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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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리뷰: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c.w.체람)
1. 저자에 대하여
베를린에서 1915년 출생하였고, 신문기자, 연극비평가, 출판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본명은 KURT W. MAREK. 저술할 때에는 주로 C.W CERAM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1949년 그는 ‘신, 무덤 그리고 학자들 GODS, GRAVES & SCHOLARS’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으로 국내에서는 명명)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26개 이상의 국가에 번역되어, 5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그는 인류에게 고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리고 아스완댐 건설로 아부심벨의 유적이 물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히타이트 문명 발굴을 위해 터키의 고고학적 발굴에도 참여했다.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MARCH OF ARCHAEOLOGY를 내놓았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발굴과 해독’, ‘사진으로 보는 영화의 역사’가 있다. 실명으로 내놓은 저서로는 ‘YESTERMORROW : NOTES ON MAN'S PROGRESS’, ‘HANDS ON THE PAST : PIONEER ARCHAEOLOGIST TELL THEIR OWN STORY’ 등이 있다.
“인간으로서의 겸양을 배우고자 할진대 굳이 하늘의 별을 쳐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수천 년 앞서 존재했으며 위대했던, 그러나 이미 사라져 없어진 수많은 문화로 눈을 돌리면 족한 것이다.” 저자는 겸양을 배우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18세부터 문학과 영화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고, 잡지사와 출판사를 창립할 만큼 글쓰기와 저널리즘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역사를 저술의 주제로 삼는다. ‘사실의 추구’를 진리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과거를 통한 미래학이라는 면에서 그에게 딱 적성이다. 4년여 긴 기간의 작업 끝에 이 책은 독일에서만 200만부가 넘게 팔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이 책은 결코 현학적인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나의 목적은 고고학의 극적인 성격, 즉 고고학의 인간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5 고고학은 모든 종류의 자극과 성취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모험은 학구적인 노력과 결부되며 낭만적인 여행은 학문적인 자기 수양과 절제와 보조를 맞춘다.
18 액체로 흐르는 돌인 용암은 여러 종류의 광물 혼합체로서 유리나 새로운 종류의 바위로 냉각될 때 단단해진다. 헤르쿨라네움은 20미터 두께의 이러한 물질로 덮여 있었다. 반면에 화산의 자갈은 유리 모양의 작은 화산암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산에서 미끈거리는 재와 함께 분출될 때 이 작은 자갈들은 가는 비처럼 내려서 손쉬운 연장으로 파낼 수 있는 느슨한 표면을 이룬다. 폼페이는 이러한 표면 아래 묻혀 있었는데 더구나 자매 도시인 헤르쿨라네움처럼 깊이 묻혀 있지도 않았다.
20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두 도시를 파묻히게 한 지각의 변동은 고고학에서 볼 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원후 79년 8월 중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려는 징후를 보였는데 그동안 그 화산이 가끔 활동중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24일 오전에는 미증유의 재앙이 내리고 있는 것이 명백해졌다. 산 정상이 뇌성 같은 폭발을 일으키며 갈라졌다.
22 자손을 위하여 도시 전체를 보존하고 일상 생활의 활동들을 명확히 포착하는 데는 재로 된 커다란 덮개로 밀폐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상상할 수 없다. 폼페이는 서서히 쇠퇴해서 자연적으로 죽어 간 도시의 몰락과는 사뭇 다르다. 살아 있는 공동 생활체에 마술 지팡이가 닿자마자 흥망성쇠라는 시간의 법칙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29 그는 국왕의 열의 없음과 왕실 관리들과 일하는 사람들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빙켈만에게 필로데모스가 음악에 관해 쓴 논문의 새로 재생시킨 부분을 보여 주면서 자기에게 당연히 줄 것은 주지도 않고 재촉만 하는 시기심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질책하였다.
30 두 번째 책인 『공개 서한』의 불어 번역판이 나폴리 왕실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왕실 박물관에서 일하게 해준 그들의 친절을 비열하게도 모욕으로 갚은 독일인에 대한 분노로 흥분하였다.
