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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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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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하여
- 1971년 전남 담양 출생
- 서울대 화학과 졸업
- 서울대 사회학과 사회학 박사
- 연구공간 수유+너머 추장
- 부커진R 편집인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삶’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최근의 운동 속에서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
『화폐, 마법의 사중주』그린비, 2005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세종서적, 2001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 2001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 ~ 1900)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생의 철학’ 의 기수(旗手)이며,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비극의 탄생』『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니체 대 바그너』『이 사람을 보라』등이 있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책머리에
§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3]
§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 한다.”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3]
§ 이 미래의 철학자가 오해되었던 것은 신비함이나 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 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아래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6]
§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 진리의 식물은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6]
§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7]
§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7]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7]
§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 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7]
§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이 필요하다.[8]
§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지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8]
[1부]
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은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27]
§ 그렇다며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사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심는다.
§ 확실히 니체는 자신과 철학의 관계를 철학 외부에서 맺었다. 니체의 철학이 생리학이나 병리학. 징후학, 자연학 등의 모습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28]
§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은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한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29]
§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설교자’라는 니체의 공격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정의 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 역시 영혼은 죽음을 통해서만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은 육체의 제약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이다.[30]
§ 서구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 죽음의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에게 ‘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 시킨다.[30]
§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소망하다. 그렇게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제발 빨리 그들이 원하는 세계, 천국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기를….
§ 니체는 철학을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에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31]
§ 생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 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삼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구한 죽음.
§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이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31]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 신과 진리가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 이다.[33]
§ 그리스 신화 속에서 죄가 들끓는 곳은 ‘이 세계’가 아니라 신들의 세계다.[35]
§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신성모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니체는 신성모독이 일종의 위엄을 창안하려고 그리스인들의 욕구에서 나왔으며, 신성 모독을 통해 그들의 고귀함을 구현하려 했다고 말한다.[36]
§ 그리스인들은 삶에 죄가 있다는 죽음의 설교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삶이야 말로 무구한 것이라고 말한다.[36]
§ 그렇다면 기독교인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36]
§ 그들은 소인들이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을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리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이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삼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37]
§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좌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37]
3. 세 개의 죽음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 삶의 비극성은 삶에서 오지 않고 죽음에서 온다. 삶이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죽음이 주는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관계한다.[39]
§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39]
§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은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하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일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주신제(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찢겨진 신체들의 모아져 디오니소스가 부활하기를 바란다.[39]
§ 일상이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플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의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나중에 그리스 비극에 대한 자신의 변증법적 분석을 후회했다.
§ 변증법 속에 갇혀 있을 때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파괴와 혼돈의 힘으로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긍정’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파괴와 혼돈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41]
§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삼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41]
§ 디오니소스가 삶을 찬미하고 그리스도가 죽음을 찬미했다는 식을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는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도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42]
§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삶에 대한 자신의 복수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42]
§ 디오니소스의 죽음이 보여주는 긍정성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보여주는 염세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을 때는 디오니소스의 죽음 역시 염세적인 것으로 읽혔던 적이 있었다.
