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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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가드너 부모는 나찌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 왔으며, 가드너는 1943년 미국 펜슬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즐겨 쳤으며, 이를 통해 많은 기쁨을 얻었다고 한다. 1965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대학의 경제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 뒤, 다시 하버드 대학으로 되돌아와서 발달심리학을 전공하여 1971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시절 호기심이 생기면 어떤 과목이든 청강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잘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지식들을 결합해 내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이 얼리 리더(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남들보다 먼저 책을 읽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보스턴 의과 대학 신경 정신과 교수이다. 하워드 가드너가 인간의 지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하버드 대학의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두뇌 손상을 입은 사람들의 인지 기능을 연구하면서부터였다. 가드너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과 그것의 발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피아제(Jean Piaget)이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피아제 이론보다 더 깊이 인간의 정신을 파고 들었다. 피아제 이론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너무 좁게 설명하고 있다고 재평가하면서, 인간의 사고 전체를 이끄는 한 가지 형태의 인지는 없으며, 적어도 일곱 가지의 지능이 있고 이들은 마치 파이(pie)의 조각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1983년 “Frames of Mind: The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라는 저서를 통해 그 아홉 가지 지능(언어 지능, 논리수학 지능, 음악 지능, 신체 지능, 공간 지능, 대인관계 지능, 자아 지능, 자연관찰, 실존 지능)을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하였다. 지금껏 대부분의 인지학자들이 인간의 지능을 언어 능력과 분석 능력만으로 평가해 온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가설은 가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 이론은 교육학뿐만 아니라, 인간 잠재력 계발 분야, 산업 분야, 리더십 분야 등 많은 영역들에서 전 세계적으로 크나 큰 관심을 얻고 있다. 90년대 후반 이후 그는 리더십과 설득, 직업윤리 등을 주제로 한 책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경영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강연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선정한 세계 경영 대가(大家) 20인 가운데 5위를 차지할 정도로 경영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지능과 창의력, 리더십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이론들로 심리학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워드 가드너는 늘 다른 사람에게 배우기를 좋아해서 많은 멘토와 조언자를 두고 있으면서도 항상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한다. 동시에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했다. 그는 성공을 자신이 좋아서 잘할 수 있고, 사회에서 자기 몫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그것은 취미에서 발견할 수도 있고, 가정을 꾸미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공을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오직 세속적 성공만을 목표로 삼고 앞으로만 달려 나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안에서 질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만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낸 것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
http://cafe.naver.com/chwi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02&
http://blog.naver.com/prettyokyang?Redirect=Log&logNo=60010521630
http://blog.daum.net/seogija/11725782
http://keywui.chosun.com/contents/section.view.keywui?cateCategoryId=101&cateSubCategoryId=22&mvSeqnum=72634
http://www.youtube.com/watch?v=xX_TKr-29Ik 2. ‘가슴에 무찔러 드는 글귀’
감역자의 글
이 모형에 따르면 개인은 내부에 어떤 분야의 대가(大家:master)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서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만으로는 창조성이 발휘되는 성인으로 성장해 가지 못하고, 우선 그러한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 등)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며, 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7]
제 1 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혁신적인 인물이 어린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간파하는 것도 창조성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39]
흔히 창조적인 인물들은 홀로 고립되어 작업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장하는 기간 내내 주변의 사람들이 행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39]
동일한 시기에 살고 있는 몇몇 행위자가 동일한 힘을 드러냈다거나 비슷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라. 혹은 몇몇 분야가 동일한 개념 구상이나 동일한 분류학적 구도를 표현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라. 이러한 주장은 시대를 포괄하는 정신이 작동한다는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다만 한 개인이 어떤 일을 할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하는 편이 훨씬 신중한 의견이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작업이나 성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러한 상호 영향이 법칙이 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개인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고 함께 활약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엘리엇과 스트라빈스키는 만년에는 친구가 되었다.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우연히 알게 된 사이로서, 편지를 통해 전쟁에 관해서 매우 날카로운 견해를 주고 받기도 했다. 이들 창조적인 인물들이 창안한 특정한 관념들은 마치 공용 화폐처럼 널리 퍼져 있어서 당대에 살았던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나 엘리엇의『황무지』,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동기에 관한 이론, 관찰자가 시공간 복합체에 편입되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등은 처음 생겨나고 10년도 되지 않아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새로운 생각이 널리 알려지고 비슷한 시기에 구상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무언가 신비한 힘이 역사의 배후에서 작용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49-50]
