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인 이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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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끔 어떤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뭔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험 말이다. “충동”이라면 꼭 한 가지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끝까지 읽으며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까 책을 읽는데 뭔가 느낌이 왔었고, 이거 뭐지? 하며 파헤쳐 보는 중이다. 뭐 대단한 이야기 아니라는 거다.
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때때로 의도했던 것과 달리 반응하는 속도가 의식보다 더 빠른 경우를 종종 본다. 예를 들어 몸이 떨린다거나, 뇌의 움직임이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쉴새 없이 움직인다던가 하는 것이다.
또 그런 생각이 깊은 속살까지 마구 찔러대며 덤벼들 때, 실체는 잘 모르겠는데 어쩜 그것이 세상을 바꾸어 놀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아니 망상인가? 이럴 때의 증상은 반드시 몸 어딘가의 은근한 떨림을 동반한다. 나는 이런 충동을 꽤 즐기는 편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천성이 게으른 편이라 어지간해선 즉시 실행에 옮기거나 하진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역시 귀차니즘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것이 딱 2% 모자라는 에너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웬만한 볼트에는 반응하지 말자고 귀여운 뱃살과 합의 본 적이 있다.
그러데 갑자기 손가락이 움직이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오는 것이다. 지 팔 지가 흔든다는 데 반대할 일 없다. 사실 언젠가 오겠지 하고 이런 순간을 기다렸던 것도 있으니깐.
잠깐, 여기까지 후다닥 쓰고 나니 뭘 쓸려 했는지 잊어버렸네. 이런..............아 뭐였지??
장기간 축적해 둔 알코올이 사랑스런 전두엽을 방문하는 순간이다.
아, 다시 생각났다.
그렇다. 한 번도 만족하지 못했던 그것에 대한 고찰과 궤변을 무리하게라도 펼치고야 말겠다며 분기탱천 한 것이다. 뭐 대단한 것을 기대하신 분들에겐 참으로 미안하게 됐다. 그것이란 다름 아닌 바로 그럴듯하게 섹시한 자기 소개서이다. 아 별거 아닌 거에 목숨 걸면 안 되는데 나 가끔 또 이런다.
왜 이 화두가 머리 속에 맴돌았는가 하면 얼마 전 요리놀이 모임에서 자기 소개서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한 일 분만에 일필휘지로 써서 보냈는데 좀 더 성의를 보이라는 대장의 요구가 살짝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울 대장은 아니었나 싶다. 도대체 어떻게 썼느냐고 궁금해할 사람을 위해 다음과 같이 내용을 공개한다.
[현재 백수. 본인은 프리터라고 함. 2년 정도 놀았더니 슬슬 좀이 쑤신다며 약간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어하는 데 밸시리 재능은 없음. 늙은 고양이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 가끔 필 받으면 창작요리라고 하는데....................................여기서 느낀 음식철학은 세상만사 다 이름 붙이기 나름. 잘난 척이 특기]
좀 심했던 걸까? 요따구로 하는 바람에 자기 소개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과제가 미결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처음 자기 소개서를 쓰는 경우는 취업을 목적으로 할 때다. 그런데 기업에서 요구하는 틀에 집어넣기 위해선 전혀 섹시함이 배제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나열해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민망함을 감수해야 한다.
판매에는 프로모션이 중요하고 전략적으로 마케팅을 잘 세워야 팔리는 법. 자본주의 하에서 팔리지 않아도 되는 상품이란 도태를 의미하지 않는가. 개중에는 아주 개성 있게 작성해서 골인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일 것이다.
이러다 보니 어디다 자기를 소개할 때, 습관대로 낯 간지러운 자기 소개서를 쓰곤 했는데 그게 사실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남이 보면 재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번엔 나름 독창적(?)으로 써 봤는데 즉시 “쫌 너무한 거 아님?” 하는 반응에 고민하기 시작한 거다.
어떻게 하면 나름 괜찮은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깐 잘난 척 안 하면서 잘나 보이고 대충 쓴 것 같은 데 은근슬쩍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뭐 좋은 비법 없을까? 뭐 이런 이야기다.
여기서 잠깐 그 동안 어떻게 자기 소개를 해왔는지 한번 떠올려 보겠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의 나는 보통 이런 모습이다.
