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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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安哲秀, 1962년 2월 26일 ~ )는 대한민국의 의사, 프로그래머, 벤처 사업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90년에는 당시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3]의대 재학 중에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88년에는 그 취미 덕분에 우연히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백신 프로그램 V1, V2와 V3를 만들었다.[4] 이후 7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백신을 무료로 제작·배포하다가 백신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1995년에 의대 학과장을 그만두고 그 해에 안철수연구소를 설립,[5] 1995년 2월부터 2005년 3월까지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로 재직했다.
2005년 3월에는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이 되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튼스쿨에서 MBA로 들어가 경영학을 배운 후 KAIST 석좌교수로 임용되면서 공대 학생들에게 경영을 가르치다가 2011년에는 KAIST 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부임했다. 최측근인 박경철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청춘콘서트’를 했다.
그는 청렴성과 도전 정신,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성공한 사업가임에도 겸손한 성격으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도 자주 하면서 젊은층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2011년 8월, 안철수의 서울시장 재보선 출마설이 나온 이후로 정치권 영입 제의가 잇따르던 가운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로 나타나는 등 이른바 ‘안철수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안철수는 현재까지 대선출마 여부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발표하고 있지 않다.
안철수는 2011년 11월 14일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연구소 주식 50%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생애
[편집]학창 시절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에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운동 등 특별히 잘하는 게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6] 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치는걸로 의심해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년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7] 그러나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는데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했다.[8]
중간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편집]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과 생화학 교실에서 기초 의학을 전공했다. 1988년 《동방 결절 내에서의 흥분 전도에 미치는 Adrenaline, Acetylcholine, Ca++ 및 K+의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9] 1991년 《토끼 단일 심방근 세포에서 Bay K 8644와 Acetylcholine에 의한 Ca2+ 전류의 조절기전》이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0]
의대 대학원에서 심장 부정맥을 연구하는 ‘심장 전기 생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처음으로 바이러스를 발견했다.[11] 그가 컴퓨터를 공부한 이유는 의사로서 전공 실험을 더 잘하고 특기를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컴퓨터 잡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의 컴퓨터와 50장 가량의 디스켓을 검사해보니 3장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다.[12] 프로그램의 세부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보니 프로그램에 누군가 (c)Brain이라고 써놓은 것이었다.[13] 그 바이러스는 최초로 파키스탄에서 나온 것이었다.[14] 어떤 형제 둘이 컴퓨터 가게를 차려 자기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팔아 가게를 운영하려 했는데 하나만 팔아도 불법 복제가 되어 가게가 망하자 이 형제들이 화가 나 불법 복제를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이러스의 시작이었다. 이 바이러스의 원본에는 만든사람의 이름, 주소, 집전화까지 모두 표시되어 있었으나 국내에 유입된 바이러스에는 그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었다.[15] 이 바이러스는 한국까지 오는데 3년이 걸렸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손에서 손으로 파키스탄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이러스 때문에 디스켓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 디스켓이 깨진다”,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긴다”는 등의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16] 안철수는 전공실험을 위해 열심히 배워두었던 컴퓨터 언어 공부를 막 끝낸 참이어서 절묘한 시기에 바이러스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던 중 후배가 안철수에게 찾아와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묻자 안철수는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후배가 이해하지 못하자 본인 자신이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는데 밤을 세워 분석한 끝에 1988년 6월 10일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하면 치료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백신’(Vaccine)이란 이름의앤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했다. 이것이 V3 최초 버전인 V1이다.[17]
처음으로 문서화된 컴퓨터 바이러스 제거 프로그램은 1987년에 발표된 번트 픽스(Bernd Fix)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18][19][20], 안철수는 “세계 최초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인 V1을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고[21] “미국의 백신 대기업들도 V1보다 1년 늦게 만든 것들이었다”라고 말했다. 바이러스 치료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도움을 요청해오기도 했다. 그 뒤로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만든 백신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후 당시 악명을 떨친 LBC, 예루살렘 바이러스 등을 치료하는 기능이 추가된 ‘V2’, ‘V2Plus’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였다.
그렇게 낮에는 의사, 밤에는 백신 제작자로 7년간 이중 생활을 했으며[22]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만큼 나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의사 생활과 백신제작을 모두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백신 제작을 하고, 의대에 가서는 박사 과정으로 생활했다.[23] 당시에 한국에는 안철수 말고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돈벌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안철수가 군대에 가게될 즈음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미켈란젤로의 탄생일인 3월 6일에 활성화되는 바이러스로 컴퓨터의 기억 자료를 파괴시킨다. 안철수는 자신이 장교 훈련을 받는 3개월 동안 백신을 만들지 않으면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1991년 2월 6일 혼자서 밤새 백신을 만들어 PC통신을 통해 배포했으며 이것이 V3이다.[24] 그리고 이날 아침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대구로 내려가 입영했다. 그러나 백신 제작에 몰입한 나머지 입대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25] 미켈란젤로 바이러스는 치료하였으나 그 바이러스를 만든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는데 당시엔 자기 이름을 과시하기 위해 장난으로 바이러스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취직하기 위해 일부러 바이러스에 허점을 만들어놓아 검거된 후 회사에 스카웃되기도 했다. 이후 해군 군의관(대위)으로 복무하다가 전역했다.
