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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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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3일 11시 19분 등록

[북리뷰 22]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1.저자에 대하여

 

제러미 리프킨 Jeremy Rifkin

 

제러미 리피킨은 사회 비평가이자 ‘노동의 종말’ ‘바이오테크 시대’ 같은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여 년 동안 15권의 저서를 통해 경제, 노동,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특히 1995년에 발표한 ‘노동의 종말’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노동 시간 삭감을 위한 사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바이오테그 시대’(1998)는 생명공학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비영리 조직인 <경제조류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사회의 공공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활발한 계몽운동과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리프킨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저변에 흐르는 조류를 날카롭게 파악하는 안목과 복잡한 현실을 명쾌한 개념으로 요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책은 『엔트로피』다. 기계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에너지의 낭비가 가져올 재앙을 경고한 것이 바로 '엔트로피' 개념이었다. 그 후 그는『노동의 종말』을 통해 정보화 사회가 창조한 세상에서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아가 될 것이라 경고하는가 하면, 『소유의 종말』 통해서는 소유가 아닌 '접속'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는 경제학, 국제관계학 외에 정식으로 과학 교육을 받은 바는 없다. 이런 점에서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주장을 비판하거나, 그의 이론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과 현실 비판은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한편 리프킨의 문명비판에는 환경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문명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환경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엔트로피라는 개념도 그렇다. 육식에 대한 비판이나 생명 현상에 대한 관심도 매우 크다. 생명공학이 21세기에 가장 크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학문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측도 이런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입각점 때문에 그는 반문명론자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저서로『생명권 정치학』, 『바이오테크 시대』,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등이 있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

 

1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시장>이라는 단어가 영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기였다.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상품이나 가축을 교환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물리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8세기 말이 되면 시장이라는 용어는 공간적 지시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물건을 사고 파는 추상적 과정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과정에 너무나 깊이 얽혀 있어, 이제 우리는 인간사를 시장이 아닌 다른 틀로 이해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p9

 

시장은 우리가의 생활 구석구석으로 파고 들어오는 힘이다. 우리 모두는 시장의 분위기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시장이 잘 굴러가면 우리의 생활도 잘 굴러가는 것 같다. 시장이 건강하면 우리 마음도 밝아진다. 시장이 맥을 못추면 우리는 상심한다. 시장은 우리 삶의 안내자이며 상담자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p10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팔아치우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담금질한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커가면서 배운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운다. p10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는 추세다. 기업과 소비자는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시장에서 재산을 교환하던 근대 경제의 기본 구도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 재산은 엄존한다. 하지만 재산이 시장에서 교환되는 빈도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p11

 

시장이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물적 자본을 많이 가진 기업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상품거래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가치 있는 지적 자본을 많이 보유한 기업이 장땡이다. p12

 

상품과 서비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데 유념해야 한다. 산업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팔면서 무료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되고 있다. 요즘은 후속 서비스를 통해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겠다는 계산으로 상품을 아예 공짜로 제공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p13

 

앞으로 25년 정도만 지나면 소유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구태의연하다는 인식이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일반화될 것이다. 소유는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풍토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느려터진 생각이다. p13

 

사유 재산이 한 인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뜻했고 또한 <인간을 재는 잣대>로 오랫동안 간주되었던 세상에서, 소유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접속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간형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p14

 

세계 인구의 1/5은 공산품과 기본 서비스를 구입하는 비용과 거의 맞먹는 돈을 문화적 경험에 접속하는 데 쓴다.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체험> 경제라고 부르는 세계로 넘어가고 있다. 개개인의 삶은 사실상 하나의 시장이 되어 버린다. p15

 

상품화된 문화 체험에 점점 무게 중심이 높이는 지구 네트워크 경제에서 문명의 생명수라 할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고 끌어올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이 새로운 세기의 으뜸가는 정치적 숙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p.21-22

 

21세기 인간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교점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갈 것이고,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세계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주체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것이다. p22

 

요즘 아이들은 재산에 기반을 둔 시장 경제의 특징이었던 내 것과 네 것이라는 전투적 관념이 좀 더 상호의존적이며 공존을 지향하는 현실 인식에 자리를 내주는, 네트워크와 연결성의 세계에서 자라고 있다. p23

 

세대 격차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경제적, 사회적 격차다. 세계 인구의 1/5은 사이버스페이스를 넘나들고 접속 관계를 즐기는 반면, 나머지 인구는 물질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p24

 

얼른 납득이 안 될지 모르지만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전화를 걸어본 경험이 없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격차도 크지만 연결된 사람과 연결되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더욱 크다. 세계는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 두 개의 뚜렷이 구별되는 문명으로 급속히 갈라지고 있다. p24

 

인류는 디지털이라는 경계선을 중심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이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단절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더 이상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접속의 문제는 심각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사람들과 이 새롭고 강력한 존재의 영역에 결코 접속하지 못할 사람들 사이에 거대한 골이 파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정치적 분쟁의 상당수는 바로 이런 골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p25

 

현실 공간에서 가상공간으로, 산업 자본주의에서 문화 자본주의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조류 앞에서 사람들은 사회 계약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25

 

접속의 시대는 상거래와 정치 참여의 방식은 물론 의식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시장에서 재산을 거래한다는 발상을 버린다는 것, 인간관계의 구조적 틀에서 일어나는 개념상의 변화를 소유에서 접속으로 밀고 간다는 것은, 마치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 영국에서 토지와 노동을 재산 관계의 틀 속으로 사유화하려는 인클로저 운동이 벌어졌을 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p26

 

접속은 결국 구별과 분리의 문제다. 들어가는 사람과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다. 접속은 우리의 경제관과 세계관을 재고할 수 있는 막강한 개념적 도구가 되었다. 다가올 시대의 성격을 예고하는 가장 강력한 메타포가 되었다. p27

 

2 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은 1851년에 이런 글을 썼다. <전기 덕분에 물질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신경이 도어 순식간에 수천 마일을 오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둥그런 지구는 지성으로 가득 찬 거대한 머리요 뇌란 소리! 아니, 지구 자체가 사고(), 그야말로 오로지 사고일 뿐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실체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p28

 

앞으로 올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는 모든 것을 모든 것에 연결시키는 것이라는 <와이어드>의 편집 고문 케빈 켈리의 말은 수많은 인터넷 예찬론자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켈리는 크건 작건 모든 물질이 다양한 차원의 광범위한 네크워크로 연결되는 미래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p32

 

모든 개인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자본을 가장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이익을 좇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니 필연적으로, 사회에도 가장 유리한 길을 선택하게 된다.

스미스가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남을 배제하고 어떻게 해서든 재산을 끌어모아 가진 사람이 시장에서 승리하게 된다. p33

 

새로운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서 다섯 가지의 중요한 네트워크 유형을 확인한다. 첫째는 설계 활동에서 부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의 투입 요소들에 대해서 기업들이 하청 관계로 엮이는 공급자 네트워크이다. 둘째는 생산 시설, 자금, 인력을 공유하여 상품과 서비스의 품목을 확대하고 시장을 넓히며 선행 투자에 따르는 위험 요인을 줄이는 생산자 네트워크이다. 셋째는 제조업체, 도매업자, 유통 경로, 소매상, 최종 사용자를 연결하는 소비자 네트워크이다. 넷째는 주어진 분야에서 업계의 선두 주자가 확립한 기술적 표준으로 가급적 많은 기업을 끌어들이는 일반적 의미의 연합체이다. 다섯째는 기업들이 연구 개발 부문에서 가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공유하는 기술 협력 네트워크이다. p33

 

무어의 법칙은 제품 주기에 치명타를 입혔다. 컴퓨터 칩을 내장한 지능형 제품은 전통적 제품보다 수명이 훨씬 짧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원숙해지면서 새로운 관문을 통과하고 새로운 세대로 태어날 때마다 새로운 과제와 임무를 부여받는다. 살아 숨쉬는 정보와 지속적인 피드백으로 무장한 제품이 나오면 나올수록 업그레이드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혁신에는 가속이 붙는다. ... 한 제품의 정보 집약도가 크면 클수록 그 제품을 갈아치우기가 쉽고 그럴 필요성 또한 커진다. p34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길어야 18개월을 못 버틴다. 경쟁에서 앞서 나가려면 자신을 상대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p36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 하이디 토플러에 따르면 상상을 초월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새로운 시장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 p37

 