§ 니체는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그리스 비극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에 들어 있는 긍정성이 쇼펜하우어식의 염세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43]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있다. 그들의 시유공간은 극장이며 그들이 세운 체계는 무대이고 개념들은 장치들이다. 니체가 “체계를 세우려는 자들의 연극이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론적 인간, 즉 철학자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45]
§ 플라톤 철학의 연극적 성격을 간파했던 사상가는 에피쿠로스였다. 에피쿠로스는 니체보다도 훨씬 이전에 삶과 건강을 위해 철학을 활용할 줄 알았던, 다시 말해 철학의 공과를 물었던 사상기이다.[45]
§ 니체의 철학처럼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극적이다.”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가령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며, 바그너 역시 배우일 뿐이다.[47]
§ 주)들뢰즈는 오히려 니체가 철학적 연극과 다른 미래의 연극을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비극의 탄생>에서 시작해서 니체의 저서들 곳곳에 등장하는 가면극, 노래와 춤들이야말로 미래 연극에 대한 실천적 모습들이라고 말한다.[46]
5. 미래의 철학자
§ 니체는 “도덕적 개념에서는 피와 고문의 냄새가 완전히 씻겨진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항상 “인간은 시대의 목적을 향해 훈련 받아야 한다.”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50]
§ 불행히도 철학은 지금까지 철학은 이 과정에 동원되어 왔다. 철학은 군대가 잔혹한 폭력을 생사하고 난 뒤에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고 길러내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 니체가 철학자들을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50]
§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50]
§ 니체가 볼 때 국가에 대한 철학의 양보는 너무 지나치다. “국가는 철학에 의한 봉사자를 필요한 시설 수만큼 뽑아내고,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사람에게 강의 하도록 강제한다. 들을 마음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강의를 한다…철학자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사상가여서는 안 된다.” 항상 사상가들 뒤쫓는 사상가, 다른 사람에 관한 사상가, 그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51]
§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 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통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51]
§ 니체가 무서운 호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광기’다.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 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51]
§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 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은 ‘아픈 것’을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말고 다르지 않다.[52]
§ 아픈 광인은 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 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52]
§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53]
§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니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니체 역시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두었다. “미래라는 나무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나의 출현도 그 시기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53]
§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새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하는 것이다.[55]
6. '사랑'의 의미
§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56]
§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 진리와 사라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57]
§ 그가 구했던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친구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 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57]
§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사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57]
§ 바그너의 친구가 되고 싶어했던 니체는 자신의 아랫사람을 필요로 했던 바그너의 사랑과 갈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그너가 사랑을 ‘이타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랑을 희생과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과 바그너가 공유하고 있는 사랑관이다. 그러나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58]
§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인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 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9]
§ 삶을 변화 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철학은 철학을 떠난 사람들의 철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삶을 바꿔 보라!’ –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59]
§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 도덕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해 다시 가치 평가 하고자 한다.[60]
§ 니체가 ‘가치의 가치’라고 말했을 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가치는 전혀 다른 지위를 갖는다. 두 번째 항은 첫 번째 항의 생존방식,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가치가 표현하고 있는 기반에 대한 물음이다.[61]
§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은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62]
§ 도덕학자들은 진리를 다루는 철학자들과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열망. 이는 도덕 자체가 가치 판단 행위를 하는 영역이며, 칸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직접적인 실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62]
§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63]
§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63]
§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63]
§ 도덕에는 소심함 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63]
--à 인간이 얼마나 교육에 의해, 관습에 의해 규격화되고 일반화 되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규정했던 일반화가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질하다. 그렇다면 세상에 규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 니체는 도덕을 가르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64]
2. 계보학 2 - 탐사
§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에서는 무엇보다도 보편화를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65]
§ 문제는 역사학이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서 차이들을 난폭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현재는 과거의 후예일 뿐’이라는 주장이나 ‘현재야말로 과거의 목적’이라는 주장을 위해 사물들을 과도하게 단순화한다. 이런 역사학에 대해서라면 차라리 ‘비역사적인 것이나 초역사적인 것’이 해독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65]
§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65]
§ 니체의 도덕에 대한 연구는 일종의 유형학이며 지세학이다.[66]
3. 도덕의 자연사
§ 도덕학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도덕은 되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어는 만큼은 억압이다.”[69]
