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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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에서는 매년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실시한다. 그 교육은 전문상담원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면서 가부장제의 안경을 벗고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장기이도 하다. 성폭력은 가해자의 시각에서 재구성되기 때문에 여성주의 시각을 갖지 못하면 피해자 상담을 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교육의 재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자리에 모인 교육생들의 반응이다. 석박사를 전공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말하고, 또 다른 운동가는 ‘자신은 운동가의 자격이 없는 것 같다’며 죄책감을 토로하고, 한 남성 참여자는 ‘자신은 이제 장가는 다갔다’고 원망 섞인 이야기를 한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교육생은 여성주의자들은 모두 무섭고 공격적이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무조건 남자들을 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만삭이 된 활동가를 보고 정말 놀랐어요. 당신들도 나와 똑같은 평범한 여성이군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40명이 넘는 교육생들과 열대명의 활동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편견을 하는자와 편견을 경험한자의 즐거운 만남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기억속에 잠들어 있던 몇 년전의 나를 깨어나게 했다. 몇 년전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나 또한 다르지 않게 생각했다. “여성주의는 편협하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서서히 나는 당위성의 껍질을 벗겨가기 시작했다. 나의 사고 역시 편협하며, 강자의 경험만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남성 언어에 익숙한 나에게 여성주의 언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했다. 이것은 내가 부정해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발 한발 다시 밟아보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았다. 내안의 다른 세계로의 이동, 그 순간은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을 거쳐 쾌락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그 순간의 쾌락을 경험하고 나서야 수많은 사람들의 편견에도 목젖을 보이여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한국사회에서 ‘나는 여성주의자 입니다’라는 말을 입밖으로 뱉어내는 것은 커밍아웃의 경험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위험하고, 까칠하고, 무서운 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시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며 나의 주장을 펼쳐왔다. 위험하고, 까칠하고, 무서운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접두어는 내가 가부장제에서 여성주의자로 살아남기 위한 두꺼운 방패였다.
이제는 무거운 방패를 놓아버린다. 나의 주장을 할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지 않는다. 여성운동단체에 있기 때문에 ‘나는 여성주의자 입니다’라고 커밍아웃을 할 이유도 없다. 위험하고, 무섭고, 까칠한 여자라는 이야기에 기가 죽지도 않는다. 나는 여성주의자가 아닌 그저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나’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아직도 여성주의를 접할 때,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의 눈을 마주할 때, 이주노동자들과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이야기 할 때, 빈곤문제를 접할 때 마다, 매번 인식 전환의 불편함과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정해서도 안되는 삶의 필연이다. 그것이 가부장제 언어이든, 여성주의 언어이든, 또 다른 소수인권의 언어이든,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당위성에 포장되어 알아차리기 어렵다.
모든 인식은 차이를 통해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다. 그 경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마음껏 불편하고, 마음껏 혼란스럽고, 마음껏 쾌락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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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교육생은 여성주의자들은 모두 무섭고 공격적이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무조건 남자들을 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만삭이 된 활동가를 보고 정말 놀랐어요. 당신들도 나와 똑같은 평범한 여성이군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40명이 넘는 교육생들과 열대명의 활동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편견을 하는자와 편견을 경험한자의 즐거운 만남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기억속에 잠들어 있던 몇 년전의 나를 깨어나게 했다. 몇 년전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나 또한 다르지 않게 생각했다. “여성주의는 편협하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서서히 나는 당위성의 껍질을 벗겨가기 시작했다. 나의 사고 역시 편협하며, 강자의 경험만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남성 언어에 익숙한 나에게 여성주의 언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했다. 이것은 내가 부정해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발 한발 다시 밟아보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았다. 내안의 다른 세계로의 이동, 그 순간은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을 거쳐 쾌락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그 순간의 쾌락을 경험하고 나서야 수많은 사람들의 편견에도 목젖을 보이여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한국사회에서 ‘나는 여성주의자 입니다’라는 말을 입밖으로 뱉어내는 것은 커밍아웃의 경험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위험하고, 까칠하고, 무서운 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시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며 나의 주장을 펼쳐왔다. 위험하고, 까칠하고, 무서운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접두어는 내가 가부장제에서 여성주의자로 살아남기 위한 두꺼운 방패였다.
이제는 무거운 방패를 놓아버린다. 나의 주장을 할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지 않는다. 여성운동단체에 있기 때문에 ‘나는 여성주의자 입니다’라고 커밍아웃을 할 이유도 없다. 위험하고, 무섭고, 까칠한 여자라는 이야기에 기가 죽지도 않는다. 나는 여성주의자가 아닌 그저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나’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아직도 여성주의를 접할 때,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의 눈을 마주할 때, 이주노동자들과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이야기 할 때, 빈곤문제를 접할 때 마다, 매번 인식 전환의 불편함과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정해서도 안되는 삶의 필연이다. 그것이 가부장제 언어이든, 여성주의 언어이든, 또 다른 소수인권의 언어이든,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당위성에 포장되어 알아차리기 어렵다.
모든 인식은 차이를 통해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다. 그 경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마음껏 불편하고, 마음껏 혼란스럽고, 마음껏 쾌락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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