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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30일 11시 24분 등록


“현대물리학과 동양 사상” –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김용정,이성범 역/ 범양사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박사는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이다. 1966년 빈 대학교에서 이론 물리에 대한 연구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 뒤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직에 있으면서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소립자 연구를 계속했다.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카프라 박사는 지난 30여년 동안 현대 과학의 철학적, 사회적 연관 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왔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카프라 박사는 본 저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을 시작으로 하여,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히든 커넥션(Hidden Connections)> 등의 저서를 연속적으로 출간하였다. 카프라 박사는 본 저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1975)을 통해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유사성과 유기적 세계관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는 세계관이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형평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386]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출간 이후 약 6년 간에 걸친 강연과 연구를 통해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한 변혁적 세계관에 대한 고찰을 생물학, 의학, 심리학, 경제학 등의 학문 분야로 넓혀서 살펴 본 결과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1982)라는 책으로 출간했다(카프라 박사는 이를 서문에서 적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세계관의 변화와 인식구조의 변환이 이들 학문 분야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나고 있음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은 미국 및 유럽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어 전세계의 과학계와 사상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신과학 운동, 신생활 운동 등을 촉발하게 하였다고 한다. 뒤를 이은 <탁월한 지혜>(1988)에서는 그가 연구 과정에서 책을 통해 혹은 실제로 만나 교류했던 다양한 선각자적 사상가들(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제프리 츄, 크리슈나무르티, 앨런 와츠, 인디라 간디 여사 등)과의 대화 내용과 그를 통한 지적 통찰을 인물별로 분류하여 제시하고 있다. <생명의 그물>(1996)에서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통해 생명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그에 기반 한 프레임웍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히든 커넥션>(2002)에서는 복잡계 이론에서 밝혀낸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사회 분야로 확대하여, 생명의 생물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 그리고 사회적 차원을 통합시키는 개념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인간 조직의 관리, 경제적 글로벌화의 도전과 문제점, 바이오 기술의 사회적/도덕적 이슈 등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카프라 박사의 공식적인 홈 페이지는 http://www.fritjofcapra.net 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2 판 역자 서문

 

카프라 박사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하는데 주력한 것이다. 즉, 20세기에 물리학이 다루게 된 극대 세계와 극미 세계의 현상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그 기계론적 자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그는 역설한다. 기계에서는 정태적으로 분리된 각 부분의 작동이 전체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유기체에서는 역동적인 부분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부분은 전체의 필요에 따라 역할하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7]

 

서구 문명을 과거 300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에서 다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에서 생멸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8]

 

카프라 박사는 오늘의 산업 문명이 중병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객관적 지식의 대가로, 가치 문제를 소홀히 한 가치 중립의 과학에도 책임이 있다 하여 오늘의 서구 학계에 맹성을 촉구하고 있다.[8]

 

1 판 역자 서문

 

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10]

 

고전 물리학을 키워 기본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11]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고전 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였다.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 없이 ‘거기 존재해’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인 수량적 제 속성의 파악에 물리학은 전력을 기울여 왔다. 반면 동양 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11]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으로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순수 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12]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쳔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찰자의 설문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주고, 어떠한 대답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은 그 관찰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로써 양자 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12,13]

 

현대 물리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적 동양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13]

 

저자는 이 책에서 힌두교, 불교, 도교, 역사상 등 동양 사상을 통틀어서 신비주의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란 마술을 행하거나 기적을 바란다는 뜻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일 것이다. 일체를 시공 4차원적인 변화의 견지에서 보는 동양 사상은 3차원적인 논리로는 적절하게 해설할 수 없으므로 그로서는 신비주의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질의 궁극체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며, 물질적 존재란 전일적인 것의 한 과정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자연관은 동양 사상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14]

 

현대물리학이 제시하는 미시 세계의 자연상은 활기에 넘치고 신비에 싸인 극적인 서사시와 같은 인상을 줄 것이고, 상상을 절하는 우주 공간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핵반응으로 별들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현상은 우주 창조의 새로운 신화처럼 들릴 것이다.[14]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15]

 

고전 물리학을 뒤따른 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수반한 결정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경시하는 풍조를 일게 했으며,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심화되는 이 물심의 불균형은 드디어 현대 문명에 난치의 중병을 초래한 것이다. 현대 문명의 중병을 진단한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조화를 되찾으라고 충고하지만, 이미 분별지를 발전시켜 고도의 기술 사회를 이루어 놓은 현대인에게는 낙원을 지키는 불칼이 없다 해도 자연의 동산에의 단순 회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물심의 조화의 달성이 지난한 것이며 지름길은 없다 해도 이 책에서의 물질관의 새로운 검토가 출발점은 될 수 있을 것이다.[17]

 

2 판 저자 머리말

 

이 책을 집필하면서 떄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 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쓰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19]

 

나는 중국의 음양 사상이 그와 같은 불균형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양 문화는 꾸준히 양 또는 남성적 가치와 태도를 선호해 왔고, 그와는 상보적으로 대립하는 음을 가벼이 보았다. 서양인들은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 종교 보다는 과학, 협동 보다는 경쟁, 보전 보다는 확장에 편중해 왔다. 이 같은 일방적인 발전은 이제 극히 위험한 단계, 즉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20]

 

그러나 동시에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하여 물러난다”는 중국의 옛 격언을 예증하는 거대한 진화 운동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20]

 

그들은 모두가 합리적 남성적 자세와 가치의 과대 평가에 대항하여 인간 본성의 남성과 여성적 측면 간의 균형을 되찾으려 한다. 이리하여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이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이 출현하게 된다.[21]

 

현대 물리학은 가치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지워진다. 그들의 연구를 추진 시키는 보다 큰 틀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21]

 

이 시대에 부처의 길, ‘가슴이 있는 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22]

 

동양 신비주의와의 유사성은 물리학에 그치지 않고 생물학, 심리학과 그 밖의 과학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주제들은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시스템 이론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개념을 다른 분야로 자연스럽게 확대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에 따라 시스템 접근 방법이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성을 크게 강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22]

 

1 판 저자 머리말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나는 그 때 수 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4]

 

나는 양자 이론의 불가사의를 연상시키는 선의 불가사의함에 특히 이끌렸다.[25]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듦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일이다.[26]

 

1 부 : 물리학의 길

 

1장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을 소용없는 것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 후앙의 가르침> [33]

 

현대 물리학의 영향권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서 우주에 대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대 수정을 가하게끔 했다.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아이디어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34]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실험과 엄밀하고도 일관성 있는 수학적 형식주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37]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 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000년 동안이나 서구 우주관의 기초가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다. [39]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되었다.[39]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40]

 

정신/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나타났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이 ‘데카르트적’인 분할은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군집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40]

 

데카르트의 철학은 오늘까지도 서양의 일반적 사고 방식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음은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40]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 그것은 자연 자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분배시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41]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41]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어떤 종파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 – 개오라고 부르는 –은 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체득이다. 그러므로 동양적인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는 것이다.[41,42]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44]

 

2장   아는 것과 보는 것

 

우리는 먼저 현대 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명된 정밀 과학과, 주로 명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들의 직관은 언어로써 전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신적 수련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45]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 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루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지식이 자주 평가절하되었고, 반면에 동양의 전통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와는 정반대이다.[46]

 

합리적 지식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 환경에서 그 대상과 사건들을 경험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식별하고 분리하여 비교하고 측정하여 범주화 하는 기능을 가진 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적 분별의 세계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상호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립자의 세계이다. 추상화는 이런 지식의 결정적인 특성이다.[47]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48]

 

불교의 선사들은 달을 가리키기 위하여 손가락이 필요한 것이지, 일단 달을 알아본 다음에는 그 손가락 때문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느냐고 말한다.[48]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 도가의 현자 ‘장주’ [48]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 알프레드 코지프스키 [49]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궁극적인 실재는 추론, 즉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49]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도덕경> [50]

 

절대지란 이렇게 전적으로 실재의 비지성적인 체험인데, 이것은 ‘명상적’ 또는 신비적 상태라고 불릴 수 있는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50]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깨어 있는 의식은 실상 의식의 한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얇은 스크린에 의해서 분리된, 그 건너 저편엔 전혀 다른 의식의 잠재 형태가 가로누워 있는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50]

 

물리학에서 지식은 3단계의 진행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인 연구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다. 1단계는 설명해야 할 현상에 관한 경험적 실증을 수집하는 일이다. 2단계에서는 경험적 사실들이 수학적 상징으로 연관되며, 이러한 상징들이 정밀하고 일관성 있게 상호 연결되어 수학적 체계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를 보통 수학적 모형 또는 그것이 더욱 포괄적일 때는 하나의 이론이라 부른다. 이것을 수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수학적 체계를 통상 언어로 해석하는 모델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러한 언어적 모델을 만드는 것이 연구의 제 3단계가 되는 것이다.[51]