초창기 영화 산업은 1920년대에 산업 전체에 유행처럼 번졌던 포드식 생산원리에 의존했다. 이른바 판박이 영화가 조립라인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동차처럼 찍혀 나왔다. .. 이 당시 영화는 내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필름 길이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 대량 생산 사고 방식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p40

 

노동의 전문적 분담에 바탕을 둔 내부 조직은 노동 과정의 각 단계에서 점점 대량 생산 체제를 닮아갔다. 그들은 규격화와 업무 분할을 지향했던 것이다. p41

 

오늘날 대형 영화사들은 자체 제작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주 노릇을 하면서 독립 제작사들에 종자돈을 대주고 그 대가로 완성된 작품을 극장에 까는 배급권과 텔레비전, 비디오 판권을 확보한다. p43

 

1979년부터 1995년까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연예 관련 기업의 수는 3배로 늘었다. 그런데 직원의 수는 10명을 넘지 않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1960년에는 독립 제작사에서 미국 전체 영화의 28%를 만들었지만 불과 20년 뒤에는 그 비율이 58%로 늘었다. 반면 메이져 영화사들은 전체 영화의 겨우 31%만 만들고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네트워크 방식의 조직 운영으로 영화산업에서 소기업의 수가 늘어났지만, 대형 영화사와 연예 기업이 풍부한 자금 동원력과 배급망을 통해 아직도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영화 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은 예나 지금이나 배급망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강조한다. p44

 

<주식회사 Inc.>라는 잡지에 실린 ‘왜 모든 기업이 쇼 비즈니스 기업처럼 되나>라는 글에서 조엘 커트킨은 이렇게 말한다.

할리우드는 수직으로 통합된 고전적 거대 기업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네트워크 경제로 변신했다....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 집약 산업이 할리우드와 똑같은 납작한 원자 상태로 해체될 것이다. 할리우드는 그저 가장 빨리 거기에 안착했을 뿐이다. p45

 

우리는 시간과 정신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가 상품으로 판매되는 지적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p47

 

3 무게 없는 경제

 

많은 기업이 회사 내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기 위해 사무실 구조를 바꾸었다. 신시내티 북쪽에 새로 들어선 프록터 앤드 갬블의 건물에서는 다양한 팀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집회장>이라고 불리는 널찍한 공간에서 함께 일한다. ..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도록 특수 회의실과 넓은 공간을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복도도 널찍하게 만들고 중간 중간에 소파를 두어 직원들끼리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유도했다. p50

 

지리적 공간에 기반을 둔 시장에서는 업종이 다르고 색깔이 달라도 모든 기업가가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다.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 부동산이 일부 업종에서는 짐이 되고 줄이거나 없애야 할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리적 시장에 기반을 둔 시대’에서 ‘사이버스페이스의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시대’로 변하는 추세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p55

 

16,17세기의 중상주의 시대에 무역과 상거래의 속도와 규모가 커지면서 약속 어음과 지폐 같은 좀더 가볍고 유연한 화폐가 도입되었다. 수표는 20세기 초반에 도입되었고, 신용카드는 20세기 후반에 도입되었다. 돈의 이동성은 갈수록 커지는 반면 물질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p56

 

돈의 탈물질화 추세에 마지막으로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정치적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 사건이었다.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금본위제를 폐지함으로써 돈과 금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래전부터 한 나라가 보유한 금의 양에 연동되어 온 달라의 가치가 금으로부터 해방되어,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가치를 뒷받침하는 금속과는 무관하게 자유로이 거래될 수 있게 된 것이다. p57

 

돈의 탈물질화가 진행되면서 저축은 감소하고 개인 부채는 증가한다. 20세기 내내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이 꾸준히 늘어나자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기 위해 신용 판매 부문에서는 수많은 혁신이 이루어졌다. ... 우량 고객에게 <지불특혜>.. <할부클럽>.. <외상>.. 이 요술같은 말이 있기 때문에 미국 국민은 빈 주머니로 시내에 가서 한 보따리 가득 사치품을 싸들고 귀가한다. p58-59

 

1928년 내셔널 시티 뱅크는 개인 융자를 시작한 미국 최초의 상업 은행이 되었다. .. 언론은 <신용대출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초석>이라며 대서특필을 했다. 소비자 부채는 1950년대에 신용카드가 등장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p60

 

사정이 그렇다면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은데도 소비자 신뢰지수가 높게 나타난 기현상은 다른 요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미국인이 돈을 버는 족족 써버리고 모아 놓은 돈 없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용 카드를 쓸 수 있는 한, 사람들은 굳이 수입을 저축이라는 형태의 재산으로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제를 조사한 의회에서 내린 잠정적 결론이다. p62

 

재산과 돈의 탈물질화, 사무실 공간을 축소하고 재고를 없애고 부동산을 털어내려는 안간힘, 개인 저축의 소멸, 이런 것들과 함께 나타나는 훨씬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의 형태이며 자본주의를 떠받쳐온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자본 자체가 많은 산업에서 부차적 지위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p63

 

<소유에 집착하면 점점 체중이 불어나서 기업의 발빠른 변신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데이비스와 마이어는 새로운 경제에서는 <생산시설을 재고로 유지하는 자본이, 생산 시설에 접속할 수 있는 저스트인타임 자본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p64

 

임대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이다. 5천여 년 전 수메르의 군주와 왕실 사제는 <신성한 토지>를 농부들에게 빌려주는 대신 수확한 곡식의 1/7을 받았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배도 빌려주었고 댐이나 관개 수로도 빌려주었다. p65

 

기업들이 꼽는 아웃소싱의 장점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아웃소싱을 하면 기업은 돈을 버는 데 집중하고,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긴 하지만 수익창출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지원 기능을 외부 지원업체에 맡길 수 있다. 둘째, 아웃소싱을 하는 기업은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업체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셋째, 값비싼 설비를 구입하거나 기업의 수익창출에 직결되지 않는 주변적인 업무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쓸데없는 돈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끝으로 리스처럼 아웃소싱도 상품의 주기가 점점 짧아짐에 따라 정신없이 바뀌는 시장 상황에 기업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p71

 

<제트기 몇 대는 들어갈 만큼 거대한> 인그램의 대형 창고 한복판에 앉아서 <뉴욕타임스>의 과학 기술 전문기자 솔 핸젤은 <이곳에 오면... 미국 산업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제조업체는 아무것도 안 만들고 소매점은 자기가 파는 물건에 손도 안 댄다>라고 기사를 썼다.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 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p73

 

나이키의 매출은 1998년 미국에서만 40억 달러가 넘었지만 베트남에 있는 하청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은 1달러 60센트에서 2달러 25센트 사이로, 하루 세 끼를 해결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다. p74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 p75

 

투자자들의 관심은 이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선의, 아이디어, 재능, 경험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에 있다는 점이다. p78

 

재너럴 모터스는 1997년 1,780억 달러의 판매고를 달성하여 세계에서 가장 매출이 큰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재너럴 모터스의 시장 평가액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GM은 막대한 자금이 공장, 기계, 설비, 창고, 기타 고정 자산에 묶여 있는 전통적 기업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p79

 

산업 시대는 육체와 근육, 완력이 지배하던 세계였다. 우리는 땅을 파고 토지를 접수하고 물리적 세계를 물질적 상품으로 변모시키는 거대한 도구를 만들었다. <크면 클수록 좋다>는 확신 아래 우리가 성취한 것을 높이, 무게, 규모만으로 측정하던 시대였다. p83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원형의 세계다. 개념의 세계, 픽션의 세계다. ... 21세기에는 개념을 거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사람들도 이런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의 물리적 구현물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점점 많이 사게 된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생각을 관리하고 파는 능력이 궁극적으로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p84

 

인간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중요하지만 상업성이 없는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인생의 길잡이가 될 만한 생각을 상업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문명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관점, 의견, 관념, 개념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가 과연 있을까? 온갖 유형의 아이디어가 거대 기업들이 관리하는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설켜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미래의 사회적 담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p85

 

4 지적 재산의 독점

 

자본주의는 시장을 등지고 네트워크의 형태로 스스로를 개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장의 오랜 지배 때문에 이제까지 사회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무섭고 위험한 힘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제도적 힘이 등장하고 있다. p86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는 판매자-구매자가 시장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던 소유권 시대에 비해서 훨씬 효과적으로 경제력을 소수 기업의 손에 집중시킨다. 단순히 도구, 생산 공정, 상품이 아니라 상업화 된 아이디어를 관리한다는 것은 새로 부상하는 범지구적 규모의 기업형 공급자에게 지금까지 경제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리한 지위를 부여한다. p87

