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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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박남준을 만나던 날
지리산 자락을 베고
섬진강에 발을 담근 날
마음을 문지르듯
솔향기로 색을 내고
부끄러운 매화봉오리로
사알짝 째를 부리던
봄날 오후
산수유 노오란 빛깔에 취해
좋은 님과 벗하다.
“뜰 앞에 매화가 피었네요. 누구에게 편지를...”
왜 그랬을까. 먼발치 안면식이 있는 그였지만, 막상 이렇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 썩 편하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제 급한 욕심을 앞세워 나선 길이라서 그럴까?
어제부터 지리산 자락 하동근처를 맴돌며, 집전화기의 자동응답 메시지만을 들어야 했다. 결국 급한 마음에 지인들을 통해, 손 전화번호를 얻었지만, 응답대신 ‘회의중’이라는 문자가 날라 왔다. 그랬구나. 내가 섬진강에 있던, 그 시간에 그는 여주의 여강에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무슨 행사에 참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가 결국 1박2일의 주말나들이로 이어졌다. 지난 몇 개월의 골방생활을 참아 넘기기에 봄바람이 너무 달았다. 17번 국도, 전주에서 남원가는 길을 따라 섬진강이 흘렀다. 강을 따라 구례, 화개장터, 하동, 매화마을 이런 낮 익은 이름들을 거슬러서 이미 봄이 오고 있었다. 잠시 장터의 번거로움에 몸을 섞고 앉아서, 산채비빔밥에 동동주 두어 잔을 걸치고서야 내 얼굴에도 꽃이 피었다. 섬진강 모래톱에 신발을 벗고서, 성급한 맘을 강물에 담궜다. 지리산 자락을 베고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던 밤하늘을 보기엔 청학동만한 곳도 없었다. 나무 타는 냄새가 참 좋은 봄날 저녁이었다.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 밥상머리 맞은 편 / 내 뼈를 발라 살점을 얹어줄 사람의 / 늘 비어 있던 자리...’
‘매형이 퇴근을 하셨을 것이다. 누님은 시장에 가서 한 움큼의 손바닥만한 저녁 찬거리를 봐 오셨을 것이다. 밥상위에 오른 소고기볶음, 한 접시가 아니었다. 간장종지만한 작은 그릇에 담긴 그것을 밥그릇을 다 비우도록 누님은 한 젓가락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매형의 밥그릇에 집어 놓아주던 그 가난한 시절의 풍경이 문득 떠오른다.’
부끄럼이 많다던데. 그에게 낯선 방문이 실례는 아닐지.
혼자라는데. 가족까지 동반하고 나선 길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무엇을 좀 챙겨가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보다 못한 옆자리 아내가 ‘굴비 한 꾸러미’가 어떠냐는 시린 농담을 던진다.
장터 한 켠에서 ‘금낭화’를 봤다. 꽃 이름이 많은 그의 시집이었지만, 원색적인 화려함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까? 기억에 없다. 그의 화단에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금낭화처럼 빠알간 속주머니를 가진 우렁각시라도 생긴다면 좋겠다는 그래서 그의 시집에서도 금낭화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접으며 금낭화를 샀다. 눈치 빠른 아주머니, 5천원이면 두 개를 준단다. 덕분에 내 몫도 하나 샀다.
그리고 다시 섬진강 따라 19번 국도 옆, 직접 만든 찐방도 샀다.
‘각시원추리가 기다리는 첫날밤은, ... 엿보고 말았다 ... 아름다운 사람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 내 사랑도 그럴 것인가 / 아니다 나는 틀렸다’
무작정 다리를 건너 직진으로 마을 끝까지 따라 올라오라던 그의 말에 두 번, 세 번 물을 수가 없었다. 대문도 없는 그 집에 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꼭 쳐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Esse를 물고서, 뜰 앞에 핀 매화나무 앞에 서 있었다. 어색하게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냈지만, 그 역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허둥지둥 아이들을 앞세워 인사를 하게하고, 차 안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아내도 소개를 했다. 머슥한 잠시의 시간 끝에 그가 집안으로 들어가며 크지도 않게 던진 말은 ‘차 한 잔 하고 가라’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미리 되돌려 보낼까 했던 처음 생각을 고쳐먹고, 부엌에 달린 마루 같은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찻물에 끓는 동안, 박상현... 김연주... 비록 얼굴도 모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들로 분위기를 데웠다. 양치는 어데서 하는지, 음악 CD가 많다는 둥,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8살 딸래미의 수선스러움에 그가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눈치 빠른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나간 사이, 매화 꽃봉오리를 띄운 찻잔이 두 어 잔씩 비워졌다.
홀아비 냄새 땜에, 감초며, 당귀며, 한약주머니를 천장에 달았다고...
얼마 전 다녀간 아이들의 손에 거문고가 제 소리를 잃었다는 이야기며...
짜장면집 요리사가 되겠다던 조카는 아직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고,
빨간 지붕 사일로를 가진 농장에서 살고 싶다던 꿈은 아직도 파란 양철지붕 아래 쳐박혀 있고.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고, 잠시 마음을 둔 분도 있었지만, 부끄럼이 많던 시절이어서...구선생은 참 좋은 분 같더라... 따뜻하고... 그런데 무슨 연구를 하는 곳인지도 물었다.
준비해 간 두 권의 시집-‘적막’과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을 건내 받고서는, 쌈지쌈지 아껴둔 만년필을 꺼낸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새겨 넣고선 마음도 그려 넣는다. 솔잎가지로 마음을 문지르듯 색을 내고, 향기를 발랐다.
‘어린 죽순이 자라서 서슬 푸른 대나무가 되듯이’
신진철 님께 4343. 3. 14. 박남준
‘강물이 흘러가는 길이 곧 순리다 삶이 순리를 지키기만 한다면야 어찌’
신진철 님께 2010. 박남준
그는 사랑니 때문에 아파했다. 쉰 네 살에 그는 아직도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잊으면, 죽은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내가 사간 찐빵도 하나 먹어보지 못했다. 두 권의 시집을 건내 받고서, 다시 가방을 뒤져, 혹시나 하고 인도홍차인 ‘짜이’가루를 건냈지만, 웃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던 내가 역시 조급했다. 잘 가겠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미 그의 마당에는 또 다른 지인들로 법석거렸다.
대문 기둥 대신 손님을 배웅하는 산수유가 이미 노랗게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 그의 손에는 또 다른 Esse가 들려 있다. 뭔가에 떠밀리듯 그의 집을 나섰다. 다음에 또 뵙겠다는 소리를 크게 남겼다.
‘신발 한 짝이 보이지 않는다 / 알 수 없는 아이들이 왔다간 뒤의 일이다 / 깨금발을 딛고 사방을 헤맨다 ... 발걸음은 자꾸 비틀거린다 ... 왼쪽 무릎을 절뚝거린다 / 불안한 긴장이 그 길을 따라 쫒아온다’
그 길을 따라 쫒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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