35 그렇다면 이러한 과거에 대한 지식들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을 얻는다 하더라도 자동차를 운전하고 비행기를 조종하며 과거가 아닌 미래 지향적인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아시리아의 왕이 그의 아들에게 설형 문자로 무어라고 썼으며, 이집트 사원의 기초 설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것은 그럴듯한 질문이고 그에 합당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37 내가 본 것은 해골이 아니라 사지가 완전하고 금방 묘지에 눕혀진 것처럼 빳빳하게 누워 있는 시신이었다. 그러나 횃불이 비치자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다.
37 수세기 동안 그대로 남아 있던 시체는 공기에 노출되자 갑자기 먼지로 부서져 버렸다. 황금색의 먼지가 공중과 횃불의 불꽃 주위로 퍼져 나갔다.
37 얀돌로가 기술한 석관에는 지금까지 그 가문이나 혈통이 분명하지 않은 에트루리아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마자 분리되어 다시는 원상 복구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극도의 부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 폼페이가 발견되기 훨씬 전에 유서 깊은 땅에서 최초의 조상들이 발굴되었을 때는 대리석으로 된 이교도의 나체 우상까지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개화된 사람들도 있었다.
42 속지 않은 기술, 예술품이 지닌 이러저러한 특징들로부터 진위 여부와 양식 그리고 역사를 확인해 내는 방법을 해석학이라 부른다.
4. 슐리만(Ⅰ): 일개 상인, 트로이의 황금을 파내다
48 “그리고 그것은 없어져서 아무도 어디 있었는지 몰라요?”
“그렇단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믿을 수 없어요.”
하고 소년 하인리히 슐리만은 말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가서 트로이 왕의 보물들을 찾아볼 거예요.”
아버지는 웃었다.
일곱 살 난 소년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가 된 61세의 나이에도 그는 의욕적이었다.
50 “이 엄격하고 맹렬한 학구열은 나의 기억력을 엉ㄹ마나 강하게 했던지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것은 매우 쉬워 보였다. 이 중 한 언어를 6주 만 공부하면 나는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50 마침내 그는 비판을 해주는 청중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냈고 이를 위해 일주일에 4프랑씩 주고 한 가난한 사람을 고용했다. 이 불행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 『텔레마코스』의 구절들을 듣기만 하면 되었다. 6주 동안 미친 듯이 공부를 한 슐리만은 인디고 물감 경매에 참가하러 암스테르담에 오는 러시아 상인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61 그것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승리였으며 또 호메로스의 승리이기도 했다. 열광적인 아마추어였던 그는 그때까지 시적 상상이 빚은 허구인 단순한 모험담과 신화로만 여겨지던 것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63 가능한 빠른 속도로 나는 큰 칼로 보물을 파냈다. 나는 이 일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무서운 위험 속에서 불굴의 투지로 해냈다. 왜냐하면 내가 파고 있는 구덩이 위에서 무거운 성벽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보물을 보자 나는 무모해져서 위험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71 전설대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연인 아이스기스토스의 연회장에서 살해당한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와 에우리메돈과 그 일행의 무덤을 발견한 것을 전하께 전해드리게 되어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72 이러한 불일치는 사실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슐리만이 선사 시대의 잃어버린 세계로 두 번째의 거보를 내디뎠다는 점이었다. 그는 또다시 호메로스가 역사가로서도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유럽 문화의 모체에 귀중한 통찰력을 갖게 해준 문화들-물질적뿐 아니라 엄밀한 고고학적 의미에서도 보화라 할-을 발굴한 것이었다. “이는 전혀 새롭고 상상치 못했던 일이다”라고 슐리만은 썼다.