글이 거친 것과 달리 실제의 난 꽤 수줍음을 잘 탄다. 울렁증도 있다. 키는 큰 데 목소리는 작다. 개미 목소리면 톤을 높여 크게 말해야 되는 데 그렇게 되면 머리가 멍해진다. 혹여 마이크라도 있으면 지 목소리에 지가 취해 가끔 길게 말하기도 하나 비교적 짧게 말하는 편이다. 그래 차례가 다가오면 옆 사람이 소개한 형식을 빌어 후다닥 넘기곤 한다. 하고 나서 마음에 안 들었다고 이럴 껄, 저럴 껄..며칠 후회하기도 한다. 줄줄이 나열 들이 아무 의미 없는 자리도 있고, 이름만 말하면 되는 데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은 체질이 아니다. 또 “.....였다면서 이거밖에 안돼?” 이런 소리를 들을까 걱정되기도 하는 소심 형 인간이기도 하다.
어째 써놓고 보니 수줍음 많은 어여쁜 봄 처녀가 연상되고 만다는................(동의여부는 묻지 않으련다)
이래서 사람은 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거다.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저자 소개도 그렇고, 누가 저 사람 어떤 어떤 사람이래.....하더라도 나는 심드렁, 그래서? 하는 반응을 보인다. 사실 스펙이 너무 화려하면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 먼 느낌이 들고, 뭔가 상대를 위축시키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이 사람일 뿐이지 사람이상의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사람의 언어는 공감을 일으키지만 신의 언어는 헷갈리만 할 뿐이고 또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비호감으로 변하는 데 일초도 안 걸린다.
뭔 잡설이 이렇게 길었나 모르겠다만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하자. 그러니깐 폼 나게 자기를 소개하는 비법 뭐 없는 가 하는 거다. 뭐가 있다는 거 같기도 한데 속에서 옹알대기만 할 뿐 아직 인간의 언어로 구성이 안되고 있다. 너무 깊이 생각하면 삼천포로 빠질 것 같아 옹알국 언어를 구글신께 번역 부탁 드리기로 했다.
신께서는, “격이 있는 바보가 되거라” 지엄하신 한 마디를 주신다. 저분의 말씀을 해석해 보자면 “상대에게 우월감을 주되, 격을 잃지 말라”, “신들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라”, “거친 언어를 구사하되 경계를 넘지 마라”, “말을 잘 못하면 짧게 할 것이며, 만약 길게 할 거라면 웃기기라도 해라”, “특히 글보다 어투에서 격이 묻어나오니 더욱 더 겸손해라”, “너를 솔직하게 드러내되, 드러나지 않게 잘난 척해라”....
뭐 이런 해석인 것 같다. 아 어렵다. 이거 괜히 건드려 본전도 못 찾는 건 아닌지 계속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고지가 바로 저긴 것 같으니 포기하지 말자는 쪽으로 기운다. 어쨌거나 그럼 어떻게 써야 한다는 말인가. 맘대로 의견만 툭 던지고 대안도 내놓지 않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있을까 싶어 할 수 없이 실패한 경험담이라도 적어 보아야겠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곤 하지 않았던가.
대낮에는 아래 중에 한 마디 정도로 짧게 소개하곤 했다.
“전 서울 출신이고 회사 생활하다 시방은 백수하고 있어요”, ”눈 먼 괭이 할배랑 같이 살고 있고 뭐든지 먹는 거 다 좋아해요”, “쫌 게으른 편이지만 가끔 필 받으면 자전거 타고 운동하기도 해요”
무난한 소개엔 무난한 반응이 온다.
술 한잔 걸친 마신 밤에는 이렇다.
“상상, 망상, 회상 암튼 먼가 생각하고 있구요, 외로움에 쩔어 혼자 울 때도 많구요, 그러다 죽을 것 같아서 술을 마시기도 하구요, 그렇게 잠드는 날도 많아요. 그러나 꼭 그렇지 만은 않구요,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백마 타고 오는 왕자, 아니 이젠 다 늙었을 황태자를 상상하기도 해요. 요즘은 추노꾼이 와 준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날은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몇 시간이고 상상을 한답니다. 그러고 나면 며칠 살만 하구요. 그런 몽상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런 소개에는 바로 대놓고 "끌끌" 하는 사람도 있고 눈만 "끌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저렇게 칠칠 맞기만 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 적도 있었다.
