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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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 (Ruth Benedict 1887-1948)
출생 및 성장
1887년 6월 5일 독실한 침례교 신자의 후손으로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두 살 무렵에 외과 의사이던 아버지 프레더리 풀턴이 급사하는 바람에 뉴욕주 섀턱 농장(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교사와 도서관 사서 등으로 일하며 힘겹게 두 딸을 키우면서 “네가 너희들 때문에 이 고생을 한다.”는 말로 생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에게 심한 염증을 느꼈고 내면적으로 깊은 고뇌를 느끼며 성장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주 어릴 적에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신체적 장애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성격이 우울해졌으며, 이러한 자신의 우울한 성격을 혐오하여 심적으로 대혼란을 겪기도 했다.
결혼과 학문
그녀는 1909년 어머니가 졸업한 배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했다. 1914년 여름 코넬 의과대학의 생화학자 스탠리 베네딕트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 그녀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를 두고 남편과 갈등하게 되었다. 그러한 갈등을 해결해줄 촉매제로서 아이의 출생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자신이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남편이 그 수술에 반대하면서 부부 관계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더욱 자신의 길을 가야겠다고 각오하게 되었고 이러한 그녀에게 1919년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32세가 되던 그해,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사회연구를 위한 뉴 스쿨에서 인류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것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임을 알게 되었다. 평소 늘 갖고 있던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가?” “나는 왜 인생에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가?” “나는 왜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문화인류학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34세가 되던 1921년, 컬럼비아 대학원에 입학하여 그녀의 절대적 스승이자 문화 상대론의 대표 주자로 미국 문화인류학의 터전을 닦은 프란츠 보아스(1858-1942)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었다.
1923년 이래 현지를 답사하며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에 관한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1930년부터 모교에서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4년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 <문화의 패턴>(1934)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종족>(1940)을 출간함으로써 미국 인류학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1943년 워싱턴 전쟁공보청에 해외정보 책임자로 파견되어 전쟁 지원 업무, 우방국가, 적성국가, 적국에 의해 점령된 국가들 등 전시 미국과 관련 있는 나라들의 문화를 연구했다.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여름, 그녀는 군부로부터 독일로 가서 점령 문제를 연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신체검사에서 허약한 심장 때문에 불합격되어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유럽행이 좌절되자 그녀는 1945-1946년 학기 동안 컬럼비아 대학으로부터 전시 연가를 받아 캘리포니아로 가서 일본 문화를 심층적으로 파헤친 만년의 명작 <국화와 칼>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화를 인성의 확대로 보고 ‘문화와 인성’이라는 미국 인류학의 가장 주도적인 한 영역을 개척한 그녀는 1946-1947년 미국 인류학회 회장에 선임되었고 1947년에는 컬럼비아 대학에 현대문화연구소를 설치, 대규모 연구 과제를 추진하였으며 1948년 7월 컬럼비아 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미국 사회 내의 완고한 성차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4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미나에 참석하였다가 귀국한 지 이틀 후 심장혈전증을 일으켜 닷새 뒤인 1948년 9월 17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성 정체성과 여성의 삶
비록 베네딕트 생존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녀의 성 정체성 또한 독특한 인생의 에피소드이다.