2. 창조성의 연구 방법
사람들이 외적인 보상을 노릴 때보다 순수한 즐거움만으로 행동을 할 때 창조적인 해법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창조성’이나 ‘독창성’을 기준으로 우리의 행동이 평가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오히려 행동의 반경이 좁아진다(비교적 상투적인 결과만을 얻는다). 반면에 그런 평가가 없을 때는 오히려 창조성을 자유롭게 북돋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68]
➜ 내적인 자유로움 안에서 창조성이 발휘된다면 외적인 보상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고 자유가 억압된다면 창조성이 자유롭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사람들은 이와 같은 내재적으로 동기화된 경험(intrinsically tmotivaing experience)에서 자신이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 상태는 어떤 활동 분야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몰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반성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자주 창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 상태를 추구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몰입순간’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훈련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고통까지도 감수하려 드는 것이다. 작품에 전념하는 작가들은 책상에 묶여 있는 시간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결과도 신통치 않은 작품을 쓰면서 그런 ‘몰입 순간’을 겪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실망할 것이다. [69]
➜ 몰입은 그 순간자체로 결과에 상관없이 희열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우에는 유년기야말로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된다. 실상 창조적인 인물이란 호기심이 많던 어린 시절에 품었던 수많은 의문점과 문제의식, 그리고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가장 선진적인 이해 방식과 ‘결혼’시키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유년기의 ‘창조성 자본’에 되풀이해서 의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른 시대라면, 성인이 되어 의존하게 되는 유년의 시기도 달라질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 축적해 놓은 자원을 파헤치는 것은 바로 현대가 부과한 짐(burden)인 것이다. [78]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몰두했더라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분야에서 통용되는 지식에 통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0년 정도의 꾸준한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도약을 이룰 수가 없다. 흔히 모차르트는 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10년간 수많은 곡을 쓴 다음에야 훌륭한 음악을 연거푸 내놓을 수 있었다.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자들 역시 혁신적인 업적을 이루기 전에 최소한 10년의 수련기를 거쳐야 했다. 물론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인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는 또 다른 10년 후에 다시 한 번 중대한 혁신을 이루었다.
➜ 10년의 법칙이란 얘기는 너무나 익숙한 얘기이긴 하지만 천재라 불리는 대가들 또한 그 법칙이 적용됐음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하지만 10년 동안은 전문 기술을 그저 추종하기만 하고 그 다음에 비로소 자기만의 혁신적인 업적을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은 옳은 얘기가 아니다. 창조적인 도약을 이룬 인물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탐구자이며 혁신가이고 사색가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다수를 따르는 데 만족하지 않으며, 선택한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가령, 젊은 음악 연주자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자신의 맘에 들도록 ‘곡을 다시 쓰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작곡 재능을 발휘한다. 신진 과학자들 역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지식에 만족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한다. 이러한 모험적인 시도는 흔히 반항적인 행위로 간주되지만, 운이 좋으면 교사나 동료들로부터 계속 실험적인 시도에 대한 격려를 받기도 한다. [79-80]
창조성은 새로운 유형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 혹은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주제를 발겨하는 것과 관련된다. [84]
공동체의 평가가 내려지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은 그것(그 사람)이 ‘창조적인 잠재력’을 지녔다는 지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소속 공동체나 문화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려야 마땅하다. 다른 판관(判官)의 말은 쓸모가 없다. [85]
첫 번째 사안은 창조자가 가장 중요한 도약을 이루는 시기에 탐구하는 과정에서 표면에 등장한다. 이 시기에 적어도 일부의 창조자들은 아주 친밀한 동료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연구에서 드러난 사실은 좀 더 극적이었다. 창조자들이 중요한 지원과 격려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 지원 체계에는 규정 가능한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97]
대게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 까지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이러한 계약의 성격은 사례마다 조금씩 다르다. 금욕적인 삶을 다짐하는 경우(프로이트, 엘리엇, 간디)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경우(아인슈타인, 그레이엄)도 있다. 피카소는 이런 거래가 거절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스트라빈스키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버리면서까지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이 범상치 않은 협정에는 이런 계약을 강박적이리 만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이 손상되거나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서려 있다. 실제로 계약 이행이 느슨해지면 창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가 있다. [99]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 지그문트 프로이드 -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프로이트가 수수께끼나 퍼즐과 같은 곤란한 문제를 푸는 데 몰두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분명 역설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했고, 해답이 풀릴 때까지 곰곰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탈무드』의 저자들만큼이나 인생의 모든 빈틈(cranny)에 대해 그 원인과 이유를 지치지 않고 따져 물었다. 왜 자신은 약혼녀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야 하는지,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몇 개월이나 실험실에서 고생하고도 어째서 아무것도 발견할 희망이 보이지 않는지, 여성이 가정과 직업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이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물음들이다. [111]
➜ 제기했던 물음들은 너무도 평범한 것들이었는데 어떻게 정신분석과 같은 이론을 창출해 낼 수 있었을까?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해서 그랬던 것일까?