 

사업방식의 체인화는 비교적 역사가 짧다. 여기서 체인으로 묶이는 것은 사업 개념이다. 모기업은 자신이 보유한 개념과 상표같은 무형의 자산이 산하 체인점의 공장, 시설, 기계, 원료 같은 유형 자산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맥도널드만 하더라도 <햄버거를 파는 것보다 햄버거 매장을 파는 것>이 훨씬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 상품의 대량 생산이 아니라 개념의 대량 생산 시대가 열린 것이다. p89

 

체인 가맹점은 사업체를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와 미리 정한 조건에 따라 사업체에 단기간 접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데 불과하다. 이 관계는 판매자-구매자가 아니라 공급자-사용자의 관계이다. 체인점 계약의 핵심은 접속의 합의이지 소유권의 양도가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이다. p93

 

<판다, 산다, 주인 같은 단어는 체인 관계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메시지를 전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 말들은 <누가 나한테 무언가를 팔았으면 난 그것을 산 셈이다. 내가 그걸 샀으면 나는 그것의 주인이다. 내가 주인이면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전제 중 어느 것도 체인 사업 계약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p93

 

인류 역사상 가장 야심찬 과학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인간이라는 종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 청사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14만 개 유전자의 위치를 거의 다 확인하고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p98

 

유전자는 팔지 않고 빌려줄 뿐이다. 사지 않고 빌릴 뿐이다. 유전자 정보는 특허의 형태로 공급자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 공급자는 이것을 사용자에게 잠시 빌려줄 뿐이다. p98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특허법은 <자연에서 이루어진 발견>을 발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 그러나 1987년 미국 특허 상표국은 자연 물질의 발견에 대한 기존 입장을 완전히 번복하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일부분 -유전자, 염색체, 세포, 섬유-도 특허를 낼 수 있으며 누구든 가장 먼저 그 성질을 분리해 내고 기능을 묘사하고 상품화에 성공하는 사람은 지적 재산권에 준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다. p100

 

이들 다국적 기업은 종자를 약간 변형하거나 개별 유전자 특성을 없애거나 새로운 유전자를 종자에 덧붙인 다음 <발명>을 했다며 특허를 딴다. 그 목적은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자를 송두리째 장악하는 데 있다. 23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세계 종자 거래 시장에서 상위 10대 생명과학 기업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32%이다. 3대 생명과학 기업인 듀폰, 몬산토, 노바티스가 한 해에 종자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은 45억 달러에 이른다. p101

 

유전자 변형 종자 시장의 규모는 2000년 말까지 20억 달러, 2010년 까지는 2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국제 종자 거래 연합은 전망한다. p101

 

특허를 받은 종자는 판매되지 않는다. 다만 한 해 농사를 지을 동안만 빌려주는 것이다. 수확을 해서 얻은 새 종자의 소유권은 특허권자에게 있기 때문에 농부가 이듬해 농사에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종자는 법적인 의미에서는 판매되거나 구입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임대될 뿐이다. p102

 

농업 전문지인 <진보 농민>에 따르면 몬산토는 이미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수백 명의 농민을 고발했다. p102

 

아예 특허권을 침해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드는 혁신적 기술을 개발했다. 델타 앤트 파인 랜드와 미국 농무부는 농부가 종자를 재사용할 수 없게 하는 종자 불임 기술의 특허를 따냈다. p103

 

터미네이터 기술에 반대하는 운동은 농민 조직, 국제 농업 관련 기구, 심지어는 외국 정부 차원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1998년 10월 유엔과 세계은행의 자금을 지원받는 세계 최대의 농업 연구 단체인 국제 농업 연구 자문단은 산하 16개 회원 기구에게 터미네이터 기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p103

 

하루 아침에 종자의 씨를 말릴 수 있는 전쟁이나 내란, 엄청난 자연 재해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만약 농민이 씨앗이 없어서 파종을 못하고 특허 종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면 대규모 기아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p104

 

복제 동물을 만들어 특허를 따놓으면 특허 소유자는 그 동물의 모든 후손에 대해서까지 지적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새끼가 태어날 때마다 로열티를 물어야 한다. p105

 

앞으로는 자기 몸 안에 있는 DNA, 세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믿기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몸, 노동, 정신 능력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접속의 시대에는 이런 전통적 소유 관념이 흔들린다. p105

 

세스 슐먼은 <미래의 소유>라는 책에서 <우리는 지식 경제에서 반독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슐먼도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위험천만한 권력의 집중 양상을 드러내는 독점, 곧 기본적 정보에 대한 독점을 확실히 규제하기 위해서 반독점법을 활성화시키자>고 제안한다. p109

 

5 서비스 세상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소유관계가 중심이 되는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 통과 의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는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p110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 <모름지기 사물의 진가는 지닐 때보다는 쓸 때 발휘되는 법이다.> p114

 

바로 중세사회였다. 이 거대한 연쇄는 신의 창조물이었고 각각의 피조물이 신이 내린 소명에 따라 자기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구조로 짜여져 있었다. 그래서 자기 위치의 높낮이에 따라 위아래를 섬겼다. 모든 창조물의 주인은 신이었으므로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신의 소유물이었다. 하느님이 명한 위계 질서에 따라 타인과 하느님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는 임무를 다하는 의로운 인간은 그 재산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와 귀족이 하느님의 대리인 노릇을 했다. 그들은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땅을 무력을 앞세워 자기들 마음대로 분할하고 관리하고 이용했다. p117

 

근대적 소유 관념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하려는 노력은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1690년에 <시민정부론>... 로크는 사유재산이 <자연권>이지 미리 합의한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조건으로 교회나 국가 같은 권위 기구가 승인한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 사람이 자연이라는 원료에 자기 노동을 덧붙여 가치 있는 물건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재산을 만든다고 믿었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대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을 공유하지만, 개개인은 <자신의 ‘신체’라는 ‘재산’을 갖는다. 이 육체에 대한 권리는 오직 그 사람만이 갖는다>라고 로크는 덧붙였다. p119

 

사람이 자신의 몫이라고 합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재산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로크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가 일구고 재배하고 활용하고 경작하고 생산품을 이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그의 재산이 될 수 있다> p119

 

중세의 성직자는 반드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노동이라고 생각했지만, 로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마땅할 기회가 노동 안에 있다고 보았다. ... 복속 관계가 소유 관계로 바뀌면서 인간관계 자체도 달라졌다. 또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근대적 의식도 나타났다. 자아를 보는 눈이 새로워졌고 개인의 영역이 만들어졌으며 국민 국가와 입헌 정부 같은 새로운 제도가 탄생했다. p120

 

그 손은 공급과 수요, 노동, 에너지, 자본을 꼼꼼히 규제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원의 생산과 소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알아서 움직였다. 정부의 간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보이지 않는 손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재산이 꾸준히 교환될 수 있는 원할한 장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스미스는 말했다. p121

 

소유보다는 접속에 기반을 둔 세계가 몰고 올 충격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맺어온 사회적 계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니엘 벨을 비롯한 많은 미래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두 가지 변화 때문에 최후의 심판은 가까운 시일 안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첫째, 사유 재산 체제의 보루였던 물품 자체가 순수한 서비스로 변형되면서 소유가 사회생활의 기본을 정의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둘째, 서비스 자체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서비스는 물품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 그러나 전자 상거래와 정교한 데이터 피드백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서비스는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장기적이고 다면적인 관계로 재창조되고 있다. p128

 

<카펫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 위에서 걷고 싶을 뿐이다... 만약 몬산토나 카펫 제조업체가 카펫을 소유하고 교체시기가 왔을 때 찾아와서 갈아준다면 어떻게 될까> 인터뷰에서 샤피로는 갑자기 모든 게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만든 모든 제품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이 물건을 정말로 사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p133

 

더 많은 제품을 팔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설치한 시설을 업그레이드하고 관리하는 쪽에서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p140

 

인간 관계의 상품화

 

우리는 접속의 시대에서는 소비자를 관리하는 것이 제품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제품이라는 것은 고객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서비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p155

 

현대 경영기법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썼다.