그녀는 1922년 가을 미국 문화인류학에 심리학적 방법을 도입, 발전시킨 마거릿 미드를 만났다. 미드의 룸메이트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녀가 친절하게 위로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친해지게 되었고 1923년 미드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미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학 시절 베네딕트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주 외로운 학생이었으나 기이한 방식으로 다른 외로운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베네딕트가 외로운 여성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사람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925년 미드가 사모아 섬으로 현지 탐사를 나가게 되자 1926년경 미드보다 두 살 아래인 21세의 나탈리 레이몬드라는 여성과도 사귀게 된다. 이후 그녀는 1931년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신하고 더 이상 남자와는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52세 때이던 1939년 배서대학 동창생으로 4세 연하인 루스 밸런타인을 만나 사망할 때까지 그들은 줄곧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
절반쯤 청각장애인이 된 아이, 조울증 기질을 가진 소녀, 결혼에 실패하여 별거한 여자, 성 정체성에 심한 혼란과 갈등을 느낀 여자, 남성 주도의 대학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으며 경쟁해야 하는 여성 학자 등 그녀는 이런 분리한 상황 아래서 자신의 독립적 태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인류학 연구를 선택했다. 그녀는 문화가 사회 내의 ‘비정상적’ 개인을 규정한다고 진단하면서 자신의 개성은 그저 개성일 뿐 비정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변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온갖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여 세계적 인물이 된 그녀의 일생은 자신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페미니스트의 한평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록 눈에 거슬리더라도 그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냉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6)
세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감성적 형제애가 지배하는 곳이다. 세계 속 각 개인은 특정한 관심과 역사, 경험에 의해 형성된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각 개인에 대해 진실이라면 국가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베네딕트가 말한 이른바 ‘어느 정도의 관대함’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다른 나라의 문화가 지닌 관점이 비록 자신의 견해와 충돌하더라도, 그것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6)
특히 극심하게 충돌하는 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비상한 관대함이 요구된다. 이런 관대함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적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만이 사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7)
일본 전문가도 아니고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베네딕트는 오직 문서 자료(학술 서적과 영어로 번역된 일본 소설 등)와 영화, 일본계 미국인들과의 인터뷰에만 의존했다. (7)
전문가가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전문가는 때로 융통성 없는 편협한 견해를 고집하기 쉽다. 또한 새로운 발전이나 아이디어가 자신의 전문 지식을 위협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8)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중의 하나는, 죽음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던 일본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하고 우호적으로 변한 사실이었다. (10)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견해에 조건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일신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절대 기준이 없는 일본인들에게, 윤리나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이 상황의존적일 뿐이다. 따라서 그렇게 호전적이던 민족이 쉽사리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
역자 서문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다로 ‘하지(수치, 부끄러움)’의 인식에 놓인 문화다. (14)
제1장 연구 과제 - 일본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에 관한 책을 쓸 경우, 동시에 이 국민이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사실을 기술한 또 다른 책이 그 국민의 성격을 보충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없다. (20/21)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민감하다. (21)
민족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강인한 신념과 그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성을 함께 필요로 한다. (34)
창이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 (35)
이 책에 기술된 사항의 이상적인 전형은 이른바 서민이다. 서민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각각 특수한 경우에 행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조건 아래서는 그런 행위를 한다고 인정할만한 사항을 기술했다. 이런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 (37)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이 연구의 목적은 일본인의 문화와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다. (43)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자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44)
이런 태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층제도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신뢰. 그것은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층제도가 일본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그 제도에 어떠한 장점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45)
그들의 군대용 교과서 첫머리에는 큰 활자로 ‘필독필승’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소형 비행기로 미군의 군함에 뛰어들어 자폭하는 조종사들은 물질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교훈이 되었다. 이 조종사들을 가미카제 특공대라 한다. 가미카제는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시켜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 (48)
일본인의 병력 소모 이론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이르게 한 것은 무항복주의였다. 서양의 군인들은 최선을 다해 싸운 후에 도저히 대적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항복. 그들은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명예로운 군인이라 생각하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명단을 본국으로 통보해주기를 원함.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또 자신의 가정에서도 모욕을 받지 않음. 그렇지만 일본은 이런 상황을 전혀 다른 식으로 규정. 일본인에게 명예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65)
제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하는 일본인과, 자유와 평등을 신뢰하는 미국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계층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71)
세계사에서 어떤 주권국가도 일본만큼 계획적으로 문명을 훌륭하게 수입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87)
일본은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이용하여 - 그것은 서양의 장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 높은 지위에 있는 일군의 유력인사도 일반민중의 이론도 결코 요구하지 않는 목표를 이루어냈다. (107)
제4장 메이지유신
19세기 전반에 겨우 중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오늘날로 따지면 태국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비범한 정치적 수완을 필요로 하는, 더군다나 놀라운 성공을 거둔 메이지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능력을 가진 많은 지도자를 배출. 그 지도자들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전통적 일본인의 성격에 깊이 뿌리박힌 것. 그 성격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113)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 (122)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체계가,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국가에는 그런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이었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체계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134/135)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동양 여러 국민은 완전히 반대이다. 그들은 과거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 (137)
조상숭배라 하더라도 전적으로 조상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일체의 과거에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137/138)
일본에서 의란 조상과 동시대인을 포함하는 거대한 채무의 망상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138)
