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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12시 07분 등록

<백범일지- 백범김구자서전> - 김구 지음 / 도진순 주해

 

* 저자에 대하여 *

<백범 김구의 인생 역정歷程 - 인생의 시기별로 살펴본 백범 김구>

1. 청년기 - 개인사

백범은 조선이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1876년 8월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의 후예이며, 파의 시조인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방조 김자점의 역모 사건으로 滅門之禍를 당해, 그의 선대는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 지점의 백운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 후 농민의 신분으로 전락되어 역군토와 군역전을 경작하였다. 백범의 아버지 김순영은 빈천한 신분에 대한 불평과 의협심이 강해 양반들과 자주 충돌했고, 슬하에 김구만 두었다. 백범은 영락한 좡 때문에 겪는 천민 학대에 대한 恨을 품고 출세하고자 12세 학문을 배울 결심을 하게 된다. 백범의 초기 사상을 이룬 인간평등 의식은 이러한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17세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임진년 慶科를 해주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시장에서 회의를 느껴 벼슬길을 포기했다. 이 지점에서 인간 차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부조리한 사회를 통찰하는 성숙된 의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 후 풍수와 관상공부를 하던 중, 마의상서에 ‘얼굴 좋은 사람보다 몸이 좋은 사람이 낫고, 몸이 좋은 사람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낫다’라는 글귀를 보고, 벼술을 하여 천한 것을 면하여보겠다는 것이 허영심임을 깨닫고 마음의 수양을 하여 好心人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 인간 평등주의를 내세우는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난에 참가하였나 실패하였다. 곧 황해도 신천 청계동 안태훈 진사의 집으로 피신하여 안중근(안태훈의 아들)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가 이곳에서 자신의 일평생에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 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이 만남이 과격한 성정을 지닌 백범의 충의를 숭상하는 인물로 성숙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2.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가는 시기 - 사회사

여기에서는 백범 행적의 추이를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백범의 인생이 독립투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이다. 백범이 20세 되는 해에 민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단발령이 내려져 나라는 혼란스러워졌다. 이듬해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주막에서 민비 시해 사건의 울분이 원인이 되어 조선을 정탐하던 일본 육군 중위 쓰시다를 살해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은 백범이 고난한 혁명지사의 길로 들어서는 인생의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백범은 석 달 후인 1896년 5월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감옥에서 초연히 서양책을 접하여 사상의 넓이를 키우게 된다. 그것에서 文盲한 동료 죄수들을 가르치며 백범이 깨달은 것은 자주독립은 백성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백범을 교육계몽의 길로 나서게 한다. 감옥에서 탈출한 후인 25세부터는 이동녕, 안창호,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운동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했고,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안악의 양산학교와 안신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사범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하였고 해서교육 총회를 조직하여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1903년 백범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한다는 이유로 예수교에 입교하여 감리교회의 의법 청년회 총무가 되어 상동교회파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했다. 백범은 여태까지 관상학과 풍수지리학의 雜學에서 동학, 성리학, 불교, 예수교 등에 이르는 철학사상과 종교의 편력을 두루 경험하였다. 백범은 실질에 부합되지 않는 공리공론은 거부하고 실천에 입각한 이론만을 흡수하였다. 즉 여러 가지 종교철학을 섭렵하였으나 그것은 다만 국민교화와 독립운동에 도움을 얻는 차원에서 가지는 종교활동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백범은 종교의 이론에 대한 집착이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스스로 견제하였다. 1914년 안악 사건에 연류되어 인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이 때 金龜를 金九로 바꾸고 호를 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白丁과 凡夫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같은 애국심이 고루 퍼져 완전한 독립국가에 대한 소원을 이루자는 뜻에서였다.

3. 임시정부 청사 시절의 열정적 시기

44세가 되던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경찰의 감시 때문에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백범은 중국의 상해로 건너간다. 백범은 임시정부에 들어가 그가 1945년 11월 23일 70세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근 27년 동안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는 전근대적 군주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근대적 민주정치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에 있다. 백범은 52세에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거쳐 국무령, 주석의 자리에 까지 올랐지만, 임시정부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원조자금을 연결하던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독립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들이 변절하거나 일제에 투항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일제는 1930년 경에 만보산 사건을 일으켜 조선과 중국간에 이간책離間策을 쓰기 시작하면서 관동군을 동원해 결국 9․28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해외기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어려움에 처해졌다. 백범은 편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정을 알리고 미주 한인사회의 활동자금을 지원받는 것으로 위기상황을 헤쳐나갔다. 일본이 중국으로 점점 세력을 넓혀오게 되자 상해에서 떨어진 진강, 장사, 중경, 광주 등의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독립군을 훈려시키기 위한 군관학교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일본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65세에는 한국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에 선전포고까지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에 대한 보람도 없이 1945년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44세에 시작하여 70세까지 계속되었던 긴 망명생활은 끝났다.