고객은 사업의 기초이며 기업의 존재 이유이다. 고객만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사회가 부를 낳은 자원을 기업에 위임한 것은 고객에게 그것을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 모든 사업을 최종 결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서 고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케팅에 대한 관심과 소명이 모든 사업 부문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p158

 

고객은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친근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특정한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이제 그가 세상에서 자기를 차별화시키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가 된다. 가령 캐딜락이나 폴크스바겐의 비틀을 운전하는 것은 단순한 교통 수단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사회적 시위를 하는 셈이다. p162

 

삶이라는 것이 한낱 계약과 금전적 도구에 의해서 결합된 사업적 거래의 연속에 불과한 것으로 변질될 때, 애정, 사랑, 헌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전통적 상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케팅 전문가와 기업이 이른바 <고객 친밀감>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깊은 <공동체적 결속>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과 장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있다는 것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사실이다. p167

 

우리 존재이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 p168

 

7 삶으로서의 접속

 

네트워크 경제의 탄생, 물품의 점진적인 탈물질화, 물질적 자본의 비중 감소, 무형 자산의 부상, 물품의 순수한 서비스로의 변신, 생산 관점을 밀어내고 사업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은 마케팅 관점, 모든 관계와 경험의 상품화 등은, 사람들이 서서히 시장과 재산 교환을 뒤로 하고 접속의 시대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첨단 글로벌 경제에서 급격하게 벌어지는 구조 변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p169

 

<CID, common-interest developments, 공동관심단지> .. 미국 전체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3천만명이 현재 15만 개의 CID에서 살고 있다. p171

 

디즈니 공동체는 기존의 단지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고통스러운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고 상충하는 이해 관계들이 충돌하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공동의 시민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여들면서 유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단지다. 입장료를 내는 사람에게만 접속을 허용하는, 반은 생활공간이고 반은 극장인 상업구역이다. p174

 

CID는 19세기 말에 처음 등장했다. .. 에비니저 하워드라는 사람이 도시 생활과 전원생활의 장점만을 결합한 새로운 종류의 소도시를 구상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낙원도시라고 불렀다. 하워드는 전통 도시에서 보았던 무질서한 발전의 양상을 회의적인 눈길로 보았다. p175

 

지금은 공공 주거단지에 널리 도입되었지만 정부 조직을 기업형으로 개혁한다는 발상을 이미 몇 십 년 전에 내놓았다는 것은 그의 선견지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28년 찰스 스턴 애셔는 뉴저지 주 래드번에 미국 최초의 계획 공동체를 세웠다. p175

 

폐쇄 공동체가 갖는 이점의 하나는 가치관이 비슷하고 경제력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살고 부동산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사람의 진입을 막음으로써 집과 부동산에 대한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굳이 CID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특별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사람, 서비스, 시설의 네트워크로 편입되고 싶다는 욕심,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생활 방식을 사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p183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지리적 장소는, 요즘처럼 이동성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그 실효성을 잃었다. ..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을 뜻하는 <human>은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뜻하는 라틴어 <humus>에서 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헤브루 신화에서는 신이 아담을 진흙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재산 관계와 소유권을 바탕을 둔 인간과 대지이 질기디 질긴 인연은 그 동안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이제는 점점 엷어지고 있다. p194

 

미디어 역사학자이며 평론가인 조슈어 마이로위츠는 전자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역사적 지리> 감각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p195

 

지리적 주소는 이메일 주소에 의해 빠른 속도로 밀려나고 있다. p195

 

우리가 의식하는 생활의 상당 부분은 겉에서 보기에는 태연자약하게 어느새 접속 관계가 지배하는 시간 중심의 세계로 들어섰지만 우리 본능의 더 원초적인 부분은 아직도 여기에 저항감을 느끼며 땅과 영토라는 관념에 뿌리를 박고 있다. 전자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대지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연결 고리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우리를 둘러싼 흙으로부터 잠시 빌려온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이렇게 포착했다.

그러니 어머니 품 같은 대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땅에 드러누워 온 몸을 한번 쭉 뻗어봄이 어떠한가. 그대는 이제 확실한 반석에 올라서 있다. 대지처럼 단단한 그대를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다. ... 대지는 내일이라는 선물을 그대에게 확실히 가져다주겠지만 새로운 갈망과 고통으로도 그대를 확실히 이끌어갈 것이다. p196

 

집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장소에, 영토에, 우리의 기원에 맞닿아 있다는 원초적 감정을 경험한다. p196

 

그들에게 집과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부차적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CID에는 전통이 살아 있는 공동체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p197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

 

8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처음에는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보였던 소비 윤리와 자기 실현의 윤리가 20세기의 자본주의 시장에서 서서히 공동의 토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상업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흥미 깊은 사건이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 두 가치를 하나로 묶은 힘은 문화적 기준을 전달하는 핵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p208

 

이런 예술의 저항적 자세를 1920년대에 들어와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같은 곳에서 활동하던 새로운 세대의 보헤미안 예술가와 지식인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기 희생, 근면, 육체적, 정서적 쾌락의 승화라고 하는 금욕주의적 가치관을 강조하던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마찰을 빚었다. p209

 

이 새로운 예술가들은 <순간의 삶, 향락주의, 자기 표현, 육체미, 무종교,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머나먼 곳에 대한 동경, 스타일의 개발과 삶의 미학화를 찬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감수성은 자본주의라는 지배 체제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것은 생산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변하는 과도기의 경제에서 이상적인 자극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p210

 

광고 회사는 석판 인쇄, 전기, 영화, 판화, 라디오 같은 다양한 매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대중의 심리적 에너지를 문화적 영역으로부터 상품 시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p211

 

예술과 예술가를 시장에 빼앗긴 문화는 공유하는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고 생산하고 창조할 수 있는 강력한 목소리를 상실했다. 이런 문화적 고사 상태의 의미를 사람들이 처음으로 절감하게 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앤디 워홀이 캠벨 사의 수프 통조림 같은 상품을 그려서 예술작품이라고 내놓았을 때 전통문하는 벌써 소비 문화로 이행한 지 오래였다. p211

 

<이제 소비자는 ‘내가 아직 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묻지 않고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는다.> 오길비도 자본주의의 추세를 주시하는 여러 분석가들처럼 산업 경제에서 체험 경제로 넘어가는 이행의 중요성을 서서히 간파하고 있다. 그는 <체험 산업은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드는 모든 내용을 거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p213

 

세계 관광기구에 따르면, 78억으로 예상되는 2020년의 전 세계 인구 중에서 16억명이 해외 여행을 갈 것이라고 한다. G7 국가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은 전 세계 관광객의 30%를 차지한다. p215

 

그러나 관광객이 뿌리고 가는 돈 중에서 현지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얼마되지 않는다. 관광 산업은 지역 사회와 나라에 돈과 일자리를 안겨주지만 여러 가지 통계를 보면 실제로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 만지는 돈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 대부분의 호텔, 항공사, 휴양 클럽, 관광 회사, 식당 체인은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런 기업의 상당수는 G7에 속한 나라들에 본사가 있다. ... 제3세계 관광 분석가인 크레그 린드버그는 개발도상국일수록 이런 누손이 많다고 지적한다. 네팔이 70%, 코스타리카가 45%, 태국이 60%에 이른다. 린드버그에 따르면 제3세계 국가들의 평균 누손율은 55%에 육박한다. p223

 

관광산업에서 또 하나 절박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 지속가능한 개발이다. 야생 동식물의 보호, 생물 다양성의 보존, 지역 생태계와 생물 서식지의 유지, 자연 보호 구역과 국립공원의 설립은 기반시설을 조성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살아 있는 체험을 상품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지역 사회와 나라의 자연 유산과 문화 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p224

 

이 새로운 <정착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연 자원을 계속 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지의 농부, 목장주, 광부, 벌목꾼과 충돌하곤 한다. 부자들은 자연자원을 가만히 두어 때묻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체험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는 땅을 일구는 것보다 땅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p225

 

최초의 실내 쇼핑몰 사우스데일은 1956년 미닝폴리스 에디나에 건설되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실내 온도를 조절함으로써 설계자 빅터 그리은 밀폐된 공간 안에 마법의 세계를 방불케 하는 환상적 환경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바깥 세계의 소음, 산만함,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고, 긴장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p229

 