§ “도덕의 자연사”라고 붙였는데, 이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덕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역전. 자연과 비자연의 역전.[69]
§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안에도 가치를 심어 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속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본다.[69]
§ 인간(과 자연)의 도덕화, 그것이 바로 문제다.[70]
§ 니체는 ‘도덕의 자연사’를 이야기할 때 그는 ‘자연의 도덕사’가 꿈꾸는 선한 자연(루소의 자연)을 인정하지 않는다. 19세기가 18세기보다 조촐하나마 조금이라도 나아간 것이 있다면 자연의 비도덕성을 시인한 것이다. [70]
§ 소펜하우어가 주장한 가치 중에서 니체가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등릐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하고 신성시해서 ‘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니체는 ‘아주 근원적인 불신, 훨씬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론’이 자신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고 말한다.[73]
4. 강한 자와 선한 자
§ 호메로스는 선한 공통체 안에서 선은 유전되며, 그러한 훌륭한 토양에서는 악인이 생성될 수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73]
§ 강한자가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시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77]
§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78]
§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하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름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 억제하는 자신과 억재되는 자신이라는 분리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니체는 그 이유들 중의 하나로 언어의 유혹을 든다. ‘번개가 친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주어를 쓰고자 하는 유혹 때문에 ‘번개’와 ‘섬광’을 분리하고, ‘섬광’을 ‘번개’라는 주체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난다.[80]
§ 노예들, 약자들, 그들의 정신적 공격 본능이 밖을 발산되지 못할 때, 그 본능은 안으로 투사된다. 귀족들, 강자들이 사라졌다면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그건 바로 너다![81]
§ 이러한 기괴한 도덕에 강자들은 왜 패하고 말았는가? 어떻게 노예의 도덕이 지배적 도덕이 되었는가? 니체는 “피에 독을 탄 사건’이라고 부르는 일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83]
§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3]
§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이다. [84]
§ 그렇다면 능동적 힘에 대한 반동적 힘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 반동적 힘들이 모여 능동적 힘보다 더 큰 힘을 형성해서 능동적 힘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동적 힘의 승리는 능동적 힘을 자신에게 가담시킴으로써, 다시 말해서 능동적 힘에서 그 능력을 박탈해 반동적 힘으로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84]
§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 니체는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84]
6. 도덕이라는 동물원
§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는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86]
§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87]
7. 선악을 넘어서
§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안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88]
§ 스피노자를 통해서 우리는 도덕의 판단을 넘어선 곳에 덕에 대한 판단, 윤리적 판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에티카’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가치 판단이다.[89]
§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90]
§ 니체는 <에티카(윤리학)>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 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귀족와 노예, 거인과 난장이, 덕(윤리)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91]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세지
§ 해석학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다. 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필요할 경우 주석을 달아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해석자’이기도 했던 것이다.[92]
2. 진리의 해석학
§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95]
§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96]
§ 가이머는 “ 모든 조명이나 자기 계몽의 과정은 다른 측면들을 어둡게 하거나 모호하게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인간 존재의 운동을 신화에서 계몽으로 이어지는 단선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인간의 삶과 문화는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100]
§ 테일러는 무조건적 승인을 위한 토대로 “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101]
3. 스핑크스의 눈
§ 니체는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니체는 스핑크스의 눈을 빌어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내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103]
§ 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학 어는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다.[105]
§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혹은 동일화의 의지)를 발견하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존을 위한 하나의 투사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107]
§ 사고와 판단, 지각의 활동은 “동등의 것으로 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107]
§ 니체는 우리의 진리 주장이 “물건 하나를 덤불 뒤에 숨겨 놓은 다음에 그것을 그 자리에서 다시 찾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만약 내가 포유동물의 정의를 하고 나서 낙타 한마리를 본 뒤에 ‘봐라, 포유동물이다’라고 말한다면…….이 진리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다.”[108]
§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08]
4. 가치의 발명
§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는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108]
§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08]
§ 니체가 진리의 주관성을 계속해서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시주의는 상대주의와 혼돈되어 왔다. 신은 죽었으니 모든 것이 허용하고, 진리란 결국 개개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이 퍼져 있다. [110]
§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독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말하도록 요구 받는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언제까지나 학생을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아라.”[111]
§ 니체는 진리성을 경쟁하기 위해 하나의 견해를 제출한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112]
§ 사람들이 사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이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주장과 진리란 없다는 주장은 정반대의 것이지만 사실 수자 1과 0은 매우 큰 숫자 N에 비하면 아주 가까운 숫자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0에 가깝다.[112]
§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 지나치게 많이 배운자들의 해석은 너무 노쇠하다. “많이 배운 자들은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어버렸다. 오늘 모든 거리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속삭인다. ‘지혜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아무것도 욕망하지 말라.’