 

보통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허심할 때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52]

 

그러나 직관적인 통찰은 그것이 일관성 있는 수학적 체계로 형성되고 일상 언어로 해석되어 보완되지 않는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이다.[52]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55]

 

불교에서 생장해 나왔으나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종은 문자에 서지 않고, 언어를 끊고, 지혜 없는, 지식 없이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개오의 증험에 집중하며, 이 증험을 해석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선의 명구가 있다. “네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 표적을 잃어 버린다.”[55]

 

동양 신비주의에서 모든 지식은 이러한 체험의 기반 위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동양적 전통은 그 지지자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강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55]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는 계절과 인과 관계를 보아야만 한다.”[56]

 

심오한 신비적 경험도 대체로 경험을 축적한 대가의 지도 아래 다년간의 수련을 요하지만 과학 수련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바친 시간만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누군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는 그 ‘실험을 반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경험의 반복이야말로 실제로 모든 신비한 수련에 필수적인 것이며, 신비가들의 정신적 지도의 목표인 것이다.[58]

 

선불교의 학도들은 그네들의 ‘본래 면목’을 되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이 본래 면목을 돌연히 ‘기억해 내는 일’이 곧 개오인 것이다.[59]

 

직관적인 통찰이 익살의 밑바탕을 순간적으로 꿰뚫을 때에만 우리는 그 익살이 의도했던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통찰과 농담의 이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오한 인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을 터이다.[60]

 

동양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모든 기예는 의식의 명상적 형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쓰이고 있다.[61]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 과정에서 오는 직접적인 직관적 통찰에 익숙해 있다. 그것은 모든 새로운 발견은 홀연한 비언어적인 섬광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61]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들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62]

 

헤아리는 마음이 숨을 죽이면 직관적 형태가 비상한 깨달음을 가져 온다. 환경은 개념적 사고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경험된다.[62]

 

명상적인 상태와 무사의 정신 자세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무사도의 이미지는 동양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63]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64]

 

동양의 전통은 언어적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무엇보다 먼저 신비가들은 실재의 체험에 주로 관심을 가지지 그 체험의 기술에는 흥미가 없다. [65]

 

인도의 신비주의, 특히 힌두교는 신화의 형식을 빌려 이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은유와 상징과 시적 이미지와 직유와 우화가 동원되고 있다. 신화적 언어는 논리와 상식에 의해 훨씬 덜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마력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암시적인 이미지가 풍부하고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적인 언어보다는 신비가들이 실재를 체험하는 방식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르면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66]

 

깊이 있는 혜안을 지닌 힌두교도들은 이런 모든 신들이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과 신화적 이미지는 실재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것들이… 신화적 경험에 뿌리 박고 있는 철학의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수레라는 것도 알고 있다. [66]

 

중국과 일본의 신비가들은 이러한 언어적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에 맞도록 실재의 역설적인 본성을 창출해 내는 대신에 그들은 가끔 사실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도가에서는 언어적 소통에서 유발하는 부조화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역설을 자주 상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도가들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중국과 일본의 불교도에게 계승시켰고, 소위 공안을 가진 선불교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른다. [67]

 

물질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양자장 이론의 어떤 국면에 의해 물리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시바신의 우주적 무도에 의해 전달된다.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 낸 이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68]

 

3장   언어를 초월하여

 

“그 본질에 있어서 어의를 초월하고 있는 우리의 내적 경험을 전달하는 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범상한 사고 방식을 그처럼 당혹시키는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다.” – 스즈키 다이세쯔 [69]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인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70]

 

서양 철학의 학파에서 논리와 추론은 철학적 이념을 공식화하는 주요한 도구로 언제나 쓰여 왔으며 종교 철학에 있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동양의 신비 사상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가 일상 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었으며, 그래서 동방의 현자들은 논리와 통상 개념을 뛰어넘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실재에 대한 모형이 서양 철학의 모형보다도 현대 물리학에 보다 적절한 철학적 배경을 이루게 된 주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70]

 

원자론의 초보 단계에서 물리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는 어떻게 전자장 방사가 입자(아주 적은 지역에 국한된 실체)와 넓은 공간의 영역에 퍼져 있는 파동으로 동시에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언어나 상상력의 어느 쪽도 이 부류의 실체는 그렇게 잘 다룰 수가 없는 것이다.[72]

 

동양의 신비 사상은 실재의 역설적인 면을 다루어 내는 몇 가지의 유별난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힌두교에서는 신화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우회한 반면에 불교와 도교는 그 역설을 감추느니보다 차라리 두드러지게 드러내려 했다. 도교의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난문이다. 그것은 당황스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단단하고 강력하고 지극히 시적인 언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논리적인 추론의 낯익은 상궤에서 떨쳐내 버린다. 선종은 대화에서 야기되는 불일치에서부터 지덕을 창출해 내는 특별한 비결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언어로써가 아니라 공안의 체계를 가지고 온전히 전수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시켜 왔다.[73]

 

‘공안’은 세심하게 궁리해 낸 일견 사리에 합당치 않은 난문으로서,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 비합리적인 언사와 역설적인 내용은 사유로써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은 사유 과정을 정지시키고자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며, 그래서 제자에게 실재에 대한 비언어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대비시켜 주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풀려지면 이 공안은 더 이상 역설적이기를 그치고 각성을 도와주는 의식의 상태에서부터 만들어진 의미심장한 진술이 되는 것이다.[73,74]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신비가들은 언제나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문제가 되었다.[75]

 

원자와 아원자 세계의 수준에 있어서의 물질에 관한 지식은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감각의 세계에서 그 이미지를 취하는 우리의 통상적 언어는 이렇게 관찰된 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합치 않은 것이다.[77]

 

4장   새로운 물리학

 

동양의 신비가에 의하면 실재에 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쯔는 그것을 “경험의 모든 표준 형태를 뒤엎는, 인간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고 하였다.[79]

 

뉴턴 역학에서 모든 물리적 사건들은 상호의 인력, 즉 중력에 의해서 야기되는 공간에서의 물리적 점들의 운동으로 환원되었다. 질점에 대한 이 힘의 효과를 정확한 수학적 형식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뉴턴은 미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과 수학적 기술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이것은 대단한 지적인 업적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은 이것에 대해 “아마도 지금까지 한 개인이 이룰 수 있었던 사고의 최대 진전이었을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83]

 

그러나 20세기가 되면서 뉴턴 모델의 한계를 나타나게 하고 그 모델의 어느 특성도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새로운 물리적 실재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전 가운데 첫 번째 것이 전기 및 자기적 현상의 발견과 탐구였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의 효과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힘의 개념을 역장으로 대체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뉴턴 물리학을 최초로 넘어서게 되었다.[86]

 

양성과 음성 전하 사이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두 전하가 뉴턴 역학에서의 두 질량처럼 서로 끌어당긴다고 말하는 대신에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각 전하는 다른 전하가 나타나면 어떤 힘을 느끼도록 그 주위의 공간에 ‘산란’ 혹은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떤 힘을 일으키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조건을 장(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일 전하에 의하여 생겨나며 다른 전하가 들어와서 그 효과를 느끼게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것은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물리적 실재에 관한 개념의 가장 심오한 변화였다. 뉴턴적 견지에서는 힘이 그 작용하는 물체와 단단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힘의 개념이 그 자체의 실재를 갖고 물질적인 것들과 아무런 관계 없이도 연구될 수 있는 훨씬 미묘한 장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87]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이 현재 뚫고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영역에로 확장될 수 없었다.[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의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만일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들은 사건들을 시간상으로 다르게 볼 것이다. 이제 뉴턴적인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버려야 한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91]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 = mc2 에 의해 주어진다. 이 때, c는 빛의 속도다.[91]

 

러더퍼드가 원자들에 알파 입자를 발사하였을 떄, 그는 놀랍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고대로부터 믿어 왔듯이 원자는 딱딱하고 견고한 입자들이 아니라 극도로 미세한 입자인 전자들이 전기력에 의해 핵에 묶여져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광대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특히 원자는 거시적인 물체들에 비하면 극도로 미세한 것이나 그 중앙에 있는 핵에 비하면 대단히 큰 것이다. 우리가 상상해 본 버찌 크기만한 원자 형태에서도 원자핵은 너무 미세해서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원자의 ‘유성’ 모델의 출현에 뒤이어 곧 원소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수가 그 원소의 화학적인 성질들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95]

 

양자론적 개념들은 물리학자들의 상상력에 실로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러더퍼드의 실험은 원자들이 견고하고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극도로 미세한 입자들이 운동하고 있는, 공간의 광막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으며, 양자론은 이제 이러한 입자들조차 고전 물리학적인 견고한 물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 주었다.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는 양면성을 띄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다. 그것은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성은 또한 전자기파 혹은 입자의 형태를 취하는 빛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물질과 빛의 이러한 성질은 매우 기묘한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입자, 즉 매우 작은 영역 속에 국한된 실체며 동시에 파동 – 공간이 넓은 영역에로 뻗어 나가는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하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96]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사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양자 이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써 표현되며 파동의 형태를 취하는 수학적인 양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 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 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추상적이고 수학적 양인 ‘확률파’이다.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97]