온의 여러 용법을 모두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139)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것을 한 사람이 내려준 은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황이다. (141)
비교적 인연이 먼 사람에게 뜻밖의 은혜를 입는 것을 일본인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다. (145)
일본의 거리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경찰이 아닌 민간인이 제멋대로 참견하면,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분명한 권한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받는다. (145)
당신은 예의바르게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마음속의 괴로움을 고백해야 한다.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온을 베풀었지만,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이 사람을 만난 일이 없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쪽에서도 온을 제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은혜를 받아서 꺼림칙하지만 사죄하면 약간은 마음이 편해진다. 감사를 나타내는 말 중 스미마센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리라. 내가 이 사람에게서 온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은 모자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자. 그 이상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147)
사소한 일에 관한 신경과민이나 쉽게 상처받는 현상은, 미국에서는 젊은 폭력배들의 기록이나 신경쇠약증 환자의 병력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것은 미덕이다. (150)
제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일본인에게 온은 중요하고도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채무다. (159)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라고 불린다. 이에 관해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부모에 대한 보은인 고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161)
모든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중되며, 또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한다. (161)
이 두 종류의 기무는 모두 무조건적이다. (161)
일본인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앞서기 때문에 이것을 ‘외부’의 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169)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 이외에는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현재에 집중한다. 많은 저서가 일본인은 추상적 사색이나 현존하지 않는 사물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에 흥미가 없다고 논한다. (169)
일본 효행의 특징은 가족 구성원간에 뚜렷한 원한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72)
미국에서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179)
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기리는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낸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에 속한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 (183)
‘기리를 안다’는 것은 목숨을 바쳐 주군에게 충절을 다한다는 것이다. (190)
인생의 모든 접촉은 반드시 이런저런 기리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 기리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기분으로 하는 사소한 말이나 행동까지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방심하지 말고 걸어 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
기리는 정확히 같은 양으로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기리는 기무와 구별된다. 기무는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193)
기리에 몰린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당한다. (196)
제8장 오명을 씻는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199)
또한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방은 자신의 명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예를 훼손시킨 자에게 복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00)
훌륭한 사람은 모욕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200)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즘,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여자는 분만할 때 큰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고,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해야 한다. (203)
빚을 깨끗이 갚아야 하는 기한인 설날이 다가오면,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살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섣달 그믐에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207)
일본인은 예부터 늘 무엇인가 교묘한 방법을 궁리하여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려 했다. (211)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는 이런 노력은 일본인의 생활 전반에서 나타난다. (211)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이다. (212)
복수는 누군가에게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때의 ‘바람직한 대응’으로, 일본의 전통 속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218)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최근 수십 년간 일본소설에는 교양 있는 일본인이 빈번히 자아를 잃고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우울에 빠져드는 모습이 거듭 묘사되고 있다. (223)
이런 일본인 특유의 권태는 과도하게 상처받기 쉬운 국민 공통의 병이다. 그들은 배척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부로 돌려 스스로를 괴롭힌다. (223)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보다 자신을 죽이는 사건을 화제에 올리기를 좋아한다. 베이컨의 말을 빌리면, 일본인은 자살을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flagrant case(중대한 사건)’로 친다. 그것은 다른 행위를 논해서는 충족되지 않는 어떤 요구를 충족시킨다. (226)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231)
일본인은 침략의 근거를 다른 데서 구한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강대국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강대국에 필적하는 나라가 되기 위한 방침을 취했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도 낙후되었기 때문에 서양 여러 나라 이상의 악랄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비상한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233)
제9장 인정의 세계
일본의 도덕률은 뜻밖에도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의 쾌락을 허용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239)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39)
일본에서는 의무와 마찬가지로 쾌락을 배운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쾌락 그 자체를 가르치는 일은 없다. (240)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쾌락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240)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253)
일본인은 항상 덕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255)
행복 추구를 인생의 최대 목표로 하는 사상은, 그들에게는 놀랄 만한 부도덕한 가르침이다. 행복은 사람이 그것을 탐닉하여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다. (256)
제10장 덕의 딜레마
사무라이는 춤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칼로 쇼군을 찌르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다이묘에 대한 기리로 사무라이는 군명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는 쇼군에게 대항하는 것을 금했다. 장막에 비친 칼춤은 이 갈등을 남김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는 해야 하는 동시에 해서는 안 된다. (275)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 때 보통 ‘성실’을 선택한다. (283)
‘성실’이 미국인이 생각하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모든 일본어 문헌에서 주의해야 할 극히 유용한 말임을 알 수 있다. (289)
현재 일본인은 때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청교도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일본인은 죄의 중요성보다도 수치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295)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 죄의 자각에 의거해 선행을 하는 데 비해,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해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296)
“일본인 누구나가 그러하듯, 나도 나의 행동을 전혀 흠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랑스러움은 무참히도 상처받았다. 나는 이 나라에서는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해, 또 내가 이때까지 받아온 예절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경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이 막연한 그러나 뿌리 깊은 분노의 감정 외에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나에게 남지 않게 되었다.”