4.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노년기

1945년 11월 23일에 백범은 27년 간의 독립운동가로서, 또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정작 미군이 마련한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백범의 귀국은 망명객의 개인 자격으로였다. 백범은 미국과 소련의 양쪽 노선을 저지하면서 당파를 떠난 초당적 위치에서 국내의 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주력한다. 백범은 12월 19일 임시정부 환영대회에서 “임시정부는 결코 어떤 일계급, 어떤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 이해에 입각한 민족단결의 정부”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백범의 민족주의는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쫓던 당시의 시류에는 어긋나는 大義였다. 12월 28일에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내용은 5년 간의 신탁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백범은 필사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1948년 8월15일과 9월9일에 각각 남북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백범은 남북정부 양쪽으로부터 냉대를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에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저격당했다. 백범이 같은 한민족의 손에 의해 저격되기는 그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중국 상해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규합하는 일을 도모하던 중, 일본 경찰에 매수된 이운환에게 받은 저격이다. 그 후유증으로 김구는 글씨를 쓸 때 획이 불안정하게 휘어나가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총알은 그대로 생명을 앗아갔다. 김구의 나이 74세였다. 백범의 장례는 7월5일 국민장으로 행해졌고 효창원에 묻혔다. 우리는 민족의 자주독립에 투철한 신념을 가졌던 민족의 지도자를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잃었다.

 

<김구 연보>

1876(1세)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어릴 때 이름은 창암

1887(12세) 과거를 준비하기로 결심. 가난한 아이들을 불러모아 집안에서 서당을 차림.

1888-89(13-14세)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전신불수. 부모는 병을 고치러 전국을 떠돌아다님. 백범은 큰어머니 댁과 장연 재종조 누이댁 등을 전전하게 됨.

1890-91(15-16세) 1890년 4월 부모님과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에 다님. 정문재에게 대학과 당나라 시, 과문(科文)을 배움.

1892(17세)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인 임진년 경과에 낙방. 마의상서(麻衣相書)로 관상공부, 1년 간 훈장 노릇함.

1893(18세) 동학 입도. 金昌洙로 개명.

1894(19세) 팔봉 접주로 해주성 공격에 나섬. 12월 홍역을 치르는 중에 같은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하고 몽금포로 피신.

1895(20세) 2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 집에 의탁.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위정척사론을 배움. 5월 김형진과 만주로 감. 11월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전투에 참가하나 패함. 귀향후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지만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됨.

1896(21세) 3월 9일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시다를 살해. 5월 해주옥에 투옥. 7월 인천 감옥으로 이송. 장티푸스에 걸림. 자살기도. 10월 사형선고. 11월 고종의 특명으로 교수형 판결 보류. 미결수로 감옥 생활함. 감옥에서 <世界歷史><世界地誌><泰西新史> 등의 책으로 서양 근대문물을 접함.

1898(23세) 3월 탈옥. 삼남으로 도피. 마곡사에서 중이 됨. 법명은 원종.

1899(24세) 9월경 환속하여 해주로 돌아옴.

1900(25세) 김진경 집에서 훈장 노릇함.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金龜)로 고치고, 호는 蓮下로 함.

1901(26세) 1월 아버지 작고.

1903(28세) 2월 기독교 입문. 장련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됨.

1904(29세)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1904(30세) 전덕기, 이준, 이동녕, 최재학 등과 함께 을사 5조약 파기 청원 상소 올림. 12월 고향에서 교육사업에 전념.

1906(31세) 장련에 광진학교 건립. 첫딸 낳음.

1907(32세) 1월 안악으로 이사. 양산학교 교사. 첫딸 사망. 면학회와 양산학교의 사범강습회를 통해 교사 양성. 4월 신민회 조직.