 

아원자적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체는 파동과 같은 확률 모형들로 분해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 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 즉, 아원자적 입자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준비와 그 다음의 측정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으로서만 단지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98]

 

두 번째 수수께끼는 원자들의 이상한 기계적인 안정성이다. 예를 들면 공기 중에서 원자들은 매초 수배만 번씩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매 충돌 뒤에는 그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양자론은 원자들의 이런 모든 놀랄 만한 성질들이 그 전자들의 파동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무엇보다 먼저 물질의 견고한 성질은 파동/입자의 이중성과 관련돼 있는 전형적인 ‘양자 효과’의 결과이다.[99]

 

존재하려는 경향성, 제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움직이는 소립자들, 어떤 ‘양자 상태’에서 돌연히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원자들, 그리고 모든 현상들의 본질적인 상호 연관성, 이런 것들은 원자 세계에만 있는 몇 가지 특징이다. 반면에 모든 원자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아는 것으로서 거시적인 세계에서 경험될 수 있다. 그것은 양전하의 원자핵과 음전하의 전자들 사이의 전기적인 인력이다. 이 힘과 전자파간의 상호 작용은 우리 주위에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102]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어떤 실체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에너지는 활동 또는 작용과 관련된 동적인 양이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은 입자가 이제는 정지된 물체로서 이해될 수 없고, 역동적 모형으로 여겨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입자의 질량으로 나타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108]

 

아원자적 소립자들을 더 이상 분할하는 유일한 방법은 높은 에너지를 포함한 충돌 과정에서 그것들을 함께 부딪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물질을 거듭해서 분해할 수는 있지만 더 작은 조각들을 얻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그 과정에 수반된 에너지로부터 입자들을 생성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원자적 입자들은 파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109]

 

입자의 속성들은 그 활동 – 주위 환경과의 상호 작용 –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입자는 독립된 실체일 수가 없고 전체의 통합된 부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12]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113]

 

 

2 부 : 동양 신비주의의 길

 

5장   힌두교

 

힌두교는 하나의 철학이라 불릴 수도 없고, 또한 잘 정의된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종파와 의식과 철학적 체계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하고도 복합적인 사회 종교적 유기체이며,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잡다한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 의식과 예식 및 정신적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는 신화적인 영역과 심원한 개념들을 지닌 고도의 지적인 철학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단순 소박한 의식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117]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그것은 무한하고 모든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실재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특히 신화를 좋아하는 힌두 현자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게 그렸고 신화적 언어 속에 담아 얘기한다. 다양한 신들이 있는데 이런 모든 신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경전은 분명히 하고 있다.[120]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 되는 것을 ‘아트만’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120]

 

힌두 신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기 희생에 의한 세계 창조라는 주제가 반복하여 나온다. 신은 이 세계가 되고, 종국에 가서는 또 다시 신으로 되돌아간다. 이 신성의 창조적인 활동은 ‘릴라’, 즉 신의 유희라고 불리며, 이 세계는 그 성스러운 유희의 무대로 간주되는 것이다.[121]

 

마야라는 말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의미를 바꾸어 왔다. 애초엔 신선한 행위자와 마술가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에 걸려 있는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신성한 릴라의 무수한 형태를 혼동하고 이들 모든 형태 아래 놓여 있는 브라만의 통일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121]

 

마야는 이러한 개념을 실재로 간주하는, 지도를 영토로 혼동하는 환상이다. [121]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22]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이다. 이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한다. … 여기에서 만물이 다른 만물과 역동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기타>경전의 말로 표현하자면,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122]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122]

 

모든 움직임은 자연의 힘이 교직하는 대로 다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망에 사로잡혀 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과 행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자연의 어떤 힘이 다른 자연의 힘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 [123]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는 그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23]

 

우주적 무도자로서의 시바는 춤을 추어 우주의 끝없는 율동을 유지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다. 비슈누 또한 여러 가지 변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신이다. 대체로 비슈누의 역할은 이 우주를 보존하는 데 있다. 이 삼위 중 세 번째 신이 샤크티, 즉 성모로서 자신의 여러 많은 형태를 가지고 이 우주의 여성적인 에너지를 나타내는 원형적인 여신이다. [124]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서양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가 인간 존재의 불가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신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육욕을 의식적인 의지로써 제어하려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전존재로써 스스로 깨닫는 데 목표를 두었다. [124]

 

힌두교에서 언제나 여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 본성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면이 전적으로 신성의 불가분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 풍부한 여신상들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힌두의 여신들은 성처녀로서 나타나지 않고 뇌쇄적일 만큼 아름다운 관능적 포옹상으로 나타난다. [125]

 

힌두교도들이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브라만의 다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25]

 

6장   불교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 개념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에 새롭고 생동하는, 맞바로 들어맞는 심리학적 해석을 가하였다.[128]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 (소승불교)와 마하야나 (대승불교)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인도 자체에서는 불교가 수세기를 지나면서 융통성 있고 동화력이 있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부처는 결국 여러 얼굴을 가진 비슈누 신의 한 화신으로 간주돼버렸다.[128]

 

대승 불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상 속에 결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동양적 신비 사상 안에서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성은 직접적 신비체험- 불가에서는 ‘각’이라고 부른다-에의 길을 밝혀 주는 한가지 수단으로 비쳤을 뿐이다. 이 체험의 본질은 지적인 분별과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무사의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실재가 분할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 ‘진여’로서 나타난다. [128]

 

불가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깨우친 직후 유명한 사성제의 형태로써 그의 핵심적인 교리를 밀도있게 표현하였다 :

l       1 성제는 인간 상황의 두드러진 특성인 ‘두카’ 즉 고뇌 또는 좌절이다. 이러한 좌절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생의 근본적인 실상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부처는 말했는데, 이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근본 모습이라는 사상은 불교의 근저를 이룬다. ‘고’란 불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의 그 유전에 저항하여 온통 마야인 고정된 형태에 – 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간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그것들에 집착하려 할 때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무상의 교리에는 자아, 즉 변화무쌍한 체험의 지속적 주체로서의 자기도 없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독립된 개별적 자아라는 생각은 하나의 환상, 즉 ‘마야’의 또 다른 형태고 실체가 없는 지적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l       2 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불교 철학에서 ‘아비댜’ 즉 무명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거듭 겪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 (업)에 의해서 몰아쳐진다.

l       3성제는 괴로움과 좌절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삼사라의 악순환을 초탈해서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경지에서는 개별적 자아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전일하다는 감정이 지속된다. 니르바나는 힌두교의 모크샤와 동일어로서 모든 지적인 개념을 넘어선 의식 상태며, 그것은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 즉 불성을 얻는다는 뜻이다.

l       4성제는 일체고를 여의는 부처의 처방으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자기 계발의 팔정도다.[129~131]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131]

 

마하야나파는 신도들에게 불성을 얻는 매우 다양한 방법, 즉 ‘능한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자칭 대승불교라고 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교리를 위시하여 현대의 과학 사상과 매우 밀접한 개념들을 포함한 정교한 철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걸쳐 있다, 마하야나 교리의 최초의 해석가는 불교의 조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오한 사상가의 한 사람인 아슈바고샤 (마조)로 그는 기원 후 1세기에 살았다. 그는 <대승신기론>이라고 불리는 한 작은 책에서 마하야나 불교의 근본 사상, 특히 불가의 ‘진여’의 개념과 관련된 사상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여러 점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연상시키는 명징하고 아름다운 이 책은 마하야나 교리에 대한 최초의 대표적인 강론이 되었으며, 모든 마하야나 교파의 으뜸가는 권위가 되었다.[132]

 

그러므로 실재의 본질적인 성질이 공이라는 나가르주나의 진술은 흔히 그렇게 오해 되는 허무주의적 진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낳은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실재 즉 공 자체는 단순한 무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이다.[133]

 

지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 불교의 특징적인 발전 중의 하나인 보디사트바 (깨달은 중생)의 이상에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왔다. 보살은 성불의 도정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이끌어 내 주는 것이며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개오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열반에 들기 전에 다른 일체 중생이 성불하기를 서원한 사람이다.[133,134]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불교 사상의 절정은 동명의 수트라에 기초를 둔 아바탐사카파 (화엄종)에서 달성되었다. 이 수트라는 대승 불교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는데, 스즈키 다이세쓰는 다음과 같은 가장 열광적인 말로써 이것을 칭송하고 있다. 아바탐사카 수트라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실로 불교 사상과 불교 감정, 불교 체험의 극치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 문헌도 이 수트라에서 달성된 것과 같은 개념과 장엄함과 감정의 깊이, 웅대한 스케일의 구성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의 영원한 샘이며, 이 샘은 그 어떠한 종교인도 부분적으로만 만족하여 목마름을 그대로 지닌 채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134,135]