<나의 좁은 섬나라> (299)
제11장 자기 수양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자기 수양의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인의 ‘자기훈련 ’ 개념에 일종의 외과적 수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이 관념의 주위에 달라붙어 잇는 ‘자기희생’과 ‘억압’이라는 부산물을 잘라내야만 한다. 일본에서는 훌륭한 경기자가 되기 위해 자기 훈련을 한다. 희생 의식을 수반하지 않고 훈련을 받는다. (309)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정신적 훈련(혹은 자기 훈련, 즉 슈요을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이 표현은 통상 “이리하여 비로소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번역된다. 자기훈련은 “배(자제력이 깃드는 곳) - 배짱 - 를 만든다. 그것은 인생을 확대한다. (309/310)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어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 예리한 칼로 만든다. (310)
일본인은 이와 같은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310)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 외에 그 이상의 것으로서 ‘숙달’이 있다. (311)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의지와 행동 사이에 일종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일본인은 이 장벽을 ‘보는 나’, ‘방해하는 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훈련으로 이 장벽을 제거하면,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 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행위는 노력 없이 행해진다. (312)
일본의 수행법이 대개 인도의 요가 수행에서 유래한 만큼 더욱 흥미롭다. 일본의 자기 최면, 정신 집중, 오관 제어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의 관행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314)
그들은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조차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누구라도, 심지어 신분이 낮은 농부조차도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했다. 각 가정의 불단에 모신 가족의 위패를 나타내는 말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불교 국가는 일찍이 없었다. (315)
무슨 일을 하든 어차피 부처가 되는 것이라면, 굳이 한평생 육체를 괴롭히고 절대적 정지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315)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한다는 교리이다. 요가 수행은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315)
일본인은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을 말없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로 쓴다. (330)
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일본의 갓난아이는 서양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양육되고 있다. (335)
그것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가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자유는 최저에 달한다. (336)
일본의 갓난아이는 보통 걷기보다는 말을 먼저 한다. 기어다니는 것은 보통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갓난아이는 만 한 살이 될 때까지는 서거나 걷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있어서, 어머니는 그 이전에 갓난아이가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 (342)
늘 쓰이는 훈계의 말은 ‘더럽다’는 말이다. 일본의 집은 정연하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어린아이는 그것을 존중하도록 배운다. (344)
나체로 목욕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사내아이는 아무렇게나 잠을 자도 괜찮지만, 여자아이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곧바로 편 채 자야 한다. (353)
음주와 같은 ‘자유로운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절대로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생활의 중요한 면에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는 말은, ‘바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이 사용하는 가장 심한 악담이다. (375)
그들은 세상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384)
그들이 그렇게 공격적 행동을 취하는 경우는 미국인처럼 자신의 주의주장이나 자유가 도전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모욕당했거나 비방당했다고 느꼈을 때이다. (384)
이제 일본인은 정신적 자유를 증대할 수 있는 과도기에 서 있다. 그 하나는 그들이 ‘몸에서 나온 녹’은 그들 자신이 처리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자기책임의 태도이다. 이 비유는 신체와 칼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칼을 찬 사람에게 칼이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 행동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 지속성의 결여, 실패 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387)
이런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고도 훌륭하게 자기 행동을 책임지는 사람의 비유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서 이 덕은 가장 평형의 역할을 한다. (387/388)
오늘날 일본은 서양적 의미에서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제의했다. 그런데 일본적 의미에서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이다. (388)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396)
일본인은 일정한 행동방침을 취하고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그는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실패한 주장을 버린다. (400)
일본은 일찍이 강대국을 이긴 바 있다. 일본은 전승국이 되었을 때 항복한 적이 일본을 조소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패배한 적에게 모욕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403)
일본인은 침략 전쟁을 하나의 오류나 실패한 주장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향한 최초의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평화로운 나라 사이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회복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413)
3. 내가 저자라면