두 사람은 비교적 고립 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사고를 발전시켰고, 세상에 자신을 이해하고 격려해 줄 사람, 물론 그렇다고 전혀 비판할 줄 모르는 위인이 아닌 사람이 최소한 한 명쯤은 있기를 바랐다. [124]
새로운 어휘와 상징체계를 만들어 내고, 온갖 신경망과 에너지 장을 추적해 체계적으로 도식화하는 작업 역시 프로이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의 전문 용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이론을 사유하고 있었다. 자시 생각의 오점을 부적절하거나 시대에 뒤진 용어로 번역하는 데서 생기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프로이트는 자신만의 언어와 도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자기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134]
창조적인 인물들은 근본적인 비약을 이루기 직전에,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언어를 믿을만한 친구에게 시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자기가 아주 미친 것이 아니며, 정말 중요하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다. 소통에 대한 이런 욕망은 인지적인 측면과 정서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창조적인 인물들은 학문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무조건적인 격려와 지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통에 대한 이런 필사적인 노력은 엄마와 아이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소통 관계와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를 회복하려는 심정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136]
꿈은 억압된 소원이 위장 실현되는 과정이며, 예전의 결심이나 혹은 근심 혹은 욕망을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다. [137]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네.” [139]
“고요한 확신이 내 마음에 들어차기 위해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자네라네.” [155]
➜ 이들에게 확신은 누구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통해 얻는 것인가 보다.
나이가 들면 새로 만난 사람과 감정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갖기가 어려운 법이고, 동년배 친구들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아지므로 이런 일에 무감각해져야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세 가지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하나는 오랫동안 홀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켰다는 점인데, 이런 혹독한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다른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두 번째로 프로이트는 남들이야 어찌 생각했건 자신은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적인 관계는 아니고 보다 공적이고 지적인 관계였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 사령관으로 여겼다. 위험하고 무모한 작전도 당연히 필요하고, 결과가 불확실한 포위 공격도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사상자를 열외시키고 전열을 재편한 후,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 전장(戰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때로 이러한 단계적 임무를 떠맡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한다. 모세는 형인 아론의 도움을 받았고, 다윈은 진화론을 주창하는 운동을 생물학자인 토머스 허슬리에게 맡겼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대개의 경우 장군과 중위 임무를 모두 수행했다. [159-160]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은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트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에게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에 돌아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어냈고, 덕분에 그 분야는 마침내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심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65]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영원한 아이
보들레르는 예술가의 “천재성이란 의지로 되찾은 유년기이자, 이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어른의 육체를 갖춘 유년기, 그리고 무의지적으로 축적된 경험의 총합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석적인 정신을 갖춘 유년기.”라고 말한다. 즉, 보들레르는 어린이를 예술가로 본 것이 아니라, 화가를 아이의 눈을 가진 어른으로 본 것이다. [170]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 [171]
“나 같은 사람에게 발달의 전환점이란, 그저 덧없을 뿐인 개인적 관심사를 서서히 뒤로 하고 사물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에 있다.” [194]
아인슈타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숙한 사고를 할 때까지는 발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신동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처음 발표한 논문들은 당시의 주요 물리학 잡지에 금방 게재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준이 특별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찍부터 과학자로서의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보인 건 사실이다. [195]
➜ ‘짠’ 하고 나타나는 법은 없나보다. 기질적으로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그것을 잘 가꾸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인슈타인은 기꺼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고자 했는데, 어린 아이의 중요한 정신적 성향이랄 수 있는 이런 특징을 그는 꽤 오랫동안 보유했다. [210]
아인슈타인은 적절한 연구 환경과 좋은 동료들, 그리고 세상의 인정을 나름대로 중요시했고, 그래서 불행했던 학창 시절 이래 별로 애착을 갖지 않았던 땅에서 제안한 직위를 받아들였다. 이 결정 덕분에 그는 전혀 애상하지 못했던 각광을 받게 될 터였다. [219]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서 이론을 발표하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확실히 자리매김 되었다. 그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상상하고 그 해답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대담한 예측도 제기했는데 이 예측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사실 1919년의 일식 관측에서 상대성 이론이 입증되자 세상은 축복으로 환영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담담했고 조금은 지겨운 기색까지 비쳤다. [228]
젊음과 원숙함의 결합은 창조적인 과학 천재의 고유한 특징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그가 젊은 시절에 숙고했던 문제가 당시의 물리학에 적합했다는 점에서, 둘째 그가 공간적·시각적 상상력에 재능이 있다는 점이 그의 과학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20년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의 재능과 세계관은 논리-수학 지능이 공간적 재능보다 더 중요한 양자 역학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233]