 

아바탐사카의 중심 주제는 모든 사물과 물건의 통일과 상호 작용으로서 이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세계관의 기본 요소의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135]

 

7장   중국 사상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자 사상 경향은 중국 철학에서 정반대의 두 극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다 같은 인간성의 양극으로서, 그래서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다. 유교는 대체로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 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11, 12세기에 와서 신유학자들이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주희의 철학에서 절정에 달한다.[138]

 

유교란 명칭은 공부자에서 유래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이른바 육경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 대의 철학적 사상서인 <예>, <악>, <시>,<서>,<역>, <춘추>로, 이것들은 중국 고대의 ‘성스런 현자’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의 사상은 <논어>, 즉 공자 어록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몇 제자에 의하여 편찬된 금언집이다.[139]

 

도교의 창시자는 노자다. 중국에서는 그것이 대체로 그냥 <노자>라고 불리는데 서양에서는 <도덕경>, 즉 <길과 힘의 경전 Classic of the Way and Power>이라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도가의 책은 <도덕경>보다 훨씬 장문인 <장자>로서, 이 책의 저자인 장주는 노자보다 약 200년 이후 사람이다.[139,140]

 

중국인들도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찰하는 삼라만상의 배후에 그것을 통일시켜 주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 실재를 ‘도’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원래 ‘길’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원래의 우주적 의미에서 도는 궁극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이런 점에서 그것은 힌두교의 브라만과 불교의 다르마카야 (법신불)와 가까운 것이다. 도는 만물이 거기에 포함되는 우주의 진행 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부단한 유전과 변화로 보이는 것이다.[141]

 

중국인들은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 특징임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전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유형이 있어 인간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자들은 이 유형을 지각하여 여기에 맞게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도와의 합일’을 이루게 되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을 누리며,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뜻대로 달성되는 것이다.[142]

 

그러면 인간이 깨달아야 할 우주적 길의 유형은 무엇인가?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 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 패턴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태양과 달의 운동이나 계절의 변화에서 추론 된 것이지만 그 때부터 또한 생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인들은 어떤 상황이 그 극한에서 발전하면 반드시 되돌아 그 반대로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본적 신념의 덕분으로 고난의 시기에도 그들은 용기와 인내를 지닐 수 있었고, 성공했을 때에도 조심성 있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나아가 도가와 유가에서 다 같이 믿는 중요의 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자는 과도와 낭비와 탐닉을 피한다”라고 노자는 말한다.[142,143]

 

도의 운동에 있어서 순환 양식이란 아이디어는 두 정반대 극인 ‘음양’의 도입에 의해 명확한 구조가 주어지게 된다. 그것은 변화의 주기를 한정시켜 주는 두 극이다.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 한 쌍의 원형인 음양의 상징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연구가 가해져 그것은 마침내 중국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143]

 

오랜 옛적부터 자연의 원형적인 두 극은 명암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남/여, 강/약, 상/하에 의해서도 표상 되었다. 양상,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창조적인 힘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음, 즉 어둡고 수동적이고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요소는 ‘땅’으로 대표되었다. 양은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남성적인 지성을, 음은 복합적이고 여성적이고 직관적인 마음을 나타낸다. 음양의 역학적인 특성은 태극도라고 불리는 고대 중국의 상징으로써 도해 되고 있다. 이 도표는 어두운 음과 밝은 양이 대칭적으로 배열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대칭이 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단한 순환 운동을 강하게 암시하는 회전적인 대칭이다. 이 도표 가운데에 있는 두 점은 두 힘의 어느 하나가 그 극에 도달할 때 마다 이미 그 자체 안에 대립자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상징화한 것이다.[144,145]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 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 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145]

 

전통적인 한의학 역시 인체 내에 있는 음양의 균형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떠한 질환도 이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얘기해서 신체의 내부는 양이고 표면은 음이다. 인체 내부의 각 기관도 음양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각 부분 사이의 균형은 ‘기’, 즉 활력 있는 에너지 흐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이 기는 경혈, 즉 침점을 간직한 ‘경락’의 계통을 따라서 흐르는 것이다. … 이 음과 양 사이의 흐름이 막히면 신체는 병들게 되고 따라서 그 질병은 경혈에 침을 놓아 기의 흐름을 자극하여 회복시켜 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146]

 

중국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음양의 갖가지 배합을 계속 연결하여 우주적 원형의 체계로 발전시켰다. 이 체계는 <역경>, 즉 <변역의 서 Book of Changes> 속에 정교하게 완성되어 있다. 이 <번역의 서>는 유가의 육경 가운데서도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며,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핵심에 놓인 저작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저명한 중국학자인 리하르트 빌헬름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가 번역한 <역경>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

“이 <번역의 서>, 즉 중국의 <역경>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문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이 책의 기원은 고대의 신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내에서는 오늘날까지 가장 탁월한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따. 3천년을 헤아리는 중국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책이라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 책에서부터 그 영감을 취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이 책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수천 년의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지혜가 <역경>을 만드는 데에 다 녹아 들어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146,147]

 

<역경>에 의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의 소인을 찾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역경>이 지혜의 책으로서 쓰이는 바가 예언서로 쓰이는 것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 노자는 자신이 가장 심오한 경구 가운데 몇몇을 바로 이 원천에서부터 인용하였다. 공자는 이것을 철저히 연구해서 이 책에다 대부분의 주석을 붙임으로써 이 책의 후경을 완성시켰다.[148]

 

공자 주석의 중심에는 <역경> 전체가 그런 것처럼 모든 현상의 역학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모든 사물과 상황의 쉼 없는 변용은 이 <변역의 서>의 핵심을 이루는 메시지다.

“천변만화가 한 권의 책일지니 그것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네.

그 도는 영원히 변하나니

쉼 없는 변화, 움직임, 공허한 여섯 장소 속을 흐르나니,

고착된 법도 없이 생하고 멸하며, 강약이 서로 바뀌며,

하나의 법률 아래 얽매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은 오직 변역일 뿐이어라.” [149]

 

8장   도교

 

중국 사상의 두 가지 주요 경향인 유교와 도교 가운데에서 후자는 신비적인 데로 나아가 우리가 현대 물리학과 비교하는 데 보다 적절한 바가 있다. 힌두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도교는 추론적인 지식보다 직관적인 지혜에 보다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문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도교적 해방은 특히 인습의 엄격한 규율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155]

 

인습적 지식과 이성에 대한 불신은 서양 철학의 다른 어느 학파에 있어서 보다 도교에 있어서 한결 강하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 결코 도를 해득할 수 없다는 공고한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장주의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아무리 넓은 지식이라도 도를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고, 이성이 인간을 현명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자는 이런 방법들에 반대해 왔다.”

장주의 책은 추론과 변설을 경멸하는 글귀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개가 잘 짓는다고 좋은 개로 인정 받는 게 아니고,

사람이 능숙하게 말한다고 슬기롭다고 인정되는 게 아니다.”

“논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한 증거다.” [156]

 

도가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 도가의 현자들은 강한 신비적인 직관과 결합된 주의 깊은 자연 관찰로써 현대의 과학 이론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는 깊은 통찰에 이르렀던 것이다.[156]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

만물이 변용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그 모든 싹과 생김새는 각기 본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안에서 각기 성숙과 쇠잔이 있고, 변화와 변용의 분단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

 

도가들은 자연 속의 모든 변화를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빚어 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떤 대립하는 쌍도 그 극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역동적으로 연관돼 있는 극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믿게 되었다.[157]

 

도의 운동이 대립자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이라는 인식부터 도가들은 인간 행위를 위한 두 가지 기본율을 추출해 냈다.

l       먼저, 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 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l       다른 한편, 당신이 무언가를 지니려 하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그 안에 허용해야 한다.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

 

이것은 높은 관점에, 즉 모든 대립자들의 상대성과 극관계가 명료하게 지각되는 어떤 조망에 도달한 현자의 생활 방식이다. 이런 유의 대립자 가운데에는 음양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선악의 개념이 맨 먼저 포함된다.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선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59]

 

그리스의 ‘도가’는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였다. 그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표현한 것처럼 부단한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 노자와 궤를 같이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가 순환적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계질서를 “얼마 동안 타오르고 얼마 동안 꺼져 있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에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음과 양의 주기적 상호 작용 속에 그 자신을 드러내는 도의 중국적 개념과 참으로 유사한 이미지다.[159]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161]

 

그래서 도교 현자들의 행위는 그의 직관적 지혜 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 그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나 자기 주변의 어떤 것도 강제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도의 운동에 자기의 행위를 순응시켜 나갈 따름이다. 회남자에 의하면 이렇다 :