일본의 다양한 이중성, 벚꽃과 국화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중의 하나는, 죽음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던 일본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하고 우호적으로 변한 사실이었다. (P10)
나라마다 나라꽃이 있다. 일본의 나라꽃은? 우리는 벚꽃이라고 알고 있지만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며 좀 어정쩡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벚꽃이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여겨져 왔고 벚꽃은 일본 신화에도 나타나며 일본인들에게는 봄에 벚꽃 구경을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자 중요한 연중행사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벚꽃이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잘 나타낸다고 말한다. 한창때 확 피었다가 금방 시들어 한꺼번에 져버려 땅에 떨어지는 벚꽃의 특성이 마치 예전 군국시대의 일본인들의 단체생활, 조직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벚꽃의 속성을 미화해 자신의 주군을 위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는 윤리 의식 기리, 그리고 명예를 위해 깨끗하게 목숨을 버리는 사무라이 정신과 결부지어 ‘벚꽃과 같다’고 표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국민들에게 ‘국가를 위해 벚꽃같이 확 피었다 확 사라지라’는 의미에서 벚꽃을 강조했다. 꽃이 질 때 꽃잎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리는 모습에서 가미카제(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시켜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 제2차 세계대전 때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일본군 특공대) 혹은 할복을 의미하는 아름다운 죽음(희생)과 단결의 표상으로 삼을 만큼 자신들의 정서와 부합한다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국민의 꽃’으로 삼았다고 한다.
봄철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져버리는 벚꽃구경에 목숨을 거는 그들의 모습에서,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벚꽃 개화시기에 맞춰 일순간에 밤하늘을 수놓았다가 일순간에 사라져가는 하나비(불꽃놀이)가 성행하다, 벚꽃이 지고 나면 언제 그렇게 했느냐는 듯이 또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중성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자신들도 똑같이 해야 하며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만이 뭔가 소외되고 일본인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생활화 되어 있다.
한편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천황가의 꽃으로 국화가 있다. 국화는 황실의 문장에도 있고 일본 여권에도 새겨져 있으며 국회의원들도 11개의 국화잎이 새겨진 배지를 가슴에 단다. 그래서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 치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나라꽃인 벚꽃보다 국화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꽃들이 피지 않는 차가운 가을에 홀로 피는 국화는 깨끗하고 청결하고 엄숙하고 고귀하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 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화한 벚꽃의 이중성뿐만이 아니라 죽음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던 일본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하고 우호적으로 변해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과거의 이중성, 칼(전쟁)을 숭상하면서도 국화(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인들 스스로도 인정한 앞에 내세우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른 이중적인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있다. 한자어로 표리부동(表裏不同), 마음이 음흉하여 겉과 속이 다르거나 말과 행동이 다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인들의 두 얼굴, 그들의 이중성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여간해서는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의 속내. 칼을 품은 속마음은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 국화인 것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사자의 무리, 창조적 소수로 살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의 심성으로 접근한다면, 우리 문화에서는, 나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가 창조적 소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속내를 터놓지 않고서는, 더욱이 두 얼굴의 모습을 하고서는 절대 창조적 소수 그들과 깊이 만나고 멀리 갈 수 없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게는 앞뒤 재지 않고,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으며, 꾸밈없이 마음가는 대로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우리의 정서로는 답답할 정도로 속내를 감추고 사는 그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창의성은 모방할 수 없다
일본인은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P21)
세계사에서 어떤 주권국가도 일본만큼 계획적으로 문명을 훌륭하게 수입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P87)
일본은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이용하여 - 그것은 서양의 장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 목표를 이루어냈다. (P107)
모두가 알다시피 일본인들은 남의 문화를 가져와 자기 스타일로 화악 바꿔놓는데 귀재다. 나가사키 카스텔라만 해도 원조는 포르투칼이지만 지금은 나가사키 지역의 명물이 됐고, 우리나라에서 현재 유행하는 빈티지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인테리어는 북유럽이 원조이지만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이 먼저 들여와 일본 특유의 정갈하고 소박한 스타일과 결합해 새로이 만들어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래문화를 도입해 기본에 충실한 고집을 고수하면서도 시대변화에 뒤쳐지지 않는 유연성을 발휘하고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활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능력이 타고난 나라, 모방에서 안주하지 않고 더 좋은 개량품을 만들어 내는 창의력이 대단한 나라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일본제품이 세계경제시장에서 날개를 펼 수 있는 이유이면서 일본이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키워드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이러한 일본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 바로 창의성이다. 