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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8일 11시 17분 등록
 

국화와 칼

루스 베네틱트 지음 Ⅰ 김윤식 ․ 오인식 옮김

을유문화사


Ⅰ. 저자에 대하여


베네딕트는 1887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두 살 무렵에 외과 의사이던 아버지가 죽은 후  뉴욕 주 섀턱 농장(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교사와 도서관 사서 등으로 일하면서 힘겹게 두 딸을 키웠다. 그 때문에 베네딕트는 내면적으로 깊은 고뇌를 느끼며 성장했다. 과부 생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호소하던 어머니에게 심한 염증을 느꼈고, 발작 비슷한 격심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어린 베네딕트가 아버지의 관 옆에 서 있는데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그런 신경질적인 여자가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신체적 장애도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이 때문에 성격이 우울해졌는데, 두 살 아래 여동생 마저리는 성격이 밝고 예쁘고 활달한 아이여서 더욱 대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성격을 혐오하여 심적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눈물 없는 외양을 꾸며야 했기 때문에 더욱 자기 혐오감이 깊어졌다. 베네딕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썼고 1909년 배서 대학 영문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녀는 한때 문필업에 전념할 생각도 있었으나 문화인류학에 입문하면서 시 쓰기는 중단했다.


베네딕트는 1914년 여름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했다. 이 무렵 남편은 뉴욕 시 코넬 의과대학에서 생화학자로 근무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를 두고 남편과 갈등을 빚었다. 그녀는 그런 갈등을 해결해줄 촉매제로서 아이의 출생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1919년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 해에 그녀는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남편이 그 수술에 반대하면서 부부 관계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다.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베네딕트는 더욱 자신의 길을 가야겠다고 각오하게 되었다.


그녀는 32세가 되던 1919년 일반인을 위한 인류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것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임을 알게 되었다. 평소 늘 갖고 있던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가?” “나는 왜 인생에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가?” “나는 왜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문화인류학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학문에 매진했고 이후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루스 베네딕트의 삶은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다. 절반쯤 청각장애인이 된 아이, 조울증 기질을 가진 소녀, 결혼에 실패하여 별거한 여자, 성 정체성에 심한 혼란과 갈등을 느낀 여자, 남성 주도의 대학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으며 경쟁해야 하는 여성 학자 등 온갖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 인물이 되었다.


베네딕트는 이런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변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런 만큼 그녀의 글에는 자기 지칭성(베네딕트 자신의 문제를 문화의 분석에 원용하는 것)의 경향이 강하다.


『국화와 칼』은 『일본문화의 극기 훈련』이라는 논문은의 한 챕터를 가져온 것이다. 이 논문은 극기에 도달하는 선불교의 정신과 수행을 기술하고 있다. 선불교는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베네딕트에게 하나의 해결안을 제시했다. 베네딕트는 퓨리터니즘과 감성의 부흥이라는 모순적 경향을 가진, 복음주의적 침례교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어릴 적 신앙을 버렸고, 그 이후 꾸준히 대안을 찾아왔는데 선불교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선불교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 개인의 자아, 내세와 신비주의의 거부, 선정(禪定)과 명상, 공안(公案)이라는 화두, 무술의 정진 등을 통해 개인의 극기를 유도하고 또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분열된 자아의 치유와 화해를 강조한다. 이런 선불교의 훈련을 통해 통합된 자아를 성취한 개인은 그 어떤 긴장이나 구속, 수치심과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가르침은 인생의 의미와 관련하여 깊은 고민과 갈등을 되풀이 해온 베네딕트에게 분명 하나의 빛이 되었다.  

‘국화와 칼’은 미 전시정보국의 요청을 받아 미국에 사는 일본인 면담과 방대한 자료 조사만으로 씌어졌다. 그럼에도 7세기에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계층적 위계질서 의식, 하지(恥)와 명예 관념, 기리(義理), 닌죠(仁情), 온(恩) 개념 등을 명확하게 분석해낸 이 책은 차후 일본 문화 분석에서 기본적인 준거가 되었고 뛰어난 일본 연구서로 평가받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문화의 패턴》(1934),《주니족 신화》(1935),《인종: 과학과 정치》(1940),《타이의 문화와 행동》(1943) 등이 있다.