1908(33세) 9월 양산학교 중학부 개설.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1909(34세)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를 돌며 계몽운동. 10월 안중근 의거에 연루되었으나 한 달만에 불기소 처분. 12월 양산학교 소학부와 재령보강학교장 겸임.

1910(35세) 둘째딸 화경(化慶)출생. 서울의 도독부(都督府)설치. 11월 안악으로 돌아옴.

1911(36세) 1월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종로 구치감으로 이감. 7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 서대문감옥으로 이감. 안락 사건 피의자 공판에서 유죄 판결.

1912(37세) 9월 일왕이 죽어 7년으로 감형. 명치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 이름을 구(九)로, 호를 백범(白凡)으로 바꿈.

1913(39세) 인천 감옥으로 이감. 인천항 축항공사에 강제 노역.

1915(40세) 둘째딸 화경 사망. 8월 아네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감.

1916(41세) 셋째딸 은경(恩慶) 태어남.

1917(42세) 2월 동산평 농장에서 소작인들을 계몽. 학교 설립. 셋째딸 은경 사망.

1918(43년) 11월 아들 인(仁) 출생.

1919(44세) 3월 상해로 망명. 9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됨.

1920(45세) 8월 아내와 아들 인이 상해로 옴.

1922(47세) 어머니가 상해로 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됨. 9월 내무총창이 됨. 차남 신(信) 출생. 10월 여운형, 이유필과 한국노병회를 조직. 초대 이사장이 됨.

1923(48세) 6월 내무총장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내림. 12월 상해교민단에서 의경대 설치, 고문에 추대.

1924(49세) 1월 아내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묻힘.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

1925(50세) 11월 어머니 차남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감.

1926(51세) 12월 국무령에 선출.

1927(52세) 3월 임시정부 3차개헌으로 국무위원제로 개편. 국무위원에 선출. 8월 내무장이 됨.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집행위원이 됨.

1928(53세) 3월 <백범일지>상원 집필 시작. 미주 교포들에게 자금지원 요청.

1929(54세) 5월 <백범일지> 상원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

1930(55세) 1월 한국독립당 창단. 하와이, 멕시코, 쿠바 교포의 원조의 의열투장 계획.

1932(57세) 1월 8일 이봉창의 일왕 히로히토 저격. 4월 29l일 윤봉길 상해ㅔ 홍구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상해 각 신문에 주모자가 본인임을 발표.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옮김. 군무장이 됨. 6월 가홍, 해염 등으로 피신.

1933(58세) 5월 장개석과 면담.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92명 입교.

1934(59세)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 4월 9년만에 어머니와 아들 인, 신 상봉.

1935(60세) 11월 한국국민당 조직. 7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대한독힙당이 통합된 민족혁명당 결성. 11월 임시정부 진경으로 이주.

1937(62세)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인애국단 및 미주 5개 단체 통합,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1938(63세) 5월 3당 합당 문제로 남목청에서 회집. 이운환의 저격으로 한 달 간 입원. 7월 임시정부 광주로 옮김.

1939(64세) 4월 어머니(81세) 중경에서 작고. 5월 임시정부 사천성으로 옮김. 김원봉과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公開信>발표.

1940(65세) 5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중앙집행위원장이 됨. 9월 임시정부 중경으로 옮김. 광복군 창설. 10월 임시정부 헙법을 개정하고 주석이 됨. 11월 서안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1941(66세) 6월 임시정부 주석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임시정부 승인 요청. 10월 중국 외교청장과 회담. <백범일지> 하권 집필 시작.

1942(67세) 3월 임시정부 3․1절 선언 발표. 중,미,영,소 임시정부 승인요구. 5월 임시정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1943(68세) 3월 임시정부 중경에서 3․1운동 24주년 기념식 거행.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 한국독립 지원 요청.

1944(69세) 4월 주석으로 재선됨. 9월 장개석 면담. 임시정부 승인 요구.

1945(70세) 2월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3월 장남 인(28세) 사망. 4월 광복군 OSS 훈련을 승인.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8월 서안에서 미군 도노반 장군 면담.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 합의. 8월 18일 중경으로 귀환. 9월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으로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항 발표. 11월 환국.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조직.

1946(71세) 2월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 4월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이한독당으로 통합.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8월 연합국 및 정당 대표에게 임시정부수립 지원 요청. 10월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발표.