젊음과 원숙함이 훌륭하게 결합한 아인슈타인의 지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우선 그는 흥미로운 현상에 대한 관심을 평생 잃지 않았다. 호프만은 이렇게 쓴다.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나 그의 마음속에는 과학이 있었다. 그는 차를 저으면서 차 찌꺼기가 컵 바닥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를 전혀 뜻밖의 사실, 즉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과 연결시켜서 설명했다. 모래 위를 걸을 때도 그는 우리가 보통 아무 생각 없이 알고 있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즉, 마른 모래나 물에 잠긴 모래는 그렇지 않은데, 젖은 모래는 딱딱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과학적 설명을 찾아낸다. [234]
어린 시절의 천재란 주로 명민하고 신속하게 직관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reflective wisdom)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한다. 이러한 지혜는 보통 링컨이나 간디와 같은 정치 및 지도자와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236]
그는 기탄없이 말했다.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 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이다.” 철학적 색채가 가미된 아인슈타인의 발언은 어느 것도 완전히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인상적인 태도로 그런 주장을 했고, 덕분에 그의 주장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었다. [236]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만큼 관심이 많은데 비해, 이와는 이상하리 만치 대조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직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협동 작업에는 익숙치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이러한 고립은 때로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할 걸 후회하지 않는다.(...)여기에는 나름대로 보상이 있었는데, 나는 관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변덕스런 토대에 내 정신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240]
문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와 같은 분야에서는 어린 시절의 직관에서 성찰적인 지혜로운 변화가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일어난다. [241]
간주곡
깊은 수준에서는 유년기와 연결된 끈이 매우 창조적인 인물들의 생애를 관통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종종 말했듯이 그가 숙고했던 문제들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제기하는 문제들이고 어른들 대부분은 자라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문제들이다. 프로이트가 몰두했던 주제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종류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동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긴 하다. 즉, 꿈이나 농담, 성적 놀이와 같은 다양한 현상뿐 아니라 전위와 응축, 대체와 같은 심리 과정이 그렇다는 애기다. 여전히 유년기의 체험과 접촉하는 사람만이 그들이 탐구했던 현상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가 개시하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만이 그토록 체계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탐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47]
5. 파블로 피카소 - 신동과 천재
신동의 출현은 특정 분야에 대한 어떤 문화권의 관심과 지원 이외에도, 언제나 여러 요인들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야(co-incidence)’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252]
아동과 주변 환경의 궁합이 꼭 맞는 경우에도 경험이 미숙한 아이들은 탈선하고 방황하기 십상이다. 세다가 신동은 모방에는 특출한 재능이 있어도 특정 분야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낡은 관행과 인습을 극복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신동은 당대의 선도적인 혁신가들이나 역사에서 배운 모범적인 인물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자신에게 ‘의미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거나 특정 분야의 일반적 규준을 익히는 등 자기만의 관심사에 주력한다. [253]
특정 분야에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은 그 분야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여 통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254]
피카소의 실험적인 성향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질, 미술 소재로 작업하는 일에서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 점점 커지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좀 더 불행한 일이지만 미술 소재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고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만 표준적인 학과 공부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능력 간의 불균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학생이면 마땅히 잘 해내야 하는 일을 잘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강점을 보이는 분야를 맹렬하게 파고들어서 개인적인 좌절감을 극복하고 가족들에게 자기의 진면목을 보이고가 하는 법이다. [259]
음악과 달리, 회화 분야의 신동은 없습니다. 어린 천재란 그저 유년기의 천재일 뿐이지요. 나이가 좀 더 들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런 아이도 미술가가 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가령, 나는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처음 그린 그림은 아동 전시회에서도 걸리지 못했어요. 아이다운 천진성이나 소박함이 없었던 거지요.(...) 어린 시절에 나는 그저 아카데미 화품에 따라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 보면 충격을 받을 정도로 거의 똑같이 베끼다시피 했더군요. (263)
주변 사람들은 피카소가 비상한 능력과 감수성의 소유자이며, 그가 침묵할 때조차 타고난 지도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피카소는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한하다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명료하게 느꼈을 터인데, 유년 시절에 이미 이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바 이다. 이런 점을 자각하고 고향의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 사이에서 리더의 자리에 올랐을 때, 다른 많은 천부적인 재능을 소유한 젊은이들처럼 그가 서양 예술의 중심지로 이주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266]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287]
➜ 큰 도약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위험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지.
아무리 친밀하고 좋은 관계를 맺은 사이라도, 서로 떨어져서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낡은 주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는 법이다. 이 점은 특히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창조적인 인물들한테 꼭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302]
아무튼 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화가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 싶은 수집가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307]
“ ‘완성된’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한 작품의 상이한 형태가 있을 뿐이다.