Ⅱ. 내 맘에 들어온 글귀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는 날줄과 씨줄로 되어있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인 것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인 것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공격적이자 비공격적이며, 군국주의적이고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리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맞이한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르게 될 때는 범죄의 유혹에 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 이다.   p.8


이 책은 일본에 있어서 예기되고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 습관에 관해 기술한 것이다. 일본인은 어떤 경우에 예의를 지키며 또 지키지 않는가,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 수치를 느끼며, 당혹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 등등에 관해 기술한 책이다. 이 책 속에 기술된 일의 이상적 전거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름난 시정인(市政人)일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각각 특수한 경우에 행한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러한 조건 아래서는 그러한 행위가 행해진다고 인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 가령 이 책이 거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하튼 그렇게 하는 것이 이상(理想)이다.  p.20


일본은 게다가 전쟁 승리의 가능성을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근저 위에 놓고 있었다. 일본은 정신력으로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물론 미국은 대국이며 군비가 우수하다. 그렇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러한 것은 모두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며 우리는 처음부터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일본의 유력한 일간지 마이니치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다. “만일 우리가 숫자를 두려워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의 풍부한 자원은 결코 이번 전쟁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p.26


서양의 군인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중과부적이란 점을 알면 항복을 한다. 그들은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가지들을 명예 있는 군인이라 생각하며, 그 명단은 그들이 살았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본국으로 통지된다.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또 그들 자신이 가정에 있어서도 모욕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경우 일본인은 사태를 전혀 다른 식으로 규정한다. 일본인에게 있어 명예란, 즉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절망적 상황에 몰렸을 때에는 일본군은 최후의 수류탄 하나로 자살하든가 무기 없이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집단적 자살을 하든가 그 둘 중의 하나이지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만일 부상했든가 기절하여 포로가 된 경우조차도 그는 “일본에 돌아가면 얼굴을 들고 걸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는 명예를 잃었다. 그 이전의 생활에서 본다면 그는 ‘죽은 자’였다.  p.40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서와 계층 제도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우리들이 계층 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 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본인의 계층 제도에 대한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관계 및 인간과 국가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어서 가족, 국가, 종교생활 및 경제 생활 등과 같은 그들의 국민적 제도를 기술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우리들은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일본인은 국내 문제를 계층 제도의 견지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국제 관계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에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국제적 계층 제도 피라밋의 정점에 점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리하여 그 위치를 이미 서구 여러나르들이 차지해 버린 지금에도, 그들이 여전히 현재의 사태를 감수하고 있는 태도의 밑바닥에는 똑같은 계층 제도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깔려 있다.  p.44


사무라이와 다른 세 계급, 즉 농 공 상인과의 사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세 계급은 서민이었지만, 사무라이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그들의 특권으로서, 또 그 카스트의 표시로서 허리에 찬 칼은 단순하 장식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는 서민에 대해 그것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도쿠가와 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그러했다. 이에야스의 법령이, “사무라이에 대해 무례하게 군다든가, 그들의 상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서민은 즉석에서 참해도 좋다.”라고 규정한 것은 실상은 전부터의 습관에다 법적 효력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p.62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형태로 실현된 봉건 시대의 일본 계층 제도가 근대 일본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봉건 제도가 법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은 요컨대 겨우 75년 전일 따름이다. 그 뿌리 깊은 국민적 습성이 겨우 인간의 일생에 불과한 75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소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 일본의 정치가들도, 다음 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국가 목적의 근본적 변경에도 불구하고 이 계층 제도의 많은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행동의 끝에서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고, 모든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 그러한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조건지워져 있다. 법과 질서가 이러한 세계 속에서 무력에 의해  유지된 200년간, 일본인은 이 면밀히 기획된 계층 제도를 안전과 보증으로 동일시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들은 이미 아는 영역에 머무는 한, 이미 아는 의무를 이행하는 한, 그들의 세계를 신뢰할 수가 있었다.   p.68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 체계는 다른 어느 곳에도 기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나라들에는 그러한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진짜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 체계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앞서 먼저 그 도덕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p.91


온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는데 그 용법 전부에 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의 힘으로써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의 윗사람이 아니거나 도는 적어도 그 사람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그 사람에게 주게 된다. 일본이이 “나는 누구에게서 온을 입었다.”라고 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 대하여 위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라서 그들은 채권자나 은혜 입힌 사람을 그들의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  p.94


일본인은 양에 있어서나 계속 기간에 있어서나 다 같이 무제한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이 동일하며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갚음은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이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孝)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忠)라는, 의무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형태를 함께 배합하고 있다. 기무라는 이 두 개의 의무는 강제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일본의 교육은 기무 교육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정말 적절한 명칭이다. 이 말처럼 유감없이 필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우발적 사건들이 어떤 사람의 기무의 세목을 수정하는 수는 있으나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짊어지워진 것이며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108