스탠퍼드 조사 연구소가 만든 <VALS(가치와 라이프 스타일)> 같은 지표는 나이, 수입, 가족 구성, 여가 활동, 문화적 배경의 상관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 쇼핑객은 생활 방식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나뉜다. <성취형> (근면하고 실질적이며 교육 수준이 높은 전통적 소비자, 사치품의 주요 수요층)은 브룩스 브라더스, 블루밍데일, 니먼 마커스를 주로 이용한다. <모방형>(브랜드를 의식하고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젊은 소비자)은 앤 테일러, 랄프 로렌에서 쇼핑한다. <생계 유지형>(어렵게 살아가는 빈민층)과 <귀속형>(보수적이며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중산층부터 서민층까지)은 가격에 민감하며 K마트나 J.C 페니를 주로 이용한다. p231

 

이미지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부유층은 고급 문화를 타락시켰다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은 새로운 이미지를 자신이 앞으로 누리게 될 더 나은 생활의 전조로 받아들였다. p238

 

지금까지 미국의 유색인이 집안 거실에 그림을 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 그림은 굴종, 억압, 결핍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 공명정대, 여가, 세련됨과 함께 온다. 이제 미국의 유색인도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머지않아 이들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 이들과 주변 사람들과의 달라진 관계를 생생하게 증언할 것이라고 믿는다. p239

 

사업의 성패는 고객의 머리에 감동적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집어 넣느냐에 좌우된다.고 조언한다. 이제 사람들에게 <신화>, <상상>,<환상> 같은 단어가 먹혀 들어간다. p243

 

보디숍이라는 영국의 화장품 체인점 매장 벽은 <선수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갖가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P243

 

서비스와 체험의 마케팅은 근본적으로 연극이며 오직 그런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대 위의 배우가 신빙성 있는 공연을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요인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서비스 분야의 ‘배우’도 관객에게 감동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세심한 연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비스 제공자의 복장, 행동거지, 동작, 매너, 업무 방식, 지식, 의사 소통력은 모두 관객이나 고객에게 감동을 주고 공연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기여한다. p244

 

문화 생산은 21세기의 고부가 가치 산업을 선도할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 문화 생산은 경제 생활의 제1열로 부상하고 정보와 서비스는 2열로, 제조업은 3열로, 농업은 4열로 내려간다. 이 네 개의 열은 소유 관계에 바탕을 둔 체제를 접속에 바탕을 둔 체제로 꾸준히 탈바꿈시킬 것이다. p246

 

9 문화의 광맥을 찾아서

전자통신은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현실을 모사한 미디어 환경이다. ... 전화 통화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도 상대방이 <옆에>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전화와 어원이 같은 영어 단어 <phony>는 금세기 초반에 널리 유행했는데, 이것은 <진짜>가 아닌 목소리, 따라서 믿을 수가 없는 목소리를 비아냥거리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p248

 

애플 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켄 카라카치오스는 <우주에서 단 하나 잘못된 점은 우리 아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이 우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계들의 숲>으로 이루어진 최첨단 생태계를 상상해 보라고... <그 생태계는 당신의 기분을 인식하고 감지한다. 당신을 바라보고 알아보는 것은 물론 ‘말을 더듬거나 말을 끊거나 침을 꿀꺽 삼키거나 목소리가 미세하게 변화하는 것에 담긴 정보’도 예민하게 포착한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된, 오직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우주다.> p249

 

사이버스페이스는 육화한다.... 극작가와 감독이 어떤 체험의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사이버 스페이스 연출가는 체험 그 자체를 전달하려고 애쓴다. 사어버스페이스 연출가는 관객이 그 안에서 직접 연기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한다. 관객은 흥미로운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고 단순히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직접 체험한다. p250

 

고급 상표가 붙은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디자이너가 창조한 가치와 의미의 세계에 자기도 끼여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조금도 의심해 보려 하지 않고 이 세련된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돈을 뿌린다. p253

 

제품을 파는 활동은 <체험>을 파는 활동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이키는 운동화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화를 신으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이미지를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 새로운 마케팅 시대에는 <이미지가 제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강조한다. p254

 

마케팅 전문가는 정서적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주제를 찾아 문학의 숲을 누비고 다닌다. 심지어는 문화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빌려온 파격적인 이미지로 상품을 판매한다. 몇 해 전 베테통은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 기름을 뒤집어 쓴 새, 수녀에게 입을 맞추는 신부, 폭탄 테러의 현장을 담은 강렬하고 충격적이 광고 사진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인가의 참상, 위선, 잔인성을 베테통 로고와 병치시키는 전략으로 베네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광고 효과를 거두었다. ... 실제로 베네통은 이 광고를 대중 문화의 중심에 자기 회사의 브랜드를 심어놓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문화 생산을 위해 예술이라는 통로로 문화를 전용한 것이다. p255

 

환경문제, 여성문제, 인권문제, 빈부문제, 이 모든 것이 이미 마케팅에 동원되었다. 사횢거으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에 상품과 서비스를 동화시킴으로서 기업은 소비자의 마음에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픈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대의에 개인적으로 동참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도록 유도한다.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광고를 적극적으로 내보내는 미용용품 체인점 보디숍에서 비누와 향수를 사는 사람들은 실은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체험을 구입하는 것이다. p256

 

미국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미국 인간 띠잇기>라는 행사였다. 이것은 <역사상 단일 행사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고 떠들썩하게 선전되기도 했다. 이 행사는 세계 기아 문제를 여론에 부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내기 위해 비영리 문화 단체들에서 구상했다. p256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 새로운 공조의 시대가 이미 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였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기업은 단순히 돈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생활에 끼여들어서... 고객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p258

 

<전 세계적으로 매일 120억개의 광고, 50만 개의 라디오 광고, 30만 개가 넘는 텔레비전 광고가 집단 무의식으로 쏟아져 들어간다>고 지적한다. p260

 

사회 전체가 다양한 종류의 오프라인, 온라인 네트워크로 재편되고 있는 지금 문지기의 기능은 더욱 각별한 뜻을 갖는다. 문지기는 이 네트워크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조건을 정한다. 소유 중심의 시대에는 소유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참정권과 투표권을 주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접속의 시대에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이 모든 사회 활동의 전제 조건이다. .. 마누엘 카스텔스는 말한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열리지만 네트워크 밖에서는 점차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몰린다.> p264

 

대다수의 미국은 의료보험 체계를 통해 이런 문지기 기능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다. ... 그는 의료 보험 가입자들 앞에서 일종의 문지기 노릇을 한다. 일차 진료의는 말하자면 <의료서비스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포털>이다. .. 그는 모든 의료 서비스의 관문에 버티고 있다. 의료 보험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p266

 

가령 출판산업에서 문예 저작권 대행사는 일차 관문의 역할을 한다. 작가 지망생은 지명도 있는 저작권 대행사를 통하지 않을 경우 출판사 편집자에게 접근할 수 잇는 길이 현실적으로 없다. p267

 

문화 상품의 세계 무역 규모가 불과 10년 만에 3배로 늘어나면서 지구 문화의 동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동질화 과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언어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있으며, 그 빈 자리에 영어가 새로운 문화 상품의 표준어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구어의 종류는 6천 가지가 넘지만 1백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진 언어는 3백 개에도 못 미친다. 6천 개의 언어 가운데 절반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 현재 전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영어를 쓴다. p272

 

10 탈근대

근대인은 신앙을 버리고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근대인은, 인간의 정신이 입수 가능한 방대한 지식을 검증 가능한 이론으로 종합하여 자연계의 기원, 발달,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곧잘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의 비밀을 올바르게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했다. 베이컨은 인간의 정신은 자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중립적 관찰자로서 자연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을 앞세워 마침내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을 뿌리까지 흔들어놓을수 있게>되었다고 믿었다. p278

 

르네 데카르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존재의 대연쇄를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거대한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자동적이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기계적 우주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남아 있던 실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벗겨내고 자연을 자신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한 수학적, 양적 요소로 환원시켰다. p278

 

계몽주의 세계관은, 소유관계에 기반을 두었으며 자본주의 발달로 힘을 얻었던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리를 설명하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이 당시의 지식인과 철학자는 합리적 사유와 엄밀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인간은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고, 자연은 물론 인간 자신의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위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p279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중세인의 사고 방식을 깔아 뭉겠다. 그들은 심지어 인간의 지각 방식까지도 바꾸어, 우주는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중세인의 관념을 몰아내고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인식론을 전개했다. 이 세상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파악하는 사고 방식은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한 원근법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 지옥의 용광로에서부터 천국의 문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거대한 연쇄로 한 점의 빈틈도 없이 촘촘히 이어진 관계망 속에서, 관계는 어디까지나 상하의 관계였다. 그리고 그런 현실 인식은 대부분의 중세 미술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수평선 저 너머로 펼쳐진 풍경, 식민지 영토, 자본주의 시장에서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수평선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며, 원근법은 자신의 주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유리한 자리로 인식된다. 원근법을 통해 화가는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며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p280