대학생때 만난 부인은 1년 후배로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26]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안철수는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의과 대학교에서 굉장히 유명한 커플이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함께 대학 생활을 했고 당시 궁핍한 학생이었던 안철수는 아무것도 없이 같이 살자며 프로포즈를 했다.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27]
[편집]벤처기업 CEO 생활
의사 생활과 백신 개발을 하는 생활을 7년 정도 했는데[28]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매년 2배씩 증가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의대 교수로 재직하려면 지도 학생을 받아야 하는데 지도 교수가 학생 몰래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학생은 불행한 것이라 생각하였고, 반년간의 고민 끝에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더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백신 제작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러나 돈벌이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7년 동안 모아놓은 모든 백신 자료들을 가지고 비영리 공익 법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려고 정부 부처를 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특히 삼성 소프트웨어 관련에도 찾아가 삼성 로고를 달고 배포한다고 약간의 돈과 인력을 지원해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29] 그러던 중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가 찾아와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왔고 안철수는 그 의견에 동의하여 1995년 3월 15일 창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철수연구소이다.[30]
기업을 만들더라도 백신을 개인에겐 무료로 보급하고, 기업들에만 사용료를 받아 기업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으며 안철수연구소는 현재도 개인에게는 ‘V3 Lite’라는 이름으로 무료 배포하고 있다.[31] 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 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32]
안철수는 1995년 회사를 세우고 몇개월 지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남은직원들은 안철수 연구소에 남아 일을 열심히 하였고 안철수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펜실베니아아 대학 공학석사과정을 공부하였다. 보통 CEO들은 회사를 창립하고 회사를 키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반면에 안철수는 회사를 창립한지 몇개월 만에 유학을 갔고 남은직원들이 2년동안 회사를 열심히 키운 덕분에 미국의 거대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1000만 달러에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석사과정은 2년이고 1997년 펜실베니아 대학교 공과대학 공학석사 학위를 가졌기때문에 1995년 회사를 창립하고 얼마있지 않고 유학을 간것을 알 수 있다.
안철수가 1997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공과대학 공학석사
학력
2008년 5월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 경영학석사 (M.B.A., Entrepreneurial Management 전공) 1997년 5월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공과대학 공학석사 (M.S.E., Management of Technology 전공) [출처 필요] <--- 상기의 한국일보 출처 1997년 공학석사 1991년 2월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 박사 (Ph.D., Physiology 전공) 1988년 2월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 석사 (M.S., Physiology 전공) 1986년 2월 - 서울대학교 의학 학사 (M.D.)
과거 2008년 5월 - 2011년 5월 한국과학기술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정문술석좌교수
2005년 2월 - 2011년 2월 POSCO 사외이사 / 이사회 의장 1995년 2월 - 2005년 3월 안철수연구소 창업자 겸 대표이사 <------------- 안철수 회사 창립 1995년 1991년 2월 - 1994년 4월 해군 군의관(대위 예편) 1990년 1월 - 1990년 2월 일본 규슈 대학 의학부 방문연구원 1989년 9월 - 1991년 2월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 및 의예과 학과장 1986년 3월 - 1989년 9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조교
당시 안철수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갔다. 보통 재벌그룹 회장 정도가 되면 직접 발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당시 인수에 의욕을 가졌던 맥아피 회장은 안철수 앞에서 직접 발표를 하며 인수를 제안했으나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이전에 자신에게 회사를 매각했던 일본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켜줬다. 일본 대표는 “당시 회사가 적자나서 힘들었으나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난 후 걱정도 없이 잘 지낸다”라며 안철수에게 회사를 팔라고 설득했으나 안철수는 끝내 거절했다.[33] 당시 맥아피는 전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안철수연구소 때문에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회사를 매각한다면 그 후에 직원들이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또한 한국의 백신이 맥아피같은 해외 업체에 의해 장악당하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34]
그러던 중 1999년 4월 26일 CIH 바이러스(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적자가 나던 회사는 흑자로 전환됐다.[35] CIH 바이러스로 인해 30만대 가량의 컴퓨터가 파괴되어 기업과 공공기관 등에서 수천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36] 이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화하게 되어 백신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직원이 50명 가량이었는데 하루 종일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었고 컴퓨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매출은 급증했고 1999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이후 세후 순익 100억원 돌파는 안철수연구소가 최초로 달성했다.[37]
[편집]유학·교수 생활과 이후
2005년 당시 회사의 경영 사정은 매우 좋았으나 다른 벤처 기업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안철수는 자신의 능력을 산업 전반에 쓸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1년 간 고민했고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회사를 창립한지 만 10년이 되는 날인 2005년에는 안철수연구소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했고 대신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았다.[38] 당시 발표날까지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철수는 무릎팍 도사나 백지연의 끝장토론에서 직원들에게 주식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고 이야기 했고 일반 월급쟁이의 월급만큼 받는다고 이야기 했지만 안철수가 받은 배당금은 현재까지 100억이 넘으며 보통 주식의 10~20%를 직원들에게 나눠주지만 회사를 경영하던 당시에 안철수는 직원들에게 1.5%의 주식을 주식이 아닌 전환사채로 나누어주었다.[39] CEO를 그만두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40]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이유는 안철수의 부인이 나이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5년을 공부한 아내는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안철수도 뒤늦게 미국 MBA 석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41] 그 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8년 4월 30일 귀국한 안철수는 KAIST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42] 2011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대학원장으로 부임하면서 현재 재직 중에 있다.