74 이보다 더한 것은 그가 가장 기발한 일을 한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카이로에 도착한 브라질의 황제에게도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브플리온을 떠나실 때 폐하께서는 경찰서장 레오나르도스에게 일선 경찰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40프랑을 주셨습니다. 이 용감한 사람을 중상하려고 시장은 그가 폐하로부터 1천 프랑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오나르도스는 해임되었고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그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알아 왔으니 폐하께서는 성스러운 진실과 인간성의 이름으로 레오나르도스가 40프랑을 받았는지 전보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77 빙켈만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은 심미가들과 미술품 감정가들의 흥미만 끌었을 뿐이었는 데 반해 슐리만의 황금 발견은 풍요를 누리고 있던 거대한 산업 사회의 건설자들과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을 감동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지닌 자연적인 공감과 상식은 그들로 하여금 슐리만을 배척하는 기존 학문의 순수학자들 편에 서기보다는 ‘제 힘으로 출세한’ 개척자인 문외한 슐리만의 편에서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79 문외한의 성공에 대한 전문가의 불신은 천재에 대한 범인의 불신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미확인된 오솔길로 다니는, 마르틴 루터의 표현을 빌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을 은근히 경멸한다. 그리고 이 세상엔 범인들이 대부분이고 권좌 또한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111 9. 나폴레옹: 파라오의 땅에서
나폴레옹 1세와 비방 드농은 이집트에서 고고학적인 발견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113 나폴레옹의 원정은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무분별한 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집트를 일깨웠고 또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고대 유물에 대한 학문적인 탐사를 실행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은 175명의 ‘박식한 민간인들’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116 이 다재다능하고 어떤 면에서 놀라운 사람은 물론 특별한 업적으로 후세에 기억되어야 한다. 나폴레옹은 병력으로 이집트를 정복했고 1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는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나 드농은 그의 크레용으로 파라오의 나라를 점령했고 그것을 영원히 점령했다. 이집트가 현대의 의식 속에 다시 소생한 것은 그의 숙련된 눈과 손의 힘을 통해서였다.
122 “그대의 의상은 빛처럼 찬란하다”라고 성서의 시편 저자는 노래한다. 아침 잉ㄹ찍 태양은 짙푸른 하늘에 떠올라서 갈색과 황갈색과 흰색의 모래에 반사되어 노란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며 또 가마솥같이 뜨겁게 타오르면서 자기의 궤도를 따라간다. 그 그림자는 원래의 윤곽대로 모래 위에 잉크처럼 쏟아져서 날카로운 선을 그린다.
123 그림자도 없는 황무지에 피라미드가 고개를 들고 서 있다. 그들 중의 예순일곱 개는 카이로 주위의 비어 있는 땅에 서 있는데 왕들의 거대한 묘지인 ‘태양의 연병장’ 주위에 줄지어 있다.
129 열한 살 난 프랑수아가 라틴어와 희랍어에 보기 드문 재능을 나타내고 히브리어 공부에도 몰두하여 놀라운 성공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형은 동생의 재능이 더 밝게 빛나도록 자신의 재능을 감출 결심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을 샹폴리옹-피지에크, 나중에는 그냥 피지에크라고 불렀다. 동생이 자신보다 가문의 이름을 더 빛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겸손과 확신은, 그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상기해 볼 때 더욱 더 놀라운 것이었다.
131 순서대로 된 개요가 없어서 자신의 역사 연구에 방해되는 것을 알고 그는 혼자서 연보를 만들었는데, ‘아담으로부터 동생 샹폴리옹에 이르기까지의 연대’라고 불렀다. 형이 그를 위해 뒷전에 물러나 있었으므로 장 프랑수아는 그가 경의를 표하는 또 다른 샹폴리옹이 있다는 것을 세상이 기억하도록 자신을 ‘동생 샹폴리옹’이라 불러 은혜를 갚은 것이었다.
132 그의 생각들은 너무나 확고한 논리로 대담한 명제들을 계속하여 펼쳐 나갔다. 교수들은 너무나 압도되어서 그 자리에서 그 소년을 교수가 되도록 결정했다. 로놀동 총장은 일어서서 샹폴리옹을 포옹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너를 교수로 뽑은 것은 지금까지의 너의 업적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네가 할 일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가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키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네가 이름을 날리게 되면 너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우리를 잊지 말아라!”
133 로제타 스톤은 높이가 114센티미터이고, 너비 72센티미터, 두께 28센티미터인 석판의 윗부분이었다. 그것은 단단하고 결이 고운 현무암으로 되어 있었다.
134 영국에서(로제타 스톤의 원본을 사용하여) 또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그 당시 최고의 지성들이 그 과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성과가 없었다. 모두 다 잘못된 전제 위에서 시작을 했다. 그들의 잘못은 상형 문자가 지닌 내용이 얼마간 궁극적으로 헤로도토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 해석하려 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통해 지속되어 온 잘못된 생각의 하나였다. 이집트 기록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사실상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관점의 변화가, 즉 관습의 굴레를 깨뜨릴 영감이 필요했다.