“ 내 그림은 모두 탐구다. (...) 이 탐구에는 논리적인 순서가 있다. 내가 번호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 순서에 따라 실험을 하고, 여기에 번호와 날짜를 적어두었다. 이런 점을 고맙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작업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언젠가는 과학이 존재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과학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터다. 창조적인 인물을 탐구해서 인간 일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그런 과학이다.” [313]
“정신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인 예술가들은 인간성과 문명의 가장 숭고한 가치가 위기에 처한 갈등 상황에 대해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 된다. 항상 나는 이렇게 믿어 왔다.” 이러서 그는 더욱 날카로운 말을 남겼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白痴)이다.(...)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거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림은 집 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 [322]
➜ 피카소는 예술가가 정치에 어떤 식으로 시대의 오류에 대항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예술적 방식으로 현 시대에 우리의 의견을 발언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공모전에 쥐를 그려 넣었다고 이슈가 되어버리는 지금 세상에 말이다.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음악가이자 정치가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력하다." [334]
스트라빈스키는 오만함이나 의기소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창조력이 풍부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다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351]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가라 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있는 법이며, 이들은 본래부터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이다. [355]
➜ 일반인들이 하는 실수를 안 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구나.
이러한 노력은 대중의 평범한 평가 기준에 의해 실패할 수는 있을지언정, 창조자 자신에게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그 작품을 통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으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는지, 나아가서 그러한 목표를 미래의 작품 속에 가장 훌륭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355]
➜ 결과나 비평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그 과정 안에서의 노력자체를 인정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다음에 멋진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나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작업을 하기 원하는 예술가라면, 자신의 권리와 신조를 위해 싸우거나 아니면 더 유력한 인물이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탁월한 창조자들은 언제나 완벽주의자이다. 처음의 구상을 세목 그대로 애써 실현하고자 하며, 수정이 꼭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용기 있는 창조자들은 어떤 권리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으려 하며, 설사 의식적으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도 무의식적으로는 원래의 착상을 그대로 고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서 타인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374]
스트라빈스키는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의식이라는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작품을 경멸했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하기보다는 전통을 확인하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는 유럽의 모든 음악을 하나의 단일한, 나눌 수 없는 전체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엘리엇과 내가 낡은 배를 수리하지 않았는가? 낡은 배를 수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진정한 임무다. 예술가는 이미 말해진 것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384]
"나의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다. 나는 매일 그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어린 시절에 이미 이 재능은 내가 잠시 보관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맨 처음에 말한 생각이 중요하다.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라는." 그리고 로버트 크래프트에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종교적인 음악을 작곡하려면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악마도 믿어야 하고 교회의 기적도 믿어야 한다." [386]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곡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성찰했다.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 (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 나간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의 우연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 [388]
➜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참신한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중을 나간다는 프로이드의 말처럼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지 준비하는 것 또한 그들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작곡할 때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손가락이 알아서 상이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손가락을 얕봐서는 안 된다. 악기와 늘 접촉하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손가락이다. 그게 없으면 무의식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388]
(...)다음 곳을 쓸 때는 전혀 다른 것을 시도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터이다. [388]
"나의 행동반경을 좁힐수록, 그리고 내 주위에 장애물을 더 많이 쌓아둘수록, 나의 자유 역시 더욱 커지고 풍부해진다. 속박을 없애면 그 만큼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도 줄어든다. 더 많은 제한을 부과할수록 우리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에서 더 자유로와진다." [390]
그는 광대한 음악적 원천에서 받은 영향을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397]
7. T.S. 엘리엇 -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중요한 작가가 되는 데는 오직 두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작품을 써서 온갖 지면에서 제 작품을 볼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만 쓰는 거지요.(...) 저는 과작(寡作)인지라 많이 써서 유력한 작가가 되기는 글렀습니다.(...) 런던에서는 작은 책자 분량의 시 한편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한 편 한 편마다 완벽성을 기해야하고, 그래서 각기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관건일 테지요. [424]
1914년 영국으로 영구 이주한 이래 1930년에 세계적인 시인이 될 때까지, 엘리엇은 자신의 경력에 중요한 행동을 할 때마다 세심하게 계획하고 깊이 생각했다. [425]
파운드는 문학에 관한 조언을 했고 비비언은 정서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기는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했다. 이런 두 명의 훌륭한 편집자가 있었기에 엘리엇은 전반적인 시의 흐름과 특정한 행의 단어 선택에서 모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429]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 - 소설가 마샤 데이븐포트 [437]
