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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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人
때: 어느 날 항혼녘
곳: 어느 곳
사람: 노인 - 약 70세, 흰 수염과 흰 머리, 검은 장옷(長衣).
소녀 - 약 10세, 갈색 머리와 검은 눈, 흰 바탕에 검정 격자무늬의 장옷.
행인 - 3, 40세, 지친 듯해 보이나, 다부지고 음침한 눈길, 검은 수염, 헝클어진 머리, 누더기의 검고 짧은 저고리와 바지, 맨발에 해진 신발, 겨드랑에 부대를 끼고 키만한 대막대로 몸을 의지하고 있다.
동편은 몇 그루의 잡목과 瓦礫, 서편은 황폐한 덤불 숲인데, 거기에 명색만의 길. 그 길에 접하여 방문이 달린 작은 土幕. 방문 옆에 시든 나무 그루터기.
(소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노인을 도와 일으키려 하고 있다. )
노인: 왜 그러니? 얘야, 왜 조용해졌지?
소녀: (동쪽을 바라보며) 누가 오는 것 같아요. 저기 보세요!
노인: 볼 것까지는 없지. 나를 집으로 데려다 다오. 해가 지려 하는구나.
소녀: 저는 - 볼 테어요.
노인: 참, 애도! 날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바람을 보고. 그러고서도 너는 아직도 누군가를 보고 싶어하다니. 해질녘에 나타나는 자는 너한테 좋지 않을 게 틀림없대두......그보다 얼른 집으로 가자.
소녀: 하지만, 바로 저기까지 왔는 걸요. 아, 거지로군요.
노인: 거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행인, 동쪽 잡목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나와서는 잠시 주저한 후, 천천히 노인 쪽으로 다가온다.)
행인: 안녕하세요, 노인장.
노인: 그래, 안녕하시오?
행인: 노인장,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물 한 그릇 청활 수 있을까요. 저는 걷기에 지쳐서 목이 바싹 말랐는데도 근처에 못도 웅덩이도 눈에 뜨이지 않는군요.
노인: 그래, 그렇게 하시오. 우선 앉아요. (소녀에게) 얘야, 물 한 그릇 떠다 드려라. 그릇을 끼끗이 씻어서 말이다.
(소녀 말 없이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노인: 손님, 이리 앉아요, 실례지만 성함은?
행인: 성함이요? -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혼자뿐이어서, 제 이름이 무언지 모릅니다. 길을 걷노라면, 사람들이 가지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너무도 여러 가지여서 저 자신도 기억할 수 없읍니다. 더구나 같은 이름은 두 번 다시 듣지를 못했으니까요.
노인: 허, 그렇다면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행인: (잠시 주저한 끝에)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줄곧 이렇게 걷고 있습니다.
노인: 그렇겠군. 그러면 어디로 가는 길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행인: 되고 말고요. - 하지만 저도 모릅니다. 양쪽의 어느 곳이든 갑니다. 저는 많은 길을 걸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곳에 왔다는 것밖에는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또 저쪽으로(서쪽을 가리킴) 향해 갑니다.
(소녀, 조심스럽게 나무그릇을 가져와 건넨다.)
행인: (물그룻을 받으며) 고맙소, 아가씨. (물을 두 모금 마시고 그릇을 돌려준다.) 고맙소, 아가씨. 정말 고마운 마음씨입니다. 뭐라 감사를 해야 할지.
노인: 그렇게 고마와할 건 없소. 당신한테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
행인: 그렇습니다., 저한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완전히 기운을 차렸읍니다. 저는 앞으로 가야 합니다. 노인장, 노인장께서는 오랫동안 이곳에 살고 계시지요? 이 다음이 어느 곳인지, 아마 알고 계시겠지요?
노인: 이 다음이? - 이 다음은 무덤이지.
행인: (이상스러운 듯이) 무덤이요?
소녀: 아니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곳에는 들백합과 들장미가 가득 피어있어요. 저는 자주 놀러갔었는 걸요.
행인: (서쪽을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짓는다.) 정말입니다. 그곳에는 들백합과 들장미가 가득 피어 있읍니다. 저도 자주 놀러갔었지요. 하지만, 그건 묘지지. (노인을 향하여) 노인장, 그 묘지를 지난 그 다음은요?
노인: 그 다음이라? - 그건 모르오. 나는 가 본 일이 없소.
행인: 몰라요?
소녀: 저도 몰라요.