137 그는 엄격한 지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으면서도 각 개인의 개성을 획일화하는 훈련의 전형인 근위병 대대가 행진하는 것을 보면 몸서리쳤다.
141 그때 19세의 나이로 그는 바로 2년 전에 리세에서 같은 교실, 같은 의자에서 함께 공부하던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그가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점은 물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앞지르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창피를 주었던 나이 많은 교수들이 꾸민 음모의 함정에 곧장 빠져들게 되었다.
145 나폴레옹의 황제로서의 상상력이 샹폴리옹과의 만남으로 해서 얼마나 강렬하게 자극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콥트어를 이집트의 공용어로 만들려는 결정을 발표했다.
150 위대한 지적 발견들이 알맞게 적당한 때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것들은 한 가지 문제를 다루느라고 정신을 단련하는 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발견들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그것들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교차 그리고 계획적인 관찰과 모험적인 꿈의 교차를 나타낸다. 단번에 해결을 보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157 샹폴리옹에 대한 이집트인의 따뜻한 영접은 탐험대를 감동시켰으며, 그들은 기르게의 지사인 모하메드 베이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에즈와 ‘포르티시의 사냥막’에 나오는 ‘자유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흥분한 프랑스인들은 또한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샹폴리옹은 하나의 유적에서 다음 유적으로 다니면서 곳곳에서 자신의 생각이 확인되는 것을 보았다.
163 1896년 레너프 경은 런던의 영국 학사원에서 연설하면서 샹폴리옹에게 그가 응당 받아야할 경의를 표했다-그가 죽은 지 64년 만이었다.
샹폴리옹은 이집트 문자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긴 여정이 이제 시작될 수 있었다.
164 이 책은 고고학에서 이루어진 최고의 업적만을 언급한 개요일 뿐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개미처럼 수고하고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면서 때로는 대담한 해석이나 창조적인 가설이나 진지한 열정을 가지고 전진했던 모든 학자들에게 다 공정할 수는 없다.
샹폴리옹의 상형 문자를 해독한 후 수십 년 동안 이집트학의 위대한 발견들은 다음 네 사람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 즉 수집가인 이탈리아인 벨초니와 목록 편집자인 독일인 레프시우스, 보존자인 프랑스인 마리에트, 측량하고 해석한 영국인 피트리가 그들이다.
166 고고학적 의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수집하는 열정에 발견보다는 파괴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우연히 얻어진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손상을 입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었다.
168 벨초니는 위대한 수집가였다. 이제 목록 편집자나 정리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데 그 중 뛰어난 사람이 리하르트 레프시우스였다.
172 과거로 멀리 갈수록 연대를 정하기가 힘들어진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집트 역사의 좀더 가까운 단계에서는-이 단계란 신왕조 시기와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애타게 연모했던 후기를 뜻한다-페르시아나 히브리, 그리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의 역사에 나타난 연대와 비교하여 연대를 정할 수 있다.
173 그렇지만 최초의 절대적인 날짜의 시작은 이집트보다 오래된 어떤 것,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되고 인간 자체보다 오래된 것, 즉 별들의 운행에 눈을 돌림으로 해서 가능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계절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 연력이 있었는데 먼 옛날부터 땅의 생존 여부가 달려 있는 나일강의 홍수 시기를 예측하는 데 사용했다.
191 쿠푸의 피라미드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먹이는 데에만 200만 불에 상당하는 돈이 들었다. 그들은 나일강으로부터 건설 현장까지 평평하게 큰 길을 닦고 뻗어 있는 화강암 바닥 위에서 일하며 감독의 채찍질 밑에서 한숨짓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썰매에 실려 천천히 움직이는 크기가 각각 1제곱야드 이상 되는 거대한 돌덩이들을 끌고 갈 때 쇄골에 파고드는 밧줄 밑에서 신음했다.
193 메로에의 유적지에 있는 북쪽의 피라미드군 하나만도 34명의 왕과 5명의 여왕과 2명의 황태자의 시체가 들어 있는 41개의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을 가진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의 무덤들은 이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축조되어 그 이름도 당당히 하늘을 향한 돌 위에 영원 무궁토록 새겨져 있다. 그것은 명성 때문이었을까? 기념물로 자기 현시를 하려는 강한 충동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로서의 주제를 망각한 채 인간적인 속박을 느끼지 않던 권력자의 단순한 오만 때문이었을까?