엘리엇은 시를 정서나 개성의 표출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와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로 여겼다. 그는 개성과 정서를 소유한 사람만이 거기서 도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동시대 모더니스트인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그는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어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했다. [443]
그는 시작 과정, 특히 자신의 경우를 비롯한 당대의 시작 과정을 깊이 있게 통찰했다. 엘리엇은 철학을 공부하고 비평을 썼던 경험을 십분 살려서 당대의 예술을 조망하면서, 보통은 교육 배경이 서로 다르고 감수성은 반대되기까지 하는 여러 사람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동시에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비평가로서 성공하고 갈채를 받았는데 당대의 다른 누구 못지않게 이러한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런 성공과 갈채를 한층 배가시킨 면이 있었다. [445]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마치 희귀종 생물처럼 자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을 금방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446]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은 한 분야에서, 드물게는 여러 분야에서 기존의 업적을 완전히 배워 익힌다. 이미 당대의 첨단에 이른 자들은 한층 더 나아가기를 열망한다. 이들은 발달 과정의 중요한 시점에서 금방 동료를 알아본다. 물론 이 동료들이 경쟁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일부는 이런 식의 편협한 관점을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포부가 큰 혁신가라면, 1914년 「돌풍」이라는 자칭 아방가르드 잡지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파운드와 엘리엇, 윈덤 루이스 동인과 같은 소규모 그룹의 대의에 유리한 것은 자신에게도 유리하다는 점을 금방 깨닫는다. 이런 식으로 더 큰 대의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경쟁 관계에서 오는 날카로운 면이 어느 정도는 부드럽게 완화되는 것이다. [448]
경계인으로 살았던 엘리엇의 생애는 역설적이다. 그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세계 최대의 강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엘리엇 가문의 다른 남자들처럼 주류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경계인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일부러 경계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455]
"예술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포구하기를 요구한다. 가족도 버리고 오직 예술만을 좇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예술은 인간이 어느 가족이나 계급, 당 혹은 동인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일 뿐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456]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457]
엘리엇의 뛰어난 작품은 경계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출현했거니와, 그런 빛나는 업적을 계속 쌓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지도 않았고 감당할 수도 없었더라도 경계인의 자리를 줄곧 지켰어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457]
간주곡2
그들은 창조력의 원천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일종의 협약, 아주 인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고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대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친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법정 싸움의 불시를 지피는 데 주저치 않았으며, 엘리엇은 프로이트처럼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고 동시에 가학적이라 할 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했다. [459]
예술가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피카소와 스크라빈스키는 마사 그레이엄과 마찬가지로 이런 길을 선택했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창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을 주기로 작품 세계를 쇄신하는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었다. [460]
이들 혁신가들 사이에는 인상적인 유사점이 있다. 파편적인 요소와 형태 자체에 대한 관심, 일상의 세속적인 삶에서 겪는 긴장, 원시에의 동경, 과거의 무거운 주제, 세속의 사소한 일들과 고상한 전체 주제 사이를 왕복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462]
우선 이들은 장인 정신이 투철한 예술가였다. 매일같이 작업실에 들어가 거의 홀로, 완성까지 몇 달 혹은 몇 년씩이나 걸리는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이러한 작품은 예술 수단과 장르의 실험을 통해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예술 수단과 예술 장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세기 동안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이들 혁신적인 예술가가 새롭고 낯선, 어쩌면 관객들에게 충격을 미칠 수도 있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463]
8. 마사 그레이엄
장엄하고 화려한 옷차림과 표정이 풍부한 눈, 인상적인 모습에 혼이 빼앗길 정도였다.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고 훗날 그녀는 회상했다. [472]
거의 서른 살이 된 시점에서 그녀는 마음속에 번지는 모든 의심을 접어두고 프로이트나 피카소에 비견할 만한 태도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475]
모든 것을 잃을 걸 각오하면서 새로운 것을 시도했고, 각자가 우리의 모든 전통을 바다에 내던진 지 오래였다. [480]
좀 인상적인 예를 들자면, 한 시즌에 마사 그레이엄 같은 무용가가 창조하는 새로운 작품의 수는 옆에서 지켜보는 구경꾼이 보기에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이 풍부한 내용을 한 번 보고 소화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런 계획에 놀라는 구경꾼이라면, 그걸 창조하고 연출한 사람에 대해서는 뭐라고 느낄까. [483]
미스 그레이엄의 무용 프로그램에는 열정과 항의가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용가로서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는 셈이다.(...) 관객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484]
그레이엄은 창조력이 풍부한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반복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든 자기 모방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489]
자기를 복제하고 반복하는 진부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면서 참신한 새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고, 가끔은 신랄한 비판에 의욕이 꺾이기는 했어도 다시 도전할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502]
그레이엄은 여성 혹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옹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 비치는 자기 모습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비판을 견뎌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창조 활동에 전념했다. 무용단의 매력적인 지도자였던 그녀는 자기 주변 사람들이나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 [508]
엘리엇이나 피카소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위기 체험은 그레이엄 예술을 손상시키기는 커녕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레이엄은 미국적 주에나 작품의 밝은 면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나, 1940년대 후반부터 고전 전통, 특히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510]
➜ 모든 위기 상황을 기회로 삶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기에 신랄한 비판에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나보다.