노인: 내가 알고 있는 건, 남과 북과 동, 말하자면 그대가 지나온 길, 그 뿐이오. 그곳들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곳, 그리고 그대한테도 제일 좋을 곳일지 모르겠소. 외람된 말을 하는 것 같으나, 보아하니 벌써 지쳐 있는 것 같소. 돌아서는 게 좋겠군. 더 간다 한들, 당도하게 될는지 어떨지.
행인: 당도하게 될지 어떨지라니요...... .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는 퍼뜩 정신이 드는 듯) 안 돼! 가야만 돼요. 어디로 돌아간들 시비거리 없는 곳이 어디 있읍니까? 지주 없는 곳이 어디 있읍니까? 추방과 강금이 없는 곳이 있읍니까? 아부 없는 곳이 있읍니까? 거짓 눈물 없는 곳이 있읍니까? 나는 그자들을 미워합니다. 돌아설 생각은 없읍니다.
노인: 그렇지만도 않을 거요. 그대를 위해 진심으로 슬퍼해 주는 눈물을 만날 때도 있을 거요.
행인: 아니요. 저는 그자들의 진심에서 솟는 눈물을 보기 싫습니다. 나를 위해 슬퍼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노인: 그러면, 그대는 (고개를 젓는다.) 갈 수밖에는 없겠군.
행인: 그렇습니다. 저는 갈 수밖에 없읍니다. 더구나 늘상 앞쪽에서 재촉하며 소리치며 저를 쉬게 하지 않는 걸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진작 발바닥이 헤져서,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피를 많이 흘렸읍니다. (한쪽 발을 들어 노인에게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피가 모자랍니다. 저는 피를 마시고 싶어요. 하지만 피가 어디 있읍니까? 게다가, 저는 누구의 피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제 피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물을 마시는 도리밖에 없읍니다. 어디를 가나 물만은 있어서 부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힘이 약해져 버렸읍니다. 제 피에 너무 많은 물이 섞인 탓이겠지요. 오늘, 한 번도 물 웅덩이를 만나지 못한 것도 조금밖에 걷지 않은 탓일지 모릅니다.
노인: 그렇지만도 않을 거요. 해가 저물었으니, 좀 쉬는 게 좋겠군. 나같이 말이오.
행인: 하지만 저 앞쪽에서 가라고 소리치는 걸요.
노인: 알고 있소.
행인: 알아요? 저 소리를 아셔요?
노인: 그렇소. 그 소리는 전에 나한테도 소리쳤던 것 같소.
행인: 그게, 지금 저한테 소리치고 있는 저 소리입니까?
노인: 그건 알 수 없군. 몇 번 나한테 소리치기는 했었지만, 내가 못 들은 척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소리치지 않았으니까, 나는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군.
행인: 허어, 못 들은 척하셨다 그 말씀 이시군.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귀를 기울인다. ) 안 돼! 역시 갈 수밖에 없어. 쉬어서는 안 되겠읍니다 유감스러운 일은 발이 헤져 버린 것입니다. (떠날 준비를 한다.)
소녀: 이거요! (천조각을 준다.) 상처에 감으셔요.
행인: (받으며) 고맙소, 아가씨. 정말...... 정말, 고마운 마음씨입니다. 덕택에 저는 더 잘 걷겠네요. (벽돌 조각에 앉아 복사뼈를 천조각으로 감는다.) 아니, 안 돼! (억지로 기운을 내어 일어서며) 아가씨, 돌려드리겠소. 역시 다 감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신세를 지게 되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니까.
노인: 그렇게까지 고마와하지 않아도 되오. 그대한테는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
행인: 그렇습니다. 저한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은혜는 가장 값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만한 것은 제 몸 어디에도 없읍니다.
노인: 고집부리지 않는 게 좋아.
행인: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할 수 없읍니다. 저는 불안해 견딜 수 없읍니다. 만약 제가 누구한테 은혜를 입게 되면, 마치 매가 송장을 찾은 듯이 주위를 돌며 그 사람의 멸망을 직접 제 눈으로 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멸망하도록 저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니까 그 속에 저도 포함되는 셈이지요. 왜냐하면, 저는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그럴 만한 힘이 없읍니다. 설사 힘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런 지경에 이르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런 지경에 이르기를 결코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겠읍니다. (소녀를 향하여) 아가씨, 당신이 주신 이 천조각은 매우 좋지만, 조금 적은 것 같네요. 돌려드립니다.
소녀: (놀라며 뒷걸음질친다.) 필요없어요! 가져가세요!
행인: (쓴 웃음을 지으며) 허허허...... 내가 손을 댔으니 그렇다는 말이지요.