§ “ 창조하는 자를 그들은 가장 증오한다. 표들과 낡은 가치들을 부셔버리는 자, 파괴자를 그들은 범법자라고 부른다. 선한 자들은 말하자면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113]
§ 니체에게 과거와 전통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첫 번째 관점은 역사를 기념비적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골동품적 역사관. 이러한 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려고만 한다. 세 번째 관점은 비판적 방식.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해야 하다는 생각.
§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114]
§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114]
§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114]
§ 해석은 “결코 단순한 소란 피우기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발명이며, 세계를 그 둘레로 회전시키는 것이다.[115]
§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115]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즈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118]
§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119]
§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 우리는 아직 ‘수많는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장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120]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 시장을 능가할 효과적인 경제 체제나 대의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꿈꾸는 일이 불가능하게 될 때, 그래서 운동이나 사상의 목표가 좀 더 공정한 시장, 좀더 충실한 대의제로 전락하게 될 때 급진적 운동과 사상은 퇴조한다.[122]
§ 그러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 현재이 체제에 항변할 수 없다는 것이 급진적 이론과 실천을 퇴조시킨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니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122]
§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122]
§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123]
§ 니체는 우리 시대를 ‘정치적 영역의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국민들의 ‘군주적 본능’이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123]
§ 니체는 이 상황을 ‘국제적 화폐 은둔자들’과 관련 짓기도 했다. 그들은 “민족들의 군주적 본능을 해체하고, 정치를 ‘증권 시장과 국가, 사회의 수단’으로 오용하고, 자유주의적-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보편적으로 확대 시킨다.” 물론 그이 자유주의의 확산을 현대 화폐 경제의 결과로 보았다고 해서, 근대의 허무주의가 경제적 원인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다.[124]
§ 근대성이란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이다. 니체는 ‘근대성(현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이 붙은 소절에서 그것을 하나의 ‘쇠퇴 형식’이며 ‘소멸해 가는 것’이락 보았는데, 정치는 그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근대란, ‘정치적 쇠퇴형식’ 혹은 ‘정치적 소멸’이다.
§ ‘허무주의의 극복’이 철학이나 도덕의 과제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과제일 수 있는 이유는 ‘허무주의’가 바로 ‘정치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역의 위축’, ‘정치적 쇠퇴’야말로 근대 사회를 표현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 ‘근대 정치 비판’에서 비판이라는 말이 향하고 있는 곳은 정치라기 보다는 정치의 상실, 즉 근대성이다.[125]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 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근대 정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가령 최대다수의 행복, 사유 재산, 공공선, 진보, 자유와평등 등은 진리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 형이상학자들이 다수의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듯이 정치학자들은 보편적 가치의 토대가 없는 차이들은 혼란만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126]
§ 근대 정치는 이러한 창조와 평가. 세력들 및 권력에 대한 물음을 봉쇄하려 한다. 이러한 물음이 커다란 혼선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26]
§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127]
§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128]
§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129]
§ “너희가 국가, 그 새로은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131]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선험적인 개별화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하며, 사회적 관계에 우선한 완전한 인간을 단위로 삼는다. [132]
§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은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을 볼 수 가 없으며, 분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옴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고 말한다.[133]
§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133]
§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136]
§ 결국 이 외침은 사회주의의 실패, 정치의 쇠태와 연결되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승리로 연결된다.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 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 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137]
§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 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138]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 ‘체제(體制)’ 라는 말은 한자풀이 그대로 ‘신체를 통제한다’라는 뜻이다.[139]
§ 다이어트라는 말과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비율이라는 단어와 합리성이라는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성’의 중시이다.[140]
§ 시공간적 분절화와 비율화를 통해서 통제하고 관리하고자 했던 힘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사회적 의미는 어떤 것일까?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141]
§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 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141]
§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142]
§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142]
§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143]
§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144]
5. 아곤의 정치
§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제이다.[146]