피라미드의 의미는 이집트의 신앙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피라미드를 세우려는 충동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집트의 근본적인 신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현세의 땅이나 하늘과는 별도의 장소에 내세인 미래가 있다.
201 피트리는 어떤 장애물에도 굴복하기를 거부한 고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완강하고 단호하고 끈질기던 그는 1889년에 나일강을 끼고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벽돌로 된 피라미드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굴했다.
208 장사하기 위해서 고대 유물을 위조하는 것과는 별도로 과학자나 학자들은 짓궃은 장난꾼들이 교묘하게 꾸며 놓은 온갖 불쾌한 일들에 주의해야 한다.
217 그러나 제20왕조 때에 사람들 전체가 무덤 도둑들과 반역한 사제들, 뇌물을 받은 관리들, 부패한 지사들,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모여든 고도로 조직된 도둑의 무리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직한 신자들과 죽은 왕들의 명예를 지키려는 정의로운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도둑들이 비밀 통로로 밤에 도주할 때에도 충성스러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기다리며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25 이 진술 결과 아브드-엘-라술의 고향인 쿠르나 마을 전체가 무덤 도둑들의 소굴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 직업이 13세기 이래 한 번도 깨진 일 없는 가업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져 왔다. 그렇게 방대한 혈통을 가진 도둑의 일가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230 왕의 매장과 도둑질이라는 주제와 뗄 수 없는 것이 미라를 만드는 과정이다. 미라를 뜻하는 ‘mummy'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12세기 아라비아의 여행가인 아브드 엘-라티프가 mummies가 약용으로 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조사한 데에도 나타나 있다. mumiya 또는 mumiyai는 아브드 엘-라티프에 의하면 역청 또는 ’유태인의 송진‘을 뜻하는 아라비아어이다.
232 시체는 보통 다음의 방법으로 다루어졌다. 뇌는 콧구멍을 통해서 금속고리로 꺼냈다. 복강은 돌칼로 열어서 부드러운 내장들을 꺼냈다.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은 항문으로 내장을 꺼내는 것이었다.
235 우리는 이 일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 교훈을 무덤에서 물건들을 꺼냈다고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비평가들에게 들려주겠다. 우리는 고대 유물들을 박물관으로 옮김으로써 안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본래의 장소에 남아 있었다면 그것들은 조만간 도둑들에게 희생당했을 것이고 그것으로 끝장이다.
236 투탕카멘 묘의 발굴은 고고학적 탐사 성공의 최고봉을 이룬다. 이 사건은 고고학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급격한 전환점을 이룬다.
237 투탕카멘 묘의 발견은 고고학적 탐사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체계 없이 이루어지고 있던 연구들을 대단원으로 집결시켰다. 이 승리는 과학적 방법의 승리라 하겠다.
249 카터는 천천히 머리를 돌리며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네, 아주 멋진 것들이요!”
“정말이지 발굴의 역사를 통틀어서 그토록 멋진 광경은 없었을 것이다!” 카터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문구멍을 통해 들여다본 문 저쪽의 광경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291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였던 시대에는 성서 속의 말씀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고 그 글자는 신성한 것이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와 함께 비판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모든 유물론적 철학들에 내포된 비판에 의해 끊임없이 의심을 하도록 단련을 받더니 성서 속에 깊이 간직된 진실들-상당히 과장되어 있기는 하나-에 대한 증거를 밝혀내게 되었다.
301 최초의 아시리아 궁전의 발견은 단지 유럽 신문들의 특종 기사로 그쳤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류 발상지는 이집트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 까닭은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멀리까지 소급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강 사이에 있는 지방에 대하여는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성서에 기술되어 있었을 뿐이었고 성서 또한 19세기 학문에 있어서는 하나의 ‘전설집’에 지나지 않았다.