자연 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이러한 행동 방식을 도교 철학에서는 ‘무위’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글자 뜻대로 하자면 ‘비행동’을 뜻하는데, 조지프 니덤은 이것을 ‘자연에 어긋나는 행위를 삼가는 것’으로 번역하고 이 해석을 <장자>에서 다음의 한 구절을 인용해 와 정당화하고 있다 :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 [161]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혹은 니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으면’ 그는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처럼 당혹스럽게 보이는 노자의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라는 말이 뜻한 것이다.[162]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도가들은 인간성의 여성적인, 순응하는 성질을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도와 조화된 완전히 균형 잡힌 삶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믿었다. [162]

 

9장  

 

기원후 1세기경 중국 정신이 불교 형태의 인도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두 가지 발전이 나란히 일어났다. 한편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이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하여 그들 자신의 철학적 조명 아래서 인도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하였다. 다른 한편 중국 정신의 실용적인 면을 인도 불교의 실제적인 상에 집중하여 보통 명상으로 번역되는 찬 (선)이란 이름의 특별한 정신적 수련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도 불교의 영향에 대응했다. 이 찬 철학은 기원후 약 1200년경 결국 일본에서 채택돼 젠이란 명칭 아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전통으로서 그곳에서 꾸준히 계발되어 왔다. 선은 이처럼 상이한 세 문화의 철학과 특질이 독특하게 융합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하나의 생활 방식이지만 여전히 인도의 신비주의, 도가의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사랑, 유교 정신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있다.[165,166]

 

다소 특수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선은 본질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불교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이 부처 자체, 즉 선에서 사토리로 알려진 체험적 개오의 얻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오의 체험은 동양 철학의 모든 학파의 핵심이지만 특히 선은 오직 이 체험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의 해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처의 깨달음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정수다. 방대한 불경 속에 상술돼 있는 여타의 교리는 보충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166]

 

동양 신비 사상의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역시 완고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도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게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에 관해서 묻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장주는 말했다.[166]

 

그런데 선 체험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질 수 있으며, 또 실제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선에 적합한 특수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네 글귀를 통해 선은 요약 기술되고 있다 :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

언어나 문제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곧바로 가리킨다’는 기법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동양적 마음의 전형이다. 선사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고 일체의 이론화와 공론을 경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갑작스럽게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말로써 진리를 곧바로 가리키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내가 언급한 공안처럼 개념적 사고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신비 체험에 대비시키기 위하여 사고 과정을 정지시키는 것을 뜻했다.[167]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깊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이건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나는 장작을 져 나르고, 물을 긷는다.”[169]

 

그러므로 선의 완성은 일상 생활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사는 데 있다. 백장이 선을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잠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많은 선어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명백하게 들리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본서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정신적 위업을 이루는 것이다. 유명한 선가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169,170]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선문의 강조는 확실히 그 도가적인 뿌리를 보여주고 있는 일이지만, 이런 강조의 기반은 엄연히 불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본성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요,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대선사 백장은 불성을 찾는 데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황소 등에 타고서 황소를 찾는 것과 너무나 같다.”[170]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꽂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 체험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 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 [171]

 

 

3 부 : 대비

 

10장                          만물의 통일성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으로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 ‘법신’, 도교에서는 ‘도’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어 또한 ‘진여’라고도 부른다. [175,176]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그것은 원자의 단계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영역에까지 물질을 더 깊이 투시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통일성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에 관한 우리의 대비를 일관하는 하나의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아원자 물리학의 다양한 모델들을 연구해 감에 따라 그것들이 물질의 구성 요소들과 그에 관련된 근본적 현상들이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그리고 그것들이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전체의 완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동일한 견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177]

 

다음에 이어질 논의는 이른바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1920년대 말기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아직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델이다. 코펜하겐 해석의 출발점은 물리적 세계를 관찰되는 세계 (‘대상’)와 관찰하는 체계로 나누는 것이다. 관찰되는 체계는 원자, 아원자적 소립자, 원자적 작용 등등이 될 수 있다. 관찰하는 체계는 실험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나 몇 명의 관찰자를 포함한 것이다. 그 두 체계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이제 커다란 어려움이 발생한다.[178]

 

관찰되는 체계는 양자론에서 확률에 의해 기술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아원자적 소립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혹은 원자적 작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확실히는 결코 예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적 예견들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분명 많은 측정을 요한다. 아원자적 입자들은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자적 사건들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전자의 위치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고 단지 어떤 지역들 내에 있을 경향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179,180]

 

관찰되는 대상은 준비의 과정과 측정의 과정 사이에 있는 상호 작용의 표현이다.[183]

 

이처럼 원자론은 우주의 본질적인 상호 연결성을 드러내 준다. 이는 세계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183]

 

닐스 보어의 말을 빌리면 “독립된 물질적 입자들이란 추상물로서 그들의 속성은 다른 체계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184]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서 보게 한다. 그런데 이는 동양의 신비가들이 세계를 체험했던 방법으로서, 그들 중의 몇몇은 그 체험을 원자 물리학자들이 쓴 것과 거의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185]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185]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상호 연결된 우주적 망이란 상 (이미지)은 동양에서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전달하는 데 널리 쓰여 왔다.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브라만은 우주적 망을 통일시켜 주는 망사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반이다.[186]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이 우주적 상호 연결성에는 언제나 관찰자와 그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점은 원자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원자의 단계에서, ‘대상들’은 준비와 측정의 과정 사이에 있는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연쇄 과정의 종국점은 언제나 관찰자의 의식에 놓여 있다. [187]

 

원자 물리학의 결정적인 특성은 어떤 대상의 속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관찰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관찰자란 존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자 물리학에서 우리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에 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 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관찰자는 그가 어떻게 자기의 측적을 진행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이 조정에 따라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결정지어진다. 실험상의 배열이 변경되면 이번에는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이 변할 것이다. [187]

 

원자 물리학에서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찰하는 바로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존 휠러는 관찰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을 양자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기고, ‘관찰자’라는 말을 ‘참여자’로 대치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188]

 

‘관찰 대신에 참여’라는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겨우 최근에야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생각이다. 신비적 견식이란 단지 관찰에 의해서만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의 존재 전부를 쏟아 넣는 전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따라서 참여자의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며, 동양의 신비가들은 이 개념을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3주체와 객체가 불가분일 뿐만 아니라 구별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 그들은 더 나아가, 깊은 명상 속에서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의 구별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고 차별이 없는 전체에로 용해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189]

 

 “이원성이 있는 곳은 말하자면 다른 것을 보고, 하나가 다른 것을 냄새 맡고, 하나가 다른 것을 맛보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곳에서는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본단 말인가?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냄새 맡는다는 것인가? 무엇에 의하며 무엇을 맛본단 말인가?” [189]

 

양자론은 근본적으로 분리된 대상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관찰자의 개념을 참여자로써 대치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세계를 기술하는데 인간의 의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깨닫고 있다. 그것은, 그 대부분들이 이 전체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정의되는 물리적, 정신적 관계들의 상호 연결된 망으로서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0).

 

“불교도는, 독립적으로 또는 외따로 존재하는 바깥 세계가 있어 그 역동적 힘 속에 자신을 삽입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동일한 작물의 양면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모든 힘과 사건들, 의식의 형태와 그 대상물의 실낱들이 서로 연관 지어져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끝없는 망으로 짜여지고 있다.” – 라마 고빈다 [191]

 

11장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동양의 신비가들이 모든 사물들을 기본적인 전일자의 현신으로서 경험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물들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이 일체를 포용하고 통일체 속에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든 대조적인 것들의 통일성이라는 것, 특히 대립자들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의식으로서는 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므로 그것은 동양 철학의 가장 난해한 특성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양인의 세계관의 바로 근원에 들어 있는 통찰인 것이다.[193]

 

대립자란 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194]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사실 동양의 모든 신비주의는- 지관, 즉 ‘무사의’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절대적인 여실지견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모든 대립적인 것의 통일의 거기에서 하나의 생생한 체험으로서 성취된다.[194]

 

모든 대립적인 것이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즉 광명과 암흑, 득과 실, 선과 악 등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동양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다.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195]

 

이러한 역동적 균형의 개념은 결코 정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언제나 두 극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이 점은 중국의 현인들이 원형적 양극을 상징하는 음과 양으로써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음과 양의 배후에 놓여 있는 통일체를 ‘도’라고 부르고, 그것을 음양의 상호 작용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보았다. “지금 어두음이 되게 하고, 또 곧 빛을 나타내 주는 것이 ‘도’다.” [195]

 

양극적인 대립의 역동적인 통일은 원운동과 그 투영의 간단한 예로써 설명될 수 있다. 투영 작용에 있어서는 어떤 원운동도 두 대립되는 점 사이의 왕복 운동으로서 나타날 것이지만 그 대립적인 것은 운동 자체 속에서 통일되고 초월 된다. [196]