§ 주변 국가들과 함께 경쟁 않고 발전할 수 없게 되자마자 밖을 향했던 에너지는 안을 향하게 되고, 아곤은 무너지고 안타곤의 사회가 된 것이다. 니체는 이때부터 그리스국가가 초월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하여 잔인해졌고, 그리스인들과 함께 타락했다고 주장한다.[150]
§ 무엇보다도 아곤적 체제가 일종의 전쟁이 아니었는가? 아곤의 전쟁적 요소가 초월적인 권력의 출연을 막아온 것은 아닌가? 고대인들은 왜 군사적 수호신을 계속해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까? 그것은 바로 전쟁을 멈추는 굿에서 하나의 우상이 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아곤이라는 치열한 경쟁이 멈추는 곳에서 법과 제도의 초월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151]
§ 니체의 경고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 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152]
§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을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152]
제 5장 권력의지와 영원 회귀(1)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 니체는 원자론을 이렇게 비꼬았다. “저울에 달아보아 차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석탄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을 공상해야 했던 것 아닌가?[155]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159]
§ 힘의 두 번째 특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 사용의 극대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남겨두지 않는 힘의 속성을 절묘하게 드러냈다.[159]
§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이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161]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 힘을 사유했던 니체 역시 자연과학적 법칙화에 반대했다. 니체에게 중력은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164]
§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를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164]
§ 힘 안에 있는 ‘내적의지’는 힘의 질을 규정한다. 이 ‘내적 으지’의 본질은 ‘지배와 명령’에 있다. 모든 힘은 자신의 방향과 작동방빗을 다른 힘에 명령한다.[164]
§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힘 안에 내재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이다.[165]
§ 힘에 들어 있는 ‘내적 의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힘의 질이다. ‘힘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질을 가지고 행사되는가?’ 는 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165]
§ 양적인 차이에서도 우리는 힘의 내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165]
§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
§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167]
§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167]
§ 능동적 힘 역시 반동적 힘의 질을 변화시킨다. 능동은 “반동을 뒤로 밀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듯” 자기 능력의 한계까지 나아간다. 능동적 힘은 “정면에서 공격한다.”: 이때의 능동적 힘 역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168]
§ 결국 우리는 힘들이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 다시 말해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169]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 쇼펜하우어의 생각과는 달리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171]
§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171]
§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은 ‘권력을 향한 의지’로 읽히게 한다. 이러한 오해를 ‘무엇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고, 그 의지를 대상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확인된다.[172]
§ 둘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티푸스>에서 욕망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정의를 구분하는데, 첫번째 정의는 욕망을 획득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이 욕망이라는 것.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
§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172]
§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진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173]
§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173]
§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173]
§ 니체는 이제 허무주의 역시 하나의 권력의지이며 지배의지라고 말한다.[174]
§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174]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 니체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용어들은 다양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176]
§ 긍정의 권력의지는 행위 자체를 촉진시키며 더욱이 지속적 행동을 강조한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증오나 반감도 없이 오늘은 이것이, 내일은 저것이, 마치 공기의 가벼운 흔들림으로도 떨어지는 노란 나뭇잎들처럼 자신에게 이별을 고해간다. 어쩌면 이것은 이별을 고하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176]
§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176]
§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177]
§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177]
§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이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 육체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이 권력느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177]
§ “행복의 최초 효과는 권력 느낌이다. 이 권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대해서든, 상상에 의해서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178]
§ “권력 느낌’이 권력으지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지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육체가 권력의지를 경험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행사함을 통해서다.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육체. 육체는 자신의 감수성, 민감성을 드러내고 행사한다.[178]
§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179]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 자연학 + 윤리학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 영원 불멸하는 존재란 미신 속에서나 존재할 뿐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181]