“전 이거 하나만은 비교적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진 아니구요. 기면 기고 아닌 건 아닌 게 제 스타일이지요”
이런 소개는 뭔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사람들이 눈이 가늘게 변하면서 비장한 침묵이 흐른다.
그런데 실은 난 이렇게 소개를 하고 싶기도 하다.
"태양이 떠오를 때 저는 이런 사람이 됩니다. 햇살을 가득 받으면 또 이렇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다시 또 저런 사람으로 변합니다. 제 스펙이란 것은 먹고사니즘이 요구한 시대에 입었던 옷입니다. 지금은 다 낡아빠졌지요. 저는 매일 죽어가고 매일 새로 태어나는 지라 오늘의 나를 소개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가까이 가는 데는 서툰 편이구요, 요즘 너꼴리니즘이란 철학에 빠져 있으며..............블라블라
이건 사람의 인내심을 좀 필요로 할 듯하다.
이걸 만약 내 주변의 오형 인간이 듣는다면? 대답:“아, 됐구!!...그래서??
이상이 지금까지의 별로 맘에 안 드는 소개였다. 역시 아무리 봐도 맘에 쏙 들어 오지 않는다. 더 솔직하자니 진짜 한심해 보일 것 같고, 잘난 척 하자니 할 건덕지가 없구나. 그래 할 수 없이 다시 신탁을 받기로 했다. 삼일 정성을 들이자 이윽고 두 번째 말씀이 계셨다.
“니 입으로 떠들지 말고 남에게 너를 소개하게 하라”
다시 해석 들어간다. 그러니깐 칭찬합시다 분위기로 가면서 누군가에게 멋지게 나를 소개시키라는 말씀이다. 나는 그냥 광 잡고 아우라만 살짝 띄우고 있으면 된다는 거네. 아 간단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폼나보이고 싶어도 해줄 사람이 없다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누가 해준다고 해 봐야 그간 지은 죄도 많고 해서 밸시리 좋은 야그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 데 친절한 신께서 뒤통수를 후려치신다.
“짜샤, 그럼 너 스스로를 한 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글로 써 봐봐!”
한 번 더 물어봤다간 병원가게 생겼다. 그래 할 수없이 글로 써 보려다 에이 뭘 하고 걍 꾸욱 참기로 했다..........가, 그러면 여태까지 이 긴 글을 읽어준 이가 짜증낼 것 같아 조신하게 신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글 쓰는 걸 봐선 애덜 같고, 하는 짓도 철딱서니 없는 데 육안으로 확인했을 땐 명백하게 지긋함이 눈에 들어옴. 지구에 살고 있고 출생기록부에는 서울에서 태어난 걸로 되어있음. 강건해 보이는 체구와 달리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인 듯. 안 그런 척 하다 속이 곪았다고 함. 잔 고장 수리하며 뭐 좀 깨달은 것 같음. 먹고사니즘에 치여 상당 시간 지구를 떠돌아다녔음. 평생 너는 누구냐며 속으로 거품 물다 구본형 연구소에서 3기로 연구원 수료. 말 안 했지만 실은 “욕망이란 무엇인가”로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함. 그런데 지 욕망도 헷갈리는 바람에 대략 포기, 고양이 얘기로 돌리지만 것도 쌩까고, 자전거로 전국유랑하며 탱자탱자 세월 보냄. 최근 요리놀이에 재미 붙이고 料理놀이家로 꿈틀대기 시작하는 중. 나쁜 사람은 아님]
섹시한 자기소개라고 떠들었던 것 같은데 어째 우악스러운 느낌도 든다. 서두에서 부르르 떨리니 하는 글로 호들갑을 떨어 조금 죄송하다. 그러나 연구원 수료하고 방황하다 오랜만에 이런 느낌을 받으니 주체하기 힘들었다. 뭐 나 같은 용감한 이도 있어야 후발 주자가 또 나와주지 않겠는가.
연구원 3기 끝난 지가 엊그제 같은 데 4기 5기 끝나고 벌써 6기라니...꿈벗은 6기였는데 벌써 20기도 훌쩍 넘었고, 도대체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나도 살아있다고 신고도 해야겠고, 뭐 이런 마음으로 오랜만에 게시판에 인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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