소녀: (고개를 끄덕이며 부대를 가리킨다.) 그 속에 넣어가지고 가셔서 노십시오.
행인: (맥이 빠지는 듯 뒷걸음 친다.) 하지만, 이것을 지고 어떻게 간단 말입니까......
노인: 쉬지 않으니, 질 수 없는 게지. - 좀 쉬면 아무 일도 아닐 게야.
행인: 그렇습니다. 쉬면......(말없이 생각한다. 그러나 이내 다시 감짝 놀란듯이 귀를 기울인다.) 아니, 안 돼. 역시 가야겠읍니다.
노인: 여하튼 쉬기 싫다는 건가?
행인: 쉬고 싶습니다.
노인: 그러면, 잠시 쉬는 게 좋겠지.
행인: 하지만 저는 ......
노인: 역시 가는 게 좋겠다는 게로군.
행인: 네, 역시 가야겠읍니다.
노인: 허면, 역시 가는 게 좋겠군.
행인: (허리를 펴며) 그러면, 하직하겠읍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녀에게) 아가씨, 이걸 돌려드리겠읍니다. 받아 주십시오.
(소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리며, 오두막으로 숨으려 한다.)
노인: 가져가는 게 좋아. 너무 무거우면 묘지 아무데나 버리면 되지.
소녀: (앞으로 나서며) 아니, 안 돼요!
행인: 그래요, 안 되고말고요.
노인: 그러면 들백합, 들장미 위에 걸쳐 놓으면 되겠군.
소녀: (손뼉을 치고 웃으며) 좋아요, 좋아요!
행인: 아아......
(짤막한 침묵)
노인: 그러면, 잘 가시오. 몸성히......(일어서며 소녀에게) 얘야, 나를 데리고 가다오. 봐라, 벌써 해가 졌구나.
(방문 쪽으로 향한다.)
행인: 감사합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걸어 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긴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드는 듯) 아니, 안 돼. 갈 수밖에는 없어. 가는 게 좋겠어...... . (곧 머리를 들고 기세좋게 서쪽을 향하여 걸음을 뗀다.) 소녀는 노인을 도와 오두막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행인은 황무지로 비틀거리며 들어간다. 밤 기운이 등 뒤에 다가선다.
1925 년 3 월 2 일
IP *.97.72.67
때: 어느 날 항혼녘
곳: 어느 곳
사람: 노인 - 약 70세, 흰 수염과 흰 머리, 검은 장옷(長衣).
소녀 - 약 10세, 갈색 머리와 검은 눈, 흰 바탕에 검정 격자무늬의 장옷.
행인 - 3, 40세, 지친 듯해 보이나, 다부지고 음침한 눈길, 검은 수염, 헝클어진 머리, 누더기의 검고 짧은 저고리와 바지, 맨발에 해진 신발, 겨드랑에 부대를 끼고 키만한 대막대로 몸을 의지하고 있다.
동편은 몇 그루의 잡목과 瓦礫, 서편은 황폐한 덤불 숲인데, 거기에 명색만의 길. 그 길에 접하여 방문이 달린 작은 土幕. 방문 옆에 시든 나무 그루터기.
(소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노인을 도와 일으키려 하고 있다. )
노인: 왜 그러니? 얘야, 왜 조용해졌지?
소녀: (동쪽을 바라보며) 누가 오는 것 같아요. 저기 보세요!
노인: 볼 것까지는 없지. 나를 집으로 데려다 다오. 해가 지려 하는구나.
소녀: 저는 - 볼 테어요.
노인: 참, 애도! 날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바람을 보고. 그러고서도 너는 아직도 누군가를 보고 싶어하다니. 해질녘에 나타나는 자는 너한테 좋지 않을 게 틀림없대두......그보다 얼른 집으로 가자.
소녀: 하지만, 바로 저기까지 왔는 걸요. 아, 거지로군요.
노인: 거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행인, 동쪽 잡목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나와서는 잠시 주저한 후, 천천히 노인 쪽으로 다가온다.)
행인: 안녕하세요, 노인장.
노인: 그래, 안녕하시오?
행인: 노인장,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물 한 그릇 청활 수 있을까요. 저는 걷기에 지쳐서 목이 바싹 말랐는데도 근처에 못도 웅덩이도 눈에 뜨이지 않는군요.
노인: 그래, 그렇게 하시오. 우선 앉아요. (소녀에게) 얘야, 물 한 그릇 떠다 드려라. 그릇을 끼끗이 씻어서 말이다.
(소녀 말 없이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노인: 손님, 이리 앉아요, 실례지만 성함은?