§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182]
§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182]
§ 생성이 침범할 수 없는 존재란 무엇일까? 특성을 가진 존재들은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피할 길이 없다. 소멸의 여지가 있는 어떤 특성도 갖지 않는 존재만이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면서 영원 불멸할 수 있는 원존재가 될 수 있다.[184]
§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떤 철학자들의 무리와도 뒤섞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로 생각했다.[184]
§ 헤라클레이토스는 무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성의 세계만 존재한다고 선언한다.[185]
§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186]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익숙한 오해
§ 새로운 생성이 이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영원 불멸하는 곳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사실상 사물들이 벌이는 생성에 다름 아니다.[178]
§ 니체가 강조했던 것은 ‘동일한 결합관계’가 아니라 ‘자주 반복되는 놀이’였다. 니체는 기계론자들의 해석에 반대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 그 놀이라는 ‘순환 놀이’를 즐기고 있는 세계”로서 영원회귀를 묘사했다.[188]
§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성의 세계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학자들처럼 동일한 것이 언제 출현할지 계산하고 있을게 아니다.[188]
§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터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 놀이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고 등장하는 놀이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가 대해선 잘 알기 못하기 때문이다.[188]
§ 영원회귀를 하나의 과학적인 법칙으로서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영원회귀가 의지의 문제,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문제라는 점이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들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191]
§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번 더!”라고 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가 삶의 구원이다.[191]
§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생성의 존재의 성격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191]
§ 영원회귀란 존재의 세계를 생성의 세계로 만드는, 혹은 “그것들을 근접시켜” 이해하는 표현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인 생성의 세계이며, 존재의 세계에 대한 극한적 근접이다.” 이로부터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192]
§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193]
§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193]
3. 반복의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196]
§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196]
§ 들뢰즈는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미래)이다.”[197]
§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197]
§ 영원회귀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이름이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럼 변하게 하면 된다! 세상이 영원 회귀하지 않는다고? 그럼 영원회귀하게 만들면 된다![199]
§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200]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201]
§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작은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된다.[201]
§ 니체의 신체도 긍정을 완벽하게 이해한 뒤에 변화했다. 더 좋은 맛을 느끼기 위해 적절히 단식을 하는 것, 일정하게 모험을 즐기는 것 등은 자신의 건강을 강화시티는 수단이 된다. 그의 금욕은 괴로운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즐겁게 향유하는 과정이다.[202]
§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203]
§ 우리는 긍정이 단순히 “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니체는 ‘부정과 파괴야 말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의 사명에 대한 전제 조건은 망치의 단단함, 파괴에서 느끼는 기쁨이다.”
§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위계가 나타난다. 긍정은 부정보다 강력하다. “친구여! 그대들 속에 숨겨져 있는 저 ‘긍정”은 그대들의 시대적 병인 저 모든 ‘부정’보다 더 강력하다.”[203]
§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204]
§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204]
§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 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204]
§ 이로써 긍정이 들어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205]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 떨어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느낌을 만들고 던져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힘을 표출한다. 결국 주사위 놀이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이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207]
§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207]
§ 긍정의 권력의지가 벌이는 차이의 놀이를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다수성이다. 다수성은 하나와 다른 하나의 차이이다. 두 번째의 차원은 자신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은 자기와 자기의 차이다. 주제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다. 세 번째 차원은 우연이다. 우연이란 차이가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207]
§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208]
§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세계는 자신을 다수성으로 운명애로, 우발성으로 드러낸다.[208]
§ 이제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 ‘선택의 문제’다.[208]
§ 왜 어린아이들은 영원회귀의 놀이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위한, 가장 큰 격려, 그것은 영원회귀라는 윤리적 선택이 도덕적 명령처럼 힘든 노동이나 고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 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209]
§ “모든 쾌락은 안에서는 원환(圓環)의 의지가 꿈틀거린다.”[209]
§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 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게, 영원회귀의 유혹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209]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과(…….and…….)'