1947(72세)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조직. 제2차 반탁운동 전개. 2월 국민의회 조직. 3월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설. 5월 한독당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불참 성명. 12fdnjf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

1948(73세)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수립 6개항 의견서 보냄. 2월 <3천만 동포에게 옵고함>발표. 김규식과 북한에 남북회담 제안. 남한총선거 불참 표명. 4월 남북연석회의 참여. <공동성명서>발표. 5월 평양에서 서울로 귀환. 7월 북한의 단독정부수립 반대입장 밝힘.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1949(74세) 1월 서울에서 조국통일 남북협상 희망을 발언함. 금호동에 백범학원 건립.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건립. 6월 26일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됨.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1962(서거13주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동장에 추서.

1969(서거20주년) 8월 23일 남산에 동상 건립.

1999(서거50주년) 4월 9일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이장. 4월 12일 부인 최준례여사 효창원으로 이장. 6월 26일 백범 서거 50주년.

 

* 내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백범 출간사>

p.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p.13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 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p.14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p.14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p.15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 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p.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p.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p.15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십이월 십오일(1947.11.15) 개천절날.

 

<백범일지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p.19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p.24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p.24 나는 병자년(1876), 할머니의 기일인 7월 11일 자시에 할아버지와 큰 아버님이 사시는 텃골 웅덩이 큰집에서 태어났다.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p.27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셨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p.27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水湖志>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아버님을 경회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p.28 아버님의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

p.29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p.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 며 주저 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p.30 선생이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마중나갔다.

p.31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선생님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밥구럭을 메고 멀리서 오는 동무들을 내가 가르쳐 주었다.

p.31 나는 아침이면 밥구럭을 메고 산 고개를 넘어 집에서 서당까지, 서당에서 집까지 오고가며 끊임없이 글을 외웠다.

p.31 어느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p.32 나무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동네 큰 서당에서 밤낮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p.32 어머님의 품팔아 김매고 길쌈하여 먹과 붓을 사 주시면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p.33 어린 내 소견으로도 선생의 마음 씀이나 일 처리가 남의 사표가 될 자격이 없어 보였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p.36 과거장에는 노소 귀천이 없이 무질서한 것이 내려오는 풍습이라 한다.

p.37 “돈만 많으면 과거도 벼슬도 다 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 선비 글을 몇백 냥 명천 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그제도 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례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 부를 지어 과문 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 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p.38 나는 이처럼 과거길에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상의하였다.

p.38-39 관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로 자신의 相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 적용해 나가는 것이 첩경이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貴格, 富格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賤格, 貧格, 凶格 밖에 없다. 과거장에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p.39 그런데 <相書>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 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p.39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지 않는다 /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지지 않는다 ” 등의 구절을 매우 흥미있게 낭송하였다. 나이 열일곱 살 때 나는 1년간 일가 아이들을 모아 훈장질을 하면서 의미도 잘 모르는 병서만 읽었다.

p.40 그 집을 찾아가는 예절은 고기를 먹지 않고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가야 접대를 한다고 한다.

p.43 사람들이 찾아와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p.53-54 나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고 동네사람들을 지휘하여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그 저고리는 어머님이 동학 접주로 지도자 노릇 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였다. 내가 눈 속에서 벌거벗은 멈으로 호곡하는 것을 본 이웃사람들이 의복을 갖다 주었다.

p.56 안진사는 용맹스럽게 씨름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내게 물었다. “창수가 보기에 어느 사람이 이길 것같은가?” “키가 크고 힘이 세 보이는 사람이 질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안신사는 다시 그 이유를 물었다. “아까 시름할 때 키 큰 사람의 바지가 찢어져 볼기가 드러나 그 사람은 기운을 다 쓰지 못하는 듯하니 단연코 그 사람이 질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지도 전에 과연 그 사람이 지는 것을 본 안진사는 나를 더욱 사랑하였다.

p.58 나의 관찰로도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도 교만한 빛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더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 안진사(안중근의 아버지)는 면모도 맑고 수려하였지만 다만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빨간 것이 흠이었다. 다만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빨간 것이 흠이었다.

p58 안진사도 종종 나를 청하여 스스로 잘된 작품이라 생각하는 것을 많이 들려주었다....."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니 /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p.60 고선생(고능선)이 거처하는 사랑은 작은 방인데 방안 가득 서적들이 쌓였고, 사면 벽에는 이름난 옛 선비들이 남긴 좌우명들과 선생 자신이 마음 깊이 깨우쳐 얻은 글 등을 붙여 놓았다.