 

반면, 동양의 신비주의에서는 이 여성적 양태가 계발되었으며, 또한 인간성의 두 국면간에 하나의 통일성이 추구되었다.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사람”이다. 동양의 여러 가지 전통에 있어서는 의식의 남성적인 양태와 여성적인 양태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이 명상의 주요한 목표고, 그것은 예술 작품들 속에서 흔히 예증되어 있다.[197]

 

/여의 대극성이 탄트라 불교에서는 때때로 성적인 상징의 도움을 받아 설명된다. …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에서 남신과 여신의 황홀한 성적 포옹을 통해서 이 양자의 통일이 표상된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한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자웅 양태의 이러한 통일은 사고와 언어의 경계가 초월 되고 모든 대립성이 역동적 통일체로 나타나는 의식의 보다 높은 경지에서만 체험될 수 있다고 확언하고 있다.[198]

 

현대 물리학에서 대립 개념의 소립자들은 붕괴되기도 붕괴되지 않기도 하며, 물질 또한 연속적이기도 비연속적이기도 하며, 힘과 물질은 단지 같은 현상의 서로 다른 양상에 불과하다. 상대성 이론은 이러한 세계를 기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상대성’의 체계에서는 4차원적인 시공 같은 고차원에 들어감으로써, 고전적인 여러 개념들이 초월된다. 공간과 시간 그 자체는 전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개념으로 보였지만 상대성 물리학에서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이 근원적 통일성이 위에서 언급된 대립 개념을 통일하는 기반이 된다. 대립자의 통일은 신비가에 의해 체험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다 높은 경지’, 즉 고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가가 체험했던 바와 꼭 마찬가지로 역동적 통일성이다. 거기서는 물질적 대상들 역시 진행 과정이요, 모든 형상들은 역동적인 모형들로 존재한다. [199]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인 세계는 힘과 물질이 통일된 세계다. 이곳에서는 물질이 비연속적인 입자들이나 연속된 장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4차원의 공간- 시간의 세계를 그들 이론의 추상적인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지만, 시각 상상- 다른 모든 사람의 상상처럼-은 감각의 3차원 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의 패턴은 이런 3차원의 세계에서 계발돼 온 것이기 때문에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 실재를 다루기에는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동양의 신비가들은 고차원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명상의 경지에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3차원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 때 모든 다원적인 것이 하나의 유기적 전체 속으로 통합되는 전혀 다른 실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200]

 

아마도 그러한 모순 개념들을 통합하는 가장 유명한 경우는 원자 물리학에서 입자와 파동의 개념을 통합하는 경우일 것이다. 원자적 단계에서 보면 물질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나타나는 양태는 상황에 따라 바뀐다. 물리학자들이 물질은 상호 배척적인 것으로 보이는, 즉 입자들은 또한 파동이고 파동은 또한 입자들이라는 방식으로 그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201]

 

파동 모형에 있어서 움직이고 있는 입자들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수파에 있어서 물의 입자들은 파동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동이 자나갈 때 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파에 있어서도 공기의 입자는 단지 전후로 진동할 뿐 그 파동을 따라서 퍼져가는 것이 아니다. 파동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은 파동 현상을 일으키는 교란이지 어떤 물질적인 입자가 아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본 뜻은 전체로서의 파동 모형은 입자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202]

 

파동은 양자론의 통계적인 성질, 즉 원자 현상은 단지 확률 입장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입자와 관련된 파동은 수파나 음파처럼 ‘실제’ 3차원적인 파동이 아니라 ‘확률파’다. 여러 장소에서 그리고 다양한 특성을 지닌 그 입자를 발견하는 확률에 관련된 추상적, 수학적 양이다.[203]

 

확률파의 도입은 파동 치는 입자의 패러독스를 해결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훨씬 더 근본적인 다른 한 쌍의 반대 개념, 즉 존재와 비존재와 같은 대립 개념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는 원자적 입자가 일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입자는 확률 모형이므로 여러 장소에 존재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기이한 종류의 물리적 실재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자의 상태를 고정된 대립 개념으로서 기술할 수 없다. 입자는 어느 한정된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위치를 변화하지도 않으며 또 정지된 체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확률 모형이며, 그러므로 일정한 장소에 존재하려는 입자의 경향들이다.

 

힘과 물질, 입자와 파동, 운동과 정지, 존재와 비존재- 이것들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초월된 대립 개념이거나 혹은 모순 개념들 중의 일부다. 이러한 모든 대립하는 쌍들 중에서 마지막 것이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원자 물리학에 있어서도 역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까지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양자론 가운데에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며, 그래서 계속 그 해석 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04]

 

대립 개념 너머에 있는 실재에 직면해서 물리학자와 신비가들은 특별한 사유 방법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마음이 고전 논리의 완고한 틀에 고착되어서는 안 되며, 항상 그 생각하는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끊임없이 전환되도록 해야 한다.[205]

 

 “동양적 사유 방식은 오히려 명상의 대상 주변을 빙빙 돌면서 구성되는 것이다. … 여러 측면에서, 즉 상이한 여러 관점으로부터 단일 인상을 다져 냄으로써 형성된 다원적 인상이다.”  - 라마승 고빈다 [205]

 

이제 양자론은 어떤 장소에서의 파동의 진폭과 그 장소에서 입자를 발견하는 확률을 관련시킴으로써, 확률파의 속성과 이에 대응하는 입자의 속성을 연관시킨다. 입자의 운동 상태에 관한 정보는 그 파동의 진동수와 과장에 포함되어 있다. 과장은 입자의 운동량에 반비례한다. 즉 이것은 짧은 파장을 지닌 파동은 높은 운동량(그만큼 고속도를 지님)을 가지고 운동하는 입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파동의 진동수는 입자의 에너지에 비례한다. 고진동수를 가진 파동은 그 입자가 고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7]

 

파속 모형은 입자가 지역 내부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그 이상 더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 파속의 중요한 속성은 그것이 일정한 파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208]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사이의 불확실한 관계에 대한 정확한 수학적 공식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 혹은 불확정성 원리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는 결코 아원자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아주 정확히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한계성은 우리의 측정술이 불완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리의 한계성 때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209]

 

불확정성 원리가 지닌 근본적인 중요성은 그것이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전적 개념의 한계성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아원자 세계는 통일된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의 거미줄과 같은 관계로서 나타난다. 우리의 일상적인 거시적 경험에서 유래된 고전적 개념들은 이 세계를 기술하기에는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입자와 같은 하나의 개별적인 물리적 실체의 개념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 하나의 이상화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전체와의 연관 아래서만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연관성들은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확률성인 통계적 성질들이다. 우리가 물질적인 ‘대상’에 하나의 개념을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그 다른 개념은 점점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두 개념 사이의 정확한 관계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210,211]

 

고전적 개념들의 이러한 방 사이의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닐스 보어는 상보성의 개념을 도입했다. 상보성의 개념은 물리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고방식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보어는 그것이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역시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종종 암시해 왔다. 사실상 상보성의 개념은 이미 2,500년 전에 지극히 유용한 것으로 입증된 바 있다. 상보성의 개념은, 그 대립 개념과 상호간에 극성의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통찰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고대 중국 사상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다했다. 중국의 현자들은 음과 양이란 원형적인 양극으로써 이 대립자의 상보성을 표상 했으며, 또 모든 자연 현상과 모든 인간 생활의 본질이란 그것들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211]

 

12장                          공간 – 시간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사상의 하나를 가장 극적으로 확증시켰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지도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지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다.[215]

 

그리스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은 항상 공간과 시간이 마음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다른 모든 지성적 개념들처럼 공간과 시간을 상대적, 제한적, 환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즉 우리의 기하학적 개념은 자연의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특성이 아니라 지성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217]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나타난 공간과 시간에 관한 새로운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공간과 시간의 측정은 상대적이라는 발견 위에 기초하고 있다.[219]

 

빛이 그 사건으로부터 관찰자에게 도달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간은 너무도 짧기 때문에 빛의 전달은 거의 동시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가 관찰되는 현상에 대하여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관찰할 때, 사건 발생과 극서을 관측하는 사이의 시간 간격은 사건을 순열을 수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인슈타인은 그런 경우 서로 다른 속도록 움직이는 관찰자는 사건들의 시간상 서열을 다르게 매길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일반 속도에서는 그 차이가 너무도 작기 때문에 탐지될 수 없지만 그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그것들은 측정할 수 있는 차이를 드러낸다.[221]

 

동시성이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좌우되는 상대적 개념임이 밝혀진 이상, 전체 우주를 두고 그러한 일정한 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관련되는 모든 측정의 그 절대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222]

 

아인슈타인은 3차원 좌표에 시간을 결합시킴으로써, 관찰자에게 상대적인 4차원 좌표라는 공통되는 ‘상대론적’ 구조 안에서 비로소 운동하는 물체의 현상을 다루는 역학적 법칙과 전기와 자기에 관한 이론인 전기 역학 법칙이 성립될 수 있게 된 것이다.[223]

