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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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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4일 23시 17분 등록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요즘에도 소년소녀가장들과 소외된 이웃들의 어려운 사연들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자주 소개되곤 한다. 한편으로는 직접 그들을 상담하는 입장에 있는 자로서 그들의 사연을 접할 때면, 나 역시 그들과 다름없는 소녀가장으로서의, 마치 끝없이 어둡기만 한 터널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일이 떠올라,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룬 지금에도 눈물로서 그 터널을 통과하곤 한다.

아프고 시린 기억의, 그러나 아픈 사연만큼이나 그것을 극복할 희망을 노래했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아름답고 귀중한.

일찍 남편을 잃어, 그래서 소위 청상 과부가 되셨던 어머니. 내 나이 일곱 살 적의 일이었고, 아버지께서 남겨 놓으신 가산이라곤 차라리 짐으로 밖에 여길 수 없었던 많은 자식들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집안으로 들어온 가난. 젊었지만 지독한 가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셨던 어머니. 비록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었지만 그런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나는 유난히도 눈이 깊고 종일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아이였다. 동생들 역시.

그런 형편에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행상이었다. 그 소득이라야 제때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든 정도였으니, 딴에는 형편을 더 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타관으로 떠도는 것 외에는 또 달리 무슨 수가 있었을까.

때로 어머니는 아주 먼 지방에까지 생업의 걸음을 떠나셔야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들은 어머니께서 두고 가신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연명을 하며 언제고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려야 했다. 일주일, 한 달, 때로는 일 년이 넘도록. 그 날들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다림에 허기져, 우리들은 밤마다 칭얼대는 그리움을 이불 밑에서 달래야만 했다. 지독히도 어렵고 힘든 나날들이었고.

그리고 그때만큼은 나는, 급작스레 어머니 역을 포기해 버린 주인공을 대신해 소녀 가장이라는 역을 맡아, 어쩌면 영영 생활의 무대에 돌아와 설 수 없을 주인공을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 역은 어려웠고 서툴었다. 특히 하루에 한 끼의 식사로 연명해야 하는 장면은 더더욱.

휴일은 내가 아닌 남이 쉬는 날로 인식했던 때도 그때였다.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남의 집 밭을 매주거나 일을 도와 주어 그 대가로 음식이나 곡식을 받아 그것으로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주어도 겨우 곡식 한 되를 받는 정도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면 너무 일찍 생존을 위해서 타협하는 법을 배워 버렸다고나 할까.

학비를 제때에 내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었다. 아니 그 무슨 황망한 꿈을. 교내방송은 아직 납부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의 명단을 읊기에 바빴고, 우리들은 매일처럼 교무실에 불려가기에 바빴다. 有錢有情 無錢無情, 상처와 원망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원칙. 그래도 나는 구차히 우리 형편을 변명하고 싶지 않아 작고 단단한 어깨로 그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그래도 배고픔을 견디는 것만큼은 버겁지 않았기에.

교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또 얼마나 선생님들을 원망했던가. 나는 당신들로부터 지식이 아닌 사랑을, 냉철한 상황 분석이 아닌 정을 배우고 싶노라고. 당신들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가정을 방문해 보셨다면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대하실 수 있을까고. 그러나 그럼에도 애정의 손길을 뻗쳤던 다른 선생님들께는 한없이 미안하고 아쉬워했던, 몸도 마음도 위태하고 힘든 시기였다. 그 때에는.

무엇이 또 우리를 힘들게 했던가. 그래, 그랬었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남의 집 일을 도와주는 게 끝나면 밤늦도록 빨래며 집안 일을 하느라 공부할 틈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사치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점심때면 밥 대신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어느 때인가는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읽게 되어 '다독상'이라는 것도 타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처한 상황이 그처럼 고마웠던 적이 또 언제 있었던가.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되지 못하여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숨어 들었던 도서관에서 학교 생활 중 유일한 휴식과 위안을 얻었으니, 가난이 아니었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귀한 경험이었다.

일주일 후면 돌아오겠다며 겨우 일주일 분만의 교통비를 주고 떠나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멀고 긴 행상의 길. 버스를 타고서도 30분은 족히 걸린 통학 길,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훨씬 지날 때까지…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가파른 길을 걸어야 했던 어머니를 우리는 원망했던가. 무작정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까워서야 친구들에게 차비를 빌려 겨우 무임 승차의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루 이틀, 우리가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던 건 부르튼 발바닥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반짝이는 별들을 더 이상 아름답게만 볼 수 없었던 우리의 괴로움처럼, 아, 어머니는 고단한 몸을 어느 하늘 아래 뉘어 별 같은 자식들의 바스러지는 소리에 진저리 쳤을 것인가!

그리고 또……하늘에 뜬 모든 별들이 튀밥처럼 보였던…….무수한……아픈 기억들만이 깊게 각인되어…..괴로움의 나날들……나는 아주 오랜 공연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연극이 끝난 후에 열렬한 박수 갈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고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셨던 것이다.