2005년에는 포스코의 사외이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2010년에는 포스코 이사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2010년부터 안철수연구소의 사내벤처로 출발한 소셜 네트워크 게임 업체인 노리타운스튜디오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으며, 2010년 6월부터 현재까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제2기 민간위원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교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안철수는 2011년 11월 14일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연구소 주식 50%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편집]철학
[편집]일상 생활
안철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이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존댓말을 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을 못하는 안철수는 심지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도 병사들에게 반말을 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43] 간호사와 안철수연구소 직원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처럼 사회적인 지위가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과 가족에게도 존댓말을 쓴다는 점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안철수는 부부싸움을 하느냐는 질문에 “존댓말로 한다”며 “어린 시절 자신에게 늘 존댓말을 쓰시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라고 말했다.[44] 어머니는 안철수에게 매번 존댓말로 대해주었으며 혼낼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동안 어머니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늦잠을 자서 택시타고 등교할 때 어머니가 “학교 잘 다녀오세요”라고 하자 택시기사가 처음에는 형수님으로 착각하고 “형수님이 참 착하네요” 라고 하였으나 후에 어머니라고 밝히면서 “어떻게 어머니가 존댓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의 존댓말이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모범적인 사생활로도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시절엔 술을 자주 마셨으나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에 과음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이후부터 술을 끊어 전혀 마시지 않고 있으며 흡연도 하지 않는다(참고로 안철수는 과음과 과로로 입원한 상태에서도 회사를 경영하다가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45] 그리고 직원들이나 남들 앞에서 화를 내본 적도 한 번도 없으며 욕을 해본 적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철수에게 청교도적인 삶을 산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은 뭔가를 참아본 적도 없고 오히려 마음 편한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며, 명예보다 자기 마음 편한게 중요하며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46] 매순간 재미있고 의미있는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했는데 “의사로서 계속 생활을 했다면 훨씬 단순하고 집중할 수 있는 생활을 했겠지만 의사를 그만둠으로 인해서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두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효율성 측면에서만 본다면 안철수는 자신이 가장 비효율적인 사람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이 효율성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에게 맞는 분야를 찾기 위해서 쓰는 시간은 값진 시간”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기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47]
한편 안철수는 자신이 크게 성공한 것에 대해 시기가 잘 맞았다고 말한다.[48] 바이러스는 기계어를 알아야 분석할 수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기계어를 배운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어 이런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이라는 것은 기회가 준비와 만난 순간이다”라고 하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은 재능과 노력, 운이 모두 맞아떨어진 것이며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며 사회적 성공이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편집]경영
안철수는 CEO는 제일 높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역할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수평적인 관계에 있으며 CEO는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는게 기본 철학이다.[49] 그는 회사를 경영할 때 영혼을 불어넣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회사지만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가치관이 있으면 자신이 없거나 구성원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계속 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50]
과거에는 바이러스가 장난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최근의 바이러스는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 유포를 통해 개인정보를 알아낸 후 중국 등에서 한국인들의 개인정보를 암거래 하는데 사용되며 러시아의 마피아가 동원되는 등 조직범죄로 발전했다. 안철수는 “백신 회사는 범죄율(바이러스)이 높을수록 이익이 높아지는 아이러니한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명감이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51] 그는 또 “돈벌이 수단으로 백신 사업을 시작한다면 오히려 사회에 해악이 된다”고 강조했는데 경찰과 군인 등도 마찬가지에 해당된다. 이를 위해 상류층의 사람들의 노력이 중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일례로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도 사건의 핵심 인물 상위층으로 올라가면 명문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출신들이 많으며 이들이 문제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사회에 똑똑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와튼스쿨 MBA에서 법학 강의를 들을 때 담당 교수는 “A학점을 줄 수밖에 없는 똑똑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10년 후에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감옥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며 똑똑하지만 개인적인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52]
안철수는 자신과 빌 게이츠를 비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는데 “분야도 다르고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도 다르며, 회사 규모 차이도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53]
[편집]교육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만 하고 자신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범을 보이지 않고 강요만 한다면 아이들은 책읽는 흉내만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독서습관을 키워주기 위해선 부모의 솔선수범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54]
[편집]벤처와 중소기업
안철수는 “대한민국의 벤처기업 95%는 망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혹자는 “요즘 세대들은 너무 안전지향적이다. 도전정신이 없다”고 말을 하는데 안철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카이스트에서 학생을 가르쳐온 안철수는 학생 개개인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학생들은 도전 정신을 가지고 있고 호기심이 왕성하다”며 “다만 그런 도전정신이 강한 학생들을 사회가 더 큰 힘으로 안전지향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몰아붙이는 사회 구조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55]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성공의 요람이라고 하는데 안철수는 “실패의 요람”이라고 바꿔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 실리콘밸리에서는 100개의 기업이 나타나면 99개는 망하고 1개만 생존한다. 실패한 기업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없고 최선을 다했다면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이다. 99번 실패를 하더라도 1번 성공하여 1,000배의 성공을 하게 된다면 그동안의 실패를 전부 갚고도 남게 된다는 것이다. | ” |
그는 이것이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패한 사람에게도 계속 기회를 주는게 청년들의 도전정신을 살리는 길이며 벤처와 청소년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56]
[편집]서울시장 선거 출마 관련
안철수는 여야 정치권에서 정치 입문 제의를 많이 받아왔다. 젊은층의 지지로 인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의한 적도 있고, 참여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 제의를 받은 적도 있으며 청와대 수석, 국회의원 출마 제의 등등 종류별로 다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57] 안철수는 “정치를 잘할 자신이 없고 힘(권력)을 즐기지 못하기에 거절했다”며 “실무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앞으로 정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58]
이처럼 안철수는 일관되게 정치 입문을 부인해왔으나 2011년 8월 이후로 윤여준이 “안철수가 서울시장 (재보궐선거[59])출마 가능성이 있다”고 언론에 알리면서 화젯거리가 됐다. 이전에 정치 입문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해왔던 안철수의 입장도 애매하게 바뀐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으며 9월 실시된 ‘청춘콘서트’에는 수십 여명의 기자가 몰려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안철수의 출마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를 긴장시켰고 젊은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비정치인 인물로서 정당들이 그동안 안철수 영입에 노력해왔음에도 매번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60]
안철수는 ‘무엇인가 도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을 세 가지 들었다.
