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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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요즘에도 소년소녀가장들과 소외된 이웃들의 어려운 사연들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자주 소개되곤 한다. 한편으로는 직접 그들을 상담하는 입장에 있는 자로서 그들의 사연을 접할 때면, 나 역시 그들과 다름없는 소녀가장으로서의, 마치 끝없이 어둡기만 한 터널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일이 떠올라,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룬 지금에도 눈물로서 그 터널을 통과하곤 한다.
아프고 시린 기억의, 그러나 아픈 사연만큼이나 그것을 극복할 희망을 노래했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아름답고 귀중한.
일찍 남편을 잃어, 그래서 소위 청상 과부가 되셨던 어머니. 내 나이 일곱 살 적의 일이었고, 아버지께서 남겨 놓으신 가산이라곤 차라리 짐으로 밖에 여길 수 없었던 많은 자식들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집안으로 들어온 가난. 젊었지만 지독한 가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셨던 어머니. 비록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었지만 그런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나는 유난히도 눈이 깊고 종일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아이였다. 동생들 역시.
그런 형편에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행상이었다. 그 소득이라야 제때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든 정도였으니, 딴에는 형편을 더 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타관으로 떠도는 것 외에는 또 달리 무슨 수가 있었을까.
때로 어머니는 아주 먼 지방에까지 생업의 걸음을 떠나셔야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들은 어머니께서 두고 가신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연명을 하며 언제고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려야 했다. 일주일, 한 달, 때로는 일 년이 넘도록. 그 날들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다림에 허기져, 우리들은 밤마다 칭얼대는 그리움을 이불 밑에서 달래야만 했다. 지독히도 어렵고 힘든 나날들이었고.
그리고 그때만큼은 나는, 급작스레 어머니 역을 포기해 버린 주인공을 대신해 소녀 가장이라는 역을 맡아, 어쩌면 영영 생활의 무대에 돌아와 설 수 없을 주인공을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 역은 어려웠고 서툴었다. 특히 하루에 한 끼의 식사로 연명해야 하는 장면은 더더욱.
휴일은 내가 아닌 남이 쉬는 날로 인식했던 때도 그때였다.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남의 집 밭을 매주거나 일을 도와 주어 그 대가로 음식이나 곡식을 받아 그것으로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주어도 겨우 곡식 한 되를 받는 정도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면 너무 일찍 생존을 위해서 타협하는 법을 배워 버렸다고나 할까.
학비를 제때에 내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었다. 아니 그 무슨 황망한 꿈을. 교내방송은 아직 납부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의 명단을 읊기에 바빴고, 우리들은 매일처럼 교무실에 불려가기에 바빴다. 有錢有情 無錢無情, 상처와 원망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원칙. 그래도 나는 구차히 우리 형편을 변명하고 싶지 않아 작고 단단한 어깨로 그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그래도 배고픔을 견디는 것만큼은 버겁지 않았기에.
교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또 얼마나 선생님들을 원망했던가. 나는 당신들로부터 지식이 아닌 사랑을, 냉철한 상황 분석이 아닌 정을 배우고 싶노라고. 당신들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가정을 방문해 보셨다면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대하실 수 있을까고. 그러나 그럼에도 애정의 손길을 뻗쳤던 다른 선생님들께는 한없이 미안하고 아쉬워했던, 몸도 마음도 위태하고 힘든 시기였다. 그 때에는.
무엇이 또 우리를 힘들게 했던가. 그래, 그랬었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남의 집 일을 도와주는 게 끝나면 밤늦도록 빨래며 집안 일을 하느라 공부할 틈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사치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점심때면 밥 대신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어느 때인가는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읽게 되어 '다독상'이라는 것도 타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처한 상황이 그처럼 고마웠던 적이 또 언제 있었던가.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되지 못하여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숨어 들었던 도서관에서 학교 생활 중 유일한 휴식과 위안을 얻었으니, 가난이 아니었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귀한 경험이었다.
일주일 후면 돌아오겠다며 겨우 일주일 분만의 교통비를 주고 떠나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멀고 긴 행상의 길. 버스를 타고서도 30분은 족히 걸린 통학 길,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훨씬 지날 때까지…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가파른 길을 걸어야 했던 어머니를 우리는 원망했던가. 무작정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까워서야 친구들에게 차비를 빌려 겨우 무임 승차의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루 이틀, 우리가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던 건 부르튼 발바닥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반짝이는 별들을 더 이상 아름답게만 볼 수 없었던 우리의 괴로움처럼, 아, 어머니는 고단한 몸을 어느 하늘 아래 뉘어 별 같은 자식들의 바스러지는 소리에 진저리 쳤을 것인가!
그리고 또……하늘에 뜬 모든 별들이 튀밥처럼 보였던…….무수한……아픈 기억들만이 깊게 각인되어…..괴로움의 나날들……나는 아주 오랜 공연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연극이 끝난 후에 열렬한 박수 갈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고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셨던 것이다.
그때 내가 맡았던 역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뜻 없이 맡게 되는 소년소녀가장들과 소외된 이웃들의 사연, 그 연극을 무심코 관람할 수 없다는 생각과 연민이상의 무엇을 하도록 끊임없이 나를 독려한다.

글과 상으로 돌아온 것을 감사함으로 승화시켜 풀어내는 헌님.
그것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긍정의 힘이라 생각이 드네요.
지금 하시는 일은 어머님이 물려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생각 됩니다.
소외된 아이들의 배고픔과 결핍된 사랑을 채워주시는 일은
아마 내가 늘 생각하는 점과 흡사하네요.
퍼주고 또 퍼주면 바닥이 보일만도 한데 '사랑' 은 퍼줄수록 나에게
행복감으로 가득차 어떤 때는 요술 항아리같다는 신비한 체험을 하곤 하지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빛과 소금과 같은 헌님과 같은 존재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원해봅니다.
아아 ~~~~ 마음이 따뜻해져요.
아마 어느날 헌님의 일을 도와 발 벗고 뛰는 날이 있을겁니다. ^^

이헌님
아침에는 갑작스런 전화에 놀라셨지요?
그런데 나는 이헌님의 목소리를 듣고 걸기를 잘 했다...생각했어요. 담담한 분이시구나! 생각했고, 멀리 여수에 사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오늘 이 글을 통해서 이헌님을 또 조금 더 알게 되었네요.
이런 말은 너무 주제 넘을지도 몰라 조심스럽지만...,
물웅덩이가 그냥 파여진 채로 있으면 흉하고 위험한 곳일 수 있지만, 빗물이 그득 고이면 호수처럼 변해요.
언젠가 이헌님의 삶의 이런저런 상처웅덩이가 빗물을 가득채운 아름다운 호수..., 혹은 씨앗을 가득채운 아름다운 민들레 꽃밭으로 변화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