선배와 인테리어용 원단을 디자인하고 재직해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우리가 개발한 제품과 유사한 상품이 시장에 나돌기 시작하면 더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계발에 공들인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금방 카피품이 나도는 상황에 상심해하고 억울할 때가 더 많지만 현 시장의 여건상, 단지 저작권을 취득했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할 수도 안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해나가면서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은 것,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발견해낼 수 있는 능력,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나의 살길이라는 생각이다. 제품은 모방해도 우리의 창의성은 그 누구도 모방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철저한 장인정신을 추구하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마치코바라고 불리는 직역하면 동네 공장으로, 일하는 사람의 숫자가 10명 안쪽인 소규모 기업과 전통과 격식으로 무장해 3-4대는 기본이고 10대 이상 대를 이어가며 노포라 불리는 100년 이상된 오래된 가게들이 동네방네 작은 골목 곳곳에 위치한 그 풍경에 놀라곤 한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빨라졌고 경쟁은 갈수록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보잘 것 없는 가내수공업이라 할지라도 대물림하면서 특정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닦아가고, 시련을 견디고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며, 철저한 장인 정신과 나름의 독특한 철학으로 시대에 무조건 영합하지 않고 시대가 나를 필요로 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인들. 어찌 보면 블루오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혁신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들, 수작업의 로망을 간직한 나에게 부러운 환경과 역할 모델로 언제나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
근대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 때 보통 ‘성실’을 선택한다. 오쿠마 백작은 일본의 윤리를 논하여 이렇게 말했다. “마코토(성실)이야말로 가장 긴요한 가르침이며, 여러 도덕적 교훈의 기초는 이 말 한마디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좋다. 우리나라 고대 어휘 속에는 마코토를 제외하고는 윤리적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 없다.” (P283)
마치코바와 노포가 오랜 시간 존속해온 데에는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제일로 여기는 덕목, 바로 성실이 밑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에 충실한 뛰어난 기술력으로 최고를 추구하며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일구어내는 그 성실함으로 자신의 삶을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아 성실하게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가는 장인들의 모습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들처럼 나도 나의 일, 나의 삶 속에서 빛나는 사람이 될 날을 기대해본다.
문화를 대하는 태도 - 관용
세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감성적 형제애가 지배하는 곳이다. 세계 속 각 개인은 특정한 관심과 역사, 경험에 의해 형성된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각 개인에 대해 진실이라면 국가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베네딕트가 말한 이른바 ‘어느 정도의 관대함’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P6)
오늘날 일본은 서양적 의미에서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제의했다. 그런데 일본적 의미에서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이다. (P388)
저자는 저술 당시, 호전적이던 일본인들이 쉽사리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윤리나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이 상황의존적이기 때문이었으며 일본은 세계열강이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 순간 군국주의로 회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일본의 변하지 않을 주요한 특질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전쟁의 패배 이후 일본은 국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유별나게 평화 지향적 민족처럼 행동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인 대다수는 평화주의적 이상을 고수하고 있다.
세상일이라는 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오늘날 차이를 인정하는 저자의 관용을 좀 더 확대해 본다면 일본인들의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이중성도 속마음을 드러내놓고 살자고 외치며 오랜 습성에 도전하는 날이 곧 오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와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야기의 요소가 강하다. 먼저 이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객관적 사실들, 즉 미국인과 일본인들의 말과 행동을 제시하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저자의 생각과 이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세계적으로 보면 두 나라 모두 매우 작은 나라들이고 같은 동양권이라 유사한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일본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인 온, 기리, 기무 같은 개념들은 내가 느끼기에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누군가가 쫓아가 주워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꺼림직해 하고 모욕에 대한 민감한 반응, 모욕에 대한 복수를 자신의 명예에 대한 것으로 찬양하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부채로 대하는 마음을 훌륭한 태도, 의무라 여기는 그들을 이해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서로 가까운 나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과 한국, 문화의 차이는 컸다.
한국과 일본이 많이 가까워 졌다고는 하지만 좀 더 가까워지려면 무엇보다 서로의 문화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나에게는 평소 여러모로 관심이 많았던 일본에 대해 더 자세히, 바로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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