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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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풍경
1.
늘 저잣거리에서 서성거리던 아이는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담장너머로 글 읽는 소리 따라 읽고,
어깨너머로 친구들의 책을 훔쳐보면서
꿀먹은 벙어리인냥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던 말도
꿀꺽꿀꺽 삼키면서
친구들 학교 가는 시간이면
막가지 하나들고
볕 좋은 저잣거리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땅 바닥에 제 이름 석자
썼다, 지웠다.
학교 밖 담장 밑,
민들레와 친구하던 아이도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노오란 웃음 꽃이 피었습니다.
2.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대감마님이 사자후를 토한다.
“자, 이제 두 명의 식구가 새로 늘었으니, 축하를 하러 가자.”
3.
모세도 하지 못한 일,
레닌도 하지 못한 일,
예수마저도 다 하지 못한 그 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일.
해야 할 일이 아니라.
4. 洗心洞 開心寺
마음을 보러 갔다
작은 절인데도
길이 넓다.
돌을 쌓고
계단을 오르던 길
산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연못이 보인다.
가로지른 다리
종마루는 화들짝 하늘로 날아오를 듯,
洗心洞 開心寺
열렸다.
닫혔다.
보일 듯 말 듯 그 사람
알 듯 모르듯 그 마음.
5.
옹골진
부지깽이 하나가
이 방 저 방 밑불을 지핀다.
초여름 細雨에
으스름 저녁
백년고택 굴뚝연기로 피어 오른다.
길 가던
나그네의 마음이
집을 찾아드는 시간
세상 떠돌던
고단한 발 씻을 물을 데우고,
마음 고픈
한 끼를 짓는다.
그는 천상
부지깽이다.
6. 석고상
고택의 뒤안
백년고택 뒤안 길,
아무도 눈길 주지 않던
그 한 구석에
줄리앙, 아그리파, 시이저, 비너스...
이름 없는 소녀의 석고상까지
먼지 가득 뒤집어 쓴 채
다 모였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걸까.
7.
‘철푸덕’
시암물에
줄줄 새는 양동이가 던져졌다.
도르레를 감아 올리는 손,
누가 담겨 올라올까
무엇을 건져 올리나.
시골집
작은 시암 속에는
누가 살까
8.
토방 한가운데
꺽여진 길
노발대발안방마님이대청마루내려질러대문옆마당쇠의발모가지를분지르러내닫다가
그만,
시암길로 향한다
찬물 한 사발
들이키고 만다.
꺽어진 길 하나,
마당쇠를 살렸다.
그날부터 그 이름은 꺽쇠다.
9.
머리에
흰 서리를 얹었다
그림 그리는
집주인을 닮았을까
백년고택
기와 위에도
이름 모를 풀들이 자랐다
10. 사랑채 수다
사랑채에선
밤새 불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가슴에 불덩어리 담고 살던
여자 셋이 만났으니
우성, 상현, 진철
차례차례
오징어 굽듯 바싹 구워
질근 질근 안주 삼아
밤새 불을 지폈다
불을 불로도 끄는구나
아내에게 친구들이 생겼다
천사라 부르던 미옥이도
노심초사 은주누나도
씀씀이 좋은 선형이 마음도
집에 돌아와
풀어 놓는 짐보따리엔
선물이 한 가득이다
11. 문자메시지
어린 돌배나무의 꽃 소식을 전합니다
초여름 단비에 죽순이 막 자랍니다
함께 배를 탔으니, 노를 힘껏 젓겠습니다.
누나, 고마워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