼고 1879년 교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뒤 10년 간 스위스와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하면서 사색과 저술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서광> <즐거운 학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학> 등을 썼다. 그 뒤 ‘모든 가치의 전복’을 위한 책을 쓰려고 계획하지만, 완성은 보지 못한 채 일부는 출판되고 일부는 유작으로 남는다. <권력 의지>는 그의 유작이다.


1888년 건강이 좀 좋아지자 6개월 동안 무려 5권의 책을 출간하는데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 그리스도> <이 사람을 보라> <바그너 대 니체> 등이 그것이다. 그 직후인 1889년 1월 이탈리아의 투린 거리에서 쓰러진다. 바젤의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그는 그때부터 11년간 뇌 손상과 정신착란으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간호 속에 살아가다 1900년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 전체를 비판하면서 ‘망치로 철학하기’를 실천했다. 어떤 철학의 개념도, 어떤 사상의 가치도 그의 손 안에서 으깨지고 부서졌다. 그는 ‘모든 가치를 전복’하려 했다. 종교와 함께 진리도 도덕도 양심도 그의 거친 망치질 아래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초인이 나타나리라고 예언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겨냥한 강한 요구인 셈이다.


그의 책은 매우 강한 격정과 정열, 화려한 수사적 문체, 강한 개성적 사고와 비판으로 쓰여졌고, 현대의 많은 사상가들에게 깊고 넓은 영향을 주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어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라고 답할 것이다. (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 (3)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안아야 한다. 그는 “숭고한 현미경을 가진 신”처럼 “선분이나 미세한 조각들”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또한 “얼음 덮힌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사람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4)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은 ‘때 아닌 것’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5)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5)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7)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7)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8)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지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8)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8)


서장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눈처럼 쉽게 길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17)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18)


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이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5)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27)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 (29)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 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31)


불행히도 서규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있다.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1)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소크라테스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 이라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을 때, 부풀어 있던 사유의 공간 역시 단 하나뿐인 진리를 향해 급속히 얼어붙었다. 빅뱅을 상쇄할 만한 거대한 냉각으로 진리에 관한 사유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존재안의 피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날조되었고, 그것이 참된 세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참된 세계는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32)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처럼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36/37)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사람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37)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심지어 고통과 싸우기 위해 꿈과 환영까지도 무기로 이용했다. (37)


3. 세 개의 죽음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 죽음이다. 그러나 으 죽음이 대등하게 나열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한 대비는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다른 두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39)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상위의 통일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해소한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40)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부터도 돌아온다.” (41/42)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이 철학자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소절을 하나 남겨놓았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제목이 붙은 소절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염세성을 그의 유언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42)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정과 심판의 법정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라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48)


5. 미래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49)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49)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에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나 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1)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 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52)


“너희는 너희의 사상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52)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3)


“미래라는 나무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 한다. (53)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54)


니체의 법정은 질서나 평화를 선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예고한다. 비판은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재판을 받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다. 니체에게 심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5)


6. 사랑의 의미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6)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Philo- sophos).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6)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7)


‘삶’을 ‘사랑’하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58)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8)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도덕학자나 도덕 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도덕에 합리적 기초를 제공하기를 원했고, 이제까지 모든 학자들은 자신이 그러한 일에 성공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도덕 그 자체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생각해왔다.” (61)


도덕 학자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62)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가까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자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3)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64)


2. 계보학 2 - 탐사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65)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 내는 “다이너마이트”가 될 지도 모른다. (68)


3. 도덕의 자연사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위조행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도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행위인 것이다. (69)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안에도 가치를 심어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본다. (69)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의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72)


그러나 니체는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이 역사에 존재했다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자는 그러한 도덕적 판단들이 어떠한 토양에서, 어떠한 건강상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진단한다. 유래와 혈통을 밝혀주는 것. 고급과 저급, 강함과 약함, 거인과 소인의 위계를 세워주는 것이 계보학이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다른 건강상태’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계보학자는 도덕의 유형을 세움에 있어 ‘다른 도덕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72)


4. 강한 자와 선 한자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 한자는 “억압하지 않는지,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양은 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80)


이제 매 맞고 있는 것은 약자나 귀족이 아니라 바로 약자 자신이다. 인간을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이미 인간은 ‘원죄’를 타고 났으므로 살아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82)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84)


6. 도덕이라는 동물원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 지도 모른다 는,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86)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쇠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죽어가고 동물원을 폐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87)


7. 선악을 넘어서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평가는 남는다. (88)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다. (88)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덕도 사람을 당기고 밀치면서 행사되는 실재적인 힘인 것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 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89)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선/악의 개념은 좋고 나쁨의 의미만을 가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90)


니체는 『에티카』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90)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해석학자가 신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해석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중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의미한다.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 하는 해석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93)


2. 진리의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95)


‘타자’보다 ‘차이(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95)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96)


해석에 있어 주관적 계기들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축소하고자 했으며, 대상을 대상 자체로 바라보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석만이 합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6)


3. 스핑크스의 눈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103)


니체의 해석학은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05)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 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 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계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7)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108)


4. 가치의 발명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09)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0)


특히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111)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이다. 해석행위는 모드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2)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112)


니체의 해석은 지배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113)


니체에게 과거와 전통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첫 번째 관점은 기념비적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의 고전적인 것이 다시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태도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 그러나 대개의 기념식이 그렇듯이 이러한 시도 속에서 수많은 차이들은 재현을 위해 깎이고 휘어진다.