신체-운동 지능은 자립적인 상징체계를 통한(혹은 자립적인 상징체계로 표기되는) 사유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 실험하고 여러 차례 변형하는 과정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517]
"그레이엄은 그녀의 몸이었다. 그것(몸)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강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단련시킨 덕분에 그녀는 그녀 자신이 된 것이다. 몸의 기능성과 불가능성에 따라 그녀가 고안할 수 있는 무용의 한계가 규정되며, 몸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있기에 그녀는 연습을 통해 더욱 더 무용 테크닉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517]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니진스키는 단 한 번의 탁월한 도약을 위해 수천 번이나 도약 연습을 했다." [521]
➜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덜 연습할 것이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W.H. 오든 역시 야심만만한 젊은 시인에게 비슷한 충고를 한 바 있다. "시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521]
그레이엄은 무용 동작의 표현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고, 동작을 위한 동작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동작을 우리가 느끼는 감정, 그녀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과 연관 지었다. "아무리 추상적인 작업을 할 때라고 거기에는 극적인 라인(dramatic line)을 넣어야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나는 무용을 삶에서 분리시킨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레이엄은 다른 현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순수 추상의 세계에 매혹되지 않았다. "나는 이해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느끼기를 원한다." [522]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에 적는다. 어떤 책에서든 인상적인 구절이다 싶으면 바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출처를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실제 작업을 할 때 모든 과정에 대한 기록을 간직할 수 있다. [523]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 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리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 [523]
내가 인생을 이해한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한 방식에서 많은 것을 얻지요. 우리가 읽고 마음 깊이 흡수한 것이 보석처럼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겁니다." [524]
"모든 사람이 재능을 타고 나지만, 대부분은 겨우 몇 분 동안만 그 재능을 간직한다."
-작곡가 에드가 베레즈가 한말 [524]
➜ 공감이 가는 말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새로운 재능을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애쓰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레이엄은 거의 평생에 걸쳐 자신을 무용가이자 배우로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용가로 태어났다고 느꼈다. "나는 무용가가 되기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나는 무용가로 선택된 것이다." [524]
(...)나의 삶, 그리고 작품 활동은 필연입니다.(...)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각 하나 없이 오직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동물이 일체의 속임수나 야망없이 먹고 마시고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524]
그레이엄은 헌신과 대담함이 부족한 사람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았다. "누구나 실패할 권리는 있다. 실패했더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단계로 오를 수 있다.(...) 한 가지 대죄가 있다면 그건 범용(mediocrity)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526]
"무용가의 도구는 탄생과 죽음의 운명에 매여 있는 그의 육체이다. 그가 사멸하면 그의 예술도 사멸한다." [530]
그녀는 모험을 꺼리지 않았다. 현재의 영예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새로운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시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창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한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하면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갈 줄 알았다. [538]
9. 마하트마 간디 - 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지선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544]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 간디는 엄청난 독서와 풍부한 산 체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인도라는 나라의 작은 지역과 세상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일부 종교에만 익숙해 있던 처지였다. 하지만 영국을 떠날 때 그는 폭넓은 독서 체험을 하고, 아주 다양한 견해에 접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간디는 앞으로 그가 만나게 될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배웠고, 앞으로 그가 협상하게 될 영국 및 영구에서 교육받은 지도자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549]
간디 성격의 중요한 일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회가 문을 두드리면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고 또 자신과 가족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해도 그 기회를 붙잡는다는 점이다. [550]
처음에는 모든 일이 서툴렀다. 배워야 할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하고 발견해 가면서 능력을 향상시켰다. 이 과정에서 간디는 필요할 때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훌륭한 능력을 찾아냈다. 간디는 언제나 사랑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표를 추구하는 끈질기고도 침착한 태도는 널리 존경받았다. [554]
간디와 같은 정치적 창조자들에게 있어 창조적인 작업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보다 넓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능력에 있다. [561]
어떤 시련도 기회로 삼을 줄 알았던 간디는 구속 수감을 일시적인 유예로 여겼다. 그는 과거의 행적을 반추하면서 폭넓은 독서와 사색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전에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저항 운동의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간디는 완전한 독립에 미달되는 목표는 충분치 않다는 결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확고한 신념이 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572]
간디는 체계적이고 철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폭넓은 독서를 했다. 특히 감옥에 갇히거나 자발적으로 활동적인 삶에서 물러나 은거 할 때 많은 책을 읽었다. [573]
간디는 개인적으로 훌륭한 삶을 추구하는 것과 공동체에 봉사하면서 모범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별개로 취급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자유는 사회에 봉사하는 자유가 되어야 했고, 개인적인 비폭력은 보다 넓은 갈등의 무대에서도 실현되는 비폭력이 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지식과 지혜는 공동체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마땅했다. [575]