 

탈근대 이론가들은 고정되고 인식 가능한 현실이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한다. p281

 

인간은 초연하기는커녕 경기자로서 참여자로서 자신이 조작하고 입김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p281

 

모든 것이 과정으로, 운동으로 보인다. 경계를 가진 형체를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뚜렷한 경계선을 가진 대상에 대한 우리의 평범한 지각마저도 실은 학습된 경험이고 인지 능력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p284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불변의 법칙에 바탕을 둔 현실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적 행위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자연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을 모든 고비에서 드러내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한다. p284

 

탈근대 세계에서 이야기와 공연은 사실과 수치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새로운 시대는 상징과 기호를 연구하는 기호학에 열광한다. 근대 세계가 물리학의 법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문법과 의미론의 법칙에 관심을 기울인다. p286

 

의미를 캐는 열쇠는 언어가 쥐고 있다. 우리가 생각과 느낌을 남과 주고받기 우해 동원하는 수단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버그퀴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탈근대 세계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생활 영역의 으뜸가는 현실이 되었다> p286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튼 질서라는 것은 무조건 답답한 것, 숨막히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은 생각한다. ...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의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진지하지 않다. p286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군림하면서 자연이나 사회를 지배하던 역사적 틀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관심 자체도 시들해진다. 역사는 이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투시하기 위한 참조틀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활용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각본에 써먹을 수 있는 느슨한 이야기의 단편처럼 되어버렸다. p287

 

탈근대 사회과학자도 인간의 행동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려는 근대의 노력은 계급론, 인종주의, 식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만을 낳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탈근대 사회학은 다원주의와 이중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수없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너그럽게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누구나 열망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상적 사회 체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타당성을 모두 갖는 수많은 문화적 실험이 있을 뿐이다. p288

 

탈근대론자는 인간 경험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국지적 경험의 다양성을 찬양한다. 새로운 시대는 모호하고 다양하며,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며, 어수선하고 너그럽다. 절충을 중요하게 여기며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 이데올로기, 만고불변의 진리,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철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서 온갖 유형의 공연이 펼쳐진다. 근대의 핵심이 근면이라면 탈근대의 핵심은 유희다. p288

 

접속의 시대에는 물건을 만들고 재산을 교환하고 축적하는 것이 시나리오를 짜고 이야기를 만들고 환상에 젖는 것에 비해 부차적 지위밖에 못 누린다. ...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의식은 의심받고 성적 욕망, 몽상, 환영에 이끌리는 무의식이 전면에 나서서 사실상의 현실이,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이퍼 현실이 된다. 지하 세계에 갇혀 있던 환상은 찬양을 받으면서 표면으로 떠오른다. p289

 

근대의 여명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의식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달라졌다. .. 자본주의 맹아기에 발달한 도시를 주무대로 성장한 부르주아지는 산업 시대를 이끌고 나간 상공업자, 공장 주인, 상인, 전문직 종사자였다. 신분이 계급으로 바뀌어가던 시대에 그들은 위로 상승하는 중산층이었다. p293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이성이 자연의 비밀을 풀 수 있으면 인식 가능한 객관적 현실의 진리를 체계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현실주의자였다. 그들은 서서히 신학을 버리고 이념을 택한 계급이었다. 천국의 구원보다는 지상의 낙원을 추구한 계급이었다. 그들은 유물론이라는 복음을 사방에 전하고 사유 재산의 미덕을 찬양했다. p293

 

물질 생활의 내부화는 의식의 내면화를 수반했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도 부르조아 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집에는 어디를 가나 거울이 달려 있었다. 자기 점검과 자기 반성은 취미이면서 동시에 집착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기 확신, 자기애, 자기 연민, 자긍, 자중, 인격, 에고, 양심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담론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자화상과 전기는 인기 있는 문화 형식이 되었다. p294

 

19세기 부르주아지는 재산과 부를 축적하기는 했어도 인생에 대해서는 금욕적 태도를 고수했다고 볼 수 있다. 소비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1920년대로 접어들면 미국에서는 물건이 남아돌기 시작한다. 자연히 소비 생활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이 필요해졌다. p296

 

그러나 새로운 세대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문화라는 장터를 이루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연기하면서 각본과 무대 사이를 경쾌하게 옮겨다니는 <창조적 공연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p297

 

10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이 일평생 알게 되는 사람의 수는 몇백 명을 넘지 않았지만 20세기에는 그 정도의 인원은 일주일도 못되는 사이에 만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방식이 질적으로 달라지면서 변화하는 환경, 새로운 상황, 시시각각 바뀌는 기대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 있는 좀 더 유연한 인간이 필요해졌다. p298

 

사람은 <자신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자리에 고정되어 같이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생산품들과 부단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지멜은 말한다. p298

 

그러나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인생은 무언가를 부단히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락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과정>이 <존재>를 압도하게 되었다. p299

 

소유라는 비유가 퇴색한 데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학자들이 지적하는 역사 의식의 붕괴와 심리 치료의 부상이다. p299

 

자본가에게 역사의 종말은 지구의 광대한 황무지를 완전히 점유하여 사람들 손에 재산을 배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역사의 종말은 사유 재산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물질 자원과 자본을 집단이 소유하는 사회를 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자본가도 사회주의자도 소유 관계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똑같이 믿었고 개개인의 인간은 거대한 역사극 안에서 일역을 맡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노력이 미래의 낙원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확신과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p299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구두로, 서로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생각을 공유했다. 심지어는 필사본까지도 큰소리로 읽었다. 필사본의 일차 용도도 독서가 아니라 낭독에 있었다. 인쇄 혁명은 파분히 성찰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책이란 것은 혼자서 조용히 읽는 것이 제격이었다. p304

 

인쇄는 문맹률을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새로운 시장과 노동 및 조직 환경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의사 소통 수단을 후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요컨대, 인쇄는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데 어울리는 마음가짐과 세계관을 안겨주었다. p305

 

모든 종류의 자료가 한 사람의 창조적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광범위한 시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서 형성되는 무한히 열린 과정 안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배타적 소유권을 누구에게 부여해야 할지 곤혹스러울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아울러 근대 정신과 사유 재산 체제의 틀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배타성과 독립성고 사라진다. p307

 

사이버스페이스 전자네트워크 안에서 <자아는 대수롭지 않다... 섬처럼 혼자 설 수 있는 자아는 없다. 모든 자아는 관계의 낱줄과 씨줄 안에서 존재한다. ... 늙었건 젊었건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가난하건 사람은 언제나 특정한 통신 회로의 ‘접속점’에 위치한다> p307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오래된 관념은 복수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념에 밀려나고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뚜렷한 경계선은 더욱 희미해진다. p309

 

이렇게 끝을 열어두면서 조건문에 가깝게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조차도 남들이 생각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심리적 성향을 드러낸다. 자율성을 가진 자아의 특징이었던 단정적 문장은 관계성에 치중하는 자아의 탐색적 문장에 자를 내준다. p311

 

머드 게임을 열성적으로 즐기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자기가 그토록 공들여 연기하는 인물이 진짜 자기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적어도 일부 인물은 그런 환상을 경기자에게 준다. <나는 내가 흉내내는 사람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소일하는 한 젊은이는 <나의 일부, 나의 아주 중요한 일부는 머드 속의 인물로서만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p312

 

복수의 인격을 실험하면서 사는 사람은 남들에 대한 이해와 아량이 깊어질 것이고 남들과 어울릴 때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일 가능성이 높다. 연극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탁 트인 생각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통설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연기를 하면서 자꾸만 남이 되어보는 훈련을 많이 한 사람은 그만큼 내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변화 무쌍한 의식은 존재를 파편화 시킬 것이라는 일부 심리학자의 우려에도 일리가 있지만 복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은 남들에게 쉽게 공감하는 능력을 배우기 때문에 문화 쇄신의 기초를 닦는 데도 기여한다. p315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는 원래 가면을 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p317

 