§ 인간은 세계를 인식한다고 말하지만 그때의 인식이란 사실상 ‘사물들의 등을 더듬는 놀이’에 불과하다. 그라나 인간은 세계를 측량하기 위해 자신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 참으로 인간은 측량하는 동물이다! “인간이라는 말은 ……측량자를 뜻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212]
§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이 동물로부터 문화를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213]
§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발한다.[213]
§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 자신의 해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우리’로 불리는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은 인식과 욕망에 있어 보편적인 척도를 갖는다. 이 때문에 푸코는 칸트의 시대인 19세기야말로 인간의 시대라고 말한다.[214]
§ 그러나 인간이 하나의 보편적인 척도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척도가 자연을 잴 수 있는 올바른 척도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곤충이나 새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지각한다.[215]
§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사이에 끼어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215]
2. 진화와 변신
§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 두었다.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이다.[216]
§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216]
§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진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의 목적임을 증명하려고 한다.[217]
§ 인간은 모든 생물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과 ‘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217]
§ )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지인, 강자, 귀족, 주인, 어린아이다. 어떻게 거인과 어린아이는 같은 종족이 될 수 있을까? ‘같은’것은 힘과 권력의지의 종류이고 존재방식으로서의 영원회귀다.[221]
§ 만약 초인이 생성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221]
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리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222]
§ 천국이란 믿음(신앙)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222]
§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223]
§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223]
§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이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인간은 신앙이 사라진 시대의 ‘무신앙’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다.[224]
§ 모든 옛 신들이 황혼 속에서 슬픈 죽음을 맞이 했던 것은 아니다.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225]
§ 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225]
4. 보다 높은 인간들
§ 만찬이 열리고 신의 죽음과 초인의 출현에 대해 짜라투스트라가 말한다. “이제 인간의 미래라는 산이 진통을 겪고 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원한다. 초인이 살게 되기를.”[229]
§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 밤은 거대한 변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탄생한 것은 초인이 아니라 새로운 신이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나귀를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제의를 올린 것이다.[229]
§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친다.[230]
§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서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하지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231]
§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두 자기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231]
§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번 더’ 라고 말하는 것이다.[231]
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 왜 보다 놓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232]
§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른다.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232]
§ 웃음은 초인의 건강을 의미한다.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짜라투스트라가 권유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워라!.......그대들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배워라’ 웃는 것을.”[232]
§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짜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232]
§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 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뛰기와 넓이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233]
§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며 영원회귀하는 신이다.[233]
§ 차라투스트라에거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요청한다. 영원회귀 하지 못하면 긍정은 그 질을 박탈당한다.[234]
§ 그러나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한다. 영원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화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 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234]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졌다. “사람을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238]
§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꿨으며 전투를 수행한다.[238]
§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239]
§ 니체의 독자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 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소화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하는 괴물! [239]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 니체, 그는 우리에게 변신의 힘, 그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린다. 그의 저서를 시간적으로 배열해서 읽어보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한 힘의 발전과 변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240]
3. 화약냄새가 사라진 전투
§ 시간은 단절된다. 1878년부터 1881년 사이에 그는 중요한 변신을 경험한다. 1881년의 <서광>과1882년의 <즐거운 지식>. “전투에서는 더 이상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다. 자시의 후각이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그것과는 다른 훨씬 사랑스런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부정을 행하고 있지만, 그 수단도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245]
§ 프로방스의 자유 분방한 무희가 이 책들을 휘 젖고 다니다. “이곳이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춤춰라!" 니체는 비로소 자신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245]
§ <차라투스트라>는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니체는 이 책이 완성된 시각이 바그너가 죽은 시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공표했다.[246]
§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적 메시지가 들어있다.[246]
4. 모든 가치의 전환
§ 긍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부정 역시 새롭게 이해되었다.[247]
§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다.[248]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서명이 붙어 있는 전하는 메시지도 이제 “니체씨로부터 떠나라” 는 것이다.[251]
§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252]
§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53]
§ 이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253]
§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는 여행자이다.[253]
▣ 내가 저자라면
어렵지만 마음이 환해 지는 책이다. 또 다른 생각 주머니가 머리 속에 생기는 기분이다. 모든 일에 대해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임해야 함을 강조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철학 책은 많이 읽지 않는 터라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명제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하고, 책을 덮을 쯤이면 앞으로는 철학적 사고를 하고 살기를 권하는 책이다.
