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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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하여
신영복
1941년 경남 밀양 생.
홈페이지 ‘더불어숲’ http://www.shinyoungbok.pe.kr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육사에서 교관으로 있던 엘리트 지식인이었던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 전주 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하다가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독 등을 강의하고 있다.
1998년 3월, 출소 10년 만에 사면 복권되었다.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2007년 정년퇴임을 하고 현재 석좌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딸들아 일어나라 노래하라(1990.6)
손잡고 더불어(1995.3)
나무야 나무야(1996.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98.8)
더불어숲1, 2 (합본: 2003.4) (1998.6/1)
신영복의 엽서(2003.12)
신영복(2003.11)
강의(2003.12)
신영복 함께 읽기(2006.8)
처음처럼(2007.2)
여럿이 함께(2007.5)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같이 써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를 묶은 산문집으로,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진솔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번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루쉰전-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공역, 1992)
중국역대시가선집 전 4권 (공역, 1994.4)
사람아 아, 사람아!(1991년 초판, 2005 재출간)
등이 있다.
<저자에 대하여>를 참 나답지 않게 썼다. 사실 이번 주의 목표는 그의 대표 저작을 한두 권 더 읽어 그에 대한 이해를 넓힌 뒤 멋지게 저자 조사를 해내는 거였다. 그러나 아뿔싸! 500페이지가 넘는 <강의>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그의 책은 추후 독파하고, 저자에 대해 조금 더 배운 뒤 보완하도록 하겠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몇 마디 말로 재단하기에 그는 너무 큰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
이 책은 신영복 선생이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 강독’이라는 강좌명으로 진행했던 강의를 정리한 것으로 모두 1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의 한 학기가 보통 14~16학기로 이뤄져 있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빼면 12~14주, 입문의 첫 주를 두 주에 걸쳐 했다면 거의 딱 들어맞는 한 학기 구성이다.) 1장은 입문 단계인 서론이며, 2장은 오래된 시와 언, 3장은 주역, 4장은 논어, 5장 맹자, 6장 노자, 7장 장자, 8장은 묵자, 9장은 순자, 10장은 한비자의 법가, 11장은 강의를 마치며 불교와 신유학, 대학과 중용, 양명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그러나 ‘고전을 읽는 방법이 일반적인 고전 연구서와 다르기 때문에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란 부제를 달았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나치게 겸손한 저자
저자는 ‘책을 내면서’에서 겸손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책을 출판하면서 늘 부담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저자’라는 호칭입니다. 특히 이 책은 그렇습니다. (중략) 풀이한 것일 뿐 무엇 하나 지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의 탁월하고 차별화된 해석에 ‘이건 그가 쓴 책 맞는데’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책이 좀 더 일찍 나왔더라면!
이 책이 처음 선보인 것은 지난 2004년 12월 13일. 책을 읽으며 내내 ‘이런 책이 내가 중고등학생 때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책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요즘 학생 세대도 참으로 복 받았다는 부러움도 들었다. (과연 그들이 이 두꺼운 책을 읽으려 들지, 읽을 시간도 없다고 생각할지는 미지수지만.) 딱딱한 윤리도덕 교과서의 사상가들이 아니라 현대적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는 힘, 이 강의에 들어 있다. 물론 지금이라도 이 책을 읽고, 때때로 이 책을 뒤적여 익힐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행운이라 생각한다.
‘서당’이 사라진 시대에 서당의 역할을 해 줄 책
이상하게도 나는 <서당>에 끌린다. 지리산에 들어가 한복을 입고 서당 체험을 하는 것을 초등학생 때부터 동경했고, 직장을 잡고 사회인이 된 다음에는 어린시절 <서당>에서 고전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그래서 스스로 ‘고전 읽기 프로젝트’를 해 보겠다며 <논어>부터 사다 읽고 재미있어 했었는데, 아쉽게도 꾸준히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 이런 친절한 가이드북을 옆에 두고, 한 권씩 읽어나가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먼저 읽어야 할지조차 어렵게 느껴지던 고전에 대한 개괄적 틀을 잡는데 매우 도움이 된 책이라 감사를 전하고 싶다.