두 번째는 골동품적 역사관. 이러한 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려고만 한다.


세 번째, 비판적 방식.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 이들은 과거를 법정에 끌어내 심문하고,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  (113)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 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은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한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다. (114)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4)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질서도 천천히 녹아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5)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115)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116)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 (!18)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120)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아마도 니체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2)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한다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여이다. (123)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말한다.“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위대한 정치가 도래할 것이다.” (125)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 근대국가와 전쟁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정치는 이러한 창조와 평가, 세력들 및 권력에 대한 물음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한 물음이 커다란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봉쇄가 두드러진다. (126)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7)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조의 권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국가의 원형은 전쟁을 통해, 그리고 군사계급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128)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131)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선험적인 개별화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하며, 사회적 관계에 우선한 완전한 인간을 단위로 삼는다. (132)


‘자유로운 개인’은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을 볼 수 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옴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고 말한다. (132)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 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 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137)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2)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143)


5. 아곤의 정치

전쟁을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152)


제 5장 권력의지와 영원 회귀 (1)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니체는 원자론을 이렇게 비꼬았다. “저울에 달아보아 차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석탄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을 공상해야 했던 것 아닌가? (155)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159)


힘의 두 번째 특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 사용의 극대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남겨두지 않는 힘의 속성을 절묘하게 드러냈다. (159)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 (159)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이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 (161)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를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164)


‘힘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질을 가지고 행사되는가?’ 는 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 (165)


니체에게 강함은 무엇보다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66)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 (167)


능동은 “반동을 뒤로 밀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듯” 자기 능력의 한계까지 나아간다. 능동적 힘은 “정면에서 공격한다.”: 이때의 능동적 힘 역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168)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171)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 (173)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5)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6)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177)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이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 까? 우리 육체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이 권력느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177)


제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떤 철학자들의 무리와도 뒤섞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로 생각했다. (184)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이 다수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186)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익숙한 오해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 (192)


3. 반복의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미래를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계보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미래란 지나가 버린 순간들 속에도 들어 있다. 들뢰즈는 사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미래)이다.” 계보학자들이 과거의 지층에 숨겨져 있던 복수의 힘들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힘들이 미래를 건설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축물로 변형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197)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때에 맞지 않은’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204)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207)


제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있는 밧줄

1. ‘과(...... und ......)'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인간이 진정한 만물의 척도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12)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발한다. (213)


2. 진화와 변신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모든 생물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과 ‘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 (217)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지인, 강자, 귀족, 주인, 어린아이다. 어떻게 거인과 어린아이는 같은 종족이 될 수 있을까? ‘같은’것은 힘과 권력의지의 종류이고 존재방식으로서의 영원회귀다. 만약 초인이 생성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 (221)


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223)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225)


4. 보다 높은 인간들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하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번 더’ 라고 말하는 것이다. (231)


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 (232)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 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뛰기와 넓이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 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 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 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3)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 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졌다. “사람을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238)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39)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40)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니체는 바그너에 몰입했던 자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압박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마약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바그너를 필요로 했다. 바그너는 탁월하다고 하는 모든 독일적인 것에 대한 해독제였다. 나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도 하나의 독이다.” (244)


4. 모든 가치의 전환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된다. (248)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니” (251)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252)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이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53)


제2부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58)


2. 근대인의 탄생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263)


3. 관료의 기제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267)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베버는 “훈육은 모든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전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270)


5. 베버의 정치학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강철 겉옷 속에 다시 영혼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스스로 강철 감옥보다 더 강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276)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책임 윤리를 갖춘 정치인,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의 출현이 낳은 것은 수동적인 대중들뿐이었다. (280)


카리스마는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 승인되어야 한다. (중략) 대중들이 카리스마에게 의존하면 대중들의 자율성이 박탈되고, 카리스마가 개중들에게 의존하면 카리스마적 성격이 박탈된다. (281)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자연상태에서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하는 정치적 정언명령은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곧바로 제2의 자연법이 나온다.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네가 너를 위해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요구하지 말라.’ (296)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편차 이상으로 그 둘 모두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가치들의 투쟁, 차이들의 투쟁을 정치 영역으로 보내서 경제적 영역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받고자 했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은 동일한 요소를 정치의 영역에서도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 열망과 그리 멀지 않다. 자유의 보증자로서의 국가, 국가의 영역, 정치의 영역들의 범위는 계속해서 줄어들지만, 그것은 네그리의 표현대로 ‘핵심으로서의 축소’라고 할 수 있다. (298)