(1) 내가 정말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인지
(2)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인지
(3) 실제로 내가 일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일인지[61]
이 중에서 안철수는 “의미 (1)를 느꼈는데 (2)와 (3)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출마를) 거부했다”며 “그런데 최근 들어서 세 번째 의문이 풀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을 조율하는것에 대해서도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으나[60] 일각에서 제기된 행정경험 부족에 대해 “그동안 대학원장과 대기업 CEO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행정운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충분히 할 수 있을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정서상 한나라당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60]
안철수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 “내가 생각할 때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현재의 집권세력이다. 한나라당은 응징을 당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한다”라며 “그럼 답은 명료하다. 나는 현 집권세력이 한국사회에서 그 어떤 정치적 확장성을 가지는 것에 반대한다. 내가 만일 어떤 길을 선택한다면 그 길의 가장 중요한 좌표는 이것(한나라당이 정치적 확장성을 가지는 것에 반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62] 그는 또 “나는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인) 1970년대를 경험했다. (현 집권세력이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거 거꾸로 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63]
서울시장 출마 고민에 대해 안철수는 “행정이기 때문에 고민을 시작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장 이렇게 여러 일 때문에 (서울시장) 자리가 열려있는데 이걸 또 이상한 사람이 망치면 분통 터지는 일이다. 그게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정말로 자격 없는,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서다”라고 말했다.[61] 안철수가 이러한 인식을 드러내면서 민주당은 안철수 영입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시민운동을 한 박원순 변호사를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중인 가운데 안철수는 박원순과의 대결에도 부담을 갖고 대화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64][65]
서울시장 출마를 확답한 적이 없으며 여론조사 등을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행정 운영을 통해 서울시를 바꾸려면 최소한 10년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윤여준 멘토설’에 대해 안철수는 “개인적으로 따로 윤여준을 만난 일은 없었다. 솔직히 석 달 전 윤여준을 처음 뵙기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다”라며 “그 분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한 300명 정도 되고, 또 저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김제동씨나 김여진씨도 제게 멘토라 할 수 있다”라며 부인했다.[66] 그는 “정치인인 국회의원은 혼자서 바꿀 수 없는게 많지만 대통령이나 서울시장같은 행정가는 자신 혼자서 바꿀 수 있는게 많기 때문에 의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안철수는 국민일보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5%를 넘어 2위인 나경원(13~17%)을 두 배 이상 제쳤다.[67]
자신의 지지율이 높은 것에 대해서 “지금 사람들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비교가 안 된다. 건국 이래 역사상 가장 심하다. 아직 만으로 40대인 나 같은 사람이 아직 (출마를) 할지 말지도 결정 안했는데, 저렇게 역사가 오래된 당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면 그게 민심이다. 나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68]
안철수는 서울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하드웨어에 치우친 행정을 문제로 꼽았는데 구체적인 개선사항에 대한 의견도 내비쳤다.[61]
“ | (지금 서울시는)완전히 하드웨어에만 매몰돼서 남에게 보이는 사업만 (진행)돼왔다.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 실제로 사는 사람의 불편함, 위기 관리는 도외시 되고 있다. 소프트웨어의 예를 들면, 도로 표지들이 무원칙하다. 직진하다가 갑자기 좌회전이 생기고 이런 것들이 통일이 안 되어 있다. 교통 막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관심도 없다. 주차난도 굉장히 심각하다. 그런 걸 해결할 방법 중 하나가 노상 주차장 등에 요즘 같으면 센서를 설치할 수 있다. 이것을 공공 데이터로 만들면 서울시에서는 그것을 이용해서 스마트폰 앱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어디에 자리가 비는지 (시민에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에너지 문제, 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정부가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 선진국은 다 공개한다. 그러면 데이터를 시민들이 가공해서 좋은 정보를 만들어 창업한다. 국가 보완과 상관 없는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알리면 일자리가 생긴다. 저 사람들(정치인들)은 그런 아이디어가 하나도 없다. 평생 자기만의 전문 분야를 갖지 않으면 그런 아이디어를 갖기 쉽지 않다. | ” |
기존 정치세력들의 분열조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제기했는데 “대북문제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교육문제에 대해서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 진보인가 보수인가? 그것은 나눌 수가 없다. 그것을 나누고 분열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다”라고 지적했다.[60]
안철수는 또한 정치인으로서의 고민도 이렇게 내비쳤다.