306 발견과 그것의 실제 응용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긴 거리가 있음을 학문의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보타가 조각품과 함께 기묘한 설형(쐐기 모양)문자로 뒤덮인 벽돌들을 수집하여 복사시킨 후 파리에 보냈을 때에 보타 자신은 그것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전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이나 근동 일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미 그 문자 해독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312 설형 문자의 해독은 참으로 천재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 두뇌의 가장 뛰어난 업적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며 인간 정신이 성취한 위대한 과학적 창안과도 대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321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감추어진 자료가 얼마나 많은지 상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면 1888년부터 1900년까지 니푸르에서 볼라트 힐프레히트의 미국인 원정대에 의해 수집된 설형 문자 원본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그것들을 해독하고 그 결과를 출판하는 일이 오늘날까지도 완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할 줄로 생각된다.
359 우리가 지금 막 살펴보았던 불가사의한 유적지(님루드를 떠나면서)를 공허하게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우리가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었는지 또는 동양의 옛이야기를 읽고 있었는지 아리송해져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아마도 먼 훗날 다시금 이 아시리아 궁전의 폐허 위에 초목이 무성해지는 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내가 오늘 본 것에 대해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363 오늘날 우리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 더구나 발굴자와 설형 문자 전문가들의 공동 노력으로 두 사람의 지배자였던 센나케리브와 아슈르바니팔 그리고 그들의 선대나 후대 인물들의 생애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372 이 작품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게 될 때 인간 정신의 여명기에 대한 수많은 밝은 통찰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건만 그것이 발견되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의미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378 다시 한 번 고고학은 우리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하여 큰 비약을 하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측면도 전개되었다. 우트나피시팀의 이야기는 보다 오래된 전설을 가지고 성서적인 전설을 확증한 셈이 아닐까?
394 바빌로니아의 대도시는 모두 지구라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바벨 탑’에 필적하지는 못한다. 8,500만 개의 벽돌이 그 건축에 사용되었으며 탑은 거대하게 우뚝 솟아 주위 경관을 압도하고 있었다.
403 오늘날 콜데바이가 재현해 준 바빌론의 땅과, 빛을 말하고 있는 단편, 그리고 지난날 장중하였던 건물의 폐허만이 보인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이 뭇사람들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이리하여 사막의 생물과 승냥이가 그곳에 깃들며 올빼미가 그곳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곳엔 사람도, 쉬어 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404 어쨌든 과거는 아직도 존재하고, 우리가 의식하건 안하건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간의 의미에 대해 깊숙이 깨닫게 되면,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무수한 세대들의 흐름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앞세대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몸속에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413 성서는 바벨탑의 건조 당시 언어의 혼란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바빌로니아에는 수메르어와 셈어라는 두 공용어가 쓰이고 있었다.
430 수사에서 발견된 커다란 기둥에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수메르의 법 원리와 관습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법전은 유죄 여부에 대한 명쾌하고 일관성 있는 개념으로 피력되어 있다는 점이다.
443 도시는 폐허인 채로 버려져 있었다. 마치 황량한 바다 한 복판에서 난파당한 범선처럼 돛대는 날아가 버렸고, 배 이름도 지워졌으며 승무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사라져 간 그 배의 사람들 모습은, 이제는 뼈대만 남은 앙상한 선체와 갑판 등을 얼기설기 짜맞추어 어느정도 그려 낼 수 있을지도....., 그러나 그들의 참모습을 우리는 영원히 알수 없으리.
447 이 책에 나오는 위대한 고고학 발견사 중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도인 유럽의 한 사나이가 미지의 풍부한 문화를 폐허로부터 복원할 필요 없이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마주보게 된 것이다. 몬테수마 앞의 코르테스! 그것은 마치 브루크슈-베이가 다이르 알-바리 계곡에서 돌연히 람세스 대왕을, 또는 콜데바이가 느닷없이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네부카드네자르을 만나서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463 아스텍의 문명은 실로 고도의 도덕성이 야만적인 천연덕스러움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 양자를 하나의 통일된 문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페인의 광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493 그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내려 놓으며 단도 직입적으로 “땅값을 얼마나 받고 싶소” 하고 물었다.
스티븐스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만일 류머티즘 환자인 그의 늙고 가련한 부인을 의술을 실험하기 위해 사겠다고 말했어도 그는 그처럼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우리 두 사람 중 어느 누가 넋 나간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땅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었으므로 그 땅을 사겠다는 내가 그리도 의심스러워 보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500 프레스콧의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무엇일까? 아스텍족과 마야족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명백했다.