지금도 살아 숨쉬기에 <고전>
신영복 선생은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1)”라고 말한다. 실제 이 책은 최근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그 어떤 책보다 탁월한 견해를 내보이고 있다. 현대 사회의 당면 과제인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을 통해 재조명되며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다. 경제학 전공 진보적 시각을 가진 저자의 내공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를 부끄럽게 한 ‘관계론’
그가 서양의 존재론과 대비하여 꾸준히 대두시키는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관계론’이다. 지난 11월 오프수업을 통해 나는 사부님에게서 ‘개인과 사회의 연결’이라는 중요한 사명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와 사회의 연결을 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 할 일이 있다. 인위적으로 끊어내다시피 했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십 수 년간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의 사고를 해왔다. 아니, 평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엄청난 반성을 했다. 적어도 내가 마음을 바꾸어 먹으면 무엇이든 조금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다시, 또 다시
나는 대학 생활을 참 치열하게 했다. 생존을 위해 등 떠밀려 진학한 대학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내가 ‘잃어버린 내 학창시절’을 말할 때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생활’도 포함된다. 10년 전이었지만 1학년 때부터 요즘의 대학생들보다 더 치열하게 사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해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깊이 있는, 나의 기본을 만들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콤플렉스로 남아 있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 기본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고전읽기 프로젝트’ 따위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연구원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기본부터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에서 언급되듯 웅덩이에 걸려 넘어지면 그곳을 메우고 나가는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매주 밀려오는 과제도서에 치여 단단하게 다지고 넘어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첫 술에 배부르랴. 올해가 며칠 남지 않은 지금 와서 깨닫는 것은, 내년에도 후년에도 올해 가슴을 후벼판 이런 책들을 제대로 다시 읽어야 ‘되돌이표’를 하지 않을 거라는 어슴푸레한 느낌이다.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이 책은 그동안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 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해왔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5)
책을 출판하면서 늘 부담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저자’라는 호칭입니다. 특히 이 책은 그렇습니다. (중략) 풀이한 것일 뿐 무엇 하나 지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6)
1. 서론
유년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6)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16)
내가 엄청난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19)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1)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3)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중략)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24)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6)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중략)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30)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중략)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32)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성찰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2)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33)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중략)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6)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37)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39)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중략)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에 견제하고 사후에 지양하는 체계가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입니다. (43~44)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45)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5)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46~47)
2장 오래된 시와 언 『시경』詩經 『서경』書經 『초사』楚辭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중략)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52)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53)
문학의 길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56)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4~65)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66)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68)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2)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75)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76)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77)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82)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 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목할 수 있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83)
3장 『주역』의 관계론 『주역』周易
『주역』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중략)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87)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고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89)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도니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90)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저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시대입니다. (중략)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90~91)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고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92)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101)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03)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103)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7)
어쨌든 결과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당했지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히는 것이지요. (119)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4)
동양 사상에서는 지와 음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중략)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126)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논어』論語
『노자』에는 노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137)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137)
크게 보아 춘추전국시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중략)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중략)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와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중략)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이고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138~140)
중국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온 사상이 바로 유가 사상이고 그 중심이 공자이고 『논어』입니다. (140)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141)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144)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145)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149)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 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중략)
우리는 막스 베버의 논리가 자본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중략)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151)
미소와 보조개와 검은 눈동자 같은 미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인간적인 바탕이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입니다. (157)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159)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중략)
세계는 통체적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 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161)
『논어』의 이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62)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략)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65)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중략)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165)
이 ‘마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8)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2)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답변에 공통되는 점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173)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4)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175)
우리가 이 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에 대한 반성입니다. 부의 형성 과정이 정당한 것인가, 그 사람의 출세가 그 능력에 따른 정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177)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2)
지보다는 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사람이란 지혜롭기보다는 어리석기가 어렵습니다.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185)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나는 것이지요. (186)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7)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189)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0)
5장 맹자의 의 『맹자』孟子