“ | 사람들한테 대접받으면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자기 발전도 중요한 사람이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도와주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로 들어서면 자기 발전의 기회보다는 내가 가진 걸 소모하면서 도와줘야 한다. 지금껏 해왔던 것과 전혀 다르다. 10년 간 그런 삶을 견딜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고민이다. 또한 나는 수평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정부 조직은 내가 아무리 수평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어도 조직이 수평이 되면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관계를) 10년 이상 그게(유지하는게) 가능할까.[61] 불출마 선언 |
안철수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 여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9월 4일에 주요 언론사들은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모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은 압도적이었지만 안철수와 오래 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발표하자 안철수는 다음날 9월 5일 박원순에게 출마를 양보할 수도 있다고 했고 그 다음날인 9월 6일 오후 4시에 박원순과 만나 불과 17분 동안의 대화 끝에 박원순으로 단일화했음을 발표하였다. ‘누가 출마하느냐’, ‘단일화가 되느냐’ 등이 모두 선거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안철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오늘 존중하는 동료이신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서 그 분의 포부와 의지를 충분히 들었다.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서 서울시장을 누구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다. 저에 대한 기대도 우리 사회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우리 미래 세대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 지금까지 심정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이해해준 박경철 원장님께도 감사하다. 단일화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다. 출마 안 하겠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꼭 시장 되셔서 그 뜻 잘 펼치시기 바란다.[73] | ” |
박원순은 단일화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시장직 자리를 원한 게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결론이 나온 것”라고 말했다. 박원순은 또 안철수에 대해 “아무리 신뢰관계가 있다해도 저보다 10배나 더 되는 지지도를 갖고 있던 분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내 말) 한마디로 양보한다는 게 사실 또 믿기 어려운 그런 일”이라며 “안 교수가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어떤 공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해왔던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였다고 본다”라고 말했다.[74] 이후 박원순, 한명숙, 문재인 등은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범시민 야권 단일후보를 통해 한나라당과 1: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박원순-한명숙 두 사람은 범시민 야권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해 상호 협력하고, 이후엔 선거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라며 결의를 다졌다.[75]
안철수의 불출마 선언에 대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안 원장은)50%대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5%대의 지지율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했다. 그것은 조중동과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핍박하고 무시하던 시민사회의 상징과 가치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이었다.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커밍아웃이다”라고 극찬했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조국 교수는 “우월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교수 양보. 큰 박수를 보낸다. 이 분의 ‘쓰임’은 또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정치판이 바뀔 조짐이다. 통큰 단결로 서울시장 선거, 총선,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안철수, 과연 ‘인물’이군요. 이 정도 열풍이면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이 멀쩡해도 취할 텐데, 50%의 지지율에도 흔쾌히 양보. 이번에 박 변호사 도와주시고, 그보다 더 큰 물에서 뜻을 펼치세요”라고 말했다.[76]
안철수의 아버지 안영모는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사람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안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렸다”고 말했고 대선출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말릴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들 나이도 50이 넘었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가 말려서 되겠나. 이제부터는 일절 말 안 하고 지켜만 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77]
이명박은 ‘떠오른 안철수 열풍’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 정치권에 올 것이 왔다. 정치권이 발전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국민들은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고 특히 정치권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변화욕구가 아마 안 교수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이것을 여러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것을 정치권이 발전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78] | ” |
이명박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민주당은 “모든 문제에 남탓만 해 실망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79]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요동치는 정치판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남 얘기하듯 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답답함을 더했다. 대통령은 정치판의 구경꾼이나 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안철수 바람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마땅하다”라고 지적했다.[80]
박근혜는 기자들이 안철수의 지지율이 자신을 넘어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병 걸리셨어요?”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박근혜는 “지나가는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표현이 부적절 했던 것 같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81]
하지만 한나라당은 안철수가 반(反)한나라당을 천명한 만큼 반감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안철수에 대해서 “IT 전문가라고 해서 정치를 잘 하겠느냐”면서 “안 원장이 뭐가 검증이 됐느냐. 예전 운영하던 회사 내에서도 내분이 있어 몇 분이 물러섰다지 않느냐”,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금세 사라진다. 정치를 너무 순진하게 보는 것 같다”, “안 원장이 너무 건방지다는 생각도 든다. ‘역사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고 했는데 이번에 좌파라고 선언한 것 아닌가 싶다. 이념적 좌파라기보다는 강남 좌파에 가까운 것 같다”라며 성향과 검증에 대한 공세를 예고했다.[82] 한나라당이 “안철수와 박원순 단일화는 정치쇼”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박원순은 “그런 쇼는 더 많이 하는 게 좋은 것 아니냐”라며 반박했다.[83] 그러나원희룡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정치에 대한 불신, 기성 정당에 대한 환멸, 새로운 인물에 대한 갈망이 겹치면서 안철수 교수의 태풍현상이 있지 않았느냐. 기존의 정치권에서의 기득권, 그리고 어쩌면 달린 식솔이 없으니까 그렇게 흔쾌히 홀가분하게 던질 수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보면서 국민들은 바이러스 백신 무료배포, 대기업 독식 비판과 분노 등 안철수 교수의 공적 헌신을 했던 모습의 연장선에서 감동을 받는 것 같다”라며 안철수를 호평하기도 했다.[84]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안철수를 최근 인기몰이 중인 꼬꼬면에 비유하면서 “꼬꼬면이 ‘품절면’이 됐듯이 안철수도 정치권에서 ‘품절남’”이라며 “꼬꼬면과 안철수는 많은 것이 닮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꼬꼬면이 그간 시장의 대세였던 ‘신라면’의 후광을 입고 나타난 ‘신라면 블랙’의 생산중단과 절묘하게 매치가 된 점” 등을 들어 박근혜를 신라면에 비유하기도 했다.[85]
안철수와 박원순은 단일화했으나, 이전까지 박원순의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은 5%에 불과해 ‘안철수의 지지층을 박원순이 흡수하는지’, ‘민주당에 입당하는지’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86] 단일화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원순은 안철수와의 단일화에 힘입어 지지율이 대폭 상승하여 나경원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87] 집전화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에서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답변이 많았으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을 수 있는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박원순이 51.6%를 얻어 32.5%의 나경원을 압도했다.[88]
안철수가 출마할 가능성이 제기되자 안철수연구소의 주가가 상승하다가 다시 불출마 선언을 하자 주가도 같이 떨어지는 등 경제계에도 영형을 미쳤다.[89]
안철수에 대한 여론의 관심에 대해 언론들은 ‘안철수 신드롬’, ‘열풍’ 등의 표현으로 보도했다. 안철수가 서울시장 후보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자 언론들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하여 차기 대선 지지율을 조사하기도 했다. 차기 대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는 박근혜와의 1:1 가상대결에서 43.2%의 지지율을 기록해 박근혜(40.6%)를 능가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답변을 많이 하는 집전화와는 다르게 휴대전화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는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안철수가 압도적인 지지율을 나타냈다.[90] 2007년 대선 이후로 박근혜가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놓친 것은 처음 있는 일로써 안철수의 영향력을 드러냈다. 특히 야권 후보들 중에는 지지율 31%를 기록해 2위를 차지한 문재인(16%)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91] 안철수는 20~30대 젊은층, 대학생, 화이트칼라, 호남지역에서 60%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서울지역에서도 54%의 지지율을 보여 박근혜를 넘어섰다.[92] 하지만 안철수는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가, 일시적인 지지율일 것이다. 가당치도 않다”라며 대권도전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내비쳤다.[93][94]
[편집]평가
안철수는 강력한 추진력과 기업가 정신, 도덕성, 차분한 성격, 성공한 사람으로써는 드물게 겸손한 이미지로 기존의 기득권층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어 젊은이들의 가장 대표적인 멘토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교수직에 임하면서 동시에 박경철과 함께 ‘청춘 콘서트’라는 강의를 해오고 있다. 박경철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강의는 1년에 3천건의 강의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일정 문제로 1년에 80여 건밖에 하지 못한다. 안철수는 돈을 많이 주는 기업들의 강의는 되도록 하지 않으며 사람이 많이 오는 무료강연을 많이 하는데 강의할 때마다 적게는 1500명에서 많게는 3천명 정도까지 몰린다.[95]
- 그외 자세한 이야기: http://ko.wikipedia.org/wiki/안철수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시작이다
13. 영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는 동안에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너무나 허무한 노릇이다. 다만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더 의미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
24. 당시 아내와 부모님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어떤 반대의사도 표명하지 않았다.