천황은 일체의 세속적 고려에서 떠난 신성한 수장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일본인의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忠)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아지경적인 정관(靜觀)으로서 받들어야 한다.  p.117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을때 세계는 이 주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 사실을 목격하였다. 일본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많은 서구인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여러 섬 곳곳에 산재한 일본인들이 순순히 무기를 버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지식한 생각이라고 그들은 주자하였다. 일본군의 대부분이 아직 지역적으로 패배를 당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들대로 전쟁 목적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일본 본토의 여러 섬도 최후가지 완강히 항전하는 군인들로 충만되어 있다. 따라서 점령군은 그 전위부대가 소부대로 구성되지 않는 한 함포의 사정권을 넘어서 진격할 경우에는 전부 살육을 당할 위험이 있다. 전쟁 중 일본인은 어떠한 단호한 일이라도 간단히 해치웠지 않았던가. 그들은 호전적인 국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을 분석하고 있던 미국인은 주를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던 것이다.  p.122


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부류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기리’-문자 그대로 기리를 갚는 것-라 부르는 것은 동배에게 온을 갚는 의무요, ‘누구의 명에 의한 기리’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명과 명성이 어떤 오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럭 하는 의무이다. 기무가,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야 세상에 대한 기리(義理)는 거칠게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기리는 법률상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기무는 직계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한다. 법률상의 아버지는 기리의 아버지로 불리고, 법률상의 어머니는 기리의 어머니, 법률상의 형제자매는 각각 기리의 형제, 기리의 자매라고 불려진다.  p.126


그들은 사람이 기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만일 그렇게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p.132


실제로 일본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상태의 무기력 사이를, 기분이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일본인은 지금에 와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데 모든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연합국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무엇을 해 보더라도 안 될 테니 잠시 제자리걸음으로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무기력은 퍼진다. p.159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 지는 수단은 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거나 또 버려두는 도구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를 일변하여 새로운 진로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다.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p.160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가 아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중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p.165


로맨틱한 연애 또한 일본인이 함양하는 인정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결혼 형태와 가족에 대한 의무에 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일본인의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일본 소설은 그것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프랑스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은 기혼자이다. 정사(情死)는 일본인이 즐겨 읽고, 또 즐겨 화제에 올리는 테마다.  p.170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자인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발을 들여 놓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주요한 의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저마다의 영역이 ‘알맞은 위치’에 정해지는 습관은, 가정의 이상적인 아버지에게도 혹은 풍류인에게도 이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보게 한다.  p.171


이상과 같은 일본인의 ‘인정’관은, 몇 가지 중요한 귀결을 수반한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자의 생활에서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철학을 근저에서부터 뒤엎는다.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肉)은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에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인은 이 신조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고 하는 결론으로까지 가져간다.   p.176


일본인의 인생관은 그들의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닌조(人情) 등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대로이다. 그들은 ‘인간 전체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제 지역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이 ‘주의 세계’ ‘고의 세계’ ‘기리의 세계’ ‘진의 세계’ ‘닌조의 세계’, 그밖에 또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인간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판단하지 않고, ‘고를 모른다’든지, ‘기리를 모른다’든지 하는 말로 판단한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대신에, 인간이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은 행동의 세계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이기적이라든지 불친절하다든지 하고 비난하는 대신에, 일본인은 그 인간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 영역을 명시한다.  p.181


일본인은 각기 자신의 생활,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만일 의무의 법도와 상용되지 않는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모든 종류의 사태가 이런 형태로 판단되는데, 그 중에서도 서구의 윤리와 가장 대조적인 것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태도이다. 아내는 고(孝)의 세계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데 불과하지만 부모는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남편의 의무는 명백하다. 공고한 도덕적 품성을 자긴 인간은 고를 따르며, 만일 어머니가 아내와 이혼하기를 결정하면 그 결정을 수락한다.  p.193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려는 열의라는 것이다. 개개의 문맥에 있어서 마코토라는 말이 아무리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일본정신의 어떤 측면의 칭찬, 덕의 지도 위에 세워져 있는 공인된 이정표의 칭찬이라고 해석하면 틀림이 없다.  p.202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어서 말하면,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물론,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던 것이다.  p.219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일본인은 자기의 행위를 관찰하고, 타인이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 시비를 판단하도록 철저히 훈련받는다. 그의 ‘보는 나는’ 매우 상처입기 쉽다. 영의 삼매경에 몰입할 때, 그는 이 상처입기 쉬운 자아를 배제한다. 그는 이제, ‘지금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그때 그는, 이로써 자기는 마음의 수양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것은 검술을 배우는 사람이, 자기는 이제 겁먹지 않고 한 개의 기둥 위에 서는 훈련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p.232