p.62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3. 질풍노도의 청년기

p.94 심신이 자못 혼란한 상태에 빠져 고민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가닥 광선이 가슴 속에 비치는 듯하였다. 그것은 바로 후조(後凋)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주신 교훈이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나는 곧 자문자답해보았다. 문.“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그렇다” 문.“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p.100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p.100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p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4. 방랑과 모색

p.148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 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 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 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p.165 아버님은 내게 원대한 뜻이 있음을 짐작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창수가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p.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 (원문 : "君子可欺以方": 맹자에 나오는 구절)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173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p.180 고선생은 제천 동문의 집에서 객사하였다 한다.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p.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 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이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p.183 "자네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p.184 할머니 말씀에 결혼 후 공부를 시키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지만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곳은 안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p.186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5. 식민의 시련

p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p.204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220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p.225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225 사회에서 나를 이같이 동정해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한 숨까지 동지를 위하여 분투하고 원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p.226-227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둘째, 굶기는 것이다.....그밖에 한 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내가 신체 고문에는 한두 번 참아보았고, 저놈이 발악을 하면 나도 감정이 발하여 자연 저항력이 생기므로 인내하였지만, 둘째와 셋째를 당하여 참아내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p.229 같은 방에 잇는 이종록은 나이가 적은 청년이었다. 친척 가운데 따라온 사람이 없으므로 사식을 가져다 줄 사람도 없었다. 방안에서 먹으면 나누어 먹게 하겠으나, 사식은 반드시 방 밖에서 따로 먹게 했는데,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로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p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p.241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p.244 네가 항상 암송하는 고인의 시 가운데,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p.254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을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p.267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 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 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6.망명의 길

p.275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81 나는 날마다 일찍 일어나 소작인의 집을 찾아, 나태해서 늦도록 잠을 자는 자가 있으면 깨워서 집안일을 하도록 하며, 가정이 더러운 자는 청결하게 하며, 땔감을 마련케 하고 집신삼기와 자리까지를 장려하였다....부지런한 자에게는 후한 상을 주고, 게으른 자에게는 다시 게으르면 경작권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예고하였다.

p.289.=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자식들에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 먹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1.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년 (1929. 54세) 5월 3일에 종료하였다.

 

<백범일지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p.296 지금 내가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p.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한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실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p.302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전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p.307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p.317.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경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p.329 동경의 이봉창의거가 세계에 전파되자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우리 동포들 중 나를 동정하던 동지들은 크게 흥분되어, 나를 애호, 신임하는 서신이 태평양을 건너서 눈송이같이 날아들었다.

p.339 “이번 홍구사변의 주모 책임자는 따로 있으면서, 자기가 사건을 감추고서 관계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이유필 등 일부 인사들의 말이었다.....그러나 나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엄항섭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 하였다. 이 발표를 통하여 비로소 세계 각국에서는 동경사건과 상해 홍구 사건의 주모계획자는 김구요,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p.351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p.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p.353.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p.360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회청교에 방을 얻어 동거하였다. 나는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여전히 광동 해남도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경찰이 호구조사를 와도 애보가 먼저 설명하고, 나는 직접 말하는 것을 삼갔다.

 

p.363 어머님은 세 살인 신을 우유로 길렀는데, 밤에 잘 때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려 재웠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했다....두 손자마저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p365 나는 비밀히 어머님께 보고하였다. “어머님께서 아이놈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에 오셔도 이전과 같이 굶지는 않을 테니, 나올 수 있으면 오십시오.” 어머님은 본래 다른 여성들이 미칠 수가 없을 만큼 용감하셔서 안악 경찰서에 출국원을 제출하였다.

p.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p.367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獻壽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을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p.371 남목청에서 자동차에 실려 상아의원에 도착한 후 의사가 진단해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여, 입원 수속도 필요 없이 문간에서 명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두 시간 내지 세 시간 내 목숨이 연장되는 것을 본 의사는 네 시간 동안만 생명이 연장되면 방법이 있을 듯하다고 하다가 ,급기야 우등병실에 입원시켜 치료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p.371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 뿐이셨다. 그리고는 당신이 손수 만드신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p.378-379 당신도 이미 회생치 못할 것을 각오하시고 말씀하셨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어머님은 50여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하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년(1939) 4월 26일 손가화원 안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p.379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 하셨다....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p.394 몇 개월 동안은 광복군이 유명무실하여 연합국의 인기를 끌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 우리 임시정부 정청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병 청년들인데, 부양으로 탈출하여 오는 것을 제3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으로 정부에 호송한 것이다.