--> 정말이지 내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가족들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때로 가족들이 더 자신을 모를때도 있지만) 외부에서도 신뢰받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다.
25. 나는 스스로 포기하거나 체념한 것은 잘 잊는 편이다.
26. 회사 일과 공부 중에서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회사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경영학을 공부하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공부는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회사 일은 나 이외에도 여러 사람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였다.
--> 정말 책임 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에 임하는 자세의 문제가 거의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낄때도 있다.
27.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리포트를 작성하려고 자주 밤을 새웠다. 일과 공부의 양이 늘어나자 잠 자는 시간도 대폭 줄여야 했다. 그래서 이틀에 하루는 밤을 새울 수 밖에 없었다.
27. 학교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 것은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였다.
30. 늘 자금 관리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30. 당시 어려운 자금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회사를 끌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신뢰가 모든 일의 첫 걸음이다.
31. 경영은 종합 예술과 같다는 것이었다.
33. 당시 회사의 입장에서 당장 생존에만 급급했다면 자금을 투자할 파트너를 좀더 빨리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회사의 장기적 발전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최적의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 우보천리
39. 우리는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였지만 애국심에 기대지 않고 제품기획 등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섰다는 점이다.
41. 나는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세에 대한 믿음만으로 현실과 치열하게 만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또 영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는 동안에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너무나 허무한 노릇이다. 다만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더 의미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
41.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래서 일분 일초도 헛되게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4. 회사의 틀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분야에 적합한 사람을 뽑아야 했다.
46. 대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그가 우리 회사의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썼다.
48. 제품 기획력에 있어서만은 우리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49. 벤처기업의 성장에서 올바른 제품기획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50.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세가지 요소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마인드, 실제적인 노력, 넓은 시야가 그것이다.
59.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을 하면 우리가 좀더 잘 되겠지'라는 판단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런 마인드로 제품을 기획하고 새로운 시장에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모든 결정에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장래에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다'라는 기준을 적용하였다.
62.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업이 한 제품만 고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끝나면 제품과 함께 회사도 없어지는 것이다.
66. 우리에게 있어 이것은 무모함 또는 대규모의 이익 실현을 위한 모험 차원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생존 전략이었다. 독단과 이익추구의 함정을 피해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다각화였고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관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외부와 만들어낸 협력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67. 일반적인 기업성장사에서 발전기 다음에는 도약기 같은 명칭이 뒤따른다. 그런데 나는 발전기 다음은 변화기라고 생각했다.
--> 끊임없는 변화만이 살길이다.
68. 결국 변화기에 우리 회사는 초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견지해야 했기 때문에 창사 이래 가장 바쁜 한 해를 보내야 했다.
74. 외국 시장에서의 경쟁은 어느 정도 검증된 업체들간의 경쟁이기 때문에 기술 싸움 외에도 자본과 마케팅 경쟁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77. 우리의 구도는 우리에게 시장 선점의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는 발전적인 포지셔닝인데 문제는 동시에 경쟁자들이 들어올 영역이 많다는 것이다.
78. 이것을 수평적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수직적 네트워크와 다르기 때문이다. 상호발전이라는 철저한 수평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우리 회사의 리소스 낭비를 최소화시켜 주며 함께 발전하는 동료회사로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회사의 핵심역량은 지켜나간다는 전제 하에서 구축되는 관계이다.
81. 물론 모든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이 모델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예단할 수 없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쪽을 열심히 찾아 최선으 노력을 다할 뿐이다.
83. 영혼이 없는 기업은 그 회사 사람들에게 단지 개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영혼이 있는 기업에서는 전 사원들이 스스로 주체의식을 가지고 기업의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해서 공동의 발전을 이뤄나간다. 그런 가운데 기업은 영속하는 우량 기업으로 자라날 수 있다.
85. 기업들을 보면 어떤 기업은 곧 사라지고 어떤 기업은 100년이 넘도록 영속한다. 아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기업은 창업자가 죽고 CEO가 몇 번 바뀌고 심지어 회사의 사업분야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계속 건재한다. 그렇다면 그런 기업은 곧 사라지고 마는 기업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런 회사들은 핵심가치를 제외한 모든 것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모든 행동과 생각의 판단 근거는 알게 모르게 회사의 역사와 함께 해온 핵심가치에 놓여있다.