529 그리하여 모든ㄷ 사람들은 떠나가고 도시와 농경지는 버려졌다. 그리고 신제국이 북방에서 세워지고 있는 사이에 정글은 서서히 버려진 신전과 궁전에 침투하여 휴경지는 다시 정글을 이루었고, 수목이 건물 위를 덮었으며 1,000년간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버려진 도시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 아닐까?
547 톰프슨이 성스러운 연못에서의 발견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하자 온 세계는 귀를 쫑긋 세웠다. 발견을 한 상황이 유별나기도 했으려니와 수프 같은 진흙 반죽에서 나온 발굴물들 역시 무진장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할 것 같으면 경제적인 가치는 뒷전으로 돌려야 했다. 엄청난 노동력과 경비를 투입하여 발굴한 유물들이 지닌 현금적 가치는 그야말로 너무나 미미한 것이었다.
제 5부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장
579인간으로서의 겸양을 배우고자 할진대 굳이 하늘의 별을 쳐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수천 년 앞서 존재했으며 위대했던, 그러나 이미 사라져 없어진 수많은 문화로 눈을 돌리면 족한 것이다.
581 우리는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의 파노라마 끝에 와 있다. 이제 5,000년이라는 긴 산책의 길도 여기서 끝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 이야기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들 중에서 우리의 특정 의도에 따라 극히 일부만을 이야기하였다.
581 여기서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장’에 대해서 기술하는 이유는 발전된 규모에 있어서 우리가 이미 탐사한 문화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고도로 발달한 세 개의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세 개의 문화란 히타이트 문화와 인더스 문화 그리고 잉카 문화이다.
588 새로운 것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우리의 지식은 그만큼 확대된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견해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592 이제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지금 이 시간에도 땅을 파내는 작업은 온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100년 앞을 내다보기 위해서 우리는 지나간 5,000년의 역사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저자로서 특히 역사에 관련한 저자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다. 모든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올바르고 투철한 가치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분들에게, 앞으로의 모든 분들에게 떳떳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인성인 것이고, 개인의 명예와 신뢰의 문제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고고학의 극적인 성격, 즉 고고학의 인간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고고학은 모든 종류의 자극과 성취를 내포하고 있다고 저자는 느끼고 있다.
저자의 접근 방식은 먼저 순수하게 고고학의 사실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항상 사실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들의 배열에서 문학적인 효과가 우러나도록 상황에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은 고고학자들의 뛰어난 업적과 그 통찰과 끈기에 대한 찬가이다. 순수한 겸손에서 재능을 숨긴 연구가들의 기념물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역사를 기술할 때 개인적인 주관이 많이 작용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어쩔수 없는 일일지 모르나, 이 책의 저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겸허하게 기술한다는 점과 잘 알려지지 않은 고고학자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인간적인 측면을 묘사하려 했기 때문에 다른 역사가들에 비해 이 책이 신뢰를 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인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고고학 전문가가 쓴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가 쓴 고고학 이야기다. 전문가가 쓰는 것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쓴다고 해도 그의 고정 관점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 책이 흥미진진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따분하게 읽힐 수 밖에 없다. 반면, 아마추어는 학계의 관행이나 서술방식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일정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고 고객의 흥미를 유발한다면, 아마추어가 전문학자에 비해 오히려 유리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머리말, 5개의 장, 부록, 이력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서는 4대문명의 발상지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닌, 고고학 소설이라는 이 책의 제목에 어울리도록 나름대로의 문명으로 구성하고 있다. 저자가 이렇게 택한 이유는 정말로 낭만적인 모험을 즐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광대한 고고학적 사실을 명괘하고 체계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점, 고고학적 현실을 알게 해 준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책이기에 500백만 부나 팔리게 되었다.
이 책의 약간의 단점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을 읽어가는 도중에 이해와 현장감을 느끼도록 그림을 삽입하고 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그림의 위치가, 읽으면서 바로 참조하기에 곤란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책의 지면 편성의 효율성을 고려하였다고는 판단되나, 내용의 쪽수와 함께 배열하거나, 아니면 그 그림의 쪽수 표시를 명확히 하여 읽어가면서 바로 참조하도록 했으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나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