대체로 공자 사후 약 100년 뒤에 산동성 남부 추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211)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략)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2)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3)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중략)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서당에서는 『맹자』로써 문리를 틔운다고 합니다. (213)
단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5)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7)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232)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33~234)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242)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44)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245)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이 그것을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중략)
석봉의 어머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만을 만들어주는 맹모에 비해서도 훨씬 뛰어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248)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老子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3)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253~254)
인의예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255)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259)
『노자』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운문입니다. (중략)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중략)
현대 서구 사상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노자』 강의가 질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61~262)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 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지요. (264)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269)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272~273)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273)
아름다움은 가까이하고 싶은 가치로 규정하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꺼리는 것, 혐오스러운 것으로 규정합니다. (중략) 선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도 미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시대에 갇혀 있고 사회적으로 갇혀 있지요. (274)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277)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280)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281)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282)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283)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284~285)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 (288)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294)
귀언은 물론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공성사수, 즉 일이 성취되더라도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이룩한 일을 생색내지 않는 것입니다. (296)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302)
노자 사상은 장자, 열자 들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304)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305)
7장 장자의 소요 『장자』莊子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중략)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 (310~311)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316)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하고 일소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317)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319)
생각건대 인의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326)
동양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330)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331)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경쟁력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340)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墨子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은 비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가는 유가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 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362)
학파 간의 차이는 접근로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지금부터 다루게 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에 대해서는 그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강조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363)
공자 다음으로 그 인간적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사람이 아마 묵자일 것입니다. (364)
『묵자』가 대화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면모가 분명하게 보이는 까닭은 묵자는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는 물론이며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층민의 이미지입니다. (중략)
둘째로는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하는 모습입니다.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입니다. (364~365)
『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해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습니다. (367)
『묵자』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문장이 간결하고, 쓸데없는 설명 즉 일체의 논변이 없기 때문입니다. (368)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370)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74)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중략) 성경 구절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음이 놀랍습니다. 비단 이 예시 문안뿐만 아니라 묵자의 하느님 사상은 기독교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376)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파괴와 처참한 죽음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를 살리는 자본 축적의 돌파구가 되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383)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 축적 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390)
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391)
이처럼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393)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9)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荀子
그의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남아 있는 자료는 매우 소략합니다. 그가 유가의 이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404)
순자는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중략)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405)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405)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거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409)
인간의 적극 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409)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14)
거슬러 올라가면 이기적 인간 본성론은 근대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 논리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이고, 자본 축적 논리입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담론이지요. (416)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7)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419)
순자는 이미 사람은 예의와 분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매우 긍정적인 인간관을 피력해두고 있습니다. (421)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23)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개량주의적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입니다. 훌륭한 규범과 제도가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424~425)
여러분에게는 순자의 이와 같은 진보적이고 신선한 관점이 매우 놀라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논의와 비교해보더라도 그 선도가 떨어지는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충격인 것은 그에게 일관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입니다. (중략)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보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에게서 훨씬 더 깊이 있는 인간주의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425)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426)
10장 법가와 천하통일 『한비자』韓非子
법가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중략)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1)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33)
순자의 성악설과 후왕 사상이 제자인 한비자에게 계승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435)
뒤에 시황제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 『오두』 같은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했다고 합니다. (437)
한비자는 눌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따르지 못했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437)
11장 강의를 마치며 불교佛敎, 신유학新儒學, 『대학』大學, 『중용』中庸, 양명학陽明學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474)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475)
송대에 이르러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까닭은 훈고학 일변도의 한나라 유학이 침체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480)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482)
『대학』은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려는 당대 인텔리들의 고뇌에 찬 선언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492)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4)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508)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09)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중략)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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