88. 고객을 먼저 생각하자.
89. 영속하는 성공기업은 결과여야하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기업이 수익을 내는 것은 기업활동의 결과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전후가 뒤바뀐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90. 핵심가치는 기업 구성원의 공통된 가치관이자 신념이며 존재이유이다. 핵심가치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신념화된 기업은 조직의 발전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유무형의 성취감을 줄 수 있으며 지치지 않는 발저늘 가능하게 한다. 또 이상적인 핵심 가치는 생계 수단 이상의 가치를 개개인에게 줄 수 있으며 기업이 위기에 처ㄹ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원한 힘이 된다.
91. 기업은 사람과 같이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사람이 나름대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기업도 하나의 가치관을 가지고 생명을 이어간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존재의 의미에 충실할 수 있듯이 기업도 그러한 가치관이 있어야 그 기업의 존재의미에 충실할 수 있다.
92.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일관성있게 유지되어야 한다/제도 속에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96. 핵심가치는 실제로 모든 사람이 수용가능하다고 믿을 정도의 설득력을 전제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99. 우리모두는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리는 존중과 신뢰로 서로와 회사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다. 우리는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객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우리는 연구소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끊임없는 연구 개발에 노력한다
102. 개인을 무시하는 회사는 설령 아무리 사회 공헌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바람직한 기업은 아니라고 본다
108. 기업 이미지에 별 신경을 안 쓰는 이유는 스스로의 기준에 부끄럽지 않게 회사를 건강하고 강한 기업으로 키워가는 데 전력하는 것을 기업 이미지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113. 외국의 경우라 하더라도 정직한 기업정보와 품질우위를 능가할 홍보수단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14. 평등함과 공정함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벤처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116. 이익을 함께 나눈다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익의 배분이 평등하게가 아니라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문제에 있어 그 평가기준은 매우 객관적이고 엄정해야 한다
117.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등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는 평등하게 주되 그 결과의 평가에 대해서는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투명경영이 필요하고 또 투명경영이 진정 힘을 발휘하는 것도 이때이다.
118. 나는 영리하고 빠른 조직과 느리더라도 건강한 조직 중 하나를 택하라면 느리더라도 건강한 조직을 택할 것이다.
122. 근원적으로 회사가 성장하려면 아무리 자기 회사라도 자기 월급만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123. 회사 돈과 내 돈 회사 시간과 내 시간은 엄격하게 구별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128. 기업이 가장 정직해야 할 부문이 있다면 그것은바로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132. 나는 내 스스로를 느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모든 것을 먼저 이론적으로 습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성공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일 뿐이다.
134. 서로를 신뢰하는 문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 서로의 발전을 생각하는 문화, 동료의식
137. 우리 회사의 경우는 인재를 끊임없이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142. 말부터 그럴 듯하게 먼저 하는 것, 말만으로 떠드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143. 길게 생각하는 것은 경영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도 미덕이다. 가치의 문제에서도 장기적인 가치는 단기적인 가치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하며 그래서 장기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단기적인 손해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돈과 명예에 대한 단기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누구나 긴 호흡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45. 리더십과 관련해 아무리 회사가 변화하더라도 바뀌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리더로서 인식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데 나는 사원들이 동료의식을 느끼는 CEO가 되고 싶다.
151. 신뢰를 이루는 구성 요소: 직원들을 이용하지 않는 마음이 직원들에게 전해지는 것, 직원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 리더가 스스로 능력을 갖추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 솔선수범, 신뢰를 받기에 앞서 신뢰를 하는 태도 그리고 시간
154. 지키지 못할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마라
155. 이건 절대 다른 사람에겐 하지 말아야 할 얘긴데 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누구에게도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 유독 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 근데 재미있는건 나 역시도 이러한데, 대개 이런식으로 입을 여는 경우는 거의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이야기들을 미리 하고 다니는 걸 보았다. 그래서 내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게 어쩔땐 우스워질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는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건 절대적인 원칙이다. 신뢰의 기본.
156. 사장은 고독한 존재라고 하는데 나는 회사를 세운 후 특별히 고독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직원들과 동료의식을 느끼기 때문인데, 이렇게 된 데에는 그들과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 큰 힘이 되었다.
158. 내가 경영학을 배우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모르고 놓아두었던 많은 부분들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 해결하거나 또는 적임자를 찾아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58.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큰 성공도 결국은 빌 게이츠의 자기 한계 인정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해서 자기 대신에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을 뽑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60. CEO가 자기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정확하게 인정하는 것 이것은 이제 하나의 전략 차원을 넘어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163. 경영도 마찬가지다. 경영에서도 아주 과학적이고 분석적인면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분석도구를 개발하고, 계속 상황 변화를 파악하면서 적절한 대응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168. 바둑에서 배운 경영원리는: 부분적인 이익보다 전체 국면을 보는 태도, 바둑을 배울 때 정석을 외운 뒤 몸으로 체화했는데 그런 경험 때문인지 경영을 할 때도 이론을 체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점, 요소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략(승부처)
172. 지금까지는 내가 져야 할 책임에서 도망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앞으로도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173. 경영자가 되면서부터는 아예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책임감은 무제한으로 커지는 데 반해 완벽을 기하는 성격과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는 태도는 여전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174. 의도적으로 고민을 떨쳐내는 것보다는 아예 고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건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인정해 버리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175.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는 타성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보기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고집과 애착이다. 감각적인 판단을 경꼐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칭찬을 경계해야 한다. 성장의 속도에 정신이 팔려 직원들의 소외감을 잊는일을 경계해야 한다.