철학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왜 철학적 사고를 하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는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철학적 개념이겠지만 개인의 철학에도 잘 적용되는 정의 같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 낼 줄 알고 위험한 주장도 들어볼 수 있는, 추론하기 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하는 그가 말한 괴물 같은 독자가 되고자 했으나 그 깊이에 도달하기엔 역부족이다.
니체에 접근하기
저자는 니체의 모든 책을 읽고, 철학적 흐름을 꿰고서 니체의 철학 사상에 대해 힘있는 문제로 잘 풀어 놓았다. 니체의 생애에 대한 내용 없이 니체의 모든 책을 넘나들며 풀이해 놓아 머리가 아팠지만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책꽂이에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꽂혀 있는데 이제 쉽게 접근하여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니체의 계보학과 해석학에 대한 부분은 난해했지만 4장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은 흥미로웠고 5장과 6장의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부분은 가슴이 들뜨도록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천제 철학자 니체는 어떻게 시대를 뒤집는, 시대를 앞서가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 놀랍고 그만큼 외롭게 살다간 생애가 안타깝다.
§ 니체는 철학을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에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31]
§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을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리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니체의 철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56]
§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인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를 생철학자라 한다. 그의 철학은 살아가는데 힘을 준다. 좀더 힘껏 내 의지대로,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삶을 사랑하게끔 한다. 종교에 구속되지도 말고, 보편적이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도덕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라고 한다.
§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름 사람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너무나 유명한 “니체-신은 죽었다” 종교의 힘이 강력했던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한 그 때에 신에 대한 부정을,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할 수 있었던 니체.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함에도 죽은 신을 숭배한다.
§ 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225]
나는 그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스스로 자신을 일으키며 의지를 가지고 살아 갈수 있는 사람인지, 초인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아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는 신 자체를 부정한다. 나 또한 그렇다. 사람의 내면에 신성이 있다고 믿는다. 종교가 인간의 삶과 의식을 구속하는 범위로 넘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내가 얼마나 교육에 의해, 관습에 의해 규격화되고 일반화 되었는지 알을 알았다. 국가가 주입하는 틀 안에서 사고하고 그 시스템 대로 움직이며 얼마나 잘 길들여졌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규정했던 일반화가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질 하다. 그렇다면 세상에 규정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광인이 되어야만 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살수 있단 말인가. 니체가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라고 한 말이 참으로 머리를 때린다.
그 동안 나의 머리를 내가 소유했음에도 남들이 판단해 주기를, 국가가, 사회가 대신 생각해주는 대로 살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생각하기가 이렇게 힘든 세상이다. 내 생각을 가지기가 힘든 세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현대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기엔 인생이 아깝다고 가끔 생각하지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론내기까지 끈기를 가지지 못할 뿐 더러 너무나 머리 아파한다. 이것이 시대의 문제일까? 예전에는 종교가 사람들의 생각을 길들였다면 요금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그런 것인가.
민주주의와 세계화에 대하여
§ 니체는 이 상황을 ‘국제적 화폐 은둔자들’과 관련 짓기도 했다. 그들은 “민족들의 군주적 본능을 해체하고, 정치를 ‘증권 시장과 국가, 사회의 수단’으로 오용하고, 자유주의적-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보편적으로 확대 시킨다.”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서 1800년 그 시대에 국가의 영역이 흐려지고 기업의 힘이 확대되는 세계화를 내다본 듯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 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138]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작용에 대해서 빈부의 격자 정도로 생각했지 개인의 생각을 박탈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사회주의와 갈라서 있는 분단 나라에서 반공 교육에 잘 길들여졌나 보다. 민주주의가 최상인줄 알았는데 이 체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얼마나 관습에 윤리에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보편성 아래에 묻히지 않는 자유로인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아를 가져야 할 때다.
긍정적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번 더!”라고 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가 삶의 구원이다.
§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생성의 존재의 성격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191]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부분을 읽으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살아 있음으로 욕망을 획득하든 넘치는 욕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든 권력의지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의 놀이처럼 즐거움이 되어 영원회귀하는 에너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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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천 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 | 희산 | 2009.11.09 | 3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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