 

공간과 시간의 결합은 다른 기보적 개념의 통일을 수반하며, 이 통일의 국면은 상대성 구조 체계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다. 비상대성 물리학에서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이제는 하나이면서 동일한 개념의 상이한 국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226]

 

‘일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확대되어 중력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의 영향으로 시-공은 만곡 된다는 것이다.[231]

 

평면 위에 있는 3각형의 세 각을 합치면 2직각, 즉 180도가 된다. 그러나 구체 위에 있는 3각형은 총합은 항상 180도 보다 크게 된다. 작은 3각형에서는 그 차가 작겠지만 3각형이 커짐에 따라서 그 차는 더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세 직각으로 된 3각형을 그릴 수도 있게 된다.[232]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휘어진 3차원 공간에 대해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더 이상 그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답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공간의 만곡은 질량체의 중력장에 의해서 일어난다. 질량은 가진 물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물체 주변의 공간은 휘어져 있으며, 그 휘어진 정도는, 즉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정도는 그 물체의 질량에 달려 있다. 공간의 곡률과 그 공간 속의 물질의 분포를 관련시킨 방정식은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이라 불린다.[234]

 

중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만곡은 4차원 시/공에도 확대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질량체의 분포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도 변한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의 이러한 변화는 그 변화를 지금까지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시계로부터 다른 곳에 남아 있는 관찰자에게만 보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235]

 

상대성 물리학에서 물적 대상의 역사, 이를테면 입자의 역사는 소위 ‘시공 도표’로 표상될 수 있다. 시공 도표는 상대성 물리학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입자들 간의 상호 작용을 그림으로 나타낼 때 흔히 쓰인다.[239]

 

양자장 이론의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

l       첫째는 시공 도표 속에서 광자의 흡인과 방출의 경우와 같이 모든 상호 작용은 입자의 생성 및 붕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l       두 번째는 입자들과 반입자들 사이에 기본적인 대칭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입자에는 같은 질량과 음전하를 가진 반입자가 존재한다.[241]

 

“시공에 있어서 우리들 각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구성시켜 주는 모든 것은 하나의 덩어리로 주어진다. … 각 관찰자는 자신의 시간이 흐를 때 그에게는 물질 세계의 연속적인 면으로서 나타나는, 말하자면 시공의 새로운 조각들을 발견한다. 비록 실제로는 시공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전체적 앙상블은 그것에 대한 관찰자의 인식에 앞서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 드 브로이 [245]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현재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다고 하는 이 생각이 아마도 시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지나가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시간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선사 도원 [247]

 

많은 동양의 현인들은, 생각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지만 통찰력은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빈다는 “통찰력은 고차원의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247]

 

13장                          역동적인 우주

 

양자론에 따르면 입자는 동시에 파동이며 이와 같은 사실은 그것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원자적 입자가 작은 공간 영역에 제한될 때에는 언제나 빙빙 돎으로써 그 제한에 반응한다. 제한의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입자들은 그 속에서 더욱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러한 동작은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아원자적 세계의 독특한 모습이요, 전형적인 ‘양자 효과’다. 입자는 양자 이론에서 파속으로 표현된다. 파속의 길이는 입자의 위치에 관한 불확실성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좀 더 정확하게 하고자 하면, 즉 우리가 입자를 좀 더 작은 영역에 제한하려 한다면 그 파속을 이 영역 안으로 압착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파속의 파장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입자의 속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결과 입자는 빙빙 돌게 된다. 제한을 가하면 가할수록 입자는 더욱 빨리 움직이게 될 것이다. 운동함으로써 제한에 반작용하는 입자의 성향은 아원자 세계의 특징인 물질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암시한다.[255]

 

생명이 없는 돌이나 금속을 확대해서 보았을 때에는 그것들은 활성으로 충만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보다 가까이 보면 볼수록 더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모든 물질적 대상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원자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상호 연관을 맺어 엄청나게 다종다양한 분자 구조를 형성하는 바, 그 분자 구조는 경직된 것이나 부동의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온도에 따라서, 또는 주변 환경의 열 진동에 보조를 맞추어 진동하는 것이다.[256]

 

현대 물리학은 물질을 부동적이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율동의 패턴이 분자, 원자, 핵의 구조에 따라서 결정되는 연속적인 율동과 진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또한 동양의 신비가가 물질 세계를 보는 방식과 같다.[256]

 

일상 생활에서 어떤 물체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물체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에너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일을 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항상 어떤 작용 혹은 어떤 활동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근본적인 중요성은 어떤 작용에 포함되어 있는 전체 에너지는 항상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에너지는 그 형태가 아주 복잡하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264]

 

어떤 물체의 질량은 그 자체의 무게, 즉 물체를 당기는 중력의 크기다. 이외에도 질량은 어떤 물체의 관성, 즉 가속화에 대한 저항의 크기가 된다. 이것 역시 에너지처럼 완전히 보존되며 어떠한 질량도 결코 없어질 수 없는 것으로 믿어졌다. 이제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질량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아원자적 소립자들이 서로 충돌할 때 일어날 수 있다.[265]

 

아원자적 소립자는 공간성과 시간성을 갖고 있는 역동적인 모형들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모형들 혹은 ‘에너지 뭉치들’은 안정된 핵, 원자, 분자의 구조를 형성하여 물질을 만들고 이것에 거시적 견고성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어떤 물질적 실체로 만들어진다고 믿게끔 한다. 따라서 우리가 관찰하게 되는 것은 상대 안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모형들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무도인 것이다.[267]

 

양자론은 소립자들이 낱낱이 떨어진 물체의 알갱이들이 아니라, 불가분해의 우주적인 망 속의 확률 모형이며 상호 연결임을 밝혔다. 말하자면 상대성 이론은 그 동적인 본성을 드러내 줌으로써 그 모형들을 생생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물체의 활동성이야말로 바로 그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원자적 입자들은 주위를 매우 빠르게 맴돈다는 의미에서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작용 자체인 것이다. 물체의 존재와 그 활동은 분리될 수가 없다. 그것들은 단지 동일한 시공적 실재가 달리 나타난 야상일 따름이다.[267]

 

14장                          공과 형상

 

고전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은 공허한 공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견고하고 파괴되지 않은 입자라는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상에 혁신적인 수정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입자들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공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으로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이른바 장 이론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중력을 공간의 기하학과 연결시킨 아인슈타인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그 후에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이 결합되어 아원자적 소립자의 역장을 기술하게 됨에 이르러 한층 더 뚜렷하게 되었다. 이 ‘양자장 이론’에서는 입자들과 그 주위의 공간 사이의 원래의 뚜렷한 구별은 사라지고 진공은 아주 중요한 역학적 양으로서 인정 받게 되었다.[271]

 

물질적 대상과 그 주위 환경 사이의 통일성과 상호 관계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거시적인 규모로 나타나 있지만 원자적 단계에서는 한층 더 놀랄 만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아원자적 소립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해서 고전적인 장 이론의 개념과 양자론의 개념은 통합된다.[274]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이라는 것을 장이 극도로 강하게 집중된 공간의 영역들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와 같이 새로운 물리학에서는 장과 물질 모두를 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장이 곧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 아인슈타인 [275]

 

동양적인 견지에 있어서는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으며 어떠한 묘사와 상술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종종 무형, 공 또는 허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276]

 

신비적인 허의 현상적인 현현은 아원자적 소립자들처럼 정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칠 줄 모르는 운동과 에너지의 율동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이다. 물리학자의 아원자적 세계와 같이 동양 신비가들의 현상적인 세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 곧 윤회의 세계다.[278]

 

중국 철학에서 공허하며 형체가 없으나 모든 현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 속에 장의 관념이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개념에도 그것은 명백히 표시되어 있다.[279]

 

양자장에서와 같이 장 – 또는 기 –은 모든 물체의 기초가 되는 본질일 뿐만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써 서로 상호 작용을 수행한다.[280]

 

아원자적 세계에서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장을 통하여, 곧 다른 소립자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소립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있을 뿐이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모든 상호 작용들은 소립자들의 교환을 통하여 발생한다. [283]

 

“장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물질적 현상의 수레다. 그것은 양성자가 그것으로부터 파이 중간자들을 생기게 하는 ‘허공’이다. 소립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단지 장의 운동 형태에 불과하다.”[289]

 

전기장이란 그 공간에서 어떤 다른 전하에 힘을 산출할 수 있는 전하체 주위의 공간 상태다.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289]

 

바로 여기에 현대 물리학이 동양 신비주의의 허에 가장 가장 가까운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동양의 허와 같이 ‘물리적 진공’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가상적 소립자들과 진공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적 관계다. 진공은 진실과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리듬으로 고동치는 ‘살아 있는 허’이다. 진공의 동적인 성질에 대한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최고로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290]