p.395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p.400 7년간의 중경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여 무슨 말을 써야할지 말의 조리와 일의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교자를 타고 남안 화성산에 있는 모친 묘소와 망자 인의 묘지를 찾아가 미리 준비해간 꽃을 바치고 축문을 낭독한 후 묘지기를 불러 돈을 후하게 주며 분묘관리를 부탁하고 돌아왔다.

p.402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p.405 내가 옛 서적을 익힐 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구절을 문인의 글재주로만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그날 교장구에 나가 광경을 살펴보니 들것으로 방공호에 산재한 시체를 수집하는데 어린 아이 시체는 들것 하나에 2, 3명씩, 어른은 1명씩 모아서 쌓으니, 과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7. 조국에 돌아와서

p.410 도착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경득의 유가족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 하였다....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으로 서로 대면하였다.

p.412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라고 되어 있다. 지나온 일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p.412 다음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포기와 향나무 한그루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나의 소원>

p.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p.423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p.424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새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p.425 철하고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국적이다...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p.425 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거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도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사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p.425-426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p.426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런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개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p.427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범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p.427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p.428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주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p.428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어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도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p.429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헙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p.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나,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나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p.430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p.430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p.431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p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우리의 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p.432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聖人을 만드는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p.432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仁厚之德이란 것이다.

p.433 우리 민족은 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p.433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 내가 저자라면 *

<백범일지>는 백범의 개인사적인 과거 행적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독립투쟁의 연대기年代記이다. 백범이 출생한 날부터 죽는 날까지 살펴보면, 그의 생애는 곧 한국 근대의 정치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백범이 살았던 시대가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격동기였고, 무엇보다 백범 자신이 그 격동기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범일지>는 백범 개인의 행적과 관련된 과거 시대의 사회, 경제 상황이 흥미롭고 실증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백범 스스로가 범인의 자서전이라고 불렀던 만큼, <백범일지>는 자신의 민족주의 사상과 그 투쟁양상을 소박한 인간적인 심정으로 토로해 놓은 책이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나의 소원>은 백범이 자신의 민족철학의 이념을 민족에게 고하는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백범은 민족의 자생적 철학의 토대를 강조하여 이것에 기초한 자주적 사상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백범일지>를 통하여, 백범 개인의 위대함도 인정해야 하겠지만,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당시의 시대적 사명이 더해져 한국근현대사의 영웅이 필연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더욱 확신이 든 것은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켄윌버가 말한 개인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집단의 내면과 외면의 4분면이 개인에게 적절하게 작용했을 때 개인이 올바르게 발달하고 성장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백범의 삶을 보아도 백범의 개인적 의지와 노력이 있었지만, 그를 지지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한 부모님의 역할 또한 컸으며, 그가 만난 스승에 의해서 문화적으로 혜택을 입어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우리 민족의 특수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민족주의를 요구하는 시대의 환경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그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요소를 간과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1순위의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개인의 의지와 노력, 능력을 중시하고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백범의 생각을 들어주고 지지했던 부모의 역할처럼 자식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부모의 슬하에 있는 것. 백범이 만난 스승처럼 백범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지식과 사랑을 모두 쏟았던 스승을 만나는 것. 백범이 처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듯, 21세기가 시작되는 지금의 시대에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 이런 것들을 적절하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때 개인의 능력 또한 더욱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백범이 말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백범일지>를 읽으며 아는 만큼(애정을 쏟고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인다는 옛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라는 백범이 말한 이 구절이 바로 내가 찾던 내가 하고 싶던 말이다. 예전에 읽었을 때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구절이었다. 바로 백범이 이루고자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문화와 교육”을 통한 국민전체의 건전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의식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자서전의 정수를 보는 듯했다. 개인의 삶,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회적인 흐름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졌던 사람만이 시대의 역사에 애정어린 시선을 보낼 수 있고, 나아가 민족과 세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개인의 역사도 시대의 역사를 담을 수 있도록 열정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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