<현실이 연극적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사회가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것, 혹은 현실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은 연극적으로 실현되고 구성되어 있다.> p320

 

극장은 사회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현상,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의 실상을 응축하고 정형화해 놓은 곳이다. p320

 

상업 영역이 상품과 서비스를 팔던 데서 상품화된 관계, 문화공연, 체험에 접속하는 권리를 제공하는 쪽으로 탈바꿈하는 시대에, 연출적 관점은 이 새로운 사업 방식을 이해하는 정확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연출적 관점은 통신을 인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자아를 관계의 중심으로 재정의하며, 체험 자체를 연극적 활동으로 만들고, 재산을 상징으로 변형시킨다. p321

 

새로운 시대의 남녀에게는 상업 세계가 제공하는 대본, 무대, 다른 배우, 청중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사는 것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격을 살찌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p322

 

11 접속자와 비접속자

21세기에는 과거의 재산권처럼 접속의 문제를 놓고 열띤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접속은 재산권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재산권은 내 것과 네 것이라는 협소한 물질의 차원을 다루지만 접속은 체험 자체를 누가 지배하는가라는 좀더 광범위한 문화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p323

 

세계은행 같은 금융기구는 미디어 시장을 여는 것이 개발을 촉진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라는 믿음 아래 개발도상국가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반대 급부로 통신 시장의 규제를 완화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를 조장하며 빈곤을 악화시킬 분이라고 주장한다. p332

 

경제와 사회에서 비중 있는 활동이 상품화된 문화체험의 형태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세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주파수와 통신 채널에 대한 관리권을 포기할 경우 정부의 역할은 더욱 왜소해질 것이다. p336

 

국민 국가의 쇠락은 무역 분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글로벌 기업의 적극적 로비가 먹혀들어 각국 정부는 상당한 양보를 했고... NAFTA, GATT 같은 국제 조약과 협약은 노동 관행이나 환경 정책에서 정부가 국내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다... 세계 무역 기구같은 새로운 국제 조직의 관리들은 어떤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으며 오히려 무역 협정과 기준을 위배한 나라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다. p337

 

통신 혁명과 미래의 네트워크 세계에 대한 대담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세계 인구의 65%가 평생 전화를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고 40%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에서 살고 있다. p339

 

북미에는 인구 1천 명당 798대의 텔레비전과 2,017대의 라디오가 있는 반면 아프리카에는 인구 1천명당 고작 37대의 텔레비전과 172대의 라디오가 있을 뿐이다. 세계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선진 공업국에 인터넷 사용자의 88%가 몰려 있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한 북미 지역에 인터넷 사용자의 절반 이상이 거주한다. 반면 세계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남아시아에는 전체 인터넷 사용자의 1%미만이 거주한다. p340

 

유엔 개발 계획이 시해한 연구에 따르면 358명의 억만장자들이 세계 인구의 절반이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미국 인구의 절반을 합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전 세계의 30억 노동자 가운데 1/3은 일자리가 없거나 생활비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1998년 국제 노동 기구의 보고서 내용이다. p341

 

전 세계적으로 6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예 집이 없거나 조악하고 불결한 집에서 살고 있다. 세계은행은 2010년까지는 14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위생적인 물을 공급받지 못한 채 살아갈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 과학재단은 케이블 텔레비전이 <가정에 묶여 있거나 각종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삶들, 미취학 아동의 교육, 고등학교 과정 및 상급 과정의 방송 통신 교육, 직업 교육, 현장 연수, 지역 정보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역 프로그램의 흔적은 지금도 케이블 텔레비전에 일부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상업 방송이고 여기서 얻은 광고비가 케이블 방송사의 주요 수입원이다. p346

 

12 문화와 자본주의의 생태학을 향하여

우리가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가 접속을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요 입구일 뿐이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p348

 

접속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완전한 이론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글로벌 경제가 시장에서 네트워크로, 현실 공간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산업 자본주의에서 문화자본주의로 빠르게 변모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반성하기 위한 논의의 여건은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다. p349

 

접속으로부터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는 시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의 활발한 전개 덕분에 최근 몇 십 년 동안 상당한 입지를 확보했다. 미국의 흑인은 1960년대부터 남부의 식당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p351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여성운동가들은 폐쇄적인 남성클럽의 개방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여성의 접근을 막는 것은 사업가로서 살아남는 데 중요한 교제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결국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마찬가지로 맑은 공기와 물, 깨끗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아무도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소유권으로 인식되는 추세에 있다>고 맥퍼슨은 말한다. p351

 

정부의 역할은 사유 재산을 보호하여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차원으로 자연히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공급자와 사용자가 중심에 오는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얽히고 설킨 배태 관계가 사회 활동의 기본축이 되기 때문에 자유도 지금까지와 판이하게 다른 뜻을 갖는다. 자치와 소유보다는 포함과 접속이 개인적 자유의 더 중요한 가늠자가 된다. p354

 

네트워크 세계에서 자치를 고수한다는 것은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반면, 배제되지 않을 권리, 곧 접속의 권리는 개인적 자유를 재는 잣대가 된다. 정부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의사소통을 하고 어울리고 상거래를 하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수많은 네트워크에 모든 개인이 접속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점점 확대되는 글로벌 네트워크 세계에서 정부가 과연 누구나 접속의 권리를 누리도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p354

 

새로운 시대의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업적으로 규정되는 관계와 전자로 매개되는 네트워크가 전통적 관계와 공동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일 것이다. 이런 전제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조직하는 두 가지 방식은 판이하게 다른 전제와 가치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들은 동질적이라기보다는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사회적 계약과 상업적 계약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계약은 더 오랜 시간적 지평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관습에 의해 또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내리는 평결에 의해 구속력을 갖는다. p356

 

제3부문은 ... 지역문화의 온갖 다양한 차원을 보존하고 향상시키는 막중한 책임도 이 기구들이 맡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활동의 규모와 범위는 정부 부문과 상업 부문을 능가한다. 제3부문의 조직들은 민주주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본적 기능의 상당 부분을 떠맡는다. 이들은 제도적으로 자행되는 권력 남용에 도전하고 사회적 불만을 표출시키는 피뢰침이다. p36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하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p362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때 길러진다. 다른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p362

 

체험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모의 현실로 자꾸만 옮겨가고 그 속에서 체험을 문화 상품으로 구입하는 추세가 일반화될 때 공감 능력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화면 앞이나 가상 세계 안에서 성장한 세대-그들의 상호 소통은 기술과 상징의 두꺼운 층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가 남들과 또는 다른 생명체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모사의 세계에서 사람은 공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p363

 

서로에게 신뢰하지 못하는 세대는 문화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p364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장과 네트워크는 사회적 신뢰감과 공감대가 형성된 강력한 사회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나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파생물이다. p365

 

새로운 사운드를 발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음반 회사들은 전자 앰프와 신시사이저를 가미하여 현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길 수 있는 전통 음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른바 <퓨전 음악> 내지는 <하이브리드 음악>을 만들어 낸다. p366

 

세계 음악 옹호론자들은 전세계인에게 토착 음악을 제공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와 관용의 폭을 넓히고 세계는 바야흐로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일차적 회로였던 음악을 판에 박힌 대중 오락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음악의 세계화는 지역 문화를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본질과 맥락을 토착 음악에서 고스란히 제거했다는 것이다. p368

 

이탈리아에서는 무려 18만개나 되는 소규모 독립 커피점이 있지만 워낙 영세하기 때문에 스타벅스 같은 미국계 커피 체인점의 공세 앞에 속수무책인 실정이다. 1999년 여름 미국인 관광객은 로마의 유명한 트레비 분수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던킨 도너츠를 발견하고 기절초풍했다. 던킨 도너츠는 다른 다국적 체인점과 마찬가지로 유럽 시장을 적극 공략한다는 방침 아래 앞으로 2,3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에 110개의 점포를 개설할 예정이다. p370

 

프랑스 남서부 지방에 있는 한 맥도널드 점포는 얼마 전 공격을 받았고 1999년에는 영국 농민들이 몬산토에서 개발한 유전자 변형 곡물을 불태웠다. 프랑스의 정치 분석가 알랭 뒤아멜은 <문화와 음식의 강탈을 거부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이 모든 사건 뒤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p371

 