 

대 물리학의 결과는 중국의 현인 장재의 말을 더욱 확증해 준다 :

“태허가 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대 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290]

 

 

15장                          우주적 무도

 

입자 상호 작용은 물질 세계를 형성하는 안정적인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 우주는 끊임없이 운동과 활동을,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우주적 무도를 하고 있다. [291]

 

이 춤은 모형들의 엄청난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것들은 몇몇의 뚜렷한 범주들로 묶이게 된다. 아원자적 입자들과 그 상호 작용들에 관한 연구는 따라서 많은 질서를 드러내 준다.[291]

 

모든 소립자들은 충돌 작용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각개는 또한 가상적 입자로 교환될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입자들 간의 상호 작용에 도움을 준다. 모든 상호 작용들은 뚜렷이 서로 다른 강도의 상호 작용을 지닌 네 가지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

l       강한 상호 작용들 : 양성자와 중성자를 원자핵 속에 속박하는데 일상 세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

l       전자기적 상호 작용들 : 거시적인 세계에서 경험될 수 있다.

l       약한 상호 작용들 : 단지 특정한 종류의 입자 충돌 베타 붕괴와 같은 입자 붕괴에서만 나타난다.

l       중력 상호 작용들 : 모든 입자들 사이에서 작용하지만 매우 약하기 때문에 실험상으로는 탐지될 수 없다.[296]

 

이 모든 상호 작용들은 양자론의 법칙을 따르므로 실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경향성 혹은 확률성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308]

 

장 이론에 따르면, 각각의 입자는 ‘조밀하고 오묘한 형태’로 에너지의 율동적 모형(가상적 입자들)을 산출하면서 실로 ‘영원히 그의 노래를 부른다.’ [310]

 

우주적 무도라는 이런 은유는 그것의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힌두교의 무도 신 시바의 이미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여러 화신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인도 신 중의 하나인 시바는 무도자들의 왕으로 나타난다. 힌두교의 신앙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생성과 소멸, 죽음과 재생의 거대한 율동적인 과정의 한 부분이며, 시바의 춤은 끊임없이 윤회를 계속하는 이 영원한 생사의 율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바의 무도는 생사와 소멸의 우주적인 윤회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인도의 신비 사상에서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 간주되는 생사의 일상적인 율동까지도 상징한다.[310,311]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 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자체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313]

 

16장                          쿼크 대칭들 – 하나의 새로운 공안?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임의적으로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고 명확한 모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315]

 

보다 고차원적인 대칭은 불교의 상징에서 사용되는 다음의 모형과 같이 여러 개의 대칭선이 그어질 수 있는 모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반사만이 대칭에 연관되는 유일한 작용만은 아니다. 만일 하나의 그림을 어떤 각도로 회전시킨 후 그것이 본래의 것과 똑같이 보인다면 그것 역시 대칭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음양 도형이 이런 회전 대칭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319]

 

17장                          변역의 모형

 

18장                          상호 관통

 

맺음말

 

일상 생활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과 유기적 우주관 둘 다 정당하며 유효하다. 전자는 과학과 공업에, 후자는 균형 있고 충만된 정신 생활에 대해서 그렇다.[382]

 

유기적 견해는 기계론적인 것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처럼 보인다. 고전 물리학은 양자론으로부터 이끌려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383]

 

나는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물리학자는 추론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고, 신비가는 직관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이 둘은 세계에 관한 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385,386]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는 세계관이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형평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386]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에 발전된 현대 물리학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자연관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하고 있다. 즉, 20세기 들어 물리학이 새로이 다루게 된 우주의 극대 세계와 원자의 극미 세계에서 발견한 새로운 현상과 이론(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그 기계론적 자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그는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1)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으로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며,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는 것, (2) 전일성 내에서 사물들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이 일체를 포용하고 통일체 속에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 (3)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 (4)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고 어떠한 묘사와 상술로도 설명이 불가능하여 그것은 종종 무형, 공 또는 허라고 일컬어지지만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쉬운 서술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 이름만 들어도 무거워 보이는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카프라 박사는 방대하고도 어려운 내용을 그 특징을 잘 잡아 내면서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덕분에 대략적인 개요는 알아도 세세한 부분은 잘 몰랐던 두 이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보면서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도 참조하면서 읽었는데 순수한 이론 설명 보다는 동양 사상과의 비교를 통한 이해가 훨씬 쉽게 느껴졌다.

 

다만 구성 상의 아주 작은 단점이라면 1부, 2부의 깔끔한 구성과는 달리 3부 ‘대비’의 글들은 카프라 박사가 작성한 다양한 논문들을 엮어서 편집했기 때문인지 1, 2부에 이미 서술한 내용들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물론 이 부분은 동일 내용의 반복을 통한 이해 향상에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지적 탐험의 즐거움과 통찰의 느낌

 

본 저서에는 철학과 물리학, 동양사상과 관련된 많은 기본적인 설명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원류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 과학의 발전까지의 역사, 고전 및 현대 물리학의 다양한 원리에 대한 자세하면서도 쉬운 설명, 그리고 현대 물리학과 비교되어지는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선종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통해 다양한 사상의 흐름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에 대해서 전체의 일부이긴 하겠지만 그 개요와 의미에 대해서 파악하게 된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또한 그 동안 연구원 과정을 통해 공부했던 많은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평소에 잘 이해되지 않았던 신화의 의미, 선불교에서의 공안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의 신비주의, 특히 힌두교는 신화의 형식을 빌려 이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은유와 상징과 시적 이미지와 직유와 우화가 동원되고 있다. 신화적 언어는 논리와 상식에 의해 훨씬 덜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마력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암시적인 이미지가 풍부하고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적인 언어보다는 신비가들이 실재를 체험하는 방식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르면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66]

 

중국과 일본의 신비가들은 이러한 언어적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에 맞도록 실재의 역설적인 본성을 창출해 내는 대신에 그들은 가끔 사실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도가에서는 언어적 소통에서 유발하는 부조화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역설을 자주 상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도가들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중국과 일본의 불교도에게 계승시켰고, 소위 공안을 가진 선불교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른다. [67]

 

‘공안’은 세심하게 궁리해 낸 일견 사리에 합당치 않은 난문으로서,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 비합리적인 언사와 역설적인 내용은 사유로써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은 사유 과정을 정지시키고자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며, 그래서 제자에게 실재에 대한 비언어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대비시켜 주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풀려지면 이 공안은 더 이상 역설적이기를 그치고 각성을 도와주는 의식의 상태에서부터 만들어진 의미심장한 진술이 되는 것이다.[73,74]

 

시스템적 구성에 대한 이해

 

보통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허심할 때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52]

 

예전에 문득 길을 걷다가 ‘삶과 죽음의 차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이 갑자기 떠 올랐던 적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몸은 많은 조건에 의해 유지된다. 외부적으로는 물과 공기, 양분이 충분히 주기적으로 공급되어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많은 장기들이 자기 고유의 기능을 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유지되는 한에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한 생명을 유지하고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다가 ‘결국 생명이란 어떤 균형에 다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모든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조건이 충족 되지 않으면서 신체의 상호 의존적 균형의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장기가 기능을 정지하면 이로 인해 인체 시스템의 균형이 깨지면서 상호 의존의 사슬이 무너지면서 기능 정지가 연속되면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즉, 인체는 상호 의존적인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고, 생명은 골격, 장기 뿐만 아니라 뇌와 근육 등 신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들의 연결의 총화로 구성된 ‘살아있음의 지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유기적 세계관에 기반 한 전일적 시스템이 생명과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체계임을 다시 한 번 모호하게 나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가 실재적 본질임과 그것은 불확실하게 확률적으로 존재할 뿐이며 이로 인해 정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변화를 도모하는 역동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큰 지적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 = mc2 에 의해 주어진다. 이 때, c는 빛의 속도다.[91]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사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양자 이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써 표현되며 파동의 형태를 취하는 수학적인 양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 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 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추상적이고 수학적 양인 ‘확률파’이다.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97]

 

바로 여기에 현대 물리학이 동양 신비주의의 허에 가장 가장 가까운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동양의 허와 같이 ‘물리적 진공’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가상적 소립자들과 진공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적 관계다. 진공은 진실과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리듬으로 고동치는 ‘살아 있는 허’이다. 진공의 동적인 성질에 대한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최고로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290]

 

뛰어들어 체험하는 삶의 중요성

 

저자가 강조하는 유기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는 역시 ‘관계’이며 ‘상호 작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체험에 의해서만 구성하고 발견할 수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듦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일이다.[26]

 

따라서, 현대 물리학을 통해 알게 된 유기적 세계관의 중요성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세계와 온 우주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고 내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삶에 ‘가슴을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사랑으로 길을 가는 것이리라.

 

이 시대에 부처의 길, ‘가슴이 있는 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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