종교적인 혁신가란 자신의 개인적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해답이 궁극적으로는 보다 넓은 공동체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575]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말했고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정신과 영혼과 몸은 일치했다. [589]
간디가 나누었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과의 대화였다. [591]
“정의로써 힘에 대항하는 이번 싸움에서 나는 세상의 공감을 얻고 싶다.” [596]
그는 여느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그가 선택한 분야(도덕분야)에서 조숙함을 보였고 그 분야의 거장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할 줄 알았다. 신중하게 경계인의 위치를 견지한다거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데도 소홀함이 없었다는 점, 근본적으로 자기본위의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점, 정치적 효과를 위해 사적인 친밀성을 희생했다는 점, 사상이나 인품에 아이 같은 요소가 남아 있다는 점도 모두 창조의 거장다운 표지였다. 여러모로 아이다운 천진성을 지닌 그는 단순하면서도 혁명적인 사상을 지녔다. 어떤 인종이나 민족도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 비해 우월하지 못하며,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고, 타협은 두 정파를 모두 강화한다는 근본적인 통찰이 그것이다. [608]
간주곡 3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 마하트마 간디 [610]
그레이엄에게 공연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었던 반면, 간디에게 실행이란 정치와 사회 및 종교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614]
제 3 부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제로 자신감과 기민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사교 생활이나 취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껏해야 일에 몰두하다가 한숨 돌리는 정도의 주변적인 의미밖에 없다. [628]
프랑스의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들은 도착이라 할지 모르나 나는 내 작품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마치 고행자가 배를 할퀴는 마모직 셔츠를 사랑하듯이 말이다.” [633]
젊은 시절에는 이처럼 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러 면에서 경계인적인 삶이 그들 앞에는 기다렸다. 일부 창조자들은 탄생의 조건에 의해 경계인이 되었다. [634]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처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637]
두 번째 10년이 지난 후에는 다른 종류의 기회가 생긴다. 관련 분야를 역사적으로 혹은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할 수도 있다. [639]
보통 그들은 창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희생했다. 계약의 종류는 다양할지 몰라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모습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거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 자신과의 계약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 펠레스를 연상시키는 그런 반쯤은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계약이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종교적인 특색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각각의 인물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과 계약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663]
에필로그 - 현대와 현대 이후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란, 기회의 시간이자 과거의 짐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뜻에 따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이며 표면 아래에 꿈틀거리고 있는 긴장과 불확실성을 표현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675]
내 생각에 모든 창조적인 도약에는 겉보기엔 전혀 이질적인 두 영역의 결합이 있다. 하나는 관련 분야에 대한 철저하고 조숙한 통달이고, 다른 하나는 유년기의 의식과 관련된 이해 방식과 직관이다. [682]
현대의 거장들은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아이다운 천진성과 자기 분야의 가장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결합할 수 있었다. [683]
보들레르가 말한 대로 천재란 유년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685]
3. ‘내가 저자라면’
같은 시대를 산 이들에게는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지만 후세인들에게는 역사를 발전시킨 대가로 흠모를 받는 이들, 전혀 새로운 발상을 이루어내 각자의 분야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사람들을 하워드 가드너는 창조성의 대가라 부른다.
가드너는 20세기 전반에 나타난 대가 일곱명의 생애를 조망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친숙하게 느껴지는 대가들의 삶을 전혀 다른 각도로 분석하여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프로이트, ‘상대성 이론’으로 기존 물리학의 체계를 완전히 뒤집은 아인슈타인, ‘입체주의’ 화풍을 만들어낸 피카소, 현대음악의 새로운 장을 연 ‘스트라빈스키’, 영원한 경계인이었던 T.S. 엘리엇, 미국 현대 무용의 어머니 마사 그레이엄, 비폭력 운동을 세상에 잉태시킨 위대한 지도자 간디, 서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작업을 진행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준 인물들의 삶을 조망하고 분석한다.
풍부한 사례와 삶의 궤적을 쫓는 이 작업은 그들이 창조성을 발현하여 생애를 온통 그 작업에 바치기 위해 그들이 고립과 고통 속에서 그들의 영혼을 팔아버리면서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갔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창조활동에 여념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이들 곁에는 조력자가 존재했다. 재정적인 후원이나 정신적인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결과물들을 같이 토론하고 다듬을 동료들과 그것들을 완성시켜가는 과정들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첫 챕터에서 책의 방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다중지능 이론과 각각의 지능설명에 대해 짧게 요약이라도 들어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각각의 인물들이 어느 지능이 뛰어난지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어떠한 행동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어떠한 지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와 같이 서술해 주었다면 다중 지능을 이해하는데 보다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은 아주 깊이 연구된 논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실제 예화가 적절히 들어가 있고 중가중간 삽화들이 들어가 있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천재란 타고나는 것만은 아니며 타고난 천재들 또한 10년의 수련기간을 거쳐야만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빛은 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깊게 탐구할 수 있는 저자는 어떤 지능에 탁월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