적절한 균형을 되찾으려면 시장에 나와 있는 문화 상품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못지않게 지역 문화를 소생시키는 데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371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소생하면 시장도 분명히 득을 보겠지만 문화가 단순히 시장의 원료로 사용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문화에서 흘러나와서 인간성을 창조하는 인간과 인간이 공유하는 의미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고, 개인적 오락과 치유의 형식으로 체험을 상품화하는 초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를 격하시키는 발상이다. p373

 

문화 체험은 방송 매체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원산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진정한 의미의 공유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줄어든다. 가령 아일랜드의 마을에서 공연되는 전통 무용은 춤추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의미를 실감나게 전달한다. 그러나 똑같은 무용이 무대에서 공연되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이역 만리의 시청자에게 전달될 때는 단순한 눈요기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 원래의 무용이 전달하려고 했던 대지와의 깊은 일체감은 맛볼 길이 없다. p373

 

인터넷에서 해당 정보를 클릭하는 것이 배움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실의 시공간에서 남들과 살을 맞대고 어울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배움의 일부분이다. p375

 

시장에서 자기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21세기의 교육이념으로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이런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남에게 팔아 먹을 수 있는 재산쯤으로 치부하는 어른을 양산한다. p376

 

문화는 독자성을 크게 잃어버린 채 다른 부 부문에 기대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화 기구는 예전의 독립성을 많이 잃고 정치 기구와 상업 기구에 얹혀 지내고 있다. 문화의 의존성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공연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거나 사업을 따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기업은 마케팅이나 홍보에서 유형무형의 이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문화 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p377

 

산업시대에는 정치 세력이 좌와 우로 갈라져 있고 소유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내 것과 네 것의 범위를 정의하기 위한 싸움에 수많은 세대의 정치적 정열이 소진되었다. 근대의 정치 형세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계급 사이에 형성된 전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상류층, 중산층, 노동자층, 빈민층은 물리적 자본을 가용하고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재산을 분배하는 최선의 방안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생산 수단을 누가 장악하고 인간 노동의 결실을 누가 주도적으로 분배할 것인가 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지난 3백여 년 동안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p379

 

접속의 시대에는 좌우가 대립하는 정치가 내재가치와 효용가치가 갈등을 빚는 새로운 사회 구도에 흡수된다. 내재 가치는 가장 깊은 의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는 절대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화 자원, 의식, 활동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p379

 

문화와 상업의 갈등은 내재 가치와 효용가치의 갈등이다. 두 가치가 모두 지난 몇백 년 동안 사회 담론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내재 가치가 효용가치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p379

 

문화의 다양성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은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상업과 무역의 밑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신뢰와 사회 자본이 고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p381

 

근본주의 세력은 불건전하고 사악하다고 판단될 경우 세계로 통하는 통신 창구를 봉쇄하는 조치도 불사한다. 그들은 지역 문화에서 외부 세계의 더러운 오염원을 말끔히 지원내려고 한다. 모든 근본주의 운동의 밑바닥에는 포위당했다는 위기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반역자, 이단자 같은 사악한 무리로부터 이념이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민족이 되었든 <참다운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광적이 노력을 기울인다. p382

 

근본주의 운동은 늘 지리적 공간과 깊숙이 결부되어 있다. 영토 수호는 사실상 모든 근본주의 신조에 면면히 흐르는 구호이다. 선조의 땅, 성지, 모국을 지켜야 한다는 외침은 <악마같은> 외부 세력에 맞서는 생사를 건 싸움으로 사람들을 규합시킨다. 이런 운동의 밑바닥에는 국경을 재설정하여 혼돈스러운 세계의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p382

 

근본주의 운동의 이런 정서는 대다수 시민 사회 조직이 추구하는 이념과 충돌한다. 시민 사회 조직은 지역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의식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국지적으로>라는 말은 너무나 남용된 나머지 상투적 구호로 변질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전세계의 제3부문 조직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한다. p383

 

자기만의 문화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 시민 사회 조직운동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p383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 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 ... 시민사회 조직이 되었건 근본주의 세력이 되었건 앞으로 지역 문화를 정치적으로 결집하여 동원하는 데 성공하는 집단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p383

 

산업 자본주의가 문화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 정신은 놀이 정신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 p384

 

인류학자들은 아득한 원시 시대부터 산업 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생활에는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는다. 가령 중세의 그리스도교 달력을 보면 1년의 절반 가까이가 공휴일, 축일, 안식일 명목으로 노는 날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 정부가 그리스도교 달력을 폐지하고 공휴일이 훨씬 적은 세속 달력을 도입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자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이 인간 생활을 지배하고 놀이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산업 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p385

 

우선 놀이는 신나고 즐겁다. ... 둘째 놀이는 자발적이다. p385

 

이 일 저 일 골라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세계 노동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일은 생존의 문제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다. 자연히 근로 조건도 혹독하고 열악하다. p386

 

개방과 포용은 놀이 환경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다. 놀다가 사소한 말썽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서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놀이터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상처를 입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난 그냥 장난으로 한거였어> 이 말은 옛날부터 아이들이 놀다가 입버릇처럼 둘어댈 수 있는 말이었다. p386

 

놀이를 하는 동안에는 일상의 시간이 유보된다. 놀이에 푹 빠져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까맣게 잊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놀이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 p387

 

놀이 공간은 보복을 염려할 필요 없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안전한 낙원이다. 그러나 이런 장소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p387

 

<사람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 p389

 

놀이도 희열도 결국은 경험의 공유이다. 숲을 혼자 거닐 때 느끼는 잔잔한 희열도 나를 둘러싼 생명과 혼연 일체가 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 순수한 놀이를 경험하는 동안 마음을 열고 남과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빠져들 때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순수한 놀이를 완전히 참여해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두려워하여 자유를 쓰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놀이다>라고 말했다. p390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은 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 p392

 

3. 내가 저자라면

 

나는 그의 책을 통해 그의 사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많은 사람들과 자료를 동원하면서도 그는 시종일관 그의 이야기를 잃지 않고 있다. 그 일맥관통 하는 힘이 느껴진다.

 

이 많은 개별적 현상들을 해석하는 핵심 코드인 <접속>이라는 말은 마치 현재와 앞으로 진행될 미래의 변화를 읽어낼 ‘마스터 키’로 이해된다. 표면적인 하나하나의 현상들의 저변에 흐르는 조류를 날카롭게 파악하는 그의 안목과 명쾌하게 개념화 해내는 그의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연관성을 해석해낼 수 있다는 것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미지의 세계의 창을 열어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가히 은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들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근대과학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와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그의 저작들에 대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세상 어느 주의주장에도 반대 의견은 항상 있어왔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일정한 새로운 흐름들이 형성된 어느 정도의 시기 이후에야 개념화하고, 이론화할 수 밖에 없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현실에서 몸담고 치열하게 오늘과 내일사이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저서는 힘을 갖고 있다.

 

제3섹터에서 일해 온 나로서는 '제러미 리프킨'의 진단과 흐름에 거의 전폭적인 공감을 보낸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내가 고민해왔던 주제들도 있어서 특히 그런 부분에서는 생각이 많아졌다. 대학시절 문화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다시 시민운동에서 환경운동과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나의 경험들과 결부시켜 생각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그때 그때마다 떠오르는 주제들과 이후에 칼럼으로 써보고 싶은 이야기들, 특히 그 같이 전 세계인 안목을 가진 의견들과 지역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현장활동가로서 나의 실험들이 서로의 관계를 통해 의미있는 결과를 내올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8월말이면 정리하게 될 전주의제21을 통한 지난 10년의 활동을 9월에 글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의 글이 나의 경험들을 정리하는데 방향과 기준들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예비 저술가로서 어떤 글이 나오게 될지 궁금해진다. 마치 그동안의 나의 경험이라는 커피를 갈고, 그 위에 그의 뜨거운 물은 부어내리는 느낌이다.

IP *.186.5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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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08.23 11:21:24 *.221.232.14
시간내 마무리를 다 못했는데, 일단 올립니다. 추가 마물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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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08.26 12:51:57 *.186.58.80
참 좋은 책인데... 빨리 소화해내지를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제 삶과 공감되어 있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장 한 장을 읽어가면서 크고 작은 제 경험들과 관련된 칼럼 소재들을 따로 적어보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이런 저런 기억들과 공상들에 빠져 있다보면.. 애써 마련한 두 시간이 홀딱 가고..
또 하루가 훌러덩 가버리고... 암튼.. 두고 두고 든든한 밑천을 챙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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