그때 내가 맡았던 역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뜻 없이 맡게 되는 소년소녀가장들과 소외된 이웃들의 사연, 그 연극을 무심코 관람할 수 없다는 생각과 연민이상의 무엇을 하도록 끊임없이 나를 독려한다.

IP *.180.7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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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6.15 09:48:31 *.197.63.9
오랜 기도발(?)로 인해 달관을 하여서 그럴까?  무성영화시대 변사에 의해 대신 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
그렇지 않고는 뛰어들어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 자네가 하고 있고, 맡고 있는 일들이 말이야. 처한 상황보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의 시간들을 통해 배우고 깨우치고 역할을 찾아 늠름히 살아내느라 어느덧 일히일비 하지 않는 습관이 온몸에 배어 그렇겠지. 자주 글 올리세. 우리야 글 나누며 사는 사람들 아닌가. 그대 글 올라오니 반갑네. 또 보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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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0.06.15 14:36:07 *.35.254.135
써니언니야말로 달관을 하지 않았을까?ㅎㅎ
난 아직 달관은 이른 나이지~
근데 기도는 좀 하고 있어.
또 나의 삶 자체가 기도라고 생각해.

쩌기 강원도 '예수원'이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노동은 기도요 기도는 노동이라'는 문구가 있어
그게 나의 삶의 모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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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06.15 10:26:29 *.219.109.113
가난과 배고픔이 원망과 대를 이은 고난으로 이어지지 않고
글과 상으로 돌아온 것을 감사함으로 승화시켜 풀어내는 헌님.
그것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긍정의 힘이라 생각이 드네요.

지금 하시는 일은 어머님이 물려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생각 됩니다.
소외된 아이들의 배고픔과 결핍된 사랑을 채워주시는 일은
아마 내가 늘 생각하는 점과 흡사하네요.

퍼주고 또 퍼주면 바닥이 보일만도 한데 '사랑' 은 퍼줄수록 나에게
행복감으로 가득차 어떤 때는 요술 항아리같다는 신비한 체험을 하곤 하지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빛과 소금과 같은 헌님과 같은 존재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원해봅니다.

아아 ~~~~ 마음이 따뜻해져요.
아마 어느날 헌님의 일을 도와 발 벗고 뛰는 날이 있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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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0.06.15 14:31:11 *.35.254.135
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주변인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시는 열정 등
은주님으로부터 저두 참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전화로 서로 통화하면서 은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각자 타고난 부르심을 따라 달란트가 사용되어지는 것 같아요.
저마다 처한 상황과 처지에 맞게 순응하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며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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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요한
2010.06.15 10:31:13 *.90.31.75

이헌님
아침에는 갑작스런 전화에 놀라셨지요?
그런데 나는 이헌님의 목소리를 듣고 걸기를 잘 했다...생각했어요.  담담한 분이시구나! 생각했고, 멀리 여수에 사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오늘 이 글을 통해서 이헌님을 또 조금 더 알게 되었네요.

이런 말은 너무 주제 넘을지도 몰라 조심스럽지만...,
물웅덩이가 그냥 파여진 채로 있으면 흉하고 위험한 곳일 수 있지만, 빗물이 그득 고이면 호수처럼 변해요.
언젠가 이헌님의 삶의 이런저런 상처웅덩이가 빗물을 가득채운 아름다운 호수..., 혹은 씨앗을 가득채운 아름다운 민들레  꽃밭으로 변화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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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0.06.15 14:24:03 *.35.254.135
저두 놀랬어요
울 부족장님의 목소리가 너무나 샤프해서요
샤프한 부족장님의 헌신과 노고로 저희들은 편한 부족원으로 활동합니다.

공감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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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17:32:15 *.124.233.1
이렇듯 물흐르듯 자연스레 읽히는 글을 저도 쓰고 싶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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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10.06.16 08:39:17 *.193.194.24
기차타고 태백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늦여름이면 가끔하곤 합니다.  글보다 삶이 더 찬란하신 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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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0.06.16 09:28:19 *.35.254.135
그룹 예수원가는길의 대표곡인 '태백행 기차'를 참 좋아합니다.
그 음악을 좋아하고 들을때마다 감동이 전해오는 것은
늘 태백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깔려 있고
그곳에서 삶을 헌신하는 분들의 치열함이 그리워서 입니다.
지치고 소진될 때마다 늘 그리운 곳입니다.

그곳처럼 깊은 영성이 흘러 넘치는 공동체
저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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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희
2010.06.17 17:42:25 *.219.138.90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여기며 부모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인지 인정은 많지만 아직 남을 배려하거나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에는 익숙하지 못한 미숙아입니다.  이헌님을 뵙고 돌아오며 많은 생각이 스쳤지요.  그리고 훌륭한  님을 만나 제가 훌쩍 자란 기분이었습니다. 바다와 함께 님의 꿈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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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0.06.17 20:02:30 *.180.75.224
꿈 많은 저를 응원해주시는 태희님 감사해요.
40중반에 이르러서도  응원과 지지받을 땐 참 좋습니다.
꿈꾸듯 아름답게 미래를 설계하시는 태희님의 꿈. 응원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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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yixiaozi98
2010.09.26 16:57:29 *.79.8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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