행인: 성함이요? -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혼자뿐이어서, 제 이름이 무언지 모릅니다. 길을 걷노라면, 사람들이 가지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너무도 여러 가지여서 저 자신도 기억할 수 없읍니다. 더구나 같은 이름은 두 번 다시 듣지를 못했으니까요.
노인: 허, 그렇다면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행인: (잠시 주저한 끝에)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줄곧 이렇게 걷고 있습니다.
노인: 그렇겠군. 그러면 어디로 가는 길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행인: 되고 말고요. - 하지만 저도 모릅니다. 양쪽의 어느 곳이든 갑니다. 저는 많은 길을 걸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곳에 왔다는 것밖에는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또 저쪽으로(서쪽을 가리킴) 향해 갑니다.
(소녀, 조심스럽게 나무그릇을 가져와 건넨다.)
행인: (물그룻을 받으며) 고맙소, 아가씨. (물을 두 모금 마시고 그릇을 돌려준다.) 고맙소, 아가씨. 정말 고마운 마음씨입니다. 뭐라 감사를 해야 할지.
노인: 그렇게 고마와할 건 없소. 당신한테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
행인: 그렇습니다., 저한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완전히 기운을 차렸읍니다. 저는 앞으로 가야 합니다. 노인장, 노인장께서는 오랫동안 이곳에 살고 계시지요? 이 다음이 어느 곳인지, 아마 알고 계시겠지요?
노인: 이 다음이? - 이 다음은 무덤이지.
행인: (이상스러운 듯이) 무덤이요?
소녀: 아니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곳에는 들백합과 들장미가 가득 피어있어요. 저는 자주 놀러갔었는 걸요.
행인: (서쪽을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짓는다.) 정말입니다. 그곳에는 들백합과 들장미가 가득 피어 있읍니다. 저도 자주 놀러갔었지요. 하지만, 그건 묘지지. (노인을 향하여) 노인장, 그 묘지를 지난 그 다음은요?
노인: 그 다음이라? - 그건 모르오. 나는 가 본 일이 없소.
행인: 몰라요?
소녀: 저도 몰라요.
노인: 내가 알고 있는 건, 남과 북과 동, 말하자면 그대가 지나온 길, 그 뿐이오. 그곳들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곳, 그리고 그대한테도 제일 좋을 곳일지 모르겠소. 외람된 말을 하는 것 같으나, 보아하니 벌써 지쳐 있는 것 같소. 돌아서는 게 좋겠군. 더 간다 한들, 당도하게 될는지 어떨지.
행인: 당도하게 될지 어떨지라니요...... .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는 퍼뜩 정신이 드는 듯) 안 돼! 가야만 돼요. 어디로 돌아간들 시비거리 없는 곳이 어디 있읍니까? 지주 없는 곳이 어디 있읍니까? 추방과 강금이 없는 곳이 있읍니까? 아부 없는 곳이 있읍니까? 거짓 눈물 없는 곳이 있읍니까? 나는 그자들을 미워합니다. 돌아설 생각은 없읍니다.
노인: 그렇지만도 않을 거요. 그대를 위해 진심으로 슬퍼해 주는 눈물을 만날 때도 있을 거요.
행인: 아니요. 저는 그자들의 진심에서 솟는 눈물을 보기 싫습니다. 나를 위해 슬퍼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노인: 그러면, 그대는 (고개를 젓는다.) 갈 수밖에는 없겠군.
행인: 그렇습니다. 저는 갈 수밖에 없읍니다. 더구나 늘상 앞쪽에서 재촉하며 소리치며 저를 쉬게 하지 않는 걸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진작 발바닥이 헤져서,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피를 많이 흘렸읍니다. (한쪽 발을 들어 노인에게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피가 모자랍니다. 저는 피를 마시고 싶어요. 하지만 피가 어디 있읍니까? 게다가, 저는 누구의 피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제 피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물을 마시는 도리밖에 없읍니다. 어디를 가나 물만은 있어서 부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힘이 약해져 버렸읍니다. 제 피에 너무 많은 물이 섞인 탓이겠지요. 오늘, 한 번도 물 웅덩이를 만나지 못한 것도 조금밖에 걷지 않은 탓일지 모릅니다.
노인: 그렇지만도 않을 거요. 해가 저물었으니, 좀 쉬는 게 좋겠군. 나같이 말이오.
행인: 하지만 저 앞쪽에서 가라고 소리치는 걸요.
노인: 알고 있소.
행인: 알아요? 저 소리를 아셔요?