가족은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인륜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국가에 대한 제1의 윤리적 기초이다. (302)

 


3. 내가 저자라면


철학, 일단 재미없다. 철학자, 뭐 그렇게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힘들게 사는지, 또 의심은 왜 그리도 많은지, 이것이 철학에 대한 나의 얕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제대로 만나야 하는 철학. 니체, 내게는 처음 만나는 철학이자, 처음 시도하는 정말 깊은 세계다.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27)


종종 ‘나의 철학은 이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듣다 보면 철학에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나의 생각은 이렇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철학이 자기 생각을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것만은 아닐텐데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또 철학에서 쓰는 말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진리, 인식, 사상 등 ‘생각’이라는 쉬운 말보다는 생각 중에서도 여러 모로 깊이 따져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왠지 생각보다는 깊이가 있는 단어 ‘사고’라는 말이 철학에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생각이나 사고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간 의식의 세계라고 해야 하나, ‘사상’에 대한 부담감도 있다.  


도대체 철학, 이것이 무엇이며, 도대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길래 니체, 철학, 그들이 현재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온갖 매체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철학책을 읽는 것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을 알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철학을 만들고 가다듬고 정리하고 부수고 재편하는 ‘생각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걸 저는 변화라고 부르지만요. 생각이 자라지 않는 변화는 그래서 본질적일 수 없습니다.

- <일상의 황홀> (165P) - 


사부님께서는 철학은 결국 세상과 인간과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일을 하든 세상과 인간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없다면 자신을 세상에 표현할 수 없다고 하셨다.


생각하는 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천부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모두 같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 넓이와 깊이가 큰 차이를 보이며, 생각하는 힘, 특히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깊고 넓게 키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로움을 모르고 지내던 나를 어느 날 외롭게 만들었던 이유는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좀 이상한 변경연에 와서 안 읽던 책도 읽게 되고, 다른 생각도 하게 되고, 나에게, 나의 마음이 하는 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변화를 꿈꾼 것은 아니었는데 나의 삶에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화가 감지됨을 느낀다.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은 나의 삶을 한층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깨워 내 삶의 또 다른 가치를 부여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감지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이를 통해 변화된 삶의 기쁨을 느낄 때 비로소 나의 삶은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사례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이다. 내게 있어 역사는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삶과 현실에 대한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다. 역사란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다. 결론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 윌 듀랜트, <일상의 황홀> (165p) 에서 재인용 -


니체, 철학자, 그들은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들의 철학적 담론이 후대에까지,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풀어낸 방식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추었다는 의미일 테고, 우리가 배워봄직한 어떤 것, 무언가가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보통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고민과 사고를 통해 뿌리를 찾고, 철학자들의 고민 속에서 나의 생각을 찾고,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신의 견해가 철학이 아닐까. 역사 속 철학자들의 고민도 결국은 현실에 대한 문제를 풀어낸 결과물로써, 그들의 철학이 적어도 유사한 상황 속에서 나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음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지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8)


나의 철학을 세우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의 현실 생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나의 삶과 주변 현실을 깊이 사색해 보고, 나의 삶을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는 문제는 무엇인지 의심해 보고, 어떠한 변화를 이룰 것인지, 어떻게 해야 발전이 가능한지, 이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 있게 바라보고 이를 나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나의 철학,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글쓰기를 통해 나의 생각을, 나의 견해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방법인 것 같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 나 자신의 내면에 샘솟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쓰는 글, 또한 나의 삶이 담겨 있는 글, 자기반성이 치열하고 나의 마음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이러한 글쓰기야말로 내 철학의 뼈대가 되어 줄 것이다. 

IP *.40.227.1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12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 혁산 2009.11.09 3110
»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혜향 2009.11.09 2739
2110 [29]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인용문 수희향 2009.11.09 2852
2109 [29]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저자 & 내가 저자라면 [1] 수희향 2009.11.09 2829
2108 시집 <생일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file [2] 예원 2009.11.09 7393
2107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엮음 숙인 2009.11.09 5000
2106 탤런트 코드 file [1] 백산 2009.11.09 4520
2105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書元 이승호 2009.11.08 3453
2104 북리뷰 29 - 삶의 기술 - 안셀름 그륀 [2] 범해 좌경숙 2009.11.08 4167
2103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file [1] 정야 2009.11.03 2995
2102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1] 희산 2009.11.03 2714
2101 사람에게서 구하라 <수정> [5] 혁산 2009.11.03 2725
2100 [28] 아니타 로딕의 <영적인 비즈니스> [1] 수희향 2009.11.03 2708
2099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1] 혜향 2009.11.03 2718
2098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1] 書元 이승호 2009.11.03 3144
2097 동양의 명상과 서양의 심리학 [1] 백산 2009.11.02 8053
2096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file 예원 2009.11.02 4108
2095 북리뷰 2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범해 좌경숙 2009.11.02 2704
2094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효인 2009.11.02 2826
2093 포트폴리오 인생 - 찰스 핸디 혜향 2009.10.26 2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