178. 조직에서는 능력이 탁월한 한두 명보다 능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협조가 잘 되는 사람이 여럿 있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일은 뛰어난 한 사람보다 평범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하게 되어 있으며 능력과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3. 사업 아이템보다 더 신선해야 하는 것은 경영관행이기 때문이다.
184. 경영자는 그 사이에 투자받은 자금을 잘 활용해서 회사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벤처산업의 성장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한국에서도 경제의 미래를 떠받치는 큰 축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186. 우리나라에서는 인수합병이 되면 그 기업이나 주변에서 마치 그것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당했다'는 표현보다 '성공했다'는 표현을 즐겨 쓸만큼 인수합병을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과정으로 생산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190. 프로세스 중심으로 정리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그 회사의 경쟁력은 커지게 된다. 즉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기업이 가진 무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유연성이 마련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진정한 디지털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191. 수익이 창출되는 기간은 더디나 진정으로 수익성에 확신이 선다면 빚을 얻기보다는 투자를 받아야 한다.
195. 내부직원이 만족하지 못하는데 외부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잘못된 방향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지 못한 상황이 된 것이다.
199. 전략적 제휴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인트 벤처를 만든다면 이것은 두 사람이 피를 섞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엄청난 고민이 필요하다. 잘못 수혈된 피가 한 사람의 생명을 죽일 수 있듯이 잘못 선택한 파트너는 그 회사를 아예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211. 핵심역량 등 자기기반에 충실한 다음에 인식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패러다임 변화를 읽는 정확한 눈의 출발점은 자기가 하는 작은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대한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과 고민이이어질 때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213. 투자자들이 옥석을 가려서 투자하려면: 경영자 및 경영진, 시장의 크기 및 비즈니스 모델, 상대적인 절대우위 요소
229. 열심히 일한 결과물로 벤처기업이 탄생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흐름이며 기업 설립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231. 벤처기업을 세울 때에는 어쨌든 나의 힘으로 회사를 궤도에 올려놓겠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나도 경험한 일이지만 회사라는 것은 설립하기 전에는 뭐든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막상 세우고 나면 문제점만 눈에 들어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설립 당시의 자신감은 수그러들고 자꾸 외부의 도움, 시장의 우호적인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232. 진지하게 찾아보면 새로운 것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233. 사업계획서에는 회사설립, 성장, 수익 모델과 관련하여 고려해야 하는 모든 요소가 치밀하게 집적되어 있어야 한다.
237. 사람 문제에 있어서는 재능의 균형도 필요하다. 나는 가장 바람직한 창업 형태는 기술을 보는 사람과 시장을 보는 사람이 각각 존재해서 균형을 취하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사람 문제에 있어 창업자의 끊임없는 자기 검증도 중요한 요소이다.
239. 아무리 작은 회사라 할지라도 늘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돈 1원이라도 투자받은 돈은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되며 늘 그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241. 직원수가 늘어나더라도 절대 흐트러져서는 안 되는 것이 그 기업만의 문화, 내재하는 공통의 가치 체계이다. 그것이 핵심가치로 체계화, 명문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함께 무엇을 지향한다는 공통된 마인드 맵이 있어야 한다
243. 벤처기업에서 가장 소중한 연고는 학교도 지역도 아닌 비슷한 가치관에 근거한 인간적 신뢰관계이다.
247. 시장이 대폭적으로 커지는 시기에 확실하게 발전하려면, 경쟁업체를 확실하게 눌러야 한다. 본질적으로 경쟁은 우호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건전한 경쟁일지라도 마찬가지다.
249. 벤처 기업가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252. 벤처기업의 속성: 고위험성, 과정성, 절박성
254. 우리가 자본력이 없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분야인가
259. 당장의 이익에만 내몰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함께 발전하는 관계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철저한 공정함이다.
261. 벤처기업가는 아무리 자기 회사 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기업가 정신을 지켜나가야 한다. '철저히 영업이익을 내는 것'
265. 일을 할 때 내 능력에 비해 벅찬 경우도 많다. 내 수준에서 어려운 주제를 이해하고 쉽게 풀어쓰기 위해서는 당대의 천재들보다 두세 곱절 시간을 더들여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깨어 있는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공연한 겸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266. 진정한 비교의 대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우리가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은 양적인 비교가 아닌 질적인 비교이다.
267. 신뢰를 주고 받는 관계, 훌륭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존중, 그리고 늘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이런 것이 더 소중한 성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270. 배려의 여러 모습들: 이해하는 마음, 남에게 피해 안 주기, 다양성 인정하기, 상대방의 말 경청하기, 사심없이 대하기
278. 한 단계 한 단계씩 자기의 수준을 올려나가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279.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늘 최선을 다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282. 내가 보이게는 분명한 가치관과 목적의식만 있다면 누구나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의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284. 원칙은 수시로 변경 가능한 지도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정북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어야 하는 것이다.
286. 일단 시도한 것이라면 아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내가 저자라면]
그의 벤처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들에 대해서 차분하게 잘 써내려간 것 같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아니 삶의 궤도처럼이나 책에도 성실과 담백함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만나본 적 없지만 어떤 성격의 분일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별 어려움 없이 쭈욱 읽게 되었다. 다만, 내가 저자라면 좀 더 맛깔나게 쓰는데 신경을 썼을 것 같다. 아주 책이 재밌다거나 그런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건강한 밥상같은 느낌, 그렇다고 순서가 뒤죽박죽 되어 있다거나 목차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회사가 있기까지의 흐름에 대한 부분이라서 어쩌면 이것이 최선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이 책을 보고 CEO가 되기를 꿈꿔본다거나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뻔한듯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안철수라는 사람이 그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그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