노인: 그렇소. 그 소리는 전에 나한테도 소리쳤던 것 같소.
행인: 그게, 지금 저한테 소리치고 있는 저 소리입니까?
노인: 그건 알 수 없군. 몇 번 나한테 소리치기는 했었지만, 내가 못 들은 척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소리치지 않았으니까, 나는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군.
행인: 허어, 못 들은 척하셨다 그 말씀 이시군.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귀를 기울인다. ) 안 돼! 역시 갈 수밖에 없어. 쉬어서는 안 되겠읍니다 유감스러운 일은 발이 헤져 버린 것입니다. (떠날 준비를 한다.)
소녀: 이거요! (천조각을 준다.) 상처에 감으셔요.
행인: (받으며) 고맙소, 아가씨. 정말...... 정말, 고마운 마음씨입니다. 덕택에 저는 더 잘 걷겠네요. (벽돌 조각에 앉아 복사뼈를 천조각으로 감는다.) 아니, 안 돼! (억지로 기운을 내어 일어서며) 아가씨, 돌려드리겠소. 역시 다 감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신세를 지게 되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니까.
노인: 그렇게까지 고마와하지 않아도 되오. 그대한테는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
행인: 그렇습니다. 저한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은혜는 가장 값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만한 것은 제 몸 어디에도 없읍니다.
노인: 고집부리지 않는 게 좋아.
행인: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할 수 없읍니다. 저는 불안해 견딜 수 없읍니다. 만약 제가 누구한테 은혜를 입게 되면, 마치 매가 송장을 찾은 듯이 주위를 돌며 그 사람의 멸망을 직접 제 눈으로 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멸망하도록 저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니까 그 속에 저도 포함되는 셈이지요. 왜냐하면, 저는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그럴 만한 힘이 없읍니다. 설사 힘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런 지경에 이르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런 지경에 이르기를 결코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겠읍니다. (소녀를 향하여) 아가씨, 당신이 주신 이 천조각은 매우 좋지만, 조금 적은 것 같네요. 돌려드립니다.
소녀: (놀라며 뒷걸음질친다.) 필요없어요! 가져가세요!
행인: (쓴 웃음을 지으며) 허허허...... 내가 손을 댔으니 그렇다는 말이지요.
소녀: (고개를 끄덕이며 부대를 가리킨다.) 그 속에 넣어가지고 가셔서 노십시오.
행인: (맥이 빠지는 듯 뒷걸음 친다.) 하지만, 이것을 지고 어떻게 간단 말입니까......
노인: 쉬지 않으니, 질 수 없는 게지. - 좀 쉬면 아무 일도 아닐 게야.
행인: 그렇습니다. 쉬면......(말없이 생각한다. 그러나 이내 다시 감짝 놀란듯이 귀를 기울인다.) 아니, 안 돼. 역시 가야겠읍니다.
노인: 여하튼 쉬기 싫다는 건가?
행인: 쉬고 싶습니다.
노인: 그러면, 잠시 쉬는 게 좋겠지.
행인: 하지만 저는 ......
노인: 역시 가는 게 좋겠다는 게로군.
행인: 네, 역시 가야겠읍니다.
노인: 허면, 역시 가는 게 좋겠군.
행인: (허리를 펴며) 그러면, 하직하겠읍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녀에게) 아가씨, 이걸 돌려드리겠읍니다. 받아 주십시오.
(소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리며, 오두막으로 숨으려 한다.)
노인: 가져가는 게 좋아. 너무 무거우면 묘지 아무데나 버리면 되지.
소녀: (앞으로 나서며) 아니, 안 돼요!
행인: 그래요, 안 되고말고요.
노인: 그러면 들백합, 들장미 위에 걸쳐 놓으면 되겠군.
소녀: (손뼉을 치고 웃으며) 좋아요, 좋아요!
행인: 아아......
(짤막한 침묵)
노인: 그러면, 잘 가시오. 몸성히......(일어서며 소녀에게) 얘야, 나를 데리고 가다오. 봐라, 벌써 해가 졌구나.
(방문 쪽으로 향한다.)
행인: 감사합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걸어 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긴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드는 듯) 아니, 안 돼. 갈 수밖에는 없어. 가는 게 좋겠어...... . (곧 머리를 들고 기세좋게 서쪽을 향하여 걸음을 뗀다.) 소녀는 노인을 도와 오두막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행인은 황무지로 비틀거리며 들어간다. 밤 기운이 등 뒤에 다가선다.
1925 년 3 월 2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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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just confused with the id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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