일본의 생활 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관대함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도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 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움과 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  p.238


여자는 이름에 대한 기리를 배우지 않으며, 사내아이처럼 중학교나 군대교육이라는 근대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애는 사내아이의 생애에 비하여 훨씬 변화가 적다. 유아기의 기억이 남는 시기부터 그녀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사내아이가 우선적이며, 사내아이에게는 계집아이에게 부여되지 않는 보살핌과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살을 인정하도록 훈련되어져 있다. 계집아이들이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세술은 공공연히 자기주장을 할 특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p.261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 모순은, 그들의 어린 시절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그들이 자신의 작은 세계에 있어 작은 신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들어 주던 시절의 깊은 상처가 남는다. 이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이중성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 로맨틱한 연애에 빠졌다 하더라도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한다. 쾌락에 빠져 들고 안일을 탐하는 하면 극단적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해치운다.  p.266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배척되어 비방을 받는 큰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처럼 맛을 알게 된 개인적인 즐거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인생의 중대한 일에 있어서는 그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패턴을 위반하는 소수의 인간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는 위험에 빠진다. 스스로를 존중하는(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적으로 진로를 정하여 세상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버린다.  p.268


그들은 혁명가가 아니다. 일본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대중 운동에 희망을 걸고 있던 서구의 저술자들, 전쟁 중 일본의 지하 세력을 과대평가하여 항복 직후엔 그 지하 세력이 실권을 쥘 것으로 기대한 학자들, 또 대일 전승일 이래 선거에 있어 급진적 정책이 승리할 것으로 예언한 저술가들은 심히 사태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p.276


미국이 할 수 없는 것-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은 명령으로써 자유로운 민주적 일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어떠한 피지배국에서도 아직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써 일본인에게 선거에 의해 뽑힌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시켜서, 그들의 계층 제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바의 ‘알맞은 위치’를 무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써, 그들에게 우리 미국인에게는 습관이 되어 버린, 허물없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태도, 아무래도 자유 독립을 요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분, 각자가 갖고 있는, 친구들, 직업, 사는 집, 맡은 의무를 선택하는 정열을 받아들이게끔 할 수는 없다.  p.287




Ⅲ. 내가 저자라면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많은 편견과 오해로 인해 일본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지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여러 에니메이션을 접하면서 일본에 대해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통해 다시 일본의 참 모습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50년 전에 쓰여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주목받고 있다. ‘국화와 칼’은 이제 고전이 되었지만, 일본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이다. ‘국화와 칼’은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 한다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책이다. 이 책을 쓴 베네딕트는 일본에 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책보다도 일본에 관한 객관적인 통찰을 주고 있다.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일본인의 양면성에 대해 깊게 다루고 있다.


「국화」는 조용하고 겸손하고 정적인 느낌의 예의바른 일본인을 상징한다. 또 국화는 일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벗꽃"을 일본의 국화(國花)라고 알고 있지만, 국화(菊花)는 오래전부터 일본 왕실을 상징해왔던 꽃이다. 또 이와 상반된 「칼」은 사무라이들의 그 서슬 퍼런 칼의 느낌을 통해 또 다른 일본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중적 모순은 일본인들이 섬세한 미감과 동시에 칼의 냉혹함을 가진 민족임을 루스 베네딕트는 간파하고 있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 줄 아는 민족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일본인의 민족성을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일본인’으로 결론짓는다.


일본을 단 한 번도 방문한 경험이 없는 저자는 일본에 관한 기존 연구서와 2차 문헌을 폭넓게 독파하고, 소설과 같은 문학적 자료들과 전시 선전용 영화까지 섭렵해 인류학적 데이터를 추출함으로써, 일본인을 엄밀하게 분석하였다. 일본인의 국민성이 형성된 과정과 배경을 밝혀내기 위해 총체적인 문화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봉건사회의 위계체계와 메이지 유신의 과정, 가족제도와 조상숭배, 육아방식 및 사회화 과정, 불교와 신도라는 종교 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비교 문화적인 분석을 통해 충과 효, 혈연과 지연에 있어서 중국과 다른 점을 대비하며, 미국과 일본의 